■ 프롤로그 / 풍운(風雲)의 서막(序幕) ━━━━━━━━━━━━━━━━━━━━━━━━━ 두 소년(少年)이 있었다. 난세(亂世)의 풍진(風 塵)을 안고 동시대에 태어난 인중용봉(人中龍 鳳)의 두 절세기재. 그들은 만났다. 한 그루 천년고목(千年古木) 아 래서. 어느 눈 내리던 날, 그들은 운명처럼 만났다. 천지가 온통 은백색으로 물들던 날 운명의 신이 점지한 양 그들은 만났다. 이것이 바로 무림(武 林)의 하늘과 땅 사이에서 시작된 대풍운(大風 雲)의 서막(序幕)이었다. 하란산(賀蘭山)의 한 아름다운 언덕 위. 그곳에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거대한 천년고목이 서 있었다. 하늘과 땅이 시작될 때부터 있었을 지도 모를 고목은 세상을 내려다보며 의연하게 거대한 그늘을 이루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천년고목에 무병장수(無病長壽)와 행운(幸運)을 빌었다. 그 고목나무의 높이는 근 십 장(十丈) 여나 되었으며 그 둘레만 해도 장 정 열 명이 팔을 두를 만큼 장대(長大)했으므로 보는 이로 하여금 무언가 숭엄한 느낌을 주었 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고목나무의 한 귀퉁이에 언 제 새겼는지 몰라도 오랜 세월의 흔적을 보이는 희미한 글씨가 보였다. <하후성(夏侯星). 독고황(獨孤皇). 다시 만날 그날까지 변치 않을 우정(友情)을 위 하여.> 천년고목에 새겨진 글씨는 비록 짧은 글귀였지 만 웅혼한 기상이 담긴 필체(筆體)로, 보는 이 로 하여금 가슴을 찌르는 듯한 감동을 느끼게 했다. 그리하여 하란산을 지나던 사람들은 자신 도 모르게 그 글씨 앞으로 다가가 한동안 생각 하다가 그 뜻을 새기며 다시 떠나곤 했다. 아마도 풍운만변(風雲萬變)하는 세상사에 빛나 는 순수하고 뜨거운 진실을 느꼈음이리라. 세월 의 흐름에 빛바래고 희미해져 버린 그 글씨는 하란산을 지나던 사람들에게 한 줄기 빛처럼 인 생의 여정을 비춰주는 듯한 느낌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느 날 밤. 휘... 이... 이...... 잉! 일몰(日沒) 이후 잔잔하던 천기(天氣)가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이더니 서서히 바람이 거세어지 면서 급기야 일진광풍(一陣狂風)을 일으켰다. 뒤이어 먹장구름이 무섭게 몰려들더니 하란산 일대를 온통 칠흑의 장막으로 가려버렸다. 번쩍! 꽈르르... 릉......! 낙뢰일성(落雷一聲). 암천(暗天)을 가르는 일섬전광(一閃電光)과 함 께 무시무시한 벽력(霹靂)이 천지를 뒤흔들었 다. 꽈르르릉...... 콰...... 앙! 암천을 가르는 뇌전(雷電)이 불칼이 되어 느닷 없이 하란산에 떨어졌다. 벼락은 하란산 언덕에 우뚝 서서 천년 세월을 굽어보던 고목을 사정없 이 베어 버렸다. 고목은 정확히 두 쪽으로 쪼개어졌다. 그 바람 에 고목에 새겨진 두 이름이 정확히 절반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뒤이어 고목나무는 무서운 불길에 휩싸이더니 하란산을 온통 횃불처럼 밝히며 만 하룻밤 하루 낮을 화염덩이가 되어 타들어갔다. 결국 하란산 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벗이요, 그늘이 되었던 천년고목은 검은 숯덩이만 남긴 채 사라지고 말 았다. 하란산에서는 이제 다시 천년고목을 볼 수가 없 게 되었다. 천년고목이 불타버린 그날 밤. 어딘가에서 비통 한 장소성(長嘯聲)이 하란산을 뒤흔들었다. "우...... 우...... 우...... 우!" 하란산 아래 살던 사람들은 그 장소성이 밤새 울린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소를 낸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장소성은 천년고목이 스스로 울부짖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세월여류(歲月如流). 물처럼 흘러가는 풍진 세월 속에 차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천년고목과 그 고목에 새겨져 있던 글씨는 희미하게 사라져 갔다. ■ 대소림사 제1권 제1장 운명(運命)의 만남 -1 ━━━━━━━━━━━━━━━━━━━━━━━━━━━━━━━━━━━ 하북(河北)의 겨울은 일찍 온다. 중원(中原)의 북쪽은 대체로 산은 험하고 들판의 지세(地勢)도 힘 찬 흐름을 가지고 있다. 북방대륙의 거친 융기는 영웅의 기세를 닮았다고 한다. 겨울(冬), 겨울이었다. 하란산(賀蘭山)은 북쪽 변방 일만리(一萬里)에 걸쳐 장대하게 뻗 어있는 만리장성(萬里長城)과 장성 너머 등격리사막(騰格里沙漠) 의 동쪽, 그리고 대황하(大黃河)의 장장한 물길이 시작되는 상류 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는 대산(大山)이다. 눈이 내린다. 천지를 은백색으로 뒤덮으며 눈이 내린다. 하란산 전체도 흰 눈에 덮여 찬란한 절승절경을 이루었다. 하란산의 절경을 이루는 산세(山勢)가 막 시작되는 언덕 위에 도 온통 눈이 덮여 있었다. 커다란 바위(岩). 그리고 그 옆에 좀처럼 보기 힘든 천년고목이 의연히 서 있다. 고목의 높이는 십 장(十丈), 그 둘레만 해도 장 정 십여 명이 팔을 벌려야 간신히 감쌀 만큼 장대했다. 그러나 고목은 겨울이라서 가지만 앙상했고 하늘을 가릴 듯이 뻗 은 가지에는 설화(雪花)가 눈부시게 피어 있었다. 소년(少年). 이제 겨우 십 세(十歲) 남짓해 보이는 소년은 고목 아래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는 여우털로 짠 조끼와 그 아래에 백의(白衣)를 입 고 있었고 머리에는 북방의 사정없이 몰아치는 추위를 막기 위해 털모자를 단단히 눌러쓰고 있었다. 아! 이토록 아름다운 소년이 또 있을까? 추위로 인해 발갛게 상기된 양 뺨, 그리고 꿈꾸듯 신비로운 흑진 주같은 두 눈....... 오관이 정명(正明)한 소년의 용모는 마치 선동(仙童)인 양 매혹적 이기까지 했다. 소년은 언덕 위 고목나무에 기대앉아 두 손으로 턱을 받치고 있었 다. 그의 까만 눈은 언제부터인지 언덕 아래의 끝없이 펼쳐진 설 야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일면 외로와 보이기까지 하는 그의 자세에서는 나이보다 훨씬 조 숙해 보이는 분위기가 풍겼다. 그것은 어쩌면 그의 총명하고 신비 로운 눈동자 속에 깃들어 있는 우수(憂愁)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의 희고 밝은 얼굴에서는 명랑하고 쾌활한 소년다운 면 도 깃들어 있었다. 눈 내리는 설야를 바라보며 가만히 눈을 감자, 무척이나 긴 속눈썹이 그의 눈꺼풀에 잠겨 심미적인 느낌을 주었 다. 문득 소년의 입술이 살짝 움직이더니 한숨이 새어나왔다. "휴우! 아버지께서는 올해가 가도 안 오시려나?" 소년은 티없이 맑은 음성으로 중얼거리며 눈을 떴다. 그의 눈망울 속에 잠깐 반짝이는 이슬이 비친 듯도 했다. 그는 고개를 들더니 자신의 머리 위 하늘을 가리고 있는 천 년고 목을 바라보며 다시 중얼거렸다. "이 고목(古木)의 잎이 두 번 지기 전에 오신다고 성아(星兒)와 약속해 놓고... 아버지는 거짓말장이!" 소년의 눈가에 기어코 눈물이 맺혔다. 그러나 곧 소년은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며 자책해마지 않았다. "쳇! 왜 자꾸만 눈물이 나오려는 거지? 절대로 울지 않겠다고 아 버지께 약속했는데…" 역시 소년은 아직 치기를 벗지 못한 연약한 동자에 불과했다. 그 는 눈물을 그친 다음 몸을 일으켰다. 우중충한 잿빛 하늘에 이따금씩 히끗히끗 눈발이 비치고 있었고 소년은 눈발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어서 집에 가봐야지. 할아범이 기다리겠어." 소년이 막 걸음을 떼었을 때였다. 후다닥! 가벼운 음향과 함께 어디서 나타났는지 하얀 토끼 한 마리가 고목 나무 뒷전에서 튀어나왔다. "아!" 소년의 눈이 반짝 빛나며 경탄성이 터져 나왔다. 토끼는 그의 앞 다섯 걸음의 거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소년은 입가 에 미소를 머금더니 잔뜩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살금살금 발을 떼 었다. 그러자 귀가 쫑긋 하는가 싶더니 토끼는 냅다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소년은 코웃음쳤다. "흥! 내가 너를 놓칠 줄 알고?" 소년은 재빨리 토끼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발이 눈에 푹푹 빠져 가면서도 그는 맹렬하게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토끼의 속도는 아무래도 그보다 더 빨랐다. 토끼는 잽싸게 저만큼 달아나다가 힐끔 돌아보곤 했다. 마치 소년이 눈속에 빠지 며 허둥대는 모습이 무척 재미있기라도 하다는 듯 얕보는 눈치였 다. 소년은 마침내 약이 바짝 올랐다. "에잇! 너를 기어이 잡고야 말겠다!" 흥분한 나머지 너무 급하게 걸음을 떼었던 것일까? "앗!" 갑자기 돌뿌리에라도 걸렸는지 소년은 휘청하더니 냅다 눈속에 처 박히고 말았다. "아야야!" 넘어진 순간 소년은 비명을 질렀다. 오른쪽 발목이 부러지는 듯한 통증을 느낀 것이다. 눈속에 엎어진 그는 인상을 잔뜩 쓰며 하늘 을 올려다 보았다. 그의 시야에 함박눈이 가득 들어오고 있었다. 잿빛 하늘에선 어느 결엔가 주먹만한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야!" 소년은 발목의 고통도 잊은 듯 누운 채 펄펄 내리는 함박눈을 바 라보며 경탄성을 질렀다. 천진무구하고 맑은 동심(童心)이 그의 얼굴에 역력히 나타났다. 성아(星兒). 그는 어려서부터 무척이나 눈을 좋아했다. 눈만 보면 마냥 즐거워했다. 소년은 눈위에 누워 춤추듯 휘날리는 눈송이를 보며 중얼거렸다. "아버지와 같이 이 눈을 봤으면 얼마나 좋을까." 성아의 두 눈이 다시금 우울해졌다. 그러나 그는 곧 맑은 미소를 되찾으며 중얼거렸다. "할아범에게 가서 눈싸움 하자고 해야지!" 소년은 벌떡 일어나더니 앞을 향해 달리려 했다. 하지만 그것은 마음 뿐 몸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아얏!" 발목을 찌르는 듯한 고통에 소년은 그만 다시 앞으로 푹 고꾸라지 고 만 것이었다. 소년의 얼굴이 낙담으로 일그러질 때였다. 누군가가 그의 한쪽 팔을 덥석 잡아 일으켰다. "꼬마야, 조심해!" 낭랑한 음성이 그 뒤를 이었고 성아는 흠칫하며 소리가 들린 쪽으 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건장하게 생긴 소년(少年)이 자신의 팔 을 잡은 채 우뚝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나이는 대략 십사오 세 가량 되었을까? 날렵한 흑의경장(黑衣輕裝)에 머리에도 역시 검은 띠를 단정히 두 른 소년으로 눈보라 속에서 흑의를 입은 모습은 무척이나 선명한 인상을 주었다. 특히 길게 귀쪽까지 쭉 뻗은 검고 짙은 눈썹과 한 쌍의 봉목(鳳 目)같은 눈, 오똑한 콧날, 흰 피부는 더더욱 찬탄을 금치 못할 정 도로 준수한 모습이었다. 흑의소년. 그는 나이는 어리나 많은 사람을 고개 숙이게 할 정도의 위엄을 풍기고 있었으며 체격 또한 조숙하여 건장했다. 그는 등 뒤에 검은 탄궁(彈弓)을 메고 있었으며 허리춤에는 토끼, 꿩, 야조(野鳥)등의 사냥한 짐승이 걸려 있었다. 실로 기상(氣象) 이 출중하고 매력이 넘치는 소년이었다. 흑의소년은 씩 웃으며 물어왔다. "꼬마야, 발을 다친 모양인데 괜찮으냐?" 성아는 갑자기 눈썹을 찡그리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 "말 조심해! 나는 꼬마가 아니야, 성아야 성아!" 뜻밖의 태도에 흑의소년은 잠시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그러나 곧 다시 씨익 웃었으되, 그 웃음은 먼저 번 것보다 훨씬 짙었고 사나이다운 매력까지 물씬 풍겼다. "하하하... 그래, 내가 잘못했다. 너를 이제 성아라고 부르지." 그제서야 성아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는 동안 흑의소년에게서 말 할 수 없는 친밀감을 느끼고는 그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너는 어디에 사니? 이곳 하란산 일대에서는 본 적이 없는데?" 그 말에흑의소년은 빙긋 웃었다. 웬일인지 자기보다 훨씬 어려보 이는 꼬마가 반말을 해도 밉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어깨에 쌓이는 눈을 툭툭 털어내며 호쾌하게 말했다. "보름 전에 이곳으로 왔지. 이 하란산 기슭의 봉산진(鳳山鎭)에 나의 집이 있다." 성아는 힐끗 흑의소년의 허리춤에 매달린 사냥감과 등 뒤의 탄궁 을 보더니 눈을 반짝 빛냈다. "너 무예(武藝)를 하는구나?" 흑의소년은 씨익 웃었다. "조금 하지." 함박눈은 더욱 많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고 대지(大地)는 건곤일색 (乾坤一色), 오로지 은색으로 화했다. 흑의소년은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거 눈이 너무 많이 내리는 걸?" 이어 그는 성아의 팔꿈치를 잡았다. "성아야, 너희 집은 어디냐? 내가 바래다 주겠다." 성아는 코웃음쳤다. "흥! 나 혼자서도 내려갈 수 있다." 그는 자못 당당하게 걸음을 떼었다. 그 순간 다시 극심한 통증이 발목을 휘감자 그의 신형이 중심을 잃고 비틀했다. 그러나 그는 이를 악물고 비명 한 마디 내지르지 않았다. 어린 마 음에도 건장하고 씩씩해 보이는 흑의소년에게 결코 비웃음을 당하 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하하... 내가 도와주지!" 흑의소년이 커다랗게 웃더니 성아를 번쩍 안아 다짜고짜 등 뒤에 얹었다. 그의 힘은 놀랄 정도였다. "놔! 내려놔라! 나 혼자서도 걸어갈 수 있단 말야!" 성아가 등 뒤에서 몸부림 치자 흑의소년은 점잖게 말했다. "바보야, 이 눈속을 잘못 걸으면 더 크게 다친단 말이다." 성아가 벌컥 화를 내며 말했다. "난 바보가 아니다! 왜 너는......." "하하... 바보가 아니면 가만히 입다물고 있어라." 마침내 성아는 입을 다물었다. 아닌게 아니라 눈발이 점점 폭설 (暴雪)로 화해 사위가 안보일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눈(雪), 눈, 눈. 폭설은 하늘과 땅을 온통 메울 듯 쉬지 않고 쏟아져 내렸다. 휙! 휙! 성아를 업은 흑의소년은 이 폭설 속을 마치 나는 듯이 달렸다. 그 런데 기이하게도 그가 지나온 자리에는 발자국의 흔적이 단 한 치 정도 밖에 없었다. 한 자가 넘게 쌓인 눈위를 달리며 그 정도의 발자국만을 남기다니 그것은 정녕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성아는 그의 목에 손을 두르며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넌 마치 산짐승 같구나?" 갑작스런 그의 질문에 흑의소년은 흠칫했다. "산짐승?" "눈속을 이렇게 빨리 달리다니 말야." "후후." 흑의소년의 나직한 웃음이 들렸다. 그러는 중에도 그는 쉬지 않고 계속 언덕을 돌아 내려갔다. 성아는 자못 염려스러운 듯 물었다. "힘들지 않니?" "후후... 너같은 꼬마가 뭐가 무겁다고?" 그 말에성아는 주먹으로 흑의소년의 머리통을 가볍게 때렸다. "꼬마가 아니고 성아라니까!" "아얏! 그래 알았다, 알았어. 하하하하......." 흑의소년은 짐짓 엄살을 부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다 문득 걸 음을 늦추고 생각난 듯 물었다. "성아, 너의 성명은 무엇이냐?" 성아는 점잔을 빼며 말했다. "하후성(夏候星)." "하후성! 좋은 이름이구나." 성아, 즉 하후성은 흑의소년의 귀를 잡고 반대로 물었다. "네 이름은?" "음, 난 독고황(獨孤皇)이다." 하후성은 픽 웃더니 빈정거렸다. "무슨 이름이 그래? 괴상한 성(姓)에다 네가 무슨 제왕(帝王)이라 고 황자를 쓰지?" 독고황은 대답 대신 빙긋이 웃었다. 하후성이란 어린 소년이 여전 히 조금도 밉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한동안 묵묵히 걷다 다시 물 었다. "성아야, 너는 몇살이냐?" "너는?" 독고황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먼저 물었다." 하후성은 코웃음쳤다. "그럼 그만 둬, 나는 말하지 않을테니." 독고황의 얼굴에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미소가 어렸다. "좋다. 내가 먼저 말하겠다. 나는 올해 열다섯이다. 자, 이제 너 도 말해라." "음... 성아는... 열 살이야." 독고황은 흥미있는 음성으로 말했다. "꼭 다섯 살 차이로구나. 어때? 나를 형(兄)이라 부르지 않겠느 냐?" "형?" "그래." 하후성의 표정이 금세 시무룩해졌고 독고황은 의아한 듯 물었다. "왜 말이 없지?" 하후성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갑자기 빙그레 웃으며 은근한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 나이같은 건 따지지 말고 서로 친구하자!" "뭐? 친구?" 독고황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나는 네 나이의 거의 두배나 되는데 친구라니?" 하후성은 입술을 삐죽였다. "지금이야 두배지만 앞으로 백 년만 지나봐. 나는 백 다섯 살, 너 는 백 열 살, 그 쯤이면 친구가 될 수 있잖아." 독고황은 그만 픽 웃고 말았다. "그건 억지다." "억지라고?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누가 더 학문(學文)이 높은가로 형을 가리기로." 독고황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학문이라고?" "그래." "하하... 성아야. 나는 이미 사서삼경을 다 뗐는데 너는 그 중 하 나라도 읽었느냐?" 하후성은 짐짓 엄숙하게 헛기침하며 말했다. "에헴! 예로부터 지자(智者)는 겸손해야 한다고 했지만 오늘만은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말을 해주지." 독고황은 묵묵히 듣고 있었다. "너는 지금 사서삼경을 뗐다지만 나는 이미 그것을 세 살때 뗐고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모두 통달했단 말야. 지금은 황청경해(皇淸 經解), 경의술문(經醫術聞), 일주서(逸周書), 개방명산측환요의 (開方命散測환要義) 따위를 보고 있는 중이란 말이다." 독고황은 걸음을 뚝 멈추었다. 그는 하후성이 말한 책이름들을 한 번도 들은 적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정말이냐?" "흠! 군자(君子)는 한 입으로 두 말하지 않는 법(法)." "음." 독고황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설사 그렇다해도 친구가 된다는 것은 내게 큰 손해인데." 하후성은 두 손으로 독고황의 목을 안으며 조르듯 말했다. "우리 친구하자. 응?" 독고황은 마침내 웃고 말았다. "좋다. 내가 손해보는 셈 치지." 하후성은 활짝 웃었다. "고마워, 너는 정말 내 마음에 꼭 드는 친구야." 그러나 독고황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무래도 난 집에 가서 이 일을 좀 곰곰히 생각해봐야겠다. 오늘 은 손해를 많이 본 것 같단 말이야." 그는 다시 몸을 움직였다. 눈(雪). 굉장한 폭설이 계속 쏟아지고 있었고 두 소년의 모습은 눈발 속에 희미하게만 보였다. 그 속에서 독고황의 음성이 들렸다. "성아, 눈이 무척 많이 내리지?" 대답이 없었다. 대신 독고황의 등 뒤에서는 고른 숨결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다. 독고황은 피식 웃었다. "이 녀석, 자는구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다. 이제부터 너와 나는 친구다." 독고황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곧 사라졌다. 그리고 두 소년의 모습 은 눈발 속으로 점차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사월(四月). 하북(河北)에서 항상 뒤늦게 찾아오는 봄(春)이다. 만리장성(萬里 長城) 전역(全域)을 흐르는 황진(黃塵)속에도 어느덧 훈훈한 춘풍 이 섞여 있었다. 하란산(賀蘭山). 일만 리(一萬里)의 대장성(大長城)이 이곳 하란산의 중심으로 통 한다. 그러나 워낙 장엄하고 거대(巨大)한 산이므로 만리장성의 맥(脈) 조차 단애와 계곡에서 끊어지고는 한다. 도화전현성(桃花田縣城). 이곳은 하란산 기슭에 자리잡은 수백호의 작은 현으로 대체로 풍 족한 가호들이 모여 사는 아름답고 풍요로운 현이다. 이 도화전현성의 서북 구릉 위. 그곳에는 제법 커다란 한 채의 장원(莊園)이 있었다. 장원은 이름이 없었다. 더우기 오랫동안 손질을 하지 않은 탓에 허름하게 낡아 있었다. 지붕에는 황사(黃沙)가 앉아 있었고 이따 금 잡초까지 자라 있는가 하면 담장도 몇 군데나 허물어져 있었 다. 그러나 장원 안에서는 도화향(桃花香)이 물씬 풍겨나오고 있었다. 장원 안의 화원에 도화가 만발해 있었기 때문이다. 도화전현성 전 체가 도화에 둘러싸인 것처럼 이 장원도 도화 속에 묻혀 있었다. 장원은 전원(前院)과 후원(後院), 그리고 내원(內院)으로 이루어 져 있었다. 그 중 후원(後院). 후원의 뜰에는 정자가 한 채 있었다. 정자는 조그만 연못에 각주 를 담그고 있었는데 연못 주위에는 도화가 만발해 아름다운 풍치 를 이루고 있었다. 이따금씩 황진 섞인 춘풍에 도화꽃이 날리며 연못 위로 떨어졌다. 연못의 수면(水面)이 가볍게 출렁이고 그때마다 연못 속에 사는 이름모를 고기(魚)들이 먹이인 줄 알고 꽃잎을 삼키곤 했다. 실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청심정(淸心亭). 이것이 정자의 이름이었다. 청심정 안에는 백의소년(白衣少年) 한 명이 난간에 기대앉아 책 (冊)을 읽고 있었다. 그는 대략 십사 세(十四歲)쯤 되어보였는데 전신에서는 신비로운 기운이 물씬 풍기며 얼굴은 마치 선동(仙童)처럼 탈속한 기품과 미(美)를 풍기고 있었다. 특히 눈(眼). 그의 두 눈은 대학자(大學子)조차 따르지 못할 비범 함과 혜지(慧志)로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하후성(夏候星). 바로 수년 전 천년고목 아래에서 부친을 기다리던 미동자(美童 子), 하후성은 내내 책을 읽고 있었다. 그동안 그는 한 번도 책에 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윽고 책을 모두 읽은 듯 책장을 덮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한 줄 기 미풍이 그의 영준한 얼굴을 스치며 향기로운 도화향을 풍겼다. "아! 향기롭군." 하후성은 낭랑하게 중얼거리고 나서 연못 주위에 만개한 도화를 바라보며 시(詩)를 읊었다. 桃花美女兩相 長得君王 笑看 流春風萬里長城 도화꽃도 절세미녀도 다 좋다고 군왕은 항상 웃음을 띄고 바라 보더라 춘풍은 만리장성을 끝없이 흐르는데....... 낭랑한 시음(詩吟)은 후원의 절경을 더욱 빛나게 했다. 하후성이 읊은 시는 본래 이백(李白)의 청평조사삼수(淸平調詞三 首)의 마지막 수(首)인데 적절히 자구(字句)를 바꾸어 자신의 흥 취대로 부른 것이었다. 그의 뛰어난 시재(詩才)가 발휘되는 광경이었다. 하후성은 시를 읊고 나서 서서히 몸을 일으키더니 기지개를 켜듯 이 하늘을 올려보았다. 창전(蒼天). 드물게도 황사가 흐르지 않는 푸른 하늘은 사뭇 눈이 시릴 정도였 다. 창천의 군데군데에 구름이 흐르고 있거니, 변방의 풍경치고는 매우 경이롭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皇)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는 서성거리다 문득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음, 호대인(胡大人) 댁의 호연향(胡燕香) 소저가 요즘 그에게 반 해서 접근하는 눈치던데......." 하후성은 이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황, 그는 모든 게 다 좋은데 단지 무뚝뚝하고 냉정한 게 흠이란 말야. 호소저 정도면 이 일대에서는 제일의 미녀(美女)이자 재녀 (才女)인데 조금도 흥미가 없는 것 같으니......." 하후성은 책을 정자의 목탁(木卓) 위에 놓으며 다시 중얼거렸다. "이제는 더이상 읽을 책도 없고... 어디 봉산진(鳳山鎭)에 가서 황이나 만나볼까." 하후성은 경쾌한 발걸음으로 정자를 걸어 나왔다. 이때 전원(前 院)쪽에서 심한 기침소리가 바람에 실려 들려왔다. 그것은 매우 창노하고 기운이 쇠잔한 기침성이었다. 일순 하후성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지며 걱정스런 어투로 중얼거 렸다. "요즘 할아범의 병은 점점 심해가고... 또 아버님은 벌써 육 년이 지나도록 소식조차 없으니......." 하후성의 신색은 금세 우울하게 변했다. 그는 장원 밖으로 걸어나 가며 탄식을 금치 못했다. "잘못하면 할아범도 올해를 넘기기가 어렵겠군." 하후성은 묵묵히 장원의 허름한 문을 열고 나섰다. 불과 십사세의 소년, 그러나 하후성에게서는 완전한 성인과 같은 진중한 분위기 가 풍기고 있었다. 도화전현성(桃花田縣城)의 양춘가절. 들뜬 분위기를 틈타 현성의 처녀들도 곱게 단장하고는 도화를 감 상하기 위해 나들이를 나섰다. 그녀들의 밝고 아름다운 웃음소리 가 곳곳에서 들리는가 하면 뭇청년들 또한 처녀들의 뒤를 따르며 각기 관심을 끌기 위해 거들먹거리기도 했다. 하후성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계속 걸었다. "와아아!" "이얍!" 한 쪽에서 떠들썩한 함성과 기합 소리가 왁자하게 들려와 그의 주 의를 끌었다. 동자(童子)의 티를 벗지 못한 현성의 장난꾸러기 소년들이 패로 모여 무술시합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각기 되지도 않는 동작으로 무술놀이를 하고 있었다. 하후성은 한동안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빙그레 웃으며 내심 중얼 거리고 있었다. '황. 그는 항상 날 놀려댔지, 몸이 약골이라고. 그러나 오늘은 내 반드시 문(文)이 무(武)보다 높음을 인식시켜 주리라.' 하후성은 다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창천에 한 사람의 모습이 선명히 떠올랐다. 육척(六尺)의 키에 단단한 체격, 준수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 그 리고 먹같이 진하며 귀까지 길게 뻗은 눈썹의 기상이 출중한 사나 이. 독고황(獨孤皇). 바로 그의 모습이었다. 하후성의 얼굴에 점차 부드러운 빛이 떠올랐다. '황.... 그는 참 신비한 인물이지. 산중의 대호(大虎)도 하늘의 비응(飛膺)도 그보다 힘세고 날렵하지는 못해.' 어느덧 하후성은 도화전현성을 벗어나고 있었다. 하란산의 웅지가 그의 눈에 그대로 들어왔다. 하란산도 전체가 이 미 봄기운으로 푸르름이 짙어져 있었다. 그러나 산 정상의 봉우리 는 신비스럽게도 새하얀 백설을 그대로 이고 있었다. 봉우리는 만년빙설(萬年氷雪), 산등성이는 초지를 이룬 그 모습은 실로 영험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후성은 하란산의 거대한 모습을 바라보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표정이 장중해지며 눈에서는 기 이한 광채가 흘러 나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어 중얼거렸다. "하란산! 수천만 년 전부터 저 산은 저렇게 이곳을 굽어보고 있었 다. 수많은 풍상(風霜)과 인간계(人間界)의 영고성쇠까지도 지켜 보면서......." 하후성은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중얼거렸다. "그러나 저 산은 늘 담담하기만 하다. 산... 산은 장중하고 또 위 대하다. 더더구나 저 하란산은 더욱 뛰어나다. 멀리 대황야(大荒 野)와 등격리대막(騰格里大漠)까지 한 눈에 굽어보면서도 마치 모 든 일에 초연하고 전능한 신(神)과도 같다!" 하후성의 독백은 계속 이어졌다. 그는 총기 번쩍이는 눈을 깜박이 지도 않고 하란산을 지켜 보았다. "나의 학문 수업이 언제 끝날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끝났다고 생각 될 때 저 하란산을 배우리라. 초탈한 저 하란산처럼 나의 마음도 거대하고 광활하게 키우리라." 하후성. 그의 만면에는 정기(正氣)가 환하게 피어 올랐다. 그는 한 동안 하란산을 올려보며 명상에 잠기더니 곧 다시 걸음을 옮겼다. 봉산진은 하란산 서쪽 등성이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었다. 독고황 은 바로 그곳의 한 장원에서 무척이나 늙어 보이는 두 노인들과 살고 있었다. 하후성도 몇 번 그 두 노인을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괴이하기 짝이 없는 위인이었다. 백발이 성성했 으며 또한 몸은 허약한 듯 깡말랐지만 이따금씩 번뜩이는 안광은 무쇠라도 녹일 듯이 무서웠다. 특히 그들의 몸 전체에서 풍기는 기운은 냉막하고 음산하기까지 하여 하후성은 진작부터 그들이 결코 보통 인물이 아님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마치 흐르는 한성(寒星)처럼 차갑다. 그런 사람은 대체로 두가지 형(形) 중 하나다. 하나는 세상사를 초월한 달인 (達人). 또 하나는 자신의 모든 감정을 죽여버린 냉혹무비한 인간 이다. 과연 그들은 이 둘 중 어떤 형에 속할까?' 하후성은 벌써 몇 번씩이나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러나 그는 봉산진으로 향하며 씨익 웃었다. '어쨌든 황은 좋은 친구이다.' 하후성은 하란산으로 올랐다. 험한 산길을 오르는 그의 이마에는 어느새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 히기 시작했다. 일년 내내 장원에 틀어박혀 책(冊)만 읽는 그에게 봉산진으로 가 는 산길은 너무도 험하고 힘들었다. 하후성은 호흡이 급박해지는 것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내심 중 얼거렸다. '이런 때는 황이 부럽다. 그는 이 하란산을 하루에도 몇십 번 씩 이나 훨훨 날듯이 넘을 수가 있으니.' 하후성은 이마에 축축히 배인 땀을 소맷자락으로 닦으며 잠시 걸 음을 멈추었다. 어디선가 신음소리가 들려온 것은 이때였다. "으... 으... 음......!" 하후성은 흠칫했다. '이 산중에 웬 신음성이?' "으... 으......." 낮은 신음소리는 계속 그의 귀로 흘러 들어왔다. '어디 한 번 가 보자!' 하후성은 마음을 정하고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언덕을 넘자 숲이 울창했다. 그는 숲을 헤치며 조금 더 나아갔다. 이어 한 거대한 바위 아래에서 하후성은 걸음을 멈추었다. 집채보다는 조금 작은 바위 밑에 한 명의 도인(道人)이 기대앉아 있었다. 그는 허름한 도포(道袍)에 때가 잔뜩 찌들어 거의 회색빛 에 가까와 보이는 낡은 도복을 입은 늙은 도사(道士)였다. 역시 때에 절은 회색빛의 머리에는 다 구겨진 도관(道冠)까지 쓰고 있 었다. 용모는 지극히 평범해 보였으되 얼굴이 누렇게 떠 있는 노도인(老 道人). 그가 바위에 기댄 채 눈을 감고 낮은 신음을 흘리고 있었 던 것이다. 하후성은 잠시 멈칫했으나 곧 도인에게 다가갔다. 도인 또한 인기 척을 느꼈는지 급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도인의 눈빛 역시 지 극히 평범했으나 하후성을 보자 경계의 빛을 띄기 시작했다. 하후 성은 그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의 미소는 조금도 악심(惡心)이 없고 세속에 물들지 않은 탈속한 미소로써 모든 사 람을 일시에 다 포용할 수 있을 듯 했다. 도인은 그 미소를 접하자 자신도 모르게 경계심을 풀었고 하후성 이 다가가 공손히 읍하며 물었다. "도장(道長)어른. 어디가 불편하신가요? 제가 도와드릴 일이라 도......." 도인은 그 말에대답 없이 하후성을 찬찬히 훑어 보았다. 차츰 그 의 눈에는 놀라움의 빛이 떠올랐다. 그러나 곧 그 기색은 사라졌 고 부드럽게 웃으며 되물었다. "소시주는 이 근방에 살고 있는가?" 하후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시주의 이름은?" "하후성이라고 합니다." 하후성은 대답한 후 도인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노도인의 얼굴은 비록 평범했지만 그 이면에는 현기(玄氣)가 깃들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으며, 만면에 인자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도인은 하후성에게 나직이 말했다. "소시주께서 빈도를 좀 도와 주시겠나?" 하후성은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일입니다." 도인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리 좀 가까이 와 보게." 하후성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도인은 더욱 자세히 관찰하려 는 듯 하후성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의 시선에 이채가 번뜩인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그는 가슴이 진동하는 것을 느끼며 내심 중얼거렸다. '어허! 틀림없구나. 놀랍도다! 정말 놀랍군, 변방의 산중에서 이 런 천고(千古)의 기재(奇才)를 만나다니! 이 아이의 신체골격과 기질은 정말 너무나도 특이하구나.......' 그러나 일순 도인의 두 눈에는 안타까움이 어렸다. '정말 안타깝도다. 빈도가 백오십 년(百五十年) 간을 살아오는 동 안 처음으로 만난 기재이건만... 천축(天竺)의 마라혈교(魔羅血 敎)에서의 약속일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하후성이 그의 상념을 깨듯 물었다. "도장 어른, 제가 도울 일은 무엇입니까?" 도인은 정신을 차리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음, 빈도는 이곳 하란산에서 한 마리의 영사(靈蛇)를 만났네. 그 런데 그만 그 영사에 욕심을 부려 잡다가 실수를 하고 말았네. 그 놈에게 물려 독(毒)을 입었지." 도인은 말을 마친 뒤 바지를 조금 걷어 보였다. "아!" 하후성은 탄성을 터뜨렸다. 도인의 왼쪽 다리 무릎 부분이 완전히 흑빛으로 변한 채 퉁퉁 부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후성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반면 도인은 담담하게 말했다. "빈도는 영사에 물린 즉시 기(氣)를 막아 독이 더이상 퍼지지 않 도록 상처로 몰았네. 그러나 이대로 두면 빈도의 다리는 곧 썩은 흑수(黑水)로 화해 버리고 말걸세." 하후성은 놀라 급히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도인은 잠시 망설이더니 말했다. "독혈(毒血)을 모두 입으로 빨아내야 하네. 빈도는 기를 막고 있 어 할 수가 없네. 누군가 생명을 내걸고 입으로 빨아내야만 하 네." 듣고 있던 하후성의 눈썹이 꿈틀했다. "만일 입에 상처가 있거나 독혈을 빠는 도중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여 삼킨다면 즉시 죽고 마네. 소시주는 필히 생명을 걸어야 하 네." 도인은 말을 하며 의식적으로 하후성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나 하 후성은 곧 안색이 펴지며 낭랑하게 말했다. "소생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찌 마다하겠습니까?" 도인은 그의 말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이 아이는 정말 너무나 순수하구나!' 그는 짧은 순간 깊은 감동을 느꼈다. 그러나 겉으로는 조금도 내 색하지 않고 품속에서 한 자루의 조그만 비수(匕首)를 꺼냈다. 비 수는 전체가 빛나는 금빛이었다. "빈도는 이제 이 금혈비(金血匕)로 다리의 상처를 찌를 것이네. 그럼 즉시 독혈이 솟아나네. 그때 소시주는 지체하지 말고 독혈을 빨아야 하네." 하후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자, 그럼!" 도인은 망설이지 않고 즉시 비수로 무릎을 푹 찔렀다. 하후성은 급히 독혈이 막 솟으려는 상처에 입을 대고 빨기 시작했다. 그는 있는 힘껏 독혈을 빨았다. 독혈이 입안에 들어가자 입안이 불에 타는 듯 뜨거워졌다. 그러나 하후성은 입 가득 독혈을 머금 자 일단 뱉어낸 후 다시 빨았다. 그의 태도에는 조금의 꺼리낌도 없었으며 심지어는 눈살을 찌푸리는 기색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도인은 그 광경을 내려다 보며 더욱 진한 감동을 느낀 듯 두 눈에 모종의 결심의 빛을 담았다. '으음. 안타깝게도 이 아이는 나와 인연이 없다. 그러나 이 아이 를 이대로 보내기가 싫구나. 비록 나의 제자로 삼을 수는 없을 망 정 무엇이든 반드시 해주고 싶다.' 도인은 잠시 눈을 감고 운공(運功)해 보고는 다리에서 독기가 모 두 빠진 것을 느꼈다. "됐네, 됐어!" 하후성은 즉시 입을 떼더니 입가에 묻은 검은 독혈을 옷소매로 쓱 문지른 다음 빙그레 웃었다. 도인은 그 광경을 찬탄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부드럽게 물었다. "소시주는 더럽다고 느껴지지 않는가?" 그 말에하후성은 미소를 띈 채 말했다. "불가(佛家)에서는 구층 석탑을 쌓는 일보다도 사람을 구하는 것 이 최상이라고 하였습니다. 어찌 그 고귀한 일을 더럽다고 여길 수가 있겠습니까?" 정기(正氣)와 신심이 굳은 분명한 어조에 노도인은 할 말을 잃은 듯 했다. 그는 곧 몸을 일으키더니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고맙네, 소시주." "별 말씀을......." 도인은 하후성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자네에게 답례를 하겠네." 하후성은 황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보답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이번에는 도인이 빙그레 웃었다. "그렇다면 이 늙은이의 선물이라고만 여기고 받아주게." 도인은 곧 품속에서 하나의 푸른 옥갑(玉匣)과 적색을 띈 깃털을 꺼냈다. 적색의 깃털은 기이하게도 일면 부드럽게 보이는가 하면 빳빳하게도 보였으며, 또한 은은한 적광(赤光)을 발산했다. "이 옥갑은 빈도의 선물이고 이 적봉우(赤鳳羽)는 빈도의 신표(信 票)네." 하후성은 얼떨결에 옥갑과 적봉우라는 붉은 깃털을 받았다. "옥갑 안에는 빈도의 몇 가지 무학과 이곳 하란산에서 잡은 금왕 신사(金王神蛇)가 들어있네. 소시주가 금왕신사를 제대로 사용하 고 옥갑의 무학을 익힌다면 장차 큰 도움이 될 걸세." 하후성은 기이한 느낌을 받으며 옥갑과 적봉우를 내려보았다. 도 인이 그를 보며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언제고 만약 자네가 중원(中原)에 오게 된다면 공동산( 山)의 공동파에 들러주게." 하후성은 옥갑과 적봉우를 도로 내밀며 말했다. "하지만 이것은......." 도인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 "허허허... 소시주, 그대의 미간(眉間)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 있네. 일년 내로 좋지않은 일이 일어날 조짐이네. 그러나 그것은 별 문제가 아니네." 하후성은 의아한 시선으로 도인을 바라보았다. "만약 이곳을 떠날 일이 생기면 하남성(河南省)으로 가 보게. 그 곳에서 어쩌면 크나큰 기연(奇緣)을 만나게 될테니. 허허 허......." 도인은 너털웃음을 치더니 곧 고소를 지으며 입맛을 다셨다. "빈도는 복이 없으니 그 늙은 중에게 양보해야지. 허허......."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아!" 하후성은 깜짝 놀랐다. 실로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노도인의 웃음소리가 점점 희미해지더니 그의 모습이 차츰 안개처 럼 흐려지며 종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이, 이럴 수가?" 이어 아주 먼 곳에서 도인의 음성이 바람을 타고 그의 귓전에 모 기소리처럼 가늘게 들려왔다. "빈도의 명호는 적봉우사(赤鳳羽士)라네. 자네가 대성한 후에는 결코 공동을 잊지 말게, 부탁하네. 허허허... 그리고 오늘 빈도를 만난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허허... 허허허......." 이윽고 가늘게 전해지던 웃음소리가 끊어지고 적막만이 감돌게 되 었다. 하후성은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그, 그 분은 노신선(老神仙)이었구나!' 그는 이렇게 생각하며 멍청히 굳어져 버렸다. 마치 꿈이라도 꾼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내 그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푸른 옥 갑(玉匣)과 적봉우(赤鳳羽)가 그곳에 있는 바, 그 두 가지 기물 (奇物)은 방금 전의 일이 생생한 현실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후성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꿈은 아니었구나......." ■ 대소림사 제1권 제2장 문(文)과 무(武)의 우정(友情) -1 ━━━━━━━━━━━━━━━━━━━━━━━━━━━━━━━━━━━ 봉산진(鳳山鎭). 바람이 다소 거세게 부는 데다 지세(地世)가 험한 산중턱에 자리 잡고 있어 황량한 곳이었다. 약 백여 호나 될까?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대체로 척박한 산허리를 일구며 사는지라 생활이 빈궁한 편으로 가옥도 대개 모옥이거나 토옥(土屋)이었다. 다만 한 곳의 예외가 있을 뿐이었다. 한 채의 작은 장원(莊園). 그 장원은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약 사년(四年) 전에 이곳에 처음 지어진 것으로 따로 이름도 없었다. 그런데 이 장원에 사는 인물들은 매우 괴이한 인물들이었다. 두 명의 깡마르고 냉혹해 보이는 백발노인과 한 명의 준수한 소년으 로, 그 소년의 이름은 독고황이었다. 장원의 후원에는 연무장(練武場)인 듯한 작지 않은 공지가 있었고 그곳에 한 채의 소정(小亭)이 있었다. 지금 정자 안에는 한 명의 흑의청년이 탁자와 마주 하고 앉아 있 었다. 그 탁자 위에는 문방사보(文房四寶)를 비롯하여 세 권의 낡 은 책자가 놓여 있었다. 흑의청년은 바로 독고황이었다. 어느덧 십구 세(十九歲)로 성장한 그는 이제 그 누구라도 한번 보 면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신비하고도 특이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 다. 먹같이 검고 진한 눈썹은 세 치나 되게 뻗어있고 흑의와는 대조적 으로 창백할 정도로 새하얀 얼굴, 그리고 날카로우면서도 비범한 야망과 지혜가 담긴 깊은 눈(眼). 그리고 반듯한 콧날과 한일 자 로 다문 입술....... 실로 상선기재요 절세미남이었다. 독고황은 무릎에 한 자루의 긴 장검을 놓고 반듯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지극히 고요한 그의 자세와 얼굴에서는 무심(無心)이 흘 렀다. 후원의 월동문(月洞門)으로 누군가 들어섰다. 하후성이 나타난 것 이다. 하후성은 가쁜 숨을 내쉬며 이마를 땀으로 흠뻑 적신 채, 독고황을 발견하자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대뜸 정자로 뛰듯이 올라왔으나 곧 웃음을 거두고 신색을 가 라앉혔다. 그는 독고황이 명상에 잠긴 것을 알고는 방해하지 않고 탁자 옆에 조용히 앉았다. 탁자에 양팔을 올린 채 독고황을 응시하는 그의 얼굴에 한 가닥 의문이 피어 올랐다. '황의 이런 모습을 몇 번이나 본 적이 있다. 대체 무엇을 하는 것 일까?' 하후성은 내심 이렇게 중얼거리며 시선을 돌려 탁자 위를 바라보 았다. 그의 눈에 세 권의 책자가 보였고 그는 일순 큰 흥미를 느 꼈다. 어려서부터 책이라면 무엇이든지 좋아했던 하후성이 아닌가? 그는 맨 위에 놓여 있는 책을 한 권 집어 들었다. 그러나 책을 바 라보는 그의 시선이 기이한 빛을 발했다. 괴이하게도 표지에 섬뜩한 서체(書體)의 핏빛 글씨가 쓰여 있는 것이 눈에 뜨인 것이었다. <수라혈경(修羅血經)> 하후성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책 이름이 이토록 섬ㅉ하단 말인가?' 그는 뭔가 꺼림직함을 느끼며 책장을 넘겨 보았다. 첫장에는 역시 핏빛 글씨로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었다. <지옥아수라천(地獄阿修羅天)의 피로써 천하(天下)를 씻는다. 수라혈마(修羅血魔) 역천균(逆天均)> '아!' 하후성의 안색이 변했다. 그는 십사 세가 되기까지 이토록 끔찍한 저주가 가득 찬 글을 읽은 적이 없었다. 하후성은 가슴이 마구 떨리는 것을 느꼈으나 자신도 모르게 다음 장을 넘기고 있었다. <아수라비천마공(阿修羅飛天魔功)> 다시 섬뜩한 글이 쓰여 있었고 다음 장을 넘기니 전신에 핏빛 장 삼(長衫)을 입은 백발노인이 앉아 있는 그림과 빽빽한 주해가 쓰 여 있었다. 하후성은 자신도 모르게 정신을 집중하여 도해와 구결주해를 읽어 내려갔다. 그는 천하제일의 총명한 두뇌와 오성(五性)을 가진 소 년이었다. 단지 한 번 읽었을 뿐인데도 모든 구결은 그의 머리 속 에 암기되고 말았다. 그러나 구결을 읽은 하후성은 탄식해 마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무공이라는 것이구나! 그런데 무공은 모두가 다 이 렇게 끔찍한 것이란 말인가? 도무지 이 무공 내용에서는 인성(人 性)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으니.......' 그는 계속 책자를 넘겨 보았다. 수라혈경 속에는 각종 검법(劍法), 장법(掌法), 신법(身法) 등이 수록되어 있었다. 하후성은 비록 마음이 떨렸으나 이상한 호기심 때문에 모두 읽었다. 한참 후 그는 여전히 목상(木像)처럼 허공만 노려보고 있는 독고 황을 바라보며 내심 또다른 의문을 느꼈다. '황은 이것을 모두 익혔을까?' 하후성은 또 다음 책을 집어 들었다. <만독진결(萬毒眞訣)> 거기에는 천하의 만(萬)가지 이상의 극독(極毒)을 다루는 법과 독 물을 이용하여 수련하는 독공(毒功) 따위가 수록되어 있었는데 역 시 모두 한결같이 극악한 내용 뿐이었다. 하후성은 가느다란 전율이 이는 것을 느끼며 만독진결을 덮고 나 서 마지막 책을 살펴 보았다. <마검통천진해(魔劍通天眞解)> 그 책은 한 권의 검경(劍經)이었다. 살기가 물씬 풍기고 지극히 패도적(覇道的)이며 상상을 초월한 마검식(魔劍式)이 수록되어 있 었다. 하후성은 대강 훑어본 후 책을 덮으며 눈썹을 찌푸렸다. '이 두 권 역시 좋지 않은 느낌이 든다.' 하후성은 힐끗 독고황을 응시했다. 독고황은 그때까지도 눈을 감 고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빠져 있는 듯 했다. 그런데 문득 괴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하후성은 경악하며 눈을 크게 떴다. 독고황의 입에서 붉은 혈홍 (血紅)색 기류덩어리가 숨을 내쉬면 나오고, 들이마시면 빨려들어 가고 하는 괴현상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 하후성은 놀라는 한편 신비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잠시 넋을 잃 고 그 광경을 바라 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 지 그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 적봉우사(赤鳳羽士)란 도인이 주신 옥갑(玉匣)속의 무공을 황 이 익히는 무공과 비교하면 어떨까?' 하후성은 이 일에 지대한 호기심을 느꼈다. 마침내 독고황은 두 눈을 떴다. 혈홍색 기류는 모두 빨려 들어가 고 없었고 그 대신 그의 눈에서는 차가운 한광이 비수처럼 날카롭 게 뻗어 나왔다. 그 한광은 만물(萬物)을 얼음덩이로 만들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가 눈을 몇번 깜빡이자 한광 또한 없어지고 담담한 기운이 감돌았 다. 그리고 잠시 후, 독고황은 눈앞의 하후성을 발견하고는 흠칫놀라 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는 곧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언제 왔지? 소성(小星)?" 하후성도 따라 웃어 보였다. "조금 전에." 독고황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소성, 조금만 더 기다려라. 하던 것을 마저 끝내고 얘기하자." 하후성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했다. 독고황은 정자 밖으로 걸어 나갔다. "소성, 자리에 앉아서 이 형님의 실력을 자세히 보아둬라. 아마 너의 눈이 튀어나올 것이다." 그 말에하후성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황, 그대는 무(武)가 영원히 문(文)을 능가하지 못함을 모르는구 나. 설사 그대가 그 검(劍)으로 하늘을 찌른다 해도 나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핫하하하......." 독고황은 앙천광소했다. "소성, 나는 너의 그 호쾌함과 대범하고 밝은 기질을 좋아한다. 비록 네가 문(文)을 알고 무(武)를 모르지만 어쩌면 그래서 더욱 너를 좋아하는지도 모르지." 독고황은 말을 마치자마자 장검을 뽑았다. 번쩍! 검집이 떨어져 나가며 눈부신 백광(白光)이 폭사되었다. 검집과 검자루는 흑색인데 반해 검신은 눈부신 백색이었던 것이다. 독고황은 장검을 허공으로 쭉 뻗으며 검식(劍式)을 전개했다. 츠츠츠츠! 대기(大氣)를 가르는 괴이한 음향과 함께 백사(白蛇)가 혀를 내밀 듯 살벌한 검기가 검 끝에서 다섯 자나 치뻗었다. 쉬쉬쉬... 쉭... 파파파파... 팟! 독고황의 몸은 처음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그가 검을 전개할 때마다 검기의 형세는 방원 십장(十丈)까지 뻗었다. 십장 범위는 완전히 검광과 검기의 영향권에 갇혔다. 실로 검초(劍招) 한식 한식 마다가 한결같이 악랄무비하고 괴이했 다. 비록 무공을 모르는 하후성일지라도 그 흉험한 기세와 뼈를 찌르는 살기는 절실히 느낄 수가 있었다. 하후성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그는 찬연한 백색 검기에 가려진 독고황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저 검법은 바로 수라혈경에 수록돼 있는 수라구마검(修羅九魔劍) 이구나!' 놀라운 일이었다. 어찌 무공을 전혀 모르는 그가 단 한번 본 검법 을 기억할 수 있단 말인가? 또한 하후성은 한동안 독고황의 검법을 지켜보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탁자 위에 놓인 문방사보에 손을 댔다. 그는 한 장의 화선지를 펼치고 붓에 먹을 찍어들었다. 그리고 다 시 시선을 돌려 한동안 독고황의 검법을 자세히 보았다. 우우웅! 엄청난 마기(魔氣)를 느끼게 하는 파공성과 함께 독고황의 검법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위이이... 웅! 가공할 검광과 검기가 허공 십 장 높이까지 치솟는 것을 보며 하 후성은 내심 부르짖었다. '제 팔 초(八招) 진천수라겁(震天修羅劫)이구나!' 검법은 돌연 홱 변했다. 우우우우... 웅--! 우우웅--! 천지가 온통 아수라(阿修羅)의 울음소리로 가득 찼다. 하후성의 안색이 급변했다. '마지막 초식 영멸수라혼(永滅修羅魂)이구나!' 그의 수중에 들려져 있던 붓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화선지 위를 날았다. 화선지 위에는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고 그것은 한 흑의청년이 검을 휘두르는 모습이었다. 어느새 연무장에는 검법시전을 끝낸 독고황이 검을 검집에 집어 넣은 채 처음 그 자세 그대로 서 있었다. 자세나 호흡이 전혀 흐 트러지지 않은 태연한 모습이었다. 아니, 애초부터 그는 검법을 전개한 것 같지도 않았다. 독고황은 돌아섰다. "하하하핫... 소성! 어떠냐? 나의 검법......?" 그는 갑자기 말을 끊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후성이 그림에 골몰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휙! 독고황은 신형을 번뜩이더니 단숨에 정자 위로 올라섰다. "소성, 뭐하는 것이냐?" 탁자 위에 시선을 던진 그는 화선지에 그려진 그림에 탄성을 발하 며 경악하고 말았다. 그림 속의 흑의청년은 바로 자신의 모습이었 던 것이다. 놀라움은 그 뿐이 아니었다. 하후성의 그림은 정확히 수라구마검 의 마지막 초식인 영멸수라혼의 검식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 다. 그러나 그보다 더더욱 놀랄 일이 있었으니, 그것은 아까 독고황 자신이 전개할 때는 괴이하고 사악하기만 했던 검법이 그림에서는 광명정대(光明正大)하기 이를데 없이 변해 있었던 것이다. 마치 일대의 군자(君子)가 탕마멸사를 하기 위에 검무(劍舞)를 추 는 듯한 그런 그림이었다. 독고황은 넋을 잃은 듯 굳어진 채 하후 성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눈빛이 가볍게 흔들렸다. '소성. 너는 이 그림으로 나에게 뭔가를 권유하고 있구나. 그것은 바로.......' 독고황은 더이상 생각할 수 없었다. 그의 안색은 삽시에 침중해지 고 말았다. 하후성이 밝게 웃으며 물었다. "황, 두 분 노인이 보이지 않는데 어디 가신 모양이지?" 하후성은 의식적으로 화제를 돌리고 있었고 독고황도 그것을 짐작 하고는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두 분은 좀 멀리 가셨다. 아마 열흘은 있어야 돌아오실 것이 다." 독고황은 말하고 나서 몸을 돌렸다. "소성, 잠깐 앉아 있어라. 내 방에 다녀오겠다." 그러나 독고황은 멈칫했다. 탁자 위에 쌓아둔 세 권의 책자가 흩 어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의 눈빛이 기이한 변화를 일으켰다. '혹시... 소성이?' 독고황은 의문을 품은 채 그대로 정자를 걸어 나갔다. 그리고 잠 시 후 그는 소반에 찻주전자와 찻잔 두 개를 들고 다시 나타났다. 독고황은 탁자에 앉으며 담담히 말했다. "이것은 사천산(四川産)의 용정연화향문차(龍井蓮花香文茶)라는 것으로 무척이나 고귀한 것이다. 소성에게 맛을 보여 주기 위해 조금 남겨 놓았었지." 독고황은 신중한 동작으로 찻잔에 용정연화향문차를 따랐다. 차는 짙은 청황색을 띄고 있었으며 향기가 금세 정자 안에 감돌았다. 하후성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차갑고 시원한 느낌이 목구멍을 적시자 입안이 향긋해지고 가슴이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야! 정말 좋은 차군!" 하후성은 탄성을 발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독고황의 준수한 얼 굴에 만족의 빛이 감돌았다. 그러나 독고황은 표정과는 달리 가라 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소성, 너에게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다." 하후성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독고황은 찻잔을 내려 놓으며 심각하게 입을 열었다. "만약에 말이다. 이것은... 만약이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하후성은 독고황의 기색에서 일말의 불 안을 느꼈으나 내색치 않고 묵묵히 듣고 있었다. "내가 만일 훗날 세상의 커다란 죄인이 된다면 너는 나를 어떻게 대하겠느냐?" 의미심장한 말에 하후성은 난색을 띄며 반문했다. "황,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냐?" 독고황은 다소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만약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하후성도 따라서 미소를 지었다. 다만 그의 미소는 일면 천진한 듯 하면서도 무한한 현기(玄機)를 품고 있었다. 하후성은 담담하게 말했다. "황, 이 하란산은 언제쯤 평지(平地)로 변할까?" 독고황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아니, 갑자기 그것이 무슨 말이냐? 이 거대한 하란산이 어찌 평 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냐?" 하후성은 그 말에자신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황, 나는 산을 좋아한다. 특히 이 하란산을 더욱더 좋아한다!" 하후성은 말을 그치고 그윽한 눈빛으로 독고황을 응시했다. 독고 황의 표정이 가볍게 동요하고 있었다. 뭔가 의미를 되새기려는 듯 그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하후성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황, 나의 마음은 곧 하란산이다." 독고황의 눈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소성.......' 독고황은 이 순간의 감정을 스스로도 정의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 다. 단지 분명한 것은 하후성에게서 진하디 진한 우의(友義)를 느 낄 수 있다는 것 뿐이었다. 그는 마음의 파문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는 하란산의 웅지를 우러러 보며 입을 열었다. "소성, 너의 꿈은 무엇이냐?" 하후성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나는 훌륭한 대학자(大學子)가 되는 것이 꿈이다." 독고황은 기이한 음성으로 다시 물었다. "명예(名譽)를 얻고 싶지 않느냐?" 하후성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명예? 글쎄... 나는 아직 나이가 어려서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 했다." 문득 독고황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그는 하후성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힘찬 음성으로 말했다. "소성, 저 하란산의 정상에 올라 밑을 보면 광활한 대지가 드넓게 펼쳐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으음." "그러나 그것은 장대한 중원 땅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중원... 그 곳에는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나타나고 또 소멸되었다." 독고황의 눈에서는 강렬한 야망과 집념이 넘쳐 흘렀다. "나는 언젠가 저 중원에 뛰어들 것이다. 저 광활한 중원을 무대로 나의 힘을 시험해 보겠다." 독고황은 말을 마친 후 하후성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확 고한 음성으로 말했다. "소성! 너는 문(文)의 제 일인자(一人者)가 되어라. 나는 무(武) 의 일인자가 되겠다. 나는 천하의 모든 인간들을 내 발아래에 놓 고 굽어 보겠다!" "크ㅋ......." "핫핫핫... 소성, 만약 그 때가 되면 나는 천하에서 가장 화려하 고 멋진 마차(馬車)로 너를 나의 집으로 데려가겠다! 어때? 재미 있지 않느냐?" 하후성은 짓궂은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재미있다! 너무나 재미있어서 이 하란산도 배꼽을 잡고 웃으려 한다. 하하하하......." 독고황은 눈썹을 치켜 세웠다. "이 녀석! 나를 비웃고 있구나!" 그는 짐짓 하후성을 치려는 시늉을 했다. "하하하하......." 하후성은 크게 웃으며 혀를 쑥 내밀어 보였다. 그는 이어 시선을 돌려 백설을 잔뜩 이고 있는 하란산의 봉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리 고 눈을 반짝이며 들뜬 음성으로 말했다. "황! 하란산의 정상에 한번 올라보자!" 그 말에독고황의 눈빛도 번쩍 빛났다. "좋다! 지금 가자!" 그들은 정자를 뛰어 내려갔다. 장원의 문을 나서자마자 그들은 나란히 하란산의 주봉(主峯)을 향 해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도 않아서 하후성은 지치고 있었다. "헉... 헉헉!" 그는 숨이 턱에 찰 지경인 반면 독고황은 마치 산보하듯 유유히 걷고 있었다. 사실 걷는다고 하지만 그 속도는 뛰어가는 하후성보 다 훨씬 빨랐다. 독고황은 하후성이 헐떡이며 쳐지자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하후 성을 향해 몸을 돌이키며 말했다. "소성, 너는 너무나 약하구나. 몸이 그렇게 유약하면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다. 어떠냐? 내가 무공을 좀 가르쳐 줄까?" 헐레벌떡 그에게 다가간 하후성은 이마의 땀을 훔치며 고개를 내 저었다. "필요없다. 너에게... 배우지 않아도 곧... 몸이 튼튼해질 거 야......." 하후성이 이렇게 말한 것은 얼마 전 적봉우사(赤鳳羽士)가 준 옥 갑이 생각나서였다. 그는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그 옥갑의 무공을 익혀 황의 높은 코를 반드시 납작하게 만들어 주리라.'. 이런 하후성의 심중을 알리 없는 독고황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녀석, 고집은......." 그는 하후성을 갑자기 번쩍 안았다. "아, 아니... 왜?" "가만 있거라. 네 체력으로 하란산 정상까지 오르려면 해가 다 질 거다!" 휙! 독고황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신형을 날렸다. 실로 엄청난 속도 로 내닫고 있었다. 윙--! 윙--! 하후성은 귓전을 스치는 바람소리를 듣고 그 속도감에 진저리를 쳤다. 그가 만일 땅을 본다면 놀라 기절초풍을 했으리라. 독고황은 한번 신형을 솟구칠 때마다 무려 삼십 장(三十丈)을 날 아갔으며 허공 십장(十丈)까지 솟구치고 있었던 것이다. 실로 통 천경악할 일이었다. 전설상의 팔보간섬(八步 蟾)도, 능공허도(凌空虎渡)도, 그리고 등천공(登天空)의 경공술도 따르지 못할 가공할 경공술이었다. 순 식간에 구름과 작은 산봉우리를 넘어 독고황은 하란산의 주봉에 당도했다. 그곳은 작은 분지를 이루고 있었다. 온통 만년빙설로 뒤덮여 은색 을 이루었으며 뼈를 얼릴 듯이 춥고 바람이 불었다. 그런데 봉우 리 밑으로는 운해(雲海)로 구름과 안개가 각 봉우리를 누르듯 흐 르고 있었으니....... 일대 장관이었다. "아아!" 바닥에 내려진 하후성은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바로 발 밑은 운 해와 산봉우리들이 늘어져 있었고, 멀리로는 광활한 대지가 끝없 이 펼쳐져 있었다. 서쪽으로는 등격리사막(騰格里沙漠)이, 동쪽으로는 거치른 황야 (荒野)가, 그리고 남쪽으로는 끝없는 대지가 안개 속에 희미하게 묻혀 있었다. 북쪽은 계속 산이었으며 남쪽은 바로 신비한 중원인 것이다. 하후성은 광활한 대지를 둘러보며 연신 탄복을 금치 못했다. "황! 정말 이 대륙은 너무도 드넓구나!" 독고황은 호쾌한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하지만 나는 네가 볼 수 있는 저 끝까지 만 하루면 갔 다 올 수 있다." 독고황의 모습에서는 불타는 투지와 호기를 엿볼 수 있었다. 그는 중천에 뜬 태양을 바라보며 팔을 벌렸다. "나의 야망(野望)은 저 태양보다도 높고 꿈은 대륙보다도 넓다. 하하하하하......." 하후성은 멍하니 대륙과 태양, 그리고 독고황의 모습을 바라보았 다. 그러나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가슴속에서도 치열한 불꽃 이 피어 올랐다. 그것은....... 바람이 분다. 따뜻한 훈풍이었다. 천년고목(千年古木). 하란산 기슭에 우뚝 서 있는 거대한 천년고목 앞, 그 언덕에 두 인영이 나타났다. 바로 하후성과 독고황이었다. 황혼. 어느덧 해가 지기 시작했고 부드러운 일사의 황혼빛을 받으며 그 들은 다정하게 고목나무 아래로 다가왔다. 독고황은 황혼에 물든 불그스레한 얼굴로 고목을 올려보며 미소를 지었다. "소성(少星), 너는 이 고목나무를 기억 하느냐?" 하후성도 따라 미소지었다. "이곳은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이지." 독고황은 기이한 웃음을 흘리더니 고목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품 속에서 조그만 비수(匕首)를 꺼내 고목의 껍질을 벗겨내고는 그곳 에 글씨를 새겼다. <독고황(獨孤皇)> 그 광경을 지켜보는 하후성의 눈에 부드러운 읏음이 어렸다. 이어 독고황은 비수를 그에게 건네 주었고 하후성은 고개를 끄덕인 뒤 다가갔다. <하후성(夏候星)> 그의 이름이 바로 옆에 새겨졌다. 독고황은 나란히 새겨진 두 이름을 번갈아 바라보고는 하후성의 어깨를 치며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소성! 이 천년고목이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의 우정은 영원이 변치 않을 것이다! 하하하......." 하후성은 미소를 지었다. 독고황은 한동안 고목에 새겨진 두 이름 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더니 이윽고 몸을 돌렸다. "자 소성, 날이 어두워졌다. 이만 돌아가자. 내 너를 바래다 주겠 다." 두 사람은 손을 맞잡은 채 고목나무를 떠나갔다. 일락(日落). 황혼은 지고 대지는 어둠에 가라앉고 있었다. 하란산의 거대한 웅 자도 어둠에 스며들 듯 컴컴해졌다. 휘 --이-- 잉--! 천년고목에 한 줄기 바람이 불었다. 우-- 우-- 웅-! 가지가 떨며 괴이한 울음소리를 토(吐)해 냈다. 천년고목은 말이 없었다, 천년(千年) 동안을. 그리고 앞으로도 말이 없을 것이다, 고목으로써의 생명이 다할 그 날까지....... 겨울(冬). 엄동설한(嚴冬雪寒)의 동지(冬至), 북방의 기후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혹한이었다. 폭설(暴雪). 모진 광풍과 함께 쏟아지기 시작한 폭설은 연 사흘째 계속되고 있 었다. 온 천지는 백색으로 물들었고 하란산 일대 역시 그야말로 설중(雪中)에 갇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위-- 잉! 휘이-- 잉! 광풍을 동반한 폭설은 천지를 온통 눈으로 뒤덮고 말았다. 그리고 어둠, 폭설이 계속 내리는 가운데 밤이 도래했다. 장원(莊園). 도화전현성에 위치한 허름한 장원은 어둠과 눈보라에 묻혀 적막하 게만 보였다. 바로 하후성이 거처하는 장원이었다. 후원의 한 침방. 방안 구석에는 낡은 나무침상이 있었고 침상 위에는 백발이 무성 하고 주름살 투성이인 노인이 기진한 듯 누워 있었다. 노인의 안 색은 희다 못해 푸른빛이 감도는 것이 도저히 산 사람이라고는 볼 수가 없었다. 노인의 옆에는 하후성이 잔뜩 근심어린 기색으로 지켜보고 있었 다. 하후성은 계속 물을 적신 천으로 식은 땀이 배이는 노인의 이 마를 닦아주고 있었다. 노인이 어느 순간 힘겹게 두 눈을 뜨자 하후성은 황급히 물었다. "할아범, 몸이 아직 괴로운가요?" 매우 염려스럽고 관심어린 어조였다. 그러나 잠시 희뿌연 눈길을 바로잡지 못하던 노인은 겨우 촛점을 맞추는가 싶더니 기침부터 연방 해댔다. "콜록! 콜록... 도, 도련님... 콜록! 노복은 괘... 괜찮습니다. 밤이 깊었으니 그만... 돌아가 주무십시... 오. 콜록! 콜...록!" 하후성은 고개를 흔들었다. "할아범, 내 걱정은 말아요, 얼른 할아범이나 병이 나아야 지......." 그 말에노인의 두 눈이 흐릿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다. 그는 깡마른 손을 힘겹게 들더니 하후성의 손을 잡았다. 온통 주 름살투성이의 뼈만 남은 손이었다. "그... 그럼요....... 이렇게... 착하신 도련님을 두고... 어찌 이 늙은 몸이 죽을 수가....... 콜록... 콜록! 콜록......." 노인의 기침은 점차 더 심해졌다. "할아범!" 하후성이 다급히 불렀으나 노인의 안색은 이미 잿빛이 되고 있었 다. "욱! 콜록......!" 다시 한바탕 심한 기침을 하자 이번에는 시커먼 피가 한덩이 토해 져 나왔다. 그는 안간힘을 쓰듯 겨우겨우 말을 이었다. "주... 주인님도 무심(無心)하시지....... 벌써... 칠 년이나 되 었는데도....... 욱! 콜록!" 시커먼 핏덩이가 연이어 노인의 목구멍에서 넘어왔다. 하후성은 어쩔 줄 모르는 듯 당황하며 비통하게 부르짖었다. "할아범! 할아범......." 노인은 그의 손을 꽉 잡으며 꺼져드는 음성으로 더듬거렸다. "도련님... 도련님... 부... 부디....... 훌륭한 사람이... 되어 야... 합니다......." "하, 할아범!" "끄... 끝까지... 돌보지 못하는... 노복을... 용서... 용서... 용... 서......." 마침내 하후성의 손을 쥔 노인의 깡마른 손에서 힘이 빠져 버렸 다. 노인은 결국 숨이 다하고 만 것이었다. "할아범! 할아범......." 하후성은 크게 울부짖으며 노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오열을 터 뜨렸다. 어려서부터 줄곧 자신을 보살펴주던 노인(老人). 그가 죽은 것이었다. 비록 주종관계라고는 하지만 하후성으로서는 친조부나 다름 없이 의지해왔던 노인이었다. 더구나 부친이 안계신 동안 넓은 장원에서 단둘이 외로움을 나누 며 칠 년이라는 긴 세월을 동고동락 해오지 않았던가? 그저 평생 동안 충심만을 가지고 착하게 헌신적으로 살아온 노인이었다. "할아범! 할아범......." 하후성의 오열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이렇게 혼자서 훌쩍 가버리시다니! 할아범......." 방안은 온통 하후성의 울부짖음으로 가득 차고 말았다. 눈은 계속 내렸다. 새하얀 백설은 어둠 속에서 하후성의 마음도 아랑곳없이 계속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폭설(暴雪), 그야말로 어둠을 짓뭉개 버릴 듯이 내리는 폭설이었 다. 하루가 소리없이 지났다. 여전히 눈은 그치지 않고 계속 내리고 있었다. 실로 몇십 년 만의 대폭설이었다. 소년(少年) 하후성. 그는 추운 줄도 모르는 듯 창문을 열어젖힌 채 쏟아지는 눈을 바 라보며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은 불과 하루 사이에 눈에 띌 정도 로 수척해져 있었다. 하후성은 멍하니 눈발을 바라보며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 커다란 장원에 지금은 단지 나혼자 뿐이다.' 갑자기 고독감이 엄습해 왔다. 그 고독감은 그에게 뼈가 저릴만큼 지독했다. 비로소 하후성은 자신의 생활 중에서 죽은 할아범의 비 중이 얼마나 컸던가를 깨닫고 있었다. 위-- 이-- 잉-- 휘--잉-! 밖은 오로지 폭설과 광풍 뿐이었다. 다만 이따금씩 방안으로 눈보 라가 휘몰아쳐 들어오곤 했는데, 그때마다 하후성은 몸을 부들부 들 떨어야 했다. 고독(孤獨). 애초부터 그는 고독한 존재였다. 그리고 그는 더욱 완벽하게 고독 해져 버렸다. 혼자라는 사실에 하후성은 미칠 것만 같았다. 평소에는 그리도 좋 아하던 눈이건만 웬지 이젠 눈조차 싫었다. 저주스러운 느낌으로 그의 가슴에 퍼붓는 눈....... 눈이 오는 날에 할아범이 죽었기 때문이었다. "할아범......." 그는 자신도 모르게 웅얼거려 보았다. 외로움은 뼈를 깎다 못해 폐부를 저미고 있었다. 불현듯 그의 머리에 떠오르는 하나의 얼굴 이 있었다. 준수하고 믿음직한 청년, 바로 독고황이었다. 일단 그의 모습이 떠오르자 하후성은 미치도록 그가 그리워졌다. '황(皇)! 보고 싶다!' 그동안 할아범의 병세가 악화되어 근 한달 간이나 그를 만나지 못 했다. 독고황의 모습이 황량한 그의 가슴에 물밀 듯이 밀려 들고 있었다. "황......." 하후성은 부르짖으며 벌떡 일어났다. '그에게 가보자!' 그는 지체없이 방을 나섰다. 장원의 밖은 눈이 몇자나 쌓여 있었고 허리까지 눈이 덮혀 걸음을 옮기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하후성에게 아무 런 문제도 되지 못했다. 그로서는 어떻게 하든 빨리 이 장원을 벗 어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하후성은 눈을 마구 헤치며 곧장 화원을 지나고 또 전원(前院)을 지났다. 힘겹게 대문을 열어 젖히는 그의 눈에는 형언키 어려운 절박함이 담겨 있었다. "앗!" 그러나 그는 대문 앞 일 장(一丈) 쯤 거리에서 무엇인가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눈속에 손을 짚은 순간 전해져오는 뭉클한 감촉! 그것은 놀랍게도 분명 사람의 가슴 부분의 감촉이었다. "이, 이것은!" 하후성은 대경하여 급히 일어났다. 그가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는 사이, 두툼하게 부풀어 오른 눈더미가 문득 꿈틀거렸다. 나직한 신음성이 그 안에서 흘러 나오고 있었다. "으... 으으... 음....... 서... 성(星)아야......." 하후성은 마치 벼락을 맞은 듯이 몸을 떨었다. 그는 곧 앞 뒤 가 릴 것 없이 급히 눈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눈속에서는 차츰 한 중년서생(中年書生)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 다. "아니!" 하후성은 경악성을 발했다. 중년서생은 워낙 남루한 옷을 입고 있는 데다 깡마르고 피골(皮 骨)이 상접하여 도무지 산 사람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온 몸이 시퍼렇게 얼어 있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하후성의 눈길이 중년인의 쾡한 얼굴을 살피다 흡사 자석에라도 이끌리듯 그의 왼쪽 귀에 가서 멈추었다. 중년인의 왼쪽 귀, 그곳 에는 손톱만한 붉은 점이 하나 박혀 있었다. 그것을 확인하자 하후성의 전신은 경련으로 떨렸다. "아... 아... 아버님!" 그 중년서생은 바로 하후성의 부친이었다. 하후연(夏候淵). 이것이 중년서생의 이름이었다. 하후성이 일곱 살 때 집을 떠났던 부친 하후연. 그가 마침내 돌아 온 것이다. "아버님......." 하후성은 절규하듯 외치며 급히 하후연을 안았다. 그는 힘겨운 줄도 모르고 하후연을 안고 장원 안으로 들어가더니 자신의 방 침상 위에 눕혔다. 하후연은 완전히 뻣뻣하게 얼어 있었다. 그가 이런 몸으로 장원 앞까지 온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적같은 일이었다. "아버님!" 하후성은 얼음장같이 굳어진 부친의 몸을 주무르며 처절하게 외쳤 다. 하후연은 그 소리를 들었는지 힘겹게 두 눈을 떴으나 아쉽게 도 그의 눈에는 촛점이 없었다. "아버님! 정신 차리세요, 성아예요! 성아......." 하후성이 귀에 대고 이렇게 외치자 하후연의 몸이 한 차례 격하게 떨렸다. 그의 입술이 기적적으로 움직였다. "서... 성아라고....... 그... 그럼 내가... 집에... 까지 왔단 말이냐......." 거의 알아 듣기 힘든 말이었으나 하후성은 부친의 입 가까이 귀를 대고 있었으므로 똑똑히 들을 수가 있었다. 하후성은 격동하여 외쳤다. "그래요, 아버님! 아버님은 지금 집에 계세요." 하후연의 움푹 꺼져 들어간 촛점 없는 눈자위로 눈물이 고였다. "하... 하늘에 감사한다......." "아버님... 흑흑!" "서... 성아야, 손을......." 하후성은 급히 자신의 손을 차디찬 부친의 손에 대주었다. 하후연 은 미약하게나마 손에 힘을 주며 더듬거렸다. "칠 년(七年)... 만이구나. 칠 년......." "흑흑... 아버님......." 하후성은 오열을 금할 길이 없었다. 하후연은 한동안 그의 손을 쥐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성아야....... 슬퍼하지 말고... 내 말을... 끝까지... 들어 라....... 이 말을... 해야 한다는... 오직 한 가지 집념... 으 로... 이곳에... 왔다......."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 약해서 거의 들릴락말락 했다. 하후성은 그 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성아... 너의 어머님은... 살아... 계신다......." 뜻밖의 말에 하후성의 몸은 굳어 버리는 것 같았다. 어머니. 그것은 과거 그에게는 하나의 금기(禁忌)였다. 부친인 하후연은 언제나 모친에 대해 물으면 침통한 표정을 짓곤 했다. 고사리같은 하후성의 손을 잡으며 눈물을 글썽였는가 하면 며칠 동안이나 방안에 틀어박혀 식음을 전폐하고 보냈던 적도 있 었다. 때문에 어린 하후성은 부친이 슬퍼할까봐 의식적으로 모친의 얘기 를 꺼내지 않았고, 그것은 아예 습관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칠 년(七年)만에 돌아온 부친이 지금 그의 손을 잡고 어머니의 얘기 를 꺼낸 것이 아닌가? 아아, 모친(母親), 얼마나 사무치도록 그리운 사람인가! 하후연의 꺼져드는 음성이 계속되었다. "너의... 어머니의 이름은... 주(朱)... 설(雪)... 란(蘭)..... .." 하후연의 흐려지던 눈에서 갑자기 신비한 빛이 발산되었다. 사랑 하는 아내의 이름이 그에게 어떤 생기(生氣)를 부여한 것일까? "십(十)... 오년(五年) 전의... 일이었다......." 그는 아련한 추억을 더듬듯 천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으로부터 십오년 전. 하후연(夏候淵)은 일개 낙척서생(落拓書生)이었다. 비록 가슴에는 무한한 학문과 청운의 높은 뜻을 지니고 있었으나 어려서 양친을 여의고 빈궁한 가운데 천하를 떠돌아 다녀 불운한 낭인문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천하를 주유하며 계속 학문 을 정진시켜 그의 학문과 덕망은 점점 높아만 갔다. 그러던 중 하남성(河南省)의 명사(名寺)에서 그는 운명의 전기를 맞았다. 백마사에서 책을 읽던 그는 그곳에 불공을 드리러 온 절 색의 미소녀를 만난 것이었다. 주설란(朱雪蘭). 이것이 그녀의 이름이었다. 청춘의 두 남녀는 이내 서로 인품에 반해 사랑에 빠지고 말았고 급기야 하후연이 주설란의 조부에게 찾아가 청혼을 하기에 이르렀 다. 주설란의 부친은 당시 일찍 타계하고 없었다. 그러나 주설란의 조부는 일언지하에 하후연의 청혼을 거절해버렸 다. 주설란의 조부로 말하면 강호(江湖)에서 위명이 쟁쟁한 일대 고수로, 가문 역시 무림대세가(武林大世家)였다. 그러므로 일개 떠돌이 문사(文士) 따위에게 금지옥엽인 주설란을 절대로 내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후연의 비통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더우기 주설란은 당시 하후연과는 이미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몸이 되어 있었다. 반면에 그 사실은 주설란의 조부에게는 그야말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노발대발한 나머지 하후연을 잡아 지하뇌옥에 가두 고 말았다. 일점혈육인 손녀가 자신의 허락도 없이 떠돌이 사내와 정(情)을 통했다 하여 실로 가혹한 처사를 감행한 것이었다. 손녀에 대한 사랑이 큰만큼 미움도 컸던 것일까? 이후로 주설란이 아무리 눈물로 애원해도 조부의 마음은 돌이킬 수가 없었다. 그러는 가운데 무심한 세월만이 흘렀다. 그러나 세월은 조부의 분노를 점차 용해시키는 듯도 했다. 주설란 이 귀여운 옥동자(玉童子)를 낳게 되었는데 그 아기가 바로 하후 성이었다. 하후성이 태어나자 주설란의 조부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하후연을 뇌옥에서 끌어냈다. "너는 진정 설란(雪蘭)을 사랑하느냐?" 그의 느닷없는 질문에 하후연은 비장하게 말했다. "저의 목숨보다도 더 사랑합니다." "좋다! 너희들의 관계가 이렇게 된 이상 노부도 더이상 막고 싶지 는 않다." "아!" 하후연과 주설란은 모두 감격의 탄성을 발했다. 그러나 조부는 역 시 호락호락한 위인이 아니었다. "그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그는 하후연에게 문초(問招)라도 하듯 냉엄하게 덧붙였다. "그렇다. 그 조건을 이루지 않는 한 너와 너의 자식을 결코 노부 의 집 안으로 들여놓을 수 없다. 네가 노부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너와 너의 자식을 노부의 혈족으로 인정하겠다." 하후연은 아연 긴장하여 물었다. "그 문제가 무엇입니까?" "노부는 닭잡을 힘도 없는 너같은 떠돌이 문사를 가장 싫어했다. 네가 만약 무인(武人) 못지 않게 참다운 용기와 인내를 보여줄 수 있다면 너를 받아 들이겠다." "하명(下命) 하십시오." "천축(天竺)에 가면 뇌음사(雷音寺)라는 신비의 절이 있다. 그곳 의 진산이보인 뇌음진경(雷音鎭經)을 가져 오너라. 그럼 허락하겠 다." 하후연의 얼굴은 그만 창백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그것은 무공을 조금도 모르는 그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찌 일만 리(一萬里)가 넘는 천산(天山)을 넘어 천축까지 다녀올 수가 있단 말인가? 아니, 설혹 간다하여도 뇌음진경을 가져오는 일은 도저히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뇌음사는 천축비문(天竺秘門)으로 무공(武功)이 엄청나게 높은 신 비의 라마승의 집단이었다. 더구나 뇌음진경은 그들의 밀종무학이 수록된 지보로써 타인에게 넘겨줄 물건이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하후연은 기어코 외치고 말았다. "하겠습니다, 어르신!" 이후로 그는 갓 낳은 핏덩이인 하후성을 안고 중원의 북쪽 하란산 까지 왔다. 그리고 도화전현성에 장원을 짓고 하후성이 일곱살 될 때까지 함께 있었다. 그러다가 하후성이 일곱살 나던 해에 결국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천축으로 떠났던 것이다. 하후연. 여기까지 말한 그의 안색은 회색에 가까워졌다. "서... 성아야....... 이 애비는... 칠 년(七年)동안... 뇌음사에 서 온갖 수모를 겪으며... 마침내... 뇌음진경을... 가져왔 다......." "아... 아버님......." 하후성은 통곡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부친의 일생이 너무 나도 처절한 한(恨)으로 점철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후연은 더욱 꺼져드는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처... 천축은 너무... 멀어... 이 애비의 약한 체질... 로서... 견딜 수가... 없었다....... 춥고 허기진 것을... 참고... 수많은 난관을 ... 뚫고... 일만 리를 지나... 이곳까지... 왔... 다......."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품속에서 하나의 황색보자기를 꺼냈 다. "이것이... 뇌음... 진경... 한(恨) 맺힌 물건....... 애비는... 틀렸지만... 너는... 이것을 가지고... 외증조부에게 가... 어머 님을... 만나라....... 그리고... 그... 리고......." "아... 아버님!" "그리...고... 나... 나는... 최선을... 다 했고... 사랑... 했었 노라고... 전(傳)... 전해......." 차츰 하후연의 손에서 힘이 빠져 나갔다. 그의 동공이 서서히 위 로 치켜 올라가고 있었다. "아, 아버님!" 최후의 힘(力)을 다한 듯 하후연의 입술이 달싹였다. "성아....... 내 몫까지... 행... 행복...해...라....... 그리 고... 외증조부의... 집...은... 중(中)... 중... 중......." 별이 떨어졌다. 유성(流星)이 떨어졌다. 하후연이라는 이름의, 일생을 불운하게 지냈던 낙척서생(落拓書 生)은 마침내 이렇게 허망하게 지고 말았다. 사랑하는 아내를 다 시 보지도 못한 채 어린 아들의 비통한 눈물 속에서 그는 죽은 것 이었다. "아버님---!" 절규(絶叫)! 하후성의 피맺힌 절규가 하늘을 찔렀으나 죽은 자(死者)는 말이 없었다. 단지 싸늘히 식어갈 뿐이었다. 하후성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아니, 흘릴 눈물조차 없었다. 너 무도 커다란 충격에 눈물조차 말라 버린 것일까? "아버님! 칠 년 만의 상봉이 이토록 허망하다니요....... 더구나 아버님은 그 칠 년간을......." 그는 넋이 나간듯 눈을 부릅뜬 채 읊조리고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사셨을 수가....... 아버님--!" 피눈물. 피눈물이 흘렀다. 하후성의 눈가가 찢어지고 마침내 눈물 대신 피 가 흘러 내리고 있었다. 눈, 눈은 더욱 거세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폭설에 잠긴 설야는 말이 없다. ■ 대소림사 제1권 제3장 대소림사(大少林寺) -1 ━━━━━━━━━━━━━━━━━━━━━━━━━━━━━━━━━━━ 후원(後園). 폭설이 분분이 흩날리는 후원 한 가운데서 하후성은 잿빛 하늘을 우러러 보며 서 있었다. 너무나 큰 타격이 그의 정신을 산산조각 으로 만들었는지 그의 얼굴은 무표정해 보였다. 문득 하후성은 허리를 굽히더니 눈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손가락 이 시퍼렇게 되었다가 나중에는 완전히 하얗게 얼어버렸다. 잠시 후 맨땅이 나왔다. 돌처럼 단단히 얼어붙은 땅이었다. 그러 나 하후성은 그 언 땅을 맨 손으로 파헤쳤다. 피(血). 새빨간 피가 손톱 사이로 흐르기 시작하더니 잠시 후에는 양 손이 온통 벌겋게 피로 젖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아픔 을 느끼지 못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땅에 커다란 구덩이가 생겼고 그제서야 하후성은 손을 멈추었다. 그는 몸을 일으켜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미 싸늘한 시신이 된 부친 하후연을 곱게 헝겊으로 싼 뒤 정성스레 안아들고 후원으 로 다시 내려왔다. 시신을 구덩이에 넣은 그는 한참 동안 멍하니 굳어졌다. 그러나 그는 이내 다시 손으로 구덩이를 묻어 조그만 봉분을 만들 었다. 그 위에 눈이 쌓이기 시작했고 눈 위에는 또한 점점이 선홍 빛 핏방울이 묻어나고 있었다. 바로 하후성의 손에서 떨어지는 피였다. 하후성은 넋이 나간듯 봉 분을 내려다 보았다. "아버님......." 그는 나직히 뇌이며 쓰러지듯 무릎을 꿇었다. "크흑!" 다시금 진한 통곡(痛哭)이 그의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뜨겁게 솟아 올랐다. 그러나 그는 이를 악물고 참으며 아홉 번 절을 한 다음 비틀비틀 일어났다. "어머님을 찾겠어요. 그러나 아버님....... 외증조부만은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결코......." 하후성은 입술을 짓씹으며 이렇게 말했다. "아버님은 용서하실지 몰라도... 저는 절대로 외증조부를 용서하 지 못할 것입니다." 하늘(天). 잿빛의 하늘은 어느덧 기울어가고 있었다. 아침인가? 동녘의 하늘이 밝아 오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실은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마음이 텅 빈 하후성은 지금이 아침인지 저녁인지조차 분별할 능력을 잃고 말았다. 벌써 오일(五日)째 계속되는 눈발은 조금도 그칠 줄을 모르고 있 었다. 하후성은 계속 잿빛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한 사람이 더욱 미치도록 그리워졌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모 든 것을 이야기하고 통곡하고 싶었다. '황(皇).......' 눈물이, 메말라 나오지 않았던 눈물이 비로소 흘렀다. 그러나 하 후성은 소맷자락으로 즉시 눈물을 닦았다. '울지 말자! 울지 말자....... 나는... 대장부(大丈夫)다. 오늘 이후로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울지 않을 것이다!' 하후성은 내심 이렇게 외치며 다시 하늘을 보았다. 그의 눈(眼)속에 눈(雪)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녹아 물이 되 어 흘렀다. 봉산진(鳳山鎭). 독고황이 사는 장원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곳은 풍설(風雪)만 사 납게 몰아치고 있을 뿐 인기척 하나 없이 텅텅 비어 있었다. 독고황도 괴이한 두 백발괴노인도 그 누구도 없었다. 장원은 온통 눈에 덮인 채 죽음같은 적막에 싸여 있었다. 텅 빈 독고황의 방(房). "......!" 그곳에 하후성이 멍하니 서 있었다. 그의 눈은 독고황이 사용하던 탁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탁자 위에 는 먼지가 쌓여 있었다. 그로 미루어 오래 전에 사람이 떠났음을 알 수가 있었다. 휘-- 이-- 잉! 열린 창문으로 을씬년스런 바람과 함께 눈보라가 밀려들어 왔다. 하후성은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황....... 너는 또 어디로 갔는가?' 뼈저린 외로움은 두려움으로 변하여 그를 엄습했다. 탁자 위에 벼 루로 눌려진 한 장의 종이가 눈에 띈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것은 한 통의 서찰로 하후성은 웬지 그 서찰을 펼쳐 보기가 두 려운 느낌이 들어 한참 동안 집어들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는 멍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창밖으로 눈길을 던졌다. 휘-- 이-- 잉--! 바람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눈(雪). 눈은 끝도 없이 내리고 있었다. 하후성은 으스스한 한기를 느끼며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춥... 다.......' 내심 이렇게 중얼거린 그는 드디어 서찰을 집어 들었다. 서찰을 든 그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서찰의 봉서가 들려지자 곧 웅혼무비한 서체(書體)가 그의 눈 앞에 펼쳐졌다. <소성(小星), 말없이 떠나는 나를 용서해다오. 지난 오년간 너와 같이 지낸 세월은 진정 즐거웠다. 창문 밖에서는 눈발이 약간 내 리고 있다. 하늘이 잿빛인 것을 보니 폭설(暴雪)이 내릴 것 같다. 소성, 너도 지금 이 눈을 보고 있겠지? 지금 나의 마음은 지극히 슬프다. 소성, 너도 이해하겠지? 너를 만나보고 떠나고 싶었지만 웬지 서로의 마음만 더 아플 것 같아 그대로 떠난다.......> "황......." 하후성은 여기까지 읽고는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결국... 너도... 떠났구나......." 하후성은 불어오는 한풍에 다시 몸을 으스스 떨었다. 그는 잠시 망연히 있다가 서찰을 마저 읽었다. <......어디로 가느냐고 묻고 싶으냐? 묻지마라, 나도 모른다. 목 적지는 없다. 단 한가지 일을 완수하기 위해 천하를 주유해야만 한다. 그 일이 무엇이냐고 또 묻고 싶겠지? 소성(小星), 그것은 말할 수 없다. 봉산진(鳳山鎭)에서 오년 동안 산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하후성은 또다시 멍해졌다. '그 일 때문에 이곳에 살았었다고? 그 일이 대체 무엇이길래? 황, 너는 온통 비밀 투성이구나. 처음 만났을 때나 지금이나 모 두.......' 서찰은 다시 이어졌다. <......소성(小星), 날씨가 춥다. 너는 몸이 약해서 병이라도 걸 릴까 근심이 되는구나. 소성, 진정 보고 싶다. 앞으로 더욱 그렇 겠지. 그러나 볼 수가 없구나. 언제 너와 내가 만나게 될지는 나 역시 기약할 수가 없다. 너무나도 험난한 나의 운명(運命) 때문이 다. 그러나 소성, 걱정하지 말아라. 나는 강하다. 어떤 일에도 굴 복하지 않을 것이다. 소성, 눈발이 점점 거세지고 있다. 옆에서 두 노인이 갈 길을 재촉한다. 소성, 이제 필(筆)을 놓아야겠다. 눈시울이 젖는다. 소성, 그럼....... 성(星)을 가장 좋아한 벗 황(皇).> 하후성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툭! 서찰이 힘빠진 그의 손에서 떨어졌다. '황.......' 갑자기 무엇인가 뜨거운 것이 하후성의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치밀 고 올라왔다. 그리고 정신이 빙글빙글 돌며 아득해졌다. 쿵! 하후성은 머리를 탁자에 박았다. 폭설이 퍼붓는 이 사흘 동안 벌 어진 일은 어린 그에게 감당할 수 없는 타격을 주고 말았다. . 첫째 날은 할아범의 사(死). 둘째 날은 부친 하후연의 사(死). 그리고 마지막 날은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벗 독고황과의 이별! 하후성은 머리를 탁자에 박고 내심 피맺히게 중얼거렸다. '단 사흘동안... 모든 것이 단절되고 말았구나.' 하후성의 가슴이 터질 듯이 압박되었다. '모든 것이 나의 곁을 떠났다, 모두! 이제 나의 주위에는 아무도, 아무도 없다!' 휘-- 이-- 잉! 풍설이 방안을 다시금 을씬년스러운 한기로 가득 채웠다. 하후성은 문득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 그 의 안색이 기이하게 변했다. '그렇다. 모든 것이 다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 은.......' 하후성의 시선이 창을 통해 설풍에 가려진 웅대한 하란산으로 향 했다. '하란산(賀蘭山)! 하란산만은 여전히 변치 않는다. 그리고, 그리 고 그 천년(千年)의 고목(古木)도!' 갑자기 하후성은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 났다. 그는 방을 뛰쳐 나가더니 눈속에 푹푹 빠지며 뛰기 시작했 다. 천년고목(千年古木). 위-- 이-- 잉--! 위-- 이-- 잉--! 거센 풍설(風雪)이 언덕을 할퀴듯 후려치고 폭설이 천지를 뒤집었 다. 그러나 하란산 기슭에 우뚝 서 있는 천년고목은 설화(雪花)를 가득 피워낸 채 의연히 서 있었다. 눈에 반쯤 묻히다시피하며 나타난 한 소년, 하후성이었다. 그는 고목나무 아래까지 비틀거리며 다가와 멍하니 고목을 응시했 다. 풍설에 옷자락이 찢어질 듯 휘날렸으나 하후성은 조금도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그저 우두커니 선 채 고목만을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어려서부터 나는 이곳에서 아버님이 돌아오시기를 기다려 왔다.' 하후성의 얼굴에 감회가 어렸다. '그리고 오년 전 바로 이 자리에서 황(皇)을 만났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다시금 솟구쳤으나 하후성은 소맷자락을 끌 어 당겼다. '또... 눈물이 흐르려 하는구나. 울지 않겠다고 맹세해 놓고.' 하후성은 입술을 악물었다. 어찌나 세게 물었던지 입술이 터져 핏 기가 비치고 있었다. 그는 고목 곁으로 다가가더니 고목에 두텁게 붙어있는 눈을 손으 로 털어내기 시작했다. 얼어붙어 단단했지만 그는 참을성 있게 눈 을 모두 떼어냈다. 나무결이 보이는가 싶더니 곧 그곳에 칼로 새긴 두 개의 이름이 나란히 드러났다. <독고황(獨孤皇)> <하후성(夏候星)> 하후성은 떨리는 손으로 글씨를 어루만졌다. 그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어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시 선은 글씨 밑으로 내려가다 흠칫했다. 그곳에 새롭게 새겨진 글씨 가 얼핏 보였던 것이다. 하후성은 다급히 다시 눈을 털어냈고 비로소 선명하게 새겨진 글 씨가 드러났다. <다시 만날 그 날까지 변치 않는 우정(友情)을 위하여.......> 하후성의 가슴이 격렬한 진동을 일으켰다. "황(皇)!" 그는 가슴이 터져라 허공을 향해 외쳐댔다. 그의 만면에는 기쁨의 미소가 가득 떠올라 있었다. "황(皇)!" 그의 외침은 눈보라를 뚫고 멀리멀리 대륙 끝으로 퍼져나가는 듯 했다. 반면 외침과는 대조적으로 그의 육신은 기진하여 허물어지 고 있었다. 스르르....... 하후성은 힘이 빠져 나가는 것을 느끼자 고목나무에 몸을 기댔다. 그러나 그대로 미끄러져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하늘은 여전히 잿빛이었고 눈은 도무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 다. 하후성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무척이나 많이 내리는군.' 졸음이 밀려 들었다. '졸린다. 조금만... 잘까?' 하후성의 눈이 서서히 내리감기고 있었다. 어디선가 꿈결처럼 아 득히 독고황의 음성이 들렸다. - 소성(小星)! 잠들지 마라. 잠들면 죽는다! 하후성은 씨익 웃었다. '황, 조금만 잘께. 무척이나 몸이 피곤해. 그러고 보니 난 사흘 동안 밥 한 끼, 물 한 모금 안먹었단 말야. 부탁이야, 조금 만.......' - 안돼! 소성(小星), 일어나라! 하후성은 서서히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 너의 말을 들을 수 없을 것 같아. 자고 나면... 자고 나야만 모든 것이... 새로와질 것 같거든.......' 하후성의 두 눈은 완전히 감기고 말았다. 휘-- 이-- 이-- 잉--! 풍설(風雪)이 몰아쳐 그의 몸을 눈으로 덮었다. 차츰 그는 설인(雪人)이 되어가고 있었다. 평화롭게 잠든 그의 얼 굴에는 천진하고 행복한 미소가 어리고 있었다. 무슨 좋은 꿈이라 도 꾸고 있는 것일까? 꿈속에서 누구라도 만난 것일까? 독고황? 아니면 부친을....... 그것도 아니면 얼굴은 모르지만 사무치게 그리운 어머니라도 만나 는 것일지....... 혹은 할아범, 다정한 충복 할아범을 만나 바둑 이라도 두는 것일까? 하후성의 얼굴에 떠도는 미소는 점점 짙어졌다. 그러나 몰아치는 눈발이 곧 그의 머리와 얼굴마저 덮어씌워 잠시 후에는 그 미소조 차 볼 수가 없게 되었다. 하후성은 완전히 눈덩이로 화하고 있었다. 이대로 그는 외로운 세상을 떠나 다정한 사람들을 만나러 가려는 것인가. 그렇게도 빨리....... 휘-- 휘-- 이-- 잉! 풍설은 더욱 천지간에 혼돈을 일으킬 듯 휘몰아쳤다. 눈(雪). 눈이 대지(大地)를 삼키고 있었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듯 거센 움직임이 그곳에서 일었다. 눈보 라를 뚫고 언덕 위 고목나무를 향해 치솟아 오르는 한 인영(人影) 이 있었던 것이다. 과연 초자연의 증명이련가? 인영은 이십 장(二十丈)을 단숨에 날 아와 고목 아래에 당도했다. 그는 전신에 회색승포를 입은 노승(老僧)으로 일견하기에도 백 세 (百歲)가 넘어보이는 창노한 모습이었다. 홍안의 노승. 그의 양미간에는 기이하게도 붉은 홍점(紅點)이 나 있었다. 그리 고 흰 눈썹에 눈송이가 얹혀 그의 눈썹은 더욱 길어 보였다. 회의노승은 고목 아래에 내려서자마자 고목에 기대앉은 채 설인이 되어 있는 하후성을 발견했다. "아미타불......." 그는 침음성으로 불호를 외우더니 급히 눈을 헤쳤다. 잠시 후 앉은 채 굳어있는 하후성을 발견한 노승은 경악성을 터뜨 렸다. "오! 진정 큰일날 뻔 했구나! 조금만 늦었다면 천고의 기재가 이 세상에서 사라질 뻔 했다. 아미타불... 관세음......." 노승은 곧 조심스럽게 하후성의 맥(脈)과 호흡을 살핀 다음 그를 안아 들었다. 그는 동정의 눈빛으로 하후성을 내려다 보며 인자하 게 중얼거렸다. "아미타불... 소사제(少師弟)....... 슬픔이란 순간적인 것, 어찌 한 순간의 비애로 인해 인생을 버릴 수가 있겠는가? 더우기 자네 에게는 앞으로 해야할 일이 태산(泰山)같이 많고... 운명(運命)의 책임이 있거늘......." 휘-- 익! 노승은 하후성을 안고 신형을 솟구쳤다. 눈보라 속에서 그의 중얼 거림이 들렸다. "백 년(百年) 동안 기다려온 염원일세, 소사제. 기나긴 백 년 동 안 세 분의 선사(禪師)들이 자네를 기다렸네. 이 운명의 만남 을... 아미타불... 과연 대사부(大師父)님의 혜지는 천기(天機)를 맞추셨네. 이곳에 자네가 있는 것까지 맞추실 줄이야......." 휘-- 이-- 이-- 이--잉! 광풍폭설(狂風暴雪). 북방의 대지는 온통 눈보라에 휘감겨 천지색(天地色)을 잃고 말았 다. 오로지 건곤일색(乾坤一色), 눈(雪)... 뿐이었다. 소림사(少林寺). 당(唐) 초엽, 혹은 남북조(南北朝) 시대에 세워졌다고 하는 소림 사. 달마대사(達磨大師)가 천축(天竺)에서 선종(禪宗)의 불경을 가지 고 소림에 들어옴으로써 소림사는 수천 년 무림사(武林史)의 태산 북두(泰山北斗) 격인 존재가 되었다. 면벽구년(面壁九年). 달마대사는 토굴에서 구 년의 면벽을 통해 마침내 무학의 시작이 되는 두 권의 기서(奇書)를 남겼다. 이른바 역근경(易筋經)과 세수경(洗髓經). 이 두 권의 기서로 인해 대소림사의 역사(歷史)는 시작되었다. 그 이후 천 년(千年). 도합 사십이 대(四十二代)를 내려오는 동안 수많은 고승(高僧)이 명멸했다. 그리고 그동안 소림의 무학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특히 소림칠십이비전절예(少林七十二秘傳絶藝)는 달마대사 이래로 소림 최고의 무공(武功)이었다. 그 밖에도 세인들은 수많은 절공 비기들이 소림사에 비장되었다고 알고 있었다. 실제로 작게 나누면 근 천팔백육십 종(千八百六十種)의 비학(秘 學)이 소림에 있었으니 그야말로 중원무학의 보고(寶庫)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소림의 역사는 곧 무림의 역사이기도 했다. 지금으로부터 칠백 년 전(七百年前). 희대의 대마두였던 혈세천존(血世天尊)이란 자가 있었다. 그는 전 무림을 피바다로 만들며 혈세교(血世敎)를 일으켰다. 무림은 그의 장하(掌下)에 신음했다. 그러나 결국 혈세천존도 마지막 소림의 관문(關門)에서 야망이 꺾 이고 무너졌다. 오백 년 전(五百年前)의 역사도 마찬가지였다. 강남북무림(江南北武林)을 완전히 폐허로 만들며 무림사상 최고의 고수라고 자부하던 천극수라대제(天極修羅大帝), 그도 역시 최후 에 가서는 소림의 한 무명고승(無名高僧)에 의해 영원히 진토 속 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는 이백 년 전(二百年前). 섭혼마안공(攝魂魔眼功)과 차녀미심대법(叉女迷心大法)으로 전 중 원의 기라성같은 고수들을 치마폭 아래 굴복시키고 마음껏 희롱했 던 절세의 대마녀 천마교주(天魔敎主) 벽안마희(碧眼魔姬), 그녀 조차도 끝내는 소림 고승의 불심(佛心) 아래 눈물을 뿌리며 이 세 상에서 사라졌다. 소림사는 정도무림의 영원한 기둥이었다. 또한 꺼지지 않는 협골(俠骨)이었으며 그 어떤 폭풍 속에서도 의 연히 줄기를 뻗어가는 정의의 가람이었다. 숭산(嵩山) 소실봉(少室峯). 천 년의 역사를 가진 대소림사는 숭산 소실봉 자체를 불문(佛門) 과 무학(武學)의 성지(聖地)로 만들고 있었다. 수많은 법당(法堂)과 불전(佛殿), 석탑(石塔), 그리고 줄지어 건 립되어 있는 법사....... 소림사의 규모는 방대하기 이를 데 없었 다. 그 중 소림오각(少林五閣)을 이르자면 불심각(佛心閣), 장경각(藏 經閣), 세심각(洗心閣), 법화각(法華閣), 천수각(千手閣)이었고 소림오원(少林五院)으로 불리우는 곳은 달마원(達磨院), 수계원 (授戒院), 계도원(戒導院), 선좌원(禪坐院), 지객원(知客院)이었 다. 소림사의 가장 중요한 요지는 바로 이 오각오원(五閣五院)으로 소 림오각은 전선대(前先代)의 장로 이상의 고승들이 관리하며 소림 오원은 현 장문인(掌門人)과 동배의 대사들이 관장했다. 그 밖에도 삼전(三殿)과 팔당(八堂) 삼십육방(三十六房)이 있었는 데 모두가 뛰어난 소림의 고수들이 관장하고 있었다. 특히 삼전 중에서 나한전(羅漢殿)은 소림사의 중들이 무학을 익히 는 곳으로, 저 유명한 소림백팔나한대진(少林百八羅漢大陳)이 이 곳의 주력이었다. 장엄무비한 소림사. 과연 그 누가 대소림을 넘볼 수 있겠는가? 소림의 역사는 끝없이 되풀이 되는 불경(佛經) 읽는 소리와 법괘 소리로 시작되고 있었다. 불심각(佛心閣). 이곳은 소림 깊숙한 위치에 자리잡은 고색 창연한 건물로 당금 소 림에서 가장 배분이 높은 소림삼성승(少林三聖僧)의 첫째인 천심 선사가 관장하고 있었다. 나이가 모두 백오십 세를 넘겼으며 천심(天心), 천뢰(天雷), 천기 (天機)로 이어지는 소림파 최고 배분의 세 고승은 이미 소림의 일 에 관여하지 않은 지 오래였다. 단지 천심선사는 불심각을, 셋째인 천기선사는 장경각을 담당하고 있는 한편, 둘째인 천뢰선사는 괴이하게 소림 내에서조차 아무 것 도 맡지 않고 소림의 금역(禁域)이라 일컬어지는 자죽림(紫竹林) 속에 은거하고 있었다. 이들 천(天)자 항렬의 삼성승은 현 장문인 현공대사(玄空大師)의 사승(師僧)들이었다. 천심선사는 바로 전대(前代) 장문인이었던 것이다. 불심각의 한 정실(淨室). 삼인의 고승들이 침상을 둘러싸고 앉아 있었다. 침상 위에는 한 명의 백의소년이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하후성(夏候星), 바로 그였다. 그의 안색은 백랍같이 창백해져 있어 핏기라곤 하나도 없었다. 마 치 죽음(死)의 문턱을 이미 넘어서 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세 명의 고승들이 줄곧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중 중앙에 앉아 있는 노승, 그는 이미 불(佛) 그 자체로 보일 만큼 인자하고 장엄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희고 둥그런 얼굴에는 혜광이 감돌고 있었으며 은염이 가슴까지 자라 있었고 백미(白眉)는 귀 밑까지 뻗어 있었다. 더우기 두 눈 은 물처럼 고요했다. 우측의 노승은 주사(朱砂)빛 얼굴에 각이 진 네모 꼴의 위맹한 모 습이었다. 두 눈은 화등잔처럼 활활 타고 있었고 괴팍해 보이는 인상으로 특히 두 팔이 길고 머리가 컸다. 그리고 좌측의 노승은 약간 마른 듯 하나 매우 청수한 용모를 지 니고 있었다. 안색이 다소 창백한 게 흠이라면 흠일까? 그의 두 눈은 끝없는 지혜를 포괄하고 있는 듯 현기가 넘치고 있었다. 이 세 노승은 어찌 보면 오륙십 세로, 또 어떻게 보면 백 세가 훨 씬 넘어 보이기도 하는 신비한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이야말 로 일컫기를 소림삼성승(少林三聖僧)이었으니....... 가운데가 천심선사(天心禪師)요, 우측과 좌측의 두 노승은 각기 천뢰선사(天雷禪師)와 천기선사(天機禪師)였다. 놀라운 일이었다. 강호는 물론 소림의 일까지도 전혀 상관을 하지 않는 삼성승이 한 자리에, 그것도 무명의 소년을 놓고 머리를 맞 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는 실로 믿지 못할 기변(奇變)이 아닐 수 없었다. 왜? 어떻게 하여 하후성이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방안은 침묵에 싸여 있었다. 단지 방안 탁자 위에 피워 둔 조그만 청옥향로에서 푸르른 향연이 피어 올라 청아한 향(香)을 품고 있 을 뿐이었다. 삼성승의 둘째인 천뢰신사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대사형, 이 아이의 몸은 지금 한 구의 시체나 다름 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아직도 손을 쓰길 망설이는 것입니 까?" 그 말에 가운데 앉은 천심선사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천뢰사제, 아직은 때가 아니네. 좀 더 기다려야 되네." 그러나 천뢰선사는 성격이 몹시 화급한 듯 주사빛 안색을 변화시 키며 말했다. "대사형! 이미 사흘이나 기다렸소이다. 현오(玄悟)가 이 아이를 데려온 때와 전혀 차도가 없는데 만약 그러다가 이 아이가 숨이라 도 끊어진다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는 게 아닙니까?" 천심선사는 대답 대신 빙그레 불존(佛尊)의 미소를 지으며 좌측에 앉은 천기선사를 바라보았다. 천기선사는 곧 담담하고 의미 깊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천뢰사형, 지금 이 아이는 마음 속에서 수많은 심마(心魔)와 싸 우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손을 써봤자 그대로 살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천뢰선사는 짙은 눈썹을 찌푸리며 의아한 듯 물었다. "천기사제(天機師弟), 그럼 이 아이를 살리는 것 외에 또다른 목 적이 있단 말인가?" 천심선사는 합장을 한 후 자비롭게 말했다. "천뢰사제, 조금 후면 이 아이는 곧 가사(假死)상태에 들게 되네. 그것은 곧 무심(無心), 무아(無我), 무념(無念), 무상(無常)의 상 태네. 즉 이 상태는 천(天), 지(地), 인(人)이 일치되는 것이나 다름없네." 천뢰선사는 마침내 침묵을 지켰다. 천심선사가 기이한 음성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달마선사께서 열반에 드신 지 천 년이 지나는 동안 수많은 기재 들이 나왔지만 아직 그 누구도 최고무학인 달마역근세수경(達摩易 筋洗髓經) 내의 반야밀다대승신공(般若密多大乘神功)을 십이성(十 二成) 성취한 사람은 없었네." 천뢰선사의 안색이 약간 변하는 것을 보며 천심선사는 합장을 했 다. "그것은 자질이 없어서가 아니라 인연이 없기 때문이었네." "아미타불......." 천뢰선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불호를 외웠다. 천심선사는 침상 위 에 죽은 듯이 누워있는 하후성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저 아이의 몸은 지금 가사상태에 이르러 있으므로 무념무아무상 무심의 경지와 천지인에 도달해 있는 상태네. 거기에 소림의 무상 영약인 대환단(大還丹)을 복용하고 또다시 본문의 개정대법(開頂 大法)을 쓴다면 커다란 영효를 얻을 수 있네." "흐음." "그렇게 되면 전신의 삼백육십오혈맥 내의 온갖 더러움이 씻기고 십이경맥의 유통이 조금도 막힘 없이 흐르게 되어 천하에서 가장 깨끗한 순수지체가 이루어지게 되네." "아!" 천뢰선사는 탄성을 발했다. 그는 한동안 멍하니 있더니 이윽고 탄 식하며 말했다. "정말 대사형의 뜻은 이 우둔한 사제, 영원히 쫓지 못할 것 같습 니다." 천심선사는 빙그레 웃었다. "천뢰사제,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야. 자네는 무공 방면에서 나보 다 훨씬 높지 않은가? 소림사상 본문 칠십이종절예(七十二種絶藝) 를 모두 통달하고 반야밀다대승신공까지 십성(十成) 익힌 자가 자 네 말고 또 누가 있었던가?" 천심선사는 부드럽게 말하며 천뢰선사의 어깨를 잡았다. "앞으로 이 아이의 무공성취와 운명은 모두 자네에게 달렸네, 사 제." 천뢰선사는 두 눈을 감았다. "아미타불......." 그의 주사빛 얼굴에 불현듯 고뇌가 어리자 천심대사는 진중하게 물었다. "사제, 자네는 아직도 그 때 일을 원망하는가?" 천뢰선사는 씁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미 백 년이 지났습니다. 사형, 그 당시 나의 성격이 너무나 거 칠고 살심이 깊었으니... 당시 장문인이시던 대사형께서 녹옥불령 (綠玉佛令)으로 소제를 금제(禁制)하신 것을 어찌 원망할 수 있겠 습니까?" "아미타불......." "어쨌든 간에 백 년 동안 불망헌에 있으면서 모든 것을 잊어버렸 습니다." 천뢰선사의 눈이 더욱 깊숙하게 감겨지자 천심선사는 낮게 불호를 외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조용히 있던 천기선사가 갑자기 입 을 열었다. "아! 사형, 보십시오!" 천심과 천뢰, 두 고승의 시선은 일제히 그가 가리키는 하후성에게 로 향해졌다. 창백했던 하후성의 안색이 평정되었는가 하면 가슴 의 기복이 눈에 띄게 줄고 호흡이 미약해져 있었다. 아니, 거의 숨을 쉬지않는 것처럼 보 이기도 했다. "무(無)의 상태다!" 천심선사는 이렇게 외치고 나서 급히 말했다. "천기! 대환단을!"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천기선사는 즉시 품속에서 조그마한 붉은 옥갑(玉匣)을 꺼냈다. 그는 재빨리 옥갑을 열고 그 속에서 밀랍된 단약을 하나 꺼냈다. 단약. 그것은 크기가 용안(龍眼)만 했다. 천기선사는 조심스럽게 밀랍을 벗겨냈다. 그러자 붉은 단약이 나 타나며 방안은 금세 그윽한 향기로 가득차게 되었다. 천기선사는 멍하니 대환단을 내려다 보며 탄식했다. "열 알 밖에 없던 대환단(大還丹)! 천 년이 흐르는 동안 모두 사 용하고 마지막 남은 하나인데......." 그 말에 천심선사는 다시 자비롭게 웃었다. "허허허허... 천의(天意)를 이룸일세, 사제." 천기, 천뢰선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천기선사는 가사상태에 빠져있는 하후성에게 대환단을 복 용시켰다. 대환단은 하후성의 입에 들어가는 즉시 용해되어 그의 목구멍을 타고 넘어 들어갔다. 천심선사는 담담히 말했다. "천뢰, 이제는 자네 차례일세, 자네의 반야밀다대승신공으로 이 아이의 몸에 개정대법을 시행하여 대환단의 약력(藥力)을 도움과 동시에 임독양맥, 천지인맥을 타통하고 벌모세수(伐毛洗髓), 탈태 환골(脫胎換骨) 시켜 주게." 천뢰선사는 무심한 표정이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침상 곁 으로 다가가 정좌했다. 그의 전신 승포자락이 갑자기 팽팽하게 부풀어 오름과 동시에 주 사빛 얼굴에는 장엄한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는 소림최고의 비학인 반야밀다대승신공을 시전한 것이 었다. 그의 몸 일장(一丈) 둘레에 은은한 현광이 장엄하게 둘러졌 다. 천심선사와 천기선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 보았다. 천뢰선사는 다음으로 두 손바닥을 움직이더니 하후성의 양쪽 가슴 에 장심(掌心)을 밀착시켰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하늘에는 별이 초롱초롱했다.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천뢰선사는 계속 개정대법을 시 행하고 있었다. 그와 하후성의 주위에는 담담한 현광이 계속 감돌 고 있었다. 차츰 천뢰선사의 안색이 탈색되어 가고 있었다. 아울러 그의 이마 에는 땀이 배기 시작했다. 천심선사는 그 사이 몸을 일으켜 창가로 걸어갔다. 그는 별빛이 초롱초롱한 야천(夜天)을 응시했다. 한동안 그 상태 로 침묵을 지키더니 문득 담담한 음성을 흘려내었다. "천기사제, 자네 몇 살인가?" 천기선사는 흠칫하더니 곧 대답했다. "올해로 백육십이 세 입니다." "백육십이 세라... 허허허... 그러고 보니 자네가 소림에 입문한 지도 벌써 백오십년이나 되었군." 천기선사는 의문을 품으며 몸을 일으켜 천심선사 곁으로 가 섰다. 그는 감회 깊은 음성으로 말했다. "소림은 이 사제에게 있어서 그 무엇보다도 귀중한 곳입니다. 음 양절맥(陰陽絶脈)으로 인해 이십 세를 못넘길 저에게 생명을 불어 넣어준 곳입니다." "그렇군. 아미타불......." "비록 아직까지도 음양절맥 때문에 무공을 조금도 익히지 못했으 나......." 그가 말을 흐리자 천심선사는 낮은 웃음을 발했다. "허허허... 천기사제, 나는 사제가 소림의 그 누구보다도 유능함 을 알고 있네. 비록 자네가 무공을 시전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장 경각(藏經閣)에 있는 천팔백육십 종의 소림 무학을 모두 암기(暗 記)하고 있으며 또한 각종 기관, 역리(易理), 천문(天文), 진법 (陳法) 등 천하무불통지(天下無佛通知)이니 어찌 타인(他人)이 따 를 수 있겠는가? 실상 오늘날의 소림이 이토록 강건해진 것도 자 네의 지혜 덕분이 아닌가?" 그들의 등 뒤에서 가라앉은 음성이 들렸다. "만약 사제가 무공을 익혔다면 지금쯤 저를 훨씬 능가했을 것입니 다." 천심, 천기선사는 동시에 몸을 돌렸다. 천뢰선사가 땀을 닦고 있 는 것이 보이자 천심선사는 급히 물었다. "사제, 그 아이는?" 천뢰선사는 창백한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성공했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이 아이 스스로에게 달렸습니다. 이 아이의 능력이 대사형의 짐작과 같다면 장차 소림 제일의 고수 가 될 것입니다." "소림제일!" "소림사상 최고 고수로 말입니다." 세 성승의 눈길은 일제히 하후성에게로 향했다. 그들의 눈에는 기 대와 갈망, 그리고 염원 등이 짙게 어려 있었다. 천심선사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천뢰, 천기사제, 저 하늘을 보게." "무슨 기운이라도?" "별이 아름답지 않은가? 그런데 저 암천(暗天)의 한 곳에서 천혈 성(天血星)을 중심으로 오대마성이 떨어졌네." "오오!" "엄청난 위난이 무림에 닥칠 것이네. 무림사상 전무후무한....... 이제 그 모든 것은 저 아이에게 달렸네. 저 아이에게......." 천뢰, 천기선사의 안색이 일제히 굳어졌다. 그들의 눈은 아득한 천공(天空) 중에 명멸하는 수많은 성좌로 향해졌다. 하후성. 그는 여전히 정신을 잃고 있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그의 전신에 서는 은은한 신광이 감돌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 대소림사 제1권 제4장 소림(少林)에 입문(入門)하다 -1 ━━━━━━━━━━━━━━━━━━━━━━━━━━━━━━━━━━━ 빙폭(氷瀑). 차라리 하나의 거대한 얼음기둥이라 해도 좋았다. 폭이 오 장(五丈), 높이가 근 사오십 장에 달하는 거대한 폭포가 혹한으로 인해 얼어붙어 있었다. 우르르릉-- 쏴-- 아! 빙폭 사이로 채 얼지 않은 물이 굉음을 내며 쏟아져 내려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비폭(飛瀑)으로 인해 주위에 자욱한 물안개와 얼 음가루가 휘날렸다. 이월(二月) 말이었다. 장소는 숭산 서북 쪽의 한 심곡(深谷). 세차게 쏟아지는 빙수 아래 한 소년이 가부좌를 튼 채 전신으로 폭포수를 맞고 있었다. 십오 세 소년, 그는 준수하고 영민하게 생겼으며 벗은 몸매는 약 간 수척해 보였다. 쏴-- 아!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에 긴 머리칼이 그의 상반신을 덮었으며 온 몸은 퍼렇게 얼어 있었다. 혹한이 최대로 기승을 부리는 이월에 그것도 빙폭에 앉아 폭포수를 맞고 있었다. 그러나 보통사람은 엄두도 못낼 일을 해내면서도 소년의 얼굴에는 전혀 고통의 빛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바로 다름 아닌 하후 성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고통이 보이지 않는 대신 온갖 번뇌(煩惱)가 얽혀 어지럽게 일그러져 있었다. 지금 그의 머리 속에는 과거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고 있었다. 일곱 살 때의 부친과의 이별과 천년고목에서 부친 하후연을 기다 리다 영원한 벗 독고황을 만난 일, 그리고 어느 폭설이 내리던 날 그가 유일하게 의지하던 할아범이 죽은 일....... 어디 그뿐인가? 긴 세월만에 돌아온 부친 하후연의 죽음과 독고황 과의 기약없는 이별 등 수많은 상념이 그의 머리를 어지럽게 스쳐 지나갔다. 그런 기억들을 껴안고 마침내 폭설 속에서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 어 버렸던 것까지도....... 그러나 어느 날 하후성은 깨어났고 그 때 그의 곁에는 한 명의 인 자해 보이는 노승(老僧)이 앉아 있었다. 구순(九旬)이 넘어보이는 노승, 그는 바로 현 소림사의 사십이 대 장문인(掌門人)인 현공대사(玄空大師)였다. 현공대사는 망연자실하여 의식의 미궁(迷宮) 상태에 놓여있는 하 후성에게 모든 사실을 알려 주었다. 일대의 대선승 천심선사(天心禪師)의 예언으로 소림의 현오대사가 그를 데려온 일, 그리고 삼성승이 그를 소림제일 고수로 키우기 위해 마지막 남은 대환단을 복용시키고 개정대법을 시행하여 탈태 환골 시킨 일 등. 결국 하후성은 그 모든 얘기를 듣고 오히려 더욱 더 멍한 상태가 되어 버렸다. 너무나도 큰 운명의 시련과 갑작스런 변화가 그로 하여금 허탈 상태로 접어들게 했던 것이다. 현공대사는 그 시기에 그에게 잠언(箴言)을 전해 주었다. - 소시주, 인생을 살다보면 수많은 과정을 겪게 되는 법이오. 그 과정 중에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의 칠정(七情)을 두루 거치면서 드디어 참된 하나의 인간으로 성숙되는 것이오. 슬픔과 비탄에 빠져 그것을 벗어나지 못함은 의지가 부족한 탓이오. 참된 인도(人道)에 이르려면 반드시 그 어떤 타격이라도 딛고 일어서야 만 하는 것이오. 불가(佛家)에서는 모든 인간의 감정과 욕망을 버 려야만 참된 나(眞我)를 얻을 수 있으며 해탈할 수 있다고 했소. 칠정오욕(七情五欲)과 백팔번뇌(百八煩惱)를 물리쳐야만 득도할 수 있는 것이오. 하후성은 빙폭에 앉아 마음 속으로 부르짖고 있었다. '아버님! 할아범! 황(皇)!' 그러나 그 누구도 그에게 대답을 주는 자는 없었다. 그의 몸이 눈에 띌 정도로 세차게 경련했다. 마음 속의 고통과 싸 우는 그의 모습은 처절하기까지 했다. 폭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한 암석 위에서는 두 명의 고승이 우뚝 서서 하후성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현 소림의 장문인인 현공과 처음 하후성을 소림에 데 려온 현오대사였다. 미간에 홍점이 나 있는 현오대사는 불호를 외우며 말했다. "아미타불... 저 아이의 마음속에 저토록 많은 번뇌가 있으 니....... 과연 대사부(大師父)님의 염원이 성취될까 걱정이오." 그 말에 현공대사는 만면에 자비로운 미소를 지으며 합장했다. "사형, 며칠 내로 저 아이는 모든 것을 벗어날 것입니다." 기이하게도 소림의 현 장문인인 현공대사는 현오대사에게 사형이 라고 부르고 있었다. 현오대사는 탄식하며 말했다. "장문인의 말씀대로 된다면 얼마나 좋겠소?" 잿빛의 하늘을 응시하는 그의 눈길에 알 수 없는 감회가 어렸다. "장문인, 어쩐지 소승은 저 아이에게 남다른 정(情)을 느끼고 있 소. 아마도 저 아이의 현재 사정이 과거의 소승과 너무나 흡사하 기 때문인 듯 합니다." 현공대사의 얼굴에 착잡한 빛이 어렸다. '아! 사형께서는 아직도 그 여인을 잊지 못하시는군.' 현오대사는 자기를 쳐다보는 현공대사의 시선에 언뜻 홍조를 띄우 며 어색한 듯 웃었다. "허허허... 장문인께 그만 소승의 마음을 내보인 것 같아 부끄럽 소이다." 현공대사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히 말했다. "사형, 마지막 눈이 올 것 같군요." 현오는 다시금 짙은 잿빛을 띈 하늘을 응시했다. 현공이 나직히 그에게 부탁했다. "사형, 계속 저 아이를 살펴 주십시오.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현오는 정중히 합장하며 대답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현공대사도 마주 합장하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러나 불과 두 걸음을 옮겼는가 싶은 순간 그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 것은 놀랍게도 실전(失傳)되었다고 알려져 있는 소림의 유일한 경 공비예(輕功秘藝)인 무흔불화영(無痕佛化影) 신법이었다. 현오대사는 멍하니 그가 사라진 곳을 응시하더니 탄식하며 중얼거 렸다. "아미타불... 진정 멀었도다. 장문사제(掌門師弟)의 불심(佛心)은 나보다 백배로 높으니......." 현오대사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중얼거렸다. "아아! 대사부의 혜안이 얼마나 높으신가? 사제를 장문인으로 내 세우신 혜안 덕분에 소림은 영원할 것이다." 눈발이 희끗희끗 떨어지기 시작했다. 현오대사는 흩날리기 시작하 는 눈발을 맞으며 깊은 감회에 젖었다. 과거의 추억들이 머리 속에 삼삼히 피어 올랐으나 곧 그는 고개를 흔들며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이미 육십 년이나 지난 아득한 과거의 일인 데......." 자탄하는 그의 두 눈에는 흐릿한 안개가 어렸다. "빈승에게 불심이 얕다고 말해도 좋다. 그러나 진정 그 일만은 죽 는 순간까지도 잊지 못할 것이다." 눈(雪). 눈이 점점 쏟아지지 시작했다. 현오대사는 쏟아지는 눈발을 바라보며 문득 외쳤다. "눈이여, 펑펑 쏟아져라. 그때처럼......." 현오(玄悟). 과연 그에게 무슨 깊은 사연이 있길래 백 세가 넘도록 번뇌를 떨 치지 못하고 이토록 상심하는 것일까? 결국 그 번뇌로 인해 그는 삼성승의 대제자임에도 불구하고 소림의 대통을 받지 못하고 사제 에게 장문인 자리를 넘기지 않았던가. 현오대사의 암울한 시선은 빙폭 속에 정좌하고 있는 하후성에게로 옮겨졌다. 그러나 곧 그의 눈에 감탄의 기색이 어렸다. "아!" 현오대사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발했다. 지극히 평정하게 가라앉은 하후성의 안색에는 무념무아무심무상 (無念無我無心無常)의 일체감(一切感)이 나타나고 있었다. "아! 저럴 수가......." 현오대사는 노안에 격동을 실으며 부르짖었다. "성공했구나!" 수계원(授戒院). 이곳은 소림의 승려로 입문하는 자에게 삭발을 하고 계(戒)를 내 리는 곳이다. 수계원은 지금 엄숙한 분위기였다. 수계원의 상 餠〈 소림의 현 장문인인 현공대사가 엄숙하게 앉아 있었고 그의 뒤에는 소림의 막강한 고수인 사대금강(四大金剛)이 신상처럼 버티고 있었다. 또한 그의 앞에는 소림오원(少林五院)의 현자(玄字) 항렬 원주(院 主)들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달마원주(達摩院主) 현오대사(玄悟大師), 수계원주(授戒院主) 현 암(玄岩), 계도원주(戒導院主) 현각(玄覺), 선좌원주(禪坐院主) 현광(玄光), 지객원주(知客院主) 현정(玄正). 그들은 당금 소림의 주축이랄 수 있었다. 그 밖에 수계원에는 십팔나한(十八羅漢)을 비롯하여 소림의 고수 들이 열을 지어 서 있었다. 수계원의 원당 중앙에는 하후성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의 표정은 완전히 담백무심(淡白無心)했다. 둥! 어디선가 북소리가 울렸고 현공대사가 장엄한 음성으로 말했다. "소시주, 그대는 이제 모든 번뇌를 씻었는가?" 하후성은 담담히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현공대사는 자애스런 미소를 지어보인 뒤 수계원주를 불렀다. "현암사제." "네!" 수계원주 현암대사는 합장을 하며 일어섰다. "원주는 수계원의 율법에 따라 저 시주에게 계를 내리고 삭발을 하시오." 현공대사의 말에 수계원주 현암대사는 서서히 걸어 하후성의 앞으 로 갔다. 그리고 그는 손가락을 펴 하후성의 머리에 얹었다. "시주, 소림의 입문을 후회하지 않는가?" "네." "불문(佛門)은 곧 사바세계를 벗어나는 일이다. 세속의 연(緣)을 끊겠는가?" "네." "불문오계(佛門五戒)와 소림십계(少林十戒)를 지키겠는가?" "네." 하후성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아울러 그의 표정은 물처럼 담담했 고 음성은 가라앉아 있었다. "그럼 계(戒)를 받아라." 현암대사의 입술이 움직였다. 그것은 전음입밀(傳音入密)로, 본시 부터 소림의 계는 본인에게만 전달하는 것이 전통이었다. 조용히 이를 듣는 하후성의 얼굴이 엄숙하게 굳어졌다. 이윽고 현암대사가 뒤로 물러나며 외쳤다. "정혜(丁慧)." "네, 원주님!" 낭랑하고 힘찬 음성과 함께 십팔나한 중에서 젊은 승려 한 사람이 걸어나왔다. 그는 이십여 세쯤 되어 보였는데 청수한 용모에 두 눈에는 혜지(慧知)가 감도는 비범한 중이었다. 그는 양손에 쟁반과 서슬이 푸른 비수(匕首)를 받쳐들고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부름을 받자 비수를 들고 하후성의 곁에 섰다. 그는 먼저 상단의 현공대사와 오원주를 향해 절을 하고는 하후성 의 머리를 비수로 삭발하기 시작했다. 스슥, 스스슥....... 맑은 음향과 함께 하후성의 긴 머리칼이 속속 바닥으로 잘려져 떨 어졌다. 하후성은 두 눈을 스르르 감았으나 표정에 일점의 변화도 없었다. 그의 무릎에 떨어지는 머리칼은 잠시 전만 해도 그의 속세를 상징 하던 번뇌의 상징이었다. 이른바 그의 과거와 현재를 잇던 인연의 머리칼이 속속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 광경에 상단에 앉아있던 현공대사는 물끄러미 하 후성을 바라보다 내심 탄식했다. '과연 대사부님의 말씀대로다. 저 아이는 불문과 인연이 없다. 그 러나, 그러나.......' 현공대사는 합장을 했다. 그의 얼굴에 언뜻 아쉬움의 빛이 스치는 사이 하후성의 머리는 모두 삭발되었다. 파르란 머리가 드러나고 하후성은 마침내 승인(僧人)이 되었다. 그의 마음이 어떤 색채로 변해 있을지 그것은 오직 그 자신만이 알 일이었다. 현공대사는 장엄한 음성으로 말했다. "소사제(少師弟), 너의 법호는 오늘부터 현수(玄修)다." '현수(玄修).' 하후성은 나직히 되뇌었다. 그의 준미한 눈썹 끝이 부르르 떨렸 다. 현공대사가 다시 장중하게 말했다. "소사제의 소림입문을 진정으로 축하한다." 하후성. 과연 그는 완전히 불제자가 된 것인지....... 하후성의 무심한 얼굴은 차츰 더 무감동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불심각(佛心閣). 소림제일각(少林第閣)이라고도 부른다. 불심각의 선방(禪房)에 소림제일의 선승인 천심선사가 포단을 깔 고 단정히 앉아 있었고 그의 맞은 편에는 하후성, 이제는 머리를 깎고 소림에 입문한 현수(玄修)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계속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현수의 얼굴은 고요하고 평정하게 가 라앉아 있었다. 게다가 파르라니 깎은 머리가 더욱 더 정적인 느 낌을 주었다. 천심선사는 인자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 보며 물었다. "현수, 지금의 심정은 어떠한가?" 현수는 고개를 숙이며 공손히 대답했다. "그저 담담할 뿐입니다." 천심선사는 빙그레 웃으며 다시 물었다. "현수, 그대는 왜 노납이 그대를 불문에 입적시켰으면서도 머리에 계인을 새기지 않았는지 아는가?" 현수가 대답을 대신하듯 의아한 표정을 짓자 천심대사는 탄식하며 말했다. "안타까운 일이나 그대는 불문과 인연이 없구나." "무슨 말씀이온지......." "허허허... 세월이 흐르다 보면 그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왜?" 현수는 가슴에 의문을 품으며 물었다. "왜 그대를 소림에 입문시켰느냐 말이지? 허허허... 그것은 불존 (佛尊)의 뜻이다. 천혈성(天血星)과 오대마성(五大魔星)을 막기위 한......." 현수는 더욱 의혹을 금치 못했다. '내가 소림에 입문하는 것이 천기의 영향 때문이란 말인가?' 그의 의문이 더이상 계속되기 전 천심대사의 담담하고 인자한 음 성이 들렸다. "현수, 앞으로 사흘간 너의 선방에서 푹 쉬어라. 그리고 그 다음 날부터 그대는 무림 입문에 들어간다." 현수의 안색이 굳어졌다. "소림무공은 천하무공(天下武功)의 근본(根本)이다. 중원에서 가 장 광범위한 무공이다. 속세인들이 소림무공을 운운하나 그들은 진정한 소림무공의 백 분지 일도 모르고 있다." '아!' 현수는 비록 표정은 변치 않았으나 내심 탄성을 금치 못했다. 천심대사는 담담하면서도 엄숙하게 말을 이었다. "현수, 소림에서 가장 무공이 강한 사람은 바로 천뢰(天雷)다. 그 는 소림사상 최강이다. 또한 한 사람이 완전히 터득하기가 불가능 한 소림 정종의 칠십이종절예조차도 유일무이하게 모두 터득했다. 그것은 바로 천뢰 그만이 가능한 일이다." "아!" "너는 천뢰대사에게 무공을 전수받을 것이다."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한은 삼 년이다. 그 삼 년 사이에 너는 그에게 칠십이종절예를 모두 익혀야 한다." 현수의 두 눈에서 점차 신비한 광채가 솟아나왔다. 소림무공입문, 기실 얼마나 가슴 설레이는 일인가? 현수의 가라앉 았던 가슴은 다시 새롭게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불망헌(佛忘軒). 그곳은 소림사의 금지로 알려진 자죽림(紫竹林) 내에 있는 것으 로, 역시 대나무로 만들어진 한 채의 죽헌(竹軒)이었다. 본래 자죽림은 소림 창건 이래로 시작하여 근 천여 년에 걸쳐 현 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말하자면 과거 달마선사가 천축에서 가져 온 자부경죽(紫府經竹)을 심은 것이 오늘에야 비로소 울창한 죽림 으로 발전된 것이다. 자죽림 속에는 굵기가 한 아름이 넘는 엄청난 대나무도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대나무 전체가 자색(紫色)을 띄고 있으며 단단하기가 강철같아 웬만한 도검(刀劍)에는 조금도 상하지 않았다. 소림의 승려들은 이곳의 자부경죽으로 죽장(竹杖)을 만들어 쓰기 도 했다. 그런데 소림에서는 왜 이 자죽림을 금지로 정했을까? 그 이유는 자죽림 안에 불망헌이 있기 때문이었다. 불망헌이란 바로 소림에 큰 죄를 지었으나 신분이 지고(至高)한 중을 역대 장문의 령(令)인 녹옥불령으로 가두어 참회토록 하는 곳이었다. 울울한 자죽림의 중심부에 대나무로 엮어진 불망헌은 허름하고 을 씬년스럽게만 보였다. 불망헌이 지어진 지 수 백 년이 지나도록 손질 한번 하지 않았으니 이는 당연한 노릇이기도 했다. 휘-- 이- 이-- 잉! 삭풍이 불면 자죽림에서는 괴이한 음향이 마치 지옥아수라천 악귀 의 호곡인 양 음산하게 울렸다. 자죽으로 엮어진 불망헌의 한 방. 바닥과 벽 천장까지 모두 대나무였고 간단한 탁자나 의자 침상 등 기물도 자죽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죽탁(竹卓) 위에는 고색(古色) 완연한 향로가 있었는데 향로에서 파란 향연이 피어 오르며 방안을 진동시켰다. 방 안의 죽침상 위. 그곳에는 소림삼성승 중 가장 괴팍하고 괴이한 천뢰선사가 낡은 마의승포를 입고 가부좌를 튼 채 앉아 있었다. 주사빛 얼굴에 화등잔같은 고리눈, 깔깔하게 뻗친 눈썹과 턱수염 은 그의 괴팍한 성품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하후성, 즉 현수는 침상 아래 무릎 꿇고 앉아 있었다. 천뢰선사는 디룩디룩 눈알을 굴려 현수의 몸 이곳 저곳을 살펴보 았고 그 때마다 그의 눈에서는 전광(電光)같은 빛이 번쩍이고 있 었다. 그는 다소 거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현수, 너는 대사형으로부터 노납의 성격을 모두 들었겠지?" "들었습니다." 현수의 대답에 천뢰선사는 까칠한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노납은 대사형처럼 불심이 깊지도 않고 세째처럼 생각이 넓지도 않다." 그의 말에는 정감이라곤 없었다. "노납은 백칠십 세가 되도록 불경의 참뜻도 모른다. 또한 평생에 단 한 권의 책도 끝까지 읽어본 적도 없다. 물론 읽으려고도 해보 지 않았다." 현수는 묵묵히 그의 말을 듣기만 했다. 어느 정도 천뢰선사에 대 한 말은 들었지만 예상을 넘는 그의 괴이함에 다소 놀라울 뿐이었 다. "노납은 단지 불존(佛尊)만 알 뿐 그 외에는 아무 것도 모른다." 말과 동시에 천뢰선사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방안을 서서히 걸으 며 다시 말을 이었다. "노납이 십 세 때 입문하여 백칠십 세가 되는 지금까지 이곳에서 배운 것은 단지 불존과 소림의 무학 밖에 없다." 천뢰선사는 말을 마치자 전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현수를 노려보며 엄숙하게 물었다. "노납이 무공을 가르치는 방법은 가혹하고 잔인할 것이다. 너는 그것을 모두 참아낼 자신이 있느냐?" 현수는 고개를 들어 담담히 반문했다. "사숙께서는 산을 아십니까?" 갑작스런 물음에 친뢰선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반면, 현수 는 신비롭고 고요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는 어려서부터 산을 좋아했습니다. 대자연(大自然)의 어떤 변 화 속에서도, 수많은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산은 언제나 산입 니다." 현수의 두 눈은 물처럼 고요했으며 표정 역시 단아하기만 했다. 오히려 그를 쳐다보는 천뢰선사의 안색이 미미하게 변화를 일으켰 다. '이 녀석은 진골(眞骨)이다. 이런 놈은 가히 백년지재(百年之才) 로 능히 성불할 자질을 갖추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대사형은 이 녀석이 불문과 인연이 없다는 것인가?' 내심 이렇게 중얼거리는 천뢰선사의 마음 속에는 차츰 현수의 존 재가 자리잡아 가기 시작했다. 그는 현수의 앞으로 가 침상에 걸 터앉으며 물었다. "현수, 너는 노납이 어떤 사람인 줄 아느냐?" "모르옵니다." 천뢰선사는 서서히 감개 어린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과거 백수십 년 전 강호에 마애천불(魔涯天佛)이란 중이 나타났 는데 그는 악(惡)을 도저히 참아내지 못하는 과격한 성품을 갖고 있었다. 그 결과 그는 정(正)과 사(邪)를 막론하고 눈에 뜨이는 악인들이라면 가차없이 죽였고 세인들은 그 보기를 마치 귀신 보 듯 했다." 그는 입술 꼬리를 말아 기이하게 웃었다. "후후. 마애천불의 무공은 감히 따를 자가 없었고 그의 과격하고 잔혹한 성품 때문에 사도(邪道)는 물론 위선을 자행하던 정도(正 道)조차도 그를 보면 꽁무니를 감추기 바빴다." '혹시?' 현수는 의문을 느꼈으나 입을 열지 않았고 천뢰선사의 말은 계속 되었다. "마애천불의 손에는 단 하루도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그의 손에 떨어져 나간 정사무인의 수가 근 천 명에 가깝게 되자 사람들은 그를 혈불(血佛)이라고 불렀다." 현수는 내심 짚히는 바가 있었다. '혈불, 마애천불... 그것은 혹 사숙님 자신의 옛 명호가 아니었습 니까?' "후후후... 결국 보다 못한 그의 대사형(大師兄)이 문파의 최고 권위인 녹옥불령(綠玉佛令)으로 그를 금제(禁制)하여 이곳 불망헌 에 백 년 동안 가두었지." 현수는 탄식하며 물었다. "아... 그 분은 그렇다면 백 년 동안 한 번도 불망헌 밖으로 나가 지 못했습니까?" 천뢰선사의 두 눈에 회한이 어렸다. "그렇다. 백 년 동안 그는 이곳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 다. 불과 일 년전에야 비로소 백 년 금제가 풀렸다." "아!" "하하하... 그 백 년이 흐르는 동안 마애천불은 성격도 야심도 모 두 꺾이고 말았다. 모두......." 방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야 천뢰선사의 표정은 차츰 평정으로 되돌 아왔고 그는 말을 돌려 이렇게 묻고 있었다. "현수, 너는 본문의 칠십이종절예가 어떤 것인지 아느냐?" 현수는 공손히 대답했다. "대강 들었습니다." 천뢰선사는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자, 밖으로 나와 봐라!" "네." 자죽림 가운데 공지(空地). 그곳은 연무장(練武場)으로 손색이 없는 곳으로 현수는 바닥에 무 릎을 꿇고 있었고 천뢰선사는 그의 앞 일 장(一丈)거리에 우뚝 서 있었다. 천뢰선사는 굵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본문 칠십이종절예는 달마성승(達摩聖僧)께서 역근세수경(易筋洗 髓經)을 창안하신 이후 천년이 흐르는 동안 수많은 소림의 고승들 이 참오 끝에 만들어내신 것이다." 현수는 그의 말을 단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새겨 들었다. "그러나 천년이 흐르는 동안 지금 칠십이종절예 중 삼십여 종 이 상이 밖으로 흘러 나갔다." 천뢰선사는 약간 열기 띈 어조로 말했다. "그것은 진본(眞本)이 아니므로 진정한 소림무예가 아니다." 천뢰선사는 칼칼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백보신권(百步神拳), 이는 소림 십 대 장문인이신 각비대사(覺非 大師)께서 창안하신 것으로 그 분은 황산 천도봉(天都峯)에서 백 보(百步) 밖의 청석비(靑石碑)를 가루로 만들어 전무림을 경동시 켰다." "아......." "그러나 지금은 백보신권이라면 무림의 삼류 고수도 할 줄 아는 평범한 무예가 되었다." 천뢰선사의 음성은 점점 더 짙은 열기를 띄어갔다. "그들은 말한다. 칠십이종소림비예가 이럴진대 나머지는 알만하다 고, 그리고 그들은 가증스럽게도 백보신권을 흉내 내면서 소림을 함부로 비웃고 있다." 천뢰선사는 문득 힘차게 말했다. "자! 현수, 보아라. 이것이 바로 진정한 소림비예 백보신권이다!" 그는 즉시 오른손 주먹을 쥐었다가 앞으로 가볍게 뻗었고 놀라운 위력이 눈 앞에 펼쳐졌다. 꽈르르르릉! 천지를 뒤흔드는 뇌음과 함께 자죽림은 일시에 오십 장(五十丈) 밖까지 완전히 평지가 되고 말았다. 그 뿐이 아니었다. 오십 장 밖에 있던 거석(巨石)이 어이없게도 가루로 화하고 만 것이었다. "아!" 현수는 그 놀라운 광경에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백보신권의 위력이 이 정도일 줄이야!' 한 반석 위. 일노일소(一老一少)의 중이 가부좌를 튼 채 마주보고 앉아 있었 다. 네모진 얼굴에 주사빛 피부, 화등잔같은 고리눈, 고슴도치 같이 빳빳한 수염의 괴승. 그는 바로 천뢰선사였고 맞은 편의 소년승은 바로 현수였다. 천뢰선사는 번뜩이는 눈으로 현수를 쏘아보며 엄숙하게 말하고 있 었다. "소림의 최고무공은 달마역근세수경에 적힌 반야밀다대승신공(般 若密多大乘神功)인데 이 신공은 가히 탈인간의 개세신학(蓋世神 學)이라 할 수가 있다." 현수의 준미한 얼굴이 엄숙하게 굳어졌고 천뢰선사는 두 눈에 섬 전같은 광망을 발하며 계속 입을 열었다. "반야밀다대승신공을 익히기는 실로 성불하는 것 만큼이나 힘들 다. 더구나 대성하기 위해서는......."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갓 태어난 아기 때부터 시작해야 한다. 즉, 갓 태어난 아기를 근 이백 년의 공력을 가진 내가고수(內家高手)가 개정대법으로 탈태 환골(脫胎換骨)시킨 다음 천여 가지의 약초를 배합한 물에 천 일 을 담궈 그 후로 백 년간을 고련해야만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 않 고는 영원히 십이성(十二成)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 '으음. 그렇다면 나는 이미 불가능하지 않은가?' 현수의 표정은 실망으로 조금 변하였다. 천뢰선사는 그의 내심을 읽은 듯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노납은 백오십 년 동안 연구한 끝에 마침내 또다른 길이 있음을 알아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것은 바로 삼십육 개의 단계를 거친 천 일의 수련방법이다. 다 만 이 방법은 정도에는 없었던 것으로, 지극히 위험하여 자칫하면 주화입마(走火入魔)는 물론 생명까지도 잃게 된다. 그러나 이 방 법이 아니고서는 영원히 반야밀다대승신공의 완전한 경지에 도달 할 수가 없다." "으음." "현수, 너는 앞으로 이 방법대로 신공을 수련해야 한다. 이미 제 일 단계는 깨쳤다. 노납이 너의 몸에 개정대법을 시행하여 탈태환 골시켰으며 소림 희대의 성약인 대환단으로 너의 내공은 이미 백 년 수위(百年水位)에 이르러 있다." 그 말에 현수는 흠칫 놀랐다. '내가 백 년 공력을?' 천뢰선사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엄숙하게 말했다. "이제부터 너는 이 단계부터 시작한다. 천 일(千日), 앞으로 천 일간의 고련(苦練)에 들어간다!" 실로 피눈물 나는 수련이었다. 정신이 산산조각으로 갈라지는 고 통과 고통의 연속이랄까? 그의 살갗은 펄펄 끓는 약물 속에서 수십 번이나 처참하게 벗겨 졌고 벗겨진 살이 채 아물기도 전에 천뢰선사의 무자비한 철편(鐵 鞭)이 허공을 가르며 그의 살을 찢었다. 구절항마철편(九節降魔鐵鞭)이라면 사실 강호의 평범한 일반 병기 였다. 그러나 그것이 일단 천뢰선사의 수중에서 휘둘러졌을 때는 단지 그 경풍에 닿기만 해도 거목이 쓰러지고 암반이 가루가 되었 다. 그 무시무시한 구절항마철편으로 현수는 매일 일천 번씩 맞아야 했다. 게다가 때로는 지하 삼백 장 깊이의 빙굴 속에서 꽁꽁 얼어 사흘 을 보낸 뒤 얼음이 채 녹기도 전에 화로 속에서 지글지글 타는 고 통도 감수해야 했다. 어디 그뿐인가. 수천 개의 금침이 다시 그의 온 몸을 고슴도치로 만들었다. 실로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고통들이 온통 그를 에워 싸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천뢰선사의 장엄한 말이 그의 정신을 일깨우곤 했다. "참아라. 참아야 한다. 이 수련이 시작된 이상 노납조차 중단시킬 수가 없다. 중단하면 너는 영원히 폐인이 되고 만다." 현수는 참고 또 참았다. 고통이 극에 이를 때는 일생의 벗 독고황 의 얼굴을 떠올리기도 하면서 거듭되는 고련을 견디어 가고 있었 다. 어느덧 이백 일(二百日)이 지났다. 그동안 현수는 쌀 한 톨, 물 한 모금 먹지 않았다. 단지 십 일마 다 주는 한 알씩의 환약(丸藥) 밖에 먹은 것이 없었다. "청신정혈보환(淸身精血補丸) 만을 먹으며 온 몸의 온갖 더러움을 모두 제거해야만 한다. 곡기를 끊고 물 한 방울 먹어서는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공(功)이 수포로 돌아간다!" 천뢰선사의 말은 더욱 지독한 허기와 갈등을 불러 일으킬 뿐으로, 그는 정신이 어지럽고 온 몸의 맥이 다 풀리곤 했다. 그러는 가운데 다시 이백 일(二百日)이 흘렀다. 그는 잠도 자지 못했다. 매일 밤을 수마(睡魔)와 싸워야 했으며 어쩌다 깜빡 졸기라도 하면 천뢰선사의 철편이 여지없이 그의 전 신을 강타했다. 끔찍하도록 무자비한 훈련이었다. 극한의 고통을 견디다 못해 까무라치고 만 적도 있었다. 그러나 쓰러진 몸뚱이 위로 찬물이 쏟아지는가 하면 다시 구절항마철편이 날아와 그를 깨웠다. 이백 일(二百日)이 그렇게 하여 또 지나자, 이전 것까지 도합 육 백 일(六百日)이었다. 실로 겁난의 세월....... 이제는 그도 더이상은 고통을 느끼지 않 게 되었다. 펄펄 끓는 약물도 그리 뜨겁게 여겨지지 않았으며 데인 살도 하루 면 멀쩡하게 아물어 버렸다. 그런가 하면 그 무서운 구절항마철편의 세례에도 그의 몸에는 단 한 줄기 혈흔(血痕)만이 남을 뿐이었고, 금침이 날아와 박혀도 채 일 각이 안되어 저절로 빠져 버렸다. 이는 정녕 기이한 변화였으나 막상 현수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사실을 미처 깨닫기도 전에 보다 더 혹독한 고통들이 시시각각 닥쳐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수의 인내는 실로 초인간적이었다. 인간이 감당할 수 있 는 한계를 벗어난 고통을 그는 신음소리 한 번 없이 잘도 참아내 고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끝없는 자신과의 투쟁일런지도 몰랐다. 자아(自我) 와의 처절한 싸움....... 이를 느낀 천뢰선사는 지극히 감동했고 마침내 현수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평생 그 누구에게도 정을 주어본 적이 없는 괴승, 그가 바로 천뢰였다. '노납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대사형 천심(天心)이다. 가장 감탄 한 사람은 세째 천기(天機). 그러나 이 아이는.......' 현수를 향하는 그의 손길에는 어느 때부터인지 보이지 않는 따뜻 함이 배어 있었다. 그것은 평생을 외곬으로 괴벽하게만 살던 천뢰 선사의 살벌한 가슴 속에 알게 모르게 싹튼 정이었다. 다만 당사 자인 그가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 그러나 이심전심(以心傳心)일까? 처절한 고통 속에서도 천뢰선사를 바라보는 현수의 두 눈에는 언 뜻언뜻 미소가 어렸다. '사숙님, 제자는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반드시....... 사숙님 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성공할 것입니다!' 현수의 웃음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동안 다시 이백 일이 흘러 팔백 일이 지났다. 그는 삼십육 관 중에서 드디어 삼십사 관(三十四關)을 넘겼다. 이제는 단지 이 관 (二關)의 단계만을 남겨 놓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남은 이 관 이야말로 지금껏 거쳐온 삼십사 관을 모두 합친 것 만큼 힘든 것 이었다. 현수도 변했다. 그의 골격은 이제 연약한 소년의 그것이 아닌 튼 튼한 강골로 변해 있었다. 비록 살이 거의 없이 깡마른 몸집이었으나 뼈대와 근육은 오히려 조화의 미(美)를 물씬 풍길 정도로 완벽하게 성숙되어 있었다. 얼굴 또한 지극히 평정담백해져서 득도한 선승(禪僧)의 얼굴도 그 와 같지는 못할 듯 했다. 누구도 그 내심을 읽을 수가 없겠거니와, 더우기 옥으로 깎은 듯 이 고운 그의 용모에서 감히 짐작이나 하겠는가. 그가 이토록 험 난한 고통 속을 헤쳐 나왔으리라는 것을....... 천뢰선사(天雷禪師). 야색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는 유난히 수심이 어려 있었다. 그는 천공에 걸린 달을 바라보며 부르짖었다. '만약 저 아이가 나머지 이 관을 통과치 못하고 실패한다면... 아 니,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다. 노납은 스스로 익힌 반야 밀다대승신공을 전부 그에게 주입하더라도 반드시 성취시키고 말 테다.' 그것은 천뢰의 진심이었다. ■ 대소림사 제1권 제5장 색(色)의 관문(關門) -1 ━━━━━━━━━━━━━━━━━━━━━━━━━━━━━━━━━━━ 태실봉(太室峯). 소실봉(少室峯)과 함께 숭산이대봉(崇山二大峯)으로 알려진 수려 웅장한 봉우리였다. 초여름이다. 울창한 수목이 태실봉 전체를 푸르게 뒤덮고 있었다. 하남(河南)의 여름이 힘차게 다가온 것이다. 태실봉 정상에 한 영준한 청년중이 우뚝 서 있었는데 그는 바로 현수였다. 완전한 청년으로 성장한 그는 임풍옥수(臨風玉樹), 곧 바람 앞에 선 옥나무와 같이 비범하고 준미했다. 현수는 물같이 고요하고 신비한 눈으로 봉우리 아래의 선경과 수 해(水海)를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제 이틀 후면 삼십육 관 중 가장 험난한 이 관을 향한 이백 일 수련에 들어간다. 이 관은 험난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어, 그동안 통과한 삼십사 관 모두를 합친 것보다 힘들다고 그랬지.' 현수의 표정은 굳은 의지로 엄숙해졌다. '그러나 두려움은 없다, 오직 이제 기다릴 뿐. 남은 이 관을 기필 코 통과하여 세 분 성승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할 즈음 등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현수는 흠칫했으나 몸을 돌리지는 않았다. 한가닥 여인(女人)의 음성이 바로 가까이에서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여봐요. 스님, 말 좀 묻겠어요." 목소리....... 그것은 한번 들으면 영원히 잊지 못할 정도로 너무나 매혹적이었 다. 아니, 거의 환상에 가까울 정도로 아름답고 고혹적인 음성이 었다. 현수의 승포자락이 가볍게 흔들렸다. 아울러 그는 이렇게 생각했 다. '이런 목소리의 여인이라면 모습도 아름다울 것이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렸고 그의 눈은 곧 한 곳에서 못박힌 듯 정지 되었다. 백의소녀(白衣少女). 그녀는 약 십팔구 세 가량 되어 보였는데 그야말로 미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소녀였다. 특히 머리를 궁장으로 가볍게 틀어올려 학 같이 곱게 뻗은 목선이 유난히 아름답게 돋보이고 있었다. 현수는 그녀를 본 순간 자신도 모르게 내심 부르짖었다. '아름답다.......' 백의소녀는 묘한 양면성(兩面性)을 지닌 미녀중의 미녀였다. 요염절륜함과 순진무구함이 동시에 내포되어 있다고나 할까? 그러 한 미녀란 사실 보기 드문 형이었다. 무릇 요염함이란 욕정(慾情) 을 불러일으키는 사요(邪妖)함을 말하는 것이요, 순진무구함은 세 상의 때가 묻지 않은 순결성을 말하는 것으로써, 이를 테면 이 두 가지의 성질은 전혀 상반된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한 미녀를 두고 양면성을 느낄 수 있다니 이는 매우 불가 사의한 일이었다. "아......." 한순간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탄성을 발한 것은 현수가 아니라 백의소녀였다. 그녀의 꽃 잎같은 입술이 살짝 벌어지는가 싶더니 한동안 다물려지지 않았 다. 그녀 역시 현수의 얼굴을 본 순간 크게 놀란 듯 했다. 옥(玉)으로 깎아 만든 듯 섬세할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 비록 승 포를 입고 있다고는 하나 사실 하후성의 얼굴은 천하미남자(天下 美男子)의 풍모가 아닌가? 두 사람의 눈길은 한동안 서로의 얼굴에 못박힌 채 떠날 줄을 모 르는 듯 했다. 그러나 그것은 실상 아주 잠깐 동안의 일이었다. 현수의 눈길은 금방 평정을 되찾고 무심(無心)해졌다. 황홀한듯 백의소녀를 보던 그의 눈은 이내 나무나 돌을 보듯 담백해지고 만 것이었다. 백의소녀의 눈꼬리가 상큼하게 치켜 올라갔다.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서는 자존심이 와르르 무너지는 듯한 느낌 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그것이 반영되기라도 했는지 그녀의 고혹적 인 신비한 눈에서는 한 가닥 쓰린 곤혹이 스쳤다. 그러나 이 신비한 젊은 중에게 급격히 마음이 끌린 소녀는 갑자기 표정을 바꾸었다. 곧 순결무비하고 천진한 미소가 그녀의 아름다 운 얼굴에 떠올랐다. 그녀의 이러한 변화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기이한 것이었다. 그녀는 옥음으로 말했다. "스님께서는 소림사의 제자이신가 보군요?" 현수는 합장했다. "아미타불... 그렇습니다." 백의소녀는 눈부실 만큼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주위를 쓸어본 뒤 다시 말했다. "숭산(崇山)이 아름답다는 말은 수없이 들었는데 막상 와보니 과 연 명불허전이군요." 현수가 다만 담담한 웃음을 짓자 백의소녀의 아름다운 눈에 이번 에는 요염한 기운이 떠올랐다. 현수는 땅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미처 그것을 보지 못했다. 백의소녀는 교태롭게 말했다. "스님,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들어 주시겠어요?" "아미타불... 말씀하시지요." "저는 숭산이 초행이라 지리에 어두워요. 그러니 안내를 좀 해주 시겠어요." 현수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현재 반야밀다대승신공을 익 히기 위해 천 일 수련을 하는 중이 아닌가? 그런데 어찌 한가롭게 미녀의 길 안내나 할 수 있겠는가? 그는 거절을 하려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백의소녀의 눈을 본 순간 가슴이 크게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백의소녀의 눈에서 신비로운 기운이 무형중에 흘러나와 그로 하여 금 거절을 할 수 없는 느낌을 준 것이었다. 마침내 현수는 응답하고야 말았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시주." "호호호... 고마와요, 스님." 백의소녀의 교태로운 웃음소리가 다시 그의 심금을 뒤흔들어 놓았 다. "스님, 소녀의 이름은 백화미(白花美)예요. 스님의 법호는 어찌 되시나요?" 현수는 담담히 대답했다. "소승은 현수(玄修)라고 합니다." 백의소녀, 즉 백화미의 두 눈에 순간적으로 기이한 이채가 스치고 지나갔다. 현정대사(玄正大師). 그는 현자(玄字) 항렬을 가지고 있는 소림의 고승으로 지객원주였 다. 그는 현 자 배분의 마지막 서열로써 대외적인 손님을 맞는 지 객원을 관장하고 있었다. 나이는 구순(九旬)으로 무공 또한 지고하기 이를 데 없었다. 특히 소림외가신공(少林外家神功)의 최고인 나한금불신공(羅漢金 佛神功)을 십이 성까지 터득하고 있어 그의 몸은 이미 창검(槍劍) 이 침입하지 못하는 금강지체였다. 현정대사는 지객원의 원방의 포단에 앉아 좌선하고 있었다. "사숙님, 제자 정원(丁元)입니다." 들려오는 소리에 현정대사는 눈을 떴고 원방 밖에서 전언은 다시 이어졌다. "한 분의 여시주께서 사숙님을 뵙자고 찾아 오셨습니다." "여시주?" 현정대사의 하얗게 센 눈썹이 위로 솟는가 싶더니 깊은 눈에는 의 혹이 서렸다. 그는 곧 침중하게 물었다. "무슨 일로 노납을 만나자고 하더냐?" "그것이... 꼭 사숙님을 뵈어야만 된다고......." 정원이 곤란한 듯 말을 흐리자 현정대사는 더 묻지 않고 몸을 일 으켰다. "알았다. 물러가 있거라." "네." 현정대사는 포단에서 일어서며 밖으로 향했다. 그런데 갑자기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했다. 그가 들고 있던 염주 의 끈이 갑자기 툭 끊어지더니 백팔(百八)개의 염주알이 좌르르 쏟아지는 것이 아닌가? '이, 이것이!' 현정대사의 안색이 일변했다. 그는 웬지 불길한 느낌이 들어 가슴 이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 선방(禪房). 그곳은 지객원에서 손님을 맞는 곳으로 넓은 탁자와 의자 등이 단 아하게 꾸며져 있었다. 그곳에 한 명의 중년부인이 탁자와 마주한 채 단정히 앉아 있었다. 기이하게도 그녀는 전신에 흑의(黑衣)를 입고 있었다. 그러나 흑 의와는 대조적으로 희다못해 창백할 정도의 흰 얼굴에 용모는 찬 탄할 정도의 절색이었다. 실로 양귀비를 능가할 정도의 미부였던 것이다. 다만 그녀의 두 눈은 마치 얼음장같이 차가운 한기가 감돌고 있어 섬ㅉ한 느낌을 주었다. 흑의미부는 마치 그린 듯이 미동도 않고 있었다. 그녀의 앞에는 찻잔이 놓여 있었으나 손도 대지 않은 듯 찻잔 속에는 향차가 그 대로 담겨 있었다. 선방 안에 현정대사가 들어왔고 흑의미부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 라보았다. 정통으로 그들의 눈길이 마주쳤으나 그녀의 눈은 얼음 같이 무심했다. '고수(高手)다!' 현정대사는 내심 이렇게 부르짖으며 가슴 한 구석이 진탕하는 느 낌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역시 불문의 고승답게 조금도 그것을 내색치 않고 합장하며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여시주께서는 어인 일로 빈승을 찾아오셨습니까?" 흑의미부는 그를 쳐다보며 차갑고 오만하게 물었다. "당신이 지객원주인 현정인가요?" 극히 오만무례한 말투였으나 현정대사는 미소를 지으며 공손히 답 했다. "그렇습니다." "호호호호... 나는 소림의 고승들이 상당한 실력을 지니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크게 실망을 금치 못하겠군요!" 느닷없는 안하무인격의 말, 그것은 실상 소림 전체에 대한 모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역시 현정대사의 정력(定力)은 대단했다. 그는 여전히 미 소지으며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빈승이 워낙 자질이 부족하여 여시주께서 실망하셨 나 보군요. 그러나 빈승 하나만으로 소림 전체를 평가함은 크나 큰 잘못이오." 그 말에 흑의미부의 두 눈에 기광이 번뜩였다. "내가 소림을 찾은 것은 한 사람을 만나보기 위해서요." 흑의미부는 싸늘하게 말했다. "곡무현(曲武玄), 법호는 현오(玄悟)에요." 현정대사의 안색이 비로소 가볍게 변했다. 그는 낮게 불호를 외우 더니 물었다. "여시주께 실례를 무릅쓰고 묻겠습니다. 현오사형과 무슨 관계이 신지?" 흑의미부는 또한 싸늘하게 반문했다. "사사로운 일까지 대사께서 알아야 되나요?" 현정대사의 흰 눈썹이 일순 꿈틀했다. "아미타불... 그것은 지객원주인 소승의 임무입니다." 흑의미부는 냉랭하게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 "대사, 이것을 좀 보시겠어요?" 그녀는 탁자 위에 놓인 찻잔에 투명할 정도로 흰 섬섬옥수를 대더 니 살짝 눌렀다. 그러자 푸른 연기가 솟더니 찻잔은 탁자에 깊숙이 박히고 말았다. 아무런 소리도 없이 깨끗하고 완벽하게 찻잔은 탁자와 평면을 이 루며 박혀 있었다. 현정대사의 흰 눈썹 끝이 파르르 떨렸다. '정녕 대단한 내공이다. 천산오목(天山烏木)으로 된 이 탁자는 굳 기가 쇠보다 더한 것인데 이토록 쉽게 찻잔을 박아 버리다니!' 현정대사는 합장했다. "놀라운 솜씨입니다, 시주. 아미타불......." 흑의미부의 싸늘하나 요염한 입가에 조소가 어렸다. "대사께서도 이렇게 할 수 있나요?" 현정대사는 초탈한 미소를 지었다. "빈승의 빈약한 재주로 어찌 그런 신기를 보일 수 있겠습니까?" 흑의미부는 냉소 짓더니 일시지간 오른손 식지를 세워 현정대사의 가슴 현기혈을 찔러 왔다. 현정대사는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살기(殺氣)가 너무 짙소이다." 현정대사는 곧장 우수(右手)를 뻗어 막았다. 팍! 흑의미부의 손가락과 현정대사의 손가락이 부딪쳤다. 그 순간 현 정대사는 손 전체가 얼어붙는 느낌에 안색이 급변했다. '음.......' 싸늘한 기운이 온 몸을 응축시키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즉시 자신의 최대 무공인 나한금불신공을 끌어올렸다. 그의 피부가 금빛으로 변했으며 한기는 곧 사라지고 팽팽한 형세가 이 루어졌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다시 차츰 흑의미부의 손가락을 통해 싸늘 한 기류가 그의 장심(掌心)을 뚫고 밀려 들어왔다. 현정대사의 이마에 서서히 식은 땀이 맺혀가고 있었다. 그는 흡사 얼음구덩이에 빠진 듯한 느낌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본신의 혈맥마저 차갑게 수축되기 시작하자 현정대사는 내 심 절망하여 부르짖었다. '무, 무리다. 나의 힘으로는!' 흑의미부는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마침내 손을 거두었고 현정대사는 멍해진 채 탄식하며 물었다. "아미타불... 여시주께서 조금전 쓴 무공은 혹시 빙백마유공(氷魄 魔幽功)이 아니신지요?" "호호호호... 안목만은 대단하군요!" "아미타불......." 현정대사는 불호를 외우며 고개를 숙였으나 그의 안색은 어둡게 변해 있었다. "정원(丁元)!" 그는 침중한 음성으로 밖을 향해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사숙님." 밖에서 응답이 들렸다. "이분 여시주를 현오사형에게 안내해 드려라." "네, 알겠습니다." 현정대사는 말을 마치자 두 눈을 스르르 감았다. 흑의미부는 그를 힐끗 응시한 후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고 밖에 서는 중년승려가 기다리고 있다가 그녀에게 합장했다. "아미타불... 소승을 따라 오십시오, 시주." 정원은 곧 흑의미부를 안내하여 지객원을 떠났다. 그가 사라지자 선방에 있던 현정대사는 두 눈을 번쩍 떴다. "정초(丁草)!" "네!" 오 순 가량의 중이 선방으로 들어왔고 현정대사는 그를 향해 침중 히 당부했다. "천리신구(千里信鳩)를 날려 달마원의 현오사형께 조금 전의 일을 전해라." 정초는 즉시 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게 된 현정대사는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었다. "아미타불... 도대체 가슴이 이렇게 무거워짐은 무슨 이유인가?" 현정대사는 계속 불경을 외웠다. 현수(玄修). 그는 백의소녀 백화미와 녹음이 무성한 태실봉(太室峯)아래를 걷 고 있었다. 백화미의 몸에서 풍기는 야릇한 체향이 가까이 느껴지 자 현수는 마음이 울렁거렸다. "호호호... 스님!" 백화미는 교태롭게 부르며 아름다운 눈으로 현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만일 스님이 중이 아니라면 중원에 큰 혼란이 올 거예요." 현수의 의아한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서 머물렀다. "호호호... 어떤 여인이든 당신을 보기만 하면 그 즉시 사랑에 빠 져 헤어나오지 못할 테니까요." 그 말에 현수는 잠시 얼굴을 붉혔으나 곧 고소를 지으며 담담히 말했다. "여시주, 얼굴이란 하나의 껍질에 불과한 것이오. 죽으면 썩어 한 줌의 흙이 되고 맙니다." 백화미는 허리를 움켜쥐며 간드러지게 웃었다. "호호호호... 그렇게 말하니 당신은 정말 득도한 고승같군요?" 현수는 고개를 숙이고 걸으며 내심 중얼거렸다. '이 여인은 대체 누구일까? 이 태실봉은 상당히 험해 일반 여인은 결코 오를 수가 없는데.......' 그의 마음 속에는 점차 기이한 미녀 백화미에 대한 의구심이 차오 르고 있었다. "아! 물소리....... 이곳에 폭포가 있군요." 쏴... 우르르릉! 아닌 게 아니라 가까운 곳에서 지축을 울리듯 폭포수 떨어지는 음 향이 시원스럽게 들려오고 있었다.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조금만 더 가면 폭포가 나옵니다. 상당히 아름다운 곳으로 그곳의 이름은 승불폭(昇佛瀑)이라 하며 소림의 불도들이 가끔 참선하기도 하는 곳입니다." 승불폭(昇佛瀑). 그곳은 바로 수년 전 현수가 입문하기 전에 잡념을 떨치기 위해 하루 밤낮을 참선한 곳이었다. 백화미는 활짝 웃었다. "저에게 구경시켜 주시지 않겠어요?" 현수는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느낌을 받았다. 우르르릉... 쏴-- 아! 승불폭. 부처가 득도하여 승천한다는 뜻을 지닌 거대한 폭포수. 자욱한 물안개가 주위 반 마장을 뒤덮고 있었고 거대한 물줄기가 굉음과 함께 쏟아져 내려 지축을 흔들었다. 그 웅장하고도 아름다운 광경에 백화미는 환성을 질렀다. "아! 정말 멋지군요." 현수는 자신도 모르게 빙그레 웃으며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 라보았다. 백화미는 폭포 앞으로 나서며 명랑하게 말했다. "스님,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줘요. 한참 걸었더니 몸에 땀이 났 어요. 이 시원한 물에서 목욕 좀 해야겠어요." 백화미는 말을 마치자마자 정말로 옷을 벗기 시작했다. "아, 아니!" 현수가 미처 말릴 틈도 없었다. 순식간에 백화미는 옷을 모두 벗 고 완전나체가 되고 말았다. 쏟아지는 폭포수의 포말 속에 휘감긴 여인의 백옥(白玉)같은 전라 (全裸)....... 빙기옥골(氷肌玉骨)의 새하얀 피부가 금세 습기에 젖어 반들거렸다. 날개죽지같이 날렵하고 가냘픈 두 어깨, 가녀린 팔과 앞가슴에 마 치 복숭아처럼 깨끗하고 탐스럽게 열려 있는 젖가슴... 그리고 젖 가슴 정상에 달린 열매....... 잘록한 허리와 동그란 배, 배 한가운데 귀엽게 숨어있는 앙징스런 배꼽, 그 아래로 급격히 미끄러지며 펼쳐지는 신비한 여인의 비림 (秘林)....... 대리석같은 두 다리는 살짝 벌려져 폭포의 비말에 젖고 있었고 칠 흑같은 흑발이 젖어 젖가슴과 등을 살풋이 가렸다. 진정 인간의 육신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도 있는 것일까? 요정(妖精). 백화미의 모습은 그대로 폭포수 속에 내려온 천상(天上)의 요정이 었다. 실로 폭발적인 아름다움을 전신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아!" 현수는 충격을 받았다. 가슴을 거대한 쇠뭉치로 두들기는 듯한 소 리가 연신 들려왔다. 난생 처음 그는 여인의 나신을 본 것이었다. 그것도 천하절색 미인의 전라(全裸)를....... 현수의 눈은 힘껏 크게 떠져 백화미의 나신을 뚫어져라 쳐다 보았 다. 그녀의 학같이 가는 목으로부터 흑발 사이에 숨은 젖가슴과 열매 를, 그리고 동그란 배와 한가운데 숨은 배꼽을, 또한 두 다리가 갈라지는 사이의 불타는 비림(秘林)을....... 이제껏 물처럼 잠잠하던 현수의 눈은 몹시 흔들렸고 그에 따라 그 의 승포자락도 눈에 띄게 떨렸다. 백화미(白花美). 그녀는 현수가 이제껏 쌓은 모든 정심(定心)을 송두리째 무너뜨리 고 있었다. 한편 소림사의 달마원(達摩院). 현오대사는 천리신구를 통해 전달된 쪽지를 읽으며 얼굴에 짙은 의혹을 담고 있었다. '대체 누가 나를 찾아왔단 말인가? 더구나 흑의미부라니.' 문득 현오대사의 안색이 변했다. '혹시?' 그의 미간 사이의 홍점에 어두운 기색이 떠올랐다. 그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선방 문을 열었다. 그러나 방을 나서려 다 말고 현오대사는 흠칫 굳어지고 말았다. 문 앞에서 그의 사제이자 선좌원주(禪坐院主)인 현광대사가 기다 리고 서 있었던 것이었다. 현광대사는 현 자 항렬 중에서 가장 성격이 온유하고 침착한 인물 로 불심(佛心)이 매우 깊어 일찌기 선좌원을 맡고 있으며 현오와 는 가장 친분이 두터운 사이기도 했다. 더우기 나이가 올해로 백 세(百歲), 세사에 또한 이미 달관한 그 였다. 현오대사는 침중하게 물었다. "현광사제, 웬일인가?" "아미타불... 대사형, 정(情)이란 고해(苦海)요. 부디 그 여시주 를 만나지 마십시오." 현오는 그만 흠칫했다. "그럼... 그녀가 맞는가?" 현광은 합장하며 말했다. "육십 년이 흘렀지만 모습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더군요." 현오대사의 고요하던 눈에 파랑이 크게 일었다. "사제, 용서하게!" 그는 현광을 피해 앞으로 나가려 했다. 그러나 현광은 더욱 바짝 다가서며 가로막았다. "대사형, 이 사제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도저히 비켜드릴 수 없 습니다." 평소 그렇게도 온유하던 현광이었으나 이 순간만은 굳세고 완강하 기가 마치 강철신과도 같았다. 현오는 탄식했다. "사제, 곡무현은 이미 육십 년 전에 죽었네. 지금 여기에 있는 것 은 단지 현오(玄悟)일 뿐이네." 현광은 그 말에 움찔하며 굳어졌고 현오대사는 묵묵히 불호를 외 우며 그를 스쳐 지나갔다. '대사형.......' 현광은 멍한 눈길로 사라져 가는 현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우르르르릉... 쏴아아! 승불폭(昇佛瀑). 현수는 도저히 눈 앞의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폭포수의 굉음 조차 지금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의 눈길은 마치 자석에라도 이끌린 듯이 승불폭 아래의 넓은 연 못으로 향해져 있었다. 백화미, 그녀가 전라로 연못에서 인어처럼 유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수는 이제껏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던 광경을 보고 있는 것이었 다. 생전 처음 보는 여체(女體), 그것도 미녀의 전라가 유영하는 모습은 그에게 너무도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무엇인가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라 전신의 혈맥이 팽창하면서 목 이 갈라지도록 갈증을 느끼게 하였다. 과거 그는 팔백 일의 수련 중 물 한모금 마시지 못했다. 그러나 그때에도 이렇게까지 목이 타지는 않았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갈증과 함께 이상한 열기가 그의 전신을 휘 몰아치고 있었다. 백화미가 드디어 폭포수에서 밖으로 나왔다. 물에 젖은 흑발이 길게 앞으로 드리워져 백옥같은 나신을 부분적 으로 가리고 있었다. 그러나 노출되어 있는 나머지 부분의 유혹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옥같은 피부에는 물방울이 선연하게 돋아 있는가 하면 젖어 붙은 머리칼 사이로 육봉과 유두가 이상한 빛을 발하며 돌출되어 있었 던 것이다. 다만 어찌 된 셈인지 백화미의 나신에서는 조금도 음탕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너무도 깨끗하고 순진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 때문이 었을까? 그러나 이러한 매력이야말로 무서운 흡입력으로 현수를 빨아들이 고 있었다. 차라리 단순한 음심(淫心)이라면 굳은 정심(定心)으로 가볍게 떨쳐 버렸을지 모를 일이었다. 현수는 점점 더 심해지는 갈증으로 정신마저 혼미해질 지경이었 다. 그러한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백화미는 어깨를 움츠리며 오 들오들 떨었다. "아! 산중(山中)이라 그런지 매우 춥군요!" 벗어놓았던 그녀의 백의는 이미 폭포의 비말에 몽땅 젖어 있었다. 현수는 문득 그녀가 애처롭다는 생각을 하며 자신도 모르게 다가 갔다. "아미타불... 소승의 옷이라도 걸치십시오." 그가 승포를 벗어 주자 백화미는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고마와요, 스님. 당신은 무척 친절하시군요." 그녀는 스스럼없이 승포를 받아 걸치더니 크고 아름다운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이 근처에 혹 불을 피워 몸을 녹이고 옷을 말릴 만한 곳은 없나 요?" 현수는 마음이 떨렸다. '이 여인의 뜻은 대체.......' 그는 곧 그녀의 눈동자를 들여다 보았다. 그러나 백화미의 눈동자는 티없이 순수하고 맑기만 할 뿐 도저히 욕념(欲念) 따위를 지닌 탕녀의 눈빛이 아니었다. 현수는 눈을 감으며 자책했다. '부끄럽다, 사심(邪心)을 가졌던 것만도 수치스럽거늘!' 이어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미소를 지었다. "아미타불... 이곳에서 얼마만 가면 조그만 동굴이 있습니다." "그래요? 좀 안내해 주시겠어요?" 현수는 이번에도 또한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기이한 소녀 백화미에게 빨려 들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그의 뇌리에 떠오른 것은 불존의 자비(慈悲)일 뿐이었다. 이윽고 그는 단지 알몸에 넓은 승포만 걸친 백화미와 함께 걷기 시작했다. 물에 젖은 그녀의 머리칼에서는 강하고 야릇한 육향이 풍겼고 승포 아래로 미끈한 두 다리가 사뿐사뿐 움직이는 것이 보 였다. 그의 눈길은 어느덧 어쩔 수 없이 백화미의 늘씬한 두 다리 에서 멎은 채 떨어질 줄을 몰랐다. 다시금 그의 가슴에서 뜨거운 불길이 일어나고 있었다. 현오대사(玄悟大師). 그의 고요한 두 눈은 이미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흑 의중년 미부가 싸늘한 표정을 지은 채 서 있었다. 현오는 두 눈을 스르르 감았다. 그의 깊이 가라앉았던 마음 속에 격정이 일고 있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곡무현, 육십 년 만이군요." 흑의미부의 음성은 차디찼으나 가늘게 떨고 있었다. 현오는 다시 눈을 떴고 그의 눈에는 아련한 비애가 떠올랐다. 현오는 침중하게 합장하며 말했다. "여시주, 곡무현은 이미 죽었소. 소승은 현오(玄悟)라 하오." 그 말에 흑의미부는 격앙된 음성으로 말했다. "무현(武玄), 당신은 육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함이 없 군요. 당신의 마음속에는 이 단혜령(段慧令)이 들어갈 공간이 조 금도 없단 말인가요?" 현오의 얼굴에 고통의 빛이 스쳐갔다. "여시주, 과거는 이미 지났소. 모두 사라진 일이오." 그의 말이 떨어지자 흑의미부 단혜령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눈빛에 사악한 빛이 스쳤다. 그녀는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무현! 당신은 이것을 기억하시죠?" 그것은 끝이 절반 가량 부러져 나간 은색의 소도(小刀)로, 손잡이 부분에 주사빛 글씨로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단심도(丹心刀)> 그것을 본 현오의 몸이 떨렸다. "단... 심... 도......." "그래요! 단심도예요. 저는 팔십 년 전 애정의 표시로 이 단심도 를 당신에게 주었고, 당신은 그 확인으로 단심도를 반으로 잘라 서로 한 쪽씩 보관하기로 했었지요." 현오의 수양 깊은 얼굴이 마구 경련을 일으켰다. "그 후 이십 년이 흐르는 동안에 우리는 맺어지기는 커녕, 급기야 정사의 대립을 이유로 나의 아버님마저 당신 손에 죽어야 했지 요." 단혜령의 창백한 얼굴에는 점차 무서운 증오와 살기가 짙어졌다. "아미타불......." 현오의 흰 눈썹이 격하게 떨리고 있었고 단혜령은 입술을 깨물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이미 지나간 일이에요. 그것을 문제 삼고자 이곳에 온 것은 아니니까요." "으음." "마지막으로 묻겠어요. 당신은 아직도 단심도의 한 조각을 갖고 계시나요?" 현오대사는 격동을 금치 못하였다. 그의 눈에는 온통 회한, 슬픔, 후회, 번민 등이 어지럽게 교차되었다. 그럼에도 현오대사는 합장을 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아미타불... 육십 년 전에 이미 버렸소." "버렸... 다고 했나요? 지금?" 단혜령의 안색은 아예 백짓장처럼 질리고 있었다. 동굴(洞窟).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모닥불을 마주보며 두 남녀가 벽에 등을 나란히 기대고 앉아 있 었다. 현수와 백화미, 바로 그들이었다. 백화미는 현수의 승포를 걸친 채 불을 쬐고 있었다. 불빛에 어른 거리는 그녀의 얼굴은 그야말로 요염절륜의 극치였으며 혼백을 빨 아들일 듯 뇌쇄적이었다. 그러나 살풋이 미소 짓고 있는 두 눈빛은 순진무구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따금씩 몸을 숙여 불을 지필 때마다 그녀가 입은 넓은 승포자락 사이로 완전히 드러나곤 하는 젖가슴이 도리어 무색할 지경이었 다. 현수는 정신이 혼란스러워졌다. '도대체 이 여시주의 정체는 무엇인가.' 현수는 어찌된 영문인지 평소의 지혜로움도 모두 사라지고 멍한 상태였다. 도대체가 오늘의 일이 꿈만 같을 뿐 스스로조차 이런 현상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백화미가 살며시 그의 어깨에 교구를 기대오자 싱그럽고 강렬한 처녀의 체향이 물씬 풍겼다. "스님, 당신께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백화미는 동그란 턱을 들어 현수의 코 밑에 바짝 들이대며 묻고 있었다. "어째서 스님은 중이 되었어요?" 현수의 얼굴에 그늘이 덮혔다. "그것은... 소승도 모릅니다." 백화미는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호호호...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자신이 중이면서 중이 된 이 유를 모르다니." "그것을 알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백화미는 그윽한 눈으로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낮게 탄식 을 발했다. "아아... 당신이 만약 중이 아니라면......." 현수는 백화미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며 불현듯 환속(還俗)하고 싶 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 그녀의 두 눈은 신비로운 광채를 발산하며 현수의 모든 것을 빨아 들일 듯한 마력(魔力)을 사출했다. 현수는 어느 순간 그만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나마 남 아 있는 사고력마저 일시에 상실하고 말았다. 그의 두 눈에 점차 뜨거운 열기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백화미의 섬섬옥수를 잡았다. 백화미는 의식적으로 그의 가슴으로 무너지듯 안겨 들어왔다. 그 러자 부드러운 여체(女體)의 감각이 곧 그의 품에 밀착되었고 그 녀와 그의 얼굴은 맞닿을 듯이 가까워졌다. 백화미의 두 눈이 사르르 감겼다. 그녀의 속눈썹은 무척이나 길었다. 까만 속눈썹이 옥(玉)같은 얼굴과 대조를 이루어 더욱더 매혹적이 었다. "스님......." 백화미는 낮게 그를 부르며 입술을 살짝 벌렸다. 붉고 탄력있는 입술 사이로 새하얀 치아가 빛났고 그녀의 입에서 는 뜨거운 입김이 토해져 현수의 마음을 불태웠다. 현수는 완전히 이성을 잃은 듯 천천히 입술을 가져갔다. "으음......." 두 사람의 입술이 한 치의 틈도 없이 밀착되었다. 입술과 입술을 통해 꿀물같은 타액이 오고 가는 사이 백화미의 백 옥같은 손은 그의 목을 휘어감고 있었다. 현수는 황홀감에 정신이 빙글빙글 도는 듯 했다. 어느새 그의 손 길은 자신도 모르게 백화미의 몸에서 승포를 벗겨내리고 있었다. 스르르....... 백옥 덩어리같은 백화미의 나신이 그대로 드러났다. 정녕 뇌쇄적 인 육체였다. 백화미는 그의 손을 잡아 자신의 젖가슴에 대었다. "음!" 현수는 뜨겁고 뭉클한 여인의 촉감에 전신을 떨며 그 젖가슴을 꽉 움켜 쥐고야 말았다. "아... 아......." "으음!" 동굴 속은 이내 열풍(熱風)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흑의미부 단혜령(段慧令). 그녀는 안면이 경직된 채 전신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반면 현오대사는 두 눈을 감은 채 내심 계속 불호를 외우고 있었 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부처님이시여....... 이 깊은 정해(情 海)로부터 제자를 구원하소서.......' 단혜령의 두 눈이 갑자기 악독하게 변했다. 그녀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앙칼지게 외쳤다. "맞아요! 곡무현은 육십 년 전에... 이미 죽었어요." 그녀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수중의 부러진 단심도를 치켜세웠다. 단심도의 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지체하지 않고 그대로 현오대사의 심장을 향해 단심도를 찔렀다. 쉭! 날카로운 파공성이 일었다. 그러나 현오는 여전히 눈을 감고 불호만 외울 뿐 피할 생각도 하 지 않았다. 푹! 단심도는 정통으로 그의 심장에 깊숙히 박혔다. 피(血)! 피가 치솟았으나 현오는 비명조차 내지르지 않았다. 그는 마치 부 처라도 된 듯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을 뿐이었다. "아!" 단혜령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찰나, 현오는 드디어 눈을 떴다. 그 러나 그의 눈에는 짙은 고뇌가 서려 있을 뿐 추호도 죽음의 공포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를 보던 단혜령의 눈이 기이할 정도로 사악해졌다. 그녀는 창백 한 안면에 계속 경련을 일으키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곡무현! 육십 년 지한(六十年之恨)을... 이 단심도를 통해 돌려 준 것이에요!" 현오는 다만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털썩! 마침내 그는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대사형....!" 외침과 함께 그 자리에 한 인영이 나타났다. 그는 바로 선좌원주 인 현광이었다. 현광대사는 급히 땅에 쓰러진 현오를 부축했다. "대사형! 대사형......." 그러나 이미 현오는 말이 없었고 어느새 그의 얼굴은 고요하게 가 라앉아 있었다. "아! 대사형......." 현광대사는 절망적인 탄식을 발하며 현오를 천천히 땅에 뉘었다. 그의 불심 깊은 얼굴에 무서운 분노심이 솟구쳐 오른 것은 그 순 간이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여시주! 빈승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소!" 단혜령은 현오의 시체를 힐끗 바라보더니 곧 미친 듯이 웃었다. "호호호호호....... 이미 육십 년 전에 죽었어야 할 자다!" 현광은 더욱 분노했다. "아미타불... 불존이시여! 살계(殺戒)를 범하는 제자를 용서하소 서!" 현광은 망설이지 않고 즉시 양쪽 승포자락을 위맹하게 흔들며 단 혜령을 공격했다. 위이잉--! 승포자락이 빳빳하게 펼쳐지며 괴이한 금속성을 냈다. 단혜령은 냉소 지으며 급히 일 장의 옥수(玉手)를 날려 보냈다. 파팟! 손이 승포에 부딪친 순간, 그녀는 마치 강철을 친 듯 손이 찌르르 울림을 느끼고 안색이 변했다. "단포철공(鍛袍鐵攻)!" 그녀가 경악하여 외치자 현광은 앞으로 두 걸음 미끄러지며 단호 하게 외쳤다. "살계를 범해 자결하는 한이 있어도 여시주를 용서하지 않겠소!" 위-- 잉! 위- 잉! 무서운 공격이 퍼부어졌다. 현광대사의 소맷자락은 소림절예의 절공인 단포철공으로 마치 강 철판처럼 단단해졌다. 소맷자락이 어지럽게 춤추며 태산을 무너뜨 릴 듯한 경풍이 주위 사오 장을 휩쓸었다. 단혜령은 이리저리 신묘한 보법으로 공격을 피하느라 도저히 반격 할 틈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과연 소림의 중들은 무섭구나!' 그러나 그녀의 눈에 일순 살기가 서렸고 양손은 이내 벽옥(碧玉) 빛을 발했다. "호호호... 그 따위 시시한 소림의 무학 따위로는 나를 이기지 못 할 것이다!" 그녀는 조소를 날리며 양손을 떨쳤다. 벽옥빛의 투명한 강기( 氣)가 무섭게 둥근 원을 그리며 일어났 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웅혼한 음성이 들려왔다. "아미타불... 현광, 손을 거두어라!" 휙! 동시에 누군가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콰르르릉! 엄청난 폭음이 울린 순간, 현광은 가슴에 커다란 충격을 받고 뒤 로 연달아 세 걸음이나 물러났다. 단혜령 역시 뒤로 두 걸음 물러났으며 그녀의 안색은 크게 변했 다. '누가 이토록 무서운 내공을?' 자욱한 흙먼지가 가라앉자 그 가운데 한 명의 고승이 홀연히 서 있는 것이 드러났다. 그는 바로 소림최고 기승인 천심선사(天心禪 師)였다. 뒤이어 몇 명의 고승들이 다시 장내에 출현했다. 천뢰선사와 천기 선사, 그리고 현공대사 등 십여 명이었다. 현광대사는 황급히 천심선사에게 허리를 굽혔다. "대사부님......." 단혜령은 그 광경에 안색이 변했다. '저 노승이 바로 천심이란 말인가?' 천심선사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현오의 시체를 보고도 안색이 조 금도 변치 않았다. 그저 담담히 물을 뿐이었다. "여시주께서 조금 전에 쓴 무공은 혹시 이백 년 전 천마교주(天魔 敎主)였던 벽안마희(碧岸魔姬) 냉소군(冷素君)의 벽옥사라공(碧玉 邪羅功)이 아니오? 여시주께서는... 벽안마희와는 어떤 관계이시 오?" 그 말에 소림의 고승들은 모두 대경했다. "벽옥사라공! 아미타불......." 단혜령의 안색이 놀라움으로 굳어졌다. 그러나 곧 그녀는 교소를 날렸다. "호호호... 과연 선사의 안력은 대단하시군요!" 그녀는 안색이 곧 싸늘하게 변하며 오만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 보았다. "앞으로 오 년 이내에 천하는 마종지문(魔宗之門)이 다스리게 될 것이다! 소림사가 비록 강하다지만 마종지령(魔宗之令)을 따르지 않는다면 처참하게 멸문을 당하고 말 것이다!" "뭣이? 아미타불......" 소림의 고승들은 일제히 대경실색했다. 그러나 그녀는 말을 멈추 지 않고 외쳤다. "호호호... 그뿐만이 아니다. 너희 소림사가 애지중지하며 키우고 있는 그 애송이 어린 놈도 지금쯤 나의 제자에 의해 철저히 망가 지고 있을 것이다! 호호호......." 단혜령은 요란하게 웃으며 신형을 허공으로 날렸다. 현광은 대노하여 버럭 외쳤다. "여마! 도망가지 마라!" 그는 곧 뒤따라 몸을 날리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천심선사가 그 를 만류했다. "그만 둬라. 현광!" 그 말에 현광은 멈칫했으나 수긍이 가지 않는 듯 불만스러운 시선 으로 천심선사를 바라 보았다. "하지만 대사부님, 현오사형이 이렇게......." 죽은 현오와 그의 친분을 익히 아는 천심선사는 합장하며 말했다. "아미타불... 현오는 스스로 그 길을 택한 것이다." 천심선사는 이어 현오의 시체 곁으로 다가가 그를 안아 들었다. "또한 현오는 아직 죽지 않았다." 이는 또 무슨 말인가? 천심대사의 나직한 읊조림에 현광은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현오대사는 심장이 관통되어 이미 숨 이 멎었는데 어찌 죽지 않았다는 것인지....... 그러나 그는 천하에서 가장 존경하는 천심선사를 믿었다. 천심대 사의 읊조리는 음성도 실은 그만이 들었을 뿐이었다. 한편, 천심선사는 현오대사의 시신을 옮기려다 문득 그의 왼손을 보고는 흠칫하는 표정을 지었다. 현오대사는 전신을 축 늘어뜨리고 있는 반면에 왼손을 꽉 움켜쥐 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거기에는 부러진 단심도의 끝이 삐져 나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육십 년 전 단혜령과 나누어 가졌던 정표로써 그의 심장에 박힌 단심도의 나머지 부분이 아닌가? 천심선사는 탄식했다. '단심도....... 현오여! 너는 그동안 얼마나 괴로와 했는가?' 천심선사는 측은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 일로 인하여 네가 모든 것을 잊고 속세의 연을 끊을 수 있 게 된다면... 노납도 더이상 바랄 것이 없건만.......' 천심선사는 현오를 안아들고 걸었다. 천뢰선사가 그의 옆에 다가와 불안한 듯 물었다. "사형, 현수가 보이지 않습니다. 혹시 아까 그 여마가 말한대 로......." 천뢰선사는 차마 뒷말을 잇지도 못했다. 그러나 천심선사는 염려 말라는 듯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를 찾지 말게. 그가 진정한 소림과 무림의 운명을 걸머질 기재 (奇才)라면 결코 색(色)에 무너지지는 않을 걸세." "그렇다면!" "아미타불... 어쩌면 오히려 그로 인해 자네가 설정한 반야밀다대 승신공의 삼십육 단계 수련 중 마지막 이 관(二關)의 하나인 심관 (心關)을 넘어설지도 모를 일이네." "아!" 천뢰선사의 얼굴이 복잡하게 변해 갔다. 그 사이 천심선사의 얼굴에는 이와는 별도로 새삼 불안의 기운이 어리고 있었다. 그는 거의 남의 귀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중얼거렸다. "대체 어떻게 그 여마가 소림에서 현수를 키운다는 사실을 알았단 말인가? 그럼 이 소림에 첩자가? 설마 그럴 수는......." 천심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말은 오직 천뢰만이 들었다. (사형!) 천뢰의 안색은 삽시에 무섭게 굳어졌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사제, 아무 말 말게. 내게 생각이 있으니.......) 그들은 전음으로 이같이 주고 받았다. 천뢰선사는 이것도 저것도 불안을 금할 길이 없었다. 비록 그는 천심선사를 하늘같이 믿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걱정을 아예 떨쳐 버릴 수는 없었다. 그로서는 사실 소림의 첩자가 문제가 아니었다. 격정적인 성격을 가진 천뢰선사는 무엇보다도 당장 현수의 안위가 궁금해 가슴이 타들어갈 지경이었다. 그가 세상에서 오직 유일하게 정(情)을 느끼던 현수가 아닌가? 그 는 팔백 일의 수련을 통해 현수와 너무도 깊은 정이 들어 있었다. 천뢰선사는 거세지는 호흡을 억지로 자제하며 되뇌였다. '현수.......' 동굴 안은 뜨거운 열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요녀(妖女)와 선녀(仙女)의 양면성을 한 몸에 가지고 있는 백화미 (白花美). 그녀의 나신은 온통 도화빛이 되어 있었다. "아아......." 그녀는 연신 가쁜 숨을 몰아 쉬었고 현수의 양 손이 그녀의 불같 이 달아오른 나신을 더듬고 있었다. 여인의 은밀한 부분을 스치는 현수의 손길에 그녀는 용광로처럼 끓어 올랐다. "으음......." 두 사람의 격정적인 신음 소리가 동굴을 더욱 뜨거운 열기 속으로 몰아넣었다. 백화미는 자신의 몸을 동굴 바닥에 뉘였다. 그녀는 두 다리를 약 간 벌린 채 짙은 열망의 호소가 담긴 눈으로 현수를 불태울 듯이 응시했다. 현수는 거친 숨을 토했다. 그의 영준한 얼굴은 온통 붉게 달아 오 른 채 극심한 갈등들을 어지럽게 교차시키고 있었다. 욕정(欲情). 이 세상에서 가장 참기 힘든 것이 바로 욕정이리라. 현수의 가슴은 발산하고 싶은 욕정으로 터질 것만 같았다. 참으면 참을 수록 욕망은 더욱 뜨겁게 타올랐다. 더구나 백화미의 마력적인 눈은 그의 혼백을 빨아들이고 있지 않 은가? 두 다리를 비스듬히 벌리고 그의 전신을, 젊은 육체를 받아 들일 자세를 취한 채....... 마침내 현수는 무너지듯 백화미의 나신 위에 자신을 실었다. 그러자 백화미의 얼굴에 일말의 득의에 찬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 은 마치 정복자의 자만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일면 그 속에는 어떤 가벼운 실망의 표정도 실려 있었으 니....... 백화미, 그녀는 대체 어떠한 여자인가? 그녀는 두 눈을 스르르 감았고 현수의 미칠 듯한 욕정의 행위가 그녀의 전신을 마구 탐하고 있었다. "헉헉......." 그의 폭풍같은 호흡을 귓전에 느끼며 백화미는 사지를 늘어뜨렸 다. 이제 그의 폭발할 듯한 남성이 자신을 삼킬 때를 기다리만 하 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문득 짤막한 신음소리와 함께 현수의 동작 이 갑자기 중지되자 백화미는 놀라서 눈을 떴다. 현수는 그녀의 나신 위에서 두 눈을 한껏 부릅뜬 채 마구 안면근 육에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안돼!" 현수는 뒤이어 버럭 외치더니 마치 불에 데인 사람처럼 벌떡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니?" 백화미는 대경하여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현수의 허리 를 와락 끌어 안고는 물었다. "당신, 왜 그러시죠?" 현수는 마치 목석이라도 된 듯 멍하니 허공만 바라볼 뿐 말이 없 었다. 백화미의 뇌쇄적인 얼굴에 짧게 당황의 빛이 스쳤다. "당신......." 그녀는 달콤하게 말하며 현수의 손을 이끌어 다시 자신의 젖가슴 에 대었다. 현수의 손이 부르르 떨리더니 급히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그의 멍청하던 얼굴에 곧이어 장엄한 표정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 의 혜지를 잃고 있던 두 눈에 강렬한 광채가 빛나며 전신은 마치 거대한 산을 연상케 하듯 은은한 위엄을 되찾았다. 현수는 곧 백화미에게 합장을 했다. "아미타불... 여시주, 소승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현수의 음성은 이미 물처럼 가라앉아 있었고 입정한 고승의 설법 처럼 엄숙했다. 백화미는 아연하여 알몸을 가리지도 못하고 굳어버렸다. 그러나 그녀의 알몸을 보는 현수의 눈빛은 더이상의 흔들림이 없 었다. 마치 생명이 없는 나무를 대하는 것처럼 지극히 담백했다. 그는 그저 그렇게 담담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백화미의 얼굴이 문득 애처롭게 변했다. 그녀는 커다란 두 눈에 담뿍 눈물을 고이게 하고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제가... 마음에 들지 않나요?" 실로 그 어떤 철혈인(鐵血人)이라도 녹일만큼 가련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현수는 이제 전혀 미혹되지 않았다. "여시주, 그대의 두 눈과 마음은 소승에게 진실(眞實)을 보이고 있지 않습니다. 그대는 분명 어떤 목적을 품고 있습니다. 시주의 행동과 생각에는 수많은 모순이 있습니다." 그의 말에 백화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순이었 고 그녀는 곧 흐느끼기 시작했다. "흑흑... 당신은 순결한 저의 몸을 마음대로 유린하고는... 이제 와서 고고한 척 발뺌을 할 셈인가요?" 현수는 묵묵히 합장한 채 고요히 서 있을 뿐이었다. 이제 그의 마 음은 굳기가 강철같아 그 어떤 유혹에도 흔들릴 수가 없었다. 백 화미는 돌연 이를 갈더니 싸늘하게 외쳤다. "당신을 죽여 버리겠어요!" 그녀는 만면에 독한 살기를 띄우더니 일 장을 뻗어 현수의 앞가슴 현기혈(玄機血)을 쳤다. 그녀의 장심은 은은한 벽옥빛을 띄고 있 었다. 현수는 피하지 않았다. 아니, 설사 피하고 싶어도 그는 무공 초식 을 조금도 모르는 몸이기에 피할 수가 없었다. 퍽! 백화미의 장심이 그의 가슴에 적중했다. 그러나 당혹에 빠진 것은 오히려 백화미 쪽이었다. 그녀는 마치 자신의 손으로 철벽을 때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 그녀는 뒤로 두 걸음 밀려났고 현수도 두 걸음 물러섰다. 그의 안색은 약간 창백해졌으나 아무런 신음도 흘리지 않았다. "이럴... 수가!" 백화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뇌까렸다. "아미타불......." 현수는 불호를 외며 잠시 서 있더니 서서히 몸을 돌며 동굴 밖으 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고 백화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멍한 시선으로 사라지는 현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악독했던 모습은 언제부터인지 희한하게도 슬프게 변해가 고 있었다. 또한 그녀의 눈 속에는 안타까움과 번민이 가득 어렸 다. '현수.......' 백화미는 낮게 부르짖었다. 그녀는 나체인 채로 언제까지고 동굴 안에 서 있을 듯 했다. '현수, 산(山)같은 사내....... 현수! 아아, 내 마음이 왜 이렇 게.......' 백화미는 갑자기 추운 듯이 나신을 움추렸다. 모닥불은 어느덧 꺼져 있었고 조금 전의 일은 오직 환상(幻想)인 것만 같았다. 백화미(白花美). 그녀는 그 순간부터 현수의 모습을 영원히 잊지 못하게 될지도 모 른다고 생각했다. ■ 대소림사 제1권 제6장 적미천존(赤眉天尊), 그리고 십팔나한관(十八羅漢 關) -1 ━━━━━━━━━━━━━━━━━━━━━━━━━━━━━━━━━━━ 쏴-- 우르릉! 쏴아---! 승불폭의 웅장한 폭포수가 쏟아져 내렸다. 현수는 폭포 앞에서 멍한 표정으로 선 채 심한 자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부끄럽다. 자칭 불문의 제자라는 내가 한낱 여인의 미색(美色)에 그토록 흔들리다니?' 폭포수의 비말에 젖고 있는 현수의 얼굴은 여느 때와는 판이할 정 도로 어둡게 변해 있었다. '세 분 사부님께서 이 사실을 아신다면 얼마나 실망하실까?' 현수는 스스로를 꾸짖으며 후회가 담긴 시선으로 쏟아지는 폭포수 를 응시했다. 갑자기 어디선가 카랑카랑한 웃음소리가 들려와 그의 상념을 깨웠 다. "하하하하... 소화상(少和尙)! 무슨 근심이 그렇게도 많은가?" 현수는 흠칫 놀라 급히 주위를 둘러 보았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 았다. "헛허헛헛! 노부를 찾느냐? 그러나 너의 눈으로 나의 모습을 발견 하긴 좀 힘들 것이다!" 실로 괴이한 일이었다. 폭포소리가 요란함에도 불구하고 카랑카랑 한 음성은 똑똑히 들리고 있었다. 현수는 합장했다. "아미타불... 어떤 고인이신지요?" "소화상, 자네는 소림의 제자인가?" "그렇습니다." 현수는 허공에 대고 대답하자 음성의 주인공은 아쉽다는 듯 입맛 을 다셨다. "허어, 아깝군. 그대와 같은 자질을 지닌 아이가 소림같이 고리타 분한 곳에서 썩고 있다니......." 현수는 계속 주위를 살폈으나 여전히 어디서 음성이 들리는지는 도저히 알아낼 수가 없었다. 커다란 웃음소리는 다시 들려왔다. "핫핫핫핫핫......." 마치 천 개의 철종을 치는 듯 쩌렁쩌렁하게 울려 고막이라도 터뜨 릴 것같은 엄청난 광소였다. "자! 소화상, 잘 보아라. 너에게 노부의 모습을 보여 주겠다." 자신감에 찬 외침이 들림과 동시에 굉음과 함께 놀라운 현상이 벌 어졌다. 쿠르르릉! 거대한 승불폭의 폭포수가 돌연 흐름을 멈추는 것이 아닌가? "아!" 현수는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기현상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쿠르르릉....... 흐름을 정지했던 폭포수가 이번에는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다. 너 무도 기가 막히도록 놀라운 일이었다. 현수는 일시지간 넋을 잃은 채 멍해졌다. "으핫핫핫핫핫!" 일진의 광소가 다시 그의 고막을 때렸다. 이어 거대한 흡인력이 현수의 몸을 휘감더니 그대로 승불폭으로 끌어들였다. "아앗!" 피하고 어쩌고 할 틈도 없었다. 그의 몸은 삽시간에 폭포수 뒤쪽 의 공간을 뚫고 들어가 바닥에 떨어졌다. "으음." 현수는 휘청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비록 동굴 속은 어두웠으나 그의 안력은 그대로 환히 살펴볼 수 있었다. 곧 그의 눈길은 한 곳에 못박혔다. 괴노인(怪老人). 동굴 안쪽 벽의 암석 위에 한 명의 괴노인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노인은 백발이 성성하여 나이가 이미 백 세(百歲)를 훨씬 넘은 것 처럼 보였다. 특이한 것은 괴노인의 눈썹 길이가 무려 한 자에 이 르렀는데 붉은 적미(赤眉)라는 것이었다. 입고 있는 낡아빠진 의 복 또한 홍의(紅衣)였다. 현수는 캄캄한 동굴 속에 그렇게 앉아 있는 괴노인을 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실로 괴이한 노인이구나.' "소화상, 너는 소림사 어느 중의 제자냐?" 현수는 비록 공손하지만 꼿꼿하게 반문했다. "그것은 어찌하여 물으십니까?" "만약 그대가 노부가 생각한 사람의 제자가 아니라면 노부에게 한 가지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현수는 침묵했고 괴이한 적미노인은 불그스레한 섬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다시 물었다. "너는 천심(天心)의 제자냐?" 현수는 비로소 움찔 했다. 적미괴인은 고소를 지으며 말했다. "노부가 한 발 늦었군. 확실히 그 늙은 중은 혜안(慧眼)이 있어." 적미괴인은 탄식하며 아쉬운 듯 현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기 이하게도 차츰 따뜻하게 변하고 있었다. "소화상, 너는 노부가 누군지 아느냐?" "모릅니다." "후후... 노부는 과거 백이십 년 전만 해도 사도무림을 관장하고 천하를 흔들었다. 노부의 별호는 적미천존(赤眉天尊) 여적성(呂赤 星)이라고 했다." 적미천존(赤眉天尊) 여적성(呂赤星). 만일 일반 무림인이 이 별호를 들었다면 필시 안색이 잿빛으로 변 하고 말았으리라. 그는 근 백이십 년 전 사도 제일의 방파인 현천교(玄天敎)의 교주 이자 사도무림의 대종사(大宗師)이기도 했다. 일신상에 실로 가공할 무공을 지니고 있으며 그의 적수가 무림에 없다시피 했다. 그런데 백 년 전 그는 갑자기 실종되었다. 그 이후 그의 실종과 함께 현천교도 자연히 해체되었다. 현수는 강호무림의 정세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를 알아보지 못함은 당연한 일이었다. 적미천존 여적성은 눈에서 붉은 광망을 번뜩이며 칼칼하게 말했 다. "노부는 이제까지 삼 갑자(三甲子)를 살아오는 동안 평생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 단지 인생에 있어서 두 번 좌절을 당한 적 이 있을 뿐이다." 여적성은 안색을 묘하게 일그러뜨리며 감개 어린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 두 번의 좌절 중 첫번 째 좌절로 인해 현천교가 해체되었고 두번 째 좌절로 인해서는 이 승불폭에 갇혀 백 년 간이나 나오지 못했다." 여적성의 두 눈에는 괴이한 빛이 일어났다. "그러나 결코 무공으로 좌절을 당한 것은 아니다. 천하에서 그 누 가 나 적미천존을 꺾을 수 있단 말이냐?" 여적성의 얼굴에서는 그야말로 꺾을 수 없는 오만함과 자부심을 엿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현수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아미타불... 노시주께서는 틀림없이 그 오만한 성격 때문에 좌절 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 말에 여적성의 안색이 보기싫게 일그러졌으며 그의 표정은 거 듭 변화를 일으켰다. 도중에는 분노한 듯 잠시 살기가 스쳐 지나가기도 했으나 결국 그 는 탄식을 했다. "으음.......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아미타불.... 소승의 법명은 현수라고 합니다." 여적성은 안색을 씰룩이며 말했다. "바보같은! 너는 평생 불문과는 인연이 없다. 노부의 예상이 맞는 다면 너는 필시 얼마 안 있어 환속하게 될 것이다." 현수가 흠칫하는 사이 여적성이 다그치듯 말했다. "네 실제 이름을 대란 말이다!" 현수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하후... 성......." 실로 오랫만에 뇌이는 이름이었다. 그의 음성은 어쩔 수 없이 떨 려 나오고 있었다. "하후성, 좋은 이름이다. 노부의 마지막 이름 자와 같군!" 여적성은 쓰디 쓴 웃음을 흘렸다. "후후후... 천심, 그 늙은 중은 아주 그럴 듯한 제자를 구했군. 너로 인하여 소림의 성세는 무궁할 것이다." 그는 마치 내뱉듯 말하고 있었으나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눈에 서 이채가 번쩍였다. '좋다. 천심, 그대는 노부를 이곳 승불폭에서 백 년씩이나 나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첫번 째 대결에서는 내가 진 셈이다. 그러나 승 부는 지금부터다. 두번 째 대결에서는 결코 패하지 않을 것이다!' 여적성은 이어 현수를 노려보며 괴이한 음성으로 말했다. "소형제, 노부의 눈을 보아라." 현수는 순순히 여적성의 눈을 응시했다. 그러나 곧 그는 흠칫했 다. 적미천존 여적성의 두 눈이 갑자기 붉게 타오르며 확산되는 것이 아닌가? 현수는 순식간에 그의 눈속으로 휘말려 들어가고 말았다. 그의 사 고력과 혜지(慧志)는 모두 사라져 버리고 두 눈은 멍청해졌다. 적 미천존 여적성은 침중하고 웅혼한 음성으로 말하고 있었다. "소형제! 지금부터 노부가 말하는 것은 영원히 너의 머리 속에 남 아있게 될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현수의 머리 속으로 그의 말은 깊숙이 파고 들었 다. "노부의 무공은 현후천겁마공(玄侯天劫魔功)으로부터 비롯된다. 현후천겁마공은 다시 세 가지로 분리되어 한 가지의 장법(掌法) 과......."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는 가운데 시간이 흘러갔다. 괴이한 마력이 깃든 여적성의 말은 속속 현수의 뇌리를 파고 들었 다. 한 시진, 두 시진... 다섯 시진....... 어느덧 두 사람은 마주 앉은 채 꼬박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동안 여적성의 입술은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으며 현수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혼(魂)이 빠진 듯 그의 마안(魔眼)에 붙들려 있었다. 현수는 차츰 정신을 차렸다. 그는 정신이 들자마자 깜짝 놀라며 급히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 런데 아무도 없었다. 동굴 속은 텅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적미천존 여적성은 어디로 갔는지 그가 앉아 있던 암석에는 그의 그림자조차 없었다. "아!" 현수는 머리 속이 꽉 찬 듯한 느낌과 함께 심한 혼란을 느꼈다. 마치 눈으로 보듯이 머리 속으로 수많은 무공(武功)의 도해(圖解) 가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아아, 이럴 수가!' 현수는 머리를 움켜쥐며 당혹에 빠지고 말았다. 무공의 도해는 한결같이 모두가 패도적이고 사이(邪異)한 것들 뿐 이었다. 그러나 또한 지극히 심오하고 정묘한 것이기도 했다. 그의 눈에 불현듯 무엇인가가 보였다. 바로 여적성이 앉아 있던 암석의 바닥에 한 자루의 검은색 화살이 꽂혀 있었던 것이다. 현수는 의문을 느끼고 화살을 뽑아 살펴 보았다. <현천령(玄天令).> 한 뼘이 조금 넘는 검은 화살의 날개 부분에는 그렇게 씌여져 있 었다. "현천령......." 또한 암석에 지력(指力)으로 새겨진 글귀가 보였다. <소형제, 노부는 백년금제에서 풀려 밖으로 나간다. 강호에서 다 시 만나게 될지는 피차의 인연에 달렸다. 현천령은 너와 내가 만 난 기념으로 준다. 오늘의 일은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소형제와 나만의 일이기 때문이다. 훗날 환속하여 강호에 나온다면 중양절(重陽節) 악양성(岳陽城)의 악양루(岳陽樓) 현판 에 현천령을 꽂고 십일(十日)을 기다려라.......> 현수는 여기까지 읽고는 고개를 저었다. '노시주, 소승이 어찌 환속할 수 있단 말이오. 뜻은 고마우나 소 승은 결코 환속하지 않을 것이오.' 그는 내심 이렇게 중얼거리며 암석 위에 새겨진 글을 다시 읽어내 려 갔다. <......마지막으로 소형제에게 충고(忠告)를 남기겠다. 강(强)하 면 부러진다, 겸손해라. 이것은 노부가 백팔십 년을 살아오며 절 실히 느낀 것이다. 강호는 훙험하기 그지없으며 음모와 질시가 심 한 곳이다. 절대 자신을 드러내지 마라. 목숨에 위험이 없는 한 (恨) 항상 마음과 능력의 삼 푼은 숨겨두어라. 그것이 진정한 강 자의 처세법이다. 그럼 훗날 강호에서 다시 만나길 바라며 소형제 의 무운(武運)을 빌겠다. 적미천존(赤眉天尊)> 현수는 멍하니 서 있었다. 그의 가슴에는 기이하게도 사도지존인 적미천존의 인상이 지워지 지 않은 채 깊이 새겨지고 있었다. 그가 설사 사도(邪道)의 거마(巨魔)일지라도 웬지 이상한 정(情) 에 이끌리는 듯한 심정이 들고 있었다. '노선배.......' 현수는 자신도 모르게 내심 그렇게 그를 부르고 있었다. 달마원(達磨院). 그곳은 자질이 특출하여 소림에서 선택받은 기재(奇才)들만이 고 승들로부터 무공수련(武功修練)을 받는 곳이다. 달마원에서 무공수련하는 승려들을 일컬어 범천승(梵天僧)이라고 부른다. 범천승, 그들을 선택하는 조건은 무척이나 까다롭고 철저했다. 그 러나 일단 범천승이 되면 소림최고의 절학(絶學)을 전수 받게 되 며 또한 그들은 장차 소림의 요직을 받게 된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 중 가장 뛰어난 자는 다음 대(代)의 소림장 문인으로 내정(內定)되는 것이었다. 일 대(一代)에 범천승은 단지 십 명(十名) 안팎이었다. 현재에도 소림의 천 명(千名)에 달하는 일반 중들 가운데 범천승 은 이십여 명 정도일 뿐이었다. 현수(玄修). 그가 태실봉의 승불폭에서 소림사로 돌아왔을 때 달마원의 분위기 는 침중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달마원 소속의 승려들은 모두 법당(法堂)에 모여 염불합장을 하고 있었다. 기이하게도 그윽한 향연이 법당을 메우는 가운데 모두 비 통하고 침중한 안색이었다. 현수는 의아심을 금치 못하는 한편, 만면에 의혹을 지으며 법당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한 명의 중이 밖으로 걸어나왔는데 그는 바로 정혜(丁慧)였다. 그는 삽팔나한(十八羅漢)중 가장 젊은 승려이며 또한 정자(丁字) 행렬 중에서도 가장 젊었다. 그러나 그는 현오대사의 수제자로써 자질이 비범하고 능력이 출중해 범천승(梵天僧)에 포함되어 있기 도 했다. 그는 이제 이십사오 세 정도로 다음 장문인으로 내정되어 있었으 며 영준한 용모와 지혜로운 안광 등은 누구나 그가 기재임을 느끼 게 했다. 정혜는 현수를 발견하자 공손히 합장했다. "아미타불... 소사숙님." 현수는 그에게 물었다. "정혜, 어찌된 일이오? 무슨 일이 생겼소?" 정혜는 떨리는 음성으로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소사숙, 사부님께서... 원적하셨습니다." 현수는 충격을 받았다. "혀, 현오사형께서!" 그의 가슴이 격탕을 일으켰다. 불심각(佛心閣). 한 선방(禪房)에서 천심선사가 선정에 든 듯 눈을 감은 채 포단 위에 단정히 정좌하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현수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대사부님! 제자가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현수의 격동된 음성에 천심선사는 두 눈을 떴다. 그의 눈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맑고 고요했다. 그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현수, 네가 하고 싶은 말은 이미 노납이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 너는 천일수련(千日修練)중이니 더이상 신경 쓰지 말아라." "대사부님!" "현수......." 천심선사는 고요하게 현수를 응시했다. "지금 너는 노납에게 묻고 싶은 말이 많이 있을 것이다." 현수는 뭔가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현수, 노납은 네게 한 가지만 말하겠다. 태실봉에서 일어 났던 그 일은 훗날의 네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반드시 굳은 신념으로 헤쳐 나가야만 한다." 그뿐이었다. 천심선사는 두 눈을 스르르 감고 다시 선정에 들고 말았다. 현수는 가슴이 답답했다. 그는 요녀(妖女)백화미(白花美)에 관한 일을 고백하고 싶었고 또 승불폭 뒤꼍 암동 속의 적미천존 여적성에 대해서도 묻고 싶은 말 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어쩔 수 없이 물러나야만 했다. 그는 공손히 천심선사를 향해 삼배를 올린 후 선방을 물러 나왔 다. 어두운 석실(石室). 사방은 완전히 밀폐되어 창문조차 없었다. 석실은 사방 오륙 장이 넘는 넒은 공간을 이루고 있었다. 현수는 석실 중앙에 상의를 벗고 정좌하고 있었고 그의 주위에는 수십 개의 촛불이 켜져 그를 비추고 있었다. 현수는 참선에 든 듯 눈을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크... 르... 릉! 암석이 마찰하는 음향과 함께 석실의 한 쪽 벽면이 갈라졌다. 문 이 열리자 그곳으로부터 한 노승이 들어왔다. 그는 천뢰선사였다. 그의 표정은 엄숙하기 그지 없었으나 현수를 보는 눈빛만은 매우 따뜻했다. 그는 서서히 현수에게 걸어와 입을 열었다. "현수, 열흘이 지났다. 이제 마음 속의 모든 잡념을 떨쳐 버렸느 냐?" "네, 사숙님!" "이제 반야밀다대승신공을 위한 마지막 관문을 뚫어라. 노납은 이 것을 십팔나한관이라 명명(名命)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엄숙했으며 천뢰선사는 횃불같은 눈으로 여전히 미동도 않고 앉아 있는 현수를 응시했다. "잠시 후면 소림의 절정고수인 십팔나한이 들어온다. 그들은 철봉 (鐵棒)으로 너의 전신 삼백육십오 개 혈도(穴道)를 사정없이 격타 할 것이다." 현수는 묵묵히 그의 말을 들었다. "너는 절대 그것을 막아서는 안되며 또한 피해서도 안된다. 단지 맨몸으로 철봉과 부딪쳐야 한다." 천뢰선사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만약 너의 정신이 조금이라도 흩어지면 그것으로 끝장이다. 너는 주화입마(走火入魔)되어 이제껏 쌓은 공(功)을 모두 잃을 뿐만 아 니라 심하면 생명까지 버리게 된다." 현수의 얼굴에는 아무런 동요도 없는 반면 오히려 천뢰선사의 얼 굴에 갈등이 어렸다. 천뢰선사는 염려스러운 눈으로 현수를 응시하며 말했다. "현수, 자신이 없다면 그만 둬도 좋다." 그 말에 현수의 굳게 다물렸던 입이 비로소 열렸다. "사숙님, 제자는 이미 모든 것을 각오했습니다." 천뢰선사의 노안에 경련이 스쳤다. "현수......." 그는 무엇인가 말하려다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만 두자." 그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침중하게 말했다. "현수, 반드시 기억하라. 반야밀다대승신공의 이환결(移環訣)과 탄공결(彈空訣), 그리고 유화결(柔化訣)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 다." "네, 사숙님." 현수는 입술을 지그시 물며 대답했다. "현수, 반드시 성공하길 빌겠다." 천뢰선사는 뒤로 물러나며 외쳤다. "들어와라." 그 순간 열린 문으로부터 십팔 명의 중이 들어왔는데 그들이 바로 십팔나한승이었다. 그들은 모두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며 손에는 길이 일 장(一 丈) 가량에 무게가 백여 근이나 나가는 긴 철봉을 들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정혜(丁慧)도 물론 포함되어 있었다. "십팔나한진(十八羅漢陳)을 펼쳐라!" 천뢰선사의 외 ㎱ 떨어지자 십팔나한은 소리도 없이 신형을 이동 했다. 현수를 화점(花點)에 놓고 그들은 구궁(九宮)의 형태로 에 워쌌다. 현수는 그들을 둘러보며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는 정신 을 모으며 합장했다. 천뢰선사의 물음이 들렸다. "현수, 준비가 됐느냐?" "아미타불......." 불호가 현수의 대답이었다. "그럼 시작해라." 천뢰선사의 말이 다시 떨어지자 십팔나한은 철봉을 쥔 채 현수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그들이 회전하자 주위에 있던 촛불이 일제히 꺼질듯 흔들렸다. 그 러나 한 개도 실제로 꺼지지는 않았다. 정인대사(丁仁大師). 그는 십팔나한의 수좌로 육 순(六旬)이 넘은 노인으로 제일 먼저 현수에게 합장했다. "아미타불... 소사숙, 용서하십시오!" 그의 손에서 무지막지하게 철봉이 날았다. 휘... 잉! 철봉의 끝은 정확히 현수의 벌거벗은 앞가슴 현기혈(玄機血)을 강 타했다. 퍽! '으윽!' 현수는 분명 비명을 질렀다. 엄청난 철봉의 위력에 그는 그대로 거꾸러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비명은 결코 입 밖 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移)... 탄(彈)... 유(柔).......' 대신 현수는 마음속으로 계속 구결을 외웠다. 윙--- 퍽! 또 하나의 철봉이 이번에는 그의 명문혈(命門血)을 강타했다. "욱!" 그의 입에서 한 줄기 피화살이 뻗쳤다. 그러나 쉴 틈이 없었다. "아미타불......." 이번에는 정운(丁雲)의 철봉이 불호와 함께 바람을 일으키며 무섭 게 현수의 장대혈(章臺血)을 쳤다. "우... 욱!" 현수의 입에서 다시 피가 튀었다. 실로 무서운 일이었다. 십팔나한은 모두 소림 절정고수였고 그들 이 전력(全力)을 기울인 철봉의 강타는 설사 일류 고수일지라도 단번에 즉사할 정도였다. 물론 현수는 달랐다. 그는 반야밀다대승신공을 익히기 위해 삼십 오 관을 넘었으며 팔백 일의 껍질을 벗기고 뼈를 깎는 수련을 통 해 이미 전신이 무쇠처럼 단단해져 있었다. 그러나 십팔나한의 철봉은 가히 바위에 구멍을 뚫고 철판을 부술 만큼 위력적이었다. 퍽! "읍......." 십팔나한의 철봉이 현수의 혈도에 정확히 떨어질 때마다 현수는 참혹한 신음을 토했다. 정혜(丁慧)의 철봉이 다시 그의 복부 수분혈(水分血)을 강타해왔 다. '이(移).......' 그는 즉시 정신을 모아 구결대로 전신의 진기(眞氣)를 수분혈로 옮겼다. 그러나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배가 터지는 듯한 고통이 엄습했다. 비록 수분혈에 진력을 모았지만 정혜의 정순한 내공과 철봉의 위 력에 그는 다시 피를 토해야 했다. 십팔나한의 무예는 한결같이 초범했다. 그들이 삼백육십오 혈을 치는데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했으 며 현수는 바로 그들 십팔나한진의 한 가운데에 서 있는 것이었 다. 그의 전신은 이미 시퍼렇게 피멍이 들어 있었고 칠공(七孔)으로 선혈이 낭자했다. 실로 눈 뜨고는 못볼 참혹한 모습이었다. 휙! 현수의 목으로 날아들던 정인(丁仁)의 철봉이 일순 멈칫했다. 그 는 고통에 일그러진 현수의 얼굴을 보고는 차마 철봉을 뻗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천뢰선사의 우렁찬 노성이 떨어졌다. "정인! 모든 것을 망치고 싶으냐?" "아미타불......." 결국 정인은 불호를 외우며 철봉을 뻗을 수밖에 없었다. 퍽! "크윽!" 현수는 마침내 피를 뿜으며 그대로 고꾸라졌다. 그는 한 차례 부르르 전신을 떨더니 이내 축 늘어지고 말았다. 그 의 주위에는 온통 그가 토한 피투성이였다. 그가 혼절하자 십팔나한들은 모두 동작을 멈추었다. 그들의 눈길 은 한결같이 동정을 담은 채 현수를 내려다 보았다. 혈인(血人), 완전히 혈인이었다. 그러나 또다시 천뢰선사의 매몰찬 외침이 들렸다. "정혜! 그에게 청신정혈보환(淸身精血補丸)을 세 알 먹이고 물을 뿌려라!" 정혜는 소스라치듯 움찔했으나 곧 쓰러져 있는 현수에게 다가갔 다. 너무나도 처참한 현수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그는 새삼 진 저리를 쳤다. '소사숙.......' 그러나 천뢰의 명을 어길 수는 없었다. 그는 즉시 품에서 청신정 혈보환을 세 알 꺼내 현수에게 복용시켰다. 그리고 잠시 후 정현(丁玄)이 현수에게 한 동이의 찬물을 뿌리자 현수는 꿈틀거리며 깨어났다. 정혜가 부축하려 하자 현수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혼자... 일어 나겠소." 현수는 비틀거리며 몇 번씩이나 쓰러졌으나 기어이 혼자 힘으로 일어섰다. 그 광경은 실로 처절하고 숙연하기까지 했다. 천뢰선사는 백미를 파르르 떨었으나 눈을 지그시 감으며 외쳤다. "다시 시작해라!" 십팔나한은 그의 명령에도 차마 움직이지 못하고 잠시 멈칫거렸 다. 현수의 몰골이 너무나 처참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현수가 도리어 핏발이 선 눈을 부릅뜨며 괴상하게 쉰 음성 으로 외쳤다. "어서... 시작 하시오. 망설이지... 말고......." 그 말에 십팔나한은 모두 섬ㅉ한 느낌을 받았다. 현수의 초인적인 의지에 차라리 그들은 공포심마저 느낄 정도였다. 천뢰선사가 뒤이어 외쳤다. "망설이지 마라. 그것은 현수를 돕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치는 일이다." 십팔나한은 비로소 다시 움직였다. 휙! 윙--- 퍽! 퍽! '크윽! 이(移)... 크... 윽!' 하루, 이틀....... 고통의 나날은 끝없이 되풀이 되었다. 십팔나한은 매일같이 현수의 전신 삼백육십오 혈을 철봉으로 강타 했으며 그 고통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차츰 날짜가 지날수록 그의 고통은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 했다. 철봉이 그의 혈도를 치는 순간 저절로 전신의 경기가 한 곳 으로 집중되어 혈도(穴道)를 차단하며 그 부위는 쇠처럼 단단해지 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반야밀다대승신공의 이환결(移環訣)을 완성한 것으로 써, 이환결이란 전신의 진력을 뜻(意)에 따라 하나의 환(環)을 이 루어 이동시켜 적의 공격을 막는 비기(秘技)였다. 어느덧 백(百)여 일이 지났다. 무수한 고통의 연속이었다. '탄(彈)... 탄공결(彈空訣)!' 현수는 내심 부르짖었다. 팍! 단중혈(檀中穴)에 격중되었던 정인(丁仁)의 철봉이 막강한 반탄력 에 튕겨나갔다. 팍! 팍! 팍! "헉!" 연달아 현수의 혈도를 치던 철봉들도 모두 튕겨나갔다. 현수는 마침내 이환결에 이어 탄공결(彈空訣)마저 완성한 것이었 다. 탄공결은 내가의 진력을 신체 한 부위에 모아 강력히 쏘아내는 것 으로 절정에 이르면 단지 뜻(意)만으로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 고 암경(暗勁)을 쏘아 적을 살상할 수 있었다. 실로 반야밀다대승신공은 오묘불가사의한 기학(奇學)이었다. 다시 백 일(百日)이 흘렀다. 현수는 석실 한가운데 우뚝 서 있었다. 십팔나한은 그의 주위에 여전히 구궁(九宮)의 형태로 서 있었으며 그것은 이백 일 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광경이었다. 천뢰선사가 엄숙하게 입을 열었다. "촛불을 모두 꺼라!" 수십 개의 촛불이 일제히 꺼지고 석실 안은 손가락을 코에 대어도 안보일 정도로 암흑을 이루었다. "현수, 오관(五官)을 모두 차단하라. 눈을 감고 청각도 끊고 후각 도 차단, 모든 감각을 죽여라! 일체 무념무아무상무심(無念無我無 常無心)의 상태로 들어가라." 현수는 천뢰선사의 지시대로 했다. 곧 암흑 속에서 그는 무(無)가 되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인 상태, 즉 그는 허공에 부유하는 공기나 다름 없는 몸이 되고 있었다. 실제로 이런 상태를 즉각 이루기란 하늘로 오르기만큼 어려운 일 이었으나 현수, 천하제일의 기재인 그에게만은 가능한 일이었다. "십팔나한, 동시에 그를 공격해라!" 천뢰선사의 말이 떨어졌으나 이미 온몸의 감각을 죽여버린 현수의 귀에는 그 말이 들려오지 않았다. 십팔나한은 일제히 철봉을 뻗었다. 아무런 소리도 공기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것은 그만큼 그들의 봉 술이 초절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설사 음향과 공기의 진동이 있 다한들 현수는 이미 그것을 감지할 수가 없었다. 정인(丁仁)의 철봉이 현수의 영대혈(靈坮穴)을, 정호(丁虎)의 철 봉은 현수의 머리 한 가운데 백회혈(百會穴)을, 정혜(丁慧)는 명 문혈(命門穴), 정운(丁雲)은 목 밑 천돌혈(天突穴)을....... 십팔나한의 철봉은 동시에 현수의 전신 십팔 개 사혈(十八個死穴) 을 격타했다. 현수는 미동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열여덟 개의 철봉이 혈도에 닿기도 전에 이미 현수의 심신은 일체(一體)가 되어 있었 다. '이환(移環)... 탄공(彈空)... 유화결(柔化訣)!' 마침내 천지합일(天地合一)의 상태를 이룬 것으로써, 그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상황을 보여주고 있었다. "으윽!" 십팔나한은 철봉이 현수의 혈도를 강타하는 순간 손에 극심한 통 증을 느껴 일제히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현수의 각 혈도에서 무서운 경기가 흘러 철봉의 경력을 흡수했을 뿐만 아니라 그 경력이 배가 되어 도로 튕겨나온 것이었다. "크으으......." 십팔나한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주르르 밀려났고, 그 순간 석실 안의 촛불이 일제히 밝혀졌다. 천뢰대사가 벌떡 일어서며 격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쿠르르릉! 석실의 문이 열리며 천심(天心), 천기(天機) 두 고승이 나란히 들 어오는 것도 보였다. 그들 또한 격동 어린 시선으로 석실 안을 둘 러보고 있었다. 반면에 십팔나한은 경악해마지 않았다. 놀랍게도 그들의 손에 든 철봉들은 한결같이 엉망으로 휘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성공이다!" 천뢰선사가 감격에 찬 음성으로 외쳤고 천심선사는 현수를 향해 합장하며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현수, 그대의 반야밀다대승신공의 완성을 축하한 다!" 드디어 모든 것이 끝났다. 현수는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서 있었으나 전신에 밀려드는 진한 감동을 어쩔 수가 없었다. '드... 드디어... 성공... 했구나.......' 그는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사부님!" ■ 대소림사 제1권 제7장 소림(少林) 파문(破門) -1 ━━━━━━━━━━━━━━━━━━━━━━━━━━━━━━━━━━━ 세월은 유수(流水)같이 흘러 일 년이 지났다. 그동안 현수와 천뢰선사는 자죽림 내의 불망헌에서 한 걸음도 밖 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들이 불망헌에서 무엇을 하는지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소림의 승려들은 자죽림을 지나치면서 모두 깊은 호기심을 느꼈지 만 아무도 감히 금지로 설정된 자죽림 속으로 들어갈 마음을 품지 못했다. 불망헌의 한 방안. 현수는 정좌하고 있었다. 그의 머리는 어느새 상당히 길게 자라 어깨까지 늘어져 있었고 입고 있는 승포도 낡을대로 낡아 먼지마 저 두껍게 앉아 있었다. 천뢰선사는 그의 맞은 편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 만이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현수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의 눈빛은 마치 물처럼 고요하기 만 했다. 그를 지켜보고 있던 천뢰선사의 백미가 꿈틀함과 동시에 횃불같은 눈에서는 이채가 번쩍 빛났다. "현수, 깨달음이 있느냐?" 현수의 입술이 담담히 열렸다. "있습니다." "무엇이냐?" "무(無)에서 유(有)를 발견한 듯 했습니다." 그 말을 듣자 천뢰선사의 얼굴에 기쁨이 어렸다. "오! 장하다. 노납은 기쁘기 한량 없구나." 그러나 곧 천뢰선사의 얼굴은 엄숙하게 굳어지더니 현수를 날카롭 게 쏘아보며 말했다. "현수, 이제 너는 소림 칠십이종절예를 모두 터득했다. 그러나 한 가지 명심할 것이 있다." "아미타불... 말씀하십시오. 사숙님." "앞으로 소림의 칠십이종절예를 모두 익힌 사람은 너로서 끝나야 한다. 이 비법(秘法)은 영원히 그 누구에게도 전수할 수가 없다." 현수는 놀라며 물었다. "어째서입니까?" 천뢰선사는 대답하지 않고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는 대 나무 탁자로 걸어가 찻주전자를 들더니 찻잔에 물을 따랐다. 그가 계속 따르자 잔이 넘치고 찻물은 바깥으로 흘렀다. "아!" 현수는 그의 그런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내 깨달을 수 있었 다. 그는 고개를 숙이며 공손히 말했다. "사숙님, 제자 비로소 사숙님의 뜻을 알겠습니다." 천뢰선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무엇이든 적당한 것이 좋다. 많으면 넘치고 강하면 부러 진다." "으음." "이것은 노납이 백수십 년을 살아오면서 느낀 진리다." 할 말을 모두 마친 듯 천뢰선사의 눈빛은 따뜻하게 변했다. "현수, 너는 노납의 말을 이해했느냐?" "네, 사숙님." 천뢰선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이제 노납의 모든 것을 배웠다. 이제 내일부터는 장경각(藏 經閣)으로 가서 천기사제(天機師弟)에게 배워라." "사숙님?" "천기사제는 소림사상 최고의 인재다. 그의 머리는 천하에서 가장 총명하여 한 번 본 것은 절대 잊지 않고 모두 기억한다. 그래서 그의 머리에는 소림 칠십이종절예는 물론 그 밖의 천팔백육십 종 의 무학이 모두 들어있다." 천뢰선사는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가 만약 무공을 익힐 체질이었다면 노납을 훨씬 능가했을 것이 다." 천뢰선사는 여전히 현수가 입을 다물고 있자 문득 너털웃음을 졌 다. "허허허... 현수, 이제 너와 나는 헤어질 때다. 왜, 서운한가?" "사숙님......." "허허허... 이 녀석! 우리 차를 마실까?" "사숙님......" "껄껄... 자, 현수. 이 차는 노납이 끓인 것이니 맛 좀 보아라. 아마 네 솜씨보다 나을 것이다." 현수는 일어나서 죽탁으로 다가가 두 손으로 공손히 차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차맛을 도통 느낄 수가 없었다. 차맛을 느끼기에는 그의 서운한 감정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었다. 그가 차를 다 마시는 동안 천뢰선사는 그의 모습을 정이 넘치는 눈길로 보고 있었다. 그리고 현수가 찻잔을 내려놓았을 때 이미 그는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사숙님!' 현수의 가슴에는 형언키 어려울 정도로 뜨거운 정(情)이 일어나고 있었다. 장경각(藏經閣). 이곳은 역대 소림의 모든 불경(佛經)을 보관하는 곳으로 소림사에 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곳이었다. 장경각 내에는 막상 천축(天 竺)에서 온 불경의 진본보다도 더 많은 소림 무학의 비급(秘級)이 소장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장경각의 내부는 온통 서가(書架)로 이루어져 있었다. 물론 수십만 권에 달하는 불경들이 고풍을 풍겼으나, 특히 그것들 중 소림 천 년 동안 창조된 무공과 외부에서 흘러들어온 수많은 무공비급은 따로 보관되어 있었다. 더우기 그 누구도 모르는 사실이 있었으니 그것은 장경각 내에 정 종(正宗)이 아닌 사도(邪道)의 비급도 백여 권 이상 소장되어 있 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말하자면 그동안 소림에 의해 제거된 마두(魔頭)들의 비예 (秘藝)들이었다. 장경각 내의 한 선방(禪房). 그곳에 장경각주인 천기선사와 현수가 마주 앉아 있었다. 현수의 윤기 나는 머리칼은 길게 자라 단정히 묶여져 있었다. 그는 왜 머리를 다시 깎지 않는가? 그것은 바로 천심선사의 지시 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머리를 흰 띠로 묶자 현수의 영준한 용모는 마치 선인(仙人)을 방 불케 할 정도로 뛰어났다. 천기선사는 그와는 대조적으로 수척하고 쇠잔한 모습이었다. 그는 근래 들어 급격히 체력이 쇠퇴하여 완연히 병색(病色)이 돌 았으며 기실 기동조차 불편했다. 그는 자신이 직접 만든 바퀴 네 개가 달린 사륜거에 몸을 의지하 는 신세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천기선사는 주름살이 깊게 패인 얼굴에 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현수를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현수, 너의 몸에 현기가 서리는구나." 현수는 다만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고 천기선사는 반대로 고 개를 치켜들며 말했다. "현수, 밖으로 나가보자." "네, 사숙님." 현수는 비로소 대답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사륜거의 뒤로 돌아 가 조심스럽게 밀었다. 사륜거는 소리 없이 그가 미는대로 선방을 빠져 나갔다. 눈(雪). 눈이 오고 있었다. 어느덧 겨울이었고 잿빛 하늘을 가득 메우며 탐스러운 눈송이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허어! 첫눈이 내리는구나." 천기선사는 하늘을 보며 감회 깊게 중얼거렸다. 현수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본시 눈(雪)을 좋아 하던 그였으나 그 눈은 그에게서 너무나 많은 것을 앗아 갔지 않 은가? 문득 천심선사가 물었다. "현수, 올해 너의 나이가 몇이냐?" "십팔 세이옵니다." "흠, 올해만 넘기면 십구 세가 되겠군." 천심선사는 눈발을 맞으며 다시 물었다. "현수, 너는 대사형이 왜 너를 노납에게 보냈는지 아느냐?" 현수는 공손히 대답했다. "사부님께 가르침을 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천심선사의 주름진 얼굴에 웃음이 피어났다. "허허허... 현수, 너는 이미 천뢰선사에게서 모든 것을 배웠다. 그런데 더이상 무엇이 필요하느냐?" 천심선사는 손을 내밀어 눈송이를 받으며 말했다. "현재 너는 너무나 강하다. 너는 느끼지 못할지 모르지만 너의 모 습에서 풍기는 기운은 상대가 섬ㅉ해 할 정도로 강하다." 현수는 그 말에 흠칫했으나 이를 내색치는 않았다. "현수, 사륜거를 밀어라." 천심선사의 말에 현수는 묵묵히 사륜거를 밀 뿐이었다. 쏟아지는 눈발 속으로 사륜거는 굴러가고 두 사람의 마음은 하나 로 합(合)해지고 있었다. 천기선사는 담담히 말했다. "현수, 너는 이제 좀 약해질 필요가 있다." 현수는 의혹을 금치 못했다. 실상 그는 여태까지 강해지기 위하여 천 일의 가혹한 무공수련을 쌓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약해지라는 것은 대체 무슨 말인지....... "천뢰사형이 강(剛)이라면 노납은 유(柔)다. 강유(剛柔)가 조화되 어야만 진정한 고수랄 수 있다." 천기선사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장경각에는 소림 칠십이종절예 외에도 수많은 무공이 있다. 그러 나 정작 너에게 필요한 것은 거의 없다." 천기선사는 허리를 숙여 땅에 쌓인 눈을 한 웅큼 집어들더니 눈송 이를 뭉쳐 앞으로 휙 던졌다. 눈덩이는 겨우 일 장쯤 날아가다 힘없이 떨어졌다. "쯧! 노납의 힘은 점점 쇠약해 가는군." 천기선사는 혀를 차더니 다시 말했다. "장경각에 비장된 천팔백육십 종의 무학이 칠십이종절예보다 강하 다면 어찌 그것이 정종무학(正宗武學)이 되지 못했겠느냐?" 그의 말은 백번 지당한 말이었고 현수는 내심 수긍하며 귀를 기울 였다. "노납이 너에게 가르칠 것은 천팔백육십 종의 무공 중 단 한 가지 뿐이다." "음." "그리고 그 밖에는 네가 앞으로 해야할 일을 이루기 위한 준비일 뿐이다." 천기선사는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장경각의 뒤 뜰은 화원과 가산으로 꾸며져 있었다. 천기선사는 손 을 들어 가산의 한 모퉁이에 있는 바위를 가리켰는데 그것은 오 장(五丈)밖에 있었다. "현수, 눈을 뭉쳐 던져 저 바위를 부숴 봐라." 현수는 의아했으나 곧 지시대로 머리를 숙여 눈을 한웅큼 집어 뭉 쳤다. 그리고 그는 가볍게 앞으로 던졌다. 눈은 소리없이 날아가 바위 속에 매끈하게 박혔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눈이 단단하기 그지없는 바위 속에 소리도 없이 깊이 박히다니....... 천기선사는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하다. 너의 무예는 지금 현 자(玄字) 항렬 중에서 제일 고강 하다." 그러나 천기선사는 이내 탄식하며 말했다. "노납은 일 장 밖까지도 눈을 던지지 못했다. 너무도 늙고 쇠약해 졌다." 천기선사는 다시 어투를 환원하여 말했다. "그러나 또한 저 바위를 부수려면 부술 수도 있다." 천기선사는 현수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어 그가 왼손으로 사륜거의 팔걸이 한 부분을 누르자 놀라운 일 이 벌어졌다. 파파파팟! 콰... 쾅...! 푸른 불꽃이 바위를 덮는가 싶은 순간, 폭발음과 함께 바위가 완 전히 가루가 되고 만 것이었다. "아!" 현수는 크게 놀란 반면 천기선사는 담담히 말했다. "노납이 너에게 가르칠 첫번 째는 바로 이같은 기관학(機關學)과 노부가 평생을 연구한 다섯 가지 암기술(暗器術)이다." 천기선사의 눈이 기이한 빛을 띄어 갔다. "무(武)란 힘(力)만 가지고 다루는 것이 아니다. 노납과 같이 힘 없는 자들도 단지 머리를 조금만 쓰면 힘 하나 들이지 않고 사람 을 해칠 수가 있다. 암기술(暗器術)은 비록 정종(正宗)이라 할 수 는 없지만 때에 따라서는 커다란 위력을 볼 수가 있으니 역시 익 혀두는 것이 유리할 것이다." "네, 사숙님." 현수의 물처럼 고요하던 눈이 반짝 빛났다. 그의 감추어진 혜지가 노출된 것이었다. 그것을 느낀 천기선사는 만족한 듯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수, 앞은 노납이 직접 가꾼 화원이다. 화원 앞으로 세 걸음 나 가 봐라." 현수는 의아했으나 곧 지시대로 세 걸음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경악성을 내지르고 말았다. "앗!" 갑자기 주위환경이 돌변한 것이었다. 그가 서 있는 곳은 놀랍게도 망망대해 한 가운데의 암초 위였다. 현수는 경악을 금치 못하는 한편 곧 느끼는 것이 있었다. '기문진법(奇門陳法)에 걸렸구나!' 그는 우선 마음을 침착하게 가라앉혔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계산하여 자신이 조금 전 들어왔던 방향으로 나갔다. 그러나 주위 환경이 다시 변화를 일으켰다. 대해는 사라지고 처처 에 기암절봉(奇岩絶峯)이 솟아있는 심산유곡(深山幽谷)으로 변해 버린 것이었다. '이럴 수가?' 현수가 아연실색하는 사이, 주위의 환영들이 모두 사라지며 천기 선사의 부드러운 말이 들렸다. "너에게 두번 째로 가르칠 것은 바로 이 기문진학(奇門陳學)이 다." 현수는 돌아서며 감탄과 존경의 눈으로 천기선사를 바라보았다. 천기선사는 점점 더 탐스럽게 떨어져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담담 히 말했다. "현수, 눈이 아름답구나. 조금만 더 나가보자." 현수는 다시 사륜거를 밀었고 퍼부어 내리는 눈발 속으로 두 사람 은 나아갔다. "오백 년 전 소림의 이십일 대 장문인이신 광무사존(廣武師尊)께 서는 속가(俗家) 시절 당시 강호제일의 검객이셨다." 천기선사의 말이 계속 되었다. "그 분은 이후 삭발하고 소림에 입문한 이후에도 계속 검을 통해 진리를 터득코자 하셨다." 현수는 두 눈에서 현기를 품어내며 천기선사의 말에 귀를 모았다. 눈발은 점점 더 굵어지고 있었다. "그 후 장문인이 되시고 육십 년이 지난 후 광무사존께서는 열반 에 드시기 직전 후대에게 한 권의 검보(劍譜)를 남겨 놓으셨다." 천기선사는 손을 내밀어 눈송이를 받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검(劍)은 원래 소림의 정종무학이 아니다. 그래서 그 검 보는 장경각에 묻힌 채로 오백 년간 햇빛을 보지 못한 채 지냈 다." 천기선사는 손바닥 위에서 녹아 물이 되는 눈송이를 내려보며 말 을 계속했다. "소림에서는 훨씬 이후에 달마삼검(達磨三劍)이 창안되어 유일한 정종검법으로써 칠십이종절예의 하나로 삼았을 뿐, 광무사존이 남 기신 검보는 완전히 잊혀져서 아무도 익히지 않았다. 만일 노납이 장경각 안의 수십만권에 달하는 불경과 무공비급을 모두 읽지 않 았다면 역시 영원히 찾지 못했을 것이다." 현수는 호기심이 크게 일어났다. "그 검법은 어떤 것입니까?" 천기선사는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불영구검(佛影九劍)! 그것이 검법의 이름이다, 또한 그것은 실로 신비한 검법으로 만약 누군가 노납더러 불영검법을 칠십이종절예 에 포함시키라면 서슴없이 칠십이종절예중 두번 째 위치에 놓겠 다." 현수가 크게 놀라는 것을 보며 천기선사는 다시 덧붙였다. "바로 반야밀다대승신공의 다음에 말이다." 거기까지 이른 천기선사는 너털웃음을 웃었다. "허허허... 소림의 폐쇄성 때문에 천고(千古)의 기학(奇學)이 오 백 년 동안 먼지 속에 버려진 것이야." 눈(雪), 눈이 더욱 심하게 쏟아졌다. 현수와 천기선사의 몸에는 눈이 상당히 쌓였고 천기선사는 심한 기침을 해댔다. "쿨록! 쿨... 록!" 현수는 몹시 염려스러워진 듯 물었다. "사숙님, 이만 안으로 들어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 말에 천기선사는 가슴을 쓸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수는 사륜거의 방향을 반대로 하여 밀고 갔다. 천기선사는 다시 입을 열었다. "불영구검(佛影九劍)은 바로 네가 유일하게 배울 천팔백육십 종 무예 중 한 가지다." 천기선사의 기침은 끊이지 않았다. "쿨... 럭! 그러나 그 분의 불영구검에도 일곱 군데의 헛점... 쿨... 럭... 이 있다." "사숙님 기침이......." "그 헛점을 보완하면 불영구검은... 천하무적의 검법이 된다." 그 사이 사륜거는 장경각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눈은 이미 폭설(瀑雪)로 변해 소림사 전체를 은빛으로 덮고 있었 다. 마지막 겨울 (冬)의 추위는 기승을 부렸다. 대단한 추위가 눈보라와 함께 세차게 숭산(崇山)을 휩쓸었다. 소실봉 기슭의 한 바위 위에 한 명의 노승(老僧)이 우뚝 서 있었 다. 구 순이 넘어 보이는 노승은 승포를 눈보라에 휘날리며 아까부터 계속 사방을 살피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자 품 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그것은 한 마리의 비둘기가 들어있는 조그만 철책이었는데 노승은 곧바로 철책을 열었다. 푸르르르륵! 비둘기는 철책이 열리자마자 잽싸게 허공으로 날아 올랐다. 목에 작은 죽통(竹筒)을 매달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것은 바로 밀 서(密書)를 전하는 전서구였다. 비둘기가 눈보라 속으로 사라진 순간 노승은 입가에 야릇한 미소 를 지었다. 그리고 다시 주위를 잠깐 살피고는 번뜩 신형을 날려 사라졌다. 그런데 노승이 사라지자마자 다시 한 명이 바위 위에 나타났다. 그는 거의 백여 세에 가까운 또다른 노승이었다. 특징이 있다면 그는 오른 소맷자락이 바람에 멋대로 펄럭이는 외 팔이었고 얼굴에 왼쪽 이마에서 오른쪽 뺨으로 긴 검상(劍傷)이 나 있어 섬뜩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었다. 이런 인상 때문에 그에게서는 도저히 불승다운 면모를 느낄 수가 없었다. 소림 계도원주(戒導院主) 현각대사(玄覺大師). 그는 바로 소림의 계율을 어기는 자에게 벌을 내리는 계도원을 담 당하는 현각대사로 소림에서 가장 냉정한 인물이었다. 원래 그는 과거 육십여 년 전 희대의 마두(魔頭)였으나 당시의 소 림 장문이었던 천심선사에게 감동을 받아 소림에 입문하게 된 인 물이었다. 현각대사는 노승이 사라진 곳을 응시하며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현우(玄羽)! 과연 대사부님의 추측이 맞았군." 현각대사는 하나 뿐인 왼팔을 들어 올렸는데, 놀랍게도 그의 손에 는 조금 전 눈보라를 뚫고 날아갔던 비둘기가 잡혀 있었다. 현각대사는 비둘기 목에 매달린 죽통을 떼어내며 냉막하게 중얼거 렸다. "현우여, 그대는 아는가? 이 년(二年) 동안 단지 주인을 찾아내지 못했을 뿐, 그대가 띄워 보냈던 모든 전서구가 빈승의 손에 잡혔 음을......." 휙! 현각대사는 몸을 날려 소림사를 향해 사라졌다. 밤(夜). 칠흑같은 밤이었다. 장경각(藏經閣)도 어둠에 묻혀 있었다. 휘익! 어둠을 뚫고 장경각으로 한 줄기 인영이 날아들었는데 그는 머리 서부터 발끝까지 흑의(黑衣)와 복면으로 감싼 자였다. 흑의복면인 은 장경각 앞에 내려서자 잠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유령같은 신법 으로 장경각 안으로 스며 들었다. 그는 장경각의 구조를 매우 잘 아는 듯 했다. 도합 십팔 개의 서고로 된 장경각은 총 오 층이었으며 층마다 서 고가 있고 서고 안에는 종으로 서가(書架)가 설치되어 있었다. 휙! 휙! 흑의 복면인은 조금도 멈칫하는 기색없이 일 층부터 오 층까지 침 투해 올랐다. 오 층을 제외한 아래는 불경이 장서되어 있었으나 오 층의 중앙서 고에는 소림비전무공비서(少林秘傳武功秘書)가 배치되어 있었다. 흑의복면인은 마침내 무경고(武經庫)에 들어왔다. 무경고에는 고색 창연한 소림의 칠십이종절예를 수록한 비급과 그 밖에도 천팔백육십 종의 무학기서(武學奇書), 그리고 수천 권에 달하는 무서가 질서정연하게 꽂혀 있었다. 그러나 흑의복면인은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는 무경고의 서가를 그대로 지나쳐 계속 안 쪽으로 들어갔다. 하나의 혈오목(血烏木) 탁자 위. 그곳에 고색창연한 푸른색 옥갑(玉匣)이 놓여 있었다. 흑의복면인 은 옥갑을 뚫어져라 노려보며 조심스럽게 탁자로 다가갔다. 그의 손끝이 약간씩 떨리고 있었다. 그는 마음의 동요를 느끼는 듯 옥갑에 손을 대고 잠시 멈춰 있다 가 뚜껑을 열었다. 그 속에는 낡을대로 낡은 양피로 된 책자가 두 권 포개져 있는 것이 보였다. '이것이 바로... 천 년 소림의 맥을 이어 온 역근경(易筋經)과 세 수경(洗髓經)이다!' 흑의복면인의 손 끝이 아까보다 더욱 눈에 띄게 떨렸으며 그의 복 면 사이로 노출된 두 눈에는 심한 갈등이 어렸다. 그러나 결국 결심한 듯 그는 옥갑 속에 든 두 권의 책자를 집었 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윽!' 그는 손 끝에 무형의 기운을 맞고는 떨어져 나갈 듯한 통증을 느 꼈다. 그는 불에 데인 듯 놀라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한 줄기 불호성이 그의 고막을 때렸다. "아미타불......." 동시에 그의 앞에 마치 허공에서 나타난 듯 한 명의 청년이 내려 섰다. 놀랍게도 청년은 현수였다. 현수는 회색 승복을 입고 있었는데 이미 허리까지 자란 검고 윤기 나는 긴 머리칼을 단정히 묶고 있었다. 실로 비범한 신태가 흐르 는 신비한 모습이었다. 흑의복면인은 그를 보자 부르르 떨었다. '현수!' 현수는 합장하며 낭랑하고 담담한 음성으로 물었다. "아미타불... 시주께서는 누구신데 감히 금역(禁域)인 장경각에 침입한 것이오?" 흑의복면인의 눈빛에 초조함이 가득 어렸다. 그는 당황하여 내심 중얼거렸다. '큰일이다! 이 녀석을 빨리 해치우지 않으면 곧 장경각을 지키는 오대수장승(五大守藏僧)이 들어온다!' 현수는 다시 추궁했다. "시주는 어찌 답이 없으시오?" "닥쳐라!" 흑의복면인은 낮게 외치고 나서 다짜고짜로 일 권(一拳)을 날렸 다. 현수는 흠칫 놀랐다. "금강복호신권(金剛伏虎神拳)! 그대는 어찌 소림의 무공을 알고 있소?" 위---잉! 권풍이 현수의 어깨를 스쳤다. "말이 많다!" 흑의복면인은 계속 권력을 날렸다. 금강복호신권. 이는 소림 칠십이종절예 중 하나로 소림의 제 십이 대 장문인이 창안했다. 그런데 그 위력은 너무도 패도적(覇道的)이어서 대성 (大成)하면 백 장(百丈) 밖의 바위를 박살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알려진 경지는 단지 사오 장 밖의 나무를 부러 뜨릴 정도의 위력이었다. 그 이유는 대성하기가 극히 힘들기 때문 이었다. 윙---! 윙---! 흑의복면인이 주먹을 뻗을 때마다 무서운 권풍이 뻗었다. 또한 흑의복면인은 내공(內功)이 정심하여 현수가 물흐르는 듯한 신법으로 피할라치면 빗나간 권력을 즉각적으로 쉽게 회수하기도 했다. 그것은 소란을 피워 장경각을 지키는 오대수장이 몰려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으며, 그로 미루어 흑의복면인의 금강복호신권 은 완숙의 경지에 이른 것이 분명했다. 윙! 윙----! 권풍 사이를 누비며 현수는 말했다. "아미타불... 시주께서 계속 이렇게 나온다면 소승도 무례를 범하 겠소." 현수는 마침내 왼손을 칼날처럼 세워 흑의복면인을 찔러갔다. "으윽! 천불인수(千佛刃手)!" 흑의복면인은 권세가 흩어지는 것을 느끼며 이번에는 급격히 초식 을 나한십팔장(羅漢十八掌)으로 바꾸었다. 휙! 팍! 팍! 팍! 복면인의 장력은 마치 도끼로 장작을 패듯 위력적이고 날카롭게 현수를 밀어부쳤다. 현수는 그만 깊은 의혹에 잠기고 말았다. '이 자가 쓰는 무공은 모두 소림 칠십이종절예다. 도대체 누구이 길래?' 어느덧 두 사람의 공방전은 삼십여 초가 흘러갔다. 좁은 공간 속 에서 그들은 막상막하의 전세를 유지했는데 그야말로 갖가지 소림 의 절예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다만 흑의복면인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초조함을 금치 못했고 현수는 약간 뒤로 신형을 물리며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시주, 할 수 없이 소승은 실례를 범하겠소이다." 그는 양손을 합장하더니 그대로 앞으로 쭉 뻗었다. 슈---- 웅! 웅휘한 경기가 뻗었다. "앗! 범자대비공(梵慈大悲功)! 네... 네가 그것까지?" 흑의복면인은 크게 놀란 듯 했다. 두 사람의 경력이 마주치며 폭 음을 냈다. 꽝---! "우욱!" 흑의복면인은 엄청난 압력이 가슴을 치는 것을 느끼며 뒤로 주르 르 오 보(五步)나 물러났다. 그의 복면 입가가 금세 피로 젖었으 나 그는 눈에 살기를 띄더니 대뜸 양손을 치켜 세웠다. 그러자 괴이하게도 그의 손은 청색 기운을 띄었다. 현수는 흠칫했 다. '저것은 대체 무슨 무공이길래?' 흑의복면인은 쌍장을 뻗으며 음침하게 외쳤다. "이 놈! 청강마라공(靑剛魔羅功)을 받아랏!" 현수는 결코 상대의 공격을 경시하지 않았다. 쏴아! 푸른색 장영(掌影)이 몰려오자 그는 전신에 반야밀다대승신공을 육 성(六成)까지 일으켜 장심(掌心)에 모으더니 즉시 일 장을 내 쳤다. "으악!" 흑의복면인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튕겨 나갔다. 아무런 소리도, 형체도 없었다. 그럼에도 흑의복면인은 마치 환상 처럼 입에서 피를 뿜으며 그대로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세차게 몸을 벽에 부딪치며 바닥에 떨어진 그는 이내 몸을 축 늘 어뜨리고 말았다. "아! 이... 이럴 수가!" 현수는 이 뜻밖의 광경에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반야밀다대승신공의 위력이 이렇게 강하다니! 단지 육 성 밖에는 펼치지 않았는데.......' 그는 자책을 느끼며 흑의복면인에게 다가가 상처를 살펴 보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안색은 이내 창백하게 질리고 말았다. "주, 죽었다!" 흑의복면인은 가슴이 박살나고 내장이 가루가 되어 즉사한 상태였 다. 현수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내, 내가... 살생(殺生)을 하다니......." 현수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떨리는 손으로 흑의인의 복면을 벗겨 보았다. "앗! 현... 현우사형(玄羽師兄)!" 믿을 수 없게도 복면인은 현우였다. "이, 이게 대체......." 현수는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느낌이 들 뿐이었다. "아미타불......." 그의 등 뒤에서 창노한 불호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현수는 흠칫하여 뒤로 돌아섰다. 언제 당도했는지 사륜거에 단정히 앉은 천기선사와 계도원주인 현 각(玄閣), 그리고 장경각을 지키는 정 자(丁字) 돌림의 오대수장 승이 우뚝 서 있었다. "사... 사숙님!" 현수는 천기선사의 발 아래 털썩 무릎을 꿇었다. "아미타불......." 천기선사의 온통 주름진 얼굴은 고요하기만 했다. 그러나 현우의 시체를 보는 순간 그의 두 눈에는 고통이 배어나고 있었다. "사숙님......." 현수는 거의 울부짖듯 머리를 바닥에 박았다. 비로소 천기선사가 입을 열었다. "현수여,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그는 고개를 돌리며 다시 말했다. "현각, 현우의 시신을 치워라." "네, 사숙님!" 계도원주 현각은 공손히 답했고 오대수장승들이 즉시 앞으로 나가 현우의 시신을 들었다. 현각을 위시한 그들 오 인은 굳은 표정으 로 시신을 메고 밖으로 사라졌다. 천기선사는 현수에게 침중하게 말했다. "현수, 지금 곧 불심각(佛心閣)으로 가서 대사형을 뵈어라." "사숙님......." 천기선사는 괴로운 듯 두 눈을 스르르 감았다. "아미타불... 대소림에서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다니......." 천시선사는 사륜거를 돌려 밖으로 사라져 갔다. '사숙님.......' 현수는 고개를 떨구었다. 불심각(佛心閣). 천심(天心), 천뢰(天雷), 천기(天機) 등 삼성승(三聖僧). 그들은 눈을 내려감은 채 나란히 불심각의 한 넓은 선전에 앉아 있었다. 분위기는 침중하기 이를 데 없었다. 벌써 시간이 한참 흘렀는데도 선전 안은 침묵만이 흐를 뿐이었다. 마침내 가운데 앉은 천심선사 가 먼저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현수, 네가 소림에 입문한 지 얼마나 되었느냐?" 현수는 공손히 대답했다. "사 년 반이 되었습니다." "아미타불......." 천심선사는 담담히 현수를 내려 보았다. "현수, 한 가지 묻겠다. 불문오계(佛門五戒)와 소림십계(少林十 戒) 중 첫번 째가 무엇이냐?" 현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 살계(殺戒)이옵니다." 천심의 고요한 눈빛이 갑자기 흔들렸다. "그렇다, 바로 살계다." 그는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부터 팔백 년 전 각원사존(覺遠師尊)께서 소림십계를 만들었 으나 그 중 몇 가지 계율은 강호무림과 깊은 관계가 있는 본문의 특성 때문에 종종 지켜지지 못했다." 현수는 고개를 푹 떨군 채 어찌할 바를 몰랐다. "특히 마도(魔徒)가 창궐할 때에는 제마멸사(制魔滅邪), 항마참요 의 뜻으로 살계를 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소림십 계는 그 후 다소의 융통성을 지니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소림입 문(少林入文) 오 년 이내에만 살생을 금지시킨 것이다!" 현수의 몸이 중심을 잃을 듯 흔들렸다. 천심선사는 탄식하며 말했 다. "그러나 현수, 그대는 그 오 년 안에 살계를 범했다." '사부님.......' "그러므로 노납으로선 한 가지 결정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 다." 그 말에 천뢰, 천기선사는 모두 안색이 굳어지며 감았던 눈을 떴 다. 그들의 눈은 안타까운 빛을 띄며 현수에게 향해졌다. 천심선사의 마지막 말이 떨어졌다. "현수여! 너에게 오늘부로 소림파문(少林破門)을 명(命)한다." 현수는 또 한번 몸을 부르르 떨며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천심은 강경하게 그를 거부했다. "현수! 말하지 마라, 이것은 불존의 뜻이다. 비록 배신자 현우를 죽인 너의 살생이 정당한 것이라고는 하나 살생은 살생이다." 천심선사의 말에는 태산같은 위엄이 있었다. 현수는 감히 항거할 수 없음을 느끼고 그만 고개를 다시 꺾고 말 았다. "사부님......." 천심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현수, 네가 비록 파계(破戒)하여 영원히 소림제자가 될 수는 없 지만... 그러나 여기에는 뜻이 있느니라." 현수는 그 말이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천심선사는 물같이 고 요한 눈으로 현수를 자애스럽게 내려다보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 "현수, 이젠 노납이 모두 이야기해 주겠다." 현수는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귀를 기울였다. "왜 너를 소림에 삭발 입문 시키면서도 머리에 계인을 박지 않았 으며 또 그 이후 머리가 길러졌을 때도 깎지 않게 했는지 아느 냐?" 천심선사는 나직히 탄식했다. "너는 애초부터 불문과 인연이 없는 몸이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그것을 말해주지 않은 이유는 너의 무공수련에 지장을 초래할까 봐서였고, 계인을 박지 않은 것은 바로 너를 무사히 환속시키기 위해서이다." 현수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나... 나를 환속시킬 예정이었다고? 그럼... 대사부님이 이 모든 일을 사전에 예측하고 안배하셨단 말인가?' 현수는 머릿 속이 온통 의문과 어지러운 회의로 가득 차고 말았고 천심선사는 그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한동안 자애스러운 눈길로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너를 소림에 입문시킨 이유는 노납이 머지않은 장래에 있을 무림 의 혈겁을 예측했기 때문이다. 노랍은 천혈성(天血星)과 오대마성 (五大魔星)의 창궐을 미리 대비해야만 했다." "으음......." "바로 너를 천혈성과 오대마성을 막을 인재로 키우려 했다면 알아 듣겠는냐?" 천심선사는 문득 몸을 일으켰다. "현수, 일어나 노납을 따라 와라." 현수는 곧장 천심의 뒤를 따랐고 천심선사는 창가로 가 창문을 활 짝 열었다. 밤(夜). 밖은 캄캄한 심야였다. "하늘을 보아라, 현수." 천심선사는 야공에 시선을 둔 채 말을 이었다. "저 어두운 천공에 천혈성과 오대마성이 점점 진한 핏빛을 띄워 가고 있다." 그의 음성이 점차 침중해지고 있었다. "실로 두려운 일이다. 수천 년 무림사에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엄 청난 대혈겁이 미구에 몰려들 것이다." 천심의 말에 현수는 가슴이 격탕했다. 캄캄한 밤하늘에 뜬 무수한 성좌(星座)들....... 현수는 그 중 어느 것이 천혈성과 오대마성인지는 알 수가 없었으 나 강한 의기(義氣)가 끓어오름을 느꼈다. "현수." "네, 사부님." 천심은 현수의 어깨를 잡았다. "그런 이유로 노납은 너를 소림에 입문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제는 너에게 소림십계와 같은 구속을 주지않기 위해서 너를 파문 (破門), 환속시키려는 것이다." 천심선사는 합장했다. "아미타불... 무서운 살겁이... 끔찍한 혈하(血河)가 중원을 적실 것이다. 아미타불... 아아! 불존의 자비만 바랄 뿐......." 현수는 점점 더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현수, 너의 한 몸에 모든 것이 달려있다. 천혈성과 오대마성, 그 마의 저주를 막을 자는 오직 너 뿐이다. 아미타불......." 천심선사는 불호를 외우며 돌아섰다. 그러나 현수는 계속 창가에 서서 천공을 바라보고 있었고 잔잔한 물결처럼 고요하던 그의 눈속에서는 무섭도록 강렬한 빛이 솟아나 오기 시작했다. ■ 대소림사 제1권 제8장 강호제일보(江湖第一步) -1 ━━━━━━━━━━━━━━━━━━━━━━━━━━━━━━━━━━━ 장경각(藏經閣). 장격각의 한 선방 안에서 현수는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의 앞에 는 사륜거에 몸을 의지한 천기선사가 침중한 안색으로 그를 내려 보고 있었다. 문득 천기선사가 신음을 흘렸다. "으음....... 현수." "네." "너를 이렇게 부르는 것도 오늘로서 마지막이 되겠구나." "사숙님......." 현수의 음성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동안 얼마나 정(情)이 든 천기선사인가? 천뢰선사는 냉혹무비할 만큼 혹독한 수련을 시키며 두터운 정을 느끼게 했지만 천기선사는 정반대로, 현수는 지난 일 년간 자애 롭기 그지없는 천기선사에게 친조부 이상의 따뜻한 정을 느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헤어져야 하다니....... 천기선사는 무릎에 놓여있던 가죽주머니를 건네 주었다. "자, 현수, 이것을 받아라." 현수는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것은 네가 소림에 들어왔을 때 갖고 있던 물건들이다." 그의 준미한 눈썹이 미미하게 떨렸다. '내 물건.......' "그 물건들은 모두 긴히 쓰일 용도가 있는 것들이다. 잘 간수해 라." 천기선사는 가죽주머니를 주고 나서 고개를 들었다. "현수, 사륜거를 밀어라. 밖에 나가고 싶구나." 현수는 공손히 일어나 사륜거를 밀고 나갔다. "콜록! 콜록......." 천기선사는 갑자기 심한 기침을 했다. 그의 기침은 요즘 들어 특히 심해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얼굴 의 주름살도 더욱 늘어 났으며 안색도 극히 초췌했다. 현수는 내심 탄식을 했다. '아! 사숙님께서는 요즘 와서 더욱 건강이 말이 아니시니, 걱정스 럽기만 하구나.' 천기선사는 간신히 기침을 진정시키고 나서 말했다. "흠, 이렇게 지내는 것도 오늘이 끝이 되겠군." 사륜거는 장경각을 벗어나 화원에 들어섰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천기선사는 탄성을 발했다. "허어! 기이한 일이로다. 네가 처음 이 장경각에 올 때도 눈이 오 더니 오늘도 눈이 오는구나. 그러고 보니 꼭 일 년이 지난 셈이 군." 현수는 멍하니 잿빛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눈발을 바라보았고 천기선사는 눈을 맞으며 담담히 말했다. "현수, 너는 이미 노납이 알고 있는 것을 모두 터득했다." '사숙님.......' "노납이 장담하건대 현 무림에서 너를 당할 자는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현수는 묵묵히 사륜거를 밀고 있었다. 칠흑같이 검고 윤기나는 그의 긴 머리는 여전히 허리 뒤로 넘겨져 단정히 묶여 있었고, 회의승포와 묘한 조화를 이루어 탈속한 기품 을 자아냈다. 떨어지는 눈송이가 그의 준미한 얼굴을 스치는 순간 천기선사는 여전히 담담하되 약간 침중하게 덧붙였다. "그러나 강호란 원래 험난하기 그지 없는 곳이다. 결코 무공만으 로 통하는 곳이 아니다. 더구나 수많은 기인이사(奇人異士)와 괴 인들의 드러나지 않은 무학은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그는 눈가에 수심을 담으며 현수를 돌아다 보았다. "현수." "네, 사부님" 그의 음성은 진지하기 그지 없었다. "너는 소림을 내려가는 즉시 두 사람을 찾아가라. 그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온갖 지혜를 동원하여 그 두 사람의 모든 것 을 배워라." 현수의 고요하던 눈빛이 현기를 발하고 있었다. "첫번 째 인물은 호북성 대홍산(大洪山) 천화곡(天火谷)에 살고 있는 광검절심(狂劍絶心) 유무심(有無心)이다. 그로부터는 불영구 검(佛影九劍)의 일곱 군데 헛점을 메울 검도(劍道)를 배워야 한 다." "광검절심......." 현수가 나직히 되뇌이자 천기선사는 부언했다. "광검절심, 무림에서 그를 아는 자는 거의 없다. 실상 그로 말하 면 천하무림에서 검법으로 가장 뛰어난 삼 인 중에 으뜸이나 그의 존재는 거의 안개에 가려 있다. 그러나 광검절심 유무심, 너는 그 에게서 불영검법을 완성시킬 수 있을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사부님." 현수의 가슴 속에는 이미 광검절심 유무심이란 존재가 깊이 들어 와 박히고 있었다. "두 번째 인물은... 콜록! 콜... 록......." 천기선사는 다시 기침을 했다. "사숙님... 바람이 차니 안으로......." "강서성(江西省) 남창(南昌)의 만경루(萬京褸)를 찾아 만사귀재 (萬事鬼才) 호불귀(胡佛鬼)를 만나라. 너는 그에게서 무공을 전혀 모르고도 무림을 헤쳐나갈 수 있는 수많은 수법을 터득할 것이 다." 이어 천기선사는 품 속에서 두 개의 고전(古錢)을 꺼냈는데 그것 은 녹이 슬고 매우 오래된 동전이었다. "그들을 만났을 때 이것을 보여 줘라." 현수는 묵묵히 두 개의 고전을 받았다. 사륜거는 눈 위를 스르르 굴러갔고 천기선사는 아쉬운 듯 쏟아지 는 눈발을 손으로 받으며 말했다. "현수, 오늘 밤 너는 이곳을 떠나라." 현수의 얼굴이 굳어졌다. "대사형은 찾아볼 필요가 없다. 이미 대사형과 이사형은 폐관에 들어갔다." "아!" "소림의 산문 오백 리 밖을 벗어나기 이전에는 절대 너의 본 모습 을 타인에게 보이지 마라." 천기선사의 얼굴은 다소 어둡게 변했다. "천려일실이라고 했다. 무엇이든 조심하는 게 좋지." 눈은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사륜거는 함박눈 속을 지나 장경각 안으로 들어갔다. 그날밤은 폭설이 쏟아졌다. 폭설에 묻힌 소림사를 뚫고 한 줄기 섬전(閃電)과도 같은 인영이 날아갔다. 그 인영은 소리도 없이 소림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하후성. 그것은 바로 천하제일의 기재인 그가 무림에 나간 순간이었다. 눈 보라를 뚫고 그가 첫 출도를 한 것이다. 호북성(湖北省) 무창(武昌). 호북 제일의 성도(省都)이자 장강(長江)의 수로(水路)가 활발히 발달된 대성(大城)으로 번화하기 그지 없는 곳이었다. 한 명의 백의기청년(白衣奇靑年). 눈이 그친 무창성에 표표히 입성한 그는 이십여 세 정도의 나이로 실로 비범하고 기이한 신태의 미청년이었다. 눈같이 흰 백삼에 머리에도 역시 백건(白巾)을 둘렀으며 얼굴은 관옥같이 희고 깨끗하여 그 준수함이 선인을 방불케 했다. 온화하 고 부드러운 기품이 은연중 그의 전신에서 풍겨 나와 탈속함을 느 끼게 하는 것이었다. 특히 물같이 고요한 눈은 보는 이로 하여금 평화로움을 느끼게 하 고 있었다. 또한 그는 매우 특이한 머리모양을 가지고 있었는데 칠흑같이 검고 윤기나는 긴 머리칼을 뒤로 모아 흰 띠로 묶고 허 리까지 늘어뜨렸다. 이같은 모양은 그야말로 옥골선인(玉骨仙人)의 풍모로써 보는 이 마다 찬탄을 금치 못했다. 이 절세의 기청년, 그는 바로 사 년반 동안 소림사에서 현수란 법 명으로 무공을 익혀온 하후성(夏侯星)이었다. 마침내 무창성에 입성함으로써 하후성의 강호 출도는 그 일보(一 步)를 내딛게 된 것이었다. 무창성은 대단히 번잡하고 커다란 성도(城都)였다. 하후성은 이렇게 큰 도성은 처음 대해본 것으로, 그는 그때까지의 세월을 오직 저 북방의 한적한 하란산과 숭산의 소림사에서만 보 내왔으므로 무창성의 번화함이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음, 굉장히 크고 복잡하구나.' 하후성은 내심 놀라며 어깨를 부딪는 인파를 헤치고 무창성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나 그의 곁을 지나던 행인들은 한결같이 하후 성을 보자 크게 경탄하며 발걸음을 멈추고 있었다. '오! 세상에 저토록 멋진 청년이 있었나?' 행인들은 모두 공통된 생각에 탄성을 발했다. 회웅루(會雄樓). 무창성에서 꽤 알려진 커다란 객점이었다. 하후성은 붉은 현판에 금빛 글씨로 씌어진 회웅루를 발견하자 문 득 시장기를 느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결심하고 회웅루의 계단 으로 올라섰다. 회웅루는 이 층의 객점으로 안에서 술마시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 나왔다. 그가 계단에 올라서자 안에서 점소이로 보이는 젊은 장한 이 황급히 나와 맞았다. "헤헤헤... 어서 오십시요. 공(公)......." 점소이는 말을 끊고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는 멍청히 하후성의 얼굴을 바라보며 넋을 잃어버렸다. 하후성 의 투명할 정도로 흰 얼굴과 너무나도 준수한 용모에 정신을 빼앗 기고 만 것이었다. 점소이는 내심 더듬거리며 중얼거렸다. '세, 세상에... 이렇게 잘 생긴 사람이 있었다니... 내 예전에 호 북제일의 기녀(妓女)인 염교월(艶嬌月)을 보고 반한 적이 있었지 만, 염교월도 이 공자 옆에 서면 당장 빛을 잃고 말 것이다.) 하후성은 점소이가 멍청히 자신을 바라보며 서 있자 담담하게 웃 으며 온화한 음성으로 물었다. "안에 자리가 있소?" 점소이는 그제서야 정신을 번쩍 차리며 어색하게 낯을 붉혔다. "아, 네네! 있고 말고요. 공자님, 어서 안으로 드십시오." 점소이는 하후성을 이 층으로 안내하기 위해 앞장서며 속으로 자 신을 나무랐다. '이런... 정초(正初)부터 정신도 없지, 여자도 아닌 남자에게 넋 을 뺏기다니.......' 한편 하후성은 객점이라면 난생 처음 들어온 것이었다. 그는 일 층이 왁자지껄 빽빽한 것을 신기한 눈으로 보며 점소이를 따라 이 층으로 오르고 있었다. "헤헤... 공자님, 일 층은 온통 잡인들이 우글거려 공자님같은 점 잖은 분이 음식을 드실 곳이 못됩니다. 이 층은 비교적 조용 합 죠. 헤헤......." "고맙소." 하후성은 부드럽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이 층에 오르니 사람도 드문드문 앉았을 뿐 아니라 분위기도 한결 품위가 있게 꾸며져 있었다. 이 층은 비교적 부자나 신분이 높은 자들이 이용하기 때문이었다. 하후성이 점소이를 따라 이층에 오르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 제히 그에게 집중됐다. 손님들의 얼굴에는 한결같이 경탄의 기색이 떠올랐다. 그들은 모 두 신비로울 정도로 풍모가 비범한 하후성에 대해 강렬한 호기심 을 느끼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후성은 천천히 걸어 창가 쪽에 있는 빈 자리로 가 앉았다. 그 가 자리에 앉자 중인들은 모두 조그만 소리로 저마다 수군거렸고 그 소리들은 모두 하후성의 귀에 똑똑히 들려왔다. "허어! 정말 잘 생긴 청년이군. 장노이(張老二), 자네 저렇게 잘 생긴 공자를 본 적이 있나?" 걸찍한 음성에 이어 다소 탁한 장한의 응답이 들려왔다. "없네. 과거 천풍보(天風堡)에서 당금무림의 중원사룡(中原四龍) 중 한 명인 옥면가람(玉面伽藍) 남궁수(南宮秀)를 본 적이 있네만 그도 저 청년과는 비교도 되지 않네." 그 자의 입맛 다시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쩝! 정말 내가 저 청년의 반 만큼이라도 생겼으면 천하의 미녀란 미녀는 모두 후릴 수 있겠는데......." "클클클... 왕팔(王八), 동경에 낯짝이나 비쳐보고 그런 소리하 게. 자네는 그저 지금 있는 호박같은 여편네의 엉덩이나 두들기고 사는 게 분수에 맞으니까." 처음 음성의 비웃음에 왕팔이라는 장한은 투덜댔다. "빌어먹을! 그렇게 말하는 너는 얼마나 잘 났느냐? 여편네가 그러 는데 너보다는 내가 훨씬 낫다더라!" 하후성은 가만히 그들의 말을 듣다 입가에 고소를 지었고 점소이 는 잔뜩 기대를 품고 정중히 물었다. "공자님, 무엇을 드실까요?" 하후성은 그 말에 일시지간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는 객점에 무 슨 음식이 있는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점소이가 묻지도 않 았는데 곧 떠벌이기 시작했다. "헤헤... 저희 회웅루에는 여러가지 산해진미가 있습죠. 먼저 연 자삼정탕(蓮子三精蕩)에다 상어의 지느러미를 볶은 일급요리, 죽 순 삶아 데친 것, 오리 혓바닥 볶음, 진귀한 설삼(雪參)에 잉어를 고은 삼리탕(蔘鯉蕩), 어수육(魚水肉), 백빙전(白氷全)에 또 그 밖에도......." 점소이의 수다는 끝없이 이어졌고 하후성은 그만 멍해지고 말았 다. '모두가 처음 듣는 이름인데... 더구나 나는 육식을 하지 않으 니.......' "나에게 소채 한 접시와 국수 한 그릇만 갖다 주시오." 점소이의 안색이 확 변했다. "소, 소채하고 국수요?"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이 휘둥그레졌으나 실망하지 않고 다 시 물었다. "그럼 술은 뭘로 하실까요? 산동명주(山東名酒) 죽엽청(竹葉靑)에 천일향잔(千日香棧), 녹각비류주(綠角秘柳酒), 여아홍(女兒紅), 금병산(金甁散)......." 하후성은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오. 나는 술을 못하니......." 그 순간 주위에서 왁자하게 폭소가 터져 나왔다. "핫핫핫... 생긴 것은 멀쩡한데 술도 못먹다니 정말 웃기는군!" "프흐흐... 왕팔! 혹시 저 친구 여자 아닌가? 남자 치곤 너무 반 반하단 말야. 더군다나 술도 못하니!" 크게 떠드는 자들은 바로 장삼과 왕팔이라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하후성은 그들의 야유에 전혀 개의치 않았고 점소이는 기 어코 실망한 듯 투덜대면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하후성은 담담한 신색으로 주위를 살펴보았다. 잠시 후 그의 고요 하던 눈이 무엇을 발견했는지 이채를 발했다. 그와 반대쪽에 있는 구석진 자리에서 한 명의 흑삼(黑衫)을 입은 중년문사가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 다. 그는 대략 삼십오륙 세 쯤 되어 보였는데 새카만 흑의에 머리에는 문사건을 쓰고 있었으며 두 눈은 담담하고 용모도 청수하기 그지 없었다. 한 눈에도 보통 인물이 아님을 느낄 수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의 눈길이 마주치자 중년 흑의문사의 담담하던 눈에서도 역시 기이한 빛이 일어났다. 그는 곧 하후성에게 호감어린 미소를 보냈고 하후성도 온화한 미 소로 답했다. 이윽고 하후성이 주문한 소채 한 접시와 국수가 나왔다. 그것은 주위에서 식사하는 손님들과 크게 대조를 이룰 정도로 조촐하고 보잘 것 없는 음식이었으나 하후성은 사 년반 동안 소림사에서 이 런 식사마저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맛있게 음식을 들고 있었 다. 우당탕! 우지-- 끈! 아래층에서 갑자기 요란하게 탁자 따위가 부서지는 소리가 울렸 다. "어이쿠!" 누군가의 비명에 이어 앙칼진 소녀의 뾰족한 힐책이 들려왔다. "이 바보같은 놈아! 저리 썩 비키지 못해!" 그 뿐만이 아니었다. 찰싹! "아이쿠우!" 뺨을 치는 소리와 더불어 듣기에도 무참한 비명이 터졌다. 그리고 잠시 후 계단을 쿵쿵 밟으며 올라오는 음향이 중인들의 관 심을 온통 집중시켰다. 이 층에서 식사하던 중인들은 큰 호기심을 보이며 이 층 입구를 향해 시선을 집중시켰고 두 명의 여인들이 올라왔다. 그 두 명은 각기 새빨간 홍의와 눈같이 흰 백의를 입은 절세의 미 소녀들이었는데 그 중 홍의소녀는 전신에 찰싹 들러붙은 홍의를 입고 있어 육체의 굴곡이 완연히 드러나 몹시 도발적인 느낌이 들 었다. 특히 백설같은 피부에 살구같이 또렷한 눈은 매우 앙칼지면서도 매혹적인 미색을 풍겼다. 반면 백의소녀는 고귀하고 내성적이며 기품있는 용모였다. 큰 눈 은 깊은 지혜를 담은 듯 했으며 눈같이 흰 피부와 고운 아미(峨 眉) 등은 말할 수 없이 그윽함을 느끼게 했다. 두 소녀는 모두 십칠팔 세 정도의 절세 미녀들로서 홍의소녀가 조 금 어려보였다. 그러나 홍의소녀는 왼손에 채찍을 감아쥐고 있었 으며 중인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몰리자 살구씨같이 야멸찬 두 눈 을 부릅뜨며 매서운 살기를 드러냈다. 그 바람에 중인들은 그만 찔끔하여 모두 고개를 돌리거나 숙이고 말았다. 실로 기(氣)가 당당하고 오만한 소녀였다. 하후성도 그녀들을 보게 되었다. 그는 두 소녀의 아름다움에 매우 감탄했다. '정말 아름다운 소녀들이구나.'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단순한 감정일 뿐이었다. 그는 그저 두 송이의 아름다운 꽃(花)을 보는 기분이 들었을 뿐 담담한 그의 마 음은 물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그의 그런 표정을 유심히 바라보는 눈길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흑의를 입은 중년문사로써 그는 기이한 미소를 지으 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홍의소녀는 오만한 눈초리로 주위를 둘러보다 하후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아!' 그녀는 탄성을 발하는 표정을 지으며 눈빛이 야릇해졌다. 마침 하후성이 그녀와 눈길이 마주치자 담담하게 미소를 지어 보 였다. 그러자 홍의소녀의 얼굴에 은은한 홍조가 떠오르며 자신도 모르게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살짝 웃었다. 그녀의 옆에 있던 백의소녀가 주위를 살피다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말했다. "영매(鈴妹), 저곳이 자리가 좋은 것 같으니 앉아서 식사하자." 그제서야 홍의소녀는 정신을 퍼뜩 차리고 대답했다. "아! 네, 언니......." 그녀는 백의소녀가 걸어 가는 대로 따라가 자리에 앉았다. 그 자리는 하후성과 중년문사의 꼭 중간지점으로 홍의소녀는 자리 에 앉은 이후에도 힐끔힐끔 하후성을 응시하곤 했다. 백의소녀는 그녀의 태도에 이상한 느낌을 받고 내심 중얼거렸다. '영매가 오늘따라 왜 이러지?' 그녀는 다시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 또한 하후성이 천천히 식사하는 모습을 발 견하고는 내심 탄성을 발하고 말았다. '아! 정말 대단한 미공자(美公子)구나!' 그녀는 내심 짚히는 것이 있었다. '훗! 그러고 보니 영매가 바로 저 사람 때문에.......' 백의소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저 사람은 무공을 모르는 것 같으니, 좀 아쉬운 느낌이 드는구나.' 홍의소녀는 백의소녀가 자신의 내심을 눈치 챈 것을 느꼈다. 그 녀는 그만 얼굴이 붉어져 고개를 숙여 버렸다. 조금 전까지의 오 만무례하고 방자했던 모습과는 퍽이나 대조적이었다. 하후성은 식사를 끝내고 창 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창성의 번화가는 아직도 그의 눈에 신기하게만 보였다. 층층누 각의 커다란 저택의 지붕들이 첩첩이 보이고 그 지붕 위에는 눈이 하얗게 덮여 있었다. '정말 이곳은 매우 큰 곳이구나.' 하후성이 내심 이렇게 중얼거릴 때 문득 그의 귓전에 담담하고 냉 랭한 음성이 들렸다. "공자, 합석을 해도 되겠소?" 하후성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고 그의 눈 앞에는 흑의중년문사가 미소를 띈 채 서 있었다. 하후성은 아까부터 그에게 호감을 느끼 던 터였기에 빙그레 웃어 보이며 정중히 말했다. "앉으십시오." 중년문사는 사의를 표하며 앉았다. 이어 그는 청수한 얼굴에 미소 를 지으며 다소 차가운 어투로 말했다. "소협의 기우가 워낙 헌앙하여 소생이 감히 합석을 청한 것이니 너무 허물치 말아주시오." 하후성은 빙긋 웃었다. "너무 과찬이십이다. 오히려 제가 송구스럽습니다." 흑의문사는 담담한 눈에 기이한 광채를 발하며 자기 소개를 했다. "소생은 위전풍(韋全風)이라 하오." 하후성은 자신도 모르게 합장을 했다. "아! 위형이셨군요. 소제는 하후성이라 합니다." "하후성!" 갑자기 흑의문사, 즉 위전풍은 크게 놀란 듯 부르짖었다. 그의 눈빛이 기이하게 변하며 안색이 굳어지더니 곧 경외지심을 나타내며 포권하는 것이었다. "아! 실례 했습니다. 설마하니 소협께서 대명이 쟁쟁한 환영신룡 (幻影神龍) 하후성 소협이신 줄은 꿈에도 몰랐소이다." 실로 뜻밖의 일이 벌어지자 하후성은 그야말로 어리둥절해지고 말 았다. '이게 무슨 말인가? 환영신룡이라니?' 하후성은 의혹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반면 위전풍은 정중히 말하 고 있었다. "보통 분이 아닌 줄은 알았으나 설마 꼬리를 보이지 않는다는 신 룡, 환영신룡이신 줄은 몰랐소이다." 하후성은 어이가 없었다. "아뭏든 하후소협같은 기인을 만나게 되어 정말 반갑소이다." 위전풍은 하후성이 뭐라 말할 틈도 주지 않고 계속 말했다. 몇 번씩이나 입을 열려다 말을 하지 못한 하후성은 그만 쓴 웃음 을 짓고 말았다. '아무래도 나와 동명이인인 고수가 있는 모양인데, 그만 나도 모 르게 그의 이름을 빌린 꼴이 되고 말았군.' 하후성은 뒤늦게 자신의 존재를 부인해 보았자 상대가 믿을 것 같 지도 않아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객점 안은 아주 조용해져 있었다. 그것은 주루 안에 있던 무림인들이 모두 위전풍이 말한 것을 들었 기 때문이었다. "아아, 환영신룡!" 중인들은 대경하여 안색이 변하고 있었고 특히 얼마전 하후성을 비웃던 장삼과 왕팔 두 장한은 안색이 잿빛이 되어 슬금슬금 눈치 를 보며 벌써부터 줄행랑을 치려는 중이었다. 조금 떨어진 탁자에 있던 홍의소녀와 백의소녀도 크게 놀란 눈치 였다. '음. 저들의 태도를 보니 황영신룡이란 자는 정말 보통 인물이 아 닌 모양이구나. 대체 누구이길래?' 하후성은 의혹에 싸여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일 층 계단 쪽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어우러져 들 려왔다. "핫핫핫......." 다시 새로운 인물들이 계단 위로 올라섰는데 그들은 한 명의 칠순 (七旬) 가량 되어보이는 백발노인과 두 명의 청년이었다. 백발노인은 칠십이 넘은 나이였으나 정정한데다 눈빛이 섬뜩할 정 도로 예리했으며 두 팔이 유난히 긴 데다 입고 있는 마의를 간편 히 걷고 있어 무척 활달한 인상을 주었다. 두 명의 청년은 모두 비범한 모습으로, 우측의 청년은 황의를 입 고 있었으며 약간 각이 진 얼굴에 피부빛은 건강한 화색(和色)을 띄고 있었다. 인중지룡(人中之龍)을 방불케 할 준수하고도 비범한 모습이었다. 좌측의 청년은 갈의를 입고 있었으며 얼굴이 다소 검은 빛을 띄었 으나 오관이 단정하고 두 눈이 뚜렷하여 역시 비범하고 준수해 보 였다. 세 사람 중 마의노인(麻衣老人)을 발견하자 위전풍의 안색이 갑자 기 가볍게 변했다. 그는 슬쩍 얼굴을 그의 반대쪽으로 돌리더니 몸을 일으켰다. "하후형, 소생은 볼 일이 있어 먼저 가보겠소. 우리는 천풍보(天 風堡)에서 어쩌면 다시 만나게 될 것이오." 하후성은 그의 갑작스런 태도에 어리둥절해졌으나 위전풍은 그의 답도 듣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바삐 밑으로 내려가 버렸다. '위형(韋兄)이 갑자기 왜 저럴까?' 하후성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저었으나 곧 느끼는 것이 있 었다. '음. 아마 저 노인과 무슨 관계가 있나 보군.' 하후성이 이렇게 생각할 때 자리에 앉아있던 홍의소녀와 백의소녀 가 백발노인을 보더니 모두 반색을 지으며 벌떡 일어났다. 홍의소녀가 먼저 명랑하게 외쳤다. "숙부님! 이쪽이에요." 백발노인은 곧 그녀를 발견하고는 껄껄 웃으며 그녀들에게 다가갔 다. "허허허... 이 계집애야! 도대체 그동안 어디에 가 있었길래 이 숙부로 하여금 찾지도 못하고 애먹게 만들었느냐?" 홍의소녀는 생긋 웃으며 교소를 날렸다. "호호호... 미안해요, 숙부님. 오는 길에 그만 황보 언니를 만나 게 되어 약속을 못지켰지 뭐예요." 그러나 그 말에 얼굴이 거무스레한 갈의청년이 눈살을 찌푸리며 나무랐다. "소령(素鈴)아! 너는 우리가 걱정하는 것도 상관치 않았단 말이 냐?" 백의소녀가 얼굴을 붉히며 청아한 음성으로 말했다. "팽소협, 영매만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이 일은 제게 책임이 있 어요." 그러자 팽이라 불리운 갈의청년은 그만 머쓱해져 입을 다물고 말 았다. 그는 백의소녀를 전부터 알며 또한 어렵게 생각하는 것 같 았다. 황의청년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핫핫핫... 팽형, 이제 됐으니 그만 하고 자리에 앉읍시다." 황의청년의 말에 일행은 모두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홍 의소녀는 하후성을 힐끗 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일행에게 뭐라고 소근거렸다. 그들 일행은 모두 깜짝 놀란 듯 일제히 안색이 변했고, 이어 백발 노인은 갑자기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성큼성큼 하후성에게 다가갔 다. 하후성은 이미 홍의소녀가 그들에게 무슨 얘기를 했는지 듣고 있었으나 모르는 척 창 밖만 바라보았다. 마의노인은 그의 옆까지 다가와 헛기침 했다. "험! 소협, 좀 실례해도 되겠소?" 하후성은 고개를 돌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네. 앉으십시요, 노인장." ■ 대소림사 제1권 제9장 천풍보(天風堡)의 회웅(會雄) -1 ━━━━━━━━━━━━━━━━━━━━━━━━━━━━━━━━━━━ 마의노인은 하후성의 맞은 편에 앉았다. 하후성은 그 순간 마의노인의 허리춤에 한 자루의 자색빛이 도는 도(刀)가 숨겨져 있는 것을 보았고 마의노인은 이러한 하후성을 유심히 살폈다. '흐음.' 그러나 아무리 살펴보아도 하후성은 도저히 무공을 연마한 사람같 지 않았으며 그의 두 눈은 물처럼 고요하여 깊이를 느낄 수가 없 을 정도였다. 마의노인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으음, 과연 대단하다. 무공을 익힌 흔적을 조금도 노출시키지 않 으니 이는 전설상의 무학경지인 반박귀진(返璞歸眞)에 이른 것이 아닌가? 과연 환영신룡답다.' 마의노인은 다시 헛기침을 했다. "허험! 실례지만 좀 묻겠소이다. 소협께서 환영신룡 하후성 소협 이 맞소이까? 하후성은 그만 난처해졌다. "환영신룡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소생의 이름이 하후성인 것은 맞 습니다." 그의 대답에 마의노인은 반색을 하며 너털웃음을 졌다. "헛헛헛! 정말 반갑소이다. 노부는 예전부터 소협의 쟁쟁한 소문 을 들어 왔소이다. 진작 만나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니 기 쁘기 한량 없소이다." 그는 포권하며 자기 소개를 했다. "노부는 하북 팽가장(彭家莊)에서 온 자전신도(紫電神刀) 팽수위 (彭袖位)라고 하오." 하후성은 두 눈에 이채를 띄며 슬쩍 자전신도 팽수위의 왼쪽 허리 춤에 있는 자색도를 바라보았다. '음. 이 노인이 바로 당금 무림의 사대세가 중 하북 팽가의 두번 째 고수 자전신도였구나.' 하후성은 비록 무림에 처음 나왔지만 그동안 소림사에서 천기선사 로부터 현무림의 전통적인 문파(門派)와 각 무가(武家), 그리고 전대고수에 대해 자세히 들은 적이 있었다. 최소한 삼백 년 이상의 전통을 지닌 사대세가는 다음과 같았다. 하북(河北) 팽가장(彭家莊). 강서(江西) 남궁세가(南宮世家). 사천(四川) 당가장(唐家莊). 산동(山東) 악가장(岳家莊). 그들 사대세가는 각기 특이한 무공으로 수백 년 간 일맥을 유지해 온 무림세가로써, 사대세가의 세력과 영향력은 각기 성(省)을 지 배할 정도로 컸으며 당금의 구파일방(九派一幇)의 성세와도 비교 할 정도였다. 하북 팽가도법(彭家刀法). 이것은 너무도 유명하여 자전십팔풍(紫電十八風)이라면 무림의 일 절로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도법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자 전신도 팽수위는 현 팽가장의 제 이 가주(第二家主)였다. 하후성의 생각이 여기까지 이어졌을 때였다. "호호호! 숙부님, 저희들도 좀 소개시켜 주세요." 그의 뒤에서 마치 은방울을 울리는 듯한 짜랑짜랑한 교소가 들려 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바로 홍의소녀가 그에게 방긋 웃고 있었다. 또한 그 뒤로 백의소녀와 두 명의 청년도 서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호 감과 호기심 어린 눈으로 하후성을 응시하고 있었다. 홍의소녀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하후소협, 저희들도 같이 합석해도 실례가 되지 않을까요?" "아, 그렇게 하십시요." 하후성이 담담하고 부드럽게 승낙하자 홍의소녀는 대뜸 활짝 웃으 며 그의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일부러인지 살이 맞닿을 정도로 찰싹 붙어 앉았으므로, 하 후성의 코에 처녀 특유의 체취를 물씬 풍겼다. 반면 백의소녀와 두 명의 청년은 그의 맞은 편에 앉았다. 모두 자리에 앉자 자전신도 팽수위는 몹시 기분이 좋은 듯 너털웃 음치며 말했다. "허허! 하후소협, 노부가 이 젊은이들을 소개 하겠네." 그는 먼저 홍의소녀를 가리켰다. "소협의 옆에 앉은 부끄러움도 모르는 그 계집애는 바로 노부의 조카일세. 별호는 홍의은편날수(紅衣銀鞭 手) 팽소령(彭素鈴)이 네. 허허... 지독한 말괄량이니 앞으로 조심해야 할 걸세." 팽수위의 말에 홍의소녀 팽소령은 그만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대 뜸 반발했다. "어머! 숙부님, 그 무슨 말씀을... 제가 어디 말괄량이에요?" 그러나 팽수위는 짐짓 위엄스럽게 말했다. "이 녀석아! 더이상 심한 소리 듣기 전에 입이나 닫아라." 팽소령은 과연 찔리는 데가 있는지 입을 다물었으나 귀여운 입술 이 튀어나온 것으로 보아 불만이 많은 모양이었다. 팽수위는 이번에는 갈의를 입고 얼굴이 약간 검은 청년을 가리켰 다. "이 아이 역시 노부의 조카일세. 그리고 저 계집애의 오빠이기도 하지." 갈의청년은 즉시 일어나 하후성에게 포권했다. "소제 흑금강(黑金剛) 팽의천(彭義天)이라고 합니다" "아, 팽형이셨군요." 하후성이 답례하고 나자 팽수위는 얼굴에 화색이 감도는 황의청년 을 가리켰다. "이 젊은이는 바로 태양장(太陽莊)의 소장주(少莊主)인 적인금붕 (赤印金鵬) 황보무룡(皇甫武龍)일세. 당금무림의 후기지수 중 손 꼽는 고수이니 잘 사귀어 보게." 적인금붕 황보금룡은 일어나 포권했다. "처음 뵙겠소이다. 하후형." 팽수위는 마지막으로 백의소녀를 가리켰다. "이 낭자는 황보문연(皇甫文娟)이라고 하네. 황보소협의 여동생이 지. 설금옥향(雪琴玉香)하면 음률(音律)과 미모로 모르는 사람이 없지." 황보문연은 얼굴을 사르르 붉혔다. "아이, 노선배님도......." 그녀는 웬지 가슴이 두근두근함을 느끼고는 감히 하후성을 바라보 지도 못했다. 그녀는 얼굴을 숙인 채 사뿐히 인사했다. 하후성이 답례하자 팽수위는 호탕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후소협, 여기있는 이 네 젊은이들은 모두 사귀어볼만 하네." 적인금붕 황보무룡이 빙긋이 웃으며 나섰다. "솔직이 말해 소제는 하후형의 위명을 듣고 소문이 지나치게 과장 되었으리라 생각해 왔었소. 그러나 막상 보게 되자 오히려 소문이 실제보다 못한 것 같소이다." 하후성은 그만 고소를 짓고 말았다. '정말 어이가 없는 일이군. 강호초출(江湖初出)인 내가 어떻게 이 렇게 유명할 수가 있단 말인가?' 하후성은 생각할수록 괴이한 느낌을 금할 길이 없었다. '대체 그 환영신룡이란 자는 누굴까? 이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대단한 인물인 것같은데.......' ■ 대소림사 제1권 제9장 천풍보(天風堡)의 회웅(會雄) -2 ━━━━━━━━━━━━━━━━━━━━━━━━━━━━━━━━━━━ 다시 계단이 울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두 명의 인 물이 올라섰다. 그들은 극히 대조적인 흑의노인과 자의소녀(紫衣少女)였다. 흑의노인은 약 육순(六旬) 정도의 나이에 음침한 인상으로 전신이 깡마른데다 넓은 흑삼을 입었고 두 눈은 움푹 패였으며 안색마저 창백하여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그의 전신에서는 기이하게도 일문종주(一門宗主)다운 위엄 이 풍기고 있었다. 자의소녀는 눈이 번쩍 뜨일 만큼 대단한 미녀였다. 그녀는 자색의 피풍을 어깨에 둘렀으며 입고 있는 자의는 경장차 림이었는데, 눈이 유난히 맑고 피부가 백옥같이 깨끗하여 매혹적 이고 산뜻한 용모였다. 흑의노인은 주루 안을 둘러보다 자전신도 팽수위를 발견하고는 흠 칫하는 표정을 짓다가 곧 반색했다. 그는 곧 팽수위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고 팽수위도 그를 발견하자 벌떡 일어났다. "허허허...! 이거 사천당가(四川唐家)의 가주(家主)이신 천수겁천 (天手劫天) 당환성(唐幻星)대협께서 무슨 바람이 불어 이곳까지 왕림하셨소이까?" 흑의노인, 즉 천수갑천 당환성은 냉막한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담 담히 말했다. "팽형이 오는데 어찌 노부라고 빠질 수 있겠소." "하하하! 이리 앉으시오. 아뭏든 몇 년 못본 새 당가주의 경지는 더 새로와진 것 같소이다." 당환성은 고소를 지으며 답했다. "노부의 암기(暗器) 따위야 팽형의 자전십팔풍에 부딪치면 흔적도 없이 가루가 될텐데 그 무슨 농담이오?" 팽수위는 두 손을 들어보였다. "원, 당가주야말로 무슨 농담을......." 이어 그는 당환성의 옆에 있는 자의소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이 낭자는?" 당환성의 음성이 갑자기 부드러워졌다. "진아(眞兒)야, 인사 드려라. 이 분은 팽가의 제 이 가주(第二家 主)님이시다." 그러자 자의소녀가 곱게 절을 했고 팽수위는 펄쩍 뛰었다. "아니! 이제 보니 낭자는 바로 당옥진(唐玉眞) 낭자가 아닌가?" "네, 노선배님." 자의소녀의 음성은 꾀꼬리처럼 고왔다. "허어! 세월 참 빠르군. 그때 왔을 때는 귀엽고 깜찍한 어린 소녀 였는데 벌써 이렇게 어엿한 아가씨가 되었다니." 자의소녀 당옥진은 얼굴을 붉혔다. 이윽고 먼저 자리에 앉았던 일행들, 특히 젊은이들이 다투어가며 그녀와 인사를 나누었다. 젊은이들은 활기차고 명랑했으며 당환성은 냉막한 얼굴에 모처럼 밝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허허허... 아까부터 주루 안이 환하다 했더니, 이제 보니 절세의 기남기녀(奇男奇女)들이 모두 모여 있었군." 하후성은 이제껏 당환성을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점차 당가의 가주인 천수겁천 당환성에 대해 감탄을 느꼈다. '음. 이 노인의 인상은 매우 특이하구나. 겉으로 보면 음산하고 냉혹하게 보이는데 실제의 내면은 매우 강직하고 정 많은 협사(俠 士)의 기질을 가지고 있구나.' 당환성은 뒤늦게야 하후성을 발견하고는 그의 뛰어난 풍모에 놀란 기색을 지었다. "팽형, 이 분 소협은 뉘시오?" 그가 묻자 팽수위는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당가주, 내 천하의 기재 한 분을 소개하겠소."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을 이었다. "당가주, 혹시 환영신룡 하후성 소협을 아시오?" "환영신룡!" 당환성의 안색이 급변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 어찌 그를 모르겠소? 출도한 지 반 년도 못되어 대막삼흉(大 漠三兇), 관외오마(關外五魔), 음산이절(陰山二絶), 동백십살(桐 栢十殺) 등의 마두들을 모두 제거하여 이미 전 무림을 경동시켰거 늘, 그런데 갑자기 그 얘기는 왜?" 팽수위는 대소를 터뜨렸다. "핫핫핫! 당가주, 왜 그렇게 눈치가 없으시오? 이 분 소협이 바로 환영신룡 하후성 소협이시오." "아!" 당환성은 탄성을 발함과 동시에 곧 경외심을 나타내며 황급히 포 권지례 했다. "이거 대단히 실례했소이다, 하후소협. 이 늙은이가 미처 고인을 몰라 보았소." "무슨 말씀을. 당대협." 하후성은 얼떨결에 답례는 했지만 입가에 당황을 금치 못했다. '나는 이제 완전히 환영신룡이 된 셈이군.' 자의소녀 당옥진의 눈빛이 야릇하게 변해 있었다. 그것은 실로 자신조차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의 변화로, 그녀는 당 가장의 금지옥엽으로 자라면서 세상을 고고하게 내려보았고 특히 남자에 대해서는 이유없이 깔보고 경시해 왔었다. 그런데 눈같이 흰 백의를 입고 긴 검은 머리를 뒤로 묶은 신비한 청년 환영신룡, 그를 보자 그녀의 방심(旁心)은 온통 뒤흔들리고 만 것이었다. 하후성이 풍기는 기운은 그야말로 꾸밈이 없는 천성이었으나 또한 그 기운은 세상의 모든 여인들의 마음을 온통 뒤흔들고도 남음이 있을만큼 마력적인 것이었다. 그 특이한 기질은 소림의 천기선사가 이미 오래 전부터 발견한 것 으로써 정작 본인인 하후성만이 모르고 있었을 뿐이었다. 당환성은 호감어린 말투로 그에게 물었다. "소협도 천풍보(天風堡)에 가시려고 이곳에 온 모양이구료?" 하후성은 흠칫했다. 얼마 전 흑의문사 위전풍의 말이 떠올랐기 때 문이었다. '그는 어쩌면 천풍보에서 다시 보게 될 것이라고 그랬지.' 하후성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도 실상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다. '강호에서 이들같이 신분이 높은 자들이 모두 천풍보로 가는 걸로 보아 필히 무슨 일이 있을 것이다. 위전풍, 그 사람을 만날겸 한 번 가보자.' "허허허! 정말 반갑소이다. 실로 이번 길은 소협같은 기인을 만나 게 되었으니 헛되지 않았소이다." 당환성의 말을 시작으로 일행은 곧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했다. 그 들은 모두 기분이 좋았으며 상대방에게 예의를 지키면서 담소를 나누었다. 다만 하후성은 자신이 다른 사람으로 오해된 것이니 만큼 씁쓸한 기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인들은 하후성과 대화를 하면 할수록 그에 대한 감탄과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하후성이 만사무불통지(萬事無佛通知), 즉 모르는 것이 없 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가 문(文)이고 무(武)고 하후성의 바다같이 넓은 지식은 그 들에게 경외지심까지 느끼게 했던 것이다. '역시 환영신룡은 일대기재다!' 중인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후성이 전혀 모르는 일이 있었으니....... 바로 당옥진, 황보문연, 팽소령 등 절세 미모를 갖춘 명가의 세 소녀들의 하후성을 향하는 눈빛이 점차 뜨거워지기 시작했다는 것 으로,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을 향한 세찬 불꽃이었다. 하후성. 그는 출도하자마자 꽃(花) 밭에 둘러 싸이고 만 것이었 다. 지금으로부터 약 사십오 년 전(四十五年前). 무림에 일대 선풍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한 명의 소년영웅(少年英 雄)의 출현 때문이었다. 종리자허(鍾里子虛). 이것이 소년영웅의 이름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십오 세에 불과했으나 놀라운 무공을 소유 한 그는 강호에 출도하자마자 삽시간에 강북무림을 휩쓸었다. 강호의 무수한 고수들이 소년영웅 종리자허의 쌍수(雙手) 아래 추 풍낙엽같이 거꾸러졌다. 실로 무림에 돌풍을 일으킨 것이었다. 더 우기 그에게는 타인이 따를 수 없는 신기에 가까운 의술(醫術)이 있어 그의 손길이 닿기만 하면 죽은 사람조차 살수가 있다고 전해 졌다. 그는 출도 후 십 년간 적수를 찾지 못하고 대남강북을 종횡하며 빛나는 무명을 날렸다. 그리고 그는 강남제일미(江南第一美)로 미와 재를 떨친 남궁세가 의 금지옥엽 남궁영미(南宮永美)와 혼인을 했으며 호북성(湖北省) 무창(武昌)에 거대한 보(堡)를 건립하여 정착했다. 이름하여 천풍보(天風堡). 이것은 또한 현 무림에서 가장 큰 세력인 일장이보(一莊二堡) 중 의 하나이기도 했다. 종리자허는 그 후 천풍보에 수많은 고수들을 받아들여 수십 년이 흐른 지금 무당파와 함께 호북무림의 양대산맥을 이루었다. 태을성수(太乙聖手) 종리자허(鐘里子虛). 그는 무림의 거성(巨星) 중 한 명이랄 수 있었다. 천풍보(天風堡). 무창성 동쪽 십 리(十里) 밖에 광활한 대지를 접하고 세워진 거대 한 보(堡)였다. 근 오만 평에 달하는 방대한 대지 위에 천풍보의 층층거각과 지붕 이 즐비하게 늘어섰으며, 높이 삼 장(三丈)의 성보와 주위에 깊고 넓게 파여진 호보하는 실로 장관이었다. 게다가 천풍보 주위에 빽빽이 자라있는 송림(松林)은 그야말로 볼 만한 절경으로 웬만한 무림고수는 천풍보의 위세만 보아도 기가 질리고 말 것 같았다. 천풍보의 영빈청(迎賓廳)은 하나의 광장을 연상케 할 정도로 웅대 하고 넓었다. 좌석만 해도 수백 석인 데다가 그곳에서는 지금 근 오백 여 명에 달하는 군웅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술을 마시고 음식을 들고 있었 다. 영빈청의 중앙에는 아름다운 무희 이십 여 명이 멋드러진 춤을 추 고 있었다. 흥겨운 가무음곡이 들리고 화기애애한 웃음소리와 술잔 부딪치는 소리, 큰 소리로 축하하는 소리, 함성소리 등이 영빈청을 한껏 쾌 활하고 호탕한 분위기로 이끌었다. 왜? 오늘이 무슨 날이기에 천풍보는 이토록 군웅들로 흥청거리는 것일까? 천풍보주인 태을성수 종리자허, 오늘이 바로 그의 육십 회갑(回 甲)일로 사해에 위명을 떨친 종리자허의 회갑을 기념하기 위해 전 중원의 군웅들이 축하객으로 달려온 것이다. 이것은 태을성수 종리자허의 위명을 생각할 때 어쩌면 당연한 일 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종리자허의 회갑일은 축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한편 하후성은 영빈청의 한 구석진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적인금붕 황보무룡과 대작을 나누고 있었는데 그들은 마치 지기처럼 조용히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황보무룡은 하후성과 안 지 불과 반 나절 밖에 안된 처지였으나 하후성에게 급격히 마음이 끌리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설사 자 신의 한 쪽 팔을 떼주어도 조금도 아깝지 않을 친밀한 기분이 드 는 것이었다. 도대체 자신의 이런 기분이 왜 생겼는지 알 수 없는 황보무룡은 술을 호기있게 마시고 나서 입을 열었다. "하후형, 소제는 진정 궁금하오. 실례가 아니라면 사문이 어디신 지 알려줄 수 있겠소?" 하후성은 멋적게 웃으며 말했다. "황보형, 실제 소제의 무공은 대단한 것이 못되오. 소제는 단지 한 무명노인에게 몇 수 무공을 배웠을 뿐이오." 황보무룡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하후형이 정히 숨기려 한다면 할 수 없지요." 이어 그는 익살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하후형의 실력이 별 것이 아니라면 대체 소제의 무공은 어디 가서 써먹을 수 있겠습니까? 하하하......." 하후성은 다시 멋적게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이때 그의 눈에 네 명의 노소가 영빈청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 보 였다. 두 명의 노인과 한 청년, 그리고 백의미소녀였다. 앞장 선 두 노인 중 오른쪽은 전신에 백삼을 입고 있으며 나이는 약 오십 정도였는데 용모가 지극히 청수했으나 기이할 정도로 안 색이 창백했다. 그러나 반면 두 눈은 마치 유리알처럼 투명하고 섬뜩하게 빛 나고 있었으며 왼쪽 허리에 기형(奇刑)의 검을 차고 있었다. 그와 나란히 선 노인은 그와는 대조적으로 위맹하게 생긴 칠순 노 인이었다. 그는 적포장삼을 입었으며 등 뒤에는 적(赤)과 청(靑)색의 두자루 쌍창(雙槍)을 메고 있었는데 얼굴은 자색빛이었고 긴 수염을 마치 교룡처럼 꼬아 기르고 있었다. 두 노인은 매우 상반되는 인상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공통적으로 종 주(宗主)다운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 뒤에 따르는 남녀는 모두 미남미녀였고 똑같이 백의를 입고 있었다. 청년은 이십이, 삼 세 정도의 준수무비한 용모와 날카롭고 명확한 눈매를 지니고 있었고, 소녀는 눈이 번쩍 뜨이는 절세가인이었다. 나이는 약 십구 세 정도 되어 보였다. 그녀는 눈, 코, 입술 등 어느 곳 하나 흠잡을 곳이 없는 완벽한 미를 지니고 있었으나 얼굴이 지나치게 차갑고 냉정해 보이는 게 흠이었다. 동중매화, 아니 설중매화(雪中梅花)같이 고결한 미를 발산하고 있 다고나 할까? 하후성은 그들을 관심있게 관찰했다. '음, 저들 두 노인은 보통 인물들이 아니다. 특히 저 오른쪽의 백 의노인의 두 눈빛을 보건대 무서운 고수임이 틀림없다. 이곳 천풍 보에도 지금 수많은 고수가 있지만 그 누구도 저 노인에게는 비할 바가 못된다.' 하후성의 관찰은 극히 예리했다. 이때 황보무룡이 웃으며 물었다. "하후형, 저 분들이 누군지 아시오?" "모릅니다." "하하.... 저 분들은 위명이 실로 천하를 울리는 분들이시오. 백 의를 입은 분은 바로 현 남궁세가의 가주이신 검제(劍帝) 남궁진 강(南宮進江)이신데, 저 분은 당금무림에서 검법의 일인자요." "아!" 하후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남궁노선배는 이곳 천풍보의 보주이신 태을성수 종리노선배 님과 처남매부지간이시오. 종리노선배님의 부인이 바로 남궁노선 배의 여동생이기 때문이지요." 하후성이 고개를 끄덕이자 황보무룡은 다시 설명을 이었다. "그 옆에 적포장삼의 쌍창을 멘 분은 일장이보 중 절강성(浙江省) 신창보(神槍堡)의 보주이신 자면신창(紫面神槍) 소중산(蘇中山) 노선배시오." "음." "그 분은 무림사상 최고의 창술을 지닌 창의 진인이시오." 황보무룡은 침을 삼키며 계속 설명했다. "그 두 분 노선배님 뒤를 따르는 백의청년은 바로 남궁노선배님의 아들인 옥면가람(玉面伽藍) 남궁수(南宮秀)요. 그는 당금무림의 후기지수(後期之秀) 중 으뜸이라는 중원사룡의 일 인이기도 하지 요." '중원사룡?' 하후성은 중원사룡이란 말에 호기심을 느꼈으나 질문하기도 전에 황보무룡이 말을 이었다. "또 그 옆의 절세미모를 지닌 백의소녀는 빙심한매(氷心寒梅) 남 궁설지(南宮雪芝)라는 방명을 가지고 있으며 남궁수 소협의 동생 인데 그녀는 성격이 차갑기로 소문 나 있소." "음." "들리는 말로 그녀는 신비의 기녀인 북해 빙심곡(氷心谷) 빙심파 파의 수제자라는 것이오. 그녀는 오히려 오빠를 능가한다는 소문 이 있소이다." 황보무룡은 문득 히쭉 웃으며 말했다. "남궁소저는 너무나 마음이 차가와 수많은 청년들의 애를 태우고 있소이다. 그러나 그녀도 하후형을 보면 아마... 핫핫핫핫..... .!" 하후성은 얼굴이 뜨거워졌다. "호호호! 황보대가, 뭐가 그렇게 우습죠? 저도 좀 같이 웃을 수는 없을까요?" 교소와 함께 자리에 끼어드는 것은 바로 홍의은편날수 팽소령이었 으며 그녀는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아! 팽낭자, 앉으시오." 황보무룡이 명쾌하게 말하자 팽소령은 연신 웃으며 말했다. "앉는 건 앉는 건데, 황보대가를 좀 보자는 분이 계신데요." "누가......?" "호호호! 황보 노선배님이 조금 전에 도착하셨어요." "아!" 황보무룡은 벌떡 몸을 일으키며 하후성에게 포권했다. "하후형, 잠시 나갔다 오겠소이다. 아마도 아버님께서 오신 모양 이오." "그러시오, 황보형." 황보무룡은 곧 서둘러 영빈청 앞으로 나갔고 그가 자리를 비우자 팽소령은 생긋 웃으며 말했다. "하후소협, 옆에 앉아도 될까요?" 하후성은 흠칫했다. 그러자 팽소령은 생긋 웃으며 교태스럽게 말 했다. "그럼 허락한 것으로 알고 앉겠어요." 그녀는 서슴없이 옆자리에 앉더니 엉덩이를 바짝 붙이고 앉아 사 나이의 간이라도 녹일 듯 생글생글 웃었다. "하후대가. 소매의 술 한잔 받으세요." 그녀는 섬섬옥수로 술병을 받쳐 들었다. 하후성은 일생에 한 번도 술을 마셔본 경험이 없었으므로 당황하 여 고개를 저었다. "소생은 술을 못하오." 그러나 팽소령은 억지를 썼다. "아이! 제 손이 부끄럽잖아요. 어서 받으세요." 그녀는 더욱더 하후성의 곁에 바짝 붙어 앉아 뭉클한 육체의 감촉 마저 느끼게 했고 하후성은 그만 당황하다 못해 어쩔 수 없이 술 잔을 들었다. "고, 고맙소이다. 소저......." 그는 곧 가득 채워진 술잔을 드는 듯 마는 듯 입술에 적신 다음 내려 놓았다. 그 모습을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던 팽소령은 재빨리 남은 술잔을 들어 올렸다. "소매에게도 한 잔 주세요." 하후성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소녀였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웬지 밉지는 않은 심정으로 그는 담담히 술을 따라 주 었다. 팽소령은 잔을 들더니 두 눈을 꼭 감고 단숨에 마셔 버렸다. 그녀 의 양 뺨에는 곧 홍조가 피어 올랐고, 얼굴이 상기되자 그녀의 미 모는 더욱 눈부시게 피어났다. 팽소령은 웬지 자신의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하후성이란 사내에 게 끌려들어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 대체 내 마음이 왜 이럴까? 단 한 번 만난 사이인데도 이토 록 끌려 들어가다니.......' 팽소령은 멍하니 절세미남 하후성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기고 말았 다. '얼굴이 잘 생겨서만은 아니야. 이분의 전신에서는 남들에게서 도 저히 볼 수 없는 특이한 기질이 강렬하게 발산되기 때문이야!' 팽소령은 마침내 입술을 꼭 깨물었다. '좋아, 나 팽소령이 한 번 마음먹은 이상 도중에 중단한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끝까지 이 분을 내가.......' 팽소령은 몸을 움직여 더욱 하후성에게 가까이 접근했다. 술기운에 얼굴이 상기되고 육향이 풍기는 그녀는 거의 하후성과 붙어 앉은 꼴이었다. 그러나 하후성이 어떤 인물인가? 불문의 반야밀다대승신공을 익혀 남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초인 적인 정력(定力)의 소유자로써 그의 마음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고요히 가라앉아 있었다. 단지 약간 거북하고 어색할 뿐이었다. "아이.... 하후대가, 저만 술을 마시면 되나요? 대가께서도 한 잔 드시라니까요." 팽소령이 교태스럽게 다시 술을 권했다. "아, 소생은 술을 하지 못하오." "호호호... 불문의 스님도 아니면서 술을 마시지 못하다니 말이나 되나요? 영웅이라면 마땅히 주색......." 팽소령은 말을 하다말고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말이 잘못됐음을 느꼈는지 그녀는 제 풀에 홍당무가 되고 말았다. 어찌 처녀의 입으로 주색을 운운할 수 있단 말인가? 하후성도 그만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불편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돌려야 했다. "하하하... 하후형! 과연 이곳에서 또 만나게 되었구려!" 낭랑한 웃음소리가 그의 귓전에 들려왔다. 그는 바로 흑의문사 위전풍이었다. "아! 위형." 하후성은 반색을 지었고 위전풍은 슬쩍 팽소령의 눈치를 살피더니 은근히 물었다. "하후형, 여기에 앉아도 되겠소?" 순간 팽소령의 살구씨같은 눈에 쌍심지가 돋더니 그녀는 마치 어 서 꺼지라는 듯이 야멸차게 위전풍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하후성의 심정은 정반대로 마치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었 다. "물론입니다, 위형. 어서 앉으십시오." 위전풍은 팽소령을 향해 씩 웃었다. "소저, 죄송하오이다. 그럼......." "흥!" 팽소령은 그에게 들릴 정도로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꼬았다. 한편 영빈청의 상좌에는 몇 명의 인물들이 웃고 떠들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사천당가의 가주인 천수겁천 당환성과 그의 애녀 당 옥진, 그리고 남궁세가의 가주인 검제 남궁진강과 그의 아들딸인 남궁수와 남궁설지, 그리고 하북의 자전신도 팽수위와 그의 조카 흑금강 팽의천 등이었다. 또 절강성에 있는 신창보의 보주인 자면신창 소중산도 한참 술을 연거푸 마시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은 모두 웃음을 띄고 즐겁게 담소하고 있었으나 단 한 명, 빙 심한매 남궁설지만은 차갑기 그지없는 얼굴에 조금도 변화를 보이 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이따금씩 음식을 집어먹을 뿐 이야기에 끼어들지도 않았다. 당옥진(唐玉眞), 그녀는 힐끔힐끔 다른 곳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곳은 바로 하후성이 있는 곳으로 그녀는 팽소령이 하후성의 곁 에 바짝 붙어 있는 것을 보고는 두 눈에 초초함과 질투심까지 드 러내고 있었다. 좌중의 인물들은 아무도 그녀의 태도를 눈치채지 못했다. 단지 팽 수위 만이 그녀의 심정을 눈치채고는 늙은 얼굴에 히죽 웃음을 지 으며 말했다. "당소저, 몸이 좀 불편한가 보군!" 당옥진은 깜짝 놀랐다. "네?" "허허허... 몸이 아프면 들어가 쉬는 것이 좋을 걸세." "괘, 괜찮아요......." 당옥진은 그만 얼굴이 새빨개졌고 그녀의 귓전에 익숙한 차가운 전음이 들려왔다. (이 계집애야, 눈치채게 하지 말고 잠자코 있거라. 너는 그저 이 애비 만 꼭 믿어라. 다른 건 몰라도 사위 고르는 솜씨 만큼은 노 부의 암기 솜씨 못지 않으니까!) 당옥진은 자신의 내심을 들킨 부끄러움에 얼굴을 들지 못했으나 반면 야릇한 느낌과 함께 기쁜 심정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당환성은 문득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헛헛헛... 팽형! 참 부럽소!" 느닷없는 말에 팽수위는 움찔했다. "허허허! 요즘은 딸을 한 번 시집 보내려면 무척이나 힘드는데 하 북 팽가는 대체 어떻게 가르쳤길래 그토록 부모 힘을 빌리지 않고 도 남자를 잘 고르오?" 당환성의 야유 짙은 말에 팽수위는 비로소 그가 팽소령을 가리켜 하는 말인 것을 알았다. 그러나 자전신도 팽수위가 또 어떤 사람 인가? 짐짓 그는 신이 난다는 듯 호탕하게 웃어제꼈다. "핫핫핫... 그것은 바로 하북 팽가의 전통이외다! 솔직히 하후소 협 정도면 노부가 여인이라도 당장 발벗고 뛸 것이오. 하하 하......." 당환성의 표정은 묘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는 오히려 한방 얻 어맞고 만 셈으로, 이렇게 되면 선수를 빼앗긴 것이나 다름이 없 지 않은가? 팽수위가 득의의 미소를 날리고 있는 것을 보자 당환성은 은근히 약이 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도 역시 고인인지라 사감(私感)을 떨쳐버리고 맞은 편에 앉은 남궁세가의 가주인 검제 남궁진강과 신창보의 보주인 자면신창 소중산에게 말했다. "남궁형, 소형, 노부가 한 청년기협을 소개하겠소." 그 말에 남궁진강과 소중산은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두 분은 환영신룡 하후성이란 이름을 들어보셨소?" 두 사람은 모두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으며 소중산이 성급히 반문 했다. "그가 이곳에 있단 말이오? 어디 있소?" "허허! 역시 만나고 싶은 모양이구려. 바로 이곳에 있소이다." 당환성이 하후성을 가리키자 두 사람 모두 안광이 번쩍 빛났다. 특히 남궁진강의 투명한 눈빛은 하후성을 자세히 살펴본 후 한 차 례 진동을 보였다. '놀라운 기재다, 당금 무림에 저런 기재가 있다니!' 소중산은 탄성을 발했다. "허어! 말로만 듣던 환영신룡이 바로 저 젊은이요?" "그렇소이다." 소중산은 몹시 성질이 급한 듯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자, 일어섭시다. 오늘 청년기재와 얘기를 나누고 싶소." ■ 대소림사 제1권 제10장 마종지문(魔宗之門) -1 ━━━━━━━━━━━━━━━━━━━━━━━━━━━━━━━━━━━ 하후성은 위전풍과 담소하고 있었으며 팽소령은 한 쪽에서 연신 술을 마셔대고 있었다. 그녀의 볼은 완전히 부어 있었다. 생각같아서는 위전풍이란 사내 의 멱살을 잡아 땅 속에 처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흥! 남의 좋은 일을 방해하다니.......' 그녀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 데다 또한 술기운도 오르고 있어 심정 을 억누르기가 고역이었다. 평소에 하던대로라면 그녀가 이렇게 참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희한하게 발전해 가고 있었다. "허허허... 하후소협, 노부들도 좀 동석하세." 너털웃음과 함께 팽수위를 위시한 그 일행이 다가왔다. 이윽고 그들은 분주히 서로 인사를 교환한 다음 차례로 자리에 앉 았으나 모두의 관심은 하후성에게 있었다. 하후성은 쟁쟁한 명성을 지닌 그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어야만 했고, 어느 정도 인사가 끝나자 그들은 자리를 잡고 술잔을 돌렸 다. 팽소령은 그때까지 가만히 있다가 빙심한매 남궁설지에게 아는 체 를 했다. "남궁언니, 오랫만이군요." 그러나 남궁설지는 여전히 냉담한 얼굴로 고개만 약간 까닥할 뿐 이었고 팽소령은 더욱 부아가 치밀었다. '흥! 고고한 척 하긴.' 검제 남궁진강은 그 사이 하후성의 모습을 계속 살피며 차츰 감탄 해마지 않았다. '으음. 실로 눈으로 보기 전에는 도저히 믿지 못할 일이다. 이 청 년의 내공(內功)은 이미 최극성의 경지에 올랐다. 어쩌면 오히려 노부보다 높을 지도 모른다. 도대체 천하에서 어떤 기인이 이같은 고수(高手)를 키워냈단 말인가?' 짧은 순간 남궁진강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기인고수들을 떠올 려 보았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만한 역량을 지닌 기인은 없었다. 그러는 동안 좌중은 시끌벅쩍 대화가 무르익었다. 대화의 중심은 역시 하후성이었으며 모든 질문이 그에게로 향해졌 기 때문에 하후성은 좋든 싫든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후성은 어려서부터 학문의 조예가 깊었다. 이미 십여 세 때 하란산 기슭에서 독고황을 경악시킨 학문의 경지 가 아닌가? 그리고 그 후로는 소림에서 천기선사로부터 더욱 정심 박대한 학문을 익힌 몸이었다. 대화가 익어갈수록 중인들은 하후성의 폭 넓고 심오한 학문조예에 감탄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심지어는 좀체로 표정의 변화를 보이 지 않는 남궁설지마저 그에게 경이의 눈빛을 보냈다. 하후성은 강호에 첫 출도하자마자 기라성같은 고수들의 이목을 집 중시킨 셈이었으며 실로 그것은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하후성은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중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러분께 소생이 여쭈어볼 게 있습니다." 중인들은 모두 그에게 이목을 집중시켰다. "혹시 적미천존(赤眉天尊)이란 분을 아십니까?" 순간 중인들, 특히 노인들은 모두 안색이 굳어져 버렸다. "적미천존!" 좌중은 금세 찬물을 뿌린 듯이 조용해졌고 소중산이 제일 먼저 입 을 열었다. "하후소협, 어떻게 적미천존을 아시오?" 그의 음성은 약간 떨리기조차 했으나 하후성은 담담히 말했다. "언젠가 그 이름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팽소령이 의아한 듯 물었다. "적미천존이 누구죠? 저는 어째서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죠?" 그 말에 그녀의 오빠인 팽의천이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소령, 그는 절세의 거마(巨魔)이자 효웅으로 이미 백 년 전에 사 라졌으니 네가 알 리가 없다." 옥면가람 남궁수도 고개를 흔들며 물었다. "그 이름은 한두 번 들은 적이 있소이다만 그가 그토록 무서운 인 물이오?" 그의 질문에 이번에는 소중산이 침중하게 대답했다. "그렇다. 무서운 인물이고 말고......." 이어 그는 좌중을 훑어보며 설명했다. "자네들같은 후배들은 잘 모르겠지만 적미천존은 천 년 무림사상 가장 무서운 육대천마(六大天魔) 중 한 명이다." "육대천마?" 팽의천과 남궁수가 똑같이 반문했다. "육대천마는 천 년 동안 가장 뛰어났던 대마두 육 명을 말하는 것 이지. 바로 그 첫 번째는 천 년 전의 천중극마(天中極魔), 두 번 째는 칠백 년 전의 혈세천존(血世天尊), 세 번째는 오백 년 전의 천극수라대제(天極修羅大帝), 네 번째는 이백 년 전의 불사지존 (不死之尊), 다섯 번째가 불사지존의 아내였던 천마교의 교주인 벽안마희(碧眼魔姬), 마지막으로 여섯 번째가 백 년 전 현천교(玄 天敎)의 교주였던 적미천존(赤眉天尊)을 말하는 것이네." "아......." 소중산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생각해 보게. 천 년 이래 가장 강한 육 명의 대마두 중 일인이라 면 엄청난 실력을 갖고 있지 않겠는가?" 중인들, 특히 육대천마라는 말을 처음 들은 젊은이들은 아연하여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후성도 적지 않게 놀랐다. '으음, 이제 보니 그 노선배가.......' 그의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위전풍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멍한 표정 을 짓고 있다가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어쩌면 육대천마보다 더욱 무서운 고수가 사도(邪道)에서 생겨날 지 모르오." 중인들의 시선은 일제히 흑의문사 차림의 위전풍에게로 쏠렸다. 그들은 비로소 위전풍에 대해 그동안 너무도 주의하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자면신창 소중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실례지만 대협의 존함은?" 그제서야 위전풍은 퍼뜩 자신의 실수를 느낀 듯 급히 어색한 표정 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 소생은 그저 일개 평범한 무인이오이다." 그러나 천수겁천 당환성의 얼굴에는 작은 의혹이 나타났다. '음, 저 자는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당환성은 이렇게 생각되자 즉시 약간 냉막한 어조로 물었다. "노부는 그대의 얼굴이 무척 낯익은 것 같소만?" 위전풍은 흠칫했고 당환성은 갑자기 오른손을 쭉 뻗더니 그의 앞 가슴 현기혈(玄機穴)을 찔렀다. "당가주! 왜 그러십니까?" 위전풍은 급히 반문하여 슬쩍 좌수(左手)를 들어 공격을 봉쇄했 다. 만일 당환성이 그대로 수도(手刀)를 찌르면 필히 그의 좌수가 당환성의 손목을 끊게 될 그런 교묘한 자세였다. 당환성의 안색은 홱 변했다. "노부는 그대가 누군지 이제 알았다!" 그는 두 눈에 무서운 살기(殺氣)와 한광을 쏟으며 싸늘하게 물었 다. "그대가 이 천풍보에 온 의도는 무엇인가?" 중인들은 모두 안색이 굳어졌고 장내에는 대뜸 험악한 살기가 퍼 졌다. 위전풍은 안색을 딱딱하게 굳히며 다급히 당환성에게로 전음(傳 音)을 전했다. (당가주, 이 위모(韋某)의 인격을 믿는다면 한 수만 양보해 주시 오. 위모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건대 결코 나쁜 뜻으로 이곳에 온 것이 아니오.) 당환성의 안색은 또다시 가볍게 변했다. '음, 이 자가?' 그는 쉽게 판단을 내리지 못했으나 마음 한 구석으로 꺼려지는 면 도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의 정체를 밝히면 연회는 순식간에 아수라장 이 되고 말 것이다. 또한 이 자는 한 번도 신의(信義)를 어긴 적 이 없었으니 한번.......' 쉭! 당환성은 뻗었던 수도를 갑자기 금나수로 바꾸며 위전풍의 좌수 완맥을 거머 쥐어갔다. "당가주......." 위전풍은 안색이 홱 변해 좌수를 움켜 쥐었다가 일제히 다섯 손가 락을 뻗었다. 핑! 핑....... 그의 오 지(五指)에서 예리한 지력이 뻗어 당환성의 손을 튕겼고 당환성은 급격히 손을 회수하며 껄껄 웃었다. "헛헛헛... 내가 실수했군, 모습은 비슷한데 그 자가 아니었소. 실례했소, 귀하(貴下)." 위전풍도 급히 손을 거두고 고개를 숙였다. "별 말씀을, 강호에는 비슷한 사람도 있는 법이니 개의치 마시 오." 중인들은 이 짧은 순간에 일어난 광경에 모두 경악과 의혹을 금치 못했다. 먼저 당환성과 신비한 흑의문사가 나눈 이, 삼 초에 불과 함에도 절묘무비한 공방에 경악했으며, 또한 그들이 곧 서로 양보 하는 것에는 더욱 큰 의혹을 느꼈다. 그러나 일단 당환성이 말을 마친 이상 아무도 캐물으려 하지는 않았다. 바로 이때 영빈청 안의 군웅들이 술렁거리며 일제히 입구(入口)쪽 을 바라보았으며 중인들의 눈길도 모두 그곳으로 향했다. 두 명의 위엄이 충만한 노인이 앞장 서 들어오고 있었고 그 옆에 황보룡과 황보문연이 그들 중 황색장포를 입은 거구의 노인을 따 르듯 들어오고 있었다. 그 노인은 팔 척(八尺)에 가까운 장신에 수염과 머리칼이 온통 붉 은 색을 이루고 있었으며 안광(眼光)에도 역시 붉은 빛이 감도는 위맹한 모습이었다. 하후성은 대뜸 짐작되는 것이 있었다. '음. 저 노인이 바로 태양장(太陽莊)의 장주인 태양신군(太陽神 君) 황보숭양(皇甫崇陽)이겠구나.' 그는 노인과 나란히 들어서는 금삼(錦衫)을 입은 노인을 주시했 다. 대략 육순(六旬) 정도의 나이에 지극히 인자하고 현기(玄機)어린 청수한 용모를 가지고 있었다. 전신에서 극히 온화하고 부드러운 기운이 흐르고 광명정대함과 강직한 느낌도 풍겼다. 노인의 가슴에 새겨진 천(天) 자를 보며 하후성은 내심 단정했다. '저 노인이 바로 이곳 천풍보의 보주인 태을성수(太乙聖手) 종리 자허(鐘里子虛)이겠구나.' 과연 그의 추측은 정확했는지 영빈청 안의 수백 명 군웅들이 일제 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와--아! 태을성주 종리대협!" "청풍보주의 만수(萬壽)를 축원하오이다!" 축복의 함성이 삽시간에 영빈청을 메웠다. 금삼을 입은 태을성수 종리자허는 연신 답례하며 영빈청의 상단에 마련된 자리로 올랐다. 그는 사방에 일일이 읍하며 담담하면서도 웅후한 음성으로 말했다. "감사하오, 감사하오! 이 보잘 것 없는 노부의 회갑에 이렇게 많 은 군웅들께서 와주시다니, 정말 감격을 금치 못하겠소이다." "종리대협이 무림에 끼친 공으로 볼 때 당연한 것이오." "종리대협의 만세건수를 기원합니다." 군웅들은 모두 저마다 한 마디씩 외쳤다. 그야말로 호탕하고 유쾌 무비한 분위기로써 종리자허는 거듭 포권했다. "정말 노부는 여러분들께 감사하오. 여러분, 술과 음식은 얼마든 지 있으니 마음껏 즐겨 주십시오." "와--- 아----!" 군웅들은 환성을 울렸다. 그러나 군웅들의 함성을 뚫고 어디선가 음침하고 냉혹무비한 괴소 가 들려왔다. "흐흐흐흐!. 사람은 많이 모였으되 쓸만한 놈은 한 놈도 없구나!" 마치 까마귀가 울부짖듯 거칠고 역겨운 음성이었으며 또한 군웅들 의 술기운과 흥을 일시지간에 산산조각 내버리는 안하무인 격의 말이었다. 군웅들은 삽시에 모두 입을 다물고 조용해졌고 태을성수 종리자허 가 상석에서 흰 눈썹을 무섭게 꿈틀거리며 외쳤다. "누구요? 어떤 친구가 본보에 와서 그런 무례한 말을 하는 것이 오?" 그러자 즉시 예의 듣기 거북한 음성이 일진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하하! 종리자허! 명년 오늘이 바로 너의 제삿날이 될 것 이다!" 쉭! 공간을 뚫고 흰 섬광이 번개같이 종리자허의 이마로 날아들었다. 번쩍하는 섬전과도같은 일순이었다. "흥!" 종리자허는 코웃음치며 손을 들어 슬쩍 막았다. 그러나 이게 어찌 된 일인가? 흰 섬광은 돌연 방향을 바꾸더니 그 의 옆의 청강석(靑剛石)으로 된 돌기둥에 깊숙히 박히는 것이 아 닌가? 실로 절묘한 변화였다. 종리자허와 군웅들은 급히 돌기둥에 박힌 물체를 바라보았다. "앗!" 중인들은 흰 물체를 확인한 순간 모두 대경하여 경악성을 내질렀 다. 단단하기가 강철같은 청강석의 기둥에 박힌 물체. 그것은 믿어지지 않게도 하나의 종이칼(紙刀)이었던 것이다. 얇고 부드럽기 그지없는 종이칼이 단단한 청강석주에 깊이 박히다니! "우----!" 군웅들은 모두 가슴에 찬 바람이 부는 것을 느끼며 은연중 으스스 몸을 떨었다. 과연 천하무림에서 몇 명이나 종이칼을 날려 청강석 주에 박을 수 있단 말인가? 비화적엽(飛花摘葉). 적엽상인(摘葉傷人). 이들 무공은 나뭇잎을 날려 사람을 죽이는 무서운 내가기공(內家 奇功)이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종이칼(紙刀)을 청강석주에 깊이 꽂을 수 있는 실력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군웅들의 얼굴에는 먹구름이 덮혔으나 천풍보의 주인인 태을성수 종리자허만은 태연했다. 과연 그는 사십오 년 전 십오 세의 나이 로 진중원(震中原)을 했던 관록과 실력을 가진 대가다웠다. 그는 조금도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으며 단지 가라앉은 침음 성으로 물었다. "친구는 누구요?" "크흐흐흐흐흐......." 소름끼치는 괴소가 영빈청을 울렸다. 그것은 도무지 방향(方向)을 알 수 없는 괴소성이었으며 곧이어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영빈 청의 중앙에 세 명의 괴인(怪人)이 나타났다. 휙! 휙! 휙! 그들은 모두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노괴들이었다. 먼저 가운데 우뚝 서 있는 괴인은 마치 한 구의 백골(白骨)을 연 상케 할 정도로 비쩍 말랐으며 회의를 입고 얼굴마저 회색이었다. 두 눈은 움푹 패인 채 검은 동자가 없는 흰자위만으로 공포스러운 느낌을 불러 일으켰다. 좌측에는 흑의(黑衣)에 콧날이 칼날같고 턱이 뾰족하며 역시 장대같이 마른 음산한 노인이었다 우측은 보는 이의 가슴이 섬뜩할 만큼 시뻘건 혈의(血衣)를 걸치 고 있는 괴인이었다. 더구나 그의 혈의 가슴팍에는 역시 핏빛의 고루가 새겨져 있어 마치 지옥의 혈신(血神)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들이 나타나자 군웅들은 모두 숨막히는 살기와 공포감 에 온몸이 얼어붙은 듯 굳어졌다. 그들 세 괴인이 풍겨내는 살기와 피비린내가 수백 명 군웅들의 기 (氣)를 완전히 억누르고 만 것이었다. 태을성수 종리자허의 얼굴은 세 명의 노괴(老怪)가 모습을 나타내 자 경악으로 크게 일그러졌으며 백미가 부르르 떨렸다. '저 세 노마(老魔)가 아직도 살아 있었다니.......' 세 노괴 중 가운데 있는 백골괴인이 음산한 괴소를 흘리며 그에게 물었다. "흐흐흐흐! 종리자허, 너는 노부가 누군지 알겠지?" 종리자허는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정중히 포권했다. "어찌 무림인으로써 백골사마(白骨邪魔) 금(金)노선배를 모르겠소 이까?" 종리자허는 이어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세 분께서는 무슨 일로 본보에 왕림하셨소이까?" 그 말에 이번에는 음산한 흑의 괴노인이 괴소를 흘려냈다. "흐흐흐... 종리자허, 우리 세 명이 청풍보에 온 것이 불만스럽단 말인가?" 종리자허는 담담히 말했다. "어찌 제가 감히 불만을 품겠소이까?" 한편 하후성과 함께 자리잡고 있던 자면신창 소중산이 눈썹을 찌 푸리며 욕설을 지껄였다. "빌어먹을. 저 세 노마가 대체 무슨 흉심(兇心)을 품고 이곳에 나 타났을까?" 그의 말에 옥면가람 남궁수가 의아한 듯 물었다. "소백부님, 저들은 대체 누구입니까?" 소중산은 침중한 표정을 지으며 설명했다. "저들 세 명은 모두가 최소한 사십 년 전에 사라졌던 거마들이네. 특히 가운데 인물은 백골사마(白骨邪魔) 금마륜(金摩輪)이라는 자 로 이미 나이가 백 살이 넘었네." "음, 백골사마 금마륜......." "흑의를 입은 노마는 지도마살(紙刀魔殺) 마운천(馬雲川)으로 저 자는 종이칼로 강철까지 자르는 실력을 가지고 있네. 과거 사십 년 전 천산파(天山派)의 장문인이셨던 천산비검옹(天山飛劍翁) 노 선배에게 패한 후 실종되었는데 다시 나타나다니......." 그의 말에 천수겁천 당환성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받았다. "그러나 괴이한 것은 고루혈마(蠱 血魔) 곡우양(谷雨陽), 저 늙 은 귀신이오. 노부가 알기로 저 노괴는 음산(陰山)에서 이미 삼십 년 전 죽은 줄 알았는데." 하후성은 여전히 물처럼 담백한 눈빛으로 세 노마를 응시했다. 종 리자허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세 분께 재차 묻겠소이다. 이 천풍보에 오신 목적이 무엇이오?" 그러자 지도마살 마운천이 시비 걸듯 괴소로 응수했다. "흐흐흐... 종리자허, 목적이 있으면 어떠할 것이고 없으면 어쩌 겠느냐?" 종리자허는 엄숙히 말했다. "옛 말에 선자불래(善者不來)요, 내자불선(來者不善)이라 했소. 목적이 있으면 말하고 없으면 죄송하지만 조용히 돌아가 주길 원 하는 바이오." 백골사마의 흰 자위뿐인 눈이 가느다랗게 변하는가 싶더니 그의 찢어진 눈 사이로 섬뜩한 한광(寒光)이 뻗었다. "종리자허! 다시 한번 말해 봐라." 그의 음성은 무시무시한 살기를 풍겨냈고 종리자허의 곁에 있던 태양신군 황보숭양이 벌떡 일어나며 우렁차게 외쳤다. "다시 듣고 싶다면 노부가 말하겠다. 금노괴, 이곳에서 더이상 망 신 당하고 싶지 않다면 당장 물러가라!" 황보숭양의 음성은 영빈청을 들썩이게 할 정도로 쩌렁쩌렁했고 백 골사마 금마륜의 흰 자위가 희번뜩이며 더욱 무서운 살기를 사출 했다. "대단히 거만한 놈이구나. 너는 누구냐?" 황보숭양은 거구를 앞으로 밀며 자신의 가슴을 쳤다. "태양신군 황보숭양이 바로 나다!" 백골사마의 입가가 기이하게 삐뚤어졌다. "흐흐흐! 이제 보니 태양장(太陽莊)인지 뭔지 하는 곳의 애송이였 군. 건방진 놈!" 백골사마의 말이 끝나는 순간 그의 옆에 서 있던 지도마살 마운천 이 으스스하게 외쳤다. "황보숭양! 금형을 대신해 노부가 너에게 버릇을 가르쳐 주겠다!" 휙! 지도마살은 그대로 몸을 솟구치더니 공중에서 매가 병아리를 채 듯이 양 손을 쫙 벌려 덮쳤고, 황보숭양의 아들인 황보무룡이 느 닷없이 냉소하며 뛰쳐 나갔다. "너같은 노괴는 나 혼자서도 충분하다!" 위-- 잉! 황보무룡은 쌍장을 뻗었으며 허공에 뜬 지도마살의 공격과 그의 쌍장이 격돌했다. 그 순간 황보숭양의 안색이 크게 변해 부르짖었 다. "용아! 위험하다!"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전권에 뛰어들어 쌍장을 날렸고 붉은 화광 (火光)이 그의 장심에서 번쩍였다. 꽝... 꽈르릉! 무시무시한 폭음이 울렸으나 사태는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으윽!" 황보무룡은 비명을 지르며 연달아 뒤로 오 보(五步)나 밀려 나갔 다. 그의 오른쪽 어깨에는 두 자루의 종이칼(紙刀)이 깊숙히 박힌 채 피로 물들고 있었다. 황보숭양은 가운데 서서 왼손 손가락 사이에 세 개의 지도(紙刀) 를 잡고 있었는데 그의 입가에도 한 줄기 선혈이 맺혀 있었다. 그 나마 천만 다행으로 만일 중간에 끼어들지 않았다면 그는 하마터 면 하나 뿐인 독자(獨子)를 잃을 뻔 했던 것이다. 그의 얼굴은 온통 분노로 물들었으며 붉은 수염과 머리칼이 온통 곤두서고 있었다. 황보숭양은 으스러져라 손을 움켜 쥐었다. 화르륵! 그대로 불길이 솟으며 세 자루의 지도가 금세 재가 되었다. 그것을 본 지도마살 마운천은 냉소 짓고 있었으나 황보숭양은 더 이상 참지 못한 듯 그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황보숭양의 전신에 곧 붉은 기운이 솟더니 양 손에서 불길이 일어 났다. "태양신공(太陽神功)이다!" 백골사마가 경악하여 외치자 지도마살 마운천의 강팍한 얼굴에도 아까와는 달리 놀람이 떠올랐다. 꽈--- 꽝! 이미 시뻘건 화기(火氣)가 그의 전신을 뒤덮고 있었다. "으흑!" 지도마살은 연달아 뒤로 세 걸음 밀려났으며 그의 가슴 옷자락이 시커멓게 그을은 것이 보였다. 그러나 황보숭양 역시 어깨 옷자락이 헤어져 나갔다.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 지도(紙刀)가 스친 것이다. 두 사람의 실력은 실로 막상막하였다. 이번에는 이제껏 두 눈에서 혈광(血光)을 흉흉하게 뻗치고 있던 고루혈마 곡우양이 앞으로 신형을 날렸다. "황보숭양! 네 놈을 가루로 만들어 주겠다!" 쉬쉬쉬...... 쉭! 그의 양 소매 속에서 수십 개의 핏빛 광선이 사출됐다. 그것은 그의 독문암기인 혈망사주(血芒死珠)로써, 혈망사주는 무 림에 알려진 공포의 암기였다. 또한 그것은 극독이 발라져 있어 살짝 스치기만 해도 전신이 핏물로 녹고 마는 무서운 마물이었다. 슈슈슈슉! 혈망사주는 황보숭양의 몸 가까이 이르자 처음 사출되었을 때보다 수십 배나 더 빨라졌는데 그것은 바로 암기술의 절정을 말하는 것 이었다. "아!" 중인들은 모두 가슴이 철렁했다. 여지없이 황보숭양은 당할 판국 이었다. 그가 어떻게 몸을 피해도 십여 개의 암기는 몸에 맞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 누군가 나서는 인물이 있었다. "곡우양! 암기라면 노부가 상대해 주겠다." 어디선가 싸늘한 음성과 함께 흰 빛이 섬전같이 뻗쳤다. 팍! 파파파팟! 놀라운 일이었다. 황보숭양의 몸에 막 적중되려면 수십 개의 혈망 사주가 모조리 추락한 것이었다. 휘익! 한 줄기 흑영이 빛살처럼 날아들며 수백 개의 암기를 고루혈마 곡 우양에게 날렸다. 슈슈슈슉! "으헉! 이... 이건!" 고루혈마는 전신을 덮어 씌우는 암기 세례에 안색이 잿빛이 되어 굴러가듯 급히 뒤로 후퇴했다. 파파파팍! 수백 개의 암기는 모두 바닥을 쳤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튕겨나듯 떠오른 암기들은 하나도 남지 않고 처음의 흑영에게 회수되는 것 이 아닌가? 실로 불가사의한 수법에 고루혈마는 당황성을 발했다. "어, 어떤 놈이냐?" 흑영은 신형을 빙글 돌리며 차갑게 말했다. "흐흐흐... 사천당가(四天唐家)의 천수겁천 당환성이오." "사천당가!" 고루혈마의 안색이 변함과 동시에 백골사마와 지도마살의 안색도 심한 동요를 일으켰다. '뜻밖이다. 이제 보니 이 보잘것 없는 천풍보에 정파무림의 최고 인물들이 모두 모여 있었구나!' 세 노괴는 똑같이 이렇게 생각하며 안색이 굳어졌다. 이번에는 남궁세가의 가주 검제 남궁진강이 앞으로 나서더니 담담 히 말했다. "세 분 선배, 이곳 천풍보는 지금 매우 즐거운 분위기요. 그러니 이곳의 화기(和氣)를 깨지 말고 이제 그만 사라지는 것이 어떻겠 소?" 그의 말은 비록 공손한 듯 했으나 매우 오만한 기색이 내포되어 있었고 백골사마는 흠칫하며 괴이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대는 또 누군가?" "소생은 남궁진강이라는 무명소졸이외다." 백골사마의 안색이 다시 가볍게 변했다. "그대가 검제(劍帝) 남궁진강이란 말이냐?" "그렇소이다." 백골사마는 흰자위 뿐인 눈빛을 좌로 우로 돌리더니 내심 중얼거 렸다. '음, 과연 궁주(宮主)의 예측이 맞았군. 말썽을 일으키지 말라더 니....... 좋다, 어차피 싸우기 위해 온 것은 아니니까.' 백골사마는 음침한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다! 이제 노부가 이곳에 온 이유를 밝히겠다." 그는 품속에 손을 넣더니 한 장의 검은 색 첩지를 꺼내 종리자허 를 향해 던졌다. 흑첩(黑帖)은 처음에는 천천히 날아가는가 싶었으나 갑자기 빨라 지며 전광석화같이 종리자허의 미간으로 파고 들었다. 그러나 종리자허 역시 절대로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탁! 그는 어느새 두 손가락 사이로 흑첩을 받아냈으며 신중한 표정으 로 그것을 뜯어 읽어 보았다. 그의 얼굴에 갑작스런 변화가 일어난 것은 그때였다. 그의 안색이 창백해지는가 싶더니 두 눈썹까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쳐들며 격앙된 음성으로 물었다. "금노선배! 이 뜻은?" 백골사마는 돌연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모두 잘 들어라! 앞으로 일 년(一年), 일 년안에 정 사무림(正邪武林)의 여하 단체는 물론 모든 인물들이 마종지문(魔 宗之門)에 굴복해야 한다. 만일 거부하면 가공할 혈겁(血劫)이 일 어날 것이다." "뭣이?" 군웅들은 모두 안색이 대변하여 경악성을 발했다. ■ 대소림사 제1권 제11장 천하제일지녀(天下第一智女) -1 ━━━━━━━━━━━━━━━━━━━━━━━━━━━━━━━━━━━ 하후성 역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마종지문(魔宗之門)이라고? 마종지문......' 그의 뇌리에 즉시 소림사를 방문했던 신비의 흑의여인이 떠올랐 다. 비록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그는 그 여인으로 인해 현오대사 (玄悟大師)가 죽은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그 여마(女魔)도 마종지문에서 왔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후성은 가슴이 은은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 '드디어 마종지문이 모습을.......' 자전신도 팽수위가 냉소하며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금마륜!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 백골사마 금마륜은 안색이 무섭게 변했다. "네 놈은 또 누구냐?" "하북팽가(河北彭家)의 자전신도 팽수위다!" 백골사마는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 이제 보니 이곳에 다 모였구나. 너희 팽가에도 이미 서찰이 당도했을 것이다. 팽가는 필히 굴복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멸문지화를 당할 것이다." 팽수위는 대로했다. "미친 수작!" 쐐--- 액! 그는 허리에서 자전섬도(紫電閃刀)를 뽑자마자 그대로 백골사마를 덮쳤다. 츠츠츠츠... 츳! 가공할 도기(刀氣)가 자색 광망을 뿜으며 회오리쳤으나 백골사마 도 결코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건방진 놈! 백골강시공(白骨 屍功)의 위력을 보여 주겠다!" 그의 쌍장에서 음산한 검은 기운이 뻗었다. 파파팟... 펑! 파공성과 폭음이 울림과 동시에 팽수위는 낮은 신음을 발하며 뒤 로 사 보(四步) 후퇴했으며 그의 안색은 즉시 창백해졌다. 그러나 곧 이를 부드득 갈며 팽수위는 자전섬도를 치켜들었다. "노마! 자전십팔풍(紫電十八風)이 어떤 도법인지 똑똑히 보아라!" 자전섬도에서 자색의 기운이 뻗어 나오자 백골사마는 흠칫하여 내 심 중얼거렸다. '듣기로 자전십팔풍은 팽가의 비전도법으로 오백 년간 적수가 없 었다고 하는데.......' 그가 멈칫하는 순간이었다. "노마! 받아라!" 무서운 도풍(刀風)을 일으키며 자전섬도가 춤추듯 빙글빙글 돌고 있었고 자색 기운으로부터 엄청난 회오리가 발생하여 휘몰아쳤다. 윙--- 윙--- 윙! 회오리 기류에는 무서운 흡인력이 일고 있었다. 백골사마는 감히 경시하는 마음을 먹지 못하고 자신의 백골강시공을 극성으로 끌어 올렸다. 우우우--- 웅! 그의 회의가 바람을 품은 듯 부풀어 오르며 전신에서 가공할 악취 와 함께 흑무가 서렸다. "죽어라, 애송이!" 우---- 웅! 그의 쌍장에서 흑색 기류가 뻗어나갔고 마침내 두 줄기 공력이 격 돌할 찰나였다. "잠깐!" 군웅들의 귀청을 두드리는 낭랑한 외침과 함께 전광석화같이 두 명 사이로 끼어드는 백영(白影)이 있었다. "앗! 저... 저런!" 군웅들은 경악성을 내질렀다. 엄청난 위력의 자전십팔풍과 백골강 시공 사이에 뛰어든 자는 대체 누구인가? 누가 감히 그들 두 개세 고수의 틈바구니에 끼어들고 있단 말인가? 꽝... 꽈르르릉! 엄청난 폭음과 함께 군웅들의 기우를 비웃기라도 하듯 무서운 반 탄지기의 압력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윽! 으으......." 두 마디의 다급한 비명이 터졌고 군웅들은 눈을 크게 떴다. 자전신도 팽수위가 뒤로 다섯 걸음이나 후퇴하고 있는가 하면 백 골사마 또한 가슴을 움켜쥔 채 삼사 보 밀려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경악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처, 천하에 이토록 무서운 내공을 지닌 자가 있다니.......' 그들은 자신들을 격퇴시킨 의문의 그림자에 대해 똑같이 회의한 나머지 눈을 들어 곧장 중앙으로 향했다. "앗!" 놀랍게도 그곳에 우뚝 서 있는 인영은 불과 이십 세 정도의 젊고 준미한 청년으로 눈같이 흰 백의(白衣)에 검고 윤기나는 긴 머리 를 흰 띠로 묶어 허리춤까지 늘어뜨린 선풍(仙風)의 미청년이었 다. "하후소협!" 팽수위가 놀라 부르짖었으나 백골사마의 놀라움은 그것에 비할 바 가 아니었다. 그는 아예 자신의 두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설마... 이 어린 놈이?' 하후성, 그는 팽수위를 향해 공손히 포권지례 했다. "팽 노선배님, 잠시만 후배에게 양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음......." 팽수위는 입맛을 다셨으나 아무 말없이 옆으로 물러나 주었고 하 후성은 곧바로 백골사마를 향해 담담히 말했다. "노선배께 한 가지 묻겠소이다." 백골사마는 대답 대신 흰자위 눈을 희번뜩였다. "네 놈은 누구냐?" "후배는 하후성이라 하오." 군웅들은 크게 술렁거렸다. "네가... 환영신룡이라는 놈이란 말이냐?" 백골사마가 놀란 듯 묻자 하후성은 다시금 쓴 웃음을 지었으나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골사마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멈칫거렸다. '과, 과연 강하다 했더니... 역시 환영신룡이었구나!' 하후성은 다시 물었다. "노선배께 묻겠소이다. 아까 마종지문이라 하던데, 혹시 단혜령 (段慧令)이란 여인을 아시오?" 백골사마의 안색이 순간적으로 급변했다. "네, 네가 어찌 그녀를......." 그러나 그는 곧 실수했다는 것을 느낀 듯 급히 입을 다물어 버렸 고 하후성은 그의 표정 만으로 무언가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역시 단혜령은 마종지문의 일원이었구나.' 그는 안색을 굳히더니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담담하나 무거운 음 성으로 물었다. "노선배, 마종지문의 정체를 말해줄 수 없겠소?" 백골사마는 괴소를 흘렸다. "흐흐흐... 그것이 궁금하느냐?" "그렇소." "흐흐!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아도 일 년 만 지나면 저절로 알게될 것이다." 백골사마는 주위를 둘러보며 득의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이미 전 무림의 구파일방(九派一幇)은 물론 일성(一成), 사가(四 家), 일장이보(一莊二堡)를 비롯하여 사파(邪派)의 남맹북단(南盟 北檀), 이곡(二谷), 일교(一敎), 일회(一會), 그리고 그 밖에 전 무림의 단체와 개인에게 마존첩(魔尊帖)이 전달됐다. 으하하 핫......." "으음!" 군웅들은 모두 안색이 변했으나 백골사마는 더욱 득의한 괴소를 흘리며 하후성에게 말했다. "환영신룡, 너의 소문은 익히 들었다. 그러나 너 역시 머지 않아 마존첩을 받게 될 것이다." 하후성은 낭랑하게 웃었다. "하하하! 소생은 일정한 거처가 없는데 어찌 첩지를 전달하겠소?" "마종지문의 이목(耳目)은 천하를 손바닥 보듯 한다. 네 놈이 어 디에 있건 찾아갈 것이다." 하후성의 입가에 문득 신비한 미소가 어렸다. "그렇소? 그러나 소생 만은 좀 힘들 것이오." 백골사마는 갑자기 음산한 눈빛을 흘렸다. "애송이 놈! 그렇다면 아주 이곳에서 너를 제거하겠다!" 쉬...... 쉭! 쉭! 이제까지 가만히 있던 지도마살이 돌연 양손을 뻗었고 그의 손가 락 사이에서 십 여 자루의 지도(紙刀)가 눈 깜빡할 사이에 섬광처 럼 날아갔다. 그러나 하후성은 빙그레 웃을 뿐 피하지도 막지도 않았으며 놀라 운 광경이 벌어졌다. 파파파팍! 여덟 개의 지도는 그의 몸에 적중되자마자 그대로 튕겨나가더니 가루로 화해 흩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두 자루의 지도는 어느새 그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마(馬)선배께 두 개는 돌려 드리겠소이다." 하후성의 담담한 음성이 떨어진 순간이었다. "으악!" 지도마살 마운천은 처절한 비명을 질렀으며 그의 양어깨에서 피가 치솟았다. 두 자루의 지도가 어깨를 관통한 것이었다. "그것은 아까 황보형이 당한 빚이오." 하후성의 재치있는 말이었다. "으으... 이, 이놈이!" 지도마살은 만면에 살기를 띄며 다시 몸을 날리려 했으나 백골사 마가 그를 저지했다. "마노제, 참게. 이곳에서의 싸움은 의미가 없는 것이니 훗날을 기 약하는 것이 좋네. 자, 가세!" 휙! 휘익! 휙! 그들의 말과 행동은 일치했다. 어깨를 한 번 흔든 순간 그들은 삽시간에 장내를 벗어나 사라져 버렸고 바닥에는 지도마살이 흘린 피 만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군웅들은 모두 꿈을 꾼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도 큰 변화였으며 엄청난 일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들은 마 종지문(魔宗之門)이라는 단체와 마존첩(魔尊帖)에 대해 불안의 먹 구름을 느꼈다. 또한 군웅들은 하후성이란 신비한 청년의 놀라운 무공에 대해서도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검제 남궁진강이 침묵을 깨고 말했다. "종리형님, 도대체 그 마존첩의 내용은 무엇이오?" 종리자허는 탄식하며 마존첩을 내밀었다. "보게." 남궁진강을 비롯한 고인들은 모두 마존첩으로 눈길을 집중시켰고 그곳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천풍보(天風堡)를 마종문(魔宗門)의 호북분타(湖北分陀)로 봉한 다. 백 일 안으로 수라궁(修羅宮)으로 와 마종지령(魔宗之令)에 복명하라. 이에 거역하면 천풍보는 멸문지화를 당할 것이다. 수라혈신(修羅血神> 마존첩의 내용은 그야말로 안하무인이요, 있을 수 없는 망상으로 가득 찬 내용이었다. 중인들은 모두 안색이 대변했다. 성질이 급한 자전신도 팽수위는 욕설을 퍼부었다. "빌어먹을! 이 따위 헛소리를 지껄이다니... 우리 하북 팽가에도 이런 서찰이 날아왔단 말인가?" 중인들의 안색은 모두 침통해졌다. 의사청(議事廳). 이곳은 천풍보에서 중요한 공사(公事)를 토의하거나 결정짓는 장 소로 지금 의사청에는 여러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모두 당금무림의 사가(四家)와 일장(一莊), 이보(二堡)의 인물들로서 먼저 천풍보의 주인인 태을성수 종리자허를 비롯하여 검제 남궁진강, 천수겁천 당환성, 자전신도 팽수위가 있었다. 그리고 뒤늦게 도착한 산동(山東) 악가(岳家)의 가주 선마검 악진 원(岳震元), 태양장의 장주인 태양신군 황보숭양, 신창보의 보주 인 자면신창 소중산 등의 고수들도 나란히 앉아 있었다. 좌중은 한동안 조용했다. 이윽고 침묵을 깨듯이 먼저 태양신군 황보숭양이 고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 어이가 없소이다. 마존첩인지 뭔지를 보자마자 그토록 많이 몰려왔던 무림인들이 급급히 자신의 문파와 집으로 돌아가 버리다 니......." 그 말에 팽수위도 못마땅하다는 듯이 코웃음쳤다. "그들이 이토록 이기적일 줄은 정말 몰랐소!" 태을성수 종리자허는 탄식하며 말했다. "그들을 탓할 수만은 없는 일이오. 지금 이런 상황에서 팽형은 하 북팽가가 걱정되지 않소?" 자전신도 팽수위는 탁자를 쾅 치며 거칠게 말했다. "내 어찌 걱정이 되지 않겠소이까? 그러나 걱정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오? 앞으로의 일에 공동대응을 해야지 무작정 허겁지겁 자신 들 문파로 돌아간다면 무슨 대처를 할 수 있겠소?" 중인들은 모두 할 말을 잃은 듯 침중하게 침묵을 지켰고 검제 남 궁진강이 탄식하며 침묵을 깨뜨렸다. "근 백 년 동안 무림은 너무도 평온했었소. 그러나 그 반면 정파 무림은 오히려 단결심이 약해지고 각기 자파(自派)의 안위에만 신 경을 쓰는 좋지 않은 풍토가 생겨났소." 자면신창 소중산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옳은 말이오. 그동안 무림인들은 구파일방, 특히 소림을 너무도 의지해 왔었소." 소중산은 침을 꿀꺽 삼킨 다음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나 실상 정파무림의 지주인 소림은 백 년전 탕마멸사(蕩魔滅 邪)에 앞장 섰던 희대의 고수 마애천불(魔涯天佛)을 불러들인 이 후 줄곧 강호 일에 관계하지 않았소." 하후성은 흠칫했다. '마애천불이란 천뢰 사숙님을 말하는구나.' 소중산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팔파일방의 세력도 이제는 예전 같지가 않소이 다." 종리자허도 탄식했다. "아! 아무튼 이미 발등에 불은 떨어졌소이다. 마종문이 어떤 것인 지는 모르나 백골사마같은 노마들이 수하 노릇을 하는 것을 보면 실로 무서운 집단임에 틀림없소." 남궁진강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를 표했다. "으음, 형님의 말씀이 맞소이다. 소제의 추측대로라면 아마 백일 후에 있을 수라궁 마종지문의 개파대전 이후 강호무림에는 엄청난 변혁이 일어날 것같소이다." 중인들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덮치자 종리자허가 다시 탄식하 며 입을 열었다. "으음, 실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소이다. 더구나 정파무림의 본 산이라 할 수 있는 소림사(少林寺)마저 백 년 이래 무림의 일에 관여치 않고 있으며 구파일방 중 가장 강한 무당(武當), 천산파 (天山派)도 이십 년 이래 두문불출이요, 해남파(海南派)는 이미 팔십 년 전에 문을 닫아 걸었고......." 종리자허는 침중하게 말을 이어갔다. "더구나 공동파마저 천하제일도(天下第一道)이신 적봉우사(赤鳳羽 士)께서 실종된 이후 무림과 인연을 끊었으니 결국 구파일방은 당 금에 이르러서는 이름만 있을 뿐 유명무실(有名無實)한 존재일 뿐 이오." 그의 말이 끝난 순간 하후성은 움찔했다. '적봉우사라고?' 종리자허는 다시 침중하게 말했다. "특히 가장 애석한 것은 정파무림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중 원무성(中原武城)의 노성주(老城主)인 주청산(朱靑山) 노선배께서 이십 년 이래 두문불출 하시는 것이오." 하후성은 그 순간 웬일인지 가슴이 찌르르 울리는 것을 느꼈다. '주청산!' 하후성은 급히 물었다. "그 분은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그의 질문에 당환성이 대답했다. "으음, 주청산 노선배는 대단한 고수(高手)로써 정파무림의 명숙 으로 추대받고 있으며, 중원무성(中原武城)은 성역(聖域)으로 되 어 있소." "으음." "주청산 노대협은 여태까지 한 번도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언제나 육장(肉掌)만을 썼으나 그 분의 권(拳), 장(掌), 지(指)는 무림의 독보적 절기로 알려져 있소. 원래 그 분은 오십 년 전 무당파(武 當派)의 속가제자(俗家弟子)로써 현 무당장문인 을목자(乙木子)의 사숙뻘이 되오." 당환성이 말하는 동안 중인들은 모두 공경하는 표정을 지었고, 그 로 미루어 중원무성의 성주인 주청산이 얼마나 존경받는 인물인지 능히 짐작할 수가 있었다. 당환성은 재차 말을 이었다. "그 분은 무당파의 내가권장법(內家拳掌法)에 자신이 깨달은 독문 의 무학을 가미하여 장삼봉(張三峯) 진인으로부터 시작된 무당내 가권을 완성시킨 절세고수이오." 하후성은 가슴이 더욱 진동하여 안색이 변하며 조심스럽게 물었 다. "혹시... 그 분에게 손녀가 있습니까?" 그 질문에 당환성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후소협이 그걸 어떻게? 그 분의 손녀는 거의 무림에 나온 적이 없는데......." 하후성의 심장은 더욱 심하게 뛰었다. "그, 그 분 손녀의 이... 름은?" 당환성은 의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글쎄... 너무 오랜 일이라서......." 그러자 옆에 있던 남궁진강이 말했다. "노부가 알기로 그 분 노대협의 손녀 이름은 주설란(朱雪蘭)이라 고 들었소이다." 하후성은 마침내 심장이 탁 멎는 것같은 충격을 받으며 일시간에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드디어... 아버님이 마지막 남긴 중 자(中字)의 뜻을 알았구 나.......' 중인들은 모두 그의 반응에 의아심을 금치 못했다. 하후성은 그들 을 의식하여 곧 표정을 회복시켰으나 내심 끓어오르는 격동을 누 를 길이 없었다. '아버님! 드디어 외증조부님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 버님, 소자는 어찌해야만 하옵니까?' 하후성의 마음은 심한 격탕을 거듭했다. 혈연(血緣), 그것은 인간 본연의 끊을 수 없는 감정이 아닌가? 그러나 혈연을 느끼기에 하후성의 외증조부는 너무도 많은 한(限) 을 하후성의 가슴에 못박히게 한 존재로 비록 겉으로는 태연한 표 정을 짓고 있었지만 내심 무수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좌중의 화제가 다행하게도 다른 곳으로 옮겨지고 있었고 자면신창 소중산이 침중하게 물었다. "앞으로 어떻게 대처하면 좋겠소이까?" 종리자허가 담담하나 기개있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물이 넘치면 흙으로 막고, 적이 오면 군사(軍士)로 막으라 했소. 정파무림의 의기를 잃지 않으면 그 어떤 사(邪)의 세력도 능히 물 리칠 수가 있는 법이오. 우선 각자의 문파로 돌아가 대책을 상의 한 뒤 백 일후에 있을 마종문의 개파대전 이전에 다시 상의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팽수위가 다시 탁자를 두들겼다. "좋소! 대체 수라궁 마종지문이 어떤 곳인지 그때 가서 똑똑히 보 겠소." 황보숭양도 두 눈에 홍광을 뿜어내며 말했다. "그때 우리 태양장도 뜨거운 맛을 보여 그들의 생각이 망상이었음 을 일깨워 주겠소!" 중인들은 팽수위나 황보숭양의 말에 모두 투지가 끓어오르고 있었 으나 반면에 웬지 모르게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금치 못했다. 그들의 가슴 속에는 부지불식간 거대한 먹구름이 밀려들고 있었 고, 그것은 바로 장차 무림에 엄청난 혈풍이 몰아칠 것이라는 막 연한 불안감이었다. 밤. 눈이 내리고 있었다. 밤하늘에 무수히 떨어지는 은백의 눈송이는 소리없이 지계(地界)를 덮고 있다. 인간의 마음이 눈같이 희다면 더이상 무림의 혈풍(血風)은 일지 않으리라. 한 객방의 창가에서 하후성은 창문을 열어젖힌 채 소리없이 내리 는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천풍보를 떠나려 했으나 보주인 태을성수 종리자허가 극력 붙드는 바람에 하룻밤 유하게 된 것이었다. 그가 든 객방은 고귀한 빈객을 모시는 곳으로 매우 단아하게 꾸며 져 있었고, 또한 천풍보의 깊은 후전(後殿)에 위치하고 있어 조용 하기 그지 없었다. 하후성은 멍하니 창 밖을 응시했다. 눈만 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독고황(獨孤皇)....... 하후성은 창 밖의 어둠 속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내심 부르짖었 다. '황(皇). 지금쯤 너도 이 눈을 보고 있겠지. 황, 너는 대체 이 하 늘 아래 어느 곳에 있느냐? 오늘따라 웬일인지 그대가 더욱 그립 구나.' 하후성은 창 밖으로 팔을 내밀어 손바닥에 떨어지는 차가운 눈의 감촉을 느꼈다. '너는 나에게 말했지, 언젠가 이 중원제일의 고수(高手)가 되겠다 고! 그런데 어찌하여 무림에서 너의 소식을 조금도 들을 수가 없 단 말인가? 너와 헤어진 후 벌써 다섯 번째 오는 눈이건만 세월이 갈수록 나의 마음은 자꾸 외로워지기만 하는구나.' 하후성은 마음이 울적해짐을 금치 못했다. 부모형제의 정(情)을 누려보지 못한 그는 오직 독고황에게만 유일하게 뜨거운 정을 주 어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와 헤어진 지 오 년이 지나도록 만날 수 없었으 니....... 하후성의 마음은 고독(孤獨)으로 쓸쓸하기만 했다. 그러다 그는 갑자기 무엇을 생각했는지 품 속에 손을 집어 넣었고 그의 손에는 한 권의 비단 책자가 들려 나왔다. <뇌음진경(雷音眞經)> 그것은 바로 오 년전 하란산에서 그의 부친 하후연(夏候淵)의 목 숨과 바꾸어 온 천축(天竺) 대뢰음사(大雷音寺)의 보전(寶典)이었 다. 하후성은 뇌음진경을 두 손에 들자 일단 먼저 마음의 격동을 억눌 러야 했다. '황. 오늘 드디어 외증조부님의 행방을 알아냈다. 어머님의 소식 도....... 미칠 듯이 보고 싶다, 그들을....... 그러면서도 달려 가지 못하는 내 마음을 아느냐? 황.......' 하후성은 뇌음진경을 움켜쥐었다. '이 한 권의 책자 때문에... 사랑을 위하여 눈보라 속에서 숨지신 아버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다. 황.......' 뇌음진경을 쥔 손이 격하게 떨렸으나 그가 고통을 내색하지 않는 것은 불문의 반야밀다대승신공으로 다져진 초인적인 정력(定力) 때문이었다. 이윽고 하후성은 간신히 마음을 가라 앉히고 뇌음진경을 품 속에 도로 집어 넣었다. '주청산(朱靑山), 나의 외증조부....... 그러나 결코... 결 코.......' 하후성은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그런데 문득 방 밖에서 한 줄기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하후소협, 좀 들어가도 되겠소?" 그는 태을성수 종리자허였고 하후성은 흠칫하여 돌아서며 담담히 말했다. "들어오십시오, 선배님." 문이 열리고 종리자허의 인자하고 현기어린 모습이 들어섰다. 그 는 만면에 부드러운 웃음을 짓더니 활짝 열린 창문을 보며 말했 다. "허허! 소협은 무척이나 낭만적인 성품을 지녔구려. 밤에 자지 않 고 눈을 감상하다니......." "무슨 말씀을....... 그런데 무슨 일로 이 밤중에?" 종리자허는 방 안의 탁자에 앉으며 신중히 말했다. "소협에게 한 가지 상의할 일이 있어서요." 하후성이 의문을 느끼며 맞은 편에 가 앉자 종리자허는 그를 진지 하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소협, 솔직히 대답해 주시겠소?" "무엇을......?" "소협은 소림(少林) 출신이 아니시오?" 하후성은 흠칫했다. "아까 영빈청에서 소협이 백골사마와 황보숭양대협을 갈라서게 한 무공은 노부가 알기로는 소림의 범자대비공(梵慈大悲攻)이었소." 하후성은 안색이 약간 변했다. "또 한 가지, 현 천하무림에서 소협 정도의 무공을 익힐 수 있게 키울 기인(奇人)은 오직 소림의 삼성승(三聖僧)밖에 없기 때문이 오." 종리자허의 추측은 실로 칼날같았고 마침내 하후성은 탄식하고 말 았다. "노선배의 혜안은 도저히 속일 수가 없군요. 그렇습니다, 모두 선 배님의 예측대로 입니다." 종리자허의 얼굴이 기쁨으로 환하게 펴지는가 싶더니 그는 덥썩 하후성의 손을 잡으며 탄성을 발했다. "오, 오! 역시... 역시!" 그는 잠시 흥분한 듯 말을 잇지 못하다가 이렇게 부르짖었다. "진정 기쁜 일이오! 실로 중원무림의 커다란 복이오!" 반면 하후성은 그저 담담히 미소지을 뿐이었다. 하후성과 종리자허, 그들 두 사람은 탁자에 마주 앉아 향차(香茶) 를 나누며 조용히 담소를 나누었다. 종리자허는 흰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실상 노부가 회갑을 기해 정파무림인들을 초청한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였소." 종리자허는 차를 한 모금 마신 연후 말을 이었다. "그것은 무림동도들과 한 가지 일을 상의하려는 의도에서였소." 하후성은 지혜로운 눈을 이따금 깜박일 뿐 조용히 경청했다. "원래 노부는 약간의 성복지학(星卜之學)을 익히고 있었소. 그리 하여 거의 매일같이 천공(天空)을 살피는 게 버릇이 되어 있소이 다." 하후성은 그 말에 소림의 천심선사를 떠올리며 미소지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노부는 전설로 알려진 천혈성(天血星)이 차 츰 붉게 타오르는 것을 발견했소. 뿐만 아니라 사기(邪氣)를 띈 오대마성(五大魔星)이 천혈성을 둘러싼 채 점차 홍살(紅殺)의 기 운을 퍼뜨리는 것까지 확인하게 되었소." 하후성은 눈썹을 움직였다. '천혈성과 오대마성. 이 노선배도 그것을 발견하다니.......' 그것은 이미 천심선사와 천기선사로부터 수차에 걸쳐 익히 들은 바가 아닌가? "전설에 의하면 천혈성과 오대마성이 빛을 내면 세상에 가공할 피 바람이 분다고 했소. 강호무림에 유사 이래 엄청난 혈겁(血劫)이 일어난다는 것이오." 종리자허의 안색은 지극히 어두워졌다. "그래서 노부는 이번에 회갑을 명분으로 무림고수를 모아 이 일에 대해 상의를 하고자 했던 것이오. 틀림없이 거대한 마(魔)의 세력 이 암중에 자라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오." 종리자허는 탄식했다. "그러나 그 누가 알았겠소? 그 마(魔)의 세력이 예상보다 훨씬 빨 리 나타난 것이오."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노부의 성복지학은 그 경지가 얕았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왔소. 그러나 소협을 보니......." 종리자허는 기광이 어린 눈으로 하후성을 부신 듯이 바라보았다. "소림 삼성승의 혜안(慧眼)에 대해 실로 감탄과 존경을 금할 길이 없소. 그 분들은 이미 모든 것을 예측하고 하후소협같은 무림의 신성(新星)을 키워냈으니 말이오." 하후성은 담담한 표정을 지을 뿐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깊숙한 두 눈에 담긴 혜지는 대체 무엇을 생각하는지 가늠할 길이 없었다. 종리자허도 역시 사십오 년 전 십오 세의 나이로 무림에 출도할 때에는 천하무림의 일대기재(一代奇才)로 지칭 받은 인물이었다. 태을성수 종리자허라는 그의 이름은 전 중원을 진동했고 모든 무 림인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제 세월이 흐르고 그는 인생의 고개에 올라섰다. 젊은 기인(奇人) 하후성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부러움과 감탄이 어려 있었다. 기재(奇才)는 기재(奇才)를 알아 보는가? 종리자허는 이미 하후성에게 남다른 애착을 느끼고 입가에 부드러 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협, 노부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소." "말씀하십시오." "잠깐만 노부를 따라서 한 사람을 만나보지 않겠소?" 하후성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종리자허의 입가에는 갑자기 자랑 스런 기색이 서렸다. "허허! 다름이 아니고 노부의 딸 아이를 만났으면 하오." 하후성은 뜻밖의 말에 어리둥절했다. "별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오. 그 이유는......." 종리자허는 기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 딸아이는 보통 아이가 아니기 때문이오. 그 아이는 천성적으 로 특이한 체질(體質)을 타고난 천고(天古)의 지녀(智女)라오." 그는 미간에 약간 어두운 기색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단지 흠이라면... 몸이 너무나도 허약하여 바람만 조금 불어도 쓰러질 정도로 약체일 뿐, 그러나 그 아이의 지혜는 실로 바다와 같이 깊소." 하후성은 웬지 강한 호기심을 느꼈고 종리자허는 그의 반응에 만 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노부가 조금 전에 딸아이에게 소협의 얘기를 했소. 그랬더니 그 아이가 꼭 소협을 한 번 뵙고 싶다는구료. 어떻소, 소협?" 하후성은 마음이 강하게 이끌렸다. "좋습니다. 선배님." 종리자허는 기쁜 표정을 지었다. "고맙소, 소협." 한 채의 별원(別院). 거대한 천풍보 내에서 가장 깊숙한 후원에 정교한 솜씨로 축조된 것으로 섬세하기 그지없는 여인(女人)의 기질이 풍기는 구조를 지 니고 있었다. 인공(人工) 연못이 후원의 한가운데 아름답게 자리잡고 있는가 하 면, 바로 그 연못 한가운데 별원이 지어져 있었다. 연못을 가로지르는 목교(木橋)가 별원으로 이르는 유일한 통로였 다. 밤. 눈이 내리는 조용한 밤길을 하후성과 종리자허는 걸었으며 그들은 곧 별원이 있는 연못가에 당도했다. 연못들은 투명하게 얼어 있었으나 그 위에 눈이 소복이 쌓이고 있 어 몹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바로 이곳이 딸아이의 거처요." 종리자허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한 후 목교 위로 올라섰다. 하후성은 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고 잠시 후 목교를 완전히 건너자 종리자허는 별원의 문 앞에서 멈추었다. 끼익! 문을 열자 은은하게 꾸며진 대청이 나왔다. 종리자허는 대청으로 들어섰고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청 안 쪽의 월동문 앞에 두 명의 청의시비가 서 있었다. "보주님을 뵈옵니다." 두 시비는 종리자허를 보자 꾀꼬리같은 음성으로 말하며 깊숙히 허리를 숙였다. "음. 향아(香兒)는 안에 있느냐?" 종리자허가 묻자 오른쪽의 얼굴이 갸름한 시녀가 공손히 대답했 다. "예, 보주님. 아가씨께서는 벌써부터 보주님을 기다리셨어요." "음." 종리자허는 월동문 앞에서 부드럽게 물었다. "향아야, 들어가도 되겠느냐?" 안에서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아버님이신가요?" 하후성은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웬지 가슴이 뭉클함을 느꼈다. 안에서 들려온 여인의 음성은 매우 부드러운 한편 특이한 느낌을 주는 것으로써, 그 음성에는 뭐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어도 사 람의 마음을 강하게 끄는 신비한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 하후성은 짧은 순간 자신도 모르게 아름답고 은은한 음성에 취했 고 그 음성은 다시 들렸다. "아버님, 들어 오세요." 종리자허는 월동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여인의 규방(閨房)으로 은은한 여인 특유의 향기가 감돌고 실내의 장식은 지극히 섬세하면서도 고아했다. 사방 벽에는 고서화 몇 점과 수를 놓은 부드럽고 단아한 장식이 걸려 있었다. 하후성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방 한가운데에 놓인 침상이 었는데 연자색 휘장이 반쯤 걷혀 있고 거기에는 한 미녀가 비스듬 히 기대앉아 있었다. 막 보던 책(冊)을 덮는 그녀는 백의의 미소녀(美少女)로 한 번도 햇볕을 보지 못한 듯 안색이 창백했으며 몸이 극히 유약해 보였 다. 나이는 대략 십칠팔 세 정도로 보였으나 기이한 매력이 그녀 의 전신에서 발산되고 있었다. 백의소녀는 칠흑같은 머리칼을 폭포수처럼 등 뒤로 완전히 빗어 내렸는데 그 모습은 막 하계에 내려온 선녀(仙女)를 방불케 했다. 그렇다고 백의소녀의 용모가 절륜한 것은 아니었고 단지 그녀가 풍기는 인상이 지극히 고혹적이라는 것이었다. 종리자허는 침상으로 다가가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향아야, 몸은 좀 어떠냐?" 소녀는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좀 괜찮아요." "허허... 다행이구나." 종리자허는 고개를 돌리며 하후성을 가리켰다. "참, 향아야. 이 분이 바로 애비가 말한 하후소협이시다." "아!" 소녀는 가벼운 탄성을 발했고 하후성은 그녀에게 정중히 포권했 다. "소생 하후성, 처음 뵙겠소이다." 백의소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달콤하게 말했다. "소녀는 종리유향(鍾里有香)이라고 하옵니다. 몸이 불편하여 예를 못취함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소녀, 종리유향이 그윽한 눈으로 응시하며 살풋이 미소짓자 하후 성은 전신이 찌르르 울림을 느꼈다. 종리유향의 미소는 단번에 사람을 흡수할 듯이 신비로운 마력(魔 力)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것은 사법(邪法)의 미공(迷功)과는 본 질적으로 다른 것으로써 천성적(天性的)으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 잡는 매혹을 지닌 미소였다. 하후성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이끌리는 것을 느꼈으나 담담할 뿐 겉으로는 이를 내색하지 않았다. "별 말씀을....... 개의치 않아도 좋소이다." 종리유향은 그윽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소협의 풍모를 뵈오니 소녀의 눈이 크게 떠진 듯하여 감탄을 금 치 못하겠습니다." 하후성은 그녀의 말에 절로 가슴이 잔잔하게 흩어지는 것같았으며 종리자허가 그런 그에게 말했다. "소협, 노부는 잠시 후에 올테니 향아와 이야기를 나누시오." 이어 그는 하후성이 뭐라 답하기도 전에 밖으로 사라졌다. 종리유향은 부드러운 눈길로 아직도 침상 앞에 서 있는 하후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소협, 자리에 앉으세요." "고맙소이다." 하후성은 침상 곁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그러나 그는 난생 처음 여인의 규방에 들어왔기 때문에 자연히 마 음이 거북하고 행동도 굳어졌다. 종리유향은 그의 심정을 헤아린 듯 자연스럽게 침상에 기대 누우 며 물었다. "실례이지만 소협의 태생은 어디인가요?" 하후성은 담담히 대답했다. "북방의 하란산(賀蘭山) 부근이오." 종리유향은 미소지었다. "하란산은 비록 가보진 않았으나 그곳의 아름다움은 서책을 통해 수없이 보았어요. 정말 하란산이 그토록 아름다운가요?" 하후성은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렇소이다. 하란산은 무척 아름다운 곳이오." "그래요. 언젠가는 저도 그곳에 가봤으면 좋겠군요." 종리유향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어두워졌으나 잠시 후에는 다시 맑 게 웃었다. 하후성은 그녀가 표정을 변화시킴에 따라 비로소 그녀의 얼굴 윤 곽을 자세히 파악하게 되었으며 내심 흠칫 놀라고 말았다. '으음, 이제 보니 종리소저는 매우 특이한 상이구나. 그녀는 선천 적으로 심미안상(審美顔相)을 가지고 있다. 이런 상은 자신은 의 식치 못하지만 천하의 모든 남자의 마음을 은연 중에 휘감게 된 다. 어떤 남자라도 소저가 웃는 모습을 보면 평생을 잊지 못하게 될 것이다. 아까 내가 느낀 감정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심미안상(審美顔相). 이것은 천성적으로 타고 나는 상(相) 중에서도 여인이 갖는 가장 희귀한 상이었다. 이 심미안상은 상천역서(相天易書)라는 고서(古書)에 기록 되어 있는 것으로 이 상을 타고 난 여인은 마음 먹기에 따라서 천하를 어지럽히는 일대마녀(一代魔女)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심미안상의 여인은 단명(短命)하는 것이 상례였고 하후성은 지난 날 소림에서 천기선사로부터 관상지술을 배운 적이 있어 이 점을 발견한 것이었다. 종리유향은 그가 자신의 얼굴을 계속 주시하자 창백한 얼굴에 홍 조를 띄우며 수줍은 듯 물었다. "하후소협, 어찌하여 저의 얼굴을 그렇게 뚫어지게 보시나요?" 하후성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 실례를 했소이다." 종리유향은 다시 그를 그윽히 바라보며 물었다. "제가 듣기로 소협은 소림 삼성승(少林三聖僧)의 전인이실지 모른 다고....... 그런데 그게 사실인가요?" "그렇소이다." "소림 삼성승의 존명은 수없이 들었어요. 게다가 아버님의 말씀에 따르면 이미 소협의 무공은 천하무적의 경지에 올라섰다고 하셨지 요." 하후성은 담담히 말했다. "종리 노선배의 지나친 과찬이시오. 소생은 이제 무림에 첫 발을 내민 말학 후배에 불과할 뿐이오." 그러나 종리유향은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아니예요. 소협의 전신에서는 일대종사의 풍모가 풍기고 있어요. 또한 소협은 이미 자신도 모르게 모든 사람들을 압도하는 기풍을 드러내고 있어요." "으음." "그것으로 보아 이미 소협의 무공 경지는 더 오를 수 없는 극(極) 의 경지에 있는 것이 분명해요." 하후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종리유향은 그의 그러한 모습에 서 도리어 일종의 형언할 길 없는 매력이 풍긴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내심 몰래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하후소협, 소녀가 왜 소협을 뵙자고 한 지 아시나요?" 하후성이 묵묵히 고개를 젓자 종리유향은 지혜가 가득 담겨진 눈 을 사르르 굴리며 말했다. "얼마 전에 아버님으로부터 마종문에서 보내온 마존첩(魔尊帖)을 보았어요." "마존첩......." "저는 어려서부터 몸이 무척 허약했기 때문에 자라면서 낙(樂)이 라고는 책(冊)을 읽는 것밖에 없었어요. 그 덕분에 웬만큼 지식을 쌓게 되었는데 특히 그 중에서도 성복지술(星卜之術)에는 큰 흥미 를 느껴 몰두했지요." "음." 하후성은 신음을 발하며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거의 매일 창문을 열고 천공을 살피던 중 저는 놀랍게도 천혈성과 오대마성이 준동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종리노선배께서도 같은 말씀이 계셨소이다." "그래요. 벌써 몇 년 전부터 천혈성과 오대마성을 관찰해온 저는 그것이 결코 평범한 마(魔)의 기운이 아님을 느끼게 되었어요. 그 래서 장차 무림은 천혈성과 오대마성의 기운을 타고난 가공할 거 마(巨魔)로 인해 혈풍에 휩쓸릴 것이 틀림없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어요." 종리유향은 약간 피곤한 듯 눈을 잠시 감았다가 뜨며 다시 입을 열었다. "천년무림(天年武林)을 통해서 수많은 마두들이 나타나 무림을 혈 겁에 빠뜨렸으나 그들은 모두 한 가지씩은 부족한 면(面)을 가지 고 있었어요. 즉 가장 무섭다던 육대천마(六大天魔)를 예로 들어 볼까요?" 하후성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천 년 전의 천중극마(天中極魔) 구양평(歐陽平)은 무림사상 최대 의 무공을 지녀 당시에 달마대사와 쌍벽을 이룬다 할 정도였지요. 그러나 그에게는 살심(殺心)은 있으되 웅심(雄心)이 없었어요. 또 한 무공은 있으되 지혜가 부족했죠. 그래서 결국 그는 말년에 제 자들의 배신으로 비참하게 죽고 말았어요." 그녀의 말은 잔잔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 이후 칠백 년 전에 혈세천존(血世天尊)은 비록 무공과 지혜 를 함께 지닌 대효웅(大梟雄)이었지만 남을 너무 믿지 않는 게 탈 이었죠. 그 불신(不信) 때문에 그의 혈세교(血世敎)는 금이 가고 결국은 멸망했지요." 하후성은 갈수록 감탄의 빛을 띄며 그녀의 얘기를 들었다. "오백 년 전의 천극수라대제(天極修羅大帝) 역시 무공은 있었으나 지혜가 모자랐죠. 또한 그는 너무도 오만했기 때문에 결국 자멸하 고 말았어요." "흐음." "이백 년 전의 천마교주(天魔敎主)나 불사지존(不死之尊), 백년 전 적미천존(赤眉天尊) 역시 무공은 불세출의 고수이나 모두 자만 심 때문에 사라진 인물들이죠, 그런데......." 종리유향은 어두운 안색을 지었다. "이번에 나타날 마두는 저의 상상으로도 추측하기 힘든 엄청난 능 력을 지니고 있어요. 그의 무공이나 지혜는 과거 육대천마를 합친 것보다 훨씬 뛰어나며, 더더구나 천혈성의 마기를 타고나 그 능력 이 하늘을 가를 정도예요." 하후성은 안색이 굳어졌다. "특히 그에게는 과거 육대천마와 맞먹는 오대마성(五大魔星)이 도 움을 주고 있으니... 실로 무서운 일이에요." 종리유향은 섬섬옥수로 이마를 짚었다. "천혈성과 오대마성이 누군지는 아무도 몰라요. 단지 천기(天機) 에 그들의 출현이 예시되었을 뿐이죠......." 하후성, 그는 아까부터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종리유향의 말을 듣 기만 했다. 그러나 그의 신비감 넘치는 깊은 두 눈에서는 이따금 씩 혜지가 번뜩이곤 했다. 종리유향은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소협께서는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하후성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담담히 말했다. "소저, 예로부터 수많은 개세마두들이 나타나 세상을 어지럽혀 왔 소. 그러나 이제껏 그 누구도 무림을 지배한 자는 없었소." 종리유향은 아름다운 눈을 빛내며 하후성을 바라보았다. "이번에 나타날 천혈성과 오대마성이 제아무리 강하다 해도 결과 는 마찬가지가 될 것이오." 하후성의 음성은 여전히 담담하기만 했다. "정도인의 기(氣)가 꺼지지 않고 살아있는 한, 평화는 무너지지 않을 것이오." 그는 말을 마치자 신음처럼 덧붙였다. "단지... 그 과정에 있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릴지 의문이지만 말 이오......." 하후성이 몸을 돌려 창문 쪽을 향하자 종리유향은 문득 하후성의 등이 한 없이 넓고 커다랗게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하후성의 등을 보는 것 자체가 마치 하나의 거대한 산(山) 을 보는 것 같다고 느꼈다. 즉 그 어떤 일이 닥쳐도 여전히 원래 그 자리에 산(山)처럼 변화없이 서 있을 것만 같은 굳은 신뢰를 느낄 수가 있었다. '이 분은 대체.......' 종리유향은 완전히 자신이 압도당하는 느낌과 함께 마음 한 구석 에서 가슴을 울리며 다가드는 뜨겁고 오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녀의 모든 생각들이 짧은 찰나에 새롭게 바뀌고 있었다. '아!' 그녀는 등을 돌린 하후성의 뒷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무엇인가 끓는 듯한 격정이 밀려들어 그녀의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공히 천하제일지녀(天下第一智女)인 종리유향. 그러나 총명한 그녀의 두뇌조차도 지금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는 도저히 규명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바로 이런 감정을 생전 처음 느꼈기 때문이었다. 사랑(愛), 그것은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 아닐지....... 종리유향의 창백하던 양 볼에 은은히 홍조가 떠올랐다. 가슴이 두 근거리기 시작하자 얼굴에 화기(和氣)가 밀려든 것으로 그러한 그 녀의 모습은 너무도 아름다왔다. 때마침 몸을 돌린 하후성은 종리유향의 그런 모습을 보는 순간 가 슴이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그의 마음이 또다시 걷잡을 수 없이 그녀에게 빨려들었다. 그것은 실로 이해할 수 없는 운명적인 느낌으로써, 두 남녀의 뜨 겁에 타는 눈빛이 허공에서 얽혔다. 그 짧은 순간 우주(宇宙)는 멎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갑자기 종리유향은 심한 기침을 해댔다. "콜록! 콜록! 콜록......." "종리소저!" 하후성은 깜짝 놀라 그녀에게 다가갔으나 감히 그녀의 몸에 손을 대지 못하고 멈칫거렸다. 종리유향은 잠시 후 간신히 기침을 멈추긴 했다. 그러나 그녀의 안색은 백짓장처럼 창백해 있었으며 이마에는 땀방울마저 처연하 게 맺혀 있었다. 두 눈을 꼭 감은 종리유향은 애처롭기 그지없는 모습이었으며 긴 속눈썹에서 보이는 가느다란 떨림이 더 할 수 없이 사람의 마음을 시큰하게 했다. 하후성의 돌처럼 굳었던 의지가 서서히 풀리고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종리유향의 등을 부축했다. "소저, 몸이 무척 불편한 듯 싶소이다." 종리유향은 두 눈을 살며시 뜨며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이어 그 녀는 그윽한 눈빛으로 잠시 하후성을 바라보더니 그의 가슴에 상 체를 기댔다. 하후성은 자신도 모르게 침상에 앉으며 그녀의 몸을 감싸 안았다. 그러나 그녀를 안은 순간 그는 종리유향의 어깨가 너무나도 가냘 프다고 생각했다. "하후소협......." 그의 가슴에 안긴 종리유향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소저." 종리유향은 눈을 사르르 감으며 물었다. "제 모습이 무척... 추하죠?" 하후성은 그녀의 몸을 약간 힘주어 안으며 부인했다. "아니오. 소저는 아름답소, 그 누구보다도......." 종리유향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하후소협, 당신은 만개(滿開)하고 싶은 꽃의 열망을 아시나요?" 하후성의 안색이 미미한 흔들림을 보였다. "화무십일홍(花無十一紅), 꽃은 십 일(十一)을 붉지 못하다 했죠. 그러나 저는 십 일이 인생의 전부라고 해도 좋으니, 단 한 번만이 라도 활짝 피어 봤으면... 소원이 없겠어요......." 하후성은 가슴이 뭉클함을 느꼈고 종리유향은 그의 품에 기댄 채 넋두리하듯 말했다. "소협, 어려서부터 몸이 아주 약한 소녀가 있었죠......." "으음." "그녀는 너무나 연약하여 언제나 침상 신세만 지고 살면서 이 세 상에서 평범한 사람들을 언제나 부러워했죠....... 그러나 하늘은 그녀에게만은 그런 행복을 주지않는 거예요......." 문득 하후성은 가슴이 축축해짐을 느끼고 흠칫했다. 종리유향이 그의 가슴에 얼굴은 묻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후성은 가슴에서 일어나는 격랑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만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굳게 껴안았다. "아!" 종리유향은 가는 신음을 발했으나 뿌리칠 생각이 없는 듯 오히려 그의 품에 더욱 파고 들었다. 마치 한 마리 외로운 새처럼....... 하후성의 물같이 고요하고 잔잔하던 마음에 뜨거운 파도가 일어났 다. "소저......." 그가 부르자 종리유향은 두 눈을 떴고 신비하도록 아름다운 그녀 의 눈 속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그러나 그 눈 속에는 의 혹과 기대, 그리고 막연하기는 하나 미지(未知)의 희망과 애정의 빛깔이 섞여 있었다. "유향(有香)." 마침내 하후성의 마음이 그녀를 향해 활짝 열렸다. 그의 입술이 서서히 떨어지며 종리유향의 젖은 입술을 덮었다. "아!" 종리유향은 전신을 바르르 떨며 그의 목에 가는 두 팔을 감았다. 과거 백화미(白花美)의 선정적이며 적나라한 육체 공세에도 굴하 지 않았으며 반야밀다대승신공을 익혀 그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던 하후성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도 인간의 순수한 본연의 정(情)에는 약했다. "서... 성랑(星郞)......." 종리유향이 전신을 파르르 떨며 그의 넓은 가슴에 몸과 마음을 파 묻어 왔다. 어려서부터 정(情)에 굶주려온 하후성, 그는 이 순간 처음으로 이성(異性)을 받아들인 행복감을 느끼고 있었다. 정실(淨室). 하나의 오목(烏木) 탁자를 마주하고 하후성과 태을성수 종리자허 가 앉아 있었다. 종리자허가 앉은 자리는 창문이 보이는 곳이었 다. 밝은 아침. 종리자허는 계속 창문 쪽을 바라보며 담담히 웃었다. "소협, 아마 어젯밤이 향아 그 아이의 일생 중 가장 행복한 날이 었을 것이오." 하후성도 시선을 창문에 둔 채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종 리자허는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생각하면 정말 가슴이 찢어질 듯 하오." 아침 햇살 아래 종리자허의 안면에 있던 주름살이 더욱 깊게 보였 고, 그는 우울하게 말을 이었다. "하늘이 내린 천형(天刑)인지 향아는 천성적으로 절음폐혈증(絶陰 閉血症)을 앓고 있는데... 그 절증에 걸린 자는 이십 세를 넘기지 못하고 죽게 되오......." 하후성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그... 그럴 수가......." 그는 더 할 수 없이 충격을 받았다. "그럼 그 절증을 치료할 방법이 전혀 없단 말입니까?" 종리자허는 고개를 흔들었다. "노부는 수십 년 간 의술(醫術)에 정열을 바쳐왔소. 천하에서 의 술 만은 누구보다 높다고 자부해 왔소, 그러나 유독 딸아이만 은......." 하후성은 문득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세상에는 상생상극(相生相剋)의 이치가 있는 법이거늘 방법이 어 찌 전혀 없겠습니까?" 종리자허는 탄식하며 대답했다. "물론... 전혀 없지는 않소. 그러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요." "왜......." "두 가지 영약(靈藥) 중 하나가 있으면 되기는 하오." 하후성이 눈을 빛내며 바라보자 종리자허는 거의 자조에 가까운 투로 입을 열었다. "그 하나는 소림의 대환단(大還丹)이오." 그 말에 하후성은 그만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대환단, 그것은 이미 자신이 마지막으로 복용함으로써 영원히 소 림에서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만년신학(萬年神鶴)의 정혈(精血), 즉 만년학정혈(萬 年鶴精血)이오." "아!" 만년학정혈, 그것은 실로 전설상에나 있는 영물이었으며 또 설사 있다 해도 그것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을 따려는 것과 다르지 않았 다. 하후성은 침음했고 종리자허는 탄식하며 다시 말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있소. 그것은 마교(魔敎)에서 전해오는 천마환혼영체대법(天魔還魂靈體大法)이오." "그, 그것은......." 하후성이 놀라자 종리자허는 괴로운 듯한 신음을 흘렸다. "그러나 그 대법을 시행하자면 필히 죄없는 동남동녀(童男童女)들 을 희생시켜야 하고 또 성공한다고 해도 향아는 그 후 무서운 천 하의 희대마녀(希代魔女)가 될 것이오." "그... 방법을 종리소저도... 알고 있습니까?" 종리자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소. 그러나 그 아이는 마녀가 되면서까지 살고 싶다는 생 각은 없다고 했소." 하후성은 잠시 침묵했다. 정녕 이 순간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 인가? 그러나 그는 곧 진심이 담긴 어조로 종리자허를 향해 말했 다. "소생이 만일 인연이 있어 만년학정혈을 얻는다면 반드시 가져오 겠습니다." 종리자허는 쓰디 쓰게 고소를 지었다. 천하제일의 의술을 지닌 그 가 말없이 탄식하는 것이었다. 눈(雪)이 내렸다. 눈보라 속에 천풍보의 문(門)이 열렸다. 보문 안에서 한 명의 영 준한 백의청년이 걸어나왔으나 청년을 배웅하는 사람은 단 한 사 람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천하무림이 존경하는 태을성수 종리자허였다. 그토록 흥청거리고 떠들썩하던 천풍보(天風堡)나 지금은 너무도 조용했고 종리자허는 지금 홀로 백의청년, 즉 하후성을 떠나 보내 고 있는 것이었다. 하후성은 감회 깊은 듯 천풍보를 둘러본 뒤 종리자허에게 깊이 포 권했다. "그럼... 노선배님, 소생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잘 가시오, 하후소협." 종리자허는 아쉬운 듯 말했다. 여전히 눈이 쏟아지고 있었고 그 눈 속으로 하후성은 묻혀져 갔 다. 종리자허는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 문득 잿 빛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 놈의 겨울은 길기도 하군......." < 대소림사 제1권 끝 > ■ 대소림사 제12장 옥소마녀(玉蕭魔女)와 오상공자(五霜公子) ━━━━━━━━━━━━━━━━━━━━━━━━━━━━━━━━━━━ 무창성(武昌城) 교외.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며칠째 내리는 눈은 천지(天地)를 온통 은백색으로 뒤덮고 있다. 성내는 물론 교외의 가도는 한 자 이상 의 눈이 쌓여 걷기가 보통 힘드는 것이 아니었다. 관에서는 백성들을 동원하여 쌓인 눈을 치워 길을 내고 있었으나 계속 내리는 눈으로 인해 그 작업도 포기될 정도였다. 하후성은 걷고 있었다. 커다란 눈송이가 그의 머리에, 어깨에 소복소복 쌓이고 있었다. 애초에 태어날 때부터 끝없이 걸어온 듯 그의 발걸음은 일정한 규 칙으로 쉬임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특히 설지를 걷는 그의 보법(步法)은 매우 독특했다.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규칙적으로 내밀고 있었는데 기이하게도 눈 위에는 발자국이 앞 부분밖에 찍히지 않았다. 또한 발자국의 깊이 도 아주 얕아 눈이 몇 번 떨어지면 그 즉시 지워질 정도였다. 하후성은 계속 그런 식으로 눈길을 걸으며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걷다가 문득 그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뇌리에 초췌하지만 아름답기 그지없는 얼굴이 떠올랐다. '종리유향.' 그의 가슴 속에 연민의 정(情)이 물결처럼 밀려 들었으나 일면 가 슴 한 쪽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때 어디선가 낭랑한 웃음소리가 그의 귓전을 울렸다. "하하하! 하후소협, 무엇을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시오?" 하후성은 흠칫하여 고개를 돌렸다. 언덕의 한 나무 밑에 흑의문사(黑衣文士)가 서 있었는데 그는 바 로 위전풍이었다. 위전풍은 손에 옷과는 대조적으로 백색의 섭선(攝扇)을 가볍게 거 머쥔 채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눈발 속에 대조적인 흑삼을 입은 그의 모습은 웬지 음침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산뜻하고 탈속한 듯한 느낌을 주었다. "아, 위형!" 하후성은 반색을 지었다. 웬일인지 그는 위전풍이란 기이한 인물 에 대해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찌된 일입니까? 이곳에서?" 위전풍은 섭선을 흔들며 부드럽게 말했다. "하후형과 그대로 헤어지기 섭섭하여 이곳에서 하루 종일 기다리 고 있었소." 하후성은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하루 종일?' 아울러 그는 새삼스런 눈길로 위전풍을 바라보았으며 그의 가슴에 는 자신도 모르게 오랫동안 잊혀졌던 훈훈한 정이 피어나고 있었 다. 위전풍은 그에게 다가오며 낭랑하게 말했다. "참, 하후형. 시장하지 않소?" 하후성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시장하긴 하지만 이 설원에서 어떻게 식사를 하겠습니까?" 위전풍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제가 좀 준비한 게 있소이다. 자, 따라오시오." 위전풍은 의아해 하는 하후성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언덕을 넘어 갔다. 한 커다란 바위 아래. 그곳에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모닥불 위에는 먹음직 한 토끼고기가 한참 알맞게 익어가고 있었다. 타닥... 탁! 모닥불 타는 소리와 함께 토끼고기에서 구수한 기름냄새가 풍겨났 다. 그 누구라도 혹한의 눈보라 속 설원에서 이렇게 모닥불에 익 고 있는 토끼고기를 보면 군침이 돌지 않을 수 없으리라. 더구나 바위가 눈보라를 막는 병풍 역할을 하고 있어 아늑한 느낌 마저 주는 장소였다. "허허허... 먹음직스럽게 익었군. 자, 한 점 드시오." 위전풍은 유쾌한 듯 껄껄 웃으며 토끼고기를 권했다. 하후성은 잠시 망설였다. 소림에서 생활했던 그는 오랫동안 술과 고기를 먹지 않았었다. 그 러므로 토끼고기를 보는 순간 멈칫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내 그는 생각을 바꾸었다. "감사합니다." 그는 사의를 표하며 토끼의 한 쪽 다리를 떼었다. '이미 나는 승인(僧人)이 아니다. 구태여 속세의 음식을 피할 이 유가 없지 않은가?' 하후성은 이렇게 생각하며 토끼고기를 한 점 베어 물었다. 위전풍은 벌써 고기를 뜯고 다시 언제 준비했는지 호리병에 든 술 을 들이키고 있었다. "크으... 과연 여아홍(女兒紅)은 독하군. 자, 하후형도 한 잔 드 시오." 위전풍은 호리병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하후성은 사양하지 않고 받아 역시 한 모금 마셨다. 독하고 향기 나는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그는 부지런히 고기와 술을 들었다. 어느덧 하후성의 마음은 속(俗)으로 돌아와 춥고 황량한 설원에서 마음에 드는 위전풍이란 사나이와 함께 있다는 사실에 흐뭇해 하 고 있었다. 그런 생각은 위전풍도 다르지 않았는지 두 사람은 서로 시간이 흐 를 수록 친근감을 느껴가고 있었다. 이윽고 식사가 어느 정도 끝났고 위전풍은 기름묻은 손을 눈덩이 로 닦아낸 후 바위에 기대 앉았다. 그는 하후성을 호감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하후형, 소제가 한 가지 질문을 해도 되겠소?" 하후성은 대답 대신 그를 바라보았으며 위전풍의 얼굴에는 갑자기 진지한 기운이 어렸다. "하후형은 정(正)과 사(邪)를 어떻게 생각하시오?" 실로 기이한 질문이라 하후성은 의아함을 느껴 반문했다. "갑자기 그것은 왜?" 위전풍은 진지한 표정에 일말의 열기를 띄우며 말했다. "수천 년 전부터 정과 사는 세불양립(世不兩立)이었소. 숱한 반목 의 역사를 만들며 한 번도 정사가 함께 평화를 이룬 적이 없었소 이다. 그러나 최근 백 년 이래로 정사는 다소 융화를 이루었소이 다. 비록 언제 균형이 깨질지 모르지만 지금까지는 별 탈이 없이 형평을 이루고 있소이다." 하후성이 가만히 듣고 있자 그는 다시 물었다. "하후형은 이 점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위전풍의 질문은 무척이나 심각한 것으로써 그는 커다란 기대를 품은 듯 하후성을 주시하고 있었다. 하후성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 침묵하다가 드디어 입을 열었 다. "으음, 소생의 견해는 정사란 단지 마음(心)에 달린 것이라고 봅 니다. 정이라고 모두 좋거나 사라고 모두 나쁠 수는 없다고 생각 합니다." 위전풍의 표정에는 은은히 기쁨의 빛이 떠올랐다. 그는 하후성의 대답에 몹시 만족을 느낀 것이었다. 그는 눈에 기이한 광망을 나 타내며 하후성을 직시했다. "하후형, 소생이 누군지 아시오?" 뜻밖의 질문에 하후성은 아무 말 하지 않고 단지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위전풍은 침중하게 신음을 발하며 말했다. "으음, 솔직히 말씀드리겠소이다. 하후형은 혹시 사파무림의 남맹 북단(南盟北檀)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소이까?" 하후성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자 위전풍은 섭선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소생이 바로 남맹북단 중 북단(北檀), 즉 흑룡단(黑龍檀)의 단주 (檀主)인 선풍마서생(旋風魔書生)이오." 하후성은 입을 다물고 있었고 위전풍은 불안감이 어린 눈으로 하 후성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매우 초조한 모양이었다. 하후성이 이내 그를 보며 크게 웃었다. "하하하... 위형, 그것을 밝히기 위해 소생을 기다린 것입니까?" 위전풍은 얼굴을 활짝 펴며 그의 손을 덥썩 잡았다. "그렇소. 솔직히 소제는 하후형을 처음 볼 때부터 친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소이다. 그러나 정과 사는 서로 걷는 길이 달라서." 하후성은 그의 손을 마주 잡고 흔들었다. "위형, 그런 말은 하지 마십시오. 소제는 강호에 나와 위형을 만 난 것이 오히려 평생의 지기(知己)를 얻은 느낌입니다." "하후형!" 위전풍은 감격하여 그의 손을 꽉 잡았다. "고맙소, 하후형!" "위형." 뜨거운 사나이들의 우정(友情)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두 사내는 서로의 가슴으로 우정을 확인하면서 언제까지고 믿음이 깃든 눈으 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천릉현(天凌縣). 호북(湖北)의 명산 대홍산(大洪山)의 웅자가 한 눈에 들어오는 곳 이다. 이곳은 대홍산의 웅대한 산세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시작하 여 삼백여 호의 가호가 모여 있었다. 눈보라는 이곳 천릉현도 뒤덮고 있었다. 그 바람에 천릉현에서 보 면 거대한 대홍산의 웅자도 희뿌연 설막에 가려 희미하게만 보일 뿐이었다. 객점(客店). 천릉현을 지나는 행인들을 위해 생겨난 이 객점은 작고 초라했으 며 이름도 없었다. 단지 객점 밖에 꽂은 장대 끝에 붉은 천 조각 이 나부끼는 것이 객점임을 알리는 표기의 전부였다. 객점 안은 의외로 손님이 꽉 차 있었다. 아마 저마다 눈보라에 발이 묶인 모양으로 퀴퀴한 술냄새와 온갖 음식냄새 등이 뿌연 김과 함께 꽉 차 있었다. 객점 안에는 십여 개의 탁자가 있었는데 거의 모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한 쪽 구석진 곳에 유난히 눈길을 끄는 주객(酒客)이 있었다. 주객이라면 당연히 사내여야 했으나 뜻밖에도 여인이었다. 그 것도 누구나 한 번 보면 눈이 번적 뜨일 정도의 절세미녀(絶世美 女)였다. 녹의(綠衣)를 입고 날씬한 어깨에 역시 녹색의 피풍을 두른 미녀 의 나이는 대략 이십사오 세 가량 되어 보였다. 살결이 빙옥(氷玉)같고 오관이 눈부시게 아름다왔으나 그녀의 얼 굴에는 까닭모를 냉막함이 서릿발처럼 맺혀 있었다. 그녀는 탁자 위에 투명해 보이는 옥소(玉簫)를 놓고 술을 마시고 있었고 탁자 위에는 빈 술병이 나란히 다섯 개가 놓여 있었다. 여 자가, 그것도 절세미인이 실로 대단한 주량이었다. 녹의미녀는 연거푸 술을 마셔대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술을 따르다 술병이 빈 것을 느끼자 고운 아미를 찌 푸리더니 앙칼진 음성으로 외쳤다. "이봐, 주인장!" "네! 네." 주방 쪽에 있던 허름한 중년사내가 달려왔다. "술 한 병 더!" "네? 또... 술을... 요?" 객점주인은 어이가 없는 듯 멍한 표정이었으나 몸을 돌려 주방으 로 걸어갔다. '빌어먹을, 얼굴은 천하절색인데 무슨 여자가 그 독한 죽엽청(竹 葉靑)을 다섯 근이나 먹는담? 세상 오래 살고 볼일이군.' 객점주인은 내심 혀를 내두르면서도 잠시 후 다시 한 병의 죽엽청 을 가져왔다. "저... 안주는." "필요없어." 녹의미녀는 차갑게 내뱉고는 섬섬옥수로 술병을 잡아 잔에 가득 따르더니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객점 안의 손님들은 벌써부터 이 미녀주객(美女酒客)에 대해 잔뜩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녹의미녀의 얼굴에 서릿발처럼 어려있 는 냉막하고 차가운 기운에 감히 드러내놓고 관심을 보이지는 못 하고 있었다. 녹의미녀는 술잔을 내리며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약간 치켜올라간 아름다운 눈매에 문득 짙은 고독감(孤獨感)이 어 렸다. 빙결같이 희고 깨끗한 이마에 흘러내린 몇 올의 머리칼이 또한 그녀의 고독한 분위기를 더해 주어서 일까? 웬지 그녀의 모습은 보는 이의 가슴을 찡하게 하는 기운이 있었 다. 녹의미녀는 내심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세월은 흘러 또 일 년(一年)이 지났구나. 그러나.' 끼익! 이때 문소리와 함께 차가운 바람과 눈보라가 일시에 객점 안으로 쏴 밀려 들어왔다. 그로 인해 마침 고개를 들던 녹의미녀는 객점 안으로 들어서는 인 물을 보게 되었다. 녹의미녀는 막 들어서는 사람을 보는 순간 버 들잎같은 눈썹 끝을 가늘 게 떨었다. 객점 안으로 들어선 인물은 준수하게 생긴 백의청년으로, 일신에 는 눈같이 흰 옷에 칠흑같은 머리칼을 묶어 등 뒤로 늘어뜨린 특 이한 차림새였다. 그는 바로 하후성이었다. 녹의미녀는 짧은 순간이었으나 하후성의 탈속한 모습에 눈길을 빼 앗긴 듯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러나 곧 돌리며 술잔을 들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다시 차갑게 굳어져 있었다. 하후성은 한 쪽 귀퉁이에 자리잡은 후 간단한 음식을 시켰다. 음 식이 나오자 그는 묵묵히 식사했다. 그런 그의 모습은 지극히 안 정되어 있었다. 하후성은 식사를 마친 후 생각에 잠기고 있었다. '음, 대홍산까지 오기는 왔는데 천화곡(天火谷)을 아는 사람이 아 무도 없으니 대체 어찌된 일인가?' 그는 천기선사의 명대로 대홍산 천화곡을 찾아온 것이었다. '더구나 광검절심(狂劍絶心) 유무심(有無心)에 대해서는 아무도 아는 자가 없으니.' 하후성은 난감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분명 천기선사로부터 광검절심 유무심이 천하삼대검객(天下 三大劍客)중에서도 첫 번째라고 들었다. 그러나 태을성수 종리자 허조차도 광검절심이란 명호는 들은 적이 없다고 하였다. '대체 이게 어찌된 일인가?' 하후성은 준미한 눈썹을 가볍게 찌푸리며 고민에 잠겼다. 덜컹! 이때 다시 객점의 문이 열리며 다섯 명의 청년(靑年)들이 찬 바람 과 함께 들어왔다. 그들은 이십대에 삼십대 초반의 나이로 제법 준수한 용모를 가지고 있었는데 입고 있는 옷색깔이 모두 틀렸다. 또한 그들은 한결같이 오만하고 패도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 다. 그들은 객점 안을 훑어보더니 일제히 시선이 한 쪽으로 집중되었 다. 혼자서 자음자작하고 있는 녹의미녀를 발견한 것이었다. 오인 의 청년들은 녹의미녀를 발견하고는 모두 안색을 굳히며 눈빛을 번쩍였다. 이윽고 다섯 명의 청년들 중에서 금의(金衣)를 입은, 나이가 비교 적 어려보이는 청년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성큼성큼 녹의미녀 앞으로 가더니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옥소마녀(玉簫魔女) 채상홍(蔡桑紅)!" 녹의미녀는 고개를 들었고 그녀의 매서운 두 눈에 일순 살기가 스 쳤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술잔을 들이키며 냉담하게 말했다. "오상공자(五霜公子)였군." 금의청년은 음침하게 웃었다. "흐흐흐... 무척이나 태연한 척 하는군." 그는 다짜고짜 예고도 없이 좌수(左手)를 쭉 뻗었다. 쉭---! 칼끝같이 펼쳐진 좌수는 녹의미녀, 즉 옥소마녀 채상홍의 앞가슴 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강호상에서 여인의 가슴 부위는 공격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으나 청년은 일부러 금기를 깨는 듯 했다. "파렴치 한 놈!" 옥소마녀 채상홍은 냉랭하게 부르짖고는 술병을 들어 막았다. 술병은 정확히 금의청년의 손을 쳐냈다. 술병의 매끄러운 곡면을 이용한 방어법으로 병은 손상되지 않고 금의청년 손이 옆으로 튕겨나갔다. 그러나 금의청년은 냉소하며 즉시 오른발로 절묘한 자오각법(子午 脚法)을 펼쳐 옥소마녀가 앉아 있는 탁자를 강타했다. 펑! 탁자는 순식간에 박살나며 그 위에 놓여 있던 빈 술병들이 사방으 로 날았다. 그러나 옥소마녀 채상홍은 어느새 앉은 채로 뒤로 삼 장(三丈)이 나 미끌어져 있었다. 실로 귀신같은 신법이었다. 금의청년은 다시 그림자처럼 덮치며 양 손을 쫙 펼쳐 손가락을 일 제히 튕겼다. 피핑핑.! 그의 손가락 끝에서 매화꽃 형상의 환영이 영출되며 날카로운 경 기가 뻗었다. "매화십지(梅花十指)!" 옥소마녀 채상홍은 부르짖으며 안색이 변 했으나 몸을 핑그르르 돌 리며 수중의 옥소를 어지럽게 휘둘렀다. 파팍... 팍팍팍! 실로 절묘하게 그녀는 금의청년의 지법을 완벽하게 차단시켰다. 이 느닷없는 살벌한 싸움에 객점 안의 손님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 며 한 구석으로 몰렸다. 이때 객점주인이 허겁지겁 주방에서 달려나오며 부르짖었다. "여, 여러분... 왜 이러십니...... 윽!" 그는 말을 하다 말고 비명을 질렀다. 네 명의 청년 중 맨 앞에 서 있던 흑의청년이 그의 목을 움켜쥐었기 때문이었다. "이봐, 죽고 싶지 않으면 참견하지 말고 물러가라!" 흑의청년의 음산한 말에 객점주인은 안색이 흙빛이 되고 말았다. "으... 으... 으!" 이번에는 갈의를 입고 얼굴이 음침하게 생긴 청년이 휙 몸을 솟구 치더니 하나의 탁자 위로 올라섰다. 이어 그는 으스스한 음성으로 말했다. "모두들 이곳에서 사라져라!" 갈의청년은 음침하게 웃으며 발로 가볍게 탁자를 밟았다가 떼었 다. 그러자 탁자에는 시커먼 족인(足印)이 찍힌 채 구멍이 뚫려있 는 것이 아닌가? "늦는 자는 머리에 이런 것을 찍어주겠다!" "아이쿠...! 사람 살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손님들은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쥔 채 혼비백산하여 삽시간에 밖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객점주인의 목을 움켜쥐고 있던 흑의청년은 득의의 미소를 지으며 손을 뿌리쳤다. "아이쿠!" 객점주인은 비명소리와 함께 창문을 박살내며 밖으로 사라졌고 객 점 안은 삽시간에 텅텅 비게 되었다. 그러나 단 한 명 만은 애초의 모습 그대로 탁자에 그대로 앉아 있 었다. 그는 바로 하후성이었다. 하후성은 태연한 표정으로 창 밖 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를 발견한 흑의청년은 안색이 묘하게 변했다. 흑의청년은 하후성을 향해 다가갔으나 이내 흠칫하더니 걸음을 멈 추고 말았다. 하후성의 뒷모습이 마치 태산(泰山)처럼 그를 압도해왔기 때문이 었다. 그 느낌은 그로 하여금 알 수 없는 중압감을 가지게 해 더 이상 접근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흑의청년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대체 이 자는 누구길래 이토록 위압감을 풍긴단 말인가?' 이때였다. 펑! 하는 폭음이 일며 객점이 흔들렸다. 금의청년이 뒤 로 연달아 삼 보(三步) 후퇴하고 있었다. 그는 금의 앞가슴 부위가 날카롭게 찢겨져 있었는데, 그의 앞에는 옥소마녀 채상홍이 살기어린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금의청년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 찢어죽일." 그는 신형을 날려 다시 공격하려 했으나 이때 흑의청년이 그에게 외쳤다. "다섯째, 잠깐!" 금의청년은 멈칫하더니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대가(大哥)! 왜." "잠시만 물러가 있거라, 다섯째." 흑의청년은 그를 물리치고 나서 옥소마녀 채상홍의 앞으로 걸어가 더니 싸늘하게 입을 떼었다. "채상홍! 너도 우리가 올 줄은 예상 못했겠지?" "흥!" 채상홍은 대답없이 냉랭하게 코웃음칠 뿐이었다. "너는 미살혼(美殺魂) 광무(廣武)가 우리 오상공자(五霜公子)와 관계가 있음을 알고 있겠지?" "알고 있었지." 채상홍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녀의 음성에는 비웃음이 어려 있었 다. 그러자 흑의청년의 얼굴에는 점차 살기가 짙어졌다. "그런데도 그를 죽인 이유는?" 채상홍은 냉소했다. "흥! 얼굴 하나 반반하다고 함부로 여인을 건드리는 그런 놈은 백 번 죽어 마땅하지!" 순간 흑의청년의 두 눈이 냉혹하게 변했다. "우리 오상공자는 언제나 결과 만을 따진다. 어쨌든 미살혼 광무 는 우리에게 큰 도움을 준 적이 있고 네가 그를 죽였으니 우리는 너를 죽여 그의 원혼을 달래주겠다." 한편 하후성은 등지고 앉은 채 그들의 말을 모두 듣고 있었다. '오상공자라면 현 사도무림(邪道武林)의 젊은이들 중에서 가장 두 각을 나타내는 자들로 정파의 사룡사봉(四龍四鳳)과 필적한다고 들었다.' 그는 혼자서 읊조리며 빙긋 웃고 있었다. '더우기 이들은 사룡사봉과 동등한 실력을 지녔으면서도 언제나 함께 행동하기 때문에 강호의 고인(高人)들조차 이들에게는 한 수 양보하는 실정이라고 들었다. 그것은 이들의 합격술 때문이라고.' 오상공자(五霜公子). 그들은 사도(邪道)의 후기지수로 각각 그 출신은 물론 무공내력조 차 모두 달랐다. 원래 그들은 사오 년 전부터 개인적으로 강호에 나타났었다. 서로 각각 무명을 날리던 그들은 이 년 전 천붕산(天朋山) 마애봉(魔涯 峯)에서 만나 서로의 무공을 비견해 보기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호승심으로 격돌했으나 그날 이후 의기가 상통하여 그 자리에서 결의형제(結義兄弟)를 맺기에 이르렀다. 그 후 그들은 오상공자라는 이름으로 언제나 함께 행동하면서 쟁 쟁한 정파의 고인들과 유수한 전대 고수(高手)들을 차례로 격파하 였다. 흑풍공자(黑風公子) 적무성(赤武成). 독수공자(毒手公子) 전비(田飛). 백변공자(百變公子) 영호랑(令狐郞). 오독공자(五毒公子) 사마균(司馬均). 매화공자(梅花公子) 하익룡(河翼龍). 이들 다섯 명의 청년 고수들은 제각기 특성있는 무공으로 기묘한 배합을 이루어 정사(正邪)를 막론하고 종횡무진하는 위명을 떨쳤 다. 챙! 흑의청년, 즉 오상공자의 첫째인 흑풍공자 적무성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았다. 그의 검은 자루와 검신이 모두 흑색(黑色)인 괴검이 었다. "채상홍! 이 자리에서 너의 시신을 거두겠다." 그는 싸늘하게 말한 후 고개를 돌려 외쳤다. "아우들! 포위해라!" 휙휙! 나머지 네 명의 오상공자는 신속하게 신형을 날려 옥소마녀 채상 홍의 퇴로를 차단했고, 그것을 본 채상홍은 아미를 찌푸리며 냉소 했다. "흥! 역시 비겁한 놈들이군. 염치없게 합공(合攻)을 하다니." 그러나 그 말에 흑풍공자 적무성은 표정이 변하기는커녕 오히려 당당하게 말했다. "오상공자는 오체일심(五體一心)으로 상대가 약하건 강하건 늘 합 공한다. 이미 우리들의 이런 행동은 강호 친구들이 너무도 잘 알 고 있다. 그러니 네가 뭐라건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싸늘하게 일갈했다. "받아라!" 쉭--- ! 그의 수중에서 흑검이 시커먼 검막을 형성하며 공격했고, 옥소마 녀 채상홍은 긴장된 표정으로 신중히 응수했다. 파파팟! 윙--- ! 옥소가 어지럽게 날고 검과 장(掌), 지(指)가 돌풍을 일으키며 얽 혔다. 싸움은 치열하게 계속되었다. 그것은 오대 일의 불공평한 대결이 었다. 그러나 옥소마녀 채상홍의 무공은 실로 대단했다. 그녀의 신법은 마치 그림자 같았으며 이따금 휘두르는 옥소의 공격은 날 카롭기가 가히 살인적(殺人的)이었다. 옥소의 그림자는 수십 개에서 수백 개로 늘어나 전후좌우를 면밀 히 차단시키며 수세를 펴다가 갑작스럽게 치명적인 살초(殺招)를 전개하곤 했다. 하후성은 비록 등을 지고 앉아 있었으나 단지 청각 만으로도 싸움 의 상황을 환히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옥소마녀에 대한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옥소마녀 채상홍이라면 몇 번 들은 적이 있다.' 옥소마녀(玉簫魔女) 채상홍(寨桑紅). 그녀는 강호에 출도한 지 칠팔 년 정도로 미색(美色)이 절륜하고 무공이 출중하여 출도하자마자 강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숱한 청년들이 그녀의 사랑과 환심을 얻으려 했으나 불행히도 채 상홍은 그들과의 애정관계가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녀 에게 접근하는 청년들이 모두 그녀의 외면적인 미(美), 즉 육체 만을 탐했기 때문이었다. 채상홍은 결국 천하의 남성들에게 배신감과 혐오를 느끼게 된 나 머지 성격이 완전히 변하고 말았다. 그녀는 차갑고 혹독해졌으며 특히 강호에서 여색(女色)으로 소문 이 좋지 않은 남자를 만나면 반드시 잔혹한 수단으로 제거하곤 했 다. 또한 정사를 가리지 않고 마음내키는 대로 살인을 했기 때문에 강 호인들은 마침내 그녀를 마녀(魔女)라고 부르게 되었다. 옥소마녀 채상홍. 그녀의 무공은 이백 년 전 한 자루의 옥소로 이름을 날리던 괴객 마소객(魔簫客) 궁천(弓天)의 마라옥소비경(魔羅玉簫秘經)을 얻어 익힌 것으로 이미 강호의 절정고수의 반열에 들어 있었다. 그러나 옥소마녀 채상홍의 무학이 아무리 고절하다해도 한 쌍의 손으로 오상공자의 합공을 상대하기에는 벅찼다. 어느덧 숨막히는 접전이 이십 초 수에 이르자 그녀는 점차 신법이 흐트러지며 밀리게 되었다. 위--- 웅! 파파파팍! 채상홍의 옥같은 이마에는 식은 땀이 맺혔으며 머리칼이 어지럽게 흩어지고 있었다. 찌익! 흑풍공자의 흑검이 가공할 수법으로 뻗자 그녀의 앞가슴 옷자락이 베어 나갔으며 그 사이로 백옥같은 젖가슴의 한 부분이 살짝 노출 되었다. 흑풍공자 적무성은 음산하게 외쳤다. "채상홍! 이제 십 초 내에 너의 목을 베겠다!" 파파파... 팟! 그의 흑검이 무서운 검기를 쏟아내며 채상홍을 몰아쳤다. 피핑! 핑! 매화공자 하익룡의 독문절기인 매화십지(梅花十指)도 숨 쉴틈없이 그녀의 요혈을 파고 들었다. 그밖에 나머지 오상공자의 공세들도 비바람 몰아치듯 일제히 채상 홍의 전신으로 쇄도했다. 오 초(五招), 육(六) 초, 칠(七) 초. "받아라!" 오상공자는 마침내 동시에 무서운 합격을 퍼부었고, 그 공격은 사 방 팔방의 모든 방위(方位)를 차단시켜 버렸다. 채상홍의 냉담하던 얼굴에 마침내 한 가닥 절망이 어렸다. "흐흐흐... 채상홍! 죽을 때가 도래했다!" 흑풍공자의 음산한 웃음과 함께 그의 흑검이 섬전처럼 채상홍의 목을 베어갔다. '트, 틀렸다.' 채상홍이 체념으로 눈을 질끈 감아버리는 순간, 어디선가 담담하 고도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손속이 너무 지나친 듯 하오이다." 아울러 소리도 없는 무형(無形)의 강기가 전권에 밀려 들었다. 그것은 일시에 오상공자의 공세를 완전히 차단했으며 마치 무형의 철벽으로 채상홍을 보호하고 있는 것같았다. 펑! 펑--- 펑! 연이어 폭음과 함께 오상공자는 일제히 뒤로 튕겨나가고 말았다. "으윽!" 그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사오 보씩 밀려난 채 만면에 대경의 빛을 띄웠다. '대체 어떤 놈이.?' 그들은 가슴이 섬뜩하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서야 하후성은 서서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돌아섰다. 오상공자는 모두 안색이 굳어진 채 하후성을 노려 보았다. 특히 흑풍공자는 눈썹을 경련하며 마침내 입을 열었다. "방금 전에 손을 쓴 것은 친구의 짓이오?" "그렇소이다." 邱캬봉 담담한 대답에 흑풍공자는 내심 신음을 베어 물었다. '으음, 어쩐지 이 자가 풍기는 기운이 신비하다 했더니. 대체 누 구이길래 이토록 엄청난 무공을 소유하고 있단 말인가?' "친구의 명호는?" 하후성은 담담히 말했다. "소생은 하후성이란 무명소졸이오." 순간 오상공자는 물론 옥소마녀 채상홍조차 경악하고 말았다. "그, 그대가 환영신룡 하후성이란 말이오?" 하후성은 쓴 웃음을 지었다. '또 환영신룡이군.'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반면 오상공자의 표정은 돌변했다. 그들은 이제까지의 태도를 거짓말처럼 싹 바꾸며 일제히 포권하는 것이 아닌가? "대단히 실례했습니다. 환영신룡이신지도 모르고 무례를 저지르다 니." 뜻밖의 말이 적무성의 입에서 나오자 하후성은 어리둥절해지고 말 았다. 그러나 적무성은 만면에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희들은 이미 위전풍 대가로부터 하후형에 대한 말을 모두 들었 습니다." "아, 위형." 하후성의 의문은 비로소 풀렸고 분위기는 금방 부드러워졌다. 적 무성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소제는 이미 하후형의 쟁쟁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벌써부터 만나 보고 싶었으나 기회가 없었는데 오늘 이렇게 뵙게 되니 진정 큰 영광입니다." "별 말씀을." "저희 오형제는 흑룡단(黑龍檀)의 동도로 이 년 전 위형님과 형제 지의를 맺었습니다." 적무성은 차례로 소개했다. "소제가 첫째인 흑풍공자 적무성, 둘째는." 적무성의 소개에 하후성은 일일이 답례했다. 이윽고 인사가 끝나자 하후성은 문득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실례지만 다섯 분께 소생의 청이 하나 있소이다." 오상공자가 모두 궁금한 표정을 짓자 하후성은 한 쪽에서 여전히 냉랭한 표정으로 서 있는 옥소마녀 채상홍을 일견한 후 말했다. "채여협과 무슨 원한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풀 수 있는 것이라면 소생의 얼굴을 봐서라도 원만히 해결했으면 좋겠소이다." 오상공자는 그 말에 난색을 지으며 서로의 얼굴들을 마주 보았고 다섯째인 매화공자 하익룡이 곤란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 었다. "하후형의 뜻은 알겠습니다만, 옥소마녀는 저희 오형제와 친분이 있는 미살혼 광무를 죽였습니다." 그러자 이제껏 가만히 있던 채상홍이 차갑게 냉소하며 말했다. "광무, 그 자는 죽어 마땅한 자였다!" "뭣이?" 하익룡은 분노하여 대뜸 공격을 취하려 했으나 하후성은 그를 만 류하며 물었다. "하형, 그렇다면 그 미살혼 광무라는 사람의 품행은 어떠하오?" 하익룡은 우물쭈물 말을 하지 못했다. "그건." 하후성은 정중히 읍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소생의 체면을 좀 세워주셨으면 좋겠소이다." 하익룡이 어쩔 줄 모르고 망설이자 흑풍공자 적무성이 끼어들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할 수 없지요. 다른 사람도 아닌 하후형의 부탁인데 어찌 거절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후성은 빙그레 웃으며 사의를 표했다. "감사하오이다, 여러분." 적무성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핫! 자, 이제 모두 끝난 일입니다. 우리 술이나 한 잔 합 시다." 이어 그는 혼쾌한 표정을 지으며 옥소마녀 채상홍에게 말했다. "자, 채낭자. 이제 우리의 일은 이것으로 끝난 것으로 합시다. 우 리는 광무의 일을 없던 것으로 하겠소이다." 채상홍은 힐끗 하후성을 바라보더니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적무성은 고개를 돌리며 음성을 높였다. "주인장!" 그 말이 끝나자 객점의 문이 열리며 조금전 창 밖으로 날아갔던 객점주인이 벌벌 떨며 기어 들어왔다. 적무성은 호탕하게 말했다. "이 객점에서 제일 잘하는 요리와 제일 좋은 술을 가져 오시오!" "네, 네." 객점주인은 연신 굽실거리며 주방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객점주인은 양 손에 두 개의 넓은 소반을 받쳐들고 나왔 는데 소반에는 김이 무럭무럭 나는 먹음직스런 오리구이와 여러 가지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일행은 한 탁자에 앉아 곧 웃고 떠들며 유쾌하게 식사와 술을 들 었다. 시간이 흐르자 하후성은 오상공자가 매우 호쾌하고 솔직한 성품을 지녔으며 자신과 의기도 상통하는 것을 느꼈다. 반면 오상공자도 역시 이야기하면 할수록 하후성에 대해 경탄에 경탄을 금치 못하 고 있었다. 바로 한 탁자 건너 편에는 채상홍이 앉아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점차 이채를 띄기 시작하더니 한 쌍의 매서우면서 도 아름다운 눈으로 줄곧 하후성을 응시했다. 흑풍공자 적무성은 술 한 잔을 쭉 들이키고는 호탕한 음성으로 말 했다. "하후형, 외람될지 모르나 부탁이 있습니다." 하후성은 담담하게 미소지었다. "하후형의 소문을 들은 이후 젊은이로써 한 번 비무(比武)해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그러나 조금 전 하후형의 무공을 보니 소제가 감히 따를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대신 멋진 한 수로 우리 형제들의 안목을 넓혀주시기 바랍니다." 하후성은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소생의 보잘 것 없는 무학을." 독수공자 전비(田飛)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하후형, 소제들의 안목을 넓혀 주십시오. 부탁합니다." 하후성은 마침내 더 거절할 수 없음을 느꼈다. "그럼, 보잘 것 없지만." 그는 승낙한 후 마침 시중을 들고 있는 객점주인에게 부탁했다. "주인장, 여기 뜨거운 차(茶) 일곱 잔 만 갖다 주시겠소?" "네, 네." 객점주인은 공손히 대답하고 즉시 주방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객점주인은 커다란 소반에 김이 무럭무럭 나는 찻잔 일곱 개를 받 쳐들고 왔다. "주인장, 거기 좀 서 있으시오." "네?" 그는 멍청히 일 장(一丈) 밖에 섰고 오상공자와 채상홍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하후성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후성은 앉은 자리에서 합장하더니 양수를 가볍게 뻗었다. "앗!" 객점주인이 얼빠진 소리를 발했다. 그가 손에 받쳐들고 있던 소반이 통채로 무형의 힘에 이끌린 듯이 허공으로 떠올랐던 것이었다 . 하후성이 가볍게 손을 젓자 일곱 개의 찻잔이 놓인 소반은 통채로 부서진 창을 통해 밖으로 날아갔다. 스스스. 소반은 눈보라를 뚫고 일직선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그 광경에 오상공자와 채상홍의 얼굴에는 실망의 빛이 떠 올랐다. 하후성이 펼친 것은 허공섭물(虛空攝物)에 진기도인공(眞 氣導引功)을 함께 시전한 것으로 그 정도면 그들도 능히 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후성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입가에 신비한 미소를 지으 며 그저 담담하게 술잔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반면 오상공자와 채상홍의 안색이 점차 의혹으로 변해갔다. 기이하게도 소반이 밖으로 날아간 후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땅에 떨어져 깨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 시간이면 최소한 백 장(百丈)은 갔을 텐데 아직도 떨어 지지 않다니.' 시간이 또 흘렀다. 마침내 모두의 얼굴에는 놀람과 의아한 표정이 떠올랐고 하후성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주인장, 양 손을 앞으로 내미시오." "네?" 객점주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두 손을 내밀었다. 쐐--- 액! 느닷없이 창 밖에서 날카로운 파공성이 울리며 흰 빛이 무서운 속 도로 흑풍공자 적무성의 머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억! 누구냐?" 적무성은 대경하여 급히 고개를 숙임과 동시에 쌍장을 뻗으려 했 다. 그러나 흰 빛은 단지 그의 머리를 스쳤을 뿐 객점주인이 내민 팔 위로 가볍게 내려 앉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얼마 전 창 밖으로 날아갔던 소반이었다. "아!" 중인들은 모두 경탄성을 발했다. "이럴 수가?" 객점주인도 마치 귀신에라도 홀린 듯이 멍하니 자신의 손 위에 내 려있는 소반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밖에는 폭설이 내리고 있었 으나 기이하게도 소반에는 한 점의 눈도 묻어 있지 않았다. 오공자와 채상홍은 놀라는 중에도 똑같이 의문을 느꼈다. '소반은 돌아왔는데 그렇다면 찻잔은?' 하후성이 그 의문을 풀어주려는 듯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여러분께 차 한 잔씩 대접하겠소이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방의 열려진 창문으로부터 번개같은 일곱 가닥의 빛이 날아들었다. 쉭! 쐐- 액! 중인들의 안색이 대변하는 사이, 그들의 탁자에는 소리없이 찻잔 하나씩이 내려 앉았다. "오오!" 그들은 일제히 경악성을 터뜨렸다. 그들이 놀란 것은 찻잔이 자신들의 앞에 놓여진 때문 만은 아니었 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찻잔은 붉게 달구어져 있었고, 그 안에서 찻물이 뜨거운 김을 내며 부글부글 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푸시식! 찻잔이 닿은 탁자가 연기를 냈다. 뜨겁 게 달아오른 찻잔으로 인한 현상이었다. 하후성은 빙그레 읏으며 말했다. "차가 너무 뜨거운 것같군요." 그가 슬쩍 소매를 저으니 차가 끓는 것이 멈추었다. 순간적으로 중인들은 주위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적당히 김이 피어오를 정도의 알맞은 온도로 식은 차를 들여다 보 며 중인들은 이 신기(神技)에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하후성이 보여준 절기야말로 도저히 인간으로는 해낼 수 없는 것 으로써 그들은 세상에 이런 류의 무공이 있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실상 조금 전 하후성이 펼친 것은 천기선사로부터 배운 다섯 가지 암기술(暗器術) 중 하나인 허공회류비선표(虛空廻流飛旋漂)였고, 거기에 본신의 삼매진화(三味眞火)로 찻잔을 뜨겁게 한 것이었다. 마침내 흑풍공자 적무성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휴우, 하후형. 진정 몸과 마음이 다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내 평 생 이런 무공은 그 비슷한 것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진정 하후 형은 신과 같은 분입니다." 오상공자 중 셋째인 백변공자 영호랑도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소제가 오늘 본 것을 남들에게 말하면 아마 모두들 소제더러 미 쳤다고 말할 것입니다." 네째인 오독동자 사마균도 고개를 흔들었다. "육십 년 전 천산파의 장문인인 천산비검옹(天山飛劍翁)이 황산의 비무대에서 한꺼번에 백 자루의 검을 날리는 신기를 보였다지만 그도 아마 하후형의 솜씨를 보면 다시는 비검(飛劍)을 쓰지 않으 려 할 것입니다." 하후성은 연속 쏟아지는 찬사에 얼굴이 뜨거웠다. "과찬이시오, 과찬." 적무성이 힘주어 말했다. "과찬이 아닙니다. 소제는 진정 하후형과 같은 고인을 만나 기쁘 기 짝이 없습니다." 그는 정말로 몹시 기분이 좋은 듯 호쾌하게 찻잔을 들어올렸다. "자! 하후형, 우리 이 차를 듭시다. 오늘 일은 소제에게 평생 잊 지 못할 추억이 될 것입니다." 그는 채상홍에게도 찻잔을 들어 보였다. "자, 채낭자도 드시오, 아까 일은 소생이 사과드리겠소." 그 말에 차갑기만 하던 옥소마녀 채상홍의 얼굴에 홍조가 피었다. "무슨 말을... 오히려 제가." 그녀의 태도는 짧은 시간 동안에 크게 변화하고 있었다. 그녀의 차갑기 만한 눈에는 점차 야릇한 기운이 부드럽게 일어나 고 있었으며 또한 그녀는 자신조차 알 수 없는 감정의 변화를 느 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감정인지는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따금 멍한 표정을 지었으며 계속 하후성의 준미한 모습을 바라 보고 있었다. 눈보라 속에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아침(朝). 하후성과 오상공자는 객방(客房)에서 나와 가벼운 식사를 들며 작 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그들은 거센 눈보라 때문에 밤길을 가지 않고 객점에 하룻밤 묵은 것이었다. 하후성은 아쉬워하는 오상공자와 작별한 후 객점을 나섰다. 그런 데 옥소마녀 채상홍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대홍산(大洪山). 눈부신 설화가 수목의 가지마다 피어 있고 대홍산에 쌓인 눈은 몇 자에 달했다. 그러나 이미 오상공자들로부터 천화곡(天火谷)의 위치를 알아낸 하후성은 한시바삐 광검절심을 만나기 위해 대홍산중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가 하나의 산등성이를 넘을 즈음 누군가 한 그루의 커다 란 설목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인물은 바로 뜻밖에도 옥소마녀 채상홍이었다. 그녀는 설목에 기댄 채 눈부시게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채여협이?' 하후성이 다가가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여전히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채여협, 어떻게 이곳에 계시오?" 하후성이 먼저 물었음에도 불구하고 채상홍은 허공에 시선을 매단 채 침묵 만을 지킬 뿐이었다. 그러자 하후성은 멋적은 듯이 말했다. "아침에 말없이 먼저 떠나셔서 섭섭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 갑소이다." 그 말에 채상홍은 눈빛을 반짝 빛내는가 싶더니 이내 얼굴을 붉히 며 고개를 떨구었다. 하후성은 부드럽게 물었다. "채여협께서는 지금 어디로 가시는 길이오?" "저는 호남성(湖南省)으로 가요. 소협은?" "소생은 대홍산에서 누구를 만나야 합니다." 두 사람은 어느새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 된 셈인지 채상홍은 희디흰 목선을 드러내며 내내 고 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러한 그녀의 모습은 한없이 약하고 가련한 여인을 연상시키는 것으로 강호에 널리 알려진 옥소마녀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 다.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변화시켰는지. 이윽고 하후성은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채여협, 소생이 한 마디 만 하겠소이다." 채상홍은 흠칫했다. "채여협, 세상은 보는 각도에 따라 틀리다고 생각합니다. 한 쪽 면 만을 보면 그 면이 곧지 않고 구부러져 있지만 다른 면은 뜻밖 에 곧을 지도 모른다는 말이오." 채상홍의 어깨에 걸쳐진 녹색 피풍이 바람도 없는데 가늘게 흔들 렸고, 하후성은 여전히 담담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세상에는 나쁜 사람도 있지만 좋은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또세 상을 살다보면 수많은 난관이 가로막는 법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난관을 헤쳐나가야 만이 진정 현명한 자요, 강한 자라 할 수가 있 을 것입니다." 채상홍은 가느다란 음성으로 말했다. "저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하후성은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채상홍, 이른바 옥소마녀(玉簫魔女).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마녀(魔女)라고 불렀고 그녀 자신도 언제부 터인가 그 말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하후성이란 청년에게서 만큼은 자신이 마녀 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데 커다란 수치를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느낌은 그녀를 깨우치게 했다. 불과 하루, 결코 길지 않은 만남을 통해 하후성이란 청년은 그녀의 인생관을 크게 변화 시켜 버린 것이었다. 갈림길이 나타났다. 인생은 수없이 많은 선택을 하게 된다. 이 갈림길처럼 인생의 길 도 언젠가가 두 갈래, 혹은 세 갈래로 갈라지는 길목에 서게 될 것이다. 나란히 걷던 하후성과 채상홍의 앞에 두 갈래 길이 나타났다. 하 후성은 걸음을 멈추고 채상홍을 바라보았다. "소생은 이쪽으로 가야 합니다." "......." 채상홍은 멍한 표정으로 두 갈래 길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녀는 어느 쪽 길을 택해야 할 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실상 딱히 예정된 목적지라는 것이 애당초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는." 그녀는 말을 흐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그러고 보니 방향없이 살아온 것이 그녀의 인생이었다. 세상 모든 남자로부터 실망한 후 그녀는 표독스럽고 냉혹하게 변했다. 여색 을 탐하는 무리들을 무차별로 죽이면서도 조금의 만족도 얻지 못 했다. 그러나 그런 행동들은 그녀의 마음을 더욱 허전하게 했으며 세상 을 믿지 않게 만들었다. 그러니 자연 갈 곳이 없었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아무렇게나 살아왔던 것이다. 하후성은 그녀가 멍한 표정을 짓자 정중히 포권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겠습니다." 채상홍의 아름다우면서도 창백한 얼굴이 흔들렸다. 하후성은 빙그 레 웃으며 말했다. "다음에 뵐 때는 채여협의 아름다운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에 채상홍은 전신을 가늘게 떨었다. '미소? 미소라고?' 하후성은 씨익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채여협같이 아름다운 분에게는 싸늘함보다 웃는 모습이 훨씬 어 울릴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후성은 말을 마친 후 서서히 몸을 돌렸다. 그는 자신의 앞에 펼쳐진 길을 걸어갔으며 채상홍은 멍하니 서서 그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그녀의 맑은 눈에서 수정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두 방울의 눈물은 그녀의 창백한 두 뺨을 적시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천하의 옥소마녀가 눈물을 흘리다니. 하후성이 사라진 지 한참이 지나도 채상홍은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러나 차디차게 얼어붙어 있던 그녀의 가슴은 어떤 알 수 없는 힘(力)에 의해 녹기 시작했다. 뜨겁고 훈훈한 힘(力), 그것은 대체 무엇이며 또 누구를 향한 것 일까? 옥소마녀 채상홍의 차가운 눈에는 어느덧 환상처럼 아름답고 정열 적인 이채가 발하기 시작했다. '하후성.' 그녀는 내심 중얼거렸다. 만난 지 불과 하루. 그러나 그녀의 마음 에 하후성이란 이름은 깊이깊이 새겨지고 말았다. ■ 대소림사 제13장 광검절심(狂劍絶心) -1 ━━━━━━━━━━━━━━━━━━━━━━━━━━━━━━━━━━━ 웅자수려한 대홍산(大洪山). 사방 수백 리에 걸쳐 험준한 지맥(地脈)을 이끌고 솟아 있는 대홍 산은 곳곳에 심곡(深谷)과 단애(斷涯)가 솟아 있다. 날씨는 무서울 정도로 싸늘했다. 정월(正月)의 기후는 사람의 살갗을 도려내듯 한랭하여 아무도 밖 으로 나가려 들지 않는다. 특히 대홍산 전체는 수 일 동안 퍼부은 눈보라로 온통 설천지를 이루고 있어 더더욱 사람이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대홍산의 서남 쪽에 하나의 거칠고 깊은 곡(谷)이 있었다. 곡구 (谷口)에는 눈이 몇 자나 쌓여 있었고 곡 안의 상황은 기암괴석이 가로막혀 추측하기가 어려웠다. 한 청년이 가득 쌓인 눈 위에 발자국도 남기지 않고 곡의 입구에 나타났다. 백의를 입은 미청년은 바로 하후성이었다. 눈처럼 흰 백의에 칠흙같이 검고 윤이 나는 머리를 길게 뒤로 드 리운 그의 모습은 여전히 선풍옥골이었다. 하늘은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르러서 오히려 섬뜩한 느낌마저 주고 있었다. 문득 하후성의 걸음이 멈춰졌다. 주위를 훑어보던 그의 현기어린 눈이 약간 가늘어졌다. '오상공자에게서 천화곡의 위치를 대강 듣기는 했지만 눈이 너무 쌓여 방향을 가늠하기가 어렵구나.' 걸음을 다시 옮기려던 하후성의 두 눈이 일순 반짝였다. '저 사람은?' 계곡의 모퉁이를 돌아 한 인영이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 다. 그는 희끗희끗한 머리칼이 섞여 있는 초로의 노인이었다. 하후성의 눈빛이 기이하게 변했다. 노인은 왼쪽 어깨에 커다란 약초주머니를 메고 오른손에는 조그마 한 호미를 들고 있었다. 그는 일신에 낡은 마의(麻衣)를 걸쳤으나 청수한 외모에 전체적으로 단정한 기품을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하후성이 놀란 것은 그 모습 때문이 아니라 그 노인의 얼 굴에서 풍기는 인상 때문이었다. 인생의 모든 것을 초탈한 듯한 무심한 얼굴. 게다가 노인의 걸음 걸이는 규칙적이었다. 노인의 걸음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또한 노인이 걸어온 자리에는 발자국이 남아 있지 않았다. '답설무흔(踏雪無痕).' 하후성의 눈빛이 한 차례 흔들렸다. 이미 노인과 하후성과의 거리는 이삼 장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하후성의 모습을 발견했을 텐데도 노인의 두 눈은 여전히 무심했 다. 마치 자기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이 그는 하후성의 곁을 지나 치고 있었다. "노인 어른." 하후성이 정중하게 불렀다. 그러나 노인은 여전히 몸을 돌리지 않은 그대로였으며 하후성 또 한 그런 것에 조금도 상관을 하지 않고 공손히 포권을 했다. "실례지만 말씀 좀 묻겠습니다." "물어보시오." 노인의 어조에는 억양이 없었다. 하후성은 괴이한 생각이 들었으나 내색치 않고 정중히 물었다. "혹시 이 근처에 천화곡(天火谷)이란 곳이 있음을 아십니까?" "천화곡!" 노인의 신형이 순식간에 한 바퀴 핑그르르 돌았고 그의 두 눈에서 는 어느새 칼날같이 섬뜩한 한광(寒光)이 내뻗치고 있었다. 하후 성은 자신을 노려보는 노인의 안광에 내심 흠칫했다. '무서운 눈빛이다. 필히 보통 내력의 노인이 아닐 것이다.' 노인은 하후성의 아래 위를 훑어보고 있었다. 그러나 하후성의 탈속한 풍모 때문일까? 순간적으로 노인의 눈 깊 은 곳에 기이한 빛이 흐르더니 태도가 약간 부드럽게 풀리는 듯했 다. "천화곡은 왜 찾으시오?" "그곳에 사시는 한 분을 뵙기 위해서 입니다." 노인의 눈이 번쩍였다. "그가 누구요?" 하후성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광검절심 유무심이란 분입니다." 노인의 얼굴이 갑자기 돌처럼 굳어졌다. "그를 찾는 이유가 무엇이오?" 노인의 어조는 찬 바람이 돌 정도로 싸늘했다. "그 분을 알고 계십니까?" "안다면 안다고 할 수 있고 모른다면 모른다고 할 수 있소." 기이하게도 노인의 어조는 갈수록 냉랭해지고 있었으며 하후성도 직감적으로 그것을 느꼈다. 노인은 하후성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대가 그를 찾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군." "그 분께 한 가지 부탁할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무엇인가?" 하후성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노인장께선 제 말에는 대답도 해주시지 않고 계속 묻기만 하시는 군요." 노인의 입가에 냉소가 어렸고 하후성은 정중하게 말했다. "소생은 광검절심 노선배님이 천하제일검(天下第一劍)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분과 비검(比劍)을 해보고자 합니다." 노인의 얼굴에 어이없다는 듯한 조소가 어렸다. "그와 비검을?" "그렇습니다." 노인은 갑자기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핫핫!" 하후성은 잠자코 있었다. 한동안 앙천광소를 터뜨리던 노인은 갑 자기 웃음을 뚝 그치더니 그에게 물었다. "자네는 하늘을 벨 수 있나?" 하후성은 어리둥절하여 반문했다. "어찌 인간의 능력으로 하늘을 벨 수 있겠습니까?" 노인은 더 얘기할 것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그냥 돌아가게, 자네가 그와 비검하겠다는 것은 곧 하 늘을 베려는 것과 다름이 없는 말이네." 노인은 타이르듯이 말을 이었다. "원래 그는 무림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인물로써 자네가 어떻게 그의 소식을 알아냈는지 궁금하지만 더이상 묻지 않겠네. 만약 다 른 사람같았으면 노부가 벌써 손을 썼을 것이네만 자네의 인상이 좋아 추궁하지 않는 것이니 이만 돌아가게." 하후성은 잠자코 듣고 있다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노인장, 소생이 한 마디 하겠습니다." 그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비록 저는 하늘을 벨 수는 없지만 베고자 하는 욕망은 있습니 다." 노인의 안색이 변했다. "광망스럽군!" 하후성은 빙긋 웃었다. "그럼으로써 발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노인의 눈에서 이채가 번쩍였다. "으음. 어쩌면 노부가 자네를 잘못 보았는지도 모르겠군." 노인은 무엇을 생각하는 듯 기이한 눈초리로 하후성을 주시하더니 돌연 오른손의 호미로 하후성의 가슴에 있는 옥당(玉堂), 현기(玄 氣), 거궐혈(巨闕穴)을 동시에 찍어갔다. 그 속도는 가히 벼락치듯 빨랐으며 호미 끝에서는 일 점의 경풍도 일지 않았다. 그러나 가공할 살기(殺氣)가 무섭게 뻗고 있었다. 하후성은 흠칫했으나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가볍게 왼손으로 호미 의 공세를 차단시켰다. 노인의 안색이 변화를 일으켰다. 다시 그의 몸이 핑그르 회전하는 듯 하더니 호미 끝이 다섯 갈래 로 갈라지는 환영을 일으키며 하후성의 전신 오대혈(五大穴)을 노 렸다. 쉬쉭! 슉--- ! 아까와는 달리 이번에는 귀청을 찌르는 날카로운 음향이 일었으나 하후성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는 오른손을 쭉 뻗더니 가볍게 손바닥을 저음으로써 공세를 모 두 차단시켰으며, 그가 발출한 공력은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아 적절하게 호미를 빗나가게 했다. "대단하다!" 노인은 호미를 내던지더니 오른손을 한 바퀴 뒤집으며 쫙 폈다. 그러자 그의 손바닥 장심에서 흰 빛이 쏟아져 나왔다. 위---잉! 웅후한 파공성과 함께 희디흰 기류가 발출되었는데 그것은 실로 무서운 위력이었다. 하후성은 흠칫하며 내심 중얼거렸다. '근 백 년(百年)이 넘는 내공이다. 이곳 대홍산에 이런 고수가 있 었다니.' 그는 일면 생각하며 두 주먹을 가볍게 움켜쥐고 연달아 이 권(二 拳)의 주먹을 날렸다. 그것은 소림의 칠십이종절예의 하나인 금강복호신권(金剛伏虎神 拳)인 바, 그의 권세에 따라 눈부신 금광(金光)이 일었다. 꽈르르르... 릉.... 우뢰소리와 함께 노인의 장력과 그의 장력은 격돌했다. 꽈꽝--! "윽!" 노인은 신음을 뱉으며 연달아 뒤로 세 걸음 밀려났으나 하후성은 단지 한 걸음 물러섰을 뿐이었다. "이, 이럴 수가!" 노인의 안색은 홱 변했다. "그... 그대는 소림의 제자인가? 금강복호신권을 쓰다니!" 하후성은 신비하게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노인의 얼굴에는 의혹이 어리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 다. "자네의 내력이 신비하나 그것은 더 묻지 않겠네. 그러나 방금 펼 친 것은 금강복호신권이 틀림없는데 어찌하여 이제껏 볼 수 없는 금광(金光)이 장력에 포함되어 있는가?" 하후성은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금강복호신권의 본래 위력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흐음?" "소림의 칠십이종절 예는 태반이 강호에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대부분 흉내에 지나지 않을 뿐 진학(眞學)은 아닙니다." 노인의 눈이 놀람의 빛을 띄어갔다. "금강복호신권에 포함된 금광(金光)은 양강(陽剛)의 화강결(火剛 訣)로써 강호의 와전된 허학(虛學)과는 그 위력이 판이한 것입니 다." "오오!" 노인의 얼굴에는 감탄이 어렸다. 소림(少林). 중원무학의 총본산. 천년무림(千年武林)의 근원지(根原地).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그토록 소림이 자랑하는 칠십이종절예는 하찮은 무림의 삼류고수도 마음대로 시전한다. 소림무예는 단지 기초공부로 전락한 것이었다. 그러나 방금 본 금강복호신권의 위력은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 마 의노인은 새롭게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얼굴은 기이하고 신비롭기 짝이 없는 청년에 대 해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윽고 노인이 소매를 슬쩍 젓자 허공섭물(虛空攝物)의 절기로 바 닥에 떨어져 있던 호미가 그의 손으로 말려들었다. 노인은 하후성을 바라보며 탄식했다. "으음. 팔십 년 전 이 대홍산에 들어와서 그 미친 늙은이에게 단 한 번 패했었는데 이제는 월극패미공(月戟貝彌功)을 모두 연성했 음에도 또 내력도 모르는 그대에게 패하다니." 노인의 얼굴에 허무의 기색이 역력히 어리는 것을 보며 하후성은 공손한 표정으로 부드럽게 말했다. "노인장께서는 패하신 것이 아닙니다. 노인장은 소생을 너무 얕보 고 본신의 진력(眞力)을 십 분 발휘하지 않은 탓에 일 장(一掌)의 대결에서 한 수 밀렸을 뿐입니다. 노인장이 전력을 다한다면 소생 은 필시 격퇴당할 것입니다." 그의 말은 실로 온화하고 겸손하여 상대방을 지극히 존중하는 성 심이 깃들어 있었다. 잠시지간 마의노인은 감명을 받았다. '이 젊은이의 심성은 실로... 온유하구나.' 마의노인은 한결 부드러워진 안색으로 하후성을 응시하며 물었다. "소협, 그대가 광옹(狂翁)을 만나려는 이유를 솔직히 말해줄 수 없겠소?" 그의 말투는 정중하게 변해 있었고 하후성은 약간 머뭇거렸으나 결국 대답했다. "그 분께 검(劍)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섭니다." 노인은 너털웃음을 웃었다. "헛헛헛... 광옹의 광증(狂症)이 또 폭발하겠군!"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소협, 돌아가시오. 솔직히 노부의 무공은 광옹에 비해 약간 정도 뒤질 뿐 별 차이가 없소. 그런데 노부가 그대에게 간단히 패했으 니 광옹 또한 소협의 적수가 아니오. 그러니 어찌 자신보다 약한 자에게 검(劍)의 배움을 얻을 수 있겠소?" 하후성은 담담히 물었다. "그 분의 검법(劍法) 경지는 어떻습니까?" "검법? 그 늙은이의 광검오마식(狂劍五魔式)을 말하는 것이오?" '광검오마식?' 하후성은 의아했으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마의노인은 진중하게 말했다. "음, 그것만은 대단한 검법이오. 그 늙은이의 광검오마식에 포함 되어 있는 발원심결(發元心訣)과 섬류심결(閃流心訣)은 검도의 이 치로 따지자면 천하제일이라 할 수 있소." 하후성의 얼굴에 엄숙한 빛이 떠올랐으나 마의노인은 다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나 그 역시 그 두 가지 심결(心訣)을 발견만 했을 뿐 아직 깨우치지 못했소. 그러므로 역시 그대의 적수는 되지 못하오." 하후성은 그에게 정중히 포권했다. "그래도 소생은 그 분을 만나보고 싶습니다." 마의노인은 잠시 망설이다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이 늙은이가 욕을 먹는 한이 있어도 일러 드리겠소. 천화 곡(天火谷)은 바로." 마의노인은 사방의 지형을 자세히 설명하고 천화곡이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고맙습니다." 하후성은 사의를 표함과 아울러 정중히 물었다. "그런데 노선배님의 존함은 어떻게 되시는지요?" 마의노인은 겸연쩍은 듯 웃었다. "허허허... 보잘 것 없는 약초캐는 늙은이의 이름은 알아서 무엇 하겠소? 단지 그저 월옹(月翁)이라고만 기억해 두시구려." '월옹?' 그가 내심 중얼거리는 동안 월옹은 이미 몸을 돌려 걷고 있었고, 그는 걸어가며 기이한 웃음을 흘렸다. "허허허. 그곳에 가면 무엇보다도 소악마(小惡魔)를 조심하시오." "소악마?" "헛헛헛헛! 매우 골치 아플 것이오. 자, 그럼 훗날 또 볼 수 있기 를 바라겠소." 월옹은 마지막 말을 남기고 신형을 한 번 번뜩이더니 모퉁이를 돌 아 사라져갔다. 하후성은 홀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소악마라.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천화곡. 별유천지(別有天地)인가? 정월의 계절은 간 곳이 없었다. 따뜻한 훈풍이 곡 전체를 흐르고 있었다. 이곳 만은 겨울이 아니라 봄이었다. 무릉도원(武陵桃園)이란 바로 이곳을 두고 말하는 것이리라. 대홍산 중에는 화산(火山)의 지맥(地脈)이 있었다. 화맥(火脈)이 란 본시 가장 지표가 얇은 곳에서 터지게 되어 있고, 그렇게 되면 곧 분화구가 형성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대홍산에는 분화구는 없었다. 대신 화맥이 가장 가깝게 있 는 계곡이 있었으니 그곳이 바로 천화곡이었다. 이 천화곡은 마치 호리병과 같은 지세를 형성하여 입구는 좁고 안 으로 들어갈 수록 넓게 분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또한 곡 안은 화 맥의 영향으로 사시사철 훈훈했으며 곡내에는 온갖 이름도 모를 꽃과 수목이 우거져 있었다. 이 천화곡에 한 가닥 백영이 소리없이 날아 들었다. 그는 바로 하후성이었다. 월옹의 말을 듣고 마침내 천화곡을 찾아 낸 것이었다. 하후성은 별유천지인 천화곡 안에 내려서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 다. '음, 정말 신비한 곳이구나. 밖은 온통 빙설(氷雪)인데 이곳은 봄 날씨이니. 아니 여름날씨에 가까울 정도구나.' 하후성은 경이감을 느끼며 서서히 곡내로 걸어 들어갔다. 푸른 초목이 우거지고 꽃향기가 진동하는 초지(草地)를 지나자 온 통 붉고 노란 꽃이 만발해 있는 꽃밭에 이르렀다. 그는 무심 중에 중얼거렸다. "이 꽃은 자연지경이 아니라 인공으로 가꾼 것이군." 이렇게 중얼거린 그의 안색이 변했다. 갑자기 주위환경이 돌변했던 것이었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꽃밭은 간 데 없고, 삽시에 주위는 온통 처참무비한 지옥도(地獄圖)로 화 하는 것이 아닌가? '음! 이것은?' 코 끝을 간지럽히던 꽃향기는 사라져버리고 온통 피냄새와 시체 썩는 악취가 코를 찌르는가 하면, 꽃밭은 온통 시산(屍山)으로 변 해 있었다. 목이 달아난 시체, 팔다리가 끊어지고 허리가 동강난 시체, 하복 부가 터져 내장이 흩어진 시체, 시체들. 뿐만이 아니었다. 역한 노린내마져 났는데 그것은 바닥에서 나는, 부글부글 끓고 있는 용암으로부터 시체들이 타들어가는 냄새였다. 하후성은 그만 안색이 굳어지고 말았다. '진법(陣法)이구나.' 그는 한 눈에 알아 보았다. 천하기재인 소림의 천기선사로부터 진 법에 대해 전수받은 하후성이었다. 그는 살벌한 지옥도 속에 우뚝 선 채 마음을 침착하게 가라앉히고 주위를 면밀히 살펴보았다. 그러자 그의 눈에서 현광이 일어났다. '이제 보니 이것은 만화십방대진(萬花十方大陳)에 구궁미혼마진 (九宮迷魂魔陳)을 교묘히 배합한 것이로구나, 그렇다면.' 하후성은 즉시 수리와 역순을 계산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 아 그의 눈에는 십방(十方)에서 다섯 군데의 생로(生路)와 세 곳 의 사로(死路), 그리고 두 곳의 휴문(休門)이 보였다. '생(生)은 일단 들어서면 사(死)로 변(變)한다. 사(死)도 역시 허 (虛)일 뿐, 휴(休)를 경동시켜 생문(生門)을 찾노라.' 이윽고 하후성은 걸음을 옮겼다. 그가 보법을 펼치자 비참하기 그 지없는 지옥도는 흐릿하게 시야에서 멀어져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문득 어디선가 한 가닥 날카롭고 거친 음성이 울렸다. "어떤 작자가 감히 천화곡을 침입하느냐?" 그 음성을 듣는 순간 하후성의 뇌리에는 문득 재미있는 생각이 떠 올랐다. 그는 곧 얼빠진 듯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리는 것 이었다. "이... 이거... 어떻게 된 거지? 분명 꽃밭이었는데. 갑자기 이런 광경이 나타나다니? 내가 귀신(鬼神)에라도 홀렸단 말인가?" 그러자 즉시 비웃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하하하... 이 놈아! 너는 진법(陳法)에 걸린 것이다. 네 놈이 이 곳에 침입한 이상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쉭... 쉭! 그를 향해 날아오는 몇 가닥 지풍(指風) 소리가 들렸다. 하후성은 움찔했다. '이거, 너무 살기가 짙군.' 그러나 그는 지풍이 날아오는 것을 알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이환결(移環訣).' 내심 중얼거리는 순간 그의 전신 오대혈에 지풍은 그대로 격중되 었다. "으윽!" 하후성은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그러자 곧 주위 환경이 원래대로 회복되며 꽃밭 사이로 한 명의 소년이 나타났다. 그는 약 십오륙 세 가량 된 무척이나 활달하고 귀엽게 생긴 청의 소년으로 갸름한 얼굴에 동그란 큰 눈, 그리고 만면에는 온통 짖 궂고 장난스런 기운이 잔뜩 어려 있었다. 그는 체구가 좀 작은 편이었는데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발로 하후 성의 허리를 툭툭 걷어찼다. "흥! 네가 어떻게 해서 이곳에 왔는지는 모르지만 재수가 없었다. 더구나 할아버지가 보면 너는 절대 살아남지 못할 거야." 소년은 제멋대로 중얼거리며 하후성의 몸을 마치 짚단이라도 되는 듯 가볍게 번쩍 들더니 어깨에 둘러 메었다. 그리고 그는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지 휘파람을 불어대며 곡 안으로 걸어갔다. 매우 낙천적인 괴소년(怪少年), 그러나 문득 소년은 채 몇 걸음 가지 않아서 이상함을 느껴야 했다. 어깨에 멘 하후성이 점차 무거워졌기 때문이었다. '어?' 소년은 의혹을 느끼며 걸음을 멈추고는 메고 있던 하후성을 내려 놓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억!" 그는 비명을 질렀다. 갑자기 하후성이 천 근(千斤) 이상으로 무겁 게 변한 것이었다. 괴소년은 엉거주춤한 채 식은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내려놓을 수 도 없고 들어 던질 수도 없을 정도로 엄청난 무게가 그를 압살할 듯 했기 때문이었다. 소년의 얼굴은 시뻘겋게 상기되고 힘줄이 불거져 나왔다. "너... 너... 나를 속였구나!" 그는 분노하여 버럭 외쳤으나 또다시 비명을 터뜨렸다. "윽!" 갑자기 목덜미 뒤 옥침혈이 뜨끔함을 느끼고 그만 전신에 맥이 빠 지고 만 것이었다. 그러 엄청난 무게가 그를 짓눌렀다. "아이쿠!" 그는 그대로 고꾸라져 엎드려야 했다. 하후성의 몸에 깔린 꼴이 되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곧 그는 누군가의 손에 부축되어 일으 켜졌다. 보니 자신이 들쳐메고 있던 사나이가 아닌가? 임풍옥수같이 준수하기 그지없는 하후성의 얼굴을 비로소 정면으 로 보게 된 괴소년은 멍해진 채 자신도 모르게 내심 중얼거렸다. '얼굴 하나는 정말 잘 생겼구나!' 하후성은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소형제, 고맙네. 자네 덕분에 힘 하나 안 들이고 그 진 법을 벗어났으니 말일세." 괴소년은 울화가 치미는 듯 귀여운 얼굴이 시뻘겋게 상기되어 씩 씩거렸다. "이제 보니 네 놈이 나를 이용했구나!" 하후성은 유쾌하게 웃었다. "하하하! 결과는 그런 셈이지." "이 놈아! 빨리 혈도를 풀어라. 비겁하게 혈도를 제압하다니. 정 정당당하게 싸워 보자!" 하후성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가 않은 걸? 이미 내가 자네를 잡았는데 무엇하러 다시 수고를 한단 말이냐?" 소년은 울화를 참지 못해 그만 폭발하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하후성이 소년을 번쩍 들어올려 어깨에 메었다. 형세가 정반대로 뒤바뀐 것이었다. "이 놈아, 내려 놔라! 내려 놔!" 소년은 길길이 고함치고 악을 썼으나 하후성은 손바닥으로 소년의 엉덩이를 찰싹 치며 웃었다. "하하하... 소형제, 좀 조용히 하게. 자네의 조부를 만나면 풀어 주겠네." 소년은 얼굴이 시뻘게 가지고 욕설을 퍼부었다. "이 후레자식아! 어서 내려 놓지 못하겠느냐?" 하후성은 눈살을 찌푸렸다. "허어, 나이도 어린 친구가 말이 좀 거칠군." 그는 소년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자네의 조부를 만나기 전에 이 형님이 너의 버릇을 먼저 고쳐줘 야겠군." 소년은 눈을 부라리며 코웃음을 쳤다. "흥! 어림도 없는 헛소리하지 마라! 내 버릇을 고쳐... 앗!" 소년은 대경하여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다. 하후성이 느닷없이 그 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이, 이 놈아!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너의 옷을 홀랑 벗겨 하루 동안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놓겠다." "네, 네가 감히!" "하하하... 왜, 내가 못할 것같으냐?" 진풍경이 따로 없었다. 하후성은 껄껄 웃으며 소년의 상의부터 옷 을 벗겨 나갔다. "멈춰라! 이 악적!" 그러나 하후성의 손은 멈춰지지 않았다. 그는 소년의 앞가슴을 풀 어헤쳤고 속옷이 나타나자 그것마저 거침없이 열어 제꼈다. 그런데 그 순간 놀랍게도 불쑥 튀어 나온 것은 바로 여인의 젖가 슴이었다. "앗!" 하후성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연홍빛 젖꼭지가 달린 조그마하면서도 소담스런 동구란 젖퉁이가 그의 눈 아래 펼쳐져 있었다. 소년은 그만 온 얼굴에 수치심이 가 득한 채 눈을 꽉 감고 있었다. 그런 그의 눈에는 눈물이 비어져 나오고 있었다. 다음 순간 소년, 아니 소녀(少女)는 비명에 가까운 울음을 터뜨리 는가 싶더니 대성통곡하는 것이 아닌가. "어... 엉! 어엉!" 하후성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는 청의소년이 설마 여자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음성이나 태도, 용모까지도 완전히 개구장이 소 년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 이건." 하후성은 고개를 돌리며 당황성을 터뜨렸다. 이때 어디선가 음침 하고도 분노에 가득찬 늙은 음성이 그의 귓전을 때렸다. "애송이 놈이 감히 천화곡에 와서 섬화(閃花)를 희롱하다니!" 하후성이 흠칫 놀라 몸을 돌리자 그의 앞에는 어느새 나타났는지 백발이 성성한 괴노인이 우뚝 서 있었다. 그는 거의 백 세 정도 되어 보였는데 발에는 짚신, 입고 있는 옷 은 다 헤어진 마의(麻衣)였다. 하얗게 센 머리칼과 수염은 마치 고슴도치처럼 빳빳해 보였으며 얼굴은 깡말라 움푹 패여 보였다. 더우기 광기(狂氣)가 어린 듯이 보이는 두 눈에서는 섬뜩할 정도의 살광(殺光)이 뻗치고 있었다. 괴노인은 왼손에 한 자루의 검은 빛이 감도는 검집도 없는 목검 (木劍)을 움켜쥐고 있었다. 하후성은 그를 보자 문득 느껴지는 것 이 있었다. '혹시 이 노인이 광검절심 유무심이 아닐까?' 괴노인은 살기띈 음성으로 말했다. "노부는 천화곡에 들어온 놈은 누구를 막론하고 살려두지 않는다. 네 놈은 거기에다 섬화까지 희롱했으니 기필코 노부가 네 놈의 몸 뚱아리를 갈기갈기 찢어 죽이겠다." 하후성은 황급히 정중하게 포권하며 말했다. "노선배님, 이것은 오해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저는 결코 이 소녀 가." "닥쳐라! 노부는 변명을 제일 싫어한다. 변명을 하려거든 염라대 왕 앞에나 가서 해라." 괴노인은 다짜고짜 수중의 목검으로 괴이하게 찍어왔다. 쉬--- 익! 귀를 찢는 듯한 엄청난 파공성이 울렸다. '이크, 대단하구나.' 하후성은 본능적으로 뒤로 미끄러졌다. "응?" 괴노인은 공격이 허탕치자 몹시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으나 곧 으 스스한 괴소를 흘렸다. "흐흐흐! 제법 한 수 하는 놈이었구나. 좋다, 어디 네 놈이 어디 까지 피할 수 있나 보자!" 이때 바닥에 쓰러져 있던 소년, 아니 소녀가 발딱 일어났다. "할아버지, 이제야 겨우 할아버지가 가르쳐준 개혈법(開血法)으로 혈도를 뚫었어요. 그 놈을 절대 살려두지 마세요!" 소녀의 말은 여전히 거칠었고 괴노인은 백발을 흔들며 외쳤다. "오냐, 염려마라! 호랑이 굴로 들어온 양새끼를 그냥 보낼 수가 있느냐?" 하후성은 멍청히 선 채 어이가 없는 느낌이었다. '정말 그 조부에 그 손녀로구나. 둘 다 미친 것같다.' 그러나 그는 다시 한 번 정중히 포권하며 물었다. "노선배님께서는 혹시 광검절심(狂劍絶心) 유무심(有無心) 선배님 이 아니십니까?" 그러자 괴노인의 눈에서 더욱 극심한 광기가 쏟아져 나왔다. "천하에 버르장머리없는 놈! 감히 성검절심(聖劍絶心)을 보고 광 검절심이라니!" 쐐--- 액! 괴노인, 즉 광검절심 유무심은 다시 목검을 무시무시하게 뻗었다. 그러자 엄청난 위력의 검풍(劍風)이 회오리쳤다. 위--- 이--- 잉---! 파파팍! 검풍에 주위의 암석이며 초목이 날려 박살이 났다. 광검절심의 공격은 눈 깜짝할 사이에 십팔검(十八劍)이나 퍼부어 졌는데 실로 질풍노도와 같은 기세였다. 하후성은 숨막히는 공세를 계속 피하기만 하며 음성을 높여 말했 다. "유노선배님! 소생은 노선배께 볼 일이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유무심이고 무무심이고 난 모른다! 볼 일이 있으면 먼저 대갈통 이나 떼어놓고 얘기해라." 위--- 잉---! 쉬이이이익! 쉭! 목검의 환영은 찰나지간에 수십 개에서 수백 개로, 수백 개에서 다시 수천 개로 불어났다. 하후성은 고소를 짓는 한편 천불현현보(千佛玄玄步)를 펼쳐 동에 번뜩, 서에 번뜩하며 공세를 피했다. 천불현현보는 바로 소림 칠십이종절예 중 하나로 느릿한 듯 여유 있어 보이는 신법이나 한 번 전개하면 상대방은 아무리 연공(連 功)을 퍼부어도 옷자락 하나 건드리지 못하는 절묘한 신법이었다. "이 놈! 꽁무니를 빼는구나!" 광검절심 유무심은 분노가 치밀대로 치밀어 올랐는지 움푹 꺼진 두 눈에서 시퍼런 광망을 뿜어냈다. 이때 곁에서 청의소녀가 발을 구르며 외쳐댔다. "할아버지, 지금 뭐하는 거예요? 자칭 천하제일검이 그까짓 놈 하 나 처치하지 못해요? 늙어서 뼈다귀가 잘 움직이지 않는단 말인가 요?" 그 말에 유무심은 더욱 분노했다. "닥쳐라! 계집애야, 더이상 떠들면 네 혓바닥을 뽑아버리겠다!" 파파팟! 그는 목검을 떨쳐 검막을 일으키더니 갑자기 뒤로 일 장 가량 뛰 어 물러났다. 자연히 공격이 중지되었고 그는 무서운 눈으로 하후 성을 노려보며 말했다. "애송이 놈, 지금부터는 좀 달라질 거다!" 유무심은 말을 마침과 동시에 목검을 고쳐 잡았다. 그런데 기이하 게도 그는 목검의 손잡이를 거꾸로 움켜쥐고 있었다. 검신이 하늘을 향하지 않고 땅을 가리키는 그 자세에서 하후성은 웬지 괴이한 느낌을 받았다. "흐흐흐... 성검오마식(聖劍五魔式)이다, 애송이 놈! 극락전까지 조용히 안내해 주마." '성검오마식?' 하후성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광검(狂劍)을 성검(聖劍) 으로 제멋대로 고쳐 부르는 상대방의 억지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 미소가 금새 사라졌다. 문득 유무심의 전신에 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폭사된 것이었다. 마의(麻衣)가 펄럭이며 머리카락과 수염이 온통 곤두서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두 눈에서는 흉맹한 기운이 화광처럼 뻗쳐나오고 있 었다. "크... 아아... 아!" 드디어 유무심은 괴성을 내지르며 몸을 사 장(四丈) 가량이나 솟 구쳤다. 머리를 아래로, 다리를 하늘로 향한 채 내려 꽂히며 목검 을 무자비하게 날리자 가공할 살기가 하후성을 덮쳐왔다. 하후성은 마침내 가슴에서 한 가닥 뜨거운 기운이 솟아나오는 것 을 느끼며 안색을 굳혔다. '어디, 성검오마식인가 광검오마식인가 얼마나 무서운지 부딪쳐 보자.' "죽어랏!" 파파팟! 유무심은 미친 듯한 검광을 작렬시키며 머리, 어깨, 등, 가슴을 한꺼번에 노리며 떨어져 내렸다. 하후성은 침착한 표정으로 다리 를 정자(丁字)로 벌린 채 진기를 끌어 올렸다. 그러나 유무심이 펼친 검광의 범위 안에 들어간 순간 그는 일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파파파... 팟! 귀를 찢는 파공성과 함께 그의 신형이 삽시간에 무려 일흔 아홉 번이나 회전해야 했다. "음!" 그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황급히 뒤로 몸을 날리 는 하후성의 몸에서 수십 조각의 백의 옷자락이 분분이 날렸다. 다행히도 피부가 베어지지는 않았으나 옷자락이 조각조각 찢겨진 하후성의 놀람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럴 수가! 놀라운 검법이다. 이 검법은 미친 듯이 발광하는 것 같으면서도 일정한 식(式)을 포함하고 있구나. 특히 섬(閃)과 살 (殺)이 깃든 가공할 살초(殺招)다.' 하후성은 유무심을 보는 인식이 새로와지는 것을 느꼈다. '과연 천기사숙님의 혜안이 놀랍구나.' 한편 땅에 내려선 유무심도 놀란 듯 안색이 일그러졌다. "흐으, 뜻밖이구나! 네 놈이 성검오마식의 제 일 초(第一招)를 받 아내다니!" 하후성은 문득 빙그레 웃으며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노선배님, 우리 기왕 비무할 바에야 내기를 하는 것이 어떻겠습 니까?" 유무심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비검을 하여 진 사람은 한 가지 부탁을 들어주는 것입니다. 어떻 습니까?" 하후성의 말에 광검절심 유무심은 괴소를 흘리며 일축했다. "크흐흐! 내가 이기는 것은 당연지사인데 굳히 내기까지 할 필요 가 있겠느냐?" "그러나 소생이 이긴다면?" "흐흐! 네 놈이 이긴다면 네 놈 앞에 무릎을 꿇고 종이 되겠다." 하후성은 싱긋 웃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만약 소생이 이긴다면 한 가지 부탁 만 들어주시면 됩니다." 유무심은 킬킬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하후성이 슬쩍 손을 흔들자 그의 옆에 있던 교목(橋木)의 가지가 탁 부러지며 그의 손으로 딸려 들어왔다. 허공섭물과 격공전지의 수법이 어우러진 절기였다. "소생도 검으로 하겠소이다." 그는 나뭇가지를 오른손으로 가볍게 쥐고 왼손으로는 검결(劍訣) 을 노리는 기이한 자세를 취했다. 나뭇가지 끝은 하늘을, 왼손의 검결은 땅을 가리키고 있었다. 유무심의 표정이 확 변했다. "그건... 다, 달마삼검(達磨三劍)의 기수식 연불지천(蓮佛指天)!" 그의 안색은 거듭 변화를 일으켰다. "달마삼검... 달마삼검이." 그는 갑자기 만면에 분노를 일으키며 버럭 외쳤다. "이제 보니 네 놈은 소림 땡중 놈의 제자였구나. 뒈져라!" 그는 분성을 내지름과 동시에 다짜고짜로 목검으로 하후성을 짖뭉 갤듯 공격했다. 하후성은 움찔하며 나뭇가지로 연불지천의 초식을 전개했다. 파파파팟! 작열하는 불꽃과 함께 검화(劍花)가 무수히 난비했다. 실로 미쳐도 단단히 미친 광검오마식(狂劍五魔式)이었다. 그러나 광검(狂劍)과 불검(佛劍)의 대결은 막상막하의 접전을 이루었다. "크아아아!" 유무심은 괴성을 지르며 날뛰었다. 위---윙! 검광과 검풍이 무섭게 일어났으나 하후성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 다. 그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그 자리에 태산같이 우뚝 선 채 나뭇 가지를 날렸다. "불광만공(佛狂萬空)." 달마삼검의 제 이 초식이 전개되자 광명정대하고 웅후무비한 검세 가 온통 주위를 뒤덮었다. 그와 정반대로 유무심의 광검오마식은 패도적이며 악랄하고 변화무쌍했다. 위--- 잉- 펑! 싸움은 눈 깜짝할 사이에 수십 초가 진행되었다. 하후성은 계속하 여 달마삼검 만을 펼쳐 공세보다는 수세를 취했으므로 실로 두 사 람의 싸움은 용호상박이었다. 유무심의 두 눈에서 무섭도록 시퍼런 광망이 폭사되더니 문득 광 성을 터뜨렸다. "크으아아아! 광풍천하(狂風天下)---!" 엄청난 검풍이 주위 십 장(十丈)여를 뒤덮으니 그것은 불가사의한 회오리를 일으키고 있었다. 하후성은 안색이 대변했다. '달마삼검으로는 힘들다!' 하후성의 검세가 돌변했다. "제천구도(諸天求道)!" 그의 입에서 맑은 외침이 터진 순간이었다. 우우--- 웅! 웅후한 파공성과 함께 나뭇가지의 검막이 하후성의 모습을 가렸 다. 그것은 불영구검(佛影九劍)의 제 팔 초로 검막이 하후성을 감 싸자 곧 검막 속에서 은은하게 불존(佛尊)의 환영(幻影)이 나타났 다. 광검절심 유무심은 자신을 향해 커다란 불존이 태산같은 무게로 다가듬을 느꼈다. 파파파... 팍! 그의 목검이 무수한 검망을 폭사하며 불존을 찔렀으나 그것은 태 산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으... 으으윽!" 유무심은 수중의 목검이 산산조각나는 것을 느꼈으며 동시에 무서 운 강기에 의해 그의 몸은 삼 장(三丈) 가량이나 뒤로 튕겨 나갔 다. 쿵! 유무심은 곤두박질치듯 땅에 내려선 후 비틀거리며 두 눈을 찢어 져라 부릅떴다. "미... 믿을 수 없다. 내... 내가... 패(敗)하다니, 말도 안 된 다." 그는 정말로 미쳐버린 듯 부르짖고 있었다. "뭔가... 잘못됐다! 말도 안 된다, 광풍천하가... 광풍천하가... 무너지다니. 으으... 으... 으." 유무심은 정말로 커다란 타격을 받은 듯 했고 하후성이 담담하게 물었다. "노선배깨선 승복하지 않으신단 말입니까?" 유무심은 안색이 일그러진 채 물었다. "네 놈이 조금 전 전개한 검법의 이름은 무엇이냐?" 하후성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그것은 불영구검의 제 팔 초식인 제천구도(諸天求道)입니다." "불영구검." 다시 유무심의 안면 근육이 씰룩였다. 이때 청의소녀, 즉 섬화(閃 花)가 앞으로 나서며 참견했다. "할아버지가 패한 것이 아니예요, 이것은 분명 속임수야! 할아버 지, 다시 한 번 싸워봐요." 유무심은 꽥 소리쳤다. "입 닥쳐라! 이 계집애야!" 그는 하후성을 응시하며 이를 갈았다. "좋다, 노부가 졌다. 네 놈은 노부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후성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광검오마식의 전수(傳授)를 부탁합니다." "뭐... 뭐라고?" 유무심은 안색이 대변하여 다시 이를 부드득 갈더니 버럭 외쳤다. "이... 이제 보니 애송이 놈이 노부를 희롱하려 드는구나. 노부를 이기고도 노부의 검법을 배우겠단 말이냐?" 하후성은 공손히 말했다. "희롱이 아닙니다. 소생은 진정으로 드리는 말입니다." 그는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소생은 노선배님의 발원심결(發元心訣)과 섬류심결(閃流心訣)을 얻고자 합니다." 유무심의 안색이 굳어졌다. "네, 네가 그걸 어떻게?" 하후성은 마침내 품 속에서 한 개의 고전(古錢)을 꺼냈다. 그것은 그것은 바로 천기선사가 준 것이었다. "노선배님은 이것을 아십니까?" 유무심은 표정이 돌변해 멍해지더니 곧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으하하하." 그는 하늘을 우러러 보며 목이 터져라 연이어 광소를 터뜨렸다. 그의 얼굴이 마구 씰룩거렸다. 또한 그의 짖무른 두 눈에서는 하 염없는 눈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하후성은 이 느닷없는 사태에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이 자는 정말 광인이란 말인가?' 이때 유무심은 웃음을 뚝 그치더니 이를 갈며 부르짖었다. "소림(少林), 소림! 그 놈의 잘난 절(寺)은 노부를 끝까지 괴롭히 는구나." 그러한 유무심의 모습은 마치 실성한 사람같이 보였다. 심지어는 곁에 있던 청의소녀 섬화조차도 멍청한 표정을 짓고 그를 바라 보 았다. 이윽고 유무심은 가슴 옷을 북 찢어내더니 손에 한 권의 낡은 책 자를 잡아냈다. 그는 책을 하후성에게 휙 던지며 외쳤다. "자, 가져가라! 그것은 노부의 모든 것이다. 크흐흐흐... 이 광검 절심의 한 평생이다." 하후성은 엉겁결에 책자를 받았다. "자, 이제 너의 부탁을 들어줬으니 꺼져라! 어서." 유무심의 처절한 말에 하후성은 웬지 자신이 크게 잘못한 듯한 느 낌이 들었다. 그는 잠시 책자를 들고 생각하는 듯 하더니 곧 정중 히 읍했다. "감사합니다. 노선배님." "필요없다! 어서 꺼져라!" 유무심은 여전히 눈물을 쏟으며 홱 돌아서 허공을 노려 보았다. 하후성은 쓴 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유섬화에게로 돌렸으나 그녀 또한 야멸찬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당장 잡아먹지 못하는 것이 한이라는 듯한 눈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와 눈빛이 정통으로 부딪치자 유섬화는 그만 움찔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후성이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웃었기 때문 이었다. 그의 웃음은 너무도 매력적이었다. 순간적으로 야성적(野性的)으로만 살아온 유섬화의 가슴에 난생 처음으로 느끼는 야릇한 감정이 일렁였다. 그녀는 처음에는 자신의 그런 느낌에 어리둥절했으나 곧 얼굴이 빨개지더니 그만 고개를 푹 숙이는 것이었다. 하후성은 그녀를 향해 말했다. "작은 아가씨, 그럼 훗날 봅시다." 그는 유무심에게도 정중히 인사했다. "노선배님, 그럼." 휘---익! 한 줄기 백영(白影)이 흰 빛으로 화한 듯 천화곡 밖을 향해 일직 선으로 날아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는 사라진 것이었다. 그러자 유섬화는 갑자기 무엇을 잃은 듯이 가슴이 텅 비는 것을 느끼며 멍하니 굳어진 채 그가 사라진 곳을 바라 보았다. 그녀는 애지중지하던 장중보옥(掌中寶玉)을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그것은 이제껏 그녀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문득 그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무심코 쓸어내리다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앞가슴의 옷자락이 풀어 헤쳐져 있고 작지만 이미 여인의 모습을 갖춘 젖가슴이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유섬화의 얼 굴은 금방 도화처럼 새빨개지고 말았다. '나도... 이제 보니, 벌써.' 그녀의 목덜미까지 빨간 홍화(紅花)가 번지고 있었다. 그것은 야 생마처럼 자란 소녀의 분홍빛 연정이 처음으로 개화하는 순간이기 도 했다. ■ 대소림사 제14장 금마비(金魔匕)의 출현(出現) -1 ━━━━━━━━━━━━━━━━━━━━━━━━━━━━━━━━━━━ 봄(春). 봄은 누구에게나 포근한 느낌을 준다. 대지(大地)를 꽁꽁 얼어붙게 했던 겨울 동안의 혹한도 봄바람에 밀려 어느새 저만치 달아나고 있었다. 사람들은 두터운 속옷을 입 고 겨울 동안 제대로 몸을 펴보지 못하다가 비로소 대지를 녹이는 훈풍과 함께 속옷을 벗어 던지고 사지를 활짝 편 채 거리를 활보 하기 시작했다. 강서성(江西省). 남창(南昌)으로 뻗은 관도(官道)는 해동과 함께 얼어붙은 황토가 녹아 질척거렸다. 관도에 한 백의청년이 나타났다. 그는 긴 머리를 등 뒤로 묶어내 린 선풍옥골의 미청년이었다. 하후성은 반듯한 걸음걸이로 남창으로 향하고 있었다. 먼 거리를 걸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모습은 조금도 흐트러진 데가 없으며 옷자락에는 먼지 하나 묻어 있지 않았다. 문득 그의 귓전에 은은한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두... 두... 두. 고개를 돌리자 멀리 바라보이는 관도 끝에서 수십 기의 인마(人 馬)가 나타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다가왔다. 하후성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사람이 많이 지나는 관도에서 한두 필도 아닌 말들을 저렇게 빨 리 몰다니.' 이십여 기의 말이 질풍같이 질주하며 그를 지나쳤다. 하후성은 길 옆으로 몸을 피하는 한편, 흙덩이가 무수히 튕겨오자 가볍게 운기(運氣)하여 호신강기로 옷이 더럽혀지는 것을 방비했 다. 그는 인마가 지나가자 고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고는 다시 걸었 다. 그런데 또다시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이번에는 세 필의 칠 흑같은 오추마(烏騶馬)가 달려왔다. 하후성은 마상 위의 인물을 얼핏 살펴보았다. 세 명의 중년인이 타고 있었는데 개중 그의 마음을 끄는 것은 가 운데 있는 자로 팔 척(八尺) 장신의 구렛나루 수염이 무성한 갈의 를 입은 거한이었다. 그는 체격이 우람했으며 두 눈은 호목(虎目)으로 번갯불같은 신광 을 발산하고 있었다. 또한 등 뒤에는 거대한 철궁과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유성추를 걸고 있었다. 갈의거한도 말이 스치는 찰나 힐끗 하후성을 응시했으나 눈 깜짝 할 사이에 관도 끝으로 사라져 버렸다. 기이한 일이었다. 두두두두두! 지축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또다시 십여 필 가량의 인마가 달려와 하후성을 스쳐가는 것이었다. 결국 짧은 시간에 세 번이나 인마들 이 그의 곁을 지나간 셈이었다. 하후성은 의혹을 금치 못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일일까? 저들은 누구이며 대체 어디로 급 히 가는 길일까?' 그가 이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을 때 다시 이번에는 두 필의 희귀 한 연지마( 脂馬)가 달려왔다. 연지마라면 하루에 천 리를 간다는 명마였다. 그런 명마가 한 필 도 아니고 두 필이 한꺼번에 나타난 것이었다. 실로 굉장한 속도 로 나타난 연지마는 다시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곁을 스쳐 지나 갔다. 하후성은 예리한 안력으로 연지마에 일남일녀가 타고 있다는 것을 알아 보았다. 히히히힝---! 문득 그를 바람처럼 스쳐갔던 연지마가 힘찬 울음소리를 발하며 멈추더니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하후형! 하후형이 아니십니까?" 두 필의 연지마는 한 번 껑충 뛰는가 싶자 이내 하후성이 있는 곳 으로 되돌아와 멈추었다. 그와 동시에 한 명의 준수한 청년이 마 상에서 뛰어내렸다. 가뿐한 남색의 경장을 입은 청년, 그는 바로 당금 사룡(四龍)의 한 명인 옥면가람(玉面伽藍) 남궁수(南宮秀)였다. 뒤이어 뛰어내 린 여인 역시 사봉(四鳳) 중의 하나인 빙심한매(氷心寒梅) 남궁설 지(南宮雪芝)였다. 만리추풍수사(萬里追風秀士) 모용랑(慕容浪). 비응공자(飛鷹公子) 표화운(飄火雲). 옥면가람(玉面伽藍) 남궁수(南宮秀). 적인금붕(赤印金鵬) 황보무룡(皇甫武龍). 이들 네 명의 청년고수들을 일컬어 중원사룡이라 부른다. 만리추풍수사는 개방( 幇)의 차기 방주( 主)로 내정된 신진고수 요, 옥면가람은 남궁세가의 소가주(少家主), 또 적인금붕은 태양 장의 소장주로서 실로 쟁쟁한 명문 출신들이었다. 그러나 비응공자 표화운 만은 출신 내력이 알려져 있지 않은 채 항상 어깨에 비응을 얹고 다니며 병기로는 검(劍)을 썼다. 비파은연(琵琶銀燕) 설미홍(雪美紅). 빙심한매(氷心寒梅) 남궁설지(南宮雪芝). 설금옥향(雪琴玉香) 황보문연(皇甫文娟). 홍의은편날수(紅依銀鞭 手) 팽소령(彭素鈴). 이 네 명의 소녀들이 이른바 중원 사봉이었다. 무공은 물론 미색의 절륜함은 가히 달이 얼굴을 가리고 꽃이 부끄 러워할 정도였으며 하나같이 정파무림의 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들 역시 모두 명문의 후예들로써 각기 화산파, 남궁세가, 태양 장, 하북팽가 등의 출신이었다. 하후성은 이전에 이들을 본 적이 있어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아, 남궁형이었군요." 남궁수는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이거 정말 반갑습니다. 이런 곳에서 또다시 만나게 되다 니." 남궁수는 하후성에게 다가와 손을 덥석 잡았다. 그는 진정으로 기 뻐하는 모습이었다. 하후성은 내심 그의 우의에 감동하며 빙그레 웃었다. "반갑소이다, 남궁형." 남궁수는 약간 들뜬 음성으로 말했다. "천풍보에서 그냥 헤어져 무척 섭섭했소이다." "소제 역시 마찬가지지요." 하후성이 담담히 말하자 남궁수는 옆에 서 있는 빙심한매 남궁설 지를 향해 말했다. "설지야, 무엇하느냐? 하후형에게 인사드리지 않고?" 남궁설지의 여전히 싸늘하고 차가운 모습을 본 하후성은 먼저 인 사를 건넸다. "남궁소저, 반갑소이다." 그의 말에 순간적으로 남궁설지의 차갑기만 하던 두 눈에는 미묘 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약간 부드러운 표정을 지어 보 이며 고개를 숙였다. "소매도 하후소협을 뵈서 반가와요." 남궁수가 하후성에게 물었다. "참, 하후형께선 지금 어디로 가시는 길이시오?" "남창(南昌)에 가는 길이오." 남궁수는 준미한 눈썹을 치켜올렸다. "남창? 그렇다면 하후형도 그 일 때문에 가시는 길이십니까?" "그 일이라니?" "아니, 그럼 하후형은 아직도 그 사건을 모르시오?" 하후성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소제는 남궁형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소이다." "아니, 정말 그럼 호(胡) 노선배의 죽음 때문에 조문가는 길이 아 니었단 말이시오?" "호 노선배?" "만경루(萬京樓)의 주인인 만사귀재(萬事鬼才) 호불귀(胡不鬼) 선 배님 말이오." 하후성은 흠칫 놀랐다. "아니, 그럼 만사귀재 그 분이 돌아가셨단 말이오?" 남궁수는 도리어 어이없다는 듯 신음을 발하며 말했다. "으음, 하후형은 요즘 강호에서 연속되는 살인사건을 아직도 모르 시나 보구려." 하후성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소제가 모두 말씀드리겠소. 요즘 석 달 사이에 강호에서는 일곱 명의 무림고인이 피살을 당했소이다." "아!" 남궁수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무림에 혈풍(血風)의 서막이 열리기 시작했다. 석 달 전 수라궁 (修羅宮)이 천하 각 문파와 고수들에게 마존첩(魔尊帖)을 전달함 으로써 혈겁의 회오리가 일기 시작한 것이었다. 갑자기 마종지문(魔宗之門)임을 내세워 개파대전(開派大典)을 기 해 무림제패를 선언하려는 수라궁의 야심에 대해 전 무림은 이제 껏 계속된 백 년의 평화가 더이상 지켜질 수 없음을 깨달았다. 정사를 막론하고 안하무인으로 전 무림을 향해 도전한 마종문의 수라궁. 마존첩이 나돈 후 알게 모르게 전 무림은 각 지역마다 정사군웅들 의 회합이 이루어졌으며 그들은 개인적인 이기심을 버리고 수라궁 에 대해 대책을 상의했다. 바로 이같은 시기에 강호에 의문의 연속 살인사건이 터졌고 그것 은 피를 부르는 시작의 예고였다. 죽림거사(竹林居士). 그는 무림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 현자(賢者)로 무림사상 제 일의 현인이라는 귀곡자(鬼谷子)의 두 제자 중 하나였다. 그의 심기(心機)는 추측할 도리가 없이 깊었고 각종 기관지학(機 關之學)에 능통한 지모(智謀)의 달인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그가 머무는 대파산(大巴山) 영인곡(靈人谷)의 죽 림헌(竹林軒)에서 그는 피살되었으며 그의 가슴에는 금빛의 비수 (匕首)가 꽂혀 있었다. 독심귀수(毒心鬼手). 그는 독(毒)의 명인(名人)이었으나 실상은 독보다 오히려 귀계와 모계(謀計)로써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런데 그도 죽었다. 사지 가 무참히 절단된 채. 역시 그의 가슴에도 금빛 비수가 꽂혀 있었고 그가 죽은 곳은 자 신의 집 서재에서였다. 죽림거사와 독심귀수의 죽음이 시작이었다. 그 뒤를 이어 개방( 幇) 제 일의 모사인 칠절심개(七絶心 )가 죽었고, 또 귀곡자의 둘째 제자인 신타옹(神陀翁)도 연달아 피살 되었다. 복건성(福健省)의 명문 석가(石家)의 가주인 석대선생(石大先生) 의 목 없는 시체. 그리고 황하칠십이채(黃河七十二寨)를 쥐고 흔드는 사해신군(四海 神君) 구양경(歐陽卿)의 수족이자 가장 신임하는 모사, 신안수사 (神眼秀士) 제갈전(諸葛全)도 역시 황하변에서 시체로 발견되었 다. 그들의 가슴에도 역시 금빛 비수가 꽂혀 있었다. 그러나 이들 육 인(六人)의 죽음보다 더 큰 경악을 일으킨 한 사 람의 죽음이 또 발생했으니 바로 오 일 전, 강호 제일의 지자이며 모사의 달인인 만경루의 주인 만사귀재 호불귀가 피살을 당한 것 이었다. 연이은 칠인(七人)의 죽음, 이 의문의 괴사는 강호에 엄청난 충격 과 불안감을 주었다. 금마비(金魔匕). 죽음을 부르는 악마의 비수, 그 금빛 비수를 무림인들은 공포의 금마비라고 불렀고 무림은 극도로 혼란해졌다. 흉수는 누구이며, 무엇 때문에 살인을 하는가? 또한 왜 살인 현장 에 금마비를 남겨두는가? 온갖 의문이 잇달았으나 아무도 해답을 줄 수 있는 자는 없었고 여기에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커다란 의문이 있었다. 칠절심개나 석대선생은 무림의 절정고수들인 반면 죽림거사나 신 안수사, 만사귀재 호불귀 등은 무공을 전혀 모르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 칠명(七名)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그들 모두가 무림에 알려진 유명한 모사(謀師)들이요, 지계(智計) 의 달인들이라는 점이었다. 무공은 그만두고 그들이 무림에 차지하는 비중은 실로 엄청난 것 이었다. 대체 흉수가 그들을 죽인 것은 무슨 저의가 깔려 있는 것일까? 전 무림인들은 칠인의 공통점을 생각하고 흉수가 노린 것을 짐작 했다. 그리고 그들은 전율을 금치 못했다. 하후성은 모든 얘기를 듣고 아연해졌다. "그런 일이 일어나다니." 남궁수는 탄식하며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것은 실로 무섭기 짝이 없는 음모요. 강호 제일의 지자들을 몰 살시키다니, 이것은 가공할 흉계요!" "이미 이곳 강서성의 군웅들은 호불귀 노선배의 영전 앞에서 다짐 했소. 반드시 복수를 하겠다고 말이오." 하후성은 침중하게 말했다. "으음, 그러나 금마비를 남긴 흉수가 누군지 모르지 않소?" 남궁수는 비분강개했다. "수라궁! 그 신비한 마의 집단인 수라궁을 제외하고 그 누가 이런 짓을 할 수 있겠소?" "......." "이미 강호의 영웅들은 모두 끓는 피를 참지 못하고 무공산(武功 山) 천마봉(天魔峯)의 수라궁(修羅宮)으로 몰려가고 있소이다." 하후성은 비로소 조금 전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음. 이제 보니 아까 그 인마들은 모두 수라궁으로 가는 인물들이 었구나.' 남궁수는 호기롭게 말했다. "저희들도 이미 아버님을 비롯하여 본가의 숙부님들과 중도에서 합류하기로 하고 수라궁으로 가는 길이오." 남궁수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 "하후형께서는 수라궁으로 가지 않으시렵니까?" 하후성은 눈빛을 기이하게 빛내며 말했다. "소제 역시 무림인의 한 사람으로써 어찌 좌시하고만 있을 수 있 겠소이까? 먼저 남창에 다녀온 즉시 가겠소이다." 남궁수는 흔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공손히 포권했다. "하후형, 그럼 저희는 걸음이 바빠 먼저 떠나겠소이다. 다음에 수 라궁에서 뵙겠소이다." 하후성은 마주 포권했다. "소제도 곧 따르겠소이다." 남궁설지는 지그시 하후성을 응시하다가 남궁수의 뒤를 이어 연지 마 위에 올랐다. "끼럇!" 두두두두......! 힘찬 말발굽 소리와 함께 두 필의 연지마는 힘차게 대지를 박차며 관도 저 편으로 사라져 갔다. 하후성은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침묵했으나 웬지 마음이 점차 무거워지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남궁수로부터 들은 의 문의 연속 살인사건이 떠올랐으며 그것은 심상치 않은 느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하후성의 초인적인 지혜와 통찰력은 이미 그 사건에서 가공할 마 영(魔影)을 발견해 내고 있었다. '그렇다. 예로부터 병법에서 적을 치기 위해서는 먼저 장수를 베 라 했다. 정사를 막론한 모든 모사와 지자를 제거한 것은 바로 군 웅들의 가장 중요한 머리를 떼어낸 것이나 다름없다. 비록 팔다리 가 남아 있다고는 하나 머리를 잃는다면 그는 곧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하후성은 이같이 생각하면서 점차 안색이 무겁게 변해가고 있었 다. 보이지 않는 대흉마의 존재에 대해 그는 한 가닥 막연한 두려움까 지 느끼게 되었다. '누군지 모르지만 암중에 숨어 이같은 계획을 꾸민 자는 상상도 할 수 없이 무서운 자다. 그 자의 지모와 독계야말로 어쩌면 이미 죽은 지자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욱 뛰어날지 모른다.' 하후성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걷는 동안 다시 무수한 인마가 그의 곁을 스쳐 남쪽으로 달려 내려갔다. 하후성은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꼈다. '수라궁. 과연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아무튼 백 년 이 래 최대의 가공할 혈풍이 일어날 것 만은 틀림없다.' 하후성은 고개를 치켜들었다. '우선 남창 만경루로 가보자.' 남창(南昌). 강서성(江西省)에 위치한 천하의 명호(名湖) 파양호( 陽湖)를 끼 고 수륙으로 크게 발달한 대도(大都). 남창 사람들은 강남인 특유의 낙천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으며 풍 류를 좋아하고 술을 즐긴다. 만경루(萬京樓). 남창 사람들로써 이 객점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남창에 즐비한 주루객점 중에서도 단연 손을 꼽는 만경루를 모른 다면 이미 그 사람은 술을 마실 줄 모르는 사람으로 무시당했다. 그 이유는 만경루가 곧 남창에서 규모가 가장 큰 주루이자 오직 천하에서 만경루에서만 맛볼 수 있는 천일로(千日露)라는 명주(名 酒)가 있기 때문이었다. 만경루는 남창성 중심가에 자리잡고 있었다. 전면에 삼층의 방대한 주루를 위시하여 후면에 약 일만 평에 달하 는 대지에 건립된 즐비한 고루거각과 객사들. 만경루는 과연 남창 제일의 객점이었다. 만사귀재 호불귀, 이 사람이 바로 만경루의 주인이었다. 그는 너무나도 유명한 인물이었는데 무공을 전혀 모르면서도 강호 무림에서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그것은 귀신도 놀랄 그의 지모와 계책, 그리고 만사무불통지(萬事無不通智)의 해박한 지식 때문이 었다. - 만사귀재의 지모를 따라갈 자는 아무도 없다. 귀곡(鬼谷), 만사 (萬事) 중 하나만 있어도 능히 천하를 얻을 수 있으리라. 무림에 떠도는 말, 이것은 귀곡자(鬼谷子)와 만사귀재(萬事鬼才) 가 천하제일뇌(天下第一腦)임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만사귀 재 호불귀가 바로 남창제일의 주루인 만경루를 경영한다는 것은 실로 기이한 일이었다. 그런데 만경루주인 호불귀(胡不鬼), 그가 죽었다. 가슴에 금마비가 꽂힌 채. 만경루 안. 한 명의 백의청년이 앉아 술을 들고 있다. 그가 앉은 삼층의 창가에서는 남창성 내가 환히 보였다. 그는 바 로 하후성으로 만사귀재 호불귀를 찾아 이곳에 온 것이다. 호불귀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만경루에는 손님이 꽉 차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숙연했으며 조용히 술을 들 뿐이었다. 이 날 만은 모두 공짜로 술을 마시게 허락되었으나 그들은 머리에 모두 조의(弔意)를 표하는 백건(白巾)을 두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만사귀재 호불귀를 문상 온 조문객들이었다. 하후성은 만면에 침통한 빛을 감추지 못한 채 계속 술을 들이키고 있었다. '천기사숙께서는 나보고 만사귀재 호 노선배를 만나 그에게서 가 르침을 받으라고 했건만.' 그는 단숨에 술잔을 들이켰다. '만경루는 그대로 있는데 만사귀재는 간 곳이 없구나.' 하후성은 빈 술잔에 술을 조용히 따랐다. 이때 한 명의 청년이 계단을 통해 들어서고 있었다. 하후성의 시 선은 자신도 모르게 그 쪽으로 향했다. 그의 두 눈에 감탄의 빛이 떠올랐다. 지금 막 삼층으로 올라온 청년의 모습은 눈길을 끌 만 했던 것이 다. 그는 황의를 입은 유생(儒生) 차림이었다. 나이는 이십삼사 세 가 량 되어 보였는데 관옥같은 얼굴에 붓으로 그은 듯한 검미(劍眉) 가 유난히 돋보였다. 또한 얼굴 전체에서 풍기는 기운은 단아하고 점잖아 보였다. 그뿐인가? 키는 후리후리할 뿐더러 중인을 압도하는 분위기는 그 야말로 인중용봉(人中龍鳳)이요, 군계일학(群鷄一鶴) 격이었다. 게다가 한 가지 특이한 것은 그의 오른쪽 눈썹 속에 있는 콩알 만 한 붉은 점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은 그의 풍모를 한층 더 뛰 어나게 해주고 있었다. 청년은 삼층에 올라오자마자 좌석을 찾는 듯 주위를 훑어 보았다. 그러다 문득 그의 시선이 하후성에게 멎더니 두 눈에 기이한 미소 가 일어났다. 그는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하후성에게 다가왔다. 그 는 하후성에게 가볍게 일례를 취하며 말했다. "형장. 초면에 실례지만 합석을 해도 되겠는지요?" 하후성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소생도 때마침 심심하던 차였습니다." 황의서생의 입가에 또 한 번 기이한 미소가 스쳤다. "감사합니다. 형장." 그는 자리에 앉았다. "소생은 광동성 출신으로 금악비(金岳飛)라 합니다." "아, 금형이셨군요. 소생은 하진성(夏鎭星)이라 합니다." 하후성은 웬지 진짜 이름을 밝히고 싶지 않아 슬쩍 한 자를 바꾸 어 버렸다. 금악비의 눈에 순간적으로 의혹의 빛이 스쳤으나 그것 은 금방 사라졌다. "하형께서도 만사귀재 호 노선배의 문상을 오신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비록 무림말학이지만 무림인의 한 명으로써 어찌 호 노선배같은 기인의 타계를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금악비의 눈 깊숙히 의미심장한 빛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하형, 소제 역시 호 노선배의 조문을 위해 왔으니 마침 잘 되었 습니다. 소제와 함께 고인의 영전에 예를 표하는 것이 어떻습니 까?" 하후성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현기서린 두 눈에 담담한 미소를 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만경루의 후원. 이곳은 만경루에서도 가장 휼륭한 곳이었다. 커다란 가산과 호수, 그리고 화려한 누각, 정자 등이 잘 조성되어 있었다. 봄부터 가을까지 만경루의 후원은 수많은 기화요초의 향기로 이곳 을 찾는 손님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아름답던 후원이 만사귀재 호불귀의 죽음을 애 도하는 문상객들의 침통한 표정으로 무거운 분위기를 느끼게 하고 있었다. 만사각(萬事閣). 이곳은 만경루의 후원에 위치하고 있었다. 과거 만사귀재 호불귀가 그의 절친한 벗과 함께 천일로를 마시며 천하정세를 논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이제 고인의 빈소로 화하고 말았다. 하후성과 금악비는 만사각으로 들어섰다. 만사각에는 독립된 문이 있었고 문 앞에는 구순(九旬) 가량의 청 의노인이 탁자에 방명록을 놓고는 붓을 들고 앉아 있었다. 청의노인은 두 눈이 깊고 지혜로와 보이는 청수한 용모였으나 하 후성과 금악비가 다가가자 침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두 분 소협의 이름은 어찌 되시는지? 방명록에 적어주시기 바라 오." 하후성이 먼저 붓을 받았다. - 하진성(夏鎭星). 방명록에 적힌 웅후수려한 필체에 노인의 눈빛이 야릇하게 빛났 다. 또한 금악비가 자신의 이름을 썼을 때에도 역시 청의노인의 눈빛은 기이하게 빛났다. 두 사람이 문 안으로 들어가고 난 후 노인은 고개를 돌려 말했다. "자명(子明)." "네!" 한 중년인이 나타났다. "조금 전에 들어간 두 명의 청년을 주의해라." "옛?" "그들은 모두 대단한 고수들이다. 그런데 노부 천안통수(天眼通 )는 현 무림고수 일만 명 가운데 그들의 이름을 들은 기억이 없 다." 중년인의 안색이 변했고 청의노인 천안통수는 다시 당부했다. "그리고 불범(不凡)에게도 알려라. 태행삼호(太行三虎)를 조심하 라고. 그들이 아무래도 수상하다." "네. 숙부님." 중년인은 급히 허리를 숙인 후 안으로 사라졌다. 천안통수의 두 눈에서 현기가 일어나더니 문득 붓을 꽉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호형님. 지하에서나마 편히 눈을 감으십시오. 소제가 필히 원수 를 갚겠습니다." 천안통수의 두 눈에서 무서운 살기가 번쩍였다. 천안통수(天眼通 ) 마운로(摩雲老). 그는 극히 괴이한 기인으로 타고난 천안과 무서운 기억력을 가지고 있어 평생에 단 한 번 스 쳐본 사람일지라도 얼굴을 기억했다. 그는 강호인들 수만 명의 명호와 얼굴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으며 만사귀재 호불귀와는 의형제(義兄弟) 지간이었다. 빈청(殯廳). 그곳은 온통 엄숙하고 비통한 분위기에 잠겨 있었다. 넓은 대청은 사방 벽이 모두 흰 천으로 가려져 있었고 중앙에는 백포(白布)로 감싸여진 관이 놓여 있었다. 빈상 위에는 커다란 향로와 촛불이 켜져 있었으며 위패가 모셔져 있었다. 빈상에 분향하는 조객들은 줄지어 빈청 밖에 서 있다가 차례로 다가와 절을 하곤 했다. 흰 관 옆에는 한 명의 상복을 입은 이십 세 가량의 청년이 무릎 꿇은 채 비통하게 흐느끼고 있었다. 그는 안색이 백납같이 창백했으나 용모가 여인을 방불케 할 정도 로 준수하여 만일 여장을 하고 머리를 풀어 헤친다면 영락없는 미 녀로 보일 정도였다. 하후성은 금악비와 나란히 선 채 조객들이 차례로 조상하는 모습 을 지켜보았다. 조객들은 대부분 침통하고 경건한 표정을 짓고 있 었다. 하후성은 내심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음. 호 노선배는 비록 무림인이 아니지만 수많은 무림인과 교분 을 맺고 있으며 정사를 가리지 않고 그들에게 큰 도움을 준 호인 (好人)이라더니 이 조객들을 보니 정말 그렇구나.' 그러나 금새 하후성은 움찔했다. 조객들 중에 정반대로 좋지 않은 표정과 살기띈 눈빛을 한 인물들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마침 조상할 차례가 된 세 명의 장한들이었다. 그들은 비록 공손히 향에 불을 붙이고 절을 하고 있었지만 표정과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우리 태행삼호(太行三虎)는 비록 호 노선배님을 생전에 뵙지는 못했지만 항상 존경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돌 아가시니 통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그들 중 한 명이 그럴 듯한 말을 했고 조객들은 그 말에 모두 비 통과 공감의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태행삼호는 몸을 일으키는가 싶더니 갑자기 벼락같이 관을 향해 동시에 장력(掌力)을 뻗는 것이 아닌가? "앗! 무슨 짓이냐!" 조객들은 이 뜻밖의 상황에 대경실색했다. 우지끈--- 펑! 그러나 관은 이미 그들 삼인이 작렬한 장력에 박살이 나고 말았 다. 더욱 놀라운 일은 바로 그 순간에 벌어졌다. 관이 박살나면서 그 속에서 한 줄기 혈영(血影)이 섬전처럼 솟구 쳐 나온 것이었다. 혈영의 몸에서 붉은 검광(劍光)이 뻗었다. "으악! 컥!" 태행삼호 중 두 명이 처절한 비명과 함께 거꾸러졌다. 한 명은 머 리가 달아나고 한 명은 허리가 두동강이가 난 비참한 죽음이었다. 비로소 멈추어 선 혈영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한 명의 피처럼 붉은 혈의를 입은 괴노인으로 나이는 대략 칠 순(七旬)으로 보였 다. 그는 얼굴이 온통 검상(劍傷) 투성이로 징그러울 정도였으며 그의 수중에는 다섯 자 길이의 긴 혈검이 뱀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조객들 중 누군가 놀라 외쳤다. "아! 혈의마검(血依魔劍) 공손패(公孫貝)다!" "삼십 년 전 사라졌던 저 자가 다시 나타나다니!" 혈의마검 공손패는 사파의 절정고수로 나이는 이미 백 세에 가까 왔다. 당금 사도무림에는 가장 큰 세력인 남맹북단(南盟北檀)을 제외하 고 백 년 간 유지되어 온 집단, 즉 이곡(二谷), 일교(一敎), 일회 (一會)가 있었으며 그 중 이곡이란 백독곡(百毒谷)과 혈영곡(血影 谷)이었다. 혈의마검 공손패는 바로 혈영곡의 삼대곡주(三代谷主)였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는 삼십 년 전 활동을 중지했었다. 혈의마검 공손패는 음침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괴검을 뻗었다. 슉---! 축 늘어져 있던 검끝은 창끝처럼 빳빳해지며 살아남은 한 명의 태 행삼호의 목구멍을 찔렀다. "큭!" 삼호의 우두머리인 대호(大虎)는 돼지 멱따는 소리를 냈으나 피만 나왔을 뿐 구멍이 뚫린 것은 아니었다. 공손패가 적당한 깊이에서 손을 멈추었기 때문이었다. 공손패는 벌벌 떠는 대호를 제압한 후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한 명도 움직이지 마시오." 조객들은 그 말에 모두 안색이 변했다. 흑도 거마인 혈의마검 공 손패의 행동에 대해 그들은 불안감을 느꼈다. 이때 이제껏 조용히 관 옆에 앉아 흐느끼고 있던 상복청년이 일어 나더니 조객들에게 청량한 음성으로 말했다. "여러분,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 일은 조부님을 시해한 흉수를 찾 기 위한 것이니 다소 억울하더라도 참으시기 바랍니다." 그 말에 조객들은 웅성거렸고 누군가 외쳤다. "호소협! 염려마시고 흉수를 찾기 바라오." 상복청년은 아름다운 얼굴에 창백한 미소를 지었다. 호불범(胡不凡). 그는 바로 만사귀재 호불귀의 손자로 이미 수년 전부터 강서성(江西省) 일대에서는 꽤 명성을 쌓고 있었다. 무공을 익혔는지 안 익혔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그는 무림인들 속 에서 조부에 못지 않은 지략(智略)과 지식으로 점차 큰 위치를 차 지하기 시작한 유능한 청년이었다. 특히 그는 여인보다 더 고운 피부와 아름다운 용모로 남창 일대에 서 무수한 낭자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하후성은 흠칫하고 있었다. 바로 옆에 있던 금악비가 입가에 한 가닥 조소를 짓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호불범이 예의 청량한 음성으로 중인들에게 말했다. "여러분들은 그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말고 계셔야 합니다. 여러분 주위의 사방 벽에 쳐진 흰 천 뒤에는 혈의삼십육궁(血依三 十六弓)이 혈천궁(血天弓)을 겨누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객들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만약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혈영전(血影箭)이 발사될 것입니다." "아!" 조객들은 모두 충격을 받은 듯 안색이 변했다. 혈의삼십육궁(血依三十六弓), 그들은 누구인가? 삼십 년 전 혈의마검 공손패가 거느리던 혈영곡의 무서운 고수들 가운데 삼십육 명의 궁노수(弓弩手)가 있었다. 모두 태어나서부터 오직 궁법(弓法) 만을 익힌 궁술의 고수들이었다. 그들이 혈천궁으로 발사하는 혈영전은 실로 가공무비한 위력을 지 니고 있었다. 전혀 소리가 없을 뿐만 아니라 내가강기(內家剛氣) 를 전적으로 파괴하며 설사 강철이라도 소리없이 관통하는 것이었 다. 조객들은 모두 두려움이 어린 시선으로 빈청의 사방벽에 늘여져 있는 흰 천을 둘러 보았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전혀 사람이 숨어 있는 기척을 느낄 수가 없었다. 호불범이 맑은 음성으로 밖을 향해 말했다. "마숙부님.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그러자 빈청 위로 청의노인이 올라섰다. 그는 바로 문 밖에서 방 명록을 관리하던 천안통수 마운로였는데 그는 손에 방명록을 들고 있었다. 그는 방명록을 펼치며 창노한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부터 노부가 부르는 사람은 밖으로 나가도 좋소." 그는 줄줄이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빈청 안의 조객은 모두 줄잡아 백여 명은 되었는데 그들은 모두 잔뜩 마음을 조이며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기를 빌었다. 마침내 약 일 각의 시간이 지나자 빈청에 남게 된 인물은 불과 십 오 명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 속에는 하후성과 금악비도 포함 되어 있었다. 그러나 마운로는 바야흐로 방명록을 덮었고 기다렸다는 듯이 혈의 마검 공손패가 나서며 음침하게 말했다. "흐흐흐... 노부는 평생 아무에게도 은혜를 받은 적이 없었다. 단 지 돌아가신 호대형 만이 유일한 은인이다. 그런 그를 죽이다 니... 내 복수를 다짐하며 삼십 년 만에 처음으로 혈영곡에서 나 왔다!" 그는 빈청에 남아 있는 십오 명의 인물들을 노려보며 살광을 폭사 하다가 수중의 혈검을 밀었다. "으윽!" 태행삼호 중 대호가 진저리를 치며 피를 흘렸다. "자! 죽기 싫으면 말해라. 분명히 이곳에 있는 인물들은 모두 너 와 같은 무리들이다. 저들 중 우두머리가 누구냐?" "으으." 대호는 목에서 나온 피로 전신이 물든 채 신음을 토했다. "빨리 말해라!" 스슷! 혈검이 그의 목에 더 큰 상처를 냈다. "으윽!" 대호는 비명을 질렀고 피가 무섭게 치솟았으나 공포에 질리면서도 굴복하지 않았다. "모, 못한다." "흐흐흐... 네 놈은 아직도 두려움을 모르는군!" 쉭! "아악!" 혈광이 번뜩인 순간 대호의 팔이 어깨로부터 베어져 떨어졌다. "크흐흐... 다음은 검이 너의 목을 가르고 심장을 토막낼 것이다. 자, 그 전에 어서 말해라." 혈의마검 공손패는 실로 잔인한 인물로 한 번 한다면 하늘이 무너 져도 해낼 위인이었다. 마침내 대호는 더이상 육체의 고통과 죽음의 공포를 감당할 수 없 었던지 남은 한 쪽 손을 쳐들었다. "마, 말하겠소. 그는 바로... 으악!" 놀랍게도 말이 끝나기도 전 그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그가 십오 명의 조객들 중 누군가를 가리킨 순간 금빛이 번쩍 하 더니 그의 이마에 한 자루의 금빛 비수가 깊이 박힌 것이었다. 공손패는 경악하여 부르짖었다. "금마비!" 혈의마검 공손패의 경악성에 중인들의 안색이 대변했다. 특히 호불범의 신비한 눈에서는 살기가 번쩍 빛났으며 천안통수의 두 눈은 무섭게 부릅떠졌다. 공손패는 이미 벌렁 쓰러져 죽은 대호의 이마에서 금빛 비수를 쑥 뽑았다. "금마비, 과연 나타났구나!" 그의 음성에는 무서운 살기와 분노가 깃들어 있었고 천안통수 마 운로가 갑자기 음산하게 외쳤다. "독하지 않으면 군자가 아니라고 했다. 공손형, 이곳에 있는 자들 은 모두 틀림없는 수라궁의 마도들이오. 혈영전을 발사하시오." 그의 말이 떨어지자 공손패의 흉칙한 검상투성이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어렸다. "좋다. 혈의삼십육궁, 혈영전을 발사해라! 한 놈도 살려두지 마 라!" 빈청 안의 십여 명 인물들은 안색이 홱 변해 모두 무기를 뽑으려 했다. 그러나 그들의 무기가 완전히 뽑히기도 전, 그들을 향해 사 방에서 붉은 빛이 섬전처럼 쏟아졌다. "으--- 악!" 처절한 비명이 연달아 일어났고 우박처럼 쏟아진 혈광은 그들의 급소를 정확히 관통시켜 버렸다. 어떤 자들은 용케 한두 개의 핏 빛 화살을 움켜쥐었으나 역시 목이 관통되고 심장에 구멍이 뚫리 며 전신이 구멍투성이가 되어 쓰러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참변이었으나 하후성은 금마비가 대호의 이마에 꽂혔을 때 이미 금마비를 전개한 흉수(凶手)가 누구인지 알아내고야 말았다. '이, 이럴 수가! 이 자가?' 하후성은 금악비의 소매 속에서 소리도 형체도 없이 금마비가 날 아간 것을 보았고 그것은 오직 그만이 발견할 수 있었다. 크게 배신을 당한 기분과 함께 분노심이 가슴을 진동시켰으나 천 하에서 누구보다도 침착하고 정력(定力)이 굳은 그는 이를 내색치 않고 있었다. 하후성은 다만 묵묵히 손을 움직였을 뿐이었다. 파팟! 두 자루의 혈영전이 손에 잡히자 그는 손바닥에 찌르는 듯한 통증 을 느끼고 놀랐다. '대단한 내공이다! 한낱 화살에 이토록 무서운 힘이 깃들어 있다 니.' 이제 모두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지고 빈청에는 오직 그와 금악비 만이 남아 있었다. 금악비 역시 자신에게 날아오는 혈영전을 가볍 게 잡아채고 있었으며 지극히 여유롭고 태연한 모습이었다. 이윽고 혈영전의 공세가 그치고 공손패는 두 사람을 노려보며 음 산하게 웃었다. "흐흐흐... 네 놈들 중 한 놈이 조금 전에 금마비를 전개한 것이 틀림없겠지?" 금악비는 미소를 지으며 경멸하듯이 물었다. "공손패, 그대가 그것을 물어볼 자격이 있을까?" 공손패의 안색이 흉칙하게 일그러졌다. "흐흐흐... 이 건방진 애송이 놈!" 그는 외치자마자 분노를 참을 수 없는 듯 수중의 혈검을 뻗었다. 쉬익!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혈광이 번개처럼 금악비의 목을 찔러갔으 나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더니 오른손을 들어 슬쩍 한 바퀴 돌렸다. 위잉! 무서운 소용돌이가 일며 무형의 장력이 공손패의 공격을 차단시키 며 날아갔다. 쾅! "으윽!" 공손패는 가슴에 거센 충격을 느끼며 뒤로 이 보(二步)나 밀려갔 다. 그의 안색은 대변했으며 온통 경악에 일그러진 얼굴로 금악비 를 노려보았다. "이, 이럴 수가? 네, 네놈이 쓴 무공은 바로 와선장(渦旋掌)이 아 니냐?" 그 말에 중인들 역시 안색이 대변했고 천안통수 마운로가 대경하 여 부르짖었다. "와선장! 부, 불사지존(不死之尊)의 와선장 말이오?" 공손패는 여전히 경악성으로 말했다. "그렇소. 이 자의 무공은 틀림없이 불사지존이 지난 날 사용했던 와선장이오!" 불사지존(不死之尊)이라면 이백 년 전(二百年前) 천하를 휩 쓸던 천마교주(天魔敎主) 벽안마희의 남편이요, 천 년 무림사상 최강이라는 육대천마의 일인이 아닌가? 그런데 금악비의 손에서 그의 가공한 마공이 시전되다니 실로 놀 라운 일이었다. 하후성도 내심 크게 놀라고 있었다. '으음. 이 자가 불사지존의 무공을 익혔다니...... 그럼 그 노마 의 제자라도 된단 말인가?' ■ 대소림사 제15장 천하우물(天下尤物) 백화미(白花美) -1 ━━━━━━━━━━━━━━━━━━━━━━━━━━━━━━━━━━━ 상복을 입은 청년, 즉 호불범이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숙부님들, 잠시만 물러나 주십시오." 그의 음성은 여전히 청량하고 차분했다. 세상의 그 어떠한 일도 호불범이라는 청년에게는 놀라운 일이 못되는 것같았다. 그는 마 치 모든 일이 예측 속에 있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공손패와 마운로는 그를 무척이나 믿는 듯 아무말 없이 뒤로 물러 났다. 호불범은 신비한 광채가 감도는 눈으로 하후성과 금악비를 주시하며 침착한 음성으로 말했다. "소생은 만사귀재의 손자로 호불범이라 하오." 그는 창백한 얼굴에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고 계속 말했다. "조부님은 여지껏 한 번도 무림의 일에 관여하신 적이 없소. 뿐만 아니라 강호의 흑백도(黑白道)에 골고루 교분을 맺어 오히려 이 지역의 평화에 크게 공헌을 하셨소. 그런데 그대들이 조부님을 암 습하여 시해하다니 실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오." 호불범의 영준한 얼굴에는 한 가닥 무서운 원한의 기운이 떠올랐 다. 그러나 금악비는 오히려 조소를 지었다. "흠, 결국 호불귀는 죽었다 그 말이군. 그 늙은이가 살아 있다는 소문이 들려 혹시나 해서 왔는데." 호불범의 창백한 얼굴에 살기가 점차 깊어졌다. "조부님은 분명 돌아가셨소. 그리고 소생은 손자된 도리로 복수를 하지 않을 수 없소." 그는 차갑게 덧붙여 말했다. "그대들은 오늘 절대 이곳에서 살아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하후성은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음. 저 청년의 눈빛은 실로 기이하구나. 무공을 익힌 것도 같고 전혀 모르는 것도 같으니.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저 자의 심계(心 計)가 놀라울 만큼 무섭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다 말고 하후성은 문득 자신의 입장이 난처해졌음을 깨달았다. '잘못하면 이 자리에서 오해를 풀지 못하겠구나.' 하후성은 곧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 소생의 말을 들어주시오." 그러나 그가 입을 떼자 즉시 금악비가 야릇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형. 이들에게 더이상 무슨 말을 하겠소? 이렇게 된 이상 계획 대로 제거합시다." 하후성은 어이가 없었다. 그는 금악비의 말 한 마디에 꼼짝없이 그의 동료로 인정되고 만 것이었다. 실로 금악비의 심계는 악독하 기 그지없었다. '무서운 자다.' 그는 절로 가슴이 떨렸다. 이때 호불범이 살기띈 음성으로 다시 말했다. "나는 조부님이 시해당한 후 일부러 그대들을 유인하기 위해 강호 에 소문을 퍼뜨렸다. 그대들로 하여금 조부께서 정말 돌아가셨는 지 의심이 들도록 말이다." 그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번졌다. "결국 그대들은 나의 계책에 걸려 들었다. 나의 천라지망(天羅之 網)은 당신들을 꼼짝없이 옭아맬 것이다." 금악비가 히죽 웃으며 빈정거렸다. "글쎄... 그게 뜻대로 될까?" 호불범은 지체없이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혈의삼십육궁! 연환마궁(連還魔弓)을 발사하시오!" 사방의 휘장을 뚫고 수십 개의 피빛 광채가 퍼부어졌다. 한결같이 궁(弓)의 달인들이랄 수 있는 혈의삼십육궁, 그들의 솜 씨는 정확했고 모두 공력이 일 갑자(一甲子) 이상을 넘었다. 비오듯 쏟아지는 핏빛 화살은 그야말로 연환마궁이었다. 파파팍! 하후성과 금악비는 조금도 태만하지 못하고 양 손을 펼쳐 광선같 은 화살을 떨쳐냈다. 그러나 수십 수백 줄기로 끊임없이 퍼부어지 는 공세를 계속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들은 마침내 화살을 막아내며 자신도 모르게 한 곳으로 몰렸다. 하후성의 눈이 갑자기 반짝 빛났다. '이제 보니 이 연환마궁은 우리를 한 방향으로 유도하고 있구나!' 그의 눈에 금악비가 여전히 입가에 냉소를 머금은 채 연달아 수도 (手刀)로 화살을 쳐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음, 저 자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구나.' 한편 그들이 빈청의 구석에 몰리자 호불범의 낭랑한 외침이 터졌 다. "건위(乾位)에 걸렸다. 천라지망을 쳐라!" 쏴아! 그의 말이 떨어지자 갑작스런 변화가 일었다. 천정에서 방원이 무 려 오 장(五丈)이나 되는 거대한 철그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엇!" 금악비는 경악성을 질렀고 하후성도 고소를 금치 못했다. '잘못하면 그물에 걸린 물고기 신세가 되겠구나.' 그러나 그 순간에도 하후성의 혜지어린 눈은 예리하게 사방을 살 폈다. '좌삼방으로 틈이 보인다.' 그의 신형이 유령같이 날았고 때맞춰 금악비도 그와 함께 신형을 날렸다. 그들이 간발의 차이로 철그물을 벗어나 막 바닥에 발을 디딜 때였다. "좌삼방에 마검정(魔劍井)을 열어라!" "앗!" 하후성과 금악비는 동시에 경악성을 질렀다. 바닥을 내딛던 발밑 이 허전해지며 시커먼 함정으로 쑥 빠져들고 만 것이었다. 너무나 찰나지간이었기 때문에 도저히 피할 도리가 없었다. "호호호호호!" 갑자기 사나이의 간장을 녹일 듯한 교태스런 여인의 웃음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더우기 그 웃음에는 기이한 마력(魔力)이 깃들어 있어 듣는 이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했다. 휙! 한 개의 가늘고 부드러운 채찍 끝이 함정 속으로 뻗더니 교묘하게 움직여 함정 속으로 이미 일 장(一丈) 가량 떨어진 금악비의 손을 휘감았다. "앗!" 금악비는 매우 놀랐으나 그 채찍에 의지해 구사일생으로 허공을 향해 붕 떠올랐다. 쾅! 간발의 차이로 바닥은 원래대로 닫치고 말았다. "으으!" 금악비는 전신에 식은 땀을 흘리며 신형을 안정시켰다. 그는 함정에 빠진 순간 함정 밑에 독이 발라진 날카로운 검이 무 수히 꽂혀져 있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었다. 그곳에 떨어지면 온 몸이 걸레처럼 되고 말 것이 뻔했다. 공손패가 고함을 질렀다. "어떤 계집이 방해를 하느냐?" "호호호! 당신은 무척이나 말이 거칠군요." 어디서 나타났는지 빈청 안에 한 명의 백의여인이 떨어져 내렸는 데 그녀는 실로 월색이 빛을 잃을 정도의 절세미녀였다. 천하의 온갖 미가 오직 그녀의 전신에 뭉쳐있는 것만 같았다. 그 로 인해 공손패는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백의미녀의 폭발적인 미모가 일시지간 그의 가슴을 마구 울렁이게 한 것이었다. "호호호! 금사형, 꼴 좋군요. 그렇게 큰소리치더니 결국 저 아니 면 당할 뻔 했잖아요?" 백의미녀는 주위환경을 둘러보며 마치 제 집인 양 이렇게 말했다. 금악비는 쓴 웃음을 지으며 입맛을 다셨다. "실수였소, 사매. 만약 무공 만으로 했다면 절대 당하지 않았을 거요." 백의미녀는 까르르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큰소리는 여전하군요." 그녀는 주변 인물들을 하나 하나 훑어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이곳에 계시는 영웅대협들께 소녀 백화미(白花美)가 인사드립니 다." 절세의 미색을 지닌 이 백의미녀는 바로 수년 전 단혜령과 함께 소림에 나타나 당시 소림의 승려였던 하후성을 유혹한 요화(妖花) 백화미였다. 천성적으로 무서운 미태를 갖고 있는 그녀로 인해 천안통수 마운 로는 전신에 끓어오르는 무서운 욕정을 느끼고 대경했다. '이럴 수가! 이 계집은 천하의 우물이다. 단지 눈웃음만으로 백 세에 가까운 내가 이렇게 마음이 흔들리다니. 아, 무서운 일이 다!' 그는 즉시 공력을 일으켜 심신을 안정시키며 공손패를 보았다. 그 러나 공손패는 멍청히 굳은 채 충혈된 눈으로 백화미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마운로는 섬뜩하여 외쳤다. "공손형! 정신차리시오!" 외치는 소리에 공손패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간신히 정신을 차리 고는 수치감으로 얼굴을 붉혔다. 그는 욕화를 발산해 버리려는 듯 버럭 고함을 질렀다. "혈의삼십육궁! 저 년놈들에게 연환마궁을 발사해라!" 백화미의 자극적인 교소가 그의 말을 받았다. "호호호! 연환마궁은 이미 쓸모없게 되었어요. 그들이 나를 보고 내 음성을 들은 이상 절대로 쏠 수가 없을 걸요? 벌써 혼(魂)이 빠졌을 테니까. 호호호!" "뭣이?" 공손패와 마운로는 대경했으나 곧 넋을 잃고 말았다. 아닌 게 아니라 휘장 뒤에서 연환마궁을 발사해야 할 혈의삼십육 궁은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고 있었다. 과연 그녀의 말대로그들이 미혹당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백화미의 폭발적인 유혹이 깃든 몸짓과 음성에도 아무런 동요를 받지 않은 자가 한 사람 있었다. 호불범이었다. 그야말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의 심력(心力)이 이 미 섭혼령술이나 미심대법을 극복할 정도로 반석지경(盤石之境)에 이르렀단 말인가? 그의 침착한 태도를 백화미도 보았다. 그 바람에 그녀의 안색이 오히려 미미하게 흔들릴 정도였다. 이때 금악비가 음침한 어조로 말했다. "호불범, 이제 네 놈에게 방금 당한 것을 갚아주겠다." 그가 전혀 아무런 동작도 취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번쩍 하는 금빛이 호불범의 이마로 날아들었다. "금마비(金魔匕)!" 호불범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나 그가 피하기에 금마비는 너무 도 빨랐다. 중인들은 모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그들은 호불범이 피를 뿌리며 쓰러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챙! 하는 날카로운 금속성이 울리며 금마비는 무엇엔가 방해받은듯 방 향이 비뚤어져 빗나가더니 한 쪽 기둥에 가 박혀 버렸다. "어떤 놈이냐?" 금악비는 안색이 대변해 외쳤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호불범의 입 가에는 회심의 미소가 어렸다. "진인(眞人), 들어 오십시오." 그의 음성이 떨어지자 즉시 밖에서 낭랑하고 부드러운 도호소리가 울려퍼졌다. "무량수불." 중인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가운데 빈청 안으로 한 명의 도인(道 人)이 걸어 들어왔다. 그는 약 삼십 세 정도 된 젊고 청수한 용모 의 도사로 손에는 푸른 색 불진을 들고 있었으며 두 눈은 맑기가 수정(水晶)과 같았다. 조용히 걸어오는 젊은 도인의 전신에서는 기이할 정도의 현기(玄 機)가 어려 있었다. 그를 보자 백화미의 아름다운 눈은 반짝 빛났 으며 반면 금악비는 섬뜩한 살기를 뿜었다. 금악비가 거칠게 물었다. "너는 누구냐?" 젊은 도인은 부드럽고 담담히 말했다. "무량수불... 소도(少道)는 무당(武當)의 청수(靑水)라 합니다." "무당(武當)!" 금악비와 백화미는 물론 공손패와 마운로마저 안색이 변했다. '이십 년 동안 한 번도 무림에 제자를 내보내지 않았던 무당에서 사람이 나오다니!' 그것은 그들 모두의 공통된 놀라움이었다. 실상 구파일방(九派一 幇)은 수십 년래 이름만 걸려 있을 뿐 거의 활동을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중인들은 갑자기 나타난 무당의 젊은 도인에 대해 경이로움을 금 치 못했다. 단지 한 사람, 호불범 만은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 다. 바로 그가 무당 도인을 초청한 장본인이기 때문이었다. 금악비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안색이 변하여 물었다. "그대가 청수(靑水)라면, 그럼 무당오행자(武當五行子) 중의 막내 인 청수자(靑水子)란 말이냐?" 도인은 담담히 미소지었다. "그렇소이다." 금악비의 안색이 굳어졌다. 무당오행자(武當五行子). 그들은 현 무당파의 중심인물로 장문인인 을목자(乙木子)를 위시 하여 무토자(戊土子), 천금자(天金子), 화룡자(火龍子), 그리고 막내인 청수자(靑水子)까지를 이르는 것이었다. 첫째인 을목자는 이미 백 세가 가까웠으나 막내인 청수자는 불과 삼십(三十), 그러나 무당오행자의 무공은 나이와 상관없이 하나같 이 통천지경으로 알려져 있었다. 단지 그들은 이십 년래 활동을 중지했으므로 그 실력이 외부로 드 러나지 않았을 뿐이었다. 금악비는 청수자를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으음. 소문에 듣기로 무당의 오행자는 모두가 무공이 신(神)의 경지이며 특히 청수자는 무당의 정종무학(正宗武學)을 완벽하게 터득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청수자가 이곳에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는 즉시 시선을 돌려 호불범을 응시했다. 그러나 호불범은 벌써 그의 생각을 알았는지 입가에 싸늘한 조소를 머금은 채 그를 마주 응시하고 있었다. 금악비는 가슴 한 쪽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무서운 놈!' 한편, 장내의 분위기는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혈의마검 공손패는 여전히 살기띈 표정이었고, 천안통수 마운로는 노안 가득히 침중함을 담은 채 금악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만 기이한 것은 백화미의 태도로써 청수자가 나타난 이후에도 그녀는 여전히 뇌쇄적인 미소를 머금고 서 있었다. 호불범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차갑게 입을 떼었다. "조부님의 사후(死後) 나는 그대들을 한 명도 살려두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 첫 번째로 이곳에서 너희들을 제거하겠다." 금악비가 음침하게 웃었다. "후후후! 너희 네 명의 힘으로 우리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느 냐?" 그의 눈 깊숙한 곳에서 한 줄기 녹광(綠光)이 스쳤다. "삼 세(三歲)때 무공수련을 시작하여 이십여 년 간 외길 만을 걸 어온 나다. 무당의 오행자가 아무리 뛰어나고 공손패의 마검이 제 아무리 빠르다 해도 나를 꺾지는 못한다." 혈의마검 공손패가 나직히 웃었다. "흐흐흐! 금가 놈, 아까는 노부가 네 놈을 너무 얕봐서 당했다. 나 혈의마검이 그렇게 호락호락할 줄 안다면 큰 오산이다." 뱀처럼 축 늘어져 있던 그의 혈검(血劍)이 독오른 독사처럼 곤두 섰다. "혈영생사절유검(血影生死絶有劍)이 어떤 것인지 똑똑히 보여주 마."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신형이 마치 붉은 구름처럼 허공으로 솟구쳤고 동시에 그의 혈검이 가공할 피의 회오리를 일으키며 금 악비의 전신 요혈을 노리고 덮쳐갔다. 파파팟! 파... 파... 팍! 무서운 혈광이 죽음의 냄새를 뿌리자 금악비의 눈꼬리가 순간적으 로 파르르 떨렸다. '과연 사도(邪道)의 거마(巨魔)답다.' 그러나 어느새 그의 쌍수는 십 자로 교차되어 있었으며 그의 양 발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좌우로 움직였다. 그는 덮쳐오는 혈검의 검기 속을 파고 들며 쌍수를 수평으로 뻗었 다. 슈... 슈슉! 귀를 찢는 듯한 날카로운 파공성이 중인들의 고막을 강타했다. 금 악비의 장법을 보고 있던 천안통수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저 장법은?" 청수자의 고요하던 얼굴에 어둠이 스쳤다. "무량수불.... 불사지존의 독문장법인 십자강살장(十字 殺掌) 입 니다. 완전히 사라진 것으로 알려진 저 장법이 다시 나타나다니." 청수자는 힐끗 호불범을 응시했다. 그러나 호불범은 여전히 무심 한 표정으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싸움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 양 높은 청수자마저도 호불범의 그런 모습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 었다. 그는 다시 시선을 싸우고 있는 두 사람에게로 돌렸다. 금악비와 공손패는 실로 무시무시한 대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공 손패의 혈영생사절유검은 섬전같이 빠르고 잔인무도한 반면 금악 비의 십자강살장은 극히 패도적이고 웅혼했다. 파파팟! 파.팍! 귀청을 찢는 날카롭고 험악한 파공성이 혼백을 달아나게 했다. 그 것을 본 천안통수 마운로는 침통하게 말했다. "실로 놀라운 일이오, 공손형의 혈영생사절유검은 강호일절로써 평생 무패(無敗)를 자랑했는데 한낱 젊은이와 평수를 이루다니." 그 사이 금악비의 입가에 야릇한 살기가 어리는가 싶더니 그의 장 법이 변화를 일으켰다. 그의 양 손이 순식간에 녹색으로 변하며 녹색기류를 뻗었다. 마운 로는 대경하여 외쳤다. "단혼녹혈수(斷魂綠血手)! 공손형, 위험하오! 정면으로 부딪치지 마시오!" 그러나 이미 때는 늦고 말았다. 파파파팟! 펑! "으윽!" 녹색 장력은 혈광 속을 곧장 꿰뚫고 들어갔다. 공손패는 처절한 비명을 발하며 뒤로 오 보나 연달아 후퇴했다. 그의 안색은 순식 간에 핼쑥해졌으며 입가에는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금악비의 얼굴에 잔혹한 미소가 번졌다. "흐흐흐... 아주 죽여주마!" 번쩍! 그의 소매 속에서 금마비가 뻗었다, 신형을 미처 바로 잡지도 못 한 공손패는 금마비가 미간으로 파고 들자 눈을 감고 말았다. 실로 절대절명(絶對絶命)의 위기였다. "무량수불... 손속이 지나치시오." 낭랑한 불호와 함께 한 인영이 유령처럼 공손패의 앞을 막았다. 쨍! 금마비는 아슬아슬하게 무엇엔가 부딪쳐 날아갔다 그곳에는 청수 자가 불진을 흔들며 우뚝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금악비의 안색이 살기를 띄며 외쳤다. "청수자! 무당의 알량한 힘을 믿고 나서느냐?" 그러나 청수자의 표정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빈도는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공손패가 처절하게 외치며 나섰다. "청수자, 비켜나게! 노부가 동귀어진하는 한이 있어도 저 어린 놈 을 죽여버리겠다!" 그의 안면에는 비장한 살기가 어려 있었다. 그는 처음으로 남에게 패했으며 그 치욕은 정녕 그에게 엄청나게 타격을 준 것이었다. 이제껏 담담히 사태를 주 쳬構 있던 호불범이 나섰다. "공손숙부님, 잠깐만!" 그러나 공손패는 거칠게 말했다. "불범, 나를 말리지 말게!" 호불범은 여전히 침착했다. "숙부님, 이것은 감정 만 갖고 해결할 일이 아닙니다. 이 조카에 게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공손패는 얼굴이 일그러졌으나 간신히 노화를 참고 물러났다. 이 때 이제껏 가만히 있던 백화미가 갑자기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호......!" 그 웃음소리에 중인들은 또 한바탕 기혈이 뜨거워지며 마음이 흔 들리는 것을 느꼈다. 다만 단 두 사람, 즉 청수자와 호불범 만이 예외일 뿐이었다. 백화미는 웃음을 뚝 그치더니 교태로운 음성으로 물었다. "당신의 이름이 호불범인가요?" "그렇소." 호불범의 대답은 여전히 침착했다. 백화미는 큰 눈에 마력적인 광 채를 발산하며 말했다. "확실히 만사귀재의 손자답게 당신의 계략은 놀랍군요. 그러나 당 신도 미처 생각치 못했을 거예요." 호불범의 얼굴에는 기이한 빛이 떠올랐고 백화미는 주위를 둘러보 며 말했다. "이 만경루의 힘이 약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 수라궁(修羅宮)에 비 교하면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에요." 호불범을 제외한 모든 인물의 안색이 변했다. "수라궁, 역시 수라궁의 짓이었구나!" 공손패가 참지 못한 듯 분노성을 터뜨렸으나 호불범은 역시 짐작 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백화미는 날씬한 교구를 묘하게 돌리며 금악비를 향했다. 그녀는 사소한 동작일지라도 미묘한 충동과 유혹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금사형, 제가 수라궁에서 올 때 어떤 인물들을 데려 왔는지 아세 요?" 금악비는 흠칫하더니 곧 눈빛을 빛냈다. "금, 은, 동, 철 중에서 말이오?" "그래요." 금악비는 기쁜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철마수(鐵魔手)? 아니면 동마수(銅魔手)?" 백화미는 꽃같은 얼굴을 저으며 웃었다. "호호호...! 아니에요, 틀렸어요. 소매는 은마수(銀魔手)를 데려 왔어요." 금악비의 안색이 변했다. "은마십이수(銀魔十二手)를?" "그래요." 금악비는 음침하게 웃었다. "흐흐흐.... 그럼 싸움은 끝난 셈이군." 백화미도 교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론이에요." 그녀는 밖을 향해 꾀꼬리같은 음성으로 외쳤다. "은마십이수, 모습을 보여라!" 중인들은 모두 안색이 변해 밖을 주시했으나 호불범 만은 여전히 태연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밖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들려오지 않 았다 백화미의 안색은 그만 동요되고 말았다. 그녀는 재차 외쳤다. "은마십이수!" 호불범이 담담히 그녀를 향해 말했다. "낭자가 부르는 그들은 이곳에 없소. 그들은 이미 남창으로 오기 전에 제지되었소이다." "뭐라고요?" 백화미의 고운 얼굴이 일그러졌다. 백화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은마십이수는 절정고수예요, 그런데 천하에 누가 그들을 제지시 킨단 말인가요? 거짓말 말아요!" "아미타불.... 자만은 곧 패배를 의미하는 법, 천하에 절대란 있 을 수 없는 법이외다." 느닷없이 들려온 불호소리에 백화미는 안색이 대변했다. "누구냐?" 백화미는 앙칼지게 외쳤다. 그러자 빈청 안으로 세 명이 올라서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회의가사를 입은 중들로, 가운데 중은 이제 이십 오 륙 세의 청수하고 눈빛이 고요한 젊은 승려였다. 놀랍게도 그는 바로 소림의 정혜(丁慧)였다. 그의 양 옆에는 두 명의 중년승려가 대동해 있었는데 그들 또한 눈빛이 모두 물처럼 고요했다. 백화미는 요염한 눈에 경악을 담으며 물었다. "그대들은?" 정혜는 합장불호했다. "아미타불.... 소승은 소림에서 왔습니다." "소림(少林)!" 이미 백 년 전(百年前) 마애천불(魔涯天佛) 천뢰선사가 소림으로 들어간 이후 줄곧 두문불출했던 소림이었다. 그런데 이 자리에 백 년의 침묵을 깨고 소림사의 승려가 나타난 것은 실로 뜻밖의 일이었다. 백화미의 고운 얼굴이 변화를 일으켰다. 무당에 이은 소림의 출현 은 정녕 놀라운 변수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대들이 은마십이수를 제지했단 말인가요?" 정혜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림십팔나한(少林十八羅漢)이 그들을 막았소이다." "십팔나한!" 백화미가 대경하는 사이 정혜는 고개를 숙였다. "소승은 십팔나한 중 한 명인 정혜라 합니다." 뒤이어 두 명의 중년승려도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빈승은 정운(丁雲)이오이다." "빈승은 정료(丁了)이오이다." 백화미와 금악비의 안색은 점차 변했다. '백 년 동안 나타나지 않았던 소림사 십팔나한이 나타나다니!' 호불범은 세 소림사 승려의 출현에 줄곧 신비한 미소를 머금고 있 었다. 그러나 그 미소 속에 이미 계산된 무서운 살기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금악비는 정혜 등을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오늘은 완전히 실패다. 저 세 중놈이 이곳에 나타난 것으로 보아 나머지 십팔나한도 분명 이 근처에 있을 것이 틀림없 다.' 금악비의 눈에 흉광이 어리더니 한 쪽에서 태연하게 서 있는 호불 범을 노려보았다. '모든 것이 다 저 놈 때문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저 놈 만은 절 대 살려둘 수 없다.' 금악비는 신형을 날리며 번개같이 우장을 휘둘렀다. 그것은 불사 지존의 절기인 와선장(渦旋掌)이었다. 우르르... 릉! 소용돌이의 장력이 순식간에 호불범을 휩쓸어갔다. 뜻밖의 급공이 었으나 호불범은 여전히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아미타불." 낭랑한 불호와 함께 회색 인영이 호불범을 막아서는가 싶더니 그 로부터 금광(金光)이 번쩍 일었다. 꽝... 꽈르릉! 엄청난 폭음이 일어났다. "윽!" 금악비는 두 팔이 시큰함을 느끼며 다급히 뒤로 두 걸음 물러났 다. 그를 막은 자는 바로 정혜로써, 정혜는 한 걸음 물러나며 담 담히 미소짓고 있었다. 금악비는 그만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럴 수가? 십팔나한 중 한 놈이 나와 평수라니.' 금악비는 정혜의 정순한 내공과 놀라운 무공에 일단 크게 놀랐으 나 정작 모르는 게 있었다. 사실상 십팔나한이 강하기는 했지만 그 중에서도 정혜의 무공이 가장 강했던 것이다. 정혜는 소림의 차기 장문인으로 내정되어 있으며 동시에 범천승 (梵天僧)에도 들어 있는 소림 제일의 기재(奇才)가 아닌가? 그는 정(丁)자 항렬에서는 가장 강한 고수였다. 더구나 방금 정혜가 전개한 금광이 일어나는 무공은 바로 금강복 호신권(金剛伏虎神拳)으로, 강호의 허수(虛手)가 아닌 소림진학 (少林眞學)이었다. 금악비는 마침내 마음을 달리 먹었다. '분하지만 오늘은 불리하다. 이대로 물러서는 것이 상책이구나.' 호불범은 그의 생각을 눈치챈 듯 기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금악비, 네 마음대로 쉽사리 물러갈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 생각은 버려야 한다." 금악비는 안색이 홱 변했다. '대체 저 놈의 머리는 어떻게 생겨 먹었길래 남이 생각하는 것까 지 모두 알아낸단 말인가?' 그는 점차 호불범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이번에는 백화 미가 교소를 터뜨리며 그에게 말했다. "호호호호...! 금사형. 우리가 이곳에 온 목적은 호불귀의 죽음을 확인하려는 것이 아닌가요?" 금악비는 흠칫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사매." "그럼 그의 죽음이 확실한 이상 이곳에 더 있을 필요가 없겠군 요?" "그렇소." 그러나 백화미의 안색에 갑자기 요기(妖氣)가 어렸다. "흥! 그러나 소매는 이대로 물러나고 싶지가 않아요." 그녀는 주위의 인물들을 둘러보더니 야릇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이곳에는 일류고수들이 많아요. 소매는 이들을 상대로 한 가지 시험을 하고자 해요." "시험이라니, 무슨?" 금악비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 백화미의 아름답기 짝이 없는 얼굴에는 살인적(殺人的)일 만큼 유혹이 충만한 웃음기 가 떠올랐다. "호호호호호호......!" 사요(邪妖)한 교소성이 그 뒤를 이었다. 그녀는 교구를 미묘하게 흔들며 웃음을 흘려내고 있었다. 그 웃음 소리에 가장 먼저 정신이 아찔해진 것은 공손패였다. 그는 심혼을 자극하는 웃음이 들리는 순간 단전에서 불같은 욕망 이 일어남과 동시에 묘한 색정(色情)이 발동되는 것을 느꼈다. 천안통수 마운로도 마찬가지로 그의 얼굴에 난 긴 수염이 내심의 충동으로 부들부들 떨렸다. "호호호......!" 백화미의 뇌쇄적인 웃음은 계속되었다. 심지어는 그녀의 동문(同 門)인 금악비조차도 굳어진 채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고 있었 다. "호호호......!" 백화미의 웃음이 점차 더 열기를 띄워가자 정혜는 침중하게 불호 를 외우며 외쳤다. "아미타불...! 여시주, 마소(魔笑)를 거두시오!" 그러나 백화미가 그의 말을 들을 리 없었다. 마기(魔氣)가 깃든 교소를 울려내는 가운데 점차 그녀의 몸에서는 가공할 색기(色氣) 가 넘쳐 흘렀다. 청수자(靑水子), 즉 무당오행자의 막내인 그도 점차 안색이 창백 해졌다. 그는 급히 두 눈을 감고 무당 정종심법(正宗心法)인 태청 신공(太淸神功)을 운공해 심력을 보존했다. 반면 이제 공손패와 마운로는 얼굴이 시뻘겋게 상기된 채 극심한 갈등을 노출시키고 있었다. 그들은 내공으로 치자면 결코 청수자보다 하수(下手)가 아니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도가(道家)의 정종심법을 익혀온 청수자보다는 아무래도 심력에서 한 수 밀릴 수밖에 없었다. 정혜(丁慧). 그도 점차 마음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으음." 옆에서 신음이 들려 돌아보니 정운과 정료가 바닥에 정좌한 채 안 색이 핏빛이 되어 유혹과 처절하게 싸우고 있는 것이 보였다. "호호호호호호......!" 백화미의 웃음소리는 점점 더 높아졌다. 마침내 정혜조차도 뜨거 운 본능의 욕망이 단전 밑으로부터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끼며 소 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안 된다. 여기서 무너진다면 소림의 명예에 먹칠을 하게 된다!' 정혜는 이를 악물며 달마선공(達磨禪功)을 일으켰다. 곧 그의 얼 굴은 차분히 가라앉았다. 백화미는 여전히 웃음을 흘리면서도 만면에 득의한 기색을 지었 다. 그러나 저으기 만족스러운 시선으로 빈청 안을 둘러 보던 그 녀는 단지 한 사람의 얼굴을 대하는 순간 경악하고 말았다. '저럴 수가?' 호불범이었다. 유일하게 그 만은 그녀의 마소에 추호도 동요되지 않은 채 냉담하 고 예리한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는 것이 아닌가? 백화미는 가슴이 섬뜩해졌다. '나의 섭혼마소공(攝魂魔笑功)에도 넘어가지 않다니, 대체 저 자 의 심력(心力)은 어느 정도란 말인가?' 백화미의 뇌리에 몇 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소림사의 태실봉(太 室峯) 승불폭(僧佛瀑)에서 만난 젊은 중. '현수(玄修)라고 했지. 그 중도 나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 런데 저 자는 그보다 더하니... 천하에 저렇게 정력(定力)이 센 자가 있을 줄이야!' 백화미는 오기를 느꼈다. '어디 누가 이기나 보자!' 그녀는 당장 섭혼마소공을 중지하고 더욱더 무서운 미공(迷功)을 전개했다. 곧 그녀의 육감적인 ㅂ은 입술에서 웃음 대신 짜릿짜릿한 음가(淫 歌)가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방중술(房中術) 중 정사(情事) 도중 에 여인이 부르는 희열과 쾌락에 가득찬 노래였다. 그리고 희대의 요녀 백화미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몸을 빙그르르 돌린 순간 한 줌밖에 안 되는 세류요의 허리에서 백색 띠가 풀어졌다. 눈같이 흰 비단옷이 서서히 아래로 흘러내리 고 있었다. "으으... 음." 장내 곳곳에서 온통 흥분에 찬 신음이 터졌다. 마침내 백화미는 백의를 벗어버렸다. 그 안에는 속이 환히 내비치 는 거의 투명한 망사의(網絲衣)를 입고 있어 그녀의 폭발적인 색 정을 유발하는 육체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났다. 백옥같은 피부, 터질 듯 솟아오른 젖가슴과 은은히 돌기된 분홍빛 유두(乳頭), 동그란 아랫배의 선(線)....... 그리고 아랫배의 기름진 경사 밑에 대리석같은 두 다리, 그 출발 하는 지점의 삼림(森林)이 우거진 비역(秘域)까지 중인들의 눈에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백화미의 육체는 중인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고 말았다. 망사의가 날릴 때마다 현란한 허벅지가 드러나 중인들의 피를 끓게 했다. 백화미는 계속 탕기어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빈청을 맴돌았 다. ■ 대소림사 제16장 호불범(胡不凡)의 운명(運命) -1 ━━━━━━━━━━━━━━━━━━━━━━━━━━━━━━━━━━━ 정혜(丁慧)는 감았던 눈을 떴다. 그리고 그의 안색은 크게 변했다. 빈청 안에는 그야말로 상상도 못할 광경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제 나타났는지 삼십육 명의 혈의장한, 즉 혈의삼십육궁(血衣三 十六弓)이 휘장을 찢고 두 눈이 충혈된 채 망사의를 날리며 춤추 는 백화미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광포한 욕정으로 이글거리는 그들의 눈은 백화미의 육체 구석구석 을 핥듯이 노려보았다. 그들은 입가에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목불인견으로, 그것은 천안통수 마운로도 예외는 아니었 다. 다만 그들과 다른 게 있다면 그의 입가에 유독 선혈이 낭자했는데 이는 그가 정신력의 한계를 넘어선 욕정을 다스리기 위해 스스로 혀를 깨문 탓이었다. 공손패와 금악비 역시 마찬가지였다. 심지어는 심력이 초인적인 호불범조차도 안색이 백지장같이 창백한 채 두 눈이 찢어질듯 부 릅떠져 있었다. 그래도 중인들 중에서 사정이 조금 나은 것은 역시 호불범과 청수 자, 그리고 정운, 정료였다. 그러나 그들도 이미 인내력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정혜는 내심 절망적으로 부르짖었다. '아아... 이대로 가면 끝장이다. 부처님이시여!' 그런데 이때 불현듯 정혜의 귓전을 가늘게 파고 드는 전음술이 있 었다. (정혜, 범자대비공(梵慈大悲功)을 끌어올려 천룡선창(天龍禪唱)을 울리시오. 저 여인이 사용하는 것은 이백 년 전 육대천마의 천마 무(天魔舞)와 섭혼요마음(攝魂妖魔音)이오.) 정혜의 머리 속에 번개처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소사숙!' 그의 심신이 크게 진동했다. 전음의 임자는 바로 그의 소사숙이었 던 현수(玄修), 즉 하후성의 음성이 아니던가? '소사숙이 여기 계시다니! 아미타불... 천운(天運)이다.' 마치 사막에서 비를 만난 듯한 심정이 된 정혜는 내면 깊은 곳에 서 커다란 용기가 우러나는 것을 느끼며 즉시 하후성이 시키는 대 로 범자대비공을 운공했다. 그는 드디어 두 손을 합장한 채 경문(經文)을 외우며 천룡선창을 불렀다. 순간 천하의 요녀 백화미는 심후하고 광명정대한 천룡선창이 들려 오자 그만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곧 그녀도 섭혼요마음 을 극성으로 끌어올려 더욱더 뜨겁고 자극적인 탕가를 불렀다. 그녀는 내심 이를 갈고 있었다. '저 젊은 중놈은 보통이 아니구나! 과연 소림은 상상도 할 수 없 이 무서운 곳이다.' 천룡선창과 섭혼요마음의 대결, 이것은 실로 극과 극의 부딪침이 었다. 그러나 백화미는 섭혼요마음에서 만족하지 않고 천마무(天 魔舞)의 다음 단계를 시전했다. 그녀의 가슴에서 망사의가 흘러내리며 백옥같이 희고 탐스러운 풍 만한 두 육봉이 그대로 드러났다. '천마살염무(天魔殺艶舞)에서도 안 된다면.' 아찔한 광경이었다. 천하우물(天下尤物)인 요녀 백화미의 젖가슴은 수만 명 사내들의 혼백을 녹이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녀의 육봉이 드러나자 제일 먼저 혈의삼십육궁이 타오르는 욕화 를 다스리지 못하고 칠 공(七孔)에서 피를 쏟으며 거꾸러지기 시 작했다. "으악!" 차례로 혈의삼십육궁은 전신혈맥이 터져 쓰러져 갔다. 그녀의 귓 전에 한 줄기 담담하고도 조용한 음성이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 다. "백소저, 그만 두시오." 백화미의 뇌쇄적인 몸이 얼어붙은 듯 굳었다. 그녀의 두 눈은 경 악으로 크게 떠지고 있었다. '이, 이 음성은... 이... 음성은!' 휘익! 혼란으로 치닫는 그녀의 눈 앞에 떨어져 내리는 한 백영, 그는 바 로 선풍옥골과 같은 모습의 하후성이었다. 그는 얼마 전 분명 마검정(魔劍井)에 빠졌다. 그런데 어찌 다시 중인들 앞에 그것도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실상 하후성 놀라운 혜지는 이미 좌삼방(左三方)에 함정이 도사 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바닥에 떨어지자마 자 불문최고의 신법인 천불현현보(千佛玄玄步)를 펼쳤다. 천불현현보가 극성으로 펼쳐지면 실상(實像)은 사라지고 허상(虛 像)만 남게 되므로 함정으로 떨어진 것은 그의 허상에 불과했다. 하후성은 이미 연기처럼 날아 천정에 붙어버린 것이었다. 다만 그의 동작이 너무도 빨라 아무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을 뿐 하후성은 이후로 줄곧 천정의 대들보 위에서 장내의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다, 당신은?" 백화미는 안색이 창백해진 채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경악성을 발 했다. "백소저, 오랫만이오." 하후성은 담담히 인사했다. 백화미는 멍하니 긴 머리를 등 뒤로 묶어내린 영준한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현수(玄修)... 환, 환속했군요." 하후성은 담담히 웃었다. "그렇소이다." 백화미는 갑자기 양 손으로 자신의 노출된 젖가슴을 가렸다. 웬지 수치심이 밀려들어 하후성에게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하후성은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나 백화미는 서둘러 바닥 에 떨어진 옷을 걸쳐 입었다. 어느새 탕기가 흐르던 요녀였던 그녀의 얼굴은 차분하게 변하고 있었다. 그것은 조금 전과는 전혀 달라보이는 모습으로 완전히 옷 을 입고 돌아선 백화미의 자태는 순식간에 청초하고 유약하며 순 결한 소녀의 모습으로 화해 있었다. 백화미는 폭포수같은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생긋 미소지었다. "당신이 나타나다니 정말 뜻밖이에요." 청아한 음성이었다. 하후성은 담담히 대꾸했다. "소저가 수라궁의 인물이라니 소생 역시 뜻밖이요." 백화미는 아름답고 현숙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그래도 아직 중의 때를 벗지 못한 것같군요." 말하는 도중 그녀는 힐끗 금악비를 응시했는데 그는 여전히 바닥 에 정좌한 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백화미는 다시 하후성을 향했다. "현수, 당신의 속명(俗名)은 어떻게 되나요?" 하후성은 침묵했다. "풋! 물어본 내가 바보같군요." 백화미는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자신이 하후성 앞에서는 한없이 초라해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백화미는 과거 현수를 유 혹했다가 성사(成事) 직전 실패한 광경을 떠올렸다. 그때 그녀는 현수의 뒷모습에서 무엇을 느꼈던가? '산(山)! 그래 산이었어.' 백화미는 내심 처량하게 부르짖으며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금악비를 옆구리에 끼더니 말했다. "계속 현수라고 부르죠. 현수, 앞으로는 당신과 내가 만나지 않았 으면 좋겠어요." 백화미의 말에 하후성은 웬지 가슴이 뭉클해짐을 느꼈다. 유약해 진 그녀의 모습은 그의 마음을 약하게 하고 있었다. "그럼... 현수!" 백화미는 몸을 날렸다. 그녀의 모습은 금새 빈청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하후성은 결국 한 마디도 못했으나 내심 탄식하고 있었다. '기이한 여인이다. 음탕함과 청순함을 한 몸에 타고 났다니 진정 요녀(妖女)인지 성녀(聖女)인지 모르겠구나.' 비로소 주위에서 중인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공손패 가 벌떡 일어나며 분노성을 터뜨렸다. "요녀! 어디로 갔느냐?" 그는 사방을 둘러보다 하후성을 발견하고는 대경했다. "아, 아니! 네 놈이 어떻게 마검정에서 나왔느냐?" 득달같이 앞으로 나서며 그는 수중의 혈검을 펼쳤다. "이 놈! 그 계집과 네 한 패는 어디 갔느냐?" 하후성은 쓴 웃음을 지으며 담담히 말했다. "그들은 갔소이다." "갔다고?" 공손패는 어리둥절하다기 곧 이를 부드득 갈며 외쳤다. "그렇다면 네 놈이라도 잡아 그들을 대신하겠다." 공손패는 말을 마치자마자 혈검을 날렸다. 그때 정혜의 불호가 그 를 막았다. "아미타불.... 손속을 거두십시오, 시주." 정혜의 소매가 펄럭이자 웅후한 경기가 혈검을 막았다. 펑! 하는 폭음이 일어났다. "아니?" 공손패는 대경한 채 어깨를 다급히 흔들며 두 걸음 밀려났다. "당신들이 감히?" 그는 소림을 두려워한 적도 그렇다고 무시한 적도 없었다. 다만 타고난 성격 때문에 그는 노성을 터뜨렸다. "소화상! 왜 가로 막는 것이오? 저 놈은 수라궁과 한 패가 아니 오?" 정혜는 공손히 합장불호했다. "아미타불.... 노시주께서는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십니다." "오해라니? 노부는 확신하오!" 정혜는 엄숙히 말했다. "아미타불.... 노시주께선 저 분과 우리의 관계를 아십니까?" 공손패는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 분은 바로 소승의 사숙입니다." "뭣?" 정혜의 말에 중인들은 모두 대경하고 말았다. 심지어는 침착하기 그지없던 호불범마저도 안색이 변했다. 공손패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반문했다. "사, 사숙이라고?" 정혜는 여전히 엄숙히 말했다. "그렇습니다." 중인들은 모두 넋을 잃고 말았다. 도대체 그들의 상식으로서는 이 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었다. 어찌 정혜보다도 어린 자가 사숙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이 아연해 하자 정혜는 하후성에 대해 설명했다. 그가 소림 삼성승이 마지막으로 거둔 제자임을 밝히는 한편 수개 월 전 파계(破戒)한 것까지 감추지 않았다. 하후성은 정혜가 말을 마치자 쓴 웃음을 지으며 자신이 처음 만경 루의 주루에서 처음 금악비를 만난 일, 그리고 그와 함께 만사각 에 조문오게 된 일 등을 털어 놓았다. 그제서야 중인들은 비로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결과적으로 자신들이 커다란 오해를 했음을 알고 그들은 하후성에게 사과했 다. 청수자가 두 눈에 이채를 띄며 나섰다. "무량수불.... 혹시 시주의 성함은 하후성이 아니신지요?" 하후성은 담담히 시인했다. "그렇습니다." 그러자 천안통수 마운로가 놀라 외쳤다. "환영신룡(幻影神龍) 하후성!" 그 말에 중인들은 모두 안색이 크게 변했다. 환영신룡 하후성이라면 근래 들어 엄청난 명성을 떨치는 신비의 청년고수로 알려져 있었다. 북방(北方)으로부터 무위를 크게 떨쳤 을 뿐만 아니라 천풍보(天風堡)에서 수라궁의 사자(使者)들을 격 퇴시킴으로써 크게 주목을 받은 환영신룡 하후성. 그의 이름은 무 림천하를 진동시킨 지 오래였다. 중인들은 모두 놀라움에 찬 눈으로 하후성을 바라보았다. 오직 정 혜와 정운, 정료만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은 소림사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강호의 소식을 거의 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 칸의 조용한 정실(淨室). 방 안에는 여섯 명의 인물이 탁자에 둘러앉아 있었다. 하후성을 비롯하여 이제는 만경루의 주인이 된 호불범, 혈의마검 공손패, 천안통수 마운로, 무당의 청수자, 마지막으로 소림의 정 혜였다. 좌중의 분위기는 침중했다. 하후성이 줄곧 담담한 음성으로 얘기 하고 있었다. 그는 남창으로 오는 도중 옥면가람 남궁수를 만난 일부터 이곳까 지 오게 된 일, 그리고 수라궁의 음모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차분 히 얘기하고 있었다. 그의 말은 조금도 막힘없이 마치 물흐르듯 유창한 언변이었다. 뿐 만 아니라 조리있고 논리가 정연했다. 중인들은 모두 숙연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특히 하후성이 최근 에 벌어진 의문의 연속 살인사건에 대해 언급하자 모두 안색이 대 변했다. "결국 칠인(七人)의 모사지인(謀師智人)들을 시해한 흉수는 수라 궁으로 밝혀졌소이다. 그로 미루어 수라궁주는 실로 무서운 계략 (計略)을 지닌 인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후성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병법(兵法)에, 적을 이기려면 장수를 베라고 했듯이, 그 자는 전 중원의 모사들을 제거함으로써 머리(首)를 끊어버린 것입니다. 실 로 수라궁주의 지계나 흉심은 상상도 할 수 없이 높고 악랄한 수 준입니다." 하후성의 계속되는 말에 중인들은 더욱더 안색이 무거워졌다. 그 러나 호불범 만은 이미 짐작했다는 듯 두 눈을 스르르 감고 있었 다. 공손패는 이를 부드득 갈며 주먹을 움켜쥐더니 탁자를 내려치며 말했다. "앞으로 수라궁의 개파대전은 십 일(十日)밖에 남지 않았소. 반드 시 그곳으로 가서 수라궁주가 어떤 놈인지 똑똑히 봐야겠소!" 하후성은 담담히 말했다. "하지만 수라궁주는 보통 인물이 아닙니다. 이번 개파대전도 어쩌 면 그가 꾸민 무서운 함정일지도 모릅니다." 그 말에 호불범이 눈을 뜨며 냉소를 날렸다. "흥! 물론 그 자가 이번 기회를 그냥 지나칠 리가 없겠지요. 그러 나 예로부터 호랑이를 잡으려면 굴로 들어가야만 한다는 말이 있 습니다. 놈들이 함정을 파놓았다면 소생은 오히려 그것을 역이용 하여 반드시 조부님의 복수를 하고야 말 것입니다." 호불범은 하후성을 응시하며 물었다. "하후형도 수라궁에 가실 생각이십니까?" 하후성은 침중한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청수자가 말 했다. "빈도의 장무사형께서는 이미 빈도와 화룡자(火龍子) 사형을 수라 궁으로 파견했습니다." 하후성은 정혜에게 물었다. "소림에서는 어떻게 대처할 것이오? 정혜." 정혜는 공손히 대답했다. "이미 장문인의 명으로 현광(玄光) 사숙님과 십팔나한이 출동했습 니다." "현광사형께서?" 현광대사는 바로 소림 선좌원(禪座院)의 원주로서 현(玄)자 항렬 중에서 내공(內功) 면과 수양에서 가장 심오한 고수였다. 또한 그 는 침착하고 지혜가 충만했다. 하후성은 짧은 순간 여러 가지를 생각했다. 그의 입에서는 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미 도화선에 불은 붙었다. 그러나 무림인들은 이 일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고 있다. 이번 수라궁의 개파대전에서 자칫하면 중 원무림의 태반이 무너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 그것은 예측할 수 없는 일이다.' 하후성의 가슴은 점차 무거워져 가고 있었다. 만사각(萬事閣)의 한 방 안. 그곳은 과거 만사귀재 호불귀가 쓰던 거실이었다. 태사의. 무척 낡은 의자였으나 품격 높아 보이는 태사의는 과거 호불귀가 늘상 이용하던 물건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주인은 호불 범이었다. 그는 태사의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맞은 편 서탁 위에서 조용히 타오르는 촛불을 응시하고 있었다. 웬지 여인같이 아름다운 그의 창백한 얼굴에는 쓸쓸한 표정이 감돌고 있었다. 그는 품 속에서 오죽(烏竹)으로 된 한 자 길이의 퉁소를 꺼내더니 소중한 듯이 어루만졌다. 그의 창백한 얼굴에는 비감의 빛이 어렸다. '십 일(十日) 전만 해도 이 자리에는 할아버님이 앉아 계셨는 데... 지금은 오직 이 퉁소만 남아 있으니 슬픔만 더해 주는구 나.' 호불범의 신비한 눈에 반짝 이슬이 어렸다. '이제는 천애고아(天涯孤兒)로구나.' 문득 그의 눈에는 무서운 살심(殺心)이 어렸다. '수라궁 놈들, 두고 보아라! 원한에 사무친 나의 저주가 얼마나 무서운지 똑똑히 보여줄 것이다.' 호불범은 마치 여인의 손같이 희고 가냘픈 옥수(玉手)로 퉁소를 꽉 움켜쥐었다. '이제 수라궁 개파대전까지는 구 일(九日) 남았다. 구 일 후면 모 든 것이 판가름난다.' 호불범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안색이 붉어 지더니 그는 연달아 심한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콜록! 콜록! 우욱!" 놀랍게도 그가 기침을 할 때마다 시커먼 피가 토해지고 있었다. 호불범은 바닥에 점점이 흩어진 혈화(血花)를 보며 두 눈에 절망 을 담았다. "아!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몸은 갈수록 쇠약해지니......." 호불범은 수건을 꺼내 파리해진 입술가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 는 탄식해마지 않았다. "앞으로 일 년(一年)을 넘기기가 힘들겠구나. 그 안에 모든 것을 끝낼 수만 있다면 한이 없겠거늘." 호불범은 안타까운 듯이 수중의 오죽 퉁소를 어루만졌다. 촛불빛 에 그의 얼굴은 더욱더 수척하게 보였다. 이때 방문 밖에서 담담하고도 조용한 음성이 들려왔다. "호형(胡兄), 들어가도 되겠소이까?" 호불범은 움찔했다. '이 음성은?' 곧 그는 급히 수건으로 바닥에 흩어진 핏자국을 닦고는 몸을 일으 키며 말했다. "하후형이십니까?" "그렇소이다." 방 밖의 음성은 과연 하후성이었다. "들어오십시요, 하후형." 하후성이 들어서자 호불범은 그 모습에 잠깐 넋을 잃은 듯한 표정 을 지었다. 하후성의 영준한 모습이 마치 선계(仙界)의 인물같았 기 때문이었다. '이 사람은 실로 천하의 선골(仙骨)이요 귀인(貴人)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호불범의 눈빛이 어떤 동요로 미묘하게 흔들렸 다. 그러나 그는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하후형께서 웬일이십니까?" 하후성은 담담히 말했다. "호형께 말씀드릴 게 있어서 왔소이다." 호불범은 탁자로 걸어갔다.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후형." "고맙소이다." 두 사람은 탁자를 마주하고 앉았다. "이 깊은 밤에 소제를 찾아온 것으로 보아 매우 급한 일인 것 같 군요?" 하후성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어떤?" 하후성은 품 속에서 마지막 남은 한 개의 고전(古錢)을 꺼내 넘겨 주었다. "이것을 혹시 아시는지?" 고전을 받아든 호불범의 안색이 급변했다. "천불(天佛)... 고전(古錢)!" 그는 뒤이어 급히 물었다. "하후형! 외람된 말입니다만 어떻게 고전을 가지고 계십니까?" 하후성은 담담히 말했다. "사부님께서 주신 것이오." 호불범의 안색이 심한 동요를 일으켰다. 그는 격동하는 눈빛으로 고전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더니 입을 열었다. "음. 조부님으로부터 이 천불고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과거 팔십 년 전 조부님께서 큰 위난을 당하셨을 때 한 분 대사께 구함 을 받은 적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으음." "조부님은 대사에게 간청하여 은혜를 갚을 방도를 물었고, 그때 그 대사께서는 이 천불고전을 보이며 이것을 훗날 가지고 오는 자 가 있으면 그의 한 가지 부탁을 들어달라고 했습니다." 하후성의 준미한 눈썹 끝이 약간 치켜 올라갔다. "이제 보니 그 분 대사께서는 바로 소림의 성승이셨군요." 호불범은 고전을 품 속에 넣은 후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하후형, 무엇을 원하십니까? 조부님의 빚은 곧 소제의 빚입니다. 어떤 부탁이라도 힘 닿는 데까지 들어 드리겠습니다." 하후성은 담담히 웃으며 물었다. "어떤 부탁이라도 말이오?" 두 사람의 눈길이 서로 부딪쳤다. 그러나 호불범은 그 순간 엄청 난 위압감을 느끼고는 당황하고 말았다. 하후성은 단지 담담한 기색을 유지하는 것에 불과했으나 호불범은 그에게서 태산같은 기상을 엿본 것이었다. 더우기 한없이 깊은 하 후성의 눈을 대하자 호불범은 마치 자신이 그 속으로 빨려드는 듯 한 느낌마저 들었다. 호불범의 눈꼬리가 가늘게 경련을 일으켰다. '내 평생 처음보는 기인(奇人)이다. 이 사람의 내심과 능력은 도 저히 추측할 길이 없구나. 마치... 산과도 같다!' 호불범은 슬며시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어떤 부탁이라도 들어 드리겠습니다." 하후성은 신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만사귀재 호불귀 노선배님과 똑같은 능력을 갖고 싶소이다." 호불범의 안색은 그만 홱 변하고 말았다. "하후형의 그 뜻은?" "소생은 만사무불통지(萬事無不通知)의 능력을 배우고 싶소이다." 호불범은 멍해진 채 한참 동안이나 하후성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상대방은 자신의 요구가 얼마나 허황된 지를 모르는 것같았다. 호불범은 마침내 몸을 일으키며 설득하듯이 말했다. "하후형, 조부님이 만사귀재라는 별호를 얻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며 결코 한 순간에 얻어진 것도 아닙니다." 호불범은 탁자 주위를 맴돌았다. "그것은 조부님이 평생을 통해 얻은 것입니다." 하후성은 조금도 자신의 생각을 수정하거나 번복할 뜻을 보이지 않고 여전히 담담하게 앉아 있었다. 호불범은 순간적으로 눈빛이 기이해졌다. '대체 이 사람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의 눈이 한 차례 신비한 신광을 발했다. 그 리고 그는 침착하게 말했다. "하후형, 소제를 따라오십시오." 호불범은 몸을 움직여 다른 방으로 갔는데 그곳은 아담한 정실이 었다. 호불범은 한 쪽 벽에 걸려 있는 족자를 걷어 올렸다. 족자 밑에는 매화(梅花) 모양의 도형으로 여러 개의 돌출된 부분이 있었다. 호불범은 손가락으로 매화도형의 중심부를 연속 일곱 번 눌렀다. 쿠르르르릉! 낮고 묵직한 굉음이 울리며 왼쪽에 한 쪽 벽을 메우다시피 설치된 서가(書架)가 한 쪽으로 이동했고 그 속에 암문(暗門)이 하나 나 타났다. "따라오십시오." 호불범은 앞장서서 암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암문 안에는 아 래로 향한 계단이 있었다. 계단을 삼 장(三丈) 가량 내려가자 곧 거대한 서고(書庫)가 나타 났다. 실히 방원 수십 장은 되는 넓은 공간에 수없이 많은 책(冊)이 꽂 힌 서가가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었다. 줄잡아도 서책은 수십만 권 에 달하는 방대한 양이었다. 하후성은 아연했다. 호불범은 그의 표정을 살펴보며 신비로운 미 소를 지었다. "하후형, 이곳의 책을 모두 자기 것으로 만들면 조부님의 능력과 똑같이 됩니다." 하후성의 안색이 굳어지자 호불범은 진지하게 말하였다. "저로서는 이 방법밖에는 다른 방법을 알려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후성은 수많은 서책들을 둘러보며 침중한 신음을 흘리고 있었 다. '으음, 실로 엄청난 책이다. 이것을 모두 읽으려면 나의 능력으로 도 최소한 십 년(十年)은 걸릴 것이다.' 그는 낙심한 듯 한숨을 쉬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나마 하 후성이 아닌 일반 사람이라면 수백 년을 읽어도 다 읽지 못할 것 이 분명했다. 하후성은 호불범을 응시하며 물었다. "호형은 이것을 모두 읽었소이까?" 호불범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단지 담담히 웃기만 했다. 하후 성은 다시 시선을 돌려 서책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뇌리에 과거 천기선사가 한 말이 떠올랐다. - 현수, 장경각 안에는 근 수십만 권의 책이 있다. 노납은 그것을 모두 읽었다. 그러나 너는 그럴 필요가 없다. 노납이 백수십 년 간을 살면서 한 가지 느낀 것이 있으니 어차피 지(智)란 것도 따 지고 보면 도(道)로 이르는 수만가지의 지로(支路)중 하나일 뿐이 다. 단지 하나의 점(點)에서 시작되면서 수많은 지류(支流)를 거 느렸을 뿐 귀일(歸一)하는 것은 원초의 점이다. 너는 그 점 만을 배우면 된다. 하후성의 신색은 담담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기이한 표정을 지으 며 입을 열었다. "호형." "네, 하후형." "내일 이 시간까지만 이곳에 있겠소이다." 호불범은 그만 멍청해지고 말았다. '이 사람이 지금 무얼 생각하는가? 포기를 했단 말인가, 아니면 너무나 자신을 과신하는 것일까?' 하후성은 이미 몸을 돌려 서책들을 살피고 있었다. 호불범은 그의 넓은 등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무한히 넓게 보이는 그의 등, 그것은 대해(大海), 아니 태 산과도 같았다. 아니, 어쩌면 무한대의 우주(宇宙)를 보는 듯도 했다. 호불범은 자신이 하후성이라는 인간에게 한없이 끌려드는 것을 느 꼈다. '대체 이 분은.......' 그러나 그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지 못했다. "욱! 콜록! 콜록! 콜......록." 갑자기 심한 기침이 터져 나왔다. 호불범은 그 자리에 털썩 무릎 을 꿇고 말았다. 그의 기침은 거의 발작적인 것으로써 통제가 불 가능했다. 하후성은 흠칫하여 돌아다 보았다. 하후성은 바닥에 쏟아진 피를 보고는 크게 놀랐다. "아니...... 호형." 그는 급히 호불범을 부축했으나 호불범은 이미 두 눈을 꼭 감은 채 안색이 밀납같이 창백해져 있었다. 의식을 잃고 만 것이었다. "호형! 호형!" 하후성은 계속 그를 불렀으나 응답이 없자 눈썹을 모으며 그의 맥 문을 짚어 보았다. 그는 과거 천기선사로부터 의술(醫術)을 배운 적이 있었다. 맥(脈)이 끊어질 듯 미약하게 뛰고 있었다. 하후성의 안색은 크게 변하였다. "이, 이것은 절음폐혈증(絶陰閉血症)!" 하후성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부르짖었다. "이럴 수가! 절음폐혈증을 이 사람이 갖고 있다니. 그것은 오직 여인(女人) 만이 걸리는 것이거늘?" 그는 마치 무엇으로 머리를 호되게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설마......." 하후성은 손을 뗀 채 아연한 눈으로 호불범의 핏기없는 얼굴을 내 려다 보았다. '비록 여인같이 생겼다고는 생각했으나 줄곧 남자라고 믿어 의심 치 않았는데.' 하후성은 안색이 매우 흔들리더니 멈칫거리며 손을 들어 호불범의 가슴에 갖다 대보았다. 겉으로는 평탄해 보이는 가슴이었으나 물 컹한 감촉이 전해졌다. '이런, 가슴을 천으로 묶었구나. 그러나 분명 여인의 가슴이다.' 하후성은 확신했다. '과연, 이 자는... 여인이었구나.' 하후성은 정신이 띵하는 것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고 멍하니 호불 범을 내려다 보았다. 그녀의 안색에는 죽음이 가까이 깃들어 있었다. '천고의 절증인 절음폐혈증. 이것은 바로 천풍보의 종리유향(鐘里 有香)과 똑같은 병이다. 결국 이십 세에 죽는다. 그렇다면 이 호 소저는 앞으로.......' 하후성은 가슴 속에 연민의 정이 치밀어 올라 한 동안 호불범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도 그는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음, 단지 초절한 심력(心力)을 지닌 인물이라고만 생각했거 늘.......' 하후성은 비로소 얼마 전 빈청에서 백화미의 섭혼술에 호불범이 태연했던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으음." 호불범은 한 차례 신음을 발하더니 감았던 눈을 힘겹게 떴다. 그녀는 자신이 바닥에 누워있음을 느끼자 급히 몸을 일으키며 하 후성의 표정부터 살폈다. 그러나 하후성은 평소의 담담한 신색 그 대로였다. 호불범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다행이구나. 내가 여자라는 것을 눈치채진 못했구나.' 호불범은 하후성을 향해 어색하게 웃었다. "하후형께 추태를 보여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하후성은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별 말씀을. 그런데 호형께선 몸이 몹시 불편하신 모양이오?" 호불범은 짐짓 활발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단지 원래 몸이 허약하여 신경을 좀 쓰면 가끔 이렇습 니다." 하후성이 묵묵히 자신을 응시하자 호불범은 웬지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림을 느끼며 포권했다. "자, 그럼 하후형.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 그 동안 많은 것을 얻 으시기 바라겠습니다." 하후성은 정중히 말했다. "감사하오, 호... 형." 호불범은 의아하여 하후성을 바라보았다. 하후성의 말투가 끝부분 에서 이상해진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후성은 곧 몸을 돌려 서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호불 범은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복잡한 기색을 지었다. 그녀는 내심 중얼거렸다. '저 사람은 반드시 하루 동안 무엇인가를 이룰 것이다.' 그녀는 굳게 믿었으나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자신도 몰랐다. 호불 범 또한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러나 계단을 오르고 서가를 통해 방으로 올라선 순간 그녀는 다 시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아! 죽음의 사자가 차츰 나에게 오라고 손짓하는구나.' 그녀는 비틀거리며 처음의 방으로 돌아와 태사의에 쓰러지듯 주저 앉았다. 한편 지하서고 안에 혼자 남게 된 하후성은 마음이 산란해져 있었 다. 차라리 호불범을 진맥하지 않았을 때가 좋았다. 그에게 절증이 있고 또 생명이 앞으로 불과 일 년(一年)밖에 남지 않음을 알게 되자 하후성의 마음은 안정을 잃었다. 더구나 호불범 이 여인이었음에랴. '호불범.......' 하후성은 내심 되뇌이며 즐비한 서가를 향해 걸어갔다. 하후성과 호불범이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있었다. "하후형, 하루 동안 얻으신 바는 어떻습니까?" 호불범은 궁금한 듯이 물었다. 하후성은 미소지으며 담담히 말했 다. "약간 있었소, 모두가 호형의 덕분이오." 호불범은 의아했다. "그 안의 책을 모두 읽었단 말입니까?" 하후성은 피식 웃었다. "아니오, 나는 단지 그 중 백 권(百卷)만 읽었을 뿐이오." "백 권?" "그러나 그 백 권이 내게 준 소득은 정말 커다란 것이오, 진정으 로 만사귀재 호불귀 노선배님께 감사드리는 바이오." 호불범의 안색이 변했다. '그, 그럼 바로 그 책들을? 아아! 그것을 어떻게 이 사람이 찾았 단 말인가? 할아버님이 직접 지은 그 책들은 나조차 찾지 못했는 데.' 하후성은 담담히 말했다. "이곳에 온 뜻을 이루어 기쁜 마음이오, 호형께 언젠가 그 보답을 드리고 싶소이다." 호불범은 멍하니 그를 응시했다. '이 사람은 정말 기인(奇人)이다. 정말... 추측할 수도 없이 뛰어 난 능력을 지닌. 더구나 어제와 오늘의 눈빛이 다르다. 그것은 바 로 그 백 권의 책을 읽은 후 무엇인가를 얻었다는 뜻이다.' 호불범은 곧 하후성에게 말했다. "아무튼 하후형의 깨달음을 축하드립니다." "감사하오, 호형." 호불범은 문득 생각이 떠오른 듯 물었다. "하후형께선 이제 어디로 가실 생각입니까?" "수라궁으로 갈 생각이오." "그럼... 무당의 청수자 도인과 소림의 대사들과 함께?" 하후성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혼자 갈 예정이오." 호불범은 내심 중얼거렸다. '무엇인가 뜻이 있구나.' 하후성은 마침내 몸을 일으켰다. "정혜에게 전해주시면 고맙겠소이다. 일이 있어 먼저 간다고." "아니? 그럼 지금 갈 예정이십니까?" 호불범은 놀라 따라 일어섰다. "그렇소이다. 수라궁으로 가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입 니다." 호불범은 웬지 아쉬웠으나 하후성 쪽에서 먼저 그에게 포권하고 있었다. "그럼 호형, 수라궁에서 만납시다." 호불범은 그를 응시하며 자신도 모르게 안색이 일그러졌다. 그의 창백한 얼굴에는 쓸쓸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하후성은 그를 잠시 응시하다 밖으로 나갔다. 밖은 밤(夜)이었다. 달빛이 요요하게 만경루 경내를 비추고 있었다. 달빛 속으로 한 줄기 백영이 뿌연 선을 환영(幻影)처럼 남기며 사라져 갔다. 호불범은 난간을 잡고 서서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달빛이 그의 아름다운 얼굴에 떨어지고 있었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으며 두 뺨에 흐르는 그의 눈물 은 이슬처럼 맑았다. '아아! 조부님의 뜻을 이으려 평생을 남자같이 살아왔다. 짧은 생 명이기에 세상에 조금도 미련을 두지 않았었다. 그러나... 조금은 살고 싶다. 아아! 왜일까? 이 마음의 변화는?' 남장여인 호불범, 그녀의 가슴에 뜨거운 감정이 퍼져 오르고 있었 다. 그녀는 내심 중얼거렸다. '예전에 없이 타오르는 이 불같은 마음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아 아... 그를 만난 후부터... 나는 살고 싶어졌어.' 천하의 기녀이자 지녀(智女)인 호불범. 그녀는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계속 달 만 바라보았다. 그 달 속에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오르고 있었다. 하후성이라는 이름의....... ■ 대소림사 제17장 자부신군(紫府神君) 무영종(無影宗) -1 ━━━━━━━━━━━━━━━━━━━━━━━━━━━━━━━━━━━ 까...... 악! 까...... 악! 핏빛 황혼(黃昏) 속에서 까마귀의 무리들이 떼로 몰려 울부짖었 다. 까아...... 악! 까...... 악! 소름끼치도록 섬ㅉ한 울음소리였다. 마치 죽음의 노래(曲)인 양 붉게 타오르는 핏빛 노을 속에 중원의 대지는 점차 어둠의 적막 속으로 잠겨들었다. 밤이 오려는가, 죽음의 밤이 오려는가? 이제 해가 떨어지면 언제나 다시 날이 밝아 오려는지....... 누군 가가 절규하듯 부르짖었다. "태양이여, 지지마라! 이제 해(日)가 지면 대지는 영원한 암흑 속 에 묻힌다, 해는 다시 떠오르지 않는다. 오호, 황혼이여! 마지막 너의 작은 빛이나마 피를 뿌리듯 영원토록 대지를 물들여라!" 이백 년(二百年) 전 천마교(天魔敎)가 전 중원을 초토화시킨 이래 처음으로 무림은 들끓기 시작했다. 마존첩(魔尊帖)이라는 죽음과 피를 부르는 한 장의 첩지(帖紙)가 무림에 뿌려진 것이다. <마존첩을 받은 천하무림인(天下武林人)은 백 일(百日) 이내에 모 두 수라궁에 와 복명(伏命)하라. 이 뜻을 거역하면 삼족(三族)을 멸(滅)하리라! 수라혈신(修羅血神)> 이 엄청난 광언(狂言)은 전 무림인들을 아연실색케 했다. 그들은 모두 마존첩을 받고 모두 망연자실해졌다. - 어떤 미친 놈이 이런 망언(忘言)을 지껄이느냐? - 수라혈신은 대체 어떤 놈이냐? 과거 천하를 울리던 육대천마도 중원의 정기에 한(恨)을 품고 쓰러졌다. 수라혈신 따위는 그 에 비 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이다! 정사를 막론하고 무림인들은 그렇게 소리쳤다. 그것은 마존첩에 대한 두려움을 부정하기 위한 몸부림인지도 몰랐다. 이백 년 전 천마교가 붕괴되면서 무림에는 평화시대가 도래했다. 그로부터 백 년 동안은 정사무림이 균형을 이루어 지극히 평화로 왔다. 따라서 평화시대에 도전장을 낸 마존첩의 존재는 무림인들 에게 경악을 던져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무림인들은 이 마존첩을 무시했다. 하북팽가(河北彭家)의 가주 패천참인도(覇天斬刃刀) 팽천후(彭天 候), 그는 마존첩을 받자마자 그것을 전달한 수라궁의 사자를 일 도에 양단하고 그 자리에서 마존첩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사도(邪道)의 패주인 남맹, 즉 천군맹의 맹주인 구주진천도(九州 震天刀) 조천명(曺天明). 그도 마존첩을 받자마자 발로 밟아 짓이 겨 버렸다. 사도의 거두인 일교, 이곡, 일회 중 일교(一敎)인 통천교(通天敎) 의 교주 통천마군 흑고. 그는 수라궁의 사자를 불에 태워 죽였으 며 마존첩을 씹어 삼켜버리고 말았다. 황하칠십이채(黃河七十二寀)의 채주인 사해신군(四海神君) 구양 경, 그는 수라궁의 사자를 산 채로 황하 속에 수장시키고 수라궁 을 비웃으며 오히려 마존첩을 불태우는 기념으로 주위의 명가들을 초청해 대연회를 베풀었다. 이렇듯 중원무림의 수많은 방파와 고수들이 마존첩을 받았으나 어 느 누구도 마존첩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마존 첩을 찢고 사자를 죽이거나 경멸하여 쫓아보냈다. 그 누구도 마존첩이나 수라궁, 수라혈신 따위에 신경을 쓰는 자는 없었다. 그것은 바로 삼 개월 전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 누가 알았으랴? 무서운 피의 보복이 그들에게 돌아올 줄을. 팽가의 가주인 팽천후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그의 손자였다. 첫째 아들 패의웅(彭義雄)이 젊어서 요절한 후 그는 어린 손자를 가엾 게 여겨 온갖 정성과 사랑을 다 쏟았다. 손자는 이제 겨우 십 세(十歲)로 그의 앞에서 재롱을 피워 팽천후 의 입에서 항시 웃음이 떠날 줄 모르게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그 귀여운 손자가 죽었다. 그것도 전신이 갈기갈기 뜯긴 채로 팽가장의 대문 앞에 흩어져 있 었다. 온전한 것은 손자의 머리뿐이었으며 그 머리 맡에 한 장의 쪽지가 놓여 있었다. <받은 것은 반드시 돌려준다. 수라궁(修羅宮).> 팽천후는 미친 듯이 절규했다. "으-- 아-- 아----!" 팽천후의 처절한 울부짖음은 하늘을 찔렀다. 사랑하는 손자의 흩 어진 시신을 부여안은 그의 노안에는 피보다 진한 눈물이 흘렀다. 이것이 보복의 시작이었다. 통천마군 흑고(黑古). 그는 대단한 호색가(好色家)로써 정력이 절 륜했다. 그리하여 그는 구순(九旬)이 넘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초인적인 정력으로 부인이 아홉 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한결같이 요염하고 꽃같은 아홉 명 중에도 가장 사랑하는 것은 이제 이십 세된 아홉째 애첩 애향향(愛香香)이었다. 그녀는 꽃과 달이 무색할 절세미녀였던 것이다. 그런데 애향향이 죽었다. 그것도 그녀의 침실에서 완전 나체가 된 채로 발견됐다. 뿐만 아 니라 그녀는 수십 명의 사내에게 강간당한 듯 하반신이 피투성이 가 되어 죽어 있었다. 그런 그녀의 가슴 위에 쪽지가 있었다. <받은 것은 반드시 돌려준다. 수라궁(修羅宮).> 통천마군 흑고의 분노는 엄청났다. 그는 두 눈을 찢어질듯 부릅뜨 며 외쳤다. "반드시 복수하리라!" 구주진천도 조천명. 그는 사도 최강의 고수였다. 나이는 칠십(七十)으로 그는 패웅이자 효웅(梟雄)이었으며 무려 오백 근이나 나가는 진천마도(震天魔刀)를 자신의 신체 한 부분처 럼 사용하고 있었다. 조천명은 천군맹을 이끌며 잔인하고 악랄무비한 성품으로 흑도를 주름 잡았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좋은 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그가 만고의 효자(孝者)라는 점이었다. 조천명에게는 백 세(百歲)에 가까운 모친이 있었는데 그는 노모를 실로 극진히 섬겼다. 언젠가 노모는 갑자기 일만 리(一萬里) 서쪽의 천산(天山)에서만 나는 빙실영과(氷實靈果)를 먹고 싶다고 했다. 조천명은 그 즉시 만사를 제쳐두고 직접 수개월에 걸쳐 천산에 가서 기어이 빙실영 과를 구해다 모친에게 바쳤다. 또한 그는 노모에게 매일 문안을 드렸다. 출타할 때에도 항상 행 선지를 보고할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날 아침, 노모에게 아침 문 안을 드리러 간 그는 대경실색했다. 노모가 침상에 반듯이 누운 채 죽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복부 깊숙히 바로 자신이 항상 거실에 걸어두었던 진천마 도가 꽂힌 채였다. <받은 것은 반드시 돌려준다. 수라궁(修羅宮).> 역시 똑같은 쪽지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것을 본 조천명은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의 분노와 비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는 침상 아래 무릎 을 꿇고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은 채 꼬박 사흘밤낮을 대성통곡 했다. 그리고 그는 이를 갈며 부르짖었다. "수라궁을 초토화시키고 모든 수라궁 궁도들을 찢어 죽이리라!" 이같은 잔악한 보복은 전 무림을 뒤흔들었다. 마존첩을 비웃던 자 들은 반드시 이같이 처참한 보복을 당했던 것이었다. 이에 정사무림인들의 분노는 엄청났다. 수라궁에 대한 그들의 분 노는 하늘조차 무너질 정도였다. 결국 이로 인해 알게 모르게 정 사무림인들은 은밀히 회동하여 한 가지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그것은 중원에서 제일가는 모사(謀事) 일곱 명을 선발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늘도 놀라고 땅도 흔들릴 계획을 세워 수라궁을 무너뜨 리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계획이 합의되어 칠인의 모사들에게 초청장이 발부 되어 사자를 파견하자마자, 차례로 그 칠인의 모사들은 금마비(金 魔匕)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그들 속에는 황하칠십이채의 채주, 사해신군 구양경의 의제(義弟) 이자 오른팔 격인 신안수사(神眼秀士) 제갈천도 포함되어 있었다. 마침내 경악과 전율이 온통 무림을 횝쓸었다. 전 무림인은 차츰 마존첩과 수라궁에 대한 공포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수라궁 개파대전(開派大典). 남칠성(南七星) 북육성(北六省)과 그 외에도 새외변방의 수많은 고수들, 마존첩을 받은 자와 혹은 받지 못했어도 호기심을 품은 자들 등. 수많은 고수들이 수라궁으로, 수라궁으로 몰려가기 시작했다. 무공산(武功山). 강서성(江西省)과 호남성(湖南省)의 경계지역에 있는 이 산은 위 로는 구령산(九嶺山)을 떠받치고 밑으로는 운산(雲山)을 접한 명 산의 하나다. 때는 신록이 우거진 봄(春). 무공산의 서편에 위치한 한 봉우리로 백의청년이 오르고 있었다. 긴 머리를 묶어 허리까지 드리운 절세의 미청년, 그는 바로 하후 성이었다. 그의 걸음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매우 규칙적이었다. 가파른 봉우리를 오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관옥같은 얼굴에는 조금 도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잠시 후 그는 봉우리의 정상에 도착했다. 한 줄기 바람이 녹음(綠陰)진 숲을 스치며 그의 백삼을 휘날렸다. 이마 앞으로 흘러내린 몇 올의 머리카락이 미풍에 살랑거렸다. '이 백안봉(白雁峯)은 무공산에서 천마봉 다음으로 높은 곳이다.' 그의 시선이 산 밑으로 향했다. 작고 큰 수많은 봉우리들이 푸른 빛을 띄운 채 운해(雲海)와 뒤섞 여 드넓은 창파(蒼波)처럼 그의 발 밑에 깔려 있었다. 그러나 아득한 저 멀리 하나의 거대한 봉우리가 운무(雲霧) 속에 서 마존(魔尊)인 양 하늘을 찌를 듯이 우뚝 서 있는 것이 하후성 의 눈에 보였다. '저것이 악의 온상인 천마봉(天摩峯)이구나.' 그 봉우리는 여느 봉우리와는 달리 나무 한 포기 없었고 운무 속 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색은 오직 칙칙한 갈색뿐이었다. '저 봉우리에 수라궁을 건축한 자는 실로 무서운 자다. 방어하기 쉽고 공격하기는 어려우며 한 명의 고수면 능히 백 인(百人)을 막 을 수 있으니... 진정 천험의 요새다.' 하후성은 천기대사로부터 물려받은 수많은 지식으로 이 모든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수라궁 개파대전까지는 앞으로 오 일(五日). 그 동안 반드시 해 야할 일이 있다.' 날카로운 그의 검미(劍眉)가 한 순간 꿈틀거렸다. '수라궁의 흉수는 중원의 고수들에 대해 손바닥을 보듯이 잘 알고 있고 반대로 무림인들은 수라궁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군웅들의 세력이 수라궁보다 강하다 해도 힘의 균형 이 깨진다. 이것을 막기 위해서는.......' 하후성의 현기서린 두 눈에 광채가 번뜩였다. '수라궁에서도 전혀 예상못한 하나의 변수가 등장해야 한다. 그 변수는 바로... 나 하후성이다.' 그는 품 속에서 세 권의 책자를 꺼냈다. '과거 하란산에서 만난 적봉우사께서 주신 감리진경(坎離眞經)과 아버님께서 돌아가시면서 전해 주신 뇌음진경(雷音眞經), 그리고 적미천존(赤眉天尊)이 마교(魔敎)의 대법으로 전수해준 무공이 있 다.' 하후성의 두 눈에 굳은 신념이 어렸다. '이 모든 것을 오 일 안으로 완성시켜야 한다. 절대로 소림의 무 공을 쓰면 안 된다. 놈들에게 내가 누구인가를 절대 모르게 해야 한다.' 그는 한 권의 책자를 응시했다. '불영구검은 무림사상 최강의 검법이지만 천하의 그 누구도 이것 이 소림의 검학인 줄은 모른다. 광검절심이 준 이 책자로부터 발 원심결(發元心訣)과 섬류심결(閃流心訣)을 깨쳐 불영구검의 일곱 군데 헛점을 반드시 보충해야 하며 이것 역시 오 일 만에 이루어 야 한다.' 하후성은 하늘을 응시했다. 그의 두 눈은 물처럼 고요했다. '하늘이 나를 돕는다면 성공할 것이다. 아니, 성공해야 한다.' 하후성은 몸을 움직였다. 오 일 간 기거할 장소가 필요했던 그는 백안봉 주위를 면밀히 살폈다. 결국 백안봉 서쪽의 한 암벽 중간 에 나 있는 동혈(洞穴)을 발견했다. 동굴 안이었다. 하후성은 풀을 뜯어 동굴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정좌하고 앉았다. 그의 앞에는 세 권의 비급이 놓여져 있었다. 그는 감리진경을 그에게 준 적봉우사(赤鳳羽士)가 떠올랐다. '적봉우사. 그 분은 정말 인자하게 생긴 분이었지. 지금 그 분은 어디에 계실까?' 하후성은 품 속에서 한 개의 깃털과 옥갑을 꺼냈다. 깃털은 적봉우사의 신물(信物)인 적봉우(赤鳳羽)였다. 옥갑은 그 의 선물이었다. 하후성은 한 동안 감회에 젖다가 두 가지 물건을 품 속에 갈무리 했다. 감리진경은 공동파( 派)의 진산절예(鎭山絶藝)에 적봉우사가 스스로 창안한 절기를 기록한 희대의 무경(武經)이었다. 그렇다면 적봉우사는 어떠한 인물인가? 백 년(百年) 전 무림에 삼 인의 천하 최강의 고수들이 있었는데 일도일불일존(一道一佛一尊)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 중 일도(一道)란 공동파의 적봉우사를 말했다. 일불(一佛)은 소림의 마애천불(魔涯天佛) 천뢰선사였다. 일존(一 尊)은 당시 사도(邪道)를 제패한 현천교(玄天敎)의 교주인 적미천 존(赤眉天尊)이었다. 그들은 당시 무림 최강의 고수들로써 적수가 없었다. 적봉우사는 현 공동 장문인 영천도인(靈天道人)의 사조(師祖)뻘이 었으며 그의 무공은 도가(道家)의 모든 기공을 망라한 것으로 그 깊이를 추측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하후성은 감리진경을 펼쳐보았다. <감리신공(坎離神功)> 해서체로 쓰여진 글씨가 하후성의 눈에 들어왔다. 다음 장에는 감 리신공의 요결이 수록되어 있었다. <감(坎)은 곧 수(水)요, 리(離)는 화(火)다. 천지 간에 가장 기본 이 되는 수화는 힘의 원천이다. 음과 양의 기에서 발생한 감리진 기(坎離眞氣)는 체내의 백회혈과 용천혈에서 동시에 운공한다. 먼 저 태음신경에 단정(丹精)을 두고 태양신경에서 원양(元陽)을 이 끈다.> 감리신공의 요결은 심오하기 그지 없었다. 만일 하후성이 타고난 오성과 절륜한 지혜를 지닌 사람이 아니었다면 평생을 참오해도 감리신공의 요결을 깨우칠 수 없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하후성은 천고의 기재였다. 그는 단 한 번 읽은 감리진경 을 외웠으며 즉시 눈을 감고 그 이치를 참오하기 시작했다. 감리신공은 불가사의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천고절학으로 이 신공을 절정에 이르도록 연마하면 전신의 반은 음, 반은 양의 기 운으로 분리시킬 수가 있었다. 따라서 음양진기를 운공하면 반은 푸르고 반은 붉은 빛을 띄게 되 는데, 외부로 드러나는 이 기 鎌 현상 때문에 자칫 사공(邪功)으 로 오인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분명 감리신공은 도가(道家) 최고의 신공이었다. 그 깊이 나 위력으로 치면 무당(武當)의 태청신공(太靑神功)보다도 한 수 위였다. 감리진경에는 감리신공 외에도 한 가지 경공(輕功)과 개세의 장법 (掌法)이 수록되어 있었다. 천공제인보(天空制人步). 이는 일종의 변화무쌍하고 오묘한 보법 으로써 절정으로 연마하여 펼치면 스스로의 신형을 안개처럼 뿌옇 게 하여 감출 수가 있었다. 또한 이 보법을 경공술로 펼치면 육지비행술을 능가하는 경공술이 되었다. 이른바 천공제인환비술(天空制人幻飛術). 단 한 숨의 진기로 능히 구름을 타듯이 수십 리를 단번에 날아갈 수가 있는 실로 믿을 수 없는 경공이었다. 감리구장(坎離九掌). 이 장법은 감리신공을 바탕으로 전개하는 것으로 실로 상상도 못 할 엄청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음유(陰柔)와 양강(陽剛)의 경기를 마음대로 뻗을 수 있으며 상대 방의 장력을 뜻에 따라 이합집산(離合集散)시킬 수도 있었다. 감 리구장은 부드럽고 강맹한 특성을 골고루 갖추었으며 상대의 장력 을 형체도 없이 소멸시킬 수 있었다. 특히 내공이 강한 상대의 공격을 받아도 그 충격을 허공으로 무산 시키는 신비한 위력이 있었다. 하후성은 감리진경에 기재된 무학에 대해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공 동파의 무학은 비록 소림과 같이 방대하고 웅후하지는 못해도 도 가(道家)의 변화무궁함과 신비한 특성이 있었다. 하후성은 온 정신을 집중해 감리진경의 무학을 참오하면서 공동의 무학에 대해 존경심마저 느꼈다. '과연 천고의 기학이다.' 하후성은 동굴 속에서 이틀이 지나는 것을 느꼈다. 그 동안 그는 감리진경의 무학을 모두 깨우칠 수는 있었으나 워낙 시일이 촉박 하여 시전해 볼 수는 없었다. 하후성은 감리진경을 갈무리하고 이번에는 두 번째 비급을 집어 들었다. <뇌음진경(雷音眞經)> 비단책자는 얄팍했다. 그러나 뇌음진경을 집어든 하후성은 가슴에 뜨거운 격정이 치밀어 오름을 느꼈다. '아버님......!' 과거 부친인 하후연이 일만 리 천산을 넘어가 목숨과 바꾸어 온 책자였으므로 하후성에게 있어 뇌음진경은 부친의 혼과 한이 들어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후성은 과거 부친을 죽게 한 것이나 다름없는 외증조부에 대해 무척이나 원망하는 마음이 컸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그의 심정 은 무척이나 담담해졌다. 소림에서의 사 년 만의 수련이 그의 마음에 커다란 포용력과 깨달 음을 주었던 것이었다. '모두 지나간 일이다.' 하후성은 잡념을 떨쳐버리고 비단으로 된 뇌음진경을 펼쳤다. 뇌음진경은 본래 천축의 뇌음사(雷音事)의 지보로써 범어(梵語)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하후성이 펼친 책에는 한어(漢語)로 적혀 있었는데 그것은 뇌음진경의 사본으로써 부친 하후연이 손수 적은 것이었다. 뇌음 진경에는 단 한 가지의 무공(武功)이 수록되어 있었다. <뇌음신공(雷音神功).> 그것은 바로 천축 뇌음사의 가장 기본이 되는 개세신공으로 뇌음신공은 아득한 과거 불문(佛門)의 뇌정신(雷霆神)이 지옥(地 獄) 삼십삼아수라천(三十三阿修羅天)의 마귀들을 제압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전설의 신공이었다. <천지(天地)의 모든 기운 가운데 가장 강한 것이 뇌정지기(雷霆之 氣)다. 이 뇌정지기를 흡수해 체내의 양화진력(陽火眞力)과 융화 시켜 지강(地剛)에 통하고 하늘(天)을 가르는 뇌정을 뽑는다. 진 력은 태양출하경맥(太陽出下經脈)에서 출발하여.......> 뇌음신공의 뇌음진결(雷音眞訣)은 난해하기 그지 없었다. 하후성 과 같은 천하기재조차도 꼬박 이틀 밤낮을 참오했으나 완전히 이 해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하후성은 점차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빠져들며 뇌음진결에 심취해 갔다. 뇌음신공을 펼치면 주위 방원 수십 장이 온통 번갯불의 섬광(閃 光)과 굉음에 의해 잿더미로 화하고 말며 웬만한 고수는 그 뇌음 만으로도 고막이 터지고 심맥이 끊겨 죽는다. 실로 천지 간에 가장 무섭고 패도적인 무공이었다. 하후성은 동굴 속에서 마치 석상처럼 앉은 채 심오한 무학의 경지 에 한 발 한 발 진경(進境)을 보았다. 어느덧 그는 마지막 책자마저 넘기고 있었다. 그것은 광검절심(狂劍絶心) 유무심으로부터 얻은 발원결(發元訣) 과 섬류결(閃流訣)이 적힌 광검진해(狂劍眞解)였다. 오 일은 무척 짧은 시일이었다. 그러나 하후성에게 있어 이 오 일이라는 시일은 전 생애에 비할 만큼 귀중한 시간이었다. 그 짧은 오 일 동안 그는 우주(宇宙)를 느끼고 그 우주를 이해해야만 했다. 무념무아무상무심(無念無我無常無心)....... 백안봉(白雁峯) 정상. 운해(雲海)가 뒤덮이고 발 아래 창파처럼 깔린 무수한 봉우리들, 그 모든 것 위에 군림하듯 솟아 있는 것이 백안봉이었다. 그 위에 검고 긴 머리를 휘날리며 우뚝 서 있는 백의청년은 하후 성이었다. 그의 영준한 얼굴에는 이제껏 보이지 않던 신태(神態) 가 넘쳐 흐르고 있었다. 하후성은 푸르른 창공을 우러러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성공(成功)했다. 오 일 만에 원하던 만큼 성취했다." 그는 그 짧은 오 일 동안에 감리진경과 뇌음진경, 적미천존의 무 공, 그리고 광검진해를 모두 터득했으니 인간의 능력으로 불가능 한 일을 이루고 만 것이었다. 하후성의 눈빛은 마치 순백의 물처럼 고요하기만 하여 그 누가 보 아도 그의 눈에서 개세무학을 읽어낼 수는 없었다. 하후성은 멀리 바라보이는 갈색의 천마봉(天魔峯)을 응시하며 중 얼거리고 있었다. "내일이 바로 수라궁의 개파대전이다." 그의 입가에 신비스런 미소가 어렸다. "수라혈신, 모든 것이 그대의 뜻대로는 되지는 않을 것이다. 중원 무림의 천년정기(千年正氣)는 결코 불의(不義)를 용납치 않을 것 이다." 하후성은 준미한 눈썹을 움직이며 고요한 눈 속에서 지혜로운 빛 을 발산했다. '천하에는 무공으로만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이번 수라궁 과 대처하는 것은 특히 심계(心計)를 많이 사용해야 할 것이다.' 하후성은 천마봉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서서히 그의 눈 빛 속에 기이한 빛이 떠올랐다. '그렇다. 나 하후성은 꼬리를 보이지 않는 환영신룡(幻影神龍)이 되어야 한다. 누가 지었는지 모르지만 정말 환영신룡이 되어야 한 다. 그러기 위해서는 변장을 해야겠다. 그것도 평범한 변장이 아 니다.' 하후성의 입가에 신비한 미소가 어렸다. '이번 오 일 동안의 무공 성취는 나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그 무공들을 융합시켜 나는 여러 가지 기공(奇功)을 창안했으며 그 중에서도 무림사상 전례가 없는 변장술도 생각해 두었다.' 하후성의 얼굴에 일말의 자부심이 어렸으나 그것은 오만이 아니라 자기완성의 신념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이윽고 하후성은 체내의 공력을 일으켰다. '소림의 축골환공(縮骨幻功).' 우두두두둑! 그의 전신에서 뼈마디가 부딪치는 음향이 일어나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의 체격이 변화했다. 놀랍게도 키가 더 커지고 수척 하면서도 강인한 골격으로 변한 것이었다. 원래 축골공은 소림이 원조였다. 그 후 강호에 흘러든 동자축골공 (童子縮骨功)은 골격을 줄이는 위력밖에 없었다. 그러나 소림의 축골환공은 뼈를 늘이거나 줄임은 물론이요, 탈골, 역골하여 마음대로 신체의 각 부분까지 이동시킬 수가 있었다. 하후성의 골격은 완전히 변했다. 특히 두 팔이 보통의 사람들보다 더 길어졌다. '뇌음진경 속의 신공을 약간 운용하면 몸의 근육과 피부색을 마음 대로 바꿀 수 있다. 나는 이것을 환피공(幻皮功)이라 이름 짓겠 다.' 그의 얼굴 근육이 이동하면서 은은한 자색(紫色)의 피부가 되는가 싶더니 그는 곧 삼사십 대의 중년인(中年人)이 되었다. 하후성의 눈빛이 불꽃처럼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감리신공 중 이화공(離火功)을 극성까지 끌어올려 그것을 모발로 집중시키면 머리색이 변한다.' 그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어렸다가 사라지자 그의 머리칼은 순식 간에 피부빛과 같은 자색(紫色)을 띄웠고 눈썹조차 자색이 되었 다. '적미천존의 마안공(魔眼功)을 약간 운용하면 안광(眼光)이 달라 진다.' 그의 눈도 또한 은은한 자광(紫光)을 띄게 되었다. 하후성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삼십대 후반의 청수하면 서도 자색이 감도는 기이한 중년인으로 변모된 것이었다. 누가 그 를 하후성으로 알겠는가? 전신에서 신비스럽고 기이한 느낌이 발산되는 중년기인(中年奇 人), 하후성은 자신이 아닌 완전히 다른 인물이 되어 버렸다. 그는 마침내 창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 "이제부터 나는 하후성이 아니다. 나는 저 동해(東海) 일 만리(一 萬里) 밖의 섬(島) 자부도(紫府島)의 도주(島主)인 자부신군(紫府 神君) 무영종(無影宗)이다." 일대기인(一代奇人) 하후성, 그는 웃었다. "핫핫핫......." 그의 웅후한 웃음소리는 하늘 높이 울려나갔다. 자부도 출신의 자부신군 무영종. 이 중원천지에 그러한 존재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것은 단지 하후 성의 분신일 뿐, 그러나 이제 곧 자부도의 자부신군 무영종의 위 명은 전 중원을 진동하리라. 새로운 무림천하의 희대기인으로....... ■ 대소림사 제18장 수라궁(修羅宮) -1 ━━━━━━━━━━━━━━━━━━━━━━━━━━━━━━━━━━━ 천마봉(天魔峯). 천하무림에 마존첩(魔尊帖)을 뿌림으로써 무림제패의 야욕을 드러 낸 수라궁이 있는 곳. 천하 정사무림에 도전장을 낸 수라궁은 마침내 이곳 천마봉에서 개파대전(開派大典)을 열었다. 그로 인해 혈겁(血劫)의 전운(戰 雲)이 천마봉의 음산한 지역을 더욱 으스스하게 뒤덮고 있는 듯 했다. 천마봉은 괴이하게도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황폐한 갈암과 적토(赤土)로만 이루어져 있었는데 위로 오를 수록 지세는 더욱 거칠고 음산해졌다. 봉우리 아래에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듯 한 인영이 나타났다. 그는 백의를 입고 자색이 감도는 긴 머리를 흘러내렸다. 역시 얼 굴도 자면(紫面)이었으며 괴이한 것은 눈동자도 자안(紫眼)이라는 것이었다. 나이는 대략 삼사십 정도로 보였다. 그는 바로 하후성이 새롭게 변신한 자부신군(紫府神君) 무영종(無 影宗)이었다. "......." 무영종은 자광이 감도는 눈으로 천마봉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봉우리로 오르는 길로 다섯 명의 인물이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의 자색 감도는 얼굴에 잠시 의혹이 스쳤다. 기이하게도 그들은 모두 풀이 잔뜩 죽은 채 힘없는 모습인 데다가 또한 그들 중 한 명은 왼쪽 어깨가 온통 피투성이였다. 그런데 기이한 행렬은 그들뿐이 아니었다. 그들의 뒤를 이어 다시 내려오는 일단의 무리들 역시 부상을 당한 듯 심하게 절룩거리거 나 서로를 부축하며 몸을 의지하고 있는 게 아닌가? 무영종은 그런 식으로 산길을 오르는 동안 수십 명의 인물을 지나 치게 되었다. 그의 의혹은 곧 하나의 결론으로 화했다. '그렇구나. 저들은 아마도 수라궁으로부터 마존첩을 받지 못한 자 들일 것이다. 호기심으로 개파대전에 참가하려다 제지를 당한 모 양이다.' 무영종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다시 맞은 편에서 세 명의 장 한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내려왔다. 그들 중 한 명이 투덜대는 소리가 들렸다. "빌어먹을! 그래도 관동(關東) 지방에서는 적수가 없다는 우리 관 동삼괴(關東三怪)가 관문 하나를 제대로 뚫지 못하고 쫓겨나다 니......." 그는 삼 인 중 가운데의 턱이 네모진 중년 장한이었다. 좌측의 약 간 마른 자가 고개를 흔들며 그의 말을 받았다. "형님, 솔직히 그 관문은 너무도 어렵소. 분명 수라궁 놈들이 고 의적으로 세운 것이오." 무영종은 그들의 말을 모두 들었다. '관동삼괴라.' 그는 강호에 나온 후 관동삼괴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었다. 그들은 관동지방에서는 꽤 알려진 고수였으며 정사지간(正邪之間) 의 인물들로써 외가권(外家拳)에서는 경지가 독특했다. 대괴(大怪) 시천공(施天公). 이괴(二怪) 시천수(施天水). 삼괴(三怪) 시천지(施天地). 그들은 형제(兄弟)였다. 첫째는 구두철편(九頭鐵鞭)이라는 채찍을 썼고 둘째는 장법(掌法)에 능했다. 그러나 세째인 시천지는 무공보다는 머리가 영악했으며 암기(暗 器)를 잘 썼다. 따라서 실제적으로 관동삼괴는 바로 시천지에 의 해서 움직인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무영종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들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세 친구, 잠깐 실례하겠소." 관동삼괴는 걸음을 멈추며 무영종을 주시했다. 곧 그들은 괴이한 인상의 무영종을 보자 경계의 빛을 드러냈다. 그들과는 달리 무영종은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친구들에게 물어볼 것이 있소." 그 말에 우측의 턱이 뾰족하고 두 눈이 깊숙하며 생각이 빠른 듯 이 생긴 자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가 바로 삼괴인 시천지였다. "이곳이 바로 수라궁으로 가는 길이오?" 무영종의 물음에 관동삼괴는 움찔했다. "그것은 왜 물으시오?" 시천지가 그의 아래 위를 유심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는 아마도 기억 중에 그와 같은 인물이 있는지 생각하는 것같았다. 무영종은 고개를 들어 천마봉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한 뒤 말했 다. "본인은 동해(東海) 자부도(紫府島)에서 온 자부신군(紫府神君)무 영종이라 하오." "자부도? 자부신군?" 시천지는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런 이름을 들어본 기억이 전혀 없자 내심 비웃었다. '스스로 신군(神君)이라고? 웃기는 놈이군.' 무영종은 다시 한 번 천마봉을 바라보며 말했다. "본인은 자부도에서 중원에 처음 나온 길이오. 중원의 친구들과 함께 견식을 넓히고 무학을 비교해 보기 위해 왔소. 막 중원에 발 을 내디디자마자 우연히 수라궁에서 강호인들을 초청한다는 소문 을 듣고 호기심에서 와본 것이오." 대괴 시천공이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귀하는 그럼 수라궁에서 보낸 마존첩을 갖고 있소?" "없소." 시천공은 냉소했다. "흥! 그럼 그냥 돌아가시오." "아니, 왜?" "공연히 올라갔다가 팔다리 하나 잃지 말고 조용히 자부도로 돌아 가는 게 좋을 거라는 얘기요." 무영종은 짐짓 멈칫하며 물었다. "수라궁이... 정말 그렇게 무섭소?" 이번에는 시천수가 말했다. "그렇게 궁금하거든 직접 올라가 보구려." 무영종은 자미(紫眉)를 움찔하며 중얼거렸다. "흠, 이 중원에도 그렇게 무서운 고수가 있단 말인가? 본 신군의 개세무학과 상대할 인물이 그럼 수라궁에 있단 말인가?" 그 말에 시천공은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딱 벌리며 말했다. "아니, 당신의 개세무학은 그럼 적수가 없다는 말이오?" 시천수도 기가 찬다는 듯 괴소를 흘렸다. "흐흐흐... 이것 보시오, 친구. 농담이라도 그런 말 하지 마시오. 만약 수라궁에서 그 말을 들었다면 당신은 살아남지도 못할 것이 오." 시천지도 충고했다. "공연히 화(禍)를 부르는 소리하지 말고 어서 조용히 사라지시 오." 그러나 무영종은 자광이 감도는 기이한 눈을 껌뻑이며 곤란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어젯밤 밤새워 복주(福州)에서 이곳까지 달 려온 보람이 없게 되는데." 관동삼괴는 모두 대경하였다. "뭐, 뭐라고? 복주에서 이곳까지 하룻밤 사이에 왔다고?" 시천수는 멍한 얼굴로 부르짖듯 외쳤다. 시천공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당신, 농담하는 거요? 복주에서 이곳까지는 이천 리(二千里)가 넘는데 당신이 무슨 재주로 하룻밤 사이에?" 마지막으로 시천지가 고개를 저었다. "형님들, 이 자는 아무래도 제 정신이 아니오. 천리마로 달려도 이틀이 걸릴 거리를 하룻밤에 왔다는 것을 누가 믿겠소? 신경쓰지 말고 우리 갈 길이나 갑시다." 그러나 시천지는 눈길을 돌리다 우연히 무영종의 눈빛을 보게 되 었다. 무영종의 눈은 자색이 감돌면서 마치 깊이가 끝이 없는 호 수처럼 담담했다. 또한 기이하게도 무공을 익힌 자라면 누구라도 솟아야할 양 쪽 태양혈(太陽穴)도 밋밋하기만 했다. 시천지는 비로소 가슴이 섬뜩함을 느꼈다. '어쩌면... 이 자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한 차례 눈알을 굴리더니 품 속을 뒤져 한 장의 천을 꺼냈다. 무영종을 주시하며 말했다. "친구, 당신이 만약 이 헝겊을 날려 저 나무에 꽂을 수 있다면 수 라궁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오." 시천지는 약 삼 장(三丈) 밖에 서 있는 고사된 나무를 가리켰다. 어찌된 일인지 천마봉 일대에는 나무가 있어도 모두 말라죽어 있 었다. 천마봉의 마기(魔氣)를 이기지 못한 탓일까? 무영종은 나무를 쳐다보았다. 나무는 그래도 굵기가 한 아름은 되 고 있었다. 시천공과 시천수는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막내가 돌았나? 저 나무에 헝겊을 꽂으려면 최소한 백 년(百年) 의 공력은 있어야 하는데.' 그러나 무영종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런 정도 해낼 사람이라면 자부도에 수십 명은 되 오. 하하! 수라궁에 들어가는 것이 이렇게 쉽다니?" 관동삼괴는 모두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마치 그들은 어떤 환상 의 세계를 듣는 것같은 기분으로 눈 앞의 괴이하고도 신비한 사나 이 자부신군 무영종의 말을 듣고 있었다. 무영종은 시천지에게서 헝겊을 받아들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가볍 게 휙 던졌다. 스슷! 깃털이 스치는 듯한 음향과 함께 헝겊은 고목에 꽂힌 게 아니라 아예 고목을 뚫고 지나가 버렸다. 우르릉... 쿵! 뒤이어 고목은 칼로 벤 듯이 잘려져 넘어갔다. 천은 또 기묘하게 방향을 바꾸더니 무영종의 손으로 되돌아왔다. "아니!" 관동삼괴는 대경실색하여 멍청히 굳어 버렸다. 눈 앞의 상황이 도 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무영종은 혀를 찼다. "쯧! 너무 힘을 썼군. 나무를 잘라 버리다니." 그는 짐짓 무안한 듯 변명을 덧붙였다. "아무래도 저 나무가 너무 무른 것 같소." 관동삼괴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 었다. 그들은 무영종을 두려움과 선망, 그리고 의혹의 눈으로 바라볼 뿐 이었다. "이 정도면 수라궁 개파대전에 참가할 수 있겠소?" 무영종의 물음에 시천지가 번쩍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추... 충분하오!" 그는 부러운 눈으로 무영종을 바라보다가 뒤로 물러났다. "그, 그럼... 올라가 보시오." 관동삼괴는 쫓기듯이 몸을 돌렸다. "잠깐." 무영종이 그들을 불러 세운 뒤 물었다. "당신들도 수라궁 대회에 참가하고 싶지 않소?" 시천공이 멈칫하며 더듬거렸다. "하, 하고는 싶지만 실력이 부족해서......." "그럼 본인이 도와준다면 가능할 것같소?" 그 말에 관동삼괴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그들은 구미가 당기는 듯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다가 마침내 그들 중 시천공이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시... 신군(神君)께서 도와 주신다면야 가능하고 말고요." 어느새 그의 말투는 공손하게 바뀌어져 있었다. 무영종은 짐짓 호 탕하게 웃었다. "하하! 염려하지 말게. 본 신군은 강호초출이니 경험이 부족하네. 오히려 그대들의 도움이 필요하니 함께 가세." 무영종의 말투도 역시 변했으나 관동삼괴는 이미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 들이고 있었다. "고, 고맙습니다. 신군." 무영종은 옷소매를 저었다. "자, 올라가 보세." 그는 관동삼괴를 앞장 세운 채 천마봉으로 올라갔다. 괴암(怪岩). 갈색의 편편한 암석 위에 탁자가 놓여 있었다. 의자에는 나란히 세 명의 흑의노인이 앉아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육 순(六旬) 정도 에 눈빛이 음침했다. 그 옆으로 사방 오 장(五丈) 넓이의 반석이 있었고 그 위에 한 명 의 백의복면인이 우뚝 서 있었다. 그러나 그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으며 두 눈빛은 얼음장같이 차가왔다. 이곳에 다시 네 명이 올라왔는데 그들은 무영종과 관동삼괴였다. 관동삼괴를 본 세 흑의노인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관동삼괴가 또 오는군." "미친 놈들, 자신의 역량을 헤아리지도 못하다니." "아무래도 이번에는 뜨거운 맛을 보여줘야겠군!" 관동삼괴가 탁자 앞에 서자 가운데 흑의노인이 비웃듯이 말했다. "관동삼괴, 다시 올라온 것을 보니 그 동안 기연(奇緣)을 만나 새 삼 천고절학이라도 익혔나 보군?" 관동삼괴는 한결같이 얼굴을 붉히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때 무영종이 나서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본좌가 대신 통과할 것이오." 흑의노인은 움찔했다. "그대는 누구요?" 시천지가 재빨리 엄숙하게 말했다. "그 분은 우리들의 대형(大兄)이시오." "대형?" 세 흑의노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조소를 띄우며 무 영종의 아래 위를 훑어 보았다. "당신은 이 관문을 통과할 자신이 있소?" 무영종은 어깨를 으쓱했다. "자신이 없으면 오르지도 않았을 거요." 그를 바라보던 세 흑의노인의 눈빛이 빛났다. '음, 이 자는 관동삼괴와는 다른 것같다. 어쩌면 생각 밖으로 고 수일 수도.' 가운데 흑의노인은 우측의 반석 위에 우뚝 서 있는 백의복면인을 가리켰다. "첫 관문의 상대자는 저 친구요." 무영종은 백의복면인을 주시했다. "흠, 저 자와 싸워 이기면 통과요?" "이긴다고? 흐흐흐... 천하의 그 누구도 저 친구를 꺾지 못할 것 이오." "흐음?" "당신이 반석에 올라가 저 친구에게 삼 장(三掌)을 공격해 한 걸 음이라도 움직이게 하면 통과요." 무영종은 어이가 없다는 듯 다시 어깨를 으쓱했다. "겨우 그 정도요?" 그러나 시천지가 옆에서 주의를 주었다. "대형, 저 복면인은 절대 얕볼 수 없습니다. 아까 우리 모두가 공 격했는데도 끄덕하지 않았습니다." 무영종의 눈에 자광이 번쩍였다. '음? 관동삼괴가 비록 절정고수는 아니나 그래도 일류급인데 그들 의 합공(合攻)을 받고도 끄덕하지 않다니.' 무영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럼 시험해 보겠소." 그는 어깨도 흔들지 않고 발도 구르지 않으며 반석 위로 뛰어 올 라갔다. 그의 괴이한 신법에 세 흑의노인은 모두 안색이 변했다. 무영종은 백의복면인 앞에 서서 말했다. "자, 친구. 공격하겠소." 백의복면인은 말이 없었다. '이 자가 어떤 외문기공(外門奇功)을 익혔는지는 모르나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는구나.' 무영종은 내심 이렇게 중얼거리며 가볍게 손바닥을 밀었다. 소리 도 없이 장력이 뻗었다. 펑! 장력은 정확히 백의복면인의 가슴을 적중시켰다. 그러나 놀랍게도 백의복면인이 끄덕도 하지 않자 무영종은 안색이 다소 변했다. '이럴 수가? 비록 이 성(二成)의 내공밖에 쓰지 않았지만 웬만한 고수는 즉사할 텐데... 이 자는......?' "일 장(一掌)을 공격했소. 이제 이 장(二掌) 남았소." 흑의노인의 말에 관동삼괴가 도리어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꽝! 하는 폭음이 울렸다. 무영종은 이번에는 사 성(四成)의 공력 으로 장력을 날린 것이었다. 그러나 백의복면인은 가볍게 상체를 흔들었을 뿐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무영종의 자면이 찌푸려졌다. '이번 일 장이면 강호의 절정고수도 피를 토하고 죽는다. 그렇다 면 이 자는 이미 금강불괴라도 된단 말인가?' 그의 안색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일 장(一掌) 남았소!" 흑의노인이 빈정거리듯 말했다. 무영종은 이번에는 육 성(六成)의 공력으로 적미천존의 현천마공(玄天魔功)을 일으켰다. 그의 장심으로부터 검은 기류가 뻗었다. 꽝! "크윽!" 엄청난 폭음과 함께 백의복면인은 비명을 지르며 연달아 뒤로 오 보(五步)나 후퇴했다. "어... 엇! 저럴 수가!" 탁자에 앉아 있던 세 흑의노인은 모두 대경하여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무영종은 안색이 변한 채 백의복면인의 앞가슴을 노려보고 있었다. 현천마공에 의해 찢어진 옷자락 사이로 핏빛의 비늘로 된 갑의(甲衣)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제 보니 호신갑을 입고 있었군!' 무영종은 내심 중얼거렸다. '아무리 호 신갑이라 해도 대단한 물건이다. 저 호신갑 만 입으면 삼류고수도 능히 절정고수의 공격을 막을 수가 있겠구나.' 무영종은 알지 못했다. 훗날 이 호신갑을 입은 괴인(怪人)들로 인 해 가공할 혈풍이 일어난다는 것을. 무영종은 예의 괴이한 신법으로 반석에서 뛰어 내렸다. "자, 됐소?" 흑의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됐소, 통과요." 무영종은 입가에 기이한 미소를 머금으며 몸을 돌렸다. 관동삼괴 가 기뻐하며 그를 따랐다. 그런데 얼마쯤 봉우리를 오르자 시천지 가 한숨을 쉬었다. "휴. 신군, 정말 조마조마했습니다." 무영종은 기소를 흘리며 말했다. "후후후... 본 신군을 믿지 못한단 말인가?" "아니, 그럴 리가요. 단지......." 시천지가 우물쭈물 말을 못하자 무영종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걸 음을 멈추며 말했다. "너희들을 만난 기념으로 본 신군이 무공을 한 수 전수해 주고 싶 은데 어떤가?" "넷? 그, 그게 정말입니까?" 관동삼괴는 펄쩍 뛰도록 기뻐했다. "후후... 물론이지, 자부도의 무학은 바다같이 넓고 깊으니 몇수 만 전해 줘도 그대들에겐 큰 도움이 될 걸세." "고, 고맙습니다. 신군!" 관동삼괴는 감지덕지했다. 무영종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입 을 열었다. "우선 한 가지 무공을 전수하겠네. 이것은 권법(拳法)과 장법(掌 法)은 물론 보법(步法)이 함께 포함되어 있으며 검(劍)이나 무기 로도 사용할 수가 있네. 이 무공의 이름은 태극십팔문(太極十八 門)이라 하지." 관동삼괴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무공의 이름치고는 괴이했 기 때문이었다. 무영종은 그들에게 구결을 들려주며 한 수 한 수 보여 주었다. 태극십팔문은 실로 익히기 쉬운 무학이었다. 그러나 그 위력은 정말 신기할 만큼 실전(實戰)에 적합한 것으로 써 십팔로(十八路)의 방위(方位)를 마음대로 차단시키며 공방(攻 防)의 변화가 기묘한 것이 특징이었다. 관동삼괴는 온통 정신을 빼앗긴 채 태극십팔문의 무공에 빠져들어 갔다. 약 이 각 후, 그들은 그런대로 익숙하게 태극십팔문의 무학 을 시전할 수가 있게 되었다. 모든 것이 무영종의 적절한 전수방법 덕분이었다. 그로 인해 관동 삼괴의 무학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커다란 진경(進境)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정말이지 꿈에도 몰랐다. 무영종이 전수한 태극십팔문이란 바로 가장 평범하다고 알려진 소 림사(少林寺)의 나한십팔장(羅漢十八掌)에 강호의 일반적인 초식 이 혼합되어 즉석에서 창안된 무공이라는 것을. 그들은 태극십팔문을 자 부도의 천고기학(天古奇學)으로 굳게 믿고 있었다. 두 번째 관문(關門). 그곳에는 탁자 앞에 한 명의 혈의노인이 앉아 있었다. 가슴에는 섬뜩한 고루가 새겨져 있었는데 음침하고 냉혹한 인상에 나이는 구순(九旬)이 넘어 보였다. 무영종은 그를 보 자 흠칫 놀랐다. '고루혈마 곡우양!' 혈의노인은 바로 수개월 전 천풍보의 회갑연에 나타났던 세 명의 수라궁 사자(使者)들 중 한 명인 고루혈마 곡우양이었다. 무영종, 그는 물론 말할 것도 없이 하후성의 분신(分身)이었으므 로 대뜸 고루혈마 곡우양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곡우양의 곁에는 한 명의 청색가면을 쓴 청의인이 있었는데 그는 체격이 왜소했으나 눈빛만은 지극히 맑아 기이한 느낌을 주었다. 청의인의 뒤에는 또다시 아홉 명의 은의무사(銀衣武士)들이 둥글 게 포진하고 서 있었다. 그들의 앞가슴에 핏빛 글씨로 혈(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들은 각기 왼손에는 은빛 방패를, 오른손에는 은월도(銀月刀)를 들고 있어 몹시 살벌한 광경이었다. 무영종과 관동삼괴가 다가오자 곡우양은 눈을 가늘게 떴다. "흠, 오랫만에 일 관을 통과한 자가 오는군." 그는 음침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대들의 이름은?" 시천공이 대답했다. "관동삼괴요." "관동삼괴?" 곡우양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수십 년 전에 강호를 떠났기 때 문에 그런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청의면구인에게 물었다. "서영주(徐令主), 관동삼괴에 대해 아는 것이 있소?" 청의면구인은 가늘고 째지는 듯한 괴이한 음성으로 말했다. "관동지방에서 약간의 명성을 얻고 있는 자입니다." "무공은?" "이류에 불과합니다." 곡우양은 음소를 흘렸다. "후후후... 관동삼괴, 이 관(二關)은 두 번째 관문이자 마지막 관 이다. 이 관을 통과하면 수라궁으로 들어갈 수 있다." 시천지는 두 사람의 대화에 자존심이 잔뜩 상했지만 어쩔 수가 없 었다. 그는 화를 꾹 눌러 참으며 물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요?" 곡우양은 아홉 명의 은의무사들을 가리켰다. "저 무사들은 수라궁의 일급 무사들이다. 저들의 합공(合功)을 십 초(十超)만 견딘다면 통과다." 그 말에 시천공, 시천수, 시천지의 눈이 동시에 반짝 빛났다. 그들은 방금 무영종에게 배운 태극십팔문을 시험해 보고 싶은 생 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윽고 시천공이 호쾌하게 말했다. "좋소. 그러나 우리 삼형제는 언제나 같이 행동하오. 우리도 합공 하겠소." "좋을 대로." 곡우양은 냉소하며 말했다. 휙! 휙! 휘익! 관동삼괴는 일제히 몸을 날려 반석 중앙에 내려섰다. 그들은 곧 서로 등을 맞댄 채 품 자(品字) 형태를 이루었다. 그런데 그들이 떨어진 순간 아홉 명의 은의무사들은 예고도 없이 갑자기 공격을 가했다. 쉬쉭! 차... 창! 은광이 눈부시게 번쩍이며 열 자루의 은월도가 일제히 관동삼괴에 게 떨어졌다. "엇!" 관동삼괴는 간담이 써늘해져 비명을 질렀다. 은의무사들의 공격이 너무도 패도적이고 악랄했으며 또한 신속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도 수십 년 강호의 도산검림(刀山劍林)을 누벼온 능구 렁이들이었다. 그들은 곧 태극십팔문을 전개했다. 펑! 장력이 난무하자 요란한 폭음과 함께 은의무사들은 뒤로 튕겨져 나갔다. 그러나 그들은 금새 재차 공격했다. 관동삼괴 중 시천공이 재빨리 구두철편을 꺼내 태극십팔문을 편법 (鞭法)으로 변용해 펼쳤다. 쐐--- 액! 구두철편이 마치 수십 마리의 뱀같이 한꺼번에 사오 명의 은의무 사의 목을 휘감아갔고, 반면에 시천수는 그대로 장법으로 맞서고 있었다. 쉬쉬익! 펑--- ! 시천지는 품에서 두 자 길이의 판관필(判官筆)을 꺼내 어지럽게 찍었다. 차--- 창---! 무수한 불꽃이 튕겼으나 은의무사들은 수시로 방패를 들어 막았기 때문에 관동삼괴의 절묘무비한 공격을 대부분 넘길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관동삼괴의 변화무궁한 태극십팔문의 공격에 초수 가 흐를 수록 기선을 뺏기고 말았다. 관동삼괴의 얼굴에는 희색이 떠오르고 있었다. '과거같으면 이 놈들의 삼 초(三超)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데 지금은 오히려 우리에게 승산이 있구나.' 그들은 희색이 만면했다. 초수가 거듭될 수록 무영종에 대한 경외 지심이 더욱 커지고 있었다. 한편 곡우양은 싸움 광경에 잔뜩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기이한 일이다. 관동삼괴같은 하찮은 놈들이 저런 절학을 쓰다 니.' 드디어 제한된 십 초가 지났고 시천지가 호기롭게 외쳤다. "이제 통과해도 되겠소?" 아홉 명의 은의무사는 약속이나 한 듯 뒤로 일제히 물러섰다. 곡 우양도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통과다!" 관동삼괴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는 듯 했다. "자, 이제 들어갑시다. 대형(大兄)!" 시천공이 무영종에게 이렇게 말하자 곡우양이 외쳤다. "잠깐!" 그는 무영종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시천지가 재빨리 대답했다. "그 분은 우리들의 대형이시오." 그러나 곡우양은 싸늘하게 잘라 말했다. "너희들에게 묻지 않았다!" 무영종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본인은 동해(東海)의 자부도(紫府島)에서 온 자부신군 무영종이 오." "자부신군?" 곡우양은 어리둥절하여 옆의 청의면구인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 자 또한 의혹의 눈빛으로 모른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무영종은 담담하게 웃으며 물었다. "후후... 나도 관문을 통과해야 되오?" 곡우양은 차갑게 말했다. "물론이오. 규칙이니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영종은 몸을 빙글 돌리더니 일 지(一 指)를 뻗었다. 슉!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지풍은 십 장(十丈) 밖 반석 위의 한 은 의무사의 방패에 격중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방패에는 구멍이 뻥 뚫리고 말았다. "앗!" 곡우양과 청의면구인은 동시에 경악성을 발했다. '저 방패는 비록 만년한철은 아니지만 두껍고 단단하다. 더구나 십 장의 거 【 지력으로 구멍을 뚫다니, 대체 이 자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들은 똑같이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곡우양은 눈에서 혈광이 번뜩이는 한편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대도 통과요!" 무영종은 당연하다는 듯한 눈짓을 보이며 몸을 돌렸다. "자, 가세!" 그는 관동삼괴와 함께 천마봉의 점점 더 가파라진 길을 올랐다. 그들이 사라진 후 고루혈마 곡우양은 침중하게 중얼거렸다. "생각지도 않던 괴이한 놈이 나타났군." 그는 청의면구인에게 말했다. "서영주, 금영주(金令主)에게 빨리 이 사실을 연락하는 게 좋을 것같소." "예, 알겠어요." 뜻밖에도 이번에 청의면구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청아한 소녀 의 목소리였다. 그 자는 여인(女人)이었던가? 천마봉 정상(頂上). 그곳은 정말 기이하기 짝이 없는 지형이었다. 우선 천마봉의 정상 은 넓다란 분지(盆地)였으며 넓이가 무려 열 마장에 달했다. 아래서 보기에 뾰족한 정상이 이렇게 넓다는 것만 해도 실상 괴이 한 것이었다. 그러나 더욱 괴이한 것은 그 한가운데 넓은 호수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더구나 호수의 면적만 해도 다섯 마장은 넘었으며 바로 그 호수 한가운데 온 천하무림(天下武林)을 경동시킨 수라궁이 있는 것이 었다. 수라궁은 실로 엄청난 규모의 건물이었다. 처처에 전각(殿閣)과 석탑(石塔)이 하늘을 찔렀으며 지붕은 모두 혈옥(血玉)으로 된 기와를 얹어 섬뜩한 살기가 허공을 물들이고 있었다. 수라궁 주위에는 높이 삼 장의 보(堡)가 축조되어 있었다. 사방에 보루(堡樓)가 있었는데 주변을 감싼 듯한 검푸른 호수는 자연적인 호보하(護堡河) 구실을 하고 있었다. 호보하에서 수라궁의 거대한 궁문(宮門)까지는 약 백 장 길이의 가교(假橋)가 설치되어 있었으나 기이하게도 가교의 넓이는 불과 두 사람이 나란히 지날 정도였다. 문득 봉우리 위에 네 줄기 인영이 나타났다. 그들은 다름아닌 무 영종과 관동삼괴 일행이었다. "아!" 그들은 수라궁의 형세를 보고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특히시천 공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정말 굉장한 위세로군! 수라궁이 그렇게 큰소리칠 만도 한데?" 무영종은 눈에 자광을 빛내며 수라궁을 살펴 보았다. 곧 그의 안 색이 미미하게 동요됐다. '으음. 실로 철담동장을 방불케 하는 천연의 요새구나. 게다가 무 서운 살기를 내포하고 있다.' 그는 관동삼괴를 돌아보며 침중하게 말했다. "삼괴, 이제부터 말을 함부로 하지 말고 모든 행동에 조심해야 한 다." 삼괴는 갑자기 변한 무영종의 말투에 움찔했으나 곧 공손히 고개 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신군." 호보하의 가교가 놓인 곳에 두 명의 괴노인이 탁자를 놓고 나란히 앉아 있었다. 탁자 위에는 흰 천의 방명록과 필묵이 놓여 있었다. 한 명은 흑의(黑衣)에 검은 안색, 한 명은 백의(白衣)에 창백한 모습으로 몹시도 상반된 느낌을 주었다. 그들은 모두 눈을 가늘게 뜬 채 만면에 온통 권태스런 표정을 짓 고 있었는데 나이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시천지가 그들을 보고 흠칫 놀라더니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저, 저들은... 흑백쌍로(黑白雙老)!" "흑백쌍로?" 무영종이 의아한 듯 반문하자 시천지는 음성을 낮추어 설명했다. "저들은 근 육십 년 전에 사라진 기인(奇人)들로 무공을 추측할 수 없는 절세 고수들입니다. 또한 저들은 행동이 몹시 신비하여 출신내력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을 이었다. "저들은 정파에 가까운 인물들인데 어째서 수라궁의 문(門)을 지 키는지 모르겠습니다." "음." 무영종은 신음을 발하며 앞장서 흑백쌍로 가까이 성큼성큼 걸어갔 다. 그러나 흑백쌍로는 귀찮다는 기색을 지으며 그들을 쳐다보지 도 않았다. 단지 마지 못한 듯이 흑로(黑老)가 냉막하게 말했다. "방명록에 이름을 적으시오." 무영종도 굳이 말을 건네지는 않았다. 그저 담담히 붓을 들어 방 명록에 용사비등한 필체로 적었다. - 자부도(紫府島) 자부신군(紫府神君) 무영종(無影宗). 관동삼괴도 차례로 자신들의 이름을 썼다. - 관동삼괴(關東三怪). 대괴(大怪) 시천공(施天公). 이괴(二怪) 시천수(施天水). 삼괴(三怪) 시천지(施天地). 그들이 모두 명호를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흑백쌍로는 쳐다보지 않 았다. 이번에는 백로가 약간 부드러운 음성으로 네 개의 은패를 꺼냈다. "이것을 지니고 들어가시오." "이게 뭐요?" 시천공이 묻자 백로는 간단히 대답했다. "그것을 잃어버리면 곤란하니 잘 보관하시오." 무영종 일행은 각기 은패를 하나씩 받아 갈무리했다. 은패의 전면 에는 마(魔)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윽고 그들은 천천히 백 장(百丈)이나 되는 가교 위를 걸었다. 그러나 그 사이 호수 밑바닥을 보던 무영종의 안색이 대변했다. 놀랍게도 검푸른 호수 밑바닥에는 무수한 검(劍)이 거꾸로 꽂혀 있어 만일 물에 빠지면 여지없이 즉사할 것같았다. 또한 무수한 검 사이를 누비며 괴이하게 생긴 금빛 고기들이 떼지 어 헤엄쳐 다니고 있었다. '저 고기는 금린식인괴어(金鱗食人怪魚)가 아닌가? 묘강(苗疆)의 열수(熱水)에서만 살며 사람을 잡아 먹는다는 무서운 고기인데 이 곳에 있다니.......' 이 모든 것은 관동삼괴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았다. 물 속 깊은 곳 의 상황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호수의 색은 어두운 푸른색이었던 것이다. 무영종은 마음이 무거워짐을 느꼈다. 잠시 후 마침내 그들은 가교를 모두 통과했다. 붉은 철문으로 된 궁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궁문 안으로 들어가니 한 명의 황의유 삼을 입은 준수한 청년이 십여 명의 은의무사들을 거느린 채 서 있었다. 무영종은 또다시 흠칫했다. '금악비(金岳飛.)' 황의청년은 바로 남창의 만경루에 나타났던 금마비(金魔匕)의 주 인공 금악비였던 것이었다. "하하하... 어서 오십시오, 여러분." 금악비가 호탕하게 웃으며 환영했다. "소생은 금악비라고 합니다. 진심으로 여러분의 방문을 환영합니 다." 무영종은 담담히 말했다. "아! 금소협이셨구료. 본인은 무영종이오." 포권을 나누던 금악비의 눈빛이 기이하게 빛났다. '서매(徐妹)의 전신에 의하면 이 자는 보통이 아니라던데.' 그러나 그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핫핫핫! 관동삼괴의 명성은 귀가 따갑도록 들었습니다. 세 분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세 분 덕분에 수라궁이 더욱 빛나는 것 같습 니다." 그의 대소에는 비웃음이 깃들어 있었다. 이를 눈치 챈 관동삼괴는 모두 울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그들은 억지로 화를 참았으며 금악 비는 몸을 돌렸다. "자, 소생을 따라 오십시오. 여러분이 머물 곳을 마련해 드리겠습 니다." 그는 앞장 서 걸었다. 정면에 하나의 거대한 대전을 지나자 넓은 화원(花園)이 나타났다. 일행은 화원 사이의 청석길을 걸어들어 갔다. 무영종은 직감적으로 화원의 꽃과 수목, 그리고 담장 틈새에서 무 서운 살기를 느낄 수가 있었다. '십팔 명이나 화원에 매복해 있군.' 일행은 다시 여러 개의 담을 지나 한 채의 화려한 전각으로 안내 되었다. 역시 정교하게 꾸며진 화원 사이에 별원(別院)과 전각, 방사(房舍)가 줄지어 질서있게 축조되어 있었다. 그들이 당도하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몇 명의 무사가 나타났다. 금 악비가 뭐라 지시하자 한 무사가 관동삼괴를 안내했다. "세 분은 소생을 따라 오십시오." 시천공, 시천수, 시천지는 무영종을 바라보았다. 무영종은 고개를 끄덕이며 재빨리 전음으로 말했다. (따라가 내가 지시할 때까지 기다리게.) 관동삼괴는 불안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무사를 따라갔다. 그들은 서쪽의 방사로 안내되고 있었다. 무영종은 여전히 금악비가 안내했으며 곧 그들은 우아하게 건립된 한 채의 전각 앞에 이르렀다. "이곳은 매화각(梅花閣)으로 무대협께서 거처하실 곳입니다." 무영종은 매화각을 둘러보았다. '푸대접은 아니군.' "참, 잊은 것이 있습니다." 무영종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금악비가 웃었다. "본궁의 사정상 개파대전이 십 일(十日) 간 연기되었습니다. 죄송 하지만 이곳에서 그때까지 머물러 주시기 바랍니다." '십 일 연기라고?' 무영종은 뜻밖의 말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금악비가 갑자기 손뼉을 세 번 쳤고, 그것이 신호인 듯 매화각의 문이 열리더니 한 명의 아름답기 그지없는 녹의시비가 나왔다. 그녀는 놀랄 정도의 미녀로 몸매가 특히 섬세했다. 금악비는 그녀를 야릇한 눈으로 보며 말했다. "매군(梅君), 이 분은 본궁의 귀빈이시니 정성껏 잘 모셔라." 시비 매군은 허리를 사뿐히 숙였다. "알겠습니다, 영주님." 금악비는 고개를 돌려 말했다. "자, 무대협. 무엇이 필요하든 간에 매군에게 분부하십시오. 소생 은 손님 대접 때문에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좋을 대로 하시오." 무영종이 담담히 말했다. "오늘 밤 군웅전(群雄殿)에서 연회가 있으니 필히 참석하시기 바 랍니다." "알겠소." "그럼." 금악비는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녹의시녀 매군이 무영종에게 사뿐히 허리를 숙이며 꾀꼬리같은 음 성으로 말했다. "나으리, 비녀를 따라 오세요." 무영종은 매군을 내려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음, 이 시녀는 실로 기이하구나. 이 정도 미모라면 도저히 일개 비녀로는 어울리지 않거늘.......' 그는 매군을 따라 매화각 안으로 들어갔다. "낭자는 이곳에 오래 있었소?" 그의 물음에 매군은 흠칫하더니 곧 교태롭게 웃었다. "호호호호... 나으리, 이 수라궁은 건립된 지 채 오 년도 되지 않 았어요. 그리고 제가 온 것은 이 년 전이예요." 무영종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 년 전이면 어린 소녀 때 왔겠군.' 매화각에 들어서자 곧 넓은 대청이 나왔다. 대청은 훌륭하게 장 식되어 있었다. 매군은 대청을 지나 한 방 앞에 섰다. "이 방이 나으리께서 머물 곳이에요. 마음에 안 드시면 언제든지 바꿀 테니 말씀해 주세요." 무영종은 방 안으로 들어서자 화려함에 놀라고 말았다. 마치 황궁 의 침궁처럼 온통 번쩍거리는 것이 화려의 극치를 이루었기 때문 이었다. "됐소. 이곳은 정말 훌륭하군!" 매군은 매혹적인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공손히 말했 다. "비녀는 바로 옆 방에 머물고 있사오니 무엇이든지 시키세요. 언 제라도 모든 분부를 받들 테니까요." 무영종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짐짓 야릇한 눈으로 매군의 교구를 응시하며 물었다. "어떤 일이라도 말인가?" 매군은 그의 물음에 무엇을 깨달은 듯 얼굴에 홍조를 띄우며 고개 를 숙였다. "네, 무엇이든지." "알겠다. 돌아가 있거라." 무영종은 말투를 바꾸며 말했다. "그럼... 언제든지 비녀를 불러 주세요." 매군은 사뿐히 절을 하고 물러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무 영종은 그녀가 매우 육감적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의 마음이 동요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화려한 방을 낯설게 둘러보며 방 한가운데 놓인 태사의에 가 앉았다. '으음, 수라궁이 개파대전을 십 일씩이나 연기하다니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렇게 생각하던 무영종의 안색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굳 어지고 말았다. '이곳에 매군과 같은 미녀가 대체 얼마나 된단 말인가? 만약 그 숫자가 많다면.......' 무영종의 자색 눈썹이 꿈틀거렸다. '혹시?' 무영종은 가슴이 쿵 하고 울리는 것을 느꼈다. 이때 문이 열리며 부르지도 않았는데 매군이 들어섰다. 그녀는 교 태롭게 말했다. "나으리, 먼 길을 오시느라 피곤하실 것같아서 목욕물을 데워 놓 았어요. 우선 목욕을 하세요." 무영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오랫만에 먼지를 씻을 겸 목욕 생각이 났다. "비녀를 따라 오세요." 매군은 나긋나긋한 몸짓으로 그를 안내했다. 대청으로 나와 한 방의 문을 여니 더운 김이 풍겨나왔다. 커다란 목통에 더운 물이 가득 담겨 있는 것이 보였다. 무영종은 욕탕에 들어선 후 옷을 벗었다. 곧 그의 미끈하고 튼튼 한 골격이 드러났다. 축골환공으로 바꾼 체격이었으나 본래의 수 려함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무영종은 천천히 목통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갑자기 문이 다시 열 리더니 욕탕 안으로 한 명의 전라미녀(全裸美女)가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놀랍게도 그녀는 바로 매군이었다. "아니!" 무영종은 대경하여 눈을 부릅떴다. 그의 눈에 매군의 나신이 적나 라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흡사 천도인 양 돌출된 팽팽하고 육감적인 젖가슴, 매끄럽게 흘러 내린 아랫배의 선(線), 그리고 은어같은 두 다리. 게다가 아랫배 밑의 은밀한 방초(芳草)가 우거진 여인의 비역까지 여지없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무영종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더구나 자신 또한 아무 것도 걸치 지 않은 알몸이니 어쩌겠는가. "이, 이게... 무슨 짓이냐?" 무영종은 아연실색하며 급히 목통 뒤로 돌아갔다. 그러나 매군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 듯 생긋 웃으며 다가왔다. "나으리의 몸을 닦아 드리려고요." 무영종은 더욱 당황하여 말했다. "필요없다, 나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 매군은 나신을 흔들며 간드러지게 웃었다. "호호호호...! 나으리께선 보기 보단 무척 부끄러움이 많군요. 나 이에 어울리지 않게요." 무영종은 움찔했으나 곧 엄숙하게 꾸짖었다. "나가라, 나 혼자 씻겠다!" 매군은 흠칫하더니 할 수 없다는 듯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그럼 소비는 물러가겠나이다. 옷은 이곳에 두겠어요." 그녀는 한 벌의 깨끗한 백의를 한 쪽에 두고 몸을 돌렸다. 잘룩한 허리와 풍만한 둔부를 기묘하게 흔들며 그녀는 밖으로 사 라졌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무영종의 안색은 서서히 굳어지고 있었다. '확실하다. 수라혈신은 십 일 동안 미인계로 군웅들의 마음을 흩 어놓을 목적이다.' 무영종은 내심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목욕을 마쳤다. 그리고 그 는 새 옷을 걸치고 흰 띠로 긴 머리를 뒤로 묶었다. 머리를 묶는 것은 이제 습관이 되고 있었다. 잠시 후 욕실 밖으로 나가자 바로 앞에 매군이 서 있다가 그를 보 고는 두 눈을 반짝이며 탄성을 발했다. "아! 나으리께서 이토록 멋진 분일 줄은 정말 몰랐어요. 아마 세 상의 여인들이 제대로 사람 볼 줄을 안다면 모두 나으리께 다투어 몸을 바치려 할 거예요." 무영종은 담담히 말했다. "너는 농담도 잘 하는구나." 매군은 교태롭게 웃으며 물었다. "나으리께서 소비에게 시키실 일은 없나요?" "없다. 더이상 수고할 것 없으니 가서 쉬어라." 매군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달콤하게 말했다. "소비는 나으리를 모시는 몸이에요. 언제나 곁에 있도록 되어있으 니 서슴치 말고 어떤 분부든지 내려 주세요." 무영종은 흠칫했다. '이 비녀는 의외로 당돌하구나. 아마도 윗사람에게 단단히 명령을 받은 모양이로군.' 무영종은 진지하게 물었다. "너는 도저히 비녀같지 않은데... 원래는 고귀한 출신이 아니었느 냐?" 매군은 생긋 웃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고마워요. 그렇다면 차후 영주님께 한 마 디만 해주세요." "영주?" "아까 금영주님에게요." "음, 무엇을 말이냐?" "저... 제가 무척 마음에 든다고요." 무영종은 눈썹을 움직였다. "음, 쉬운 일이군. 그렇다면 그것이 너에게 무슨 도움이 되느냐?" "그렇게 되면 영주께서는 소비를 나으리에게 주실 거예요." 무영종은 멈칫하며 헛기침을 발했다. "흠, 좀 우습군." "네?" "너는 나를 오늘 처음 봤는데도 자신을 나에게 맡길 수 있다는 것 이냐?" 매군은 갑자기 만면에 처량한 표정을 지었다. "소녀는 비록 천한 일개 비녀이지만... 아직... 처녀의 몸이예 요." 그녀는 왼팔의 소매를 걷더니 하얀 팔뚝을 보여 주었다. 그 곳에 는 순결성을 상징하는 수궁사(守宮砂)가 찍혀 있었다. "저는 그 동안... 함부로 몸을 굴리지 않았어요." 무영종은 입가에 신비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매군을 내려다보며 담담히 말했다. "너는 대단히 아름답다. 그러나 나는 너에게 관심이 없다." 매군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그러나 급히 고개를 떨구는 그녀의 눈가에 이슬이 맺히는 것을 무영종은 볼 수 있었다. '음, 만약 이 소녀의 행동이 의도적인 것이라면 실로 무서운 심계 (心計)다. 다른 사람에게 이런 방법을 쓴다면 십중 팔구는 넘어갈 것이다.' 매군이 가볍게 탄식하며 말했다. "소비가 잠시 주제넘는 말을 한 듯 하옵니다. 나으리께 용서를 비 옵니다." 그녀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무영종은 담담히 고개를 저으며 말 했다. "그럴 필요없다. 나는 쉬고 싶으니 너도 잠시 물러가 있거라." "네, 나으리." 매군은 몸을 돌려 사라졌다. 무영종은 자신의 거실로 돌아가 태사의에 깊숙히 몸을 묻은 뒤 깊 은 명상에 잠겼다. 저녁 무렵이었다. 무영종의 거실 문 앞에서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무대협, 안에 계십니까? 소생 금악비입니다." 무영종은 태사의에서 일어섰다. "아! 들어오시오." 문이 열리고 금악비가 들어오더니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군웅전에서 연회 준비가 끝났습니다. 개파대전을 연기하게 된 데 대한 사과의 의미에서 성대하게 연회가 벌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무대협을 모시러 왔습니다." "음, 그렇소?" 무영종은 곧 그를 따랐다. 그들이 매화각을 나오자 관동삼괴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대형(大兄)!" 시천공이 반색을 지었다. 그리고 곧이어 금악비의 안내로 그들은 화원 사이를 지나갔다. 그 사이 무영종은 사방을 예리하게 살핀 결과 화원과 전각 건물 등의 은밀한 곳마다 보이지 않는 감시망이 펼쳐져 있음을 발견하 고 침중해졌다. '으음,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것도 드러나지 않으나 속으로는 무 서운 살기를 내포하는 지세다. 곳곳에 고수들의 눈길이 감시하고 있구나.' 얼마 후 그들은 한 커다란 대전에 당도하게 되었다. ■ 대소림사 제19장 음모(陰謀)의 밤 -1 ━━━━━━━━━━━━━━━━━━━━━━━━━━━━━━━━━━━ 군웅전(群雄殿). 대전의 현관에 쓰여진 필체는 웅후한 가운데 패기가 넘치고 있었 다. 군웅전은 넓은 대청으로 되어 있어 수백 명이 함께 연회를 벌 일 수 있는 방대한 규모였다. 무영종 일행은 금악비에 의해 군웅전 앞에 안내되었다. "자, 무대협. 소생은 잠시 다녀올 곳이 있으니 먼저 올라가십시 오." 금악비의 말에 무영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을 대로 하시오." 금악비가 총총히 오던 길로 사라지자 무영종은 관동삼괴와 함께 군웅전으로 올랐다. 군웅전 안에는 과연 성대한 연회가 벌어지고 있었다. 거대한 긴 탁자가 놓여져 근 오백 명이 넘는 군웅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탁자에는 온갖 미주가효가 풍성히 놓여져 있었다. 무영종은 들어서자마자 주위를 둘러본 뒤 아는 인물들이 꽤 많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먼저 사가(四家), 일장(一莊), 이보(二堡)의 인물들이 보였는데 사대세가(四大世家)의 가주들과 그들의 젊은 후인들이 대부분 모 여 있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태양장(太陽莊)의 태양신군 황보숭양과 황보무룡, 황보문연, 천풍보(天風堡)의 태을성수 종리자허, 신창보(神槍堡)의 자면신창 소중산 등.......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도무림(邪道武林)의 남맹(南盟)인 천군맹 (天群盟)의 맹주 구주진천도 조천명과 그의 수하들, 일교(一敎)인 통천교(通天敎)의 교주 통천마군 흑고의 모습도 보였다. 이곡(二谷)인 혈영곡(血影谷)의 곡주 혈의마검 공손패와 그의 수 하인 혈의삼십육궁(血衣三十六弓), 백독곡(百毒谷)의 곡주 백독마 군(百毒魔君) 음무위(陰武韋)와 그의 수하인 십독(十毒)도 있었 다. 그밖에도 숱한 정사도의 고수들과 구파일방(九派一幇)의 고수들도 보였다. 근 백 년(百年) 간 보이지 않던 십팔나한의 출현은 매우 경이로운 일이요, 무당(武當)파의 도사들과 그밖에도 구파일방의 고수들이 곳곳에서 보이는 것 또한 놀랄 만한 현상이었다. 무영종은 주위를 면밀히 훑어보다 한 인물의 이름을 되뇌였다. '호불범도 왔구나.' 만사귀재 호불귀의 후인인 호불범이 천안통수(天眼通 ) 마운로와 함께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무영종은 다시 주위를 둘러보다 내심 의혹을 느꼈다. '북단의 단주인 선풍마서생 위전풍과 오상공자(五霜公子)가 보이 지 않는구나.' 무영종은 대충 장내의 인물들을 살펴본 후 관동삼괴와 함께 빈자 리를 찾아 앉았다. 그는 앉자마자 전음으로 말했다. (삼괴, 지금부터 나의 명령이 있기 전에는 절대 섣불리 움직이지 마라.) 관동삼괴는 모두 공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이미 무영종이란 신비한 인물에게 완전히 굴복되고 있었다. 무영종의 옆 조금 떨어진 자리에는 한 명의 괴도(怪道)가 앉아 있 었다. 그는 몰골이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으며 입고 있는 도포도 낡아 너 덜거리고 있었다. 봉두난발 사이로 두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채 그는 연신 술을 병째로 벌컥벌컥 마시고 있었다. 워낙 술과 음식을 아귀처럼 먹어대는 바람에 그의 주위에는 아무 도 앉는 사람이 없었다. "크으... 독하구나. 과연 죽엽청(竹葉靑)은 언제 마셔도 좋거든!" 무영종은 자음자작하는 그를 유심히 보았다. 나이는 사십 정도로, 자세히 보니 그의 용모는 비록 지저분하긴 했어도 청수한 편이었고 지혜가 어려 있었다. 중년 괴도사는 주위를 훑어 보더니 히쭉 웃으며 중얼거렸다. "모두 악살(惡殺)이 꼈어, 모두! 흐흐흐... 죽을 줄도 모르고 함 정에 뛰어들다니." 그는 술을 다시 들이킨 후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하듯 말했다. "하기야... 덧없는 인생(人生) 멋지게 싸우다 죽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 흐흐흐......." 비록 그의 음성이 크지는 않았다 해도 장내의 군웅들은 모두 쟁쟁 한 무림고수들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괴도사의 말을 듣고는 모 두 눈살을 찌푸렸다. 누군가 거칠고 우렁찬 음성으로 말했다. "친구! 말이 좀 지나치군!" 괴도사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그 자를 바라보았다. 팔 척(八尺)의 거구, 그 인물은 탁자 위에 거대한 철궁(鐵弓)과 유성추를 놓고 있는 장한이었다. 그의 얼굴은 사각형이며 고리눈에서는 전광같은 섬뜩한 빛이 쏟아 져 나오고 있어 매우 위압적인 모습이었다. "으하하하하!" 그러나 괴도사가 갑자기 마구 웃어제끼자 입에서 침이 튀고 탁자 위의 술병이 엎어졌다. 그러한 그의 행동은 예의 거한을 격노케 했다. 꽝! 거한은 탁자를 손바닥으로 쳤고 솥뚜껑 만한 시커먼 장인(掌印)이 탁자에 선명히 찍혔다. "미친 놈, 죽고 싶으냐? 감히 나 사해신군(四海神君) 구양경(歐陽 卿)을 놀리다니!" 그의 우렁찬 고함은 군웅전을 찌르릉 울렸다. 괴도사는 비로소 광 소를 그쳤으나 여전히 히쭉히쭉 웃으며 지껄였다. "당신이 황하칠십이채(黃河七十二寨)의 총표파자 사해신군 구양경 이란 말이오?" "그렇다! 이 미친 말코야!" 사해신군 구양경, 그는 겉으로 보기에는 사순 가량 되어 보였으나 실제 나이는 이미 칠십이 넘었다. 워낙 타고난 성품(性品)이 격정 적이라 나이가 들어보이지 않을 뿐이었다. 그의 무적철궁칠십이로(無敵鐵弓七十二路)와 단혼절명유성추법(斷 魂絶命流星錘琺)은 무림의 패도지학이었다. 그는 벌써 삽십 세 때 황하칠십이채를 건립했다. 특히 의제(義弟) 이자 군사(軍師)인 신안수사 제갈전의 지모의 도움으로 인해 황하 칠십이채를 무림의 철벽으로 세운 일대호걸이었다. 그런데도 괴도사는 그를 전혀 안중에 없다는 듯 비웃고 있었다. "흐흐흐... 당신은 일찌감치 이곳에서 도망가는 게 좋겠군. 보름 이내로 당신은 반드시 액운을 당할 거야. 흐흐흐." 악담도 그쯤되면 이만저만 도가 지나친 게 아니었다. 사해신군 구 양경은 노기를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죽여버리겠다! 미친 도사 놈!" 그는 두 눈에서 분광을 폭사하며 벌떡 자리에서 뛰쳐 일어났다. 그러나 곧 지극히 차분하면서도 침착한 말이 그를 만류했다. "구양대협(歐陽大俠), 참으시오. 이곳에서는 모두가 같은 배를 탄 격이니 내부에서 분열을 일으키면 오히려 수라궁 만 좋은 일을 시 켜주는 셈입니다." 그는 구양경의 옆 자리에 앉아 있던 이십 세 가량의 한 청년으로 누가 죽었는지 상복(喪服)을 입고 있었다. 지극히 준수한 용모와 지혜로운 두 눈, 그리고 창백할 정도로 흰 피부가 사람들의 인상에 깊게 자리하게 하고 있었다. 머리에는 유 생건을 쓰고 있어 단아하고도 고귀한 기품이 흘렀다. 그가 만류하자 구양경은 안면을 씰룩이더니 간신히 화를 참으며 앉았다. "석공자(石公子)가 아니었다면 노부는 저 놈을 그저......." "구양대협의 넓으신 도량은 무림에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상복청년의 음성은 침착하고도 냉정했다. 구양경은 그를 보며 탄 식했다. "아! 복건(福建) 석가(石家)의 석대선생(石大先生)의 죽음은 곧 무림의 지다성(智多星)이 떨어진 것이야. 다행히 그 분의 후인인 석검영(石劍英) 공자가 있으니 곧 선생의 원한을 갚을 수 있을 걸 세." 상복청년은 바로 비명횡사한 칠인의 무림지사 중 석대선생의 후인 이었다. 석대선생의 손자로 지무성(智武星) 석검영이라 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무영종은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사해신군 구양경을 저렇듯 쉽게 다루는 석검영이란 청년은 보통 인물이 아니다.' 한편 괴도사는 주의의 상황과는 아랑곳 없이 다시 연신 술을 마시 기 시작했다. 그러다 옆 쪽에 앉은 무영종을 발견하자 그의 게슴 츠레하던 두 눈에 이채가 번쩍 일어났다. 그는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비틀거리며 무영종에게 다가왔다. "형씨, 여기 좀 앉읍시다." 무영종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괴도사는 허락도 없이 털썩 주 저 앉더니 넉살 좋은 괴소를 흘렸다. "헤헤헤... 솔직히 내 자리의 술은 모두 바닥이 났소. 좀 실례하 겠소이다." 무영종은 담담히 그가 하는 대로 보고만 있었다. 괴도사는 덥썩 술병을 거머쥐더니 말했다. "이 타락한 도인은 선기묘인(仙機妙人) 사도유(司徒有)라 하오." "본인은 무영종이오." 선기묘인 사도유는 두 눈을 가늘게 했다. "무영종이라... 무척이나 신비한 이름이구려." 사도유는 술병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의 이런 무례한 행동에 무 영종은 막상 담담했으나 오히려 관동삼괴가 노기를 띠고 들먹거렸 다. 그러나 무영종이 눈짓으로 제지하자 그들은 이내 조용해졌다. "흐흐흐... 역시 인생은 술밖에 가치있는 것이 없지." 선기묘인 사도유는 트림을 했다. "키억!" 그리고 그는 혀꼬부라진 소리로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크... 으. 나는 저 머나먼 대막(大漠)에서 왔소." 무영종은 표정에서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고 듣고 있었다. "빌어먹을 수라궁인지 무언지 모르지만 그 자식들은 기인(奇人)도 몰라본다오. 무림의 쓰레기같은... 크윽! 자들에겐 마존첩인지 뭔 지를 돌리면서... 커... 억! 이 뛰어난 선기묘인 사도유 어르신에 게는 그런 것 한 장 안 주니 말이오." 군웅들이 모두 들었으되 군웅들 전체를 한데 묶어 쓰레기로 치부 한 그의 말은 실로 대담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군웅들의 얼굴에는 은은히 노기가 어리고 있었으나 무영종은 내심 느끼는 것이 있었다. '마존첩을 받지 않았다고? 그럼 이 자도 이 관(二關)을 통과한 인 물이란 말인가.' 그는 사도유의 소매를 잡았다. "사도형, 이제 그만 드시오." 그러나 사도유는 그 말에 펄쩍 뛰었다. "아니 무형, 내가 지금 주정하는 줄 아시오? 천만에, 천만의 말씀 이오. 나는 지금 그 누구보다도 정신이 맑소." 그는 다시 술병을 잡았으나 술병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젠장! 술이 떨어졌군!" 사도유는 밖을 향해 빽 고함을 쳤다. "여봐! 여기 술을 더 가져와라!" 실로 방약무인한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군웅전 밖에서 십여 명의 청의시비들이 술병을 안고 들어왔 다. 그들 중 한 시비가 사도유 앞에 와 두 개의 술병을 내려놓았 다. 그녀는 아름답고 청초한 용모를 지닌 십칠팔 세쯤 되어보이는 미 소녀였다. 선기묘인 사도유의 오른손이 느닷없이 그녀의 둔부를 쓰다듬었다. "어머!" 시비는 그만 깜짝 놀라 얼굴이 빨개졌다. "나리, 이러시면 안 되옵니다." 시비는 도망치듯 달아났다. 사도유는 키들키들거렸다. "아름다운 계집들이야! 흐흐흐... 저 정도의 미모라면 천하의 철 석간장도 녹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치마폭 아래 많은 사내들이 무릎을 꿇겠는걸?" 사도유는 계속 낄낄거리며 술을 들이켰다. "오호라! 그대여, 아느냐? 여인(女人), 여인이란 존재는 남자를 즐겁게 해주지. 황홀할 정도로. 그러나 그 웃음 속에 독(毒)이 있 음을 아는가?" 사도유는 실로 미친 사람같았다. "흐흐흐흐... 젊고 장래가 촉망받는 젊은 영웅들, 일개의 협사(俠 士)들....... 낄낄! 그러나 한낱 썩은 계집들의 가랑이에 침을 질 질 흘리고 만다면 끝장이지, 끝장이야!" 사도유는 두 눈을 희번뜩이며 군웅들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희한 하게도 군웅들 중 몇몇은 그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버 리는 것이 아닌가? 무영종은 그의 말 속에 현기(玄機)가 있음을 알아 보고 내심 크게 놀라고 있었다. '음, 선기묘인 사도유, 이 자는 보통 인물이 아니다. 필시 내력이 있는 자다.' 무영종은 이렇게 생각하고는 입을 열었다. "사도형, 이제 그만 하시오. 수라궁에서 들으면 어떻게 하시겠 소?" 그러나 사도유는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그까짓 수라궁이 무섭다면 이곳에 오지도 않았지. 더더구나 수라궁이 내 말에 움직인다면 흥! 그거야말로 가치도 없는 잡졸들 이고 말고." 실로 교묘한 말솜씨였다. 설사 수라궁인들이 그의 말에 분노한들 도저히 화를 낼 수가 없게 만들고 만 것이었다. 무영종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이때 어디선가 둔중한 북소리가 울 려퍼졌다. 둥! 둥! 둥! 둥! 도합 열두 번의 북소리, 그것은 군웅들의 가슴에 무겁게 와닿았 다. 장내는 삽시에 조용해졌다. 고요하기 이를 데 없는 침묵이었다. 마치 폭풍전야의 정적이라고나 할까? 군웅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가운데 장내에는 십여 명의 인물이 들 어섰다. 맨 앞장 선 자는 마치 흡혈귀처럼 생긴 괴노인으로 그는 온통 머리칼과 수염이 거칠게 자라 있었는데 기이하게도 모두 붉 은 색이었다. 또한 입은 옷도 혈의(血依)였다. 두 눈은 움푹 꺼지고 섬광이 뻗었다. 코가 유독 날카롭고 키는 구 척(九尺) 장신이었으나 몸은 깡말라 있었다. 그를 보자 군웅들 가 운데 누군가가 외쳤다. "앗! 광마혈제 적표다!" 군웅들은 그 말에 금새 웅성웅성 거렸다. 광마혈제(狂魔血帝) 적표(赤豹). 그는 나이가 이미 백이십(百二十)이 넘은 노마로 팔십 년 전 신비 하게 실종됨으로써 무림에서 자취를 감춘 바 있었다. 그의 무공은 과거 혈교의 진전을 받은 것으로 사이하고 패도적이었다. 적표는 군웅들을 둘러보며 입가에 음산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흐... 아직도 노부의 이름을 기억하는 자가 있었다니 정말 기쁘군."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 한 곳에서 갑자기 눈길을 멈추더니 두 눈에 서 혈광(血光)을 번쩍 뿜어냈다. 그의 음성이 한층 더 살벌해졌다. "흐흐흐흐... 천산(天山)의 늙은이! 이곳에서 팔십 년 만에 보게 되는군!" 그의 말에 군웅들의 시선은 일제히 그가 보는 방향으로 집중됐다. 그곳에는 오십 세 가량 되어 보이는 한 명의 지극히 평범한 용모 의 백의노인이 있었다. 보통 키에 아무런 특징도 없는 노인이었다. 단지 눈길을 끌 것이 라면 노인이 허리에 찬 한 자루의 백검으로 수실과 자루, 검집까 지 모두 순백의 검이었다. 백의노인의 눈빛은 지극히 고요하고 평정하여 마치 태어난 지 얼 마 되지 않은 어린아이의 눈빛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백의노인은 서서히 몸을 일으키더니 희대의 노마두 광마혈제 적표 에게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허허... 적형(赤兄)이 노부를 알아볼 줄은 몰랐구료." 음성은 매우 낮고 차분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중인들은 마치 귓 전에서 말하는 것처럼 똑똑히 들을 수가 있었다. 광마혈제 적표는 그를 노려보며 음침하게 말했다. "노부의 두 눈이 멀지 않는 한 아무리 세월이 흘렀다 해도 천산비 검옹(天山飛劍翁) 비간운(丕干雲)을 몰라볼 리가 있겠는가?" 순간 장내는 온통 경악에 휩싸였다. "아아, 천산비검옹!" 장내는 삽시지간 온통 경악에 휩싸였다. 천산비검옹이라면 육십 년 전 황산비무대회(黃山比武大會) 이후 한 번도 무림에 나온 적이 없다. 또한 천산파도 이십 년래 두문불 출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 자리에 그가 나타나다니, 그것도 수행제자 한 명도 없 이 말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분명 그의 나이가 백 세가 넘었음에 도 불구하고 겉으로 보기에는 오십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인다는 것 이었다. 천산파 사상 최강의 고수라는 천산비검옹은 미소를 짓더니 다시 자리에 앉았다. 광마혈제 적표는 주위를 훑어보며 말했다. "강호의 고인들이 모두 모이셨군." 그는 포권을 하는 듯 마는 듯 하며 말을 이었다. "노부는 수라궁의 부궁주(副宮主)겸 혈마전(血魔殿)의 전주요. 궁 주님을 대신하여 여러분의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하는 바요." 군웅들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사도의 대마황인 그가 수 라궁의 일개 전주(殿主)로 만족하여 있다니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던 것이었다. "우선 본궁의 고수들을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겠소." 그러자 그의 뒤에 서 있던 회색옷을 입은 깡마른 강시같은 늙은이 가 나섰다. 그는 눈동자가 없이 눈이 모두 흰자위뿐이어서 섬뜩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흐흐... 노부는 백골당(白骨堂)의 당주인 백골사마(白骨邪魔) 금 마륜이오." "아!" 여기저기서 경악성이 터졌다. 백골사마 금마륜, 그는 수개월 전 고루혈마 곡우양, 지도마살 마 운천과 함께 천풍보에 마존첩을 전달하며 모습을 보인 적이 있었 다. 그가 자기 소개를 마치자 이번에는 키가 작고 백의를 입었으며 안 색이 창백하고 백발이 무성한 괴노인이 나왔다. 그의 눈동자는 괴 이하게 남색이 돌고 있었다. "독혈당(毒血堂)의 당주인 오독비마(五毒飛魔) 구우령(仇雨令)이 오." 군웅들은 다시 웅성거렸다. 오독비마 구우령은 오십 년 전 사라졌던 대흉마로써 독술독공(毒 術毒功)의 제일인자였기 때문이었다. 다시 한 명의 청의노인이 나섰다. 그는 살집이 좋은 인자하게 생 긴 팔순노인으로 언뜻 보아서는 마음씨가 지극히 좋은 객점주인같 은 인상이었다. "하하... 노부는 음풍당주(陰風堂主) 불면소살(佛面笑殺) 호천광 (胡天光)이오." 강호에서 오랜 옛날 이런 노래가 한 때 유행한 적이 있었다. 儆笑者 笑中殺. 儆笑年 暗中殺. 웃는 자를 조심하라, 웃음 속에 살인을 한다. 어린 소년을 조심하라, 보이지 않은 곳에서 은밀히 살수를 뻗는 다. 이 노래는 사십 년 전의 두 마두(魔頭)를 가리키는 것으로 경소자 (儆笑者) 소중살(笑中殺)이란 바로 언제나 인자한 불면(佛面)과 웃음 속에 칼을 품고 있는 불면소살 호천광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으... 음." 군웅들은 음풍당주인 호천광을 보며 가슴이 섬뜩함을 느꼈다. 다시 이번에는 한 명의 혈의노인이 나왔다. "고루당주(蠱淚堂主) 고루혈마 곡우양이오." 그는 천풍보에 나타난 적이 있었다. "마살당주(魔殺堂主) 지도마살 마운천이오." 흑의에 깡마른 노인, 종이칼(紙刀)로 돌을 자르는 대마두도 역시 천풍보에 나타난 적이 있었다. "야천당주(夜天堂主) 환우령(幻羽囹)이오!" 흑의(黑衣)에 얼굴에는 검은 복면을 쓴 괴인(怪人), 그는 삼십 년 전 야제(夜帝)라는 별명이 붙었던 밤에만 나타났던 마두였다. "광풍당주(狂風堂主) 열화풍사(熱火風砂) 관천우(關千牛)요!" 사막(砂漠)에서 악명 높기로 이름났던 삼십 년 전 광풍문(狂風門) 의 문주로 그는 갈의를 입었으며 가슴에는 풍(風)자가 새겨져 있 었다. "사신당주(死神堂主) 화의사신(華衣死神) 곡량(哭亮)이오!" 삼십 년 전 무림에서 가장 기분나쁜 마인(魔人)이 나타났다. 그 는 언제나 화려한 화복(華服)을 입고 다녔으며 꼭 경사가 있는 강 호고수들의 장원이나 문파에 잘 나타났다. 그러나 그가 나타나면 잔치는 머지않아 초상집으로 화하고 말았다. 그는 항상 죽음을 몰고왔기 때문이었다. 그 역시 사십 년 전 무림 에서 자취를 감추었다가 다시 출현했다. 이름하여 팔대당주(八大堂主). 그들은 말 그대로 각기 수라궁의 팔당(八堂)을 맡고 있었다. 장내의 군웅들은 그들의 소개가 끝나자 온통 경악과 미혹에 사로 잡히고 말았다. 팔대당주는 모두가 한결같이 백 살이 넘은 전대의 대마두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최소한 삼십 년 전에 의문의 실종을 했던 자들이었다. 더구나 오독비마, 비천야차, 열화풍사 등은 이미 죽은 것으로 소 문이 나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모두 수라궁의 수하가 되어 있을 줄이야 과연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장내(場內)의 분위기는 지극히 침중해졌다. 군웅들은 수라궁의 일개 전주와 팔대당주가 가공할 거마(巨魔)들 로 구성되어 있음에 모두 공포심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광 마혈제 적표가 중인들을 깔보듯이 둘러보며 말했다. "우선 여러분께 한 가지 양해를 구하겠소. 이미 들어서 알고 계시 겠지만 본궁의 개파대전은 사정상 십 일(十日)동안 연기되었소. 그 점에 대해서 사과드리오." 그는 비록 사과한다고 했지만 조금도 미안해 하는 빛이 보이지 않 았다. 어디선가에서 착 가라앉으면서도 깊은 분노심이 서린 음성이 그 말을 받았다. "적표!" 적표의 안색이 변했다. 그 누가 감히 그의 이름을 부른단 말인가? 군웅들도 놀라 소리가 들린 곳을 일제히 주시했다. 대청의 중앙에서 한 명의 갈의노인이 일어서고 있었다. 그는 탁자 위에 긴 흑도(黑刀)를 들고 있었는데 팔십 정도 되어 보이는 나이에 체격은 건장하고 비범한 용모를 가지고 있었다. 특 히 눈빛은 마치 두 자루의 비수를 보는 기분이었다. 그는 일어서서 예의 분노서린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십 일을 연기하든 백 일을 연기하든 다 좋다. 그러나 한 가지만 묻자!" 그의 말투는 칼로 끊듯 단호했다. 적표는 자신에게 감히 막말을 하는 갈의노인에 대해 살기를 띄웠다. "네 놈은 누구냐?" 갈의노인의 눈이 무섭게 빛났다. "노부는 팽가의 가주(家主)인 패천참인도(覇天斬刃刀) 팽천후다." 적표의 표정이 움찔 변했으며 군웅들은 술렁거렸다. 팽천후는 두 눈을 무섭게 부릅뜨며 물었다. "팽가에서 나의 손자를 그토록 잔인하게 죽인 놈이 누구냐?"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으나 무서운 살기를 내포하고 있었다. 적표의 눈빛이 야릇해졌다. "후후후... 팽가주, 노부가 한 마디 하겠네." 그는 말을 놓았다. 나이나 무림의 경력이나 모든 것이 선배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패천참인도 팽천후의 말투는 그보다 더 했다. "무엇을 말이냐?" 적표는 노기를 띄웠으나 참고 말했다. "십 일 후 개파대전 때 그대의 모든 원한을 풀 수 있도록 해주겠 네." 팽천후의 안면이 가볍게 경련을 일으켰다. 그의 뇌리에는 그 순간 비참하게 찢겨죽은 손자의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러나 역시 그는 무림의 고인다왔다. "석 달 동안 기다린 것을... 십 일 더 못기다릴 것도 없지." 그는 분노를 삭이며 도로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역시 분노성 깃 든 음성이 또 한 차례 터져 나왔다. "적선배!" 외침과 함께 한 명의 흉맹하게 생긴 흑의노인이 일어서고 있었다. 그는 체격이 장대한 칠순 노인으로 얼굴에 긴 상흔(傷痕)이 나 있 었다. "노부는 천군맹(天群盟)의 맹주인 구주진천도(九州震天刀) 조천명 이오!" 장내가 술렁거렸다. 현 사파무림을 양분하고 있는 남맹북단(南盟 北檀)중의 남맹 천군맹의 맹주. 구주진천도 조천명의 이름은 우는 아이도 그치게 할 공포의 존재였다. "내 비록 사도의 인물이나 사(邪)에도 엄연히 법도가 있음을 알고 있소!" 조천명의 두 눈에서는 으스스한 살광이 뻗쳐 나왔다. 그 눈빛을 한 번 본 자는 절대로 그와 원한을 살 수가 없다. 그것은 조천명 의 무서움이 바로 정확한 은원을 신조로 하기 때문이었다. 은혜 입은 자는 꼭 갚되 원수는 반드시 처참하게 복수한다. 이것 이 조천명의 철칙이자 천군맹(天群盟) 삼천여 명 고수의 계율이었 다. 조천명은 수라궁의 혈마천주인 광마혈제 적표를 노려보며 계속 말 했다. "적선배! 당신은 분명 동도에서 나보다 선배요. 당신이 선배라면 이 후배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오." 적표는 그의 당당한 태도에 움찔했다. 조천명은 두 눈에서 불똥을 튕기며 물었다. "적선배, 나의 노모(老母)를 죽인 자는 누구요?" 적표는 안색이 변했으나 곧 음침하게 웃으며 말했다. "조맹주, 노부의 신의를 걸고 약속하겠소. 십 일 후 모든 사실을 알려주겠소." 조천명의 입가에 살기가 어렸다. "좋소! 적선배의 말을 믿겠소. 그러나 한 가지 명심하시오. 나 조 천명의 이름이 결코 하루 아침에 얻어진 것이 아님을 말이오." 그는 침중하게 말을 이었다. "수라궁이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나 천군맹의 힘 또한 그에 못지 않음을 알아야 할 것이오." 적표는 음산한 읏음을 터뜨렸다. "크흐흐흐... 좋소, 조맹주! 조맹주의 뜻은 충분히 알겠소." 그는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자, 그건 그렇고 오늘밤은 여러분을 위해 특별히 연회를 베푼 것 이니 마음껏 먹고 즐기시기 바라오." 적표는 손을 들었다. "여봐라!" 그러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장내에 오십여 명의 청의시비들이 나타 났다. 그녀들은 모두 품에 술병을 안고 있었으며 한결같이 어디다 내놓아도 미색(美色)을 자랑할 수 있는 미녀(美女)들이었다. "핫핫핫... 오늘은 특별히 백 년(百年) 묵은 설홍매로주(雪紅梅露 酒)를 열 독 준비했소. 즐겁게 드시기 바라오." 적표의 말이 떨어지자 오십 명의 시비들은 바쁘게 군웅들 사이를 누비며 술병을 나르기 시작했다. 장내에는 향기로운 주향이 진동했다. 그러나 보기 드문 명주인 설 홍매로주가 탁자마다 놓여졌음에도 불구하고 군웅들은 한 사람도 술을 마시려 들지 않았다. 선기묘인 사도유가 갑자기 낄낄거리며 말했다. "이 좋은 섬서(陝西) 특산의 미주를 놓고 마시지 않다니 정말 바 보같은 자들이군!" 그는 술병을 덥썩 쥐더니 벌컥벌컥 마셔댔다. 군웅들의 눈은 일제 히 그에게 향해졌다. 사도유는 단숨에 한 병을 비워대더니 다른 병을 잡았다. "자, 자! 무형도 한 잔 드시오!" 무영종은 담담히 술잔을 내밀었다. "고맙소, 사도형." 그는 사도유가 따라주는 술을 거침없이 마셨다. 사도유는 유쾌하 게 대소했다. "하하하... 무형은 정말 이 도사의 마음에 들었소. 진정 무형이야 말로 영웅 중의 영웅이라고 할 수가 있소. 핫핫핫핫." 그는 대소를 뚝 그치더니 이번에는 적표에게 얼굴을 돌렸다. "적노선배. 소생이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소이다." 적표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사도유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흥 얼거리듯 말했다. "소생이 알기로는 현재 수라궁에 들어온 군웅의 숫자는 모두 오백 오십 명인데 어째서 이곳에는 오백십일 명밖에 없는 것이오?" 그 말에 적표의 안색이 급변했다. "그대는 누구인가?" "후후후... 소생 말이오? 크크... 소생은 사도유라는 시시껄렁한 거지도사요." 사도유는 연신 장난치듯 킬킬거렸다. "그건 그렇고, 아까 소생의 물음에 대답을 해주시지요? 적선배 님." 적표의 얼굴에 무서운 살기가 덮혔다. "노부는 그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자 사도유는 다시 술을 몇 모금 마신 뒤 킬킬거리며 말했다. "소생이 알기로는... 킬킬... 그 삼십 구 명은 이미 수라궁에 넘 어간 것으로 알고 있소만?" 군웅들의 안색이 대뜸 홱 변했다. "클클클... 여기에 계신 이 멍청한 영웅호한들만 모두 제거하면 이제 곧 수라궁은 강호독패를 이룰 것이 틀림없구료." 군웅들의 안색은 더욱더 크게 변했다. 삽시간에 장내는 소란해지 고 말았다. 벌써 몇몇 사람은 탁자를 치며 일어서고 있었다. 적표는 무섭게 외쳤다. "사도유!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 그러나 사도유는 추호도 개의치 않고 다시 술을 들이키더니 이번 에는 고개를 저어댔다. "낄낄낄... 적노선배, 농담이오 농담! 소생이 적노선배 말대로 잠 시 헛소리를 했소. 낄낄낄." 사도유는 괴소를 흘리며 마침내 더이상 술을 이기지 못하는 듯 탁 자에 얼굴을 처박고 말았다. 그리고 이내 그는 요란하게 코를 골 며 잠이 들어 버렸다. 적표는 그만 상대를 잃은 꼴이 되고 말았다. 그는 무서운 눈으로 사도유를 노려보다가 마침내 몸을 돌렸다. 무영종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음, 이 선기묘인이란 자는 두서없이 횡설수설 하는듯 하지만 실 상은 그 누구보다도 냉철하다. 실로 심계와 지혜가 깊은 자다.' 그는 탁자에 엎드려 코를 골고 있는 사도유를 차분히 훑어보며 다 시 중얼거렸다. '그러나 단점은 너무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위험 을 유발시키니 좋은 방법이 못된다.' 장내의 상황은 몹시 어색하고 침중하게 굳어져 있었다. 이백이십일 명에 달하는 군웅들은 아무도 입을 여는 자가 없었고 술과 음식을 드는 자도 없었다. 모두 납덩이같은 안색으로 이 무 서운 음모(陰謀)의 밤이 지나기 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현광대사(玄光大師). 소림사 선좌원주(禪坐院主). 그는 소림사에서 불심(佛心)이 깊기로 장문인인 현공대사(玄空大 師)와 필적했다. 또한 현자(玄字) 항렬에서 현오(玄悟), 현공(玄 空) 다음의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 누구보다도 마음이 깊고 차분했으며 심기도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현오대사와 특히 친분이 두터웠다. 현오 가 소림사에 방문한 흑의여인 단혜령에게 죽은 후 가장 슬퍼한 것 도 바로 현광이었다. 천심선사(天心禪師)는 그를 선택하여 십팔나한과 함께 수라궁으로 보냈다. 거기에는 바로 그가 그 누구보다도 침착하다는데 이유가 있었다. 현광은 백 세가 넘었는데도 얼굴에 주름이 없었다. 방 안에 앉아 탁자 위의 촛불을 응시하는 현광대사의 깊고 맑은 두 눈에는 근심이 어려 있었다. 그가 있는 곳은 수라궁이 마련해 준 거처로써 추심각(秋心閣)이었다. '으음. 정혜(丁慧)에게서 소사제가 이곳으로 온다고 들었는데 어 찌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현광대사는 지금 한 가지 일을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 '대사부님의 혜안은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다. 당금의 어지러운 무림을 구원할 자는 오직 소사제밖에 없다.' 문 밖에서 낭랑한 음성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사숙님, 주무십니까?" "음, 정혜냐?" "네, 사숙님." "들어 오너라." 잠시 후 방 안으로 정혜가 들어왔다. 그는 여전히 영준한 얼굴에 두 눈이 물처럼 고요했다. 그것은 당대 소림사의 젊은 고수중 일 인자다운 면모였다. 정혜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현광대사는 그를 내려보며 담담히 물었다. "정혜, 소사제의 행적은?" "아직도 묘연하옵니다." 정혜는 그러나 확신하듯 말했다. "그러나 소사숙님은 워낙 초절한 분이시므로 어쩌면 벌써 이곳에 와 있을지도 모릅니다." 현광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역시 그렇게 믿는 듯한 눈치였 으나 갑자기 무엇을 생각했는지 진지하게 말했다. "정혜, 만사(萬事)에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호굴(虎屈)에 들어와 있다. 천려일실이라 했으니 극히 조심에 조심을 기해야 한 다." 정혜는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알고 있습니다." 현광대사는 고개를 들어 촛불을 바라보며 침중하게 말했다. "수라궁이 개파대전을 십 일 미룬 것은 필시 크나큰 음모일 것이 다. 어쩌면... 상상도 못할 무서운 일이 일어날지도." 현광은 안색이 어두워지며 입을 다물었다. 이번에는 또한 무엇을 생각하는지 얼굴에 불안한 기운이 음영으로 얼룩지고 있었다. 잠시 시간이 흘렀고 현광은 다시 입을 열었다. "정혜, 노납이 너에게 시킬 일이 있다." "네, 사숙님." "정인(丁仁)과 정비(丁比)로 하여금 두 인물을 감시케 하여라." "두 인물이라면?" "백골사마 금마륜과 오독비마 구우령이다." 현광대사는 음성이 더욱 침중해졌다. "정혜 너는 잘 모르겠지만 그 두 명은 아까 소개했던 팔대당주 중 가장 나이가 많고 음험한 위인들이다." "으음." 정혜는 침음성을 발했다. 현광은 계속하여 말했다. "무공 역시 가공할 정도다. 과거 노납이 속가시절 그들을 만난 적 이 있었는데 만약 그들이 그것을 모두 완성시켰다면......." 현광의 안색은 더욱 어두워졌다. "실로 상상도 못할 무서운 혈겁(血劫)이 일어날 것이다." 현광은 의아해 하는 정혜를 내려보며 지시를 내렸다. "정인과 정비는 십팔나한 중에서 경공(經功)이 가장 뛰어나고 머 리가 현명하다. 그들에게 각각 그들을 맡도록 해라." "네, 사숙님." "그리고 정혜. 그대는 다시 한 사람을 감시해라. 그 자는... 수라 궁의 부궁주이자 혈마전주인 광마혈제 적표다." 정혜의 안색이 변하자 현광은 침중하게 말했다. "그 자의 무공은 대단히 높다. 어쩌면... 노납보다 한 수 위일지 도 모른다." 정혜는 굳어진 얼굴로 물었다. "사숙께서 그를 감시하라는 이유는 무엇이옵니까? 현광은 무겁게 대답했다. "그 자는 과거 팔십 년 전 공동의 기인이신 적봉우사(赤鳳羽士)에 게 패한 후 사라졌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무공 외에도 무서운 것 이 있다." 정혜의 눈이 빛을 발했다. "그것은 천강삼백육십은살무영대(天 三百六十銀殺無影隊)다." "그게 무엇이옵니까?" 그러나 현광은 고개를 흔들었다. "노납도 모른다. 단지 소문에 의하면 과거 적봉우사께서 직접 그 자를 찾아간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가 가공할 삼백육십 명 의 천강은살무영대를 키우는 것을 제지시키기 위해서였다." "......." "만일 그 자가 그것을 그 동안 완성시켰다면... 실로 무서운 일이 다." 현광은 이어 신중히 말했다. "정혜, 그대는 정자(丁字) 제일의 인재다. 그대 외에는 적표를 맡 을 사람이 없다." "알겠습니다. 사숙님." "조심해야 한다."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사숙님." 정혜는 공손히 절을 하고 방을 나갔다. "아미타불." 현광은 눈을 감으며 불호를 외웠다. 그러나 그는 곧 탄식을 하며 중얼거렸다. "휴우! 만약 이 수라궁에 광마혈제의 천강삼백육십은살무영대가 있고 백골사마의 구유강시녀(九幽彊屍女)와 오독비마의 오독마절 진(五毒魔絶陳)마저 있다면. 아미타불... 아미타불!" 현광은 더이상 생각하기가 끔찍한 듯 백미를 떨었다. 그의 귓전에 소림을 떠나기 전 천기선사가 한 말이 떠올랐다. - 현광. 천강삼백육십은살대와 구유강시녀, 오독마절진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무섭다. 천하에서 그것을 저지할 수 있는 사람은 오 직 두 명뿐, 그들은 바로 만사(萬事)와 귀곡(鬼谷)이다. 현광은 한숨을 쉬었다. '아! 그러나 만사는 죽고 귀곡자는 나타나지 않았으니.' 그의 청수한 노안에는 불안의 먹구름이 어렸다. 그런데 그의 바로 등 뒤에서 가볍고 낭랑한 웃음이 들리는 것이 아닌가? "하하하... 무슨 걱정이 그리 많습니까?" 현광은 마치 벼락을 맞은 듯이 몸이 굳어졌다. '처, 천하에 그 누가 이런 경공술을!' 그의 몸이 앉은 채로 눈부실 정도의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는가 싶 더니 그는 눈 앞에 서 있는 자면(紫面)의 중년인을 날카롭게 쏘아 보며 물었다. "아미타불... 그대는 누구요?" 중년인은 빙그레 웃었다. "사형, 이 현수(玄修)의 목소리도 잊었습니까?" 현광의 얼굴에 기쁨이 크게 일더니 그는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오, 오! 소사제, 소사제였군!" 현광은 자면중년인의 손을 덥썩 잡았다. 그는 바로 자부신군 무영 종, 즉 그렇게도 고대하던 하후성인 것이었다. 하후성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사형께선 여전히 정정하시군요?" 현광은 흥분으로 고조된 음성으로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불존의 돌보심일세. 소사제, 자네를 만나니 마치 암 흑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보는 듯 하군." 현광은 하후성을 보며 감탄해마지 않았다. "정말 자네는 노납을 놀라게 하는군. 허허허!" 하후성은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사형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할 말이 있다고?" "네, 우선 자리에." 이윽고 두 사람은 마주보며 바닥에 앉았다. 그들 사이에는 긴 대화가 오갔으나 무슨 말을 했는지는 오직 그들 만이 알고 있었다. 모두 상승의 전음술로 주고 받았기 때문이었 다. 대략 한 시진 가량이 지나자 하후성, 즉 무영종은 일어섰다. "그럼." 그는 가볍게 포권하더니 아무런 소리도 없이 방 안에서 사라졌다. 실로 놀랍고도 신비한 신법이었다. 현광대사는 여전히 바닥에 앉 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조금 전과는 달리 무척 밝아 보였다. ■ 대소림사 제20장 옥쇄령(玉碎令) -1 ━━━━━━━━━━━━━━━━━━━━━━━━━━━━━━━━━━━ 밀전(密殿). 수라궁 깊은 곳으로 비밀에 싸여 있는 하나의 대전. 이 대전 주위에는 각종의 무서운 기관과 진법이 설치되어 있어 무 형중 살벌한 살기가 물씬 풍기고 있다. 밀전 안. 그곳의 벽에는 휘장이 쳐져 있었다. 휘장은 대발로 엮은 것으로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고 반면 안에 서는 밖을 볼 수가 있었다. 휘장 안 쪽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희미 하게 비쳐보여 신비하고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밀전에는 의자가 이십 여개 줄지어 있었다. 그 위에 한결같이 괴 기한 인상을 풍기는 인물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맨 앞 쪽에 광마혈제 적표를 위시하여 수라궁 팔대당주의 모습도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엄숙한 표정으로 휘장 안 쪽을 주시하고 있 었다. 휘장 안에서 한 줄기 담담하고 괴이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혈마전주, 마존첩을 받은 자들은 모두 도착했는가?" 그 말에 광마혈제 적표는 공손히 대답했다. "예, 모두 당도했습니다." 놀라운 일이었다. 백이십 살이 넘은 노마 적표가 이토록 공손히 말하다니, 그렇다면 휘장 안의 인물의 신분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 가? 예의 담담하면서도 으스스한 음성이 다시 흘러 나왔다. "좋소. 흐흐흐... 그럼 이제부터 시작이군." 으스스한 어조는 계속 이어졌다. "앞으로 십 일. 개파대전이 시작되기 전까지 여러분은 본좌가 안 배한 죽음의 오계(五計)를 빈틈 없이 시행해야 한다." 밀전 안에 모인 마두들의 안색이 삽시에 굳어졌다. "오계 중 첫 번째는 미인계(美人計)다. 만묘각주(萬妙閣主)가 오 년 동안 준비한 만묘칠십이미랑대(萬妙七十二美 隊)는 이미 미색 계(美色計)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상당한 숫자의 군웅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함정으로 빠져들고 있다." 그 순간 한 의자에 앉아 있던 홍의미부(紅依美婦)가 입가에 뇌쇄 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는 삼십대로 보였는데 풍만한 몸매와 선정적인 용모로 전신에 음탕한 기가 흐르는 여인이었다. 휘장 안에서 다시 예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둘째는 독계(毒計)다. 열흘 동안 독혈당주(毒血堂主)는 귀신도 모르게 그대가 준비한 것을 풀어라, 단 서서히. 그 양이 많으면 탄로가 나니 신중을 기하도록." 독혈당주는 오독비마 구우령으로 그는 공손히 대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궁주." 휘장 안의 인물, 그는 바로 수라궁의 궁주인 수라혈신(修羅血神) 이었던 것이다. 강호에 엄청난 혈풍의 서막을 연 장본인인 수라혈신의 정체는 아 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 이때 수라혈신의 음성이 다시 흘러나왔다. "세 번째는 분열계(分裂計)다. 이미 군웅들 사이에는 본 궁에 굴 복하거나 본 궁이 파견시킨 열 명의 고수가 있다. 그들이 군웅들 사이에 분열을 일으킬 것이다. 흐흐흐... 그럼 볼만한 광경이 벌 어질 것이다." 대전에는 누구도 감히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네 번째는 심계(心計)다. 열흘 동안 군웅들은 단 하루도 편히 잠 들 수가 없을 것이다. 본 궁의 제자들은 항상 그들을 그림자 같이 따르며 그들이 어디를 가든 감시의 눈초리를 번뜩일 것이다. 물론 그들로 하여금 그 사실을 눈치채도록 해야 한다. 흐흐흐... 그들 은 잠시도 경계심을 풀지 못하고 바짝 긴장할 것이고 마침내는 개 파대전이 열리기도 전에 심력(心力)이 탈진되고 말 것이다. 흐흐 흐... 오계 중 가장 무서운 것이 바로 이 보이지 않는 심계다." 밀전의 마두들의 얼굴은 한결같이 굳어 있었다. 수라혈신의 음성 은 계속하여 들렸다. "마지막 다섯째 계는 오계 중 가장 직접적인 것이다. 그것은 살계 (殺計)다. 즉 전자의 사계에 방해되는 자들은 모두 죽인다. 그러 나 명심할 것은 반드시 본궁이 손을 썼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바로 분열계를 시행한 본궁 고수들의 힘을 빌 리는 것이다." 실로 엄청난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수라혈신은 스스로 지극히 만족스러운 듯 덧붙여 말했다. "흐흐흐... 앞으로 열흘 남았다. 열흘 후에는 천하무림을 우리 수 라궁이 지배하게 될 것이다. 무림 수천 년 사상 처음으로 천하통 일의 대업을 이루는 것이다. 으하하하---!" 무시무시한 일진광소가 뒤를 이었다. 휘장이 마구 흔들렸다. 밀전의 마두들의 얼굴에 서서히 살기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가공 할 살기, 그것은 섬뜩한 마(魔)의 기운이었다. 화려한 방 안. 그곳은 군웅들을 위해 마련된 처소 중 한 장소였다. 방 안에는 모두 열 명의 인물이 탁자를 중심에 두고 앉아 있었다. 만일 누군가가 그들의 모습을 보면 크게 놀라고 말리라. 그것은 열 명의 인물이 모두 한결같이 전 무림을 떨어울리는 고인 (高人)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사가(四家), 일장(一莊), 이보(二堡) 등 이른바 정파무림의 중추 격인 그들의 대표자들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세 명은 풍진기인인 천안통수(天眼通 ) 마운로, 그리고 유일하게 사파 인물로 이곡(二谷) 중 혈영곡(血影谷)의 곡 주 혈의마검(血依魔劍) 공손패(公孫貝)였다. 마지막 한 명은 열 명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다. 호불범(胡不凡)이었다. 바로 남창 만경루의 주인이었던 만사귀재 호불귀의 손자인 호불범으로 그는 전신에 백삼을 입고 있었다. 그들의 안색은 한결같이 침통했다. 이미 그들 사이에는 여러 가지 대화가 오고 갔다. 그것은 물론 앞으로의 대책에 관한 것이었다. 하북팽가(河北彭家)의 가주인 패천참인도 팽천후가 입을 열었다. "분명히 앞으로 남은 개파대전까지 수라궁은 가공할 음모를 꾸밀 거요." 사천당가의 가주인 천수겁천 당환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바로 그 음모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오." 이번에는 남궁세가의 검제 남궁진강이 입을 열었다. 그는 항상 침 착하고 냉정한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우리가 양지(陽地)라면 그들은 음지요. 이런 상태에서는 우리의 힘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절대 불리하오." 이때 태양장의 태양신군 황보숭양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여러분, 노부가 한 가지 제의를 하겠소." 중인들은 모두 그를 주시했다. 황보숭양은 적광(赤光)이 감도는 눈빛을 번쩍이며 말했다. "지금 상황을 살펴보면 이곳에 온 군웅들은 모두 세 파(三派)로 분리되어 있소."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신중하게 이었다. "소림의 현광대사(玄光大師)와 소림의 절정고수인 십팔나한을 중 심으로 구파일방(九派一幇)이 뭉쳐 있고, 남맹(南盟)인 천군맹(天 群盟)을 중심으로 사파세력이 뭉쳐 있소. 그리고 또 하나는 바로 우리들이오." 그 말에 중인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평소 성질이 불 같은 태양신군 황보숭양에게 상황을 살피는 이런 예리한 면이 있 는 줄은 몰랐다. 그들은 모두 내심 감탄하며 귀를 기울였다. "구파일방에서는 현 개방의 젊은 방주이자 개방사상 최고 인재라 는 만리추풍수사(萬里追風秀士) 모용랑(慕容浪)이 뛰어난 머리로 현광대사와 함께 군웅들을 주도하고 있소." 그 말에 이제껏 말이 없던 악가(岳家)의 섬마검(閃魔劍) 악진원이 눈을 기이하게 번뜩이며 물었다. "만리추풍수사 모용랑이라면 이제 삼십오 세의 나이로 바로 이곳 으로 오기 직전 개방의 방주가 된 현 무림사룡의 으뜸을 말하는 것이오?" 천안통수 마운로가 대신 대답했다. "그렇소이다. 노부는 과거 그 젊은이를 한 번 본적이 있소만 과연 비범한 기재였소. 틀림없이 개방이 그로 인해 부흥할 것이란 생각 을 했었소." 황보숭양이 빙그레 웃었다. "노부의 자식 놈인 무룡(武龍)도 사룡에 포함되어 있기에 그를 조 금 알고 있소. 그는 전대 개방의 십결장로(十結長老) 팔인(八人) 에게 공동으로 무공을 전수받아 이미 절정의 고수요." "음." 악진원은 웬지 무거운 신음을 발했다. 황보숭양은 다시 말을 이었 다. "그리고 천군맹이 주도하는 사도에서는 천군맹주 구주진천도 조천 명, 황하칠십이채의 사해신군 구양경, 통천교의 통천마군 흑고, 백독곡의 백독마군 음무위(陰武韋) 등이 주축을 이루고 있소. 그 들은 석가(石家)의 소가주인 지무성(智武星) 석검영(石劍英)을 지 지하고 있소." 황보숭양은 좌중을 둘러보더니 말했다. "그러나 우리 쪽에는 적당한 지사(智士)가 없소." 그러자 남궁진강이 침착하게 물었다. "그렇다면 황보장주의 뜻은?" 황보숭양은 이제껏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던 호불범을 응시했다. "호소협은 강호의 지다성(智多星)인 만사귀재 호불귀선배의 손자 요. 그러므로 그 분의 진전을 이어받은 호소협은 비록 무공을 모 른다지만 천하의 그 누구보다 현명하오." 황보숭양은 확신한다는 듯이 말했다. "만약 우리가 호소협의 지혜에 힘을 입는다면 반드시 좋은 결과를 얻을 것이오." 그 말에 역시 이제껏 말이 없던 천풍보의 보주 태을성수 종리자허 가 미소를 지으며 자청하여 나섰다. "찬성이오. 노부도 황보장주와 같은 생각을 벌써부터 하고 있었 소." 팽천후도 가세하여 찬동했다. "으음, 호소협 정도면 노부도 안심하겠소." 뒤이어 마운로와 혈의마검 공손패 등도 아울러 찬성을 표했다. 황보숭양은 중인들을 향해 마침내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렇다면 이 일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소." 호불범은 얼굴을 약간 붉히며 입을 열었다. "여러 선배님들께서 후배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남궁진강이 부드럽게 웃으며 그 말을 받았다. "과한 평가가 아니오. 노부는 그 누구보다 사람보는 눈이 있다고 자부하오. 호소협은 우리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오." 호불범은 비로소 안색을 가다듬는 한편 엄숙하게 가라앉은 음성으 로 중인들을 향해 말했다. "소생이 이곳에 온 것은 조부님의 원한을 갚기 위해서입니다. 만 일 여러분께서 보잘 것 없는 소생을 믿어 주신다면 저 역시 최선 을 다하여 반드시 수라궁의 음모를 분쇄하고 말겠습니다." 호불범의 말에 중인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소협을 믿겠소." "호소협의 지혜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오." 그런데 바로 이때였다. "크악!" 갑자기 가까운 곳에서 터진 듯한 처절한 비명에 방 안의 인물들은 모두 안색이 확 변했다. 그러나 호불범은 신비로운 미소를 지으며 담담히 말했다. "여러분, 놀라실 필요없습니다." 악진원이 의혹에 차 물었다. "아니, 저 비명소리는?" 호불범은 차분히 설명했다. "소생은 만약을 위해서 이곳 주위에 공손숙부님의 수하인 혈의삼 십육궁을 배치시켰습니다. 그리고 접근하는 자는 여하간에 혈영전 을 발사하여 죽이도록 했습니다." "아!" "수라궁에서도 자신들이 우리를 감시하려다 당했으므로 뭐라 말하 지 못할 것입니다." "오오!" 중인들은 모두 만면에 감탄의 기색을 드러냈다. 자신들은 전혀 생 각지도 못했던 일을 벌써부터 호불범은 차분하고 면밀히 안배해 놓은 것이 아닌가? 그들은 비로소 호불범에 대해 굳은 신뢰감을 느꼈다. 남궁진강이 그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호소협! 이번 일에 대해 무슨 복안을 지니고 있소?" 호불범은 신비한 미소를 지으며 미리부터 생각해 둔 듯 자신의 계 획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호불범의 얘기는 끝나고, 중인들은 모두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과, 과연 신(神)의 머리요!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렇게 치 밀할 수가 없소이다." 모두들 호불범의 뛰어난 지혜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황보숭양 이 탄식하며 말했다. "비록 만사귀재 호선배는 죽었으나 이런 손자가 있으니 그 분은 아무런 여한이 없을 것이오." 그 말에 호불범의 안색에 어두움이 스쳤다. '여한이 없다고?' 그는 내심 가슴을 찌르는 아픔을 느낄 뿐이었다. '일 년도 채 안 남은 목숨. 여한은커녕 조금의 미련조차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뇌리에 갑자기 떠오르는 모습이 있었다. '산같으신 분.' 일단 그의 존재를 생각하자 호불범은 갑자기 한 사람이 미치도록 그리워졌다. 밤. 음모의 피냄새가 물씬 풍기는 그런 밤이다. 푸르스름한 월광(月光)이 수라궁 전체를 음산하게 비추고 있었다. 수라궁 깊숙한 후전에 한 채의 가산(假山) 있었는데 그 규모는 무 척 컸다. 인공으로 판 연못이 가산의 한 귀퉁이를 장식하고 있었 다. 그리고 연못과 가산에 걸쳐 한 채의 아름답고 정교하게 축조 된 소정(小亭)이 있었다. 한 줄기 인영이 연못가에 나타났다. 그 인영은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으나 달빛 아래 어쩔 수 없이 모든 것이 노출되고 있었다. 녹의시비 차림의 매혹적인 미녀인 그녀는 바로 매군(梅君)이었다. 매군은 한 차례 주위를 둘러본 후 다시 신형을 가볍게 날려 정자 안으로 날아갔다. 정자 안에는 아무도 없었으나 매군은 그곳에서 두 손을 내려뜨린 채 멈추어 섰다. 이때 그녀의 등 뒤에서 한 줄기 요염하면서도 싸늘한 음성이 들렸 다. "매군!" 매군은 소리가 들린 쪽으로 몸을 홱 돌렸다. 어느새 나타났는지 그녀의 눈 앞에 삼십대의 홍의미부가 서 있었 다. 풍만한 몸매와 뇌쇄적인 용모의 미부였다. 터질 듯 풍만한 육봉과 둔부는 몸에 꼭 맞는 홍의 위로 역력히 굴 곡이 져 드러나고 있었으며 두 눈은 탕기가 흐르고 붉은 입술은 지극히 선정적인 마력을 풍기고 있었다. "각주(閣主)님." 매군은 그녀를 보자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만묘각주(萬妙閣主) 만묘선랑(萬妙仙 ) 장염하(張艶河). 이것이 홍의미부의 수라궁 내의 신분이었다. 그녀는 타고난 탕녀로써 어 려서부터 음공색계(淫功色計)를 익힌 마녀였다. 그런데 뭇사내들의 혼을 녹이던 그녀의 요염한 눈에서는 얼음장같 은 한기가 발산되어 매군을 주시하고 있었다. "너는 그 자의 정체를 파악했느냐?" "아, 아직......." 매군의 음성은 떨려 나오고 있었으나 만묘선랑 장염하는 차갑게 말했다. "옷을 벗어라." 매군의 안색이 금새 창백하게 질렸다. 그러나 그녀는 감히 거역할 수가 없었던지 곧 걸치고 있던 녹의를 차례로 벗었다. 푸르스름한 달빛이 정자 안을 비스듬히 비치는 가운데 점차 드러 나는 여인의 나신. 완전히 알몸이 된 매군은 슬픈 육체를 가만히 세우고 있었다. 눈이 부시도록 새하얀 피부와 가냘픈 어깨부터 흘러내린 완벽하도 록 고운 육체의 선, 두 육봉은 알맞게 풍만한 채 분홍빛의 돌기를 가지고 있었다. 잘룩한 허리와 둥근 아랫배에 군살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급격히 굴곡을 이루며 둥글게 퍼진 둔부, 그리고 미끈하게 뻗어내 린 두 다리는 대리석 옥주(玉柱)같았다. 두 다리가 시작되는 지점 의 은밀한 비역(秘域). 차마 달빛도 무참한 듯 스며들지 못한 채 그곳은 음지(陰地)를 이루고 있었다. 만묘선랑 장염하는 매군의 몸 이곳저곳을 살펴보더니 손을 들에 세차게 그녀의 뺨을 쳤다. "악!" 매군은 난간으로 나가 떨어졌다. 그나마 간신히 난간을 붙잡았기 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는 하마터면 연못에 빠질 뻔했 다. "바보같은 계집! 만묘칠십이미랑대(萬妙七十二美 隊)중 가장 미 모가 뛰어나고 기지가 넘친다는 네가 사내 하나 다루지 못하다니 말이 되느냐?" 장염하의 얼굴에는 무서운 한기가 감돌고 있었다. "자부신군 무영종은 실로 신비한 인물이다. 무슨 방법을 동원해서 든지 반드시 그 자의 정체를 밝혀야 한다." 이어 그녀는 얼음 가루가 풀풀 날리는 음성으로 명령했다. "옷을 입어라." 매군은 말없이 비틀거리며 녹의를 챙겨 입었다. 장염하는 품 속에 서 한 개의 붉은 색이 감도는 환약(丸藥)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 다. "이것을 복용해라." 그것을 본 매군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렸다. "이, 이것은." "삼켜라!" 매군은 환약을 받아들자 전신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겠지?" 장염하의 음성에 매군의 눈에 공포가 떠올랐다. "하루의 여유를 주겠다. 오늘 밤에 실패하면 너는 끝장이다. 그동 안 너에게 온갖 방중술(房中術)과 색기(色技)를 가르치면서도 순 결을 지켜준 것은 오직 이런 날을 위해서였다. 이제 너는 옥쇄(玉 碎)할 때가 왔다.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무영종 그 자의 정체를 밝혀라." "아아." "삼켜라, 그 약을!" 매군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붉은 환약을 입에 넣었다. 그녀의 눈에는 일말의 체념이 떠돌고 있었다. "가라." 장염하의 지시는 간단하고도 냉혹했다. "그럼......." 매군은 절을 한 뒤 몸을 날려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지자 만묘선 랑 장염하의 탕기 흐르는 얼굴에는 의문이 떠올랐다. "무영종. 그 자가 며칠 전 관문 돌파시 일 관(一關)에서 지옥일살 (地獄一煞)을 물러나게 한 무공은 바로 적미천존(赤眉天尊)의 현 천마공(玄天魔功)이었다. 필시 그 놈은 백 년 전 사라졌던 적미천 존과 관계가 있다. 필히 정체를 파악해야 한다. 무슨 방법을 동원 해서든. 오늘 밤 매군이 실패하면 직접 내가 나서서라도." 이렇게 중얼거린 장염하의 두 눈에는 온통 음탕한 춘색(春色)이 감돌았다. "호호호... 놈을 잡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 만묘선랑 장염하 또한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린 후, 정자의 지붕 일각이 움직였다. 그곳에 한 인영이 엎드려 있었던 것이다. 달빛 아래 고개를 쳐드는 얼굴은 자색이 감돌고 있었다. 그는 바 로 무영종이었다. 무영종은 조금 전의 모든 상황을 엿듣고는 안색이 매우 침중해 있 었다. '흠. 수라궁이 이미 나를 중요 인물로 보고 감시하기 시작했군.' 그러나 이내 그의 입가에는 신비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대들은 곧 실망할 것이다. 매군에게 넘어갈 내가 아니다.' 스스슷, 하는 묘한 기척이 들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의 모습은 안개처럼 엷어지더니 지붕 위에서 사라졌다. 그것은 바로 현천교(玄天敎)의 비전인 무영환영비(無影幻靈飛)라 는 경공술로써 그가 적미천존에게서 구결로 전수받은 것이었다. 매화각의 문 앞. 무영종은 유령처럼 나타나서는 곧 문을 열고 매화각 안으로 들어 갔다. 사위는 조용했다. 무영종은 대청을 가로질러 자신의 방으로 걸어 갔다. 그는 매군이 나오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으나 개의치 않고 방문을 열었다. 그러나 방문을 연 그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리고 말았다. 방 안의 침상에 한 여인이 누워 있었는데 그녀는 전신에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매군이었다. 무영종의 안색이 일순 차갑게 굳었다. "무슨 짓이냐? 매군." 그러나 매군은 여전히 침상에 누운 채 매혹적인 눈웃음을 보냈다. 그녀의 눈에서는 사나이를 녹일 듯한 불꽃이 나오고 있었다. 그녀 는 비음을 발하며 한 손으로 터질 듯 솟아오른 자신의 젖가슴을 쓰다듬었다. 무영종은 그 광경에 어쩔수 없이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아무리 철석간담의 냉혈한이라 해도 그와 같은 노골적인 유혹을 이긴다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매군은 여전히 뇌쇄적으로 웃으며 이번에는 다리를 약간 벌렸다. 그것은 실로 충격적인 모습으로 새하얀 허벅지 사이의 은밀한 비 역이 그대로 노출되고 있었다. 그러나 무영종은 차갑고 혹독한 음성으로 일갈했다. "일어서지 못하겠느냐? 매군!" 그것은 매군의 마음에 찬물을 끼얹는 말로 매군은 안색이 급변했 다. "나으리... 정말 무정하시군요." 그녀는 마지 못한 듯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으나 두 육봉이 육감적 으로 출렁거렸다. 그리고 매군은 나신을 묘하게 비틀며 무영종에게 다가왔다. 그녀 가 새하얀 다리를 들어 걸을 때마다 젖가슴은 줄곧 미묘하게 일렁 거렸으며 아랫배와 둔부는 육감적인 율동을 발했다. 무영종은 그녀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그러나 매군은 가쁜 숨을 내쉬며 그의 목에 매달리더니 나신을 비벼대는 것이었다. "당신은... 제가... 마음에 안 드나요?" 무영종은 그녀에 귓가에 대고 무심하게 말했다. "옷을 입어라. 매군." "나으리." 그럴수록 매군은 자신의 몸을 그에게 더욱더 밀착시켰다. 무영종 의 안색은 더욱더 차갑게 굳어갔다. "어서! 지금 내 눈에 너의 모습은 돌덩어리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다." 매군은 그 말에 충격을 받은 듯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녀 의 동공은 마치 실성한 듯 풀려 있었다. 무영종은 담담한 눈길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눈길에는 추호도 욕념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반면 그를 보는 매군의 눈빛 이 오히려 기이하게 변했다. 슬픔과 고뇌, 그리고 수치감이 눈빛에 복잡하게 얽혀 있는 눈빛이 었다. 마침내 그녀는 탄식하고 있었다. "대체... 나으리란 분은... 오르지 못할 산(山)... 같군요." 산, 매군은 산이란 말을 했다. 무영종은 그 말에 흠칫했다. 매군은 몸을 돌렸다. 그녀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더니 침상가 에 떨어진 옷을 대충 걸치고 나서 그에게 허리를 굽혔다. "밤늦게 나으리의 심경을 편치 않게 한 점을 용서해 주세요." 무영종은 담담히 대답했다. "상관하지 않겠다." "그럼." 매군은 몸을 돌려 문을 향해 걸어나갔다. 그녀의 눈에 반짝 기이 한 결심의 기운이 맺힌 것은 그때였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내 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제 방법은 한 가지뿐이야.' 그로부터 약 이 각이 흐른 후, 매군은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태 사의에 앉아 있던 무영종은 그녀를 보자 흠칫했다. "매군, 왜 또 왔느냐?" 그러나 그는 입을 다물었다. 매군의 모습이 전혀 달라보였기 때문 이었다. 옷을 단정히 입고 머리를 깨끗이 빗어넘긴 그녀는 마치 한 송이 난초인 양 깨끗하고 청순해 보였던 것이었다. 그녀는 두 손에 김이 나는 찻잔을 받쳐들고 있었다. "나으리, 조금 전 소녀가 실태를 보인 것 같사옵니다." 그녀의 정숙한 음성에 무영종은 담담히 답했다. "상관하지 않겠다고 했지 않느냐?" 그러나 매군은 그의 앞에 와 무릎을 살짝 꿇었다. "심신을 맑게 하고 향기가 좋은 설매홍정차(雪梅紅精茶)를 끓여 왔사오니 이것을 드시고 소녀의 잘못을 잊어주시기 바랍니다." 현숙하고도 단아하기 그지 없는 자태였다. 무영종은 이렇듯 변한 매군의 모습에 또다른 한 여인이 떠올랐다. '음, 이 소녀는 어떻게 보면 백화미(白花美)와 상당히 흡사한 기 질을 갖고 있구나. 짧은 시간에 이렇게 변모할 수 있다니.' "드십시오, 나으리." 매군은 두 손으로 찻잔을 받쳐 올렸다. 무영종은 부드럽게 말했 다. "고맙게 들겠다. 매군." 그는 단지 찻잔을 받아 들었을 뿐, 매군의 눈빛이 야릇하게 변하 는 것을 미처 보지 못했다. ■ 대소림사 제21장 독고황(獨孤皇)-1 ━━━━━━━━━━━━━━━━━━━━━━━━━━━━━━━━━━━ "나...... 나으리!" 매군은 너무도 놀란 나머지 미처 나신을 가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무영종을 바라볼 뿐이었다. 무영종은 담담히 그녀를 응시하며 말했다. "매군. 당신이 북단(北檀)의 흑룡단주(黑龍檀主) 위전풍의 처제였 다니 정말 뜻밖이군." 그 말에 매군의 안색이 홱 변했다. 그녀는 뒷걸음질치며 부르짖듯 외쳤다. "다... 당신은 모두... 보았군요?" 문득 매군은 자신이 알몸임을 의식한 듯 수치감에 몸을 웅크렸다. 무영종은 그녀에게서 돌아서며 미소지었다. "염려하지 않아도 좋소.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을 테니." 그의 말투는 어느새 변해 있었다. 매군이 위풍전과 관계가 있는 이상 비녀처럼 대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매군은 안색이 이전과는 다르게 창백하게 변하더니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챙그랑! 그녀의 손에 있던 비수가 그 바람에 바닥에 떨어졌다. 무영종은 흠칫 놀라 몸을 돌렸다. "왜 그러시오?" "도... 독(毒)이......." "독?" 매군의 얼굴에 검푸른 기운이 번지는 것과 함께 그는 그녀의 동공 이 급격히 응축되고 있는 것까지 볼 수 있었다. 매군은 고통스러운 듯이 이를 악물었다. "만묘선랑은... 저에게... 독을...... 지금 첫 발작이......." 무영종은 가산의 정자에서 만묘선랑 장염하가 환약을 그녀에게 복 용시키던 것이 생각났다. 그는 마음이 침중해져 말을 잊고 말았 다. 매군이 그의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나... 나으리, 소녀에게 온정을......." 매군의 안색은 차라리 처절해졌다. 그녀는 호소하듯 무영종을 올 려보며 말했다. "저... 에게도 어느 여인 못지 않게 자존심이 있어요. 그러나 그 자존심을 세우기에는... 언니가......." 무영종은 그만 갈등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대체... 이 일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매군의 두 눈이 절박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만약... 오늘 밤... 당신과 관계를 맺지 못하면... 해약을 얻지 못해 저는... 날이 새기 전에 죽고... 말아요." 이러는 동안 차츰 매군은 고통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절혼칠독 산의 첫 발작이 지나간 것으로써 그녀의 고통스런 얼굴은 차츰 평 온을 되찾고 있었다. 그러나 무영종의 얼굴은 내내 무표정했다. 그는 적어도 겉으로 보 기에는 마치 매군의 애원을 귓전으로 흘리는 듯한 인상이었다. 마 침내 매군은 그에게서 절망감을 느꼈다. "아아, 결국 안 되겠군요." 매군은 탄식과 함께 온통 쓸쓸하고 처연한 표정을 지으며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워 입었다. 그녀는 헝클어진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 넘기며 나직하게 말했다. "이제 날이 새려면 앞으로 두 시진. 나으리께 더이상 강요하진 않 겠어요." 매군은 몸을 돌리며 내심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언니, 저도 더이상 어쩔 수가 없어요. 이제 만묘선랑을 찾아가 그녀를 죽이고 해약을 찾는 수밖에. 그리고 그것이 실패한다면 죽 는 수밖에 도리가 없군요.' 한편 무영종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심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내심 이렇게 부르짖었다. '위형. 당신은 나에게... 너무도 큰 짐을 지우는구려.' 매군은 문을 열고 나가려 했다. "매군." 무영종의 음성이 그녀를 움찔하게 했으나 그녀는 몸을 돌리지 않 은 채 침착하게 물었다. "또 무슨 일인가요? 나으리." 무영종의 부드럽고 다감한 음성이 들렸다. "매군. 두 시진밖에 안 남은 시간이라면 헛되이 보낼 수 없지 않 겠소?" 매군의 몸이 무섭게 경련을 일으켰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렸 다. 그녀의 눈물에 젖은 두 눈은 크게 떠져 있었다. "나으리... 그 뜻은." 무영종은 희미하게 웃었다. "나는 그대같이 아름답고 착한 소녀가 죽는 것을 볼 수가 없소." "아!" 매군, 그녀는 그 순간 보았다. 거대한 산이 자신을 포용하려는 것을. 그토록 험하고 장중하여 영원히 오를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그 산 이 양 손을 활짝 벌리고 그녀를 받아들이는 것을. "나... 나으리!" 매군은 그 산을 향해 작은 새처럼 몸을 날렸다. "흐흐흑!" 그녀의 참고 참았던 설움이 진한 흐느낌이 되어 봇물처럼 터지고 말았다. 매군은 울었다. 마음껏. 그러나 가슴 속 깊은 곳에서는 크나큰 기쁨의 소용돌이가 일고 있었다. 그것은 당장 내일의 죽음을 면할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또 한 천하에서 가장 소중한 언니를 살릴 수 있게 되어서만도 아니었 다. 그것은 바로 그녀가 꿈에도 염원하던 그런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 었다. 무영종은 매군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자신의 가슴 옷 이 흥건하게 젖는 것을 느꼈다. 매군의 눈물이 그의 옷섶을 흠뻑 적신 것이었다. "매군." 그는 계속 흐느낌을 그치지 않는 그녀를 번쩍 안더니 방 한 쪽의 침상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침상에 곱게 매군을 눕히고는 신중 한 손길로 그녀의 몸에서 가볍게 옷자락을 거두어내고 있었다. 옷은 쉽게 벗겨지고 매군은 다시 알몸이 되었다. 나신(裸身). 그것은 완벽한 예술품으로 솟을 곳은 적당히 솟아오 르고, 평평한 곳은 알맞게 기름진 채 고운 선을 이루었으며 꺼질 곳은 미묘하게 꺼져 있었다. 무영종은 그러한 매군의 나신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아무런 잡욕 도 없는 그런 눈빛이었다. 한편 매군은 눈을 꼬옥 감고 있었다. 그녀는 실상 스스럼없이 그의 앞에서 여러 번 옷을 벗었다. 그러 나 지금의 그녀는 웬일인지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확확 달아 올랐다. 그녀는 비록 눈을 감고 있었으나 무영종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뜨겁게 몸이 타오르는 듯했다. 무영종은 그녀의 나신을 한동안 내려다 보다가 자신도 옷을 벗었 다. 그리고 침상에 올랐다. 아니, 매군의 육체 위에 자신의 육체 를 실었다. 뜨겁고 탄력있는 젊은 두 육체는 마침내 한 치의 틈도 없이 밀착 되었다. "아아!" 매군의 입에서 희열인지 오열인지 모를 신음이 새어나왔다. "매군." 무영종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육체의 한 부분이 매군의 소중한 부분과 뜨겁게 결합되었다. 두 남녀의 신음은 점차 고조되었다. 정점을 향하여. 침상은 후끈한 열기에 사로잡혔다. 뜨겁게 달은 두 육체는 본능적 으로 율동을 시작했다. 하늘과 땅이 합일(合一)하여 서로의 존재 를 확인하고 통일시키기 위해 숨가쁜 열기를 계속 토해냈다. "아... 아흑!" 뜨거운 열풍이었다. "으음." 무영종과 매군의 동정(童貞)과 순음지체(純陰之體)가 깨지는 순간 이었다. 매군의 아름다운 얼굴은 발그레 상기되어 있었다. 그녀의 이마에 는 몇 올의 머리칼이 엉겨붙어 있었다. 그녀는 무영종의 단단하고 뜨거운 가슴에 안겨 뺨을 묻고는 행복감에 잠긴 듯했 ? 무영종은 그녀의 육체를 안은 채 손으로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었다. 매군이 그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나으리께선... 소녀가 어떻게 이곳에 들어왔는지 아시나요?" "모르오." 매군은 탄식하더니 섬섬옥수로 무영종의 넓은 가슴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저의 원래 이름은 매교랑(梅嬌 )이에요. 그리고 저는 고아였지 요." 매교랑은 고아였다. 그녀는 철이 들기 이전부터 인간이 받을 수 있는 모든 학대와 굴 욕을 받으면서 마치 잡초처럼 살아왔다. 그녀는 한 끼의 식사를 걱정해야 했으며 하룻밤의 잠자리를 근심 하며 세상을 정처없이 떠돌아 다녔던 것이었다. 그러다가 십 세 때, 그녀는 한 조각의 만두를 훔치려다 객점주인 에게 채 피지도 못한 순결을 무참히 짓밟힐 뻔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간신히 그 자의 손에서 벗어나 도망치다 눈보라 속에서 쓰 러지고 말았다. 얼어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된 그녀는 세상과 하늘을 원망했다. 그때에 극적으로 한 명의 여인을 만났다. 빙혈미인(氷血美人) 고 설한(古雪恨)이라는 냉막한 미녀를. 그런데 빙혈미인은 뜻밖에도 죽어가는 매교랑에게 따뜻한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알고 보니 고설한의 처지도 매교랑과 무척이나 비슷했던 것이었다. 빙혈미인 고설한도 역시 고아출신이었다. 매교랑과 다른 점이 있 다면 고설한은 흑도(黑道)의 무림고수였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매교랑에게 있어 고설한은 그 순간부터 마음의 신(神)이 요, 자신의 목숨보다도 소중한 언니가 되었다. 매교랑은 고설한에 게 새 삶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무공도 익혔던 것이다. 그 후 빙혈미인 고설한은 선풍마서생(旋風魔書生) 위전풍을 만나 게 되었다. 결국 같은 사도 출신의 두 사람은 사랑하게 되어 혼인 을 했다. 그리고 매교랑은 고설한의 안배로 그녀와 함께 있을 수 가 있었다. 당시 위전풍은 사도제일의 기재로써 이미 삼십 세가 되기 전에 흑 룡단(黑龍檀)을 창설하여 사파의 북무림(北武林)을 장악했다. 북 단은 그의 뛰어난 무공과 탁월한 지혜로 강성해졌다. 그런데 약 오 년쯤 전, 위전풍은 암중(暗中)에 수라궁(修羅宮)이 태동함을 알게 되었다. 그는 무공산 천마봉에 거대한 토목공사가 진행됨을 염탐하고 막연 하게나마 불안을 느낀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북단의 수하 중 뛰어난 자 아홉 명을 골라 은밀하게 수라궁에 침투시켰다. 그것은 오직 그만이 아는 극비사항으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북단 흑룡단이 사도무림을 남맹과 함께 양분한 것도 이와 같은 치밀함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이 년 전, 한 가지 불행한 사건이 터졌다. 그의 아내인 빙혈미인 고설한이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갑 자기 실종된 것이었다. 위전풍은 그녀를 끔직히 사랑했다. 그는 크게 상심하여 당장 북단 의 삼천 명 고수들을 풀어 전 강호를 이잡듯이 뒤졌으나 고설한의 종적은 바다에 빠진 돌맹이처럼 감감 무소식이었다. 결국 그는 한 가지 짐작에 이르렀다. '수라궁!' 수라궁 밖에 그런 일을 벌일 집단이 없었다. 따라서 그는 벌써 삼 년 전 밀파시킨 수라궁의 아홉 수하들에게 은밀히 고설한의 종적 을 알아보도록 밀명을 내렸다. 그 결과 그의 추측은 적중했다. 고설한은 과연 수라궁에 갇혀 있 었던 것이다. 위전풍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으나 그는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못했 다. 자신의 아내가 아무리 중하다 한들 흑룡단 전체와 맞바꿀 수 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그는 부심 했다. '이 일을 어찌 한단 말인가?' 매교랑이 나선 것은 바로 이때였다. 그녀는 그에게 간청해 스스로 수라궁에 침투하겠노라고 했으며 위전풍은 일단 극력 반대했다. 그러나 매교랑의 결심은 이미 굳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한몸을 희생시켜서라도 기필코 일생 처음으로 자신의 삶에 희망을 불러 일으켜준 고설한을 구출하겠다고 맹세한 것이었다. 그녀는 스스로의 목에 칼을 들이대며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마침 내 위전풍은 탄식하며 승낙했다. 그 후는 일사천리였다. 위전풍의 뛰어난 안배로 그녀는 수라궁에 잡입하여 만묘각(萬妙閣) 소속이 되었다. 어렵지 않게 만묘칠십이 미랑대 속에 일원이 될 수가 있었다. 매교랑의 활동은 그때부터 은밀히 시작되었다. 수라궁에 파견된 아홉의 흑룡단 고수들에게 자신과 함께 십비(十秘)라는 명칭을 붙 인 것도 그녀였다. 그녀는 구비(九秘)의 인원을 조종하는 일비, 즉 대비(大秘)로서 고설한의 행적을 찾았다. 그리고 최근에야 그녀가 있는 곳을 어렴 풋이 알아내게 되었다. 그러나 그 전에 그녀는 자부신군 무영종의 정체를 알아내라는 각 주의 명령과 함께 옥쇄령을 받아 지금에 이른 것이었다. 매군의 말은 여기서 끝났다. 무영종은 큰 감명을 받았다. 아울러 그는 매군이라는 여인에 대해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기우는 것을 느꼈다. 그는 매군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내심 중얼거렸다. '매군. 이 여인은 잡초와도 같다.' 악착같이 살면서도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이를 위해서는 흙탕물 속에 빠지면서까지 갚으려는 여인. 무영종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는 매군의 턱을 치켜들었다. 매군 의 아름다운 두 뺨에는 두 줄기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눈물 고인 눈으로 무영종을 응시했으나 곧 부끄러움을 느 낀 듯이 얼굴을 붉히며 두 눈을 감았다. "매군." 무영종의 입술이 그녀의 감은 눈을 덮었다. 그리고 그의 입술은 뺨을 흘러내려 매군의 작고 붉은 입술을 접했다. 매군의 나신이 바르르 떨었으나 그것은 잠시일 뿐, 그녀의 육체는 다시 뜨겁게 달아올랐다. 무영종의 손이 그녀의 육봉과 둔부를 애 무했기 때문이었다. "으음." 무영종의 혀가 자신의 혀를 감자 매군은 온 몸을 비틀며 바짝 그 의 가슴으로 파고 들었다. 무영종은 불타오르는 매군의 육체를 애 무하면서 자신도 역시 거센 욕화의 불길에 타는 것을 느꼈다. 이는 처음 겪는 일로 거센 열풍이 다시 한 차례 침상을 몰아쳤다. 젊고 뜨거운 두 육체는 하나로 연결된 채 우주일순을 지나고 있었 다. 매군은 침상에 걸터 앉아 옷을 입고 있었다. 무영종은 여전히 누 운 채 그녀의 고운 육체를 응시했다. 그의 눈에는 어느새 애정의 빛깔이 어려 있었다. 이윽고 매군이 옷을 다 입자 무영종의 눈에 일말의 아쉬움이 스쳤 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이었다. 그는 담담히 물었다. "매군, 만묘선랑이 그대에게 시킨 것이 무엇이오?" 매군은 돌아앉으며 부드럽게 무영종의 벗은 가슴을 만졌다. "첫째, 당신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둘째는 이것을 복용시키는 것이에요." 그녀는 품 속에서 작은 접지에 싼 흰 가루약을 보였다. 무영종은 의아하여 몸을 일으켰다. 금침이 흘러내려 그의 잘 발달 된 상체가 드러나자 매군은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그녀는 굳이 외면하지는 않았다. 무영종은 곧 가루약을 혀 끝에 대보고는 흠칫했다. 그의 안색이 기이하게 변했다. '이, 이것은?' 매군이 급히 물었다. "왜 그러세요? 그 약의 정체를 알아냈나요?" "아... 아니오, 매군. 나도 잘 모르겠소." 무영종은 가루약을 다시 접고는 침착하게 말했다. "매군, 만묘선랑에게 이렇게 말해 주시오." "어떻게요." "자부신군 무영종은 적미천존(赤眉天尊)의 제자라고, 그는 백 년 전 해체되었던 현천교(玄天敎)를 다시 일으키려고 하고 있으며, 이곳에 온 이유는 고수들을 포섭하려는 목적이라고 말이오." 매군은 눈을 반짝이며 그의 말을 새겨 들었다. "그리고 약은 이미 복용시켰다고 말하시오." 매군의 얼굴에 감격의 빛이 떠올랐다. "고... 고마워요. 나으리."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떨어졌다. 그 녀는 돌아서면서 내심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산같으신 분....... 이 매교랑은 단 한 번의 맺어짐으로... 당신 을 사랑하게 되었답니다. 그러나... 당신의 장엄함의 높이에는 더 이상 가까이 갈 수가 없는 것인가요? 아... 매교랑, 무슨 짓이냐? 너에게는 할 일이 있고... 또... 저 분에게 너의 존재는... 아무 것도 아니니 딴 생각을 하면 안 된다.' 그녀의 마음은 끓고 있었다. 비록 사정에 의해서라고는 하지만 그 에게 십칠 년 간 고이 간직했던 순결을 바치지 않았던가? 여인이라면 누구나 일생 동안 첫 남자를 잊지 못할 것이다. 매군 도 단순히 이런 경우였을까? 아니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무영종에 게 모든 것을 바쳤다. 바로 그녀가 자신의 과거와 극비사항을 죄다 말한 것이 그 증거였 다. 그녀는 많은 말들을 내심에 묻고 밖으로 사라졌다. 무영종은 매군이 나가자 곧바로 몸을 일으켰는데 그의 안색은 침 중하게 굳어져 있었다. '보통 일이 아니다. 이 가루약은 일반적인 독이 아니다. 냄새도 맛도 색도 없다. 이것을 만일 모든 군웅들이 복용했다면.......' 급히 옷을 입는 무영종의 머리에는 한 인물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렇다. 그 자라면 이 가루약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아침. 수라궁 전체가 신비스런 분위기의 안개에 덮여 있었다. 아니 수라 궁뿐만 아니라 천마봉(天魔峯) 전체가 안개에 휩싸여 있었다. 중천(中天)으로 떠오르려는 태양의 빛조차 안개에 가려 어슴푸레 하기만 했다. 화원(花園). 수라궁 곳곳에 있는 화원은 겉으로 보기에는 단지 아름다운 느낌 뿐이었다. 그러나 군웅들은 그 화원들이 평범한 것이 아님을 어렴 풋이 느끼기 시작했다. 한 포기의 꽃, 풀, 나무까지도 수라궁에서 는 목적없이 심어진 것이 없었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무형중에 불가사의한 진(陣)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심지어는 꽃의 배색까지도 일정한 순서대로 심어져 있었 던 것이다. 수라궁 동쪽에 위치한 한 채의 별원에도 화원이 있었다. 화원은 안개에 싸인 가운데 꽃향기가 심신을 몽롱하게 했다. 그 화원 한 쪽에 한 명의 흑의인이 서 있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흑의문사였다. 손에는 대조적으로 백색의 섭 선을 쥐고 있었다. 삼십대 후반의 준수한 흑삼문사. 그는 선풍마서생(旋風魔書生) 위전풍으로 남맹북단 중 북단 흑룡 단의 단주이자 사도무림에서 손가락 꼽는 고수인 그는 지금 화원 한가운데 서 있었다. 위전풍의 준수한 얼굴에는 짙은 그늘이 어려 있었다. 그는 꽃을 내려보고 있다가 문득 한 송이의 자전매괴화(紫電梅 花)를 꺾어들었다. 자색과 홍색이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꽃이었으 나 위전풍은 꽃송이를 들고 이렇게 반문하고 있었다. "꽃이 아름답다고 하나 어찌 설한(雪恨)보다 더할 것인가? 꽃의 향기가 짙다지만 어찌 설한의 향기보다 짙을소냐? 꽃이 사랑스럽 지만 설한보다 사랑스럽겠는가?" 위전풍은 들고있던 자전매괴화를 휙 던져 버렸다. 꽃은 일직선으 로 날아가 화원을 두른 담장에 박혔다. 담장은 단단하기 그지 없 는 청석(靑石)을 반듯이 깎아 쌓은 것이었다. 위전풍의 얼굴이 참담히 일그러졌다. "설한, 그대는 지금 어디에 있소? 미칠 듯이 그립구려. 설한." 그가 낮으나 절실하게 중얼거리고 있을 때 그의 등 뒤로 한 명의 녹의시비가 나타났다. 그녀는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나으리, 궁주님께서 찾으시옵니다." "알겠다." 위전풍의 음성은 담담했다. 언제 그토록 애절하게 중얼거렸냐는 듯 그는 무심히 몸을 돌렸다. 한 커다란 방 안. 태사의가 마주 보게 놓여 있었다. 한 쪽에는 이미 한 명의 금포를 입은 백발노인이 앉아 있었는데 당당한 체구였다. 다만 그의 얼굴 에는 애석하게도 면사가 드리워져 있어 용모를 알아볼 수가 없었 다. 위전풍이 들어오자 금포노인은 대뜸 물었다. "위단주, 그 동안 생각해 보셨소?" 위전풍은 그를 노려보며 침중하게 말했다. "수라궁주, 당신은 본인을 너무 핍박하는구려." 그렇다면 금포노인이 바로 수라혈신(修羅血神)이란 말인가? 위전풍의 말에 금포노인은 착 가라앉았으면서도 으시시한 음성으 로 말했다. "핍박이 아니오.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본좌도 이런 짓을 하지 는 않았을 것이오." "흐음." "그만큼 위단주가 우리에게 꼭 필요하기 때문이오." 위전풍은 그 말에 대답치 않고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설한은 잘 있소?" 금포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점에 대해서는 염려마시오. 귀빈 대우를 받고 있으니까." 위전풍은 하나 남은 태사의에 앉더니 기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다 시금 금포노인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면사를 통해 시선이 금포노인의 눈빛과 부딪치자 위전풍은 탄식하며 말했다. "궁주, 당신은 진정 무서운 사람이오." 금포노인은 반문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위전풍은 입가에 괴이한 미소를 흘렸다. 그의 두 눈에서는 섬뜩한 광망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궁주, 나 위전풍은 결코 허수아비가 아니오. 천하인을 모두 속일 지라도 이 위모 만은 속일 수 없소. 금선탈각지계(金蟬脫殼之計) 를 교묘하게 쓰긴 했으나 위모를 속이지는 못했소." 그 말에 금포노인은 흠칫했다. 위전풍은 냉랭하게 말했다. "당신은 바로 모두 죽은 것으로 알고 있는 석(石)......" 그의 말을 금포노인이 웃음으로 끊었다. "헛헛헛! 과연! 이제서야 그 분이 위단주를 왜 그렇게 중시하는지 이유를 알 것같소." '그 분?' 위전풍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천하를 독패하려는 야심을 품은 수라궁의 궁주인 수라혈신, 그가 그 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 이 있단 말인가? 위전풍은 의혹에 싸였다. 그는 지금 자신과 마주하고 있는 수라혈 신의 내력을 알고 있었으나 사태가 이렇게 되자 오히려 미궁에 빠 지는 느낌이었다. 수라혈신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위단주, 잠시만 기다리시오. 위단주를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소." 수라혈신은 이내 창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위전풍은 홀로 남은 채 명상에 잠겼다. '나를 만나고 싶어한다고? 수라혈신이 그 분이라고 불러야 할 자 가?' 이때 소리없이 그의 앞에 인영이 떨어졌다. 아니, 맞은 편 태사의 에 마치 무(無)에서 갑자기 생성된 듯한 청년의 모습이 나타났다. 위전풍은 크게 놀랐다. 문이 열리는 소리도 없었다. 경공술을 펼치는 음향도 그는 듣지 못했다. 그런데 줄곧 눈을 뜨고 있던 자신의 눈 앞에 환영(幻影) 처럼 한 청년이 앉아 있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 청년의 모습을 확인한 그는 더욱더 놀랐다. 청년은 전신에 황색의 곤룡포(袞龍袍)를 입고 있었으며 가슴에 두 마리의 흑룡이 교차되는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늠름한 체격에 나이는 이십 칠팔 세 정도. 게다가 두 눈은 마치 두 개의 태양을 보는 것같았다. 그렇다고 빛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물처럼 담담한 눈이었으나 웬지 부신 느낌이 드는 것이었 다. 준수한 용모였을 뿐 아니라 누구든 한 번 보면 절대로 잊을 수 없 는 특이한 기질을 청년은 갖고 있었다. 위전풍은 격동을 일으키며 벌떡 일어났다. "다... 당신은 독고황!" 독고황이라니, 그렇다면 곤룡포의 청년은 바로 지난 날 하란산(賀 蘭山)에서 하후성과 함께 천년고목에 우정의 이름을 새긴 독고황 이란 말인가? 오직 천하에서 그 만이 이런 기질을 갖고 있었다. 곤룡포를 입고 담담히 위전풍을 바라보던 독고황은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위형, 산해관(山海關)에서 우리가 만난 지도 벌써 이 년이 되었 소이다." 위전풍은 완전히 넋을 잃고 있었다. "다... 당신이 바로?" 독고황은 미안한 듯이 말했다. "위형, 결코 위형을 처음부터 속일 생각은 없었소이다." 위전풍은 여전히 경악을 금치 못하며 말했다. "수... 수라궁의 진정한 주모자는 바로 당신이었단 말이오?" 독고황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곧 시인을 의미하는 것이 었다. 위전풍은 마침내 깨달은 듯 말했다. "그렇군! 내 아내를 납치해간 것도 당신이로군." 독고황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위형,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 만은 알아주시오. 나는 진정으로 위형에게 지기(知己)로써 협조를 구하고 싶은 것이오." "이럴 수가......!" "흑룡단을 원하는 것이 아니오. 그 정도 단체라면 본인이 마음만 먹는다면 단 한 달 정도면 세울 수 있소. 그러나 위형과 같은 인 재는 천하에서 다시 얻을 수 없소." 독고황의 말은 줄곧 담담하여 음성의 높고 낮음이 없이 내내 평탄 했다. 그러나 그런 말은 듣는 이에게 일종의 형언할 수 없는 매력 과 함께 묘한 위압감을 주고 있었다. 위전풍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년 전 눈 내리던 날 산해관(山海關)에서였다. 흑룡단의 산해분타(山海分陀)에 사고가 생겨 그것을 처리하고 돌 아가는 길에 그는 한 객점에서 독고황을 만났다. 그리고 첫 눈에 그는 독고황이 풍기는 마력(魔力)에 가까운 매력에 반해 버렸다. 당시 독고황은 마치 낭인(浪人)처럼 떠돌이 무사의 차림을 하고 있었으나 위전풍은 그가 보통 인물이 아님을 느끼고 그와 더불어 한 밤을 지새면서 삼십 병도 넘는 독한 설로주(雪露酒)를 마셨다. 자신의 생각과 이치, 그리고 온갖 얘기를 나누며. 이튿 날 그가 술기운에서 간신히 깨어났을 때 이미 독고황은 사라 지고 없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 위전풍의 머리 속에 독고황이란 존재는 한 번도 떠나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를 이 년 만에 재회하게 된 것이었다. 그것도 수라궁에서. 위전풍의 안색 은 갈등으로 여러 번 변했다. 그는 독고황을 바라보 며 신음하듯 물었다. "만약... 내가 그대의 제의를 거절한다면?" 독고황의 안색이 가볍게 변하는가 싶더니 곧 담담히 말했다. "위형이 거절한다면 나도 더이상 할 말이 없소. 위형의 부인과 위 형을 이곳에서 보내 드리겠소." 위전풍의 얼굴에 미묘한 빛이 떠올랐다. 그가 이토록 쉽게 말할 줄은 짐작조차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다음에 한 독고황의 말은 그를 얼어붙게 만들고 말았다. "그 이후에 위형과 본인이 만났을 때, 그대 목숨은 내 것이오." 위전풍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등 뒤가 축축이 젖는 것을 느꼈다. 상대가 다른 사람이라면 그 어떤 협박에도 꿈쩍하지 않을 위전풍 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지금의 상대는 독고황이 아닌가? 수라궁이라는 가공할 단체를 뒤에서 조종하는 상상도 하지 못할 마력의 소유자, 그가 한 번 뱉은 말이라면 그것은 곧 지옥 염왕의 선언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위전풍의 안색은 몇 차례나 변화를 거듭했다. 그는 탄식하며 말했 다. "만약... 그대를 만난 후 또 한 명을 만나지 않았다면 오늘 나는 그대에게 넘어 갔을지도 모르오." 독고황의 담담한 두 눈에 언뜻 의혹이 스쳐갔으나 그 인물이 누구 인가는 묻지 않았다. 그것은 천하에서 자신과 비견될 수 있는 자 는 없다는 그의 자부심 때문이었다. 위전풍은 다시 탄식하며 말했다. "나에게 며칠 간의 여유를 주시오. 최소한 수라궁의 개파대전까지 만이라도." 독고황의 얼굴에 매력있는 웃음이 피어 올랐다. "잘 생각하셨소, 위형." 그는 두 눈에 기이한 광채를 발산하며 말했다. "무림 수천 년 사상 무림을 진정으로 통일한 자는 단 한 명도 없 었소. 그러나 나는 통일할 것이오, 그것도 영원히 말이오." 독고황의 모습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그가 앉아 있던 태사의도 텅 비었다. 위전풍은 그 자리에서 화석 처럼 굳어버렸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또 독고황을 만난 후 다시 만났다 는 한 명이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오직 자신 만이 아는 일이었다. ■ 대소림사 제22장 음모(陰謀) -1 ━━━━━━━━━━━━━━━━━━━━━━━━━━━━━━━━━━━ 백독마군(白毒魔君) 음무위(陰武韋). 그는 백독곡(百毒谷)의 교주이자 사도제일의 독의 명인이며 나이 는 백삼 세였다. 그는 독인(毒人)이나 다름 없었다. 그는 수만 가지의 독을 자유자 재로 쓰며 무형(無形) 중에 사람을 독살시키는 공포의 대마왕이었 다. 그의 백독마공(百毒魔功)은 독공(毒功)의 최고봉으로 알려져 있었 다. 깡마른 얼굴에 백발이 성성한 모습인 음무위의 앞에는 한 명의 자 면(紫面)의 중년인이 앉아 있었다. 백독마군 음무위는 독광이 감도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자칭 자부신군 무영종이라는 사나이가 느닷없이 그를 방문한 것이었다. 음무위는 괴이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대가 노부를 방문한 이유는 무엇인가?" 무영종은 신비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에게 한 가지 자문을 구할 게 있어 왔소이다." "나에게? 흐흐흐... 뜻밖이군. 천하의 그 누구도 감히 내 곁에 오 지 않거늘." 음무위는 음침하게 내뱉았다. "나는 무형중에 사람을 죽일 수가 있다." 그러나 무영종은 추호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 담담히 웃었다. "당신의 명성은 귀가 따갑도록 들었소이다." 그의 태연자약한 태도에 음무위가 오히려 기이한 빛을 띄웠다. "음, 그대가 자문을 청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이오." 무영종은 품 속에서 접지를 꺼냈는데 그것은 매군으로부터 받은 가루약이었다. "이 약의 성분을 알려고 왔소이다." 음무위는 의혹의 표정을 지으며 가루약을 조금 집어 혀 끝으로 맛 을 보았다. 그리고 그의 안색은 급변했다. "이, 이것은......!" 무영종은 급히 물었다. "무엇인지 아시오?" "으음, 이럴 수가! 남만에서만 나는 이것을 그대가 갖고 있다니." 음무위는 고개를 홱 돌리더니 무영종을 무섭게 노려보며 추궁 했 다. "자네는 이것을 어디서 얻었나?" 무영종은 담담히 대꾸했다. "수라궁의 인물에게 얻었소." "수라궁!" 음무위의 안색이 삽시에 일그러지더니 입가에 으스스한 괴소를 흘 리며 중얼거렸다. "흐흐흐... 이제 보니 수라궁 놈들은 이것으로 우리들의 힘을 꺽 으려 획책했군!" "그렇소이다." "후후훗! 그러나 나 음무위가 있는 이상 잘못 생각했다." 음무위의 두 눈에서 무서운 녹광이 뻗어 나왔다. "오독비마 구우령! 그 노마가 분명 이것을 만들었을 것이다." 음무위는 무영종을 주시하며 음산하게 말했다. "좋다. 그대는 내일까지 이것을 노부에게 맡겨라. 내 반드시 이 약의 해약을 만들겠다. 후후후... 오독비마 그 놈의 구겨진 얼굴 이 보고 싶군. 흐흐흐......." 침상이란 애초 잠을 자기 위한 도구였다. 그러나 잠뿐만 아니라 남녀가 일을 치르는 도구로도 사용될 수도 있었다. "학... 하학." 흥분을 일으키는 신음소리, 그것은 남녀가 교합(交合)을 할 때 자 연적으로 발해지는 희열의 교성이었다. 침상 위에는 세 명의 남녀가 엉켜 있었다. 일남이녀(一男二女). 그것도 모두 실 한 올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한 남자가 두 명의 여인을 상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통천마군(通天魔君) 흑고. 이것이 남자의 이름이었다. 그는 사파의 일교(一敎)인 통천교를 이끄는 일대지존으로 지금 그 의 털투성이 몸 아래 깔려 있는 두 나체여인은 그의 방중술에 연 신 숨가쁜 교성을 질러대고 있었다. "흑... 흐... 응!" 절정으로 치닫는 모양이었다. 두 여인 모두 절색으로 흑고의 시중 을 들기 위해 배정된 수라궁의 시비들이었다. 마침내 여인들은 전 신을 부르르 떨며 환희의 절정에 올랐다. 흑고는 두 여인의 육봉을 주무르며 입가에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흐흐흐... 꽤 쓸만한 계집들이군. 본좌가 이곳의 개파대전이 끝 나면 필히 너희들을 통천교로 데려 가겠다." 그의 손은 우악스럽게 두 미녀의 젖가슴과 비밀스러운 곳을 주물 렀다. "아이... 나으리도." 두 미녀는 또다시 몸이 뜨겁게 달아 올라 그의 품 안으로 파고 들 었다. "흐흐흐... 귀여운 것들." 흑고의 정력은 왕성하여 다시 한 차례 열풍이 휩쓸고 지나갔다. 일남이녀의 음탕한 행위에 침상은 온통 후끈한 열기에 타버릴 듯 했다. 흑고는 두 번째의 행위를 마치고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갑자기 머리가 핑 도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전신의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끼며 그는 안색이 변했다. '요즘 들어 계속 이런 증상을 느낀다. 그것도 점점 더 심해지는 것같다. 대체 어찌된 일이기에......?' 그는 도대체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분명 그는 수라궁에 들어온 이래 음식과 술, 물 따위를 절대로 그대로 들지 않고 통천교의 제 자 중 독(毒)에 능통한 수하에게 엄밀히 검사를 시킨 후에야 들었 다. 그러므로 절대로 중독될 염려는 없었다. 흑고는 여전히 알몸인 채로 침상에 걸터 앉아 고개를 흔들었다. 한 비녀가 다시 그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또 한 비녀는 여전히 나체인 채로 침상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알맞게 퍼진 육감적인 둔 부를 흔들며 사뿐사뿐 탁자로 걸어갔다. 그 비녀는 탁자에 놓인 술병과 잔을 들고 돌아왔다. "나으리, 술 한 잔 드시겠어요?" 비녀는 혼을 앗을 듯 교태를 지었다. "음, 좋지." 흑고는 비녀의 젖가슴을 바라보며 잔을 받았다. 비녀는 술을 따랐 다. 그런데 흑고의 귀로 한 줄기 가느다란 전음이 들려왔다. (흑고, 그 술 속에는 독은 아니되 독보다 더 무서운 것이 들어있 소. 그것은 서서히 뇌를 마비시키고 힘을 빼는 것이오. 이미 당신 은 알게 모르게 많은 양을 먹었으니 더이상 먹는다면 큰 위험을 당할 것이오.) 흑고는 안색이 홱 변해 급히 청력을 기울여 주위 십 장(十丈)을 살폈다. 그러나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고 조용하기만 했다. 흑고의 안색은 다시 기이하게 변했다. '누가 나에게 이런 경고를?' 그는 비로소 가슴이 철렁했던 것이었다. '그렇다! 분명 이 이상한 증세는 수라궁에 와서 얻은 것이다. 그 렇다면?' 갑자기 그의 안색에 음침한 살기가 감돌았다. 그는 술잔을 들더니 두 비녀에게 냉랭하게 말했다. "춘앵(春櫻), 추요(秋姚)! 너희들이 이 술을 마셔라." "넷?" 춘앵과 추요는 안색이 금새 굳어졌다. 그러나 곧 추요가 교태롭게 웃으며 그의 목에 두 손을 감았다. "아이, 나으리.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는 술을 못마 시......." "흐흐흐... 계집년들! 이 안에 무엇을 넣었느냐?" "나, 나으리!" 춘앵, 추요는 대뜸 안색이 창백해졌고 이를 본 흑고는 음침하게 말했다. "감히 나 흑고에게 이런 유치한 수작을 부리다니!" "아악!" 흑고의 목에 두 팔을 걸고 있던 추요는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그 녀의 매끄러운 아랫배 속으로 흑고의 손이 푹 뚫고 들어갔던 것이 다. 그것은 실로 눈 깜짝할 순간의 일이었다. 흑고는 손을 뗐다. 그러 자 그의 손에는 시뻘건 창자가 한 웅큼 뽑혀져 나왔다. 침상은 온 통 피바다가 되고 말았다. "아악! 나... 나으리......." 쿵! 추요는 바닥에 떨어지고 춘앵은 새파랗게 질려 뒤로 물러났다. 흑 고는 술잔을 들고 서서히 일어나며 물었다. "흐흐... 춘앵, 이 술 속에 무엇을 넣었느냐?" "소, 소비는 무슨 말인지." "너를 죽여버리겠다." 흑고는 잔인하게 말하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춘앵의 얼굴은 완전 히 공포에 질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문득 날카로운 교갈이 터졌다. "찻!" 그녀는 갑작스럽게 옥수(玉手)를 들어 흑고를 공격했다. 정녕 뜻 밖의 급습이었다. 펑! 그녀의 옥수는 정확히 흑고의 가슴에 적중했다. 그러나 흑고가 누 구인가? 그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흐흐흐... 나 통천마군 흑고가 어떤 인물인지 똑똑히 보여주마. 이 수라궁의 못된 계집!" 휙! 흑고의 신형이 전광석화처럼 움직였다. "악!" 춘앵은 비명을 질렀다. 흑고의 손에 그녀의 가녀린 두 발목이 잡 힌 것이었다. 그것은 춘앵의 생의 마지막이었다. "아아악!" 처참했다. 피보라가 튕기는 가운데 춘앵은 무참하게 사지가 찢기 고 만 것이었다. 흑고는 알몸에 온통 두 시비의 피를 뒤집어 썼다. 그것은 전설상 의 흡혈악귀와 같은 모습이었다. "흐흐흐... 감히 이 흑고에게 수작을 부리다니!" 흑고는 바닥에 흩어진 춘앵, 추요의 인육(人肉)을 내려보며 으스 스한 괴소를 흘렸다. 그야말로 강호의 대마군 통천교주다운 모습 이었다. 그는 뒤이어 갈라진 음성으로 외쳤다. "구살(九殺)!" "넷!" 우렁찬 대갈과 함께 방 안에 아홉 명의 흑의인들이 들어왔다. 그 들은 모두 안색이 음침한 중년인들로, 그들 또한 방 안의 광경을 보았다. 그러나 인간계(人間界)가 아닌 처참한 풍경에도 그들은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흑고는 냉혹한 음성으로 물었다. "밖에 서황견(西黃犬)이 있느냐?" 한 중년인이 대답했다. "넷! 세 마리 모두 튼튼하게 있습니다." 흑고는 아수라귀처럼 웃었다. "홋홋홋... 이 계집들의 시체를 서황견의 오늘밤 먹이로 주어라." "넷!" 구살은 대답과 함께 방 안에 흩어진 인육을 모아 밖으로 끌고 나 갔다. "흐흐흐... 나 흑고를 우롱한 대가다." 흑고는 침상에 걸터 앉으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때 어디선가 분 노성이 울렸다. "잔악무도한 놈!" 가벼운 경풍 소리와 함께 방 안에 한 인영이 나타났다. 그는 바로 금악비였다. 금악비의 두 눈은 피투성이인 방 안을 둘러본 후 무서운 살기를 폭사했다. 흑고는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며 음소를 흘렸다. "흐흐흐... 조금 전의 말은 네 놈이 씨부렸느냐?" 금악비는 치를 떨었다. "그렇다. 노마!" "크하하하핫!" 흑고는 일진광소를 터뜨렸다. 금악비의 소매가 펄럭이며 금빛이 번쩍 빛났다. 쐐액! 무림을 공포에 떨게 한 한 자루의 금마비(金魔匕)가 날았다. 흑고 의 목구멍이 정통으로 꿰뚫릴 찰나였다. 그러나 흑고는 과연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신형을 흔들하는 순간 그는 이미 귓전으로 금마비를 스쳐보내고 있었다. "애송이 놈! 네 놈도 갈기갈기 찢어 개의 먹이로 만들어 주겠다." 흑고는 유령처럼 흐느적거리며 쌍장을 무섭게 뻗었다. 금악비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노마! 그 전에 네 놈이 먼저 죽을 것이다!" 그는 양 손을 칼처럼 세우더니 휘둘러 뻗었다. 두 줄기 장력이 격 돌했다. 콰쾅! 지붕이 들썩이고 방이 무너질듯 울렸다. 자욱한 먼지 속에서 두 사람은 튕기듯 뒤로 물러났다. 금악비는 뒤로 세 걸음, 그러나 흑 고는 비틀거리며 한 걸음 물러섰을 뿐이었다. "호호호......!" 이때 느닷없이 사내의 마음을 온통 뒤흔들어 놓을 마력(魔力)의 교소가 두 사람 사이를 파고 들었다. "호호호... 사형, 그만 둬요. 어차피 개파대전은 오 일밖에 남지 않았으니 그때 모든 것을 해결하도록 하세요." 방 안에는 어느새 한 백의미녀가 나타나 있었다. 그녀는 바로 천 하우물(天下尤物) 백화미(白花美)였다. 백화미는 미태가 잘잘 흐르는 옥용을 무슨 까닭인지 면사로 반쯤 가리고 있었다. 그러나 드러난 두 눈 만으로도 온 천하 남성의 혼 백을 녹이고도 남음이 있었다. 금악비는 안면을 씰룩였으나 백화미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는 흑고를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 "좋다, 흑고! 두고보자. 나 금악비가 얼마나 무서운 인물인지 그 때 가서 똑똑히 보여주마!" 금악비는 말을 마치자마자 몸을 홱 돌렸다. 흑고는 음흉한 괴소를 흘렀다. "흐흐흐... 수라궁 따위를 안중에 둘 이 통천마군이 아니다. 노부 가 이곳에 온 이유는 노부의 애첩 애향향(愛香香)을 죽인 자를 찢 어죽여 개 먹이나 만들기 위해 온 것이다. 흐흐흐......!" 흑고의 두 눈에서는 무시무시한 살광이 줄기줄기 뻗쳐나오고 있었 다. 그러나 금악비와 백화미가 사라진 후 방 안에 혼자 남게되자 그는 음침하게 말했다. "친구, 이제 그만 모습을 보이시지!" "하하하... 역시 통천교주답소." 낭랑한 음성과 함께 방 안에 한 인영이 나타났는데 그는 바로 자 부신군 무영종이었다. "그대가 방금 노부에게 깨우침을 줬소?" 흑고의 의문스러운 말에 무영종은 담담히 말했다. "그렇소, 조금 전 내가 전음을 보냈소이다." 무영종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조심하시오. 이미 수라궁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개파대전 전까 지 모든 군웅들을 무력화시키려 하고 있소. 조금 전의 그런 방법 도 여러 가지 계략 중 하나인 독계(毒計)와 미인계(美人計)요." 흑고의 얼굴이 약간 굳어지는 것을 느끼며 무영종은 몸을 돌렸다. "당신을 통해 경고하니 모든 사도 고수들에게도 경각심을 불러일 으켜 주시기 바라오. 미인계와 독계, 그리고 또 무슨 계략이 있는 지 모르지만." 무영종이라는 신비의 사나이, 그는 이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흑고는 방 안에 선 채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미인계, 독계, 그리고...... 또 무엇이 있단 말인가?" 천황십독(天皇十毒). 그들은 백독곡의 제일고수들이었다. 나이는 모두 칠순이 넘었으며 백독마군 음무위의 오른팔 격인 존 재들이었다. 십독은 지금 한 방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두 눈이 모두 녹색을 띄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독공(毒功)이 절정에 이른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문 밖에서 음침한 음성이 들렸다. "십독! 안에 있느냐?" 문이 열리며 방 안으로 들어선 자는 바로 십독이 하늘처럼 섬기는 백독마군 음무위였다. 그의 옆에는 한 명의 복면인이 따르고 있었 다. 대독이 음무위에게 머리를 숙이며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곡주님." 음무위는 나직하게 말했다. "음, 너희들과 긴히 상의할 일이 있다." 십독은 모두 의아했다. 지금은 한밤중이거늘 갑자기 무슨 의논을 하러 그가 친히 왔단 말인가? 또한 그와 함께 있는 복면인은 정체 가 무엇인가? "모두 이리 다가와 봐라." 음무위는 그들에게 손짓을 했다. 십독은 의아했으나 감히 그의 명 을 어기지 못하고 시키는 대로 따라 했다. 복면인의 두 눈에 기광이 스쳤다. "탓!" 그의 입에서 기합이 발해지고 검광이 무섭게 번뜩였다. "크악!" 처절한 비명이 잇달아 터졌다. 놀랍게도 그의 단검에 십독 중 다 섯이 두 동강이가 나버린 것이었다. 실로 통천경악할 일이었다. "무... 무슨 짓이냐?" 대독은 분노성을 질렀다. 그러나 백독마군 음무위가 음침하게 외 쳤다. "죽어라!" 그의 손에서 가공할 장력이 발해졌다. "으악!" 다시 사인(四人)의 머리가 단번에 박살나 피와 뇌수가 사방으로 튀었다. 마지막 남은 것은 오직 대독뿐이었다. 그는 부들부들 떨며 처절하게 외쳤다. "너, 너는 곡주님이 아니구나!" 그 말에 복면인이 싸늘하게 말했다. "흐흐흐... 깨닫기엔 너무 늦었다." 번쩍! 가공할 검광이 번뜩이고 대독의 몸은 정수리부터 정확히 두 쪽이 났다. 아침. 백독마군 음무위는 자신의 처소에 앉아 조그만 옥갑을 만지작거리 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는 지극히 만족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흐흐... 이 해약(解藥)... 이제 오독비마 늙은이의 독계는 수포 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더구나 이 해약은 놈들의 계락을 풀 뿐만 이 아니라 첩자까지도 가려낼 수 있다." 그의 상념을 깨듯 덜컹 하며 갑자기 문이 열렸다. "응?" 음무위는 몸을 돌렸다. "아... 아니?" 그는 대경했다. 한 명이 피투성이가 된 채 방 안으로 뛰어들어왔 는데 그는 바로 십독의 막내였다. "아니! 황곡(黃曲), 어찌 된 일이냐?" 황곡은 쓰러질 듯이 다가왔다. "저... 적이 기습을......." "뭐, 뭣이?" 음무위는 급히 황곡을 부축했다. "황곡! 똑똑히 얘기해라. 대체 어찌 된... 으악!" 그의 가슴에 한 자루의 비수가 깊숙히 꽂히며 피가 푹 하고 치솟 았다. 하늘도 놀랄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큭! 네... 네놈이?" 음무위는 심장을 부여잡고 뒤로 물러났으나 그의 눈에는 온통 경 악과 불신, 회의가 어려 있었다. "흐흐흐... 나는 황곡이 아니다. 황곡은 이미 내 손에 죽었다." "너... 너는 누구냐?" "흐흐... 알고 싶으냐?" 황곡은 얼굴을 쓱 문질렀다. 황곡의 새 얼굴이 드러나자 음무위의 얼굴이 시퍼렇게 변했다. "네... 네 놈이... 네 놈이 이럴 수가!" 황곡의 얼굴은 뜻밖에도 젊었으며 또한 준수했다. 그는 사이한 음 소를 흘렸다. "흐흐흐... 뜻밖이냐?" 음무위는 치를 떨었다. "배... 배신자!" 음무위는 쌍장을 번쩍 치켜 들었다. 그의 쌍장에서 검은 기운이 감도는 것을 보자 가짜 황곡은 감히 소홀히 하지 못하고 경계의 표정을 지었다. 음무위가 무섭게 노려보며 서서히 다가왔다. "너를 죽여버리겠다!" 그의 쌍장은 순식간에 시커멓게 변했다. 가짜 황곡은 두려움을 느 끼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흐흐흐... 백독마공으로 너를 한 줌의 독수(毒水)로 만들어 주 마!" 음무위는 쌍장을 앞으로 뻗었다. 그러나 창문이 박살나면서 한 줄 기 가공할 검광이 번쩍 빛났다. "크악!" 음무위의 입에서 단말마가 터졌다. 그의 등이 쪼개지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한 명의 복면인이 서 있었다. "너... 너는?" 그 물음에 복면인은 복면을 벗었다. 오 순 가량의 청수한 노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음무위는 몸이 거의 두동강이가 난 채 쓰러졌다. 가짜 황곡은 그 것을 보며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흐... 우리의 일에 방해가 되는 자는 모두 죽인다. 이 자는 독에 능통한 자니 죽는 것이 당연하다." 그는 복면인을 향해 말했다. "갑시다!" 휘휙! 두 사람은 방 안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이때 등이 갈라져 틀림없 이 죽은 것만 같았던 음무위가 꿈틀거렸다. "이... 이대로... 죽을 수는... 너무나 원통하다... 무... 영종이 곧... 온다....... 그가... 이것을 필히 보아야......." 음무위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흥건한 피를 찍어 바닥에 썼다. <해약(解藥)은 완성...... 첩자도 가려낼 수 있는 효능...... 날 죽인 자는...... 두 명으로...... 지무성(智武星) 석(石)......> 음무위는 스스로의 피를 찍어 그같이 썼다. 그러나 끝까지 쓰지 못하고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그의 얼굴에는 온통 울분과 원한이 어려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방 안에 한 인영이 날아들었다. 그는 바로 무영종이었다. 그는 방 안의 참경에 놀라고 말았다. "이... 이럴 수가?" 그는 아찔해짐을 느꼈다. 그의 눈에 죽어가던 음무위가 이 세상에 서 마지막으로 남긴 피로 쓴 글자가 보였다. 그 글씨를 읽은 순간 무영종의 눈은 무섭게 번뜩였다. "지무성 석검영(石劍英)이라고?" 지무성 석검영, 그는 복건성 석가(石家)의 소공자로써 현재 이곳 에 있는 사도군웅들의 군사(軍師)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배신자라니 실로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이었다. "놀라운 일이로구나." 무영종의 안색은 납덩이처럼 무거워졌다. 밤. 월광이 수라궁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자전신도(紫電神刀) 팽수위. 하북팽가의 이(二) 가주인 그는 요즘 들어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 지고 있었다. 자신이 가는 곳, 있는 곳마다 끊임없이 떠나지 않고 감시하는 주위의 눈길을 느끼기 때문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오 일이 흐른 지금은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와져 있었다. 사람이 긴장을 한다는 것, 그것도 며칠 동안 계속 긴장에 싸여 있 는다는 것은 자칫하면 정신적인 균형을 깨뜨리기가 십상이 아닌 가? 자전신도 팽수위가 바로 그런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좋다, 수라궁 놈들! 끝까지 이렇게 나온다면 나에게도 생각이 있 다.' 그는 자신의 몸의 일부분이 되다시피한 자전신도를 집어들었다. '자전십팔풍(紫電十八風)의 맛을 단단히 보여주마!' 팽수위는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월광(月光). 휘황한 달빛 아래 화원은 숨막히는 정적에 싸여 있었다. 그러나 화원의 곳곳에 매복자의 눈초리가 자신을 향해 번들거리는 것을 팽수위는 알고 있었다. 그는 걸음을 옮겼다. 스스스! 극히 미세한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그의 곤두세운 청각 속으로 들 려왔다. '역시.......' 팽수위는 자전신도의 칼자루를 힘껏 잡았다. '하나... 둘... 셋... 네 놈이구나.' 그는 모르는 척 화원 중심으로 걸어들어갔다. 네 명의 감시자는 계속 그의 뒤를 따라왔다. 얼마쯤 가자 그의 눈에 한 그루 교향목(橋香木)이 보였다. 휙! 팽수위는 갑자기 신형을 날려 교향목 뒤로 몸을 감추었다. 그런데 조용했다. 그의 뒤를 따르던 감시자가 모습을 나타내거나 몸을 날려야 됨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기척도 들려오지 않았던 것 이었다. 팽수위는 눈살을 찌푸렸으나 인내심을 가지고 한참 동안 기다렸 다. 그러나 역시 종무소식이었다. '이 자식들이?' "아악!" 처절한 비명이 울렸다. 그것도 날카롭고 뾰족한 여인의 음성으로, 팽수위는 흠칫하여 비명이 울린 곳으로 잽싸게 신형을 날렸다. 화원 깊숙한 곳, 그곳에는 키가 낮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그런데 그 꽃밭 위에 끔찍한 한 구의 시체가 누워 있었다. 여인은 강간(强姦)을 당한 듯 하체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가 슴에는 비수가 깊숙히 꽂혀 있었다. 게다가 복부도 뚫려 내장이 흘러나와 있었으니 실로 너무나 잔악무도한 살인이었다. "이... 이럴 수가!" 팽수위는 대경실색했다. 더우기 그는 간살당한 여인의 얼굴을 보 자 아연해지고 말았다. "아니, 이 여인은 비운선자(飛雲仙子)!" 비운선자는 화산파(華山派)의 인물이었다. 그녀는 미모와 검법(劍 法)이 모두 크게 알려진 일대의 협녀(俠女)로써 당금의 화산장문 인인 철검수사(鐵劍秀士) 초일비(草一飛)의 사매였다. "이... 이렇게 당할 수가?" 팽수위는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대체 천하의 누가 비운선자를 강간하고 이토록 끔찍하게 죽일 수 있단 말인가? 휘익! 한 가닥 파공성과 함께 인영이 꽃밭에 날아들었다. 그는 오순 가량의 청수한 노인으로 허리에는 한 자루의 폭이 좁고 가벼운 연검(軟劍)을 두르고 있었다. 당금 사가(四家) 중 악가(岳 家)의 가주인 섬마검(閃魔劍) 악진원이었다. 악진원은 내려서자마자 비운선자의 끔찍한 주검을 보고는 안색이 홱 변해 외쳤다. "팽형, 이게 어찌된 일이오?" "으음." 팽수위는 그저 무거운 신음을 발할 뿐이었다. "아니! 이 여인은 비운선자가 아니오?" "그렇소, 악형." "천하에 어떤 놈이 이런 짓을?" 팽수위는 드디어 눌러 참고 있던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다. "아... 수라궁 놈들을... 내 오늘 밤 끝장내고야 말겠소!" 그가 몸을 홱 돌리자 악진원은 깜짝 놀란 듯 그를 만류했다. "팽형! 경거망동하지 마시오." 그러나 팽수위의 분노는 극에 달해 이미 그는 이성을 상실하고 있 었다. "경거망동이 아니오. 나는 이제 더이상은 참을 수가 없소. 개파대 전을 십 일 연기할 것을 허락한 것은 군웅들의 커다란 실수였소. 그 동안에 놈들은 우리를 차례로 죽일 것이오." 악진원은 눈썹을 꿈틀했다. "팽형! 그렇지만 함부로 움직이면 역시 목숨이 위태로울 것이오." 그 말에 팽수위는 기분나쁜 듯이 코웃음을 쳤다. "흥! 그까짓 놈들이 뭐가 두려워... 으악!" 처절한 비명이 그의 입으로부터 터져 나왔다. 그의 심장을 뚫고 하나의 연검이 등까지 관통한 것이었다. 그는 눈을 찢어질듯 부릅 떴다. 그의 눈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아... 악진원... 네... 네가?" 섬마검 악진원이 연검을 뽑아내자 피분수가 팽수위의 가슴에서 뻗 쳐나왔다. "그러게 내가 뭐랬소? 함부로 움직이면 목숨이 위태롭다고 하지 않았소?" 팽수위의 눈은 이미 찢어져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네... 네... 네가?" 그러나 그는 그대로 있지 않았다. "으아아!" 그는 괴성을 내지르며 혼신의 힘을 모아 악진원을 덮쳤다. 그러나 악가(岳家)의 섬마검칠십이류(閃魔劍七拾貳流)가 번개를 그렸다. "크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팽수위의 목이 날아갔다. 그리고 그는 뒤로 일곱 걸음이나 물러가다가 쓰러졌다. 악진원은 연검을 거두며 음산하게 웃었다. "흐흐흐... 팽수위. 내 분명히 말하지 않았느냐? 경거망동 말라고 말이다. 흐흐흐흐!" 음모(陰謀). 암흑의 십 일(十日)을 통해 무서운 음모가 거미줄처 럼 군웅들 사이로 퍼져 나갔다. 죽음의 암수(暗手)에 영문도 모른 채 군웅들의 피는 덧없이 허공 에 뿌려졌다. 독(毒). 그 누구도 막지 못하는 사이에 무서운 독이 보이지 않는 연기처럼 퍼져 나갔다. 색(色). 아름다운 여인의 품 속에서 희열의 극치를 맛보며 신음하 다 졸지에 하나둘 죽어갔다. 그뿐이 아니었다. 군웅들은 서로를 의심했다. 웃고 떠들며 함께 이야기하던 친구가 검으로 가슴을 쑤시는가 하 면, 차를 마시던 친구의 손이 머리통을 부수었다. 또한 한 밤중 방문한 동문(同門)이 무참히 등을 찔렀다. 불신(不信), 또 불신(不信). 미칠 듯한 불신 풍조가 군웅들 사이에 독약처럼 번졌다. 그 누구 도 이제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믿지 않았다. 웃고 떠들지도, 술을 마시거나 차를 나누지도, 방문한 동문을 맞아들이지도 않았 다. 이 엄청난 불신과 견딜 수 없는 불안(不安), 그리고 공포에 마침 내는 스스로 자결했다는 사람까지 생기게 되었다. 진짜로 자결했 는지는 모르지만. 군웅들은 개파대전이 다가올 수록 수라궁의 존재에 대해 차츰차츰 엄청난 공포심과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오백십일인(五百十一人)이라는 숫자의 군웅들 중 불과 팔 일(八 日) 동안에 백육십(百六十) 명이 줄어 들었다. 가공할 음모의 주동자는 분명 수라궁이었으나 그 증거가 없었다. 수라궁도가 군웅들을 죽였다는 아무런 증거가 없었던 것이다. 왜 냐면 죽은 자는 모두가 군웅들 자체 인물의 수법으로 죽었기 때문 이었다. 두려움과 불안 속에 군웅들은 동요하고 있었다. ■ 대소림사 제23장 배신자(背信者)는 누구인가? -1 ━━━━━━━━━━━━━━━━━━━━━━━━━━━━━━━━━━━ 군웅전(群雄殿). 커다란 대전에는 수백명의 군웅들이 운집해 있었다. 무서우리만치 무겁고 조용한 침묵이 벌써 한 시진이나 흘러갔다. 침중하고 살벌 한 분위기였다. 수라궁의 개파대전은 내일이었다. 그런데 왜 군웅들이 이곳에 운 집한 것일까? 그것도 한 명도 빠짐없이. 군웅들은 한결같이 의혹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 날의 모임은 완전히 전격적인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 날 아침에 비밀리에 통첩이 모든 군웅들에게 전달된 것이었다. 정파군웅들에게는 소림(少林)의 현광대사(玄光大師), 천산파(天山 派)의 천산비검옹이 첩지의 발부자였다. 또한 사파군웅들의 첩지 발부자는 천군맹(天群盟)의 대표인 조천명이 발부자로 되어 있었 다. 결국 몇몇의 영수급 인물들로 인해 이 모임이 긴급 소집된 것 이었다. 군웅전에는 근 삼백 명이 넘는 군웅들이 운집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늘 한 개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한편 무영종(無影宗)은 한쪽 구석에 앉아 있었다. 그의 옆에는 선기묘인 사도유가 술병을 들고 벌컥벌컥 마셔대고 있었는데 처음 볼 때와 조금도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사도유는 소매로 입가를 슥 문지르더니 입을 열었다. "흐흐흐... 무형, 오늘 왜 군웅들이 소집됐는지 아시오?" 무영종은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글쎄 올시다." 사도유는 괴소를 흘렸다. "훗훗훗... 좀더 빨리 소집했어야 했소. 그러나 그렇게 늦은 것만 도 아니오." 그는 술병을 흔들며 혀꼬부라진 소리로 외쳤다. "그 동안 두 다리 걸친 놈들은 모두 죽여야지! 암, 죽여야 하고 말고!" 그의 음성은 컸다. 모든 군웅들이 그의 말을 들었다. 그들 중 몇 명의 안색이 변하고 있었다. 이윽고 소림의 선좌원 원주인 현광대사가 몸을 일으키며 침중하게 불호를 외었다. "아미타불......." 현광대사는 고요한 눈에 은은한 신광을 담고 군웅들을 둘러보았 다. "여러분께서는 오늘 무엇 때문에 이렇게 급히 소집됐는지 의문을 느끼실 것이오." 군웅들은 숨마져 죽였다. 그들은 모두 그 점에 대해 한결같은 의 문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광대사는 합장을 하고 다시 나직히 불호를 외운 뒤 장엄한 음성 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 수라궁의 개파대전이 하루 남았소이다. 개파대전이 열흘 연 기된 그 날로부터 여러분은 어떠한 경험을 겪었소이까?" 현광대사의 인자한 얼굴에 비감이 스쳤다. "그동안 실로 엄청난 음모에 의해 일백육십 명의 동도들이 억울하 게 숨져 갔소이다." 군웅들의 안색에도 비통이 떠올랐다. 그 숨진 사람들은 모두가 직 접 간접으로 그들과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광대사의 말이 계속되었다. "더욱 무서운 일은 그 일들은 수라궁에서 손을 쓴 것이 아니오. 슬프게도 이번 일의 원흉은 바로... 우리 자체 내에 있다는 것이 오." 군웅들은 일제히 술렁거렸다. 비록 모두 그 점을 짐작은 하고 있 었지만 현광대사가 명백히 단정짓자 새삼 의론이 분분해졌다. 악가의 가주인 섬마검 악진원이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대사! 그것은 너무 빠른 속단이 아니겠소이까?" 악진원은 눈썹을 기이하게 꿈틀거리며 군웅들을 둘러보았다. "여기에 모이신 군웅들은 모두 수라궁을 공동의 적으로 여기고 있 소이다.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쳐 있는데 대사의 그런 말씀은 오히 려 우리들의 일체감에 분열을 초래할 우려가 있소이다. 노부는 오 히려 그 점이 두렵소이다." 그의 말은 비록 공손한 듯 했지만 뼈가 있었다. 은근히 현광대사 를 자체 내의 분열 주동자로 모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현광은 수 양이 깊은 불승이었다. 그는 지그시 악진원을 응시하며 탄식해 마지 않았다. "아미타불... 악시주의 말도 일리는 있소이다. 그러나 이미 분열 은 시작되었소이다. 이제까지의 희생자가 바로 그것을 보여주는 사례이오. 다만 남은 것은 앞으로 어떻게 그 배신자를 찾아내느냐 하는 것이오." 그의 말에 이번엔 곤륜파(崑崙派)의 대표자로 파견된 구환비객(九 環飛客) 환도(桓陶)가 일어섰다. "대사, 소생이 한 마디 하겠소이다." 환도는 날카로운 두 눈을 번뜩이며 추궁했다. "숨져간 동도들은 수라궁 놈들에 의해 죽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소?" 그 말에 이번에는 현 개방( )의 젊은 영걸이자 장문인인 만리 추풍수사(萬里追風秀士) 모용랑이 일어섰다. 그는 삼십 세 정도의 청수하게 생긴 위인이었다. 전신에는 낡았으 나 깨끗한 마의수사복을 입었으며 진한 눈썹과 서글서글한 눈은 초인적인 비범함과 지혜를 보여주었다. 모용랑은 수중에 들고 있는 죽선(竹扇)을 짧게 쥐고는 자신의 손 바닥을 가볍게 두드리더니 구환비객 환도를 지그시 응시하며 물었 다. "환대협, 한 가지 묻겠소. 백독마군 음무위의 무공은 어느 정도 요?" 마치 자신의 내부를 꿰뚫는 것같은 모용랑의 날카로운 눈길에 환 도는 움찔했다. 그는 마지 못한 듯 대답했다. "그는... 최절정 고수요." 만리추풍수사 모용랑은 죽선을 쫙 펼쳤다. "그렇소이다. 그는 최절정 고수요. 거기에 더욱 함부로 볼 수 없 는 것은 그가 무서운 독공을 익혔다는 것이오. 당금 천하에서 그 를 꺾을 사람은 실로 손가락을 꼽을 정도요." 모용랑의 말은 조리가 분명하면서 은연중 만인을 압도하는 기풍이 있었다. 과연 젊은 나이에 중원에서 가장 인원이 많은 개방을 영 도하는 방주로써 추호도 손색이 없었다. 모용랑은 군웅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침착하게 말했다. "그런 그가 심장과 등 뒤에 치명상을 입고 죽었소이다." 구환비객 환도는 눈썹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수라궁 고수들의 합공(合攻)을 받은 것이 아니겠소?" 모용랑은 두 눈에 이채를 발산하며 확신하듯 말했다. "아니오. 그가 있던 방 안에는 전혀 싸운 흔적이 없었소이다. 더 군다나 그의 수하로써 역시 절정인물인 천황십독(天皇十毒)도 손 한 번 써보지 못하고 살해되었소이다." 모용랑은 죽선을 다시 접었다. 그의 눈에서 칼끝같이 예리한 혜광 이 번쩍였다. "이로 미루어 분명 그들을 죽인 자는 그들과 친분이 두터운 자였 을 것이오." 환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더이상 반박할 말이 없었던 것이 었다. 쾅! 팽가의 가주인 패천참인도 팽천후가 탁자를 치며 일어서더니 좌중 을 향해 분노성을 터뜨렸다. "노부도 모용방주의 말에 동감이오. 노부의 아우 역시 도법(刀法) 으로 강호일절이오. 그런데 아우 역시 칼 한 번 뽑아보지 못하고 죽었단 말이오!" 팽천후의 눈에서는 무서운 분광이 쏟아져 나왔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나의 아우를 죽인 자는 아우가 너무도 잘 아는 자요. 아우는 그 자를 믿었기 때문에 방심하다가 어처구니 없이 당한 것이오." 팽천후는 살기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군웅들을 차례로 노려보았다. "오늘 이 자리에서 원흉(元兇)을 가려내 죽이지 못하면 노부는 칼 을 꺾은 후 영원히 강호에서 사라지겠소!" 그 말에 한 거한이 벌떡 일어났는데 그는 사도의 거마인 철탑유신 (鐵塔幽神) 구유명(仇有命)이란 자였다. 그는 운남(雲南)일대의 마왕(魔王)으로써 무서운 외가무공(外家武功)인 철탑파황공(鐵塔 破荒功)을 익히고 있었다. 그는 버럭 분노성을 질렀다. "팽가주! 그대의 말은 너무 지나치다. 나는 더이상 이곳의 일따위 는 참견하고 싶지 않으니 이 자리에서 나가겠다!" 구유명은 정말로 성큼성큼 걸어 자리를 떠나려 했다. 그러나 혈영 곡의 곡주인 혈의마검 공손패가 일어서더니 음산하게 외쳤다. "혈의삼십육궁!" "넷!" 사방에서 일제히 대답이 들림과 동시에 삼십육 명의 혈의궁수들이 나타났다. 공손패는 차디차게 명령했다. "너희들은 이곳을 빠져 나가려는 자가 있다면 누구를 막론하고 가 차없이 쏴 죽여라!" "넷!" 혈의삼십육궁은 지체없이 대전의 사방으로 물러가더니 혈궁(血弓) 을 들고 화살을 매겼다. 그들은 모두 차가운 표정으로 전 군웅들 을 향해 화살을 겨누었다. 막 밖으로 나가려던 철탑유신 구유명은 흠칫하더니 걸음을 멈추었 다. 그는 즉시 살기 어린 눈으로 공손패를 노려 보았다. "공손패! 너의 이 행동은 무엇을 뜻하는 것이냐?" "누구든지 이곳을 나가려는 자가 있다면 배신자로 단정하고 죽일 것이다." "뭣이?" 철탑유신은 물론 몇몇 군웅들의 안색이 돌변했다. 현광대사 또한 탄식하더니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정혜(丁慧)." "네, 사숙님." 정혜가 그의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그대는 십팔나한과 함께 대전 밖으로 나가라. 그 누구도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게 할 것이며 또 외부의 누구라도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사숙님." 정혜는 합장을 한 뒤 물러났다. 소림사의 십팔나한도 모두 대전 밖으로 사라졌다. 군웅들은 가슴이 섬뜩해짐을 느꼈다. 일백 년 만에 출현한 소림사 십팔나한, 그들이 소나한진(小羅漢陣)을 펼친다면 그 누가 군웅전 을 빠져나갈 수 있단 말인가? 천군맹의 구주진천도 조천명도 무시무시하게 외쳤다. "천군십마(天群十魔)!" "넷!" 열 명의 음침한 노인이 벌떡 일어섰다. "너희들도 나가 소림 십팔나한을 도와라!" "알겠습니다, 맹주님!" 천군십마. 그들은 천군맹의 일류고수들로 한결같이 끔찍한 사도의 거물들이었다. 그들 역시 군웅전 밖으로 나갔다. 일이 이렇게 되자 군웅들은 숨을 죽였다. 철탑유신도 터질 듯한 분위기를 느끼고 마지못해 제자리에 앉았다. 분위기는 가일층 살 벌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섬마검 악진원이 다시 일어서며 침중하게 말했다. "배반자들을 어떤 식으로 가리겠소?" 그의 물음은 어느 특정인을 향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그 말에 대답 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제껏 구석진 곳에서 말없이 앉아 있던 무영종이 일어났다. 그는 군웅들을 둘러보며 담담히 말했다. "본인에게 방법이 있소이다." 군웅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집중되었다. 무영종은 그들을 둘 러보며 여전히 담담하게 말했다. "이 구 일 동안 수라궁에서는 우리들의 몸에 한 가지 기이한 약을 은밀하게 주입시켰소이다. 그 약은 무색무미무취한 것으로 독이 아닌 기이한 성질을 가지고 있어 전혀 방비할 수 없는 것이오. 수 라궁에서는 그 약을 우리들이 마시는 물과 술, 그리고 모든 음식 에 조금씩 탔으니 그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 약성분이 배어 있소이 다." "그... 그럴 수가!" 군웅들의 안색이 모두 돌변했다. 무영종은 경악하는 그들을 둘러 보며 말을 이었다. "본인은 며칠 전 백독마군에게 그 약을 주고 검토시킨 적이 있소 이다. 마침내 그는 죽기 직전 해약을 얻어냈소이다." 무영종의 담담한 말은 군웅들의 마음 속을 부드럽게 파고 들었다. 무영종은 기이한 음성으로 다시 말했다. "그 해약은 백독마군이 전력을 기울인 것으로 두 가지 효능이 있 는 것이오." 군웅들의 얼굴에 의혹이 어리는 가운데 천안통수 마운로는 벌써부 터 무영종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다가 마침내 물었다. "무슨 효능이오?" 무영종은 군웅들을 둘러보며 담담히 말했다. "한 가지 효능은 물론 여러분의 몸에 잠재된 약성분을 해소시키는 것이오. 그러나 다른 한 가지는 바로 우리 자체 내의 배신자를 가 려내는 것이오." 군웅들의 안면에 재차 의혹이 서렸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었다. 악진원이 번뜩이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반문했다. "한낱 해약이 어찌 배신자를 가려낼 수 있단 말이오?" 무영종은 담담히 웃었다. "그 이유는 수라궁이 복용시킨 약을 먹은 자는 해약의 효능을 나 타내지만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곧 죽음의 독약이 되기 때문이 오." 군웅들의 얼굴에 경악과 아울러 감탄이 실렸다. 반면에 악진원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냉소하며 물었다. "흥!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누구요? 첫날부터 노부는 당신을 의심 했었소. 당신이 수라궁의 인물일지도 모른다고 말이오. 해약이라 고 준 그 약이 우리 모두를 독살시킬지 어떻게 믿겠소?" 그 말에 군웅들이 웅성거렸으나 무영종의 안색은 여전히 담담했 다. "어쨌든 이 해약을 거부하는 자가 있다면 그 자가 바로 첩자일 가 능성이 있소. 왜냐하면 백독마군이 만든 약은 틀림없기 때문이 오." 악진원이 다시 차갑게 물었다. "그렇게 자신있게 말하는 그대는 대체 누구요?" 무영종은 담담히 말했다. "본인은 자부신군 무영종이라 하오." "자부신군 무영종? 노부는 강호에서 수십 년 동안 그같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 악진원은 주위를 둘러보며 언성을 높였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시오! 만약 이 자가 주는 해약이 극약이 라면 여러분은 완전히 수라궁의 계락에 넘어가고 마는 것이오." 그 말에 군웅들은 이내 소란을 일으켰다. 구환비객 환도가 나서며 적극적으로 찬동했다. "노부도 악대협의 말에 동감이오." 그는 두 눈에 살기를 띄며 나섰다. "노부는 저 정체모를 자를 잡아서 심문하겠소. 저 자는 필시 수라 궁의 첩자일 것이오!" 그가 앞으로 나서자 군웅들 속에서 몇몇이 따라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살기등등한 채 무영종에게 다가갔다. "아미타불!" 갑자기 천 개의 쇠종이 치듯 웅후한 불호성이 터졌다. 현광대사가 보다못해 일어선 것이었다. "노납이 한 마디 하겠소이다." 그 말에 곧 장내는 숙연해졌다. 소림의 현광대사라면 믿을 수 있 는 인물임은 물론 은연중에 군웅의 영수 역할을 해내고 있었기 때 문이었다. 현광대사는 신광이 감도는 눈으로 좌중을 쓸어보며 웅후한 음성으 로 말했다. "노납이 저 분 무시주의 말을 보장하겠소이다. 만약 여러분이 노 납을 믿어준다면 무시주의 말을 따라주시오." 군웅들의 안색은 대변했다. 자부신군 무영종, 그 자가 대체 누구 이길래 소림의 고승이 신의를 보장하고 나서는 것인가? 악진원이 쾅! 하고 탁자를 치며 격하게 외쳤다. "대사! 어찌 전 군웅의 생명이 걸려 있는 일을 정체도 모르는 한 사람에게 맡길 수 있겠소?" 그것은 사실 군웅 대부분의 의문이기도 했으나 현광대사는 담담한 신색에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미타불... 노납이 이 일에 생명을 걸겠소이다." 군웅들의 안색은 다시 동요했다. 그러나 구환비검 환도가 노성을 터뜨렸다. "대사! 대체 저 자의 무엇을 믿고 그러시는 것이오? 노부는 죽어 도 믿지 못하겠소이다." 현광대사는 두 눈을 스르르 감고 불호를 외었다. "아미타불... 여러분! 무시주가 누군지 아시오?" 군웅들의 얼굴에 삽시지간 온통 의혹이 어렸다. 뜻밖의 말에 무영 종조차도 흠칫 놀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귓전에 현광대사의 전음이 들려왔다. (아미타불... 사제,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네. 자네의 신분을 밝혀야만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네.) 무영종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사형 뜻대로 하십시오.) 그들 사이에 오간 전음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현광대사의 입이 드디어 떨어졌다. "아미타불... 무시주는 바로 본 소림의 전대 고승이신 삼성승(三 聖僧)의 제자이오." "뭣?" 군웅들은 모두 경악과 함께 굳어졌다. 너무나도 뜻밖의 사실을 접 한 때문이었다. 소림 삼성승(三聖僧)이라면 백 년 전 무림을 떨어 울린 나머지 그 위명이 가히 일월(日月)을 능가할 정도가 아닌가? 전 군웅들의 눈길이 무영종에게로 향해졌다. 그들 중 호불범의 눈 빛이 유난히 반짝였다. 눈물이 비친 것일까? 그의 눈에는 간절한 그리움과 애틋한 빛이 깃들어 있었다. '아! 역시 그 분이었구나.' 그는 무영종의 정체를 비로소 파악한 것이었다. 천안통수 마운로 는 잠시 어리둥절하더니 무릎을 쳤다. "그러면 그렇지, 그랬었군!" 그의 옆에 있던 공손패가 의아한 듯 물었다. "아니, 마대협! 그게 무슨 말이오?" 마운로가 그의 귓전에 대고 뭐라고 말하자 공손패의 안색이 일변 하는가 싶더니 온통 탄복의 빛을 드러냈다. 이때 군웅들의 소란을 제지하듯이 무당파의 오행자(五行子) 중 막 내인 청수자(靑水子)가 일어서며 도호를 외었다. "무량수불... 빈도는 무시주를 믿겠소이다. 빈도가 먼저 그 약을 복용하겠습니다." 호불범도 입가에 신비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소생도 무대협을 믿겠습니다." 공손패가 벌떡 일어나며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핫... 무대협! 정말 당신일 줄은 꿈에도 예측치 못했소. 과 연 무대협답소이다." 천안통수 마운로도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노부는 무대협을 꽉 믿겠소이다." 연이은 이들의 태도에 군웅들은 어리둥절했다. 섬마검 악진원의 안색은 거듭 변화를 일으켰다. 그는 은연중 검제 남궁진강을 응시 했다. 남궁진강은 침중한 표정을 짓더니 신음을 발했다. "으... 음. 호소협까지 그렇다면 노부도 따르리라." 악진원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이때 갑자기 통천교(通天敎)의 교주인 통천마군(通天魔君) 흑고가 음침하게 웃으며 나섰다. ■ 대소림사 제3권 제24장 背信者의 末路 -1 ━━━━━━━━━━━━━━━━━━━━━━━━━━━━━━━━━━━ ① 통천마군 흑고는 군웅들을 둘러보며 음침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흐... 나 흑고가 장담하건대 만약 노부에게 이곳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을 고르라면 노부는 서슴치 않고 무대협을 꼽겠 소!" 그 말에 군웅들은 경악했다. 일대의 마군인 흑고까지 동조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흑고는 두 눈에 흉광을 뿜어내며 쌍장을 거칠게 부볐다. "만약 누구든지 저 해약을 들지 않는 놈이 있다면 이 쌍장으로 대 갈통을 부숴 놓겠다!" 그 말에 악진원이 노성을 발했다. "흑고! 말이 너무 지나치다." 이어 그는 두 눈에 흉광을 번뜩이며 말했다. "누가 뭐라해도 노부는 저런 해약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뭐라고?" 흑고의 얼굴에 흉칙한 살기가 덮였다. 그는 당장이라도 섬마검 악 진원을 덮쳐갈 기세를 보였고 악진원도 허리에 두른 연검의 손잡 이를 잡았다. 사도군웅들의 군사 역할을 해왔던 지무성 석검영이 탄식하며 나섰 다. "여러분! 여러분들께서는 사람을 너무 믿는 것같습니다. 소생이 비록 무림말학이오나 이번 일에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 다." 그의 말은 반응이 컸다. 그는 지난 구 일 동안 사도군웅들의 행동 을 좌지우지해 왔으므로 사도 쪽에서는 자연히 그를 신뢰하는 마 음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의 한 마디 말로 인해 무영종에게 기울 던 사도군웅의 마음은 다시 의심으로 흔들렸다. 그러나 장내의 군웅들은 또한번 아연실색했다. "흐흐흐... 석검영, 네 놈이 감히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단 말이 냐?" 음산무비한 말이 대전을 울렸다. 순간 석검영을 위시하여 정사군 웅들은 일제히 소리가 들린 곳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들은 너무도 놀라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어느 틈엔가 나타난 십여 명, 그들은 바로 이제껏 죽었다고 알려 진 위인들이 아닌가? 백독마군 음무위로부터 자전신도 팽수위, 그 리고 무적권(無敵拳) 왕상 등....... 한결같이 군웅들이 친히 그 시체를 목격했던 자들로써 그들 중에 는 천황십독도 끼어 있었다. "아, 아니! 이럴 수가......?" 섬마검 악진원은 안색이 창백해졌고 지무성 석검영도 전신을 부르 르 떨었다. 철탑유신 구유명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부릅떴다. 이번에는 팽수위가 음침하게 외쳤다. "악진원, 왜 안색이 변하느냐? 노부를 보니 가슴이 떨리기라도 하 느냐?" "으으으......." 악진원은 마치 유령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분명히 그는 연검으 로 팽수위의 심장을 정확히 찔렀고 반격해오는 팽수위의 목을 날 리기까지 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살아날 수 있단 말인가? 백독마군 음무위가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 석검영, 애송이 놈! 네 놈이 아무리 날고 긴다해도 젖비린내 가시지 않은 애송이에 불과하다. 네 놈이 죽인 음무위는 내가 아니다. 노부는 이미 모든 것을 예측했었다." "이, 이럴 수가! 거, 거짓이다. 이건......." 석검영은 뒤로 물러나며 이마에서 식은 땀을 흘렸고 무적권 왕상 은 노성을 질렀다. "구환비객 환도! 네 놈의 아홉 개 비환(飛環)은 노부를 죽인 것이 아니다. 네가 죽인 자는 가짜였다!" "으으......." 구환비객 환도도 공포에 질려 비틀거렸다. 다시 또 이번에는 음침 한 인상의 흑의노인이 철탑유신 구유명을 노려보며 말했다. "흐흐흐... 구유명! 너의 철탑파황공(鐵塔破荒功)에 죽은 자도 역 시 내가 아니었다!" 구유명은 거구를 떨었다. "그... 그럴 리가......." 군웅들은 이 뜻밖의 사태에 대경하여 모두들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으며 호불범도 따라 일어섰다. 호불범은 무섭도록 차분한 안색으로 침착하고 낭랑하게 말했다. "악 노선배. 당신은 크나큰 실수를 했소이다. 어떻게 당신의 음모 가 드러났는지 아시오?" 섬마검 악진원은 충혈된 눈으로 의혹에 빠진 채 그를 노려보았고 호불범은 냉정하게 말했다. "악 노선배, 살인을 하면서 이 푼 오 리의 작은 상처밖에 내지 않 는 검법은 오직 천하에서 악가의 섬마검칠십이류(閃魔劍七拾貳流) 밖에 없다는 것을 모르시오?" 악진원의 안색이 참담하게 일그러졌으며 호불범은 여전히 싸늘하 게 말을 이었다. "이미 소생은 모든 배신자들을 파악했소이다. 그동안 그들을 밝히 지 않은 것은 더 큰 분열을 초래할까 두려워서였으나 이제 모든 것이 확실해졌소이다." 호불범은 악진원, 환도, 석검영, 구유명 등을 둘러보다가 다시 냉 기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여러분들은 소생의 허허실실(虛虛實實)의 계책에 걸려든 것이 오." 호불범은 이번에는 군웅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소생은 필히 수라궁주가 군웅들을 음모로 죽일 것을 예상했기 때 문에 몇몇 중요인물들을 가짜로 대치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 위에 고수를 배치시켜 감시케 했습니다." "으으......." 악진원의 안색은 완전히 창백하게 질려 버렸고 석검영도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석검영이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천하에서 나 지무성의 머리를 따라올 자는 없다고 생 각했다. 그러나 오늘에야 그것이 틀렸음을 알았다. 완전히 당하고 말았다. 하하핫......." 군웅들의 안색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석검영의 말은 곧 스스로의 음모를 시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신창보의 보주 자면신창 소중산이 그를 향해 노호성을 터뜨렸다. "석검영, 이 놈! 지하에 있는 석대선생(石大先生)이 너의 모습을 보면 통탄하실 것이다. 조부는 수라궁에 의해 죽었는데 그 손자가 수라궁의 주구가 되다니, 네 놈은 하늘이 무섭지도 않으냐?" 그 말에 군웅들까지도 한결같이 분노를 일으켰으나 정작 석검영은 냉소를 치고 있었다. "흥! 사람에겐 각자 뜻이 따로 있기 마련이다.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하든 누구도 상관할 바 아니다." "비, 비열한 놈!" 섬마검 악진원이 문득 외쳤다. "동도들, 모두 탈출하라!" 그의 허리로부터 연검이 번개를 그렸다. "으아악!" 그의 가까운 곳에 있던 이인(二人)의 허리가 창졸지간에 두 동강 이 났다. "앗! 저런!" 군웅들은 대경했으며 삽시간에 장내는 수라장이 되었다. 그 사이로 악진원이 허공을 몸을 솟구치고 있었고, 그것을 본 팽 가가주 팽천후가 이를 부드득 갈며 외쳤다. "악진원! 네 놈을 용서하지 않겠다!" 팽천후의 신형이 비쾌하게 날며 무서운 도광이 뻗었다. 츠츠츳! 도광이 악진원을 세로로 양단시킬 듯 덮쳤으나 그는 눈 하나 깜박 이지 않았다. "팽천후, 비켜라!" 번쩍! 도광과 검광이 우박처럼 쏟아지며 부딪쳤고 두 사람은 즉각 떨어 졌다. 그러나 팽천후도 악진원도 모두 상처를 입지는 않았다. 팽천후가 다시 이를 갈았다. "악가야! 너같은 잡배를 친우로 여긴 내가 부끄럽다!" 위--- 잉! 파츠츠츳....... 가공할 팽가의 자전십팔풍(紫電十八風)이 전개되었고 악진원은 삽 시에 그의 도세에 휩쓸렸다. 장내는 완전히 혈전의 수라장으로 화하고 말았다. 구환비객 환도, 석검영, 구유명 등과 또다른 배신자 등 십여 명이 대전을 탈출하 기 위해 군웅들과 불꽃 튀는 혈전을 벌인 것이었다. 그들의 무공은 모두 놀라왔으며 군웅들에게로 칼을 돌린 자들의 신분은 그야말로 뜻밖이었다. 호불범이 낭랑한 음성으로 외쳤다. "여러분, 모두 물러나십시오." 그의 말은 이제 정사군웅들에게 완전한 믿음을 주었다. 군웅들은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그렇게 되자 자연 히 배신자들 십여 명 만이 중앙에 남게 되었다. 호불범은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과연 추측이 맞았군. 섬마검 악진원, 구환비객 환도, 지무성 석검영, 철탑유신 구유명, 그리고 마장(魔掌) 유진광, 동 해쾌수(東海快手) 전성, 초혼신(招魂神) 두문강, 흑패왕(黑覇王) 거문, 엽살귀(葉殺鬼) 노반구, 신탄마도(神彈魔刀) 구운 환......." 그가 차례로 부르는 이름은 대전의 중앙에 몰려있는 열 명의 명호 였다. 모두가 쟁쟁한 정사의 호걸들로써 그들을 둘러싼 정사군웅들은 실 로 아연실색을 금치 못했다. "저럴 수가...... 저 자들이 배신자라니......." 군웅들은 배신자들에 대한 분노로 온통 흥분을 참지 못하고 있었 다. 그러나 호불범은 군웅들을 둘러보며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아직 한 명이 더 있소." 군웅들은 흠칫 놀라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호불범의 음성이 갑자기 한층 더 싸늘하게 변했다. "철검수사 초일비(草一飛)! 사매를 강간하고도 양심에 거리끼는 바가 없단 말이냐?" ② 군웅들은 대경하여 한 곳으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철검수사 초일 비가 누구인가? 그는 당금 화산파의 장문인으로 수라궁 대전에 사매인 비운선자와 함께 나란히 화산파 대표로 참가했다. 그런데 그가 사매를 간살 (姦殺)하고 사문을 배신했다니! 그야말로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 다. 군웅들의 시선이 일제히 초일비에게 집중되자 그는 안색이 백지장 처럼 창백해지며 뒤로 연달아 물러났다. "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내가 사매를 간살하다니!" 호불범은 냉랭하게 일갈했다. "이것을 보고도 시치미를 떼는가?" 그는 품 속에서 찢어진 옷자락을 꺼냈다. "비운선자의 손에는 이 천조각이 꽉 쥐어져 있었다. 너의 그 청삼 의 좌측 귀퉁이를 봐라!" "헉!" 철검수사 초일비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더니 급히 옷자락을 살 펴보고는 안색이 창백해져 부르르 떨었다. "천하의 죽일 놈! 너같은 놈을 가장 증오하는 게 나다!" 구주진천도 조천명의 오백 근짜리 도(刀)가 번쩍 빛을 발하며 그 를 향해 날아갔다. 초일비는 혼비백산한 채 혼신의 힘을 다해 철 검을 뽑아 막았다. 카캉! 불꽃이 튀었다. 조천명의 도는 그의 검에 가로 막혔다. 그러나 어 찌 알았으랴? 오백 근짜리 도의 위력은 실로 가공한 것이었다. "크아악!" 그의 철검은 도에 부딪치는 순간 두 동강이 나버렸다. 동시에 그 의 몸이 머리에서부터 가랑이까지 그대로 갈라졌다. 실로 처참무 비하게 죽은 것이었다. 단칼에 화산파의 장문인을 해치운 조천명의 도법은 장내의 군웅들 로 하여금 간담이 써늘하게 만들었다. 과연 누가 구파일방의 일문 지존을 단칼에 양분시킬 수 있단 말인가? '과, 과연 천군맹의 맹주답다!' 군웅들은 자신도 모르게 내심 그렇게 부르짖고 있었다. 한편 이 광경에 중앙에 몰려 있는 열 명의 배신자들은 안색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처단해라!" 드디어 혈의마검 공손패가 음침하게 외쳤다. 슈슈---- 슉!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대전 사방에서 궁을 겨누고 있던 혈의삼 십육궁이 일제히 화살을 날렸고 우박같은 혈영전이 십 인을 향해 쏘아졌다. "앗!" 그들 십 인은 대경하며 검장권을 휘둘러 우박같이 쏟아지는 연환 마궁을 막았다. 실상 그들 모두가 공히 절정고수들이었으므로 화 살을 어느 정도는 막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대전을 쩌렁쩌렁 울리는 앙천광소가 터졌다. "크핫핫핫...! 이 비열한 무리들, 나 구양경의 철마궁이 어떤 것 인지 보여주마!" 위--- 잉! 허공을 찢는 파공성이 울렸다. "으악!" 두 마디의 처절한 비명이 그 뒤를 이었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한 대의 거대한 화살이 한꺼번에 두 명의 가슴을 통째로 꿰어 버린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화살에 산적처럼 꿰인 채 그대로 날아 가 벽에 부딪쳤는데 놀랍게도 그 벽마저 뚫고 날아가고 말았다. 실로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한 대의 화살에 어떻게 그토록 엄 청난 힘이 들어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화살에 꿰어 날아간 자는 마장 유진광과 초혼신 두문강이었고 거 대한 철궁을 들고 앞으로 나선 것은 바로 황하칠십이채의 총표파 자인 사해신군 구양경이었다. 그는 철궁을 흔들며 쩌렁쩌렁한 음성으로 외쳤다. "악진원! 한 번 쏘면 황하마저도 흐름을 멈춘다는 이 천마궁의 맛 을 네 놈에게도 보여주마!" 악진원은 이미 팽천후와 떨어져 있었다. 펑! 다시 철마궁이 떨쳐지자 허공을 찢는 파공성과 함께 시커먼 빛이 그를 향해 뻗었다. 악진원은 대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악가의 가주로 초절정고수였다. 그가 몸을 빙글 돌린 순간, 연검은 찰나지간 십 팔검을 번뜩였다. 쩡! 금속음을 울리며 그의 검은 철마전을 차단했다. 그러나 악진원은 손아귀가 찢어져 나가는 고통을 느끼며 주춤했다. "으윽!" 게다가 그의 어깨로부터 살덩이가 뭉텅 날아갔다. 철마전은 검에 부딪히고도 튕겨나지 않고 비스듬히 날아 그의 어깨를 뜯어낸 것 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크악!" 비껴나간 철마전은 옆에 서 있던 엽살귀 노반구의 머리통을 꿰어 날려 버렸으니 실로 가공할 위력이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군웅들은 모두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으며 악진 원도 가슴이 떨리는 것을 금할 길이 없었 다. 그러나 팽천후가 다 시 두 눈에 흉광을 발산하며 덤벼들었다. "악진원, 죽어랏!" 츳츳--- 츠츠츳! 가공할 도기가 휩쓸어 오자 악진원은 피가 철철 쏟아지는 어깨 미처 지혈시키지도 못한 채 연검을 휘둘러 대응했다. "크아악!" 처절한 비명이 다른 곳에서 터지고 있었다. 구환비객 환도가 어느 틈엔가 조천명의 거대한 진천마도에 의해 허리가 두동강이 나버린 것이었다. 이 광경에 철탑유신 구유명은 퉁방울같은 눈이 훽 뒤집히며 무쇠 같은 양 손을 무섭게 사방으로 떨쳤다. 펑! 퍼엉! "으윽!" 그의 장력은 무림에서 가장 패도적 외문기공인 철탑파황공(鐵塔破 荒功)으로 힘으로는 당할 자가 없었다. 삽시에 오륙 인의 고수가 피를 토하며 고꾸라지는가 싶었으나 아쉽게도 그의 공세는 오래 가지 않았다. 파파팍! 혈의삼십육궁의 연마환궁이 일제히 우박처럼 퍼부어졌고 미처 할 사이도 없이 그것은 모조리 구유명의 몸에 박혀 버렸다. "크윽!" 철탑유신 구유명은 고슴도치가 된 채 비명을 발했다. 그러나 놀랍 게도 그는 쓰러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 여주었다. "으아아아!" 괴성을 지르며 그가 두 팔을 벌리자 몸에 박혔던 화살이 모두 빠 져버린 것이었다. 실로 가공할 괴력이었다. "이 피라미같은 놈들! 모두 죽여 버리겠다!" 구유명이 두 눈에 흉광을 번뜩이며 혈의삼십육궁을 향해 달려가려 할 때였다. 쐐액---! 귀청을 찢는 파공성이 울리는가 싶더니 사태가 채 파악되기도 전 에 이미 구유명의 미간(眉間)과 목, 심장에는 세 개의 핏빛 방울 이 깊숙히 박혀 있었다. "크악!" 구유명은 뒤늦게서야 비명을 질렀고 천수겁천 당환성의 침성이 들 렸다. "철탑유신! 네 놈이 아무리 무쇠로 몸을 만들었다고 해도 노부가 있는 한 소용이 없다." "끄으으윽!" 철탑유신 구유명의 눈이 툭 튀어나오는 것을 보며 당환성은 슬쩍 손을 저었다. 딸랑딸랑! 심금을 흔드는 묘한 방울소리와 함께 구유명의 미간과 목, 그리고 가슴에 박혔던 세 개의 혈령(血鈴)이 뽑혀 그의 손으로 되돌아갔 다. "사... 사혈삼령(死血三鈴)...... 크윽!" 구유명은 최후의 한 마디를 남기고는 고목처럼 넘어졌다. 쿵! 그의 거구가 쓰러지는 소리가 대전을 울렸고 그의 몸에서는 세 줄 기 피화살이 뻗치고 있었다. 사혈삼령. 그것은 당가의 너무도 무서운 암기로 각종 내가강기는 물론 철갑이라도 꿰뚫는 위력이 있는 불가사의한 죽음의 핏빛 방 울이었다. 한편 지무성 석검영은 주위를 재빨리 훑어보았다. 그러나 절망적 이게도 이미 그의 동도들은 모두 죽고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는 오 직 자신과 악진원뿐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어렸다. '트... 틀렸다. 도망가자!' 그는 기회를 보아 몸을 휙 솟구쳤다. 그러나 그의 앞을 가로막는 자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통천교의 교주인 통천마군 흑고였다. 흑고는 으시시한 괴소를 흘렸다. "흐흐흐... 애송이 놈이 감히 나 흑고를 속여?" 석검영은 눈을 부릅떴다. "비켜라!" 위잉! 그의 쌍장이 푸른 장영을 그리며 뻗었으나 흑고는 움직이지 않았 다. 그 대신 석검영의 장력이 격중되는 찰나 흑고의 배와 가슴은 마치 공처럼 불룩해지고 있었다. 펑! 폭음이 들렸으나 석검영은 대경실색했다. "억!" 그는 놀라운 반탄력에 양 손이 꺾어질듯 아픔을 느끼며 뒤로 물러 났다. "흐흐흐... 그까짓 장력으로는 노부의 하마공(蝦 功)을 깨지 못 한다." "으으......." 석검영은 공포에 질려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으나 흑고의 신형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그를 덮쳤다. 흑고의 오른손은 전광 석화처럼 석 介돛 복부를 쑤시고 있었다. "으악!" 석검영은 자신의 모든 것이 일시에 창자와 함께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으며 스스로의 눈으로 피와 창자가 흑고의 손에 의해 분분이 흩날리는 것을 보았다. "크하하하! 나 흑고를 속인 놈의 말로다!" 펑! 무참하게도 흑고의 왼손은 석검영의 머리를 수박처럼 으깨고 말았 다. 그 바람에 허연 뇌수(腦髓)와 피가 사방으로 튕겼다. 팽천후가 참인도를 치켜들며 외치고 있었다. "악진원, 이 배신자! 이제 네 놈 혼자만 남았다. 너의 목숨도 그 만 종지부를 찍어 줘야겠다!" 위--- 잉---! 하북팽가의 독문(獨門)인 자전십팔풍의 위력은 역시 대단했다. 팽 천후가 참인도를 휘두르자마자 주위의 공기 자체가 무섭고도 엄청 난 회오리로 돌변했다. 그러나 악진원의 섬마검칠십이류(閃魔劍七拾貳流)도 그에 손색이 없었다. 그의 연검은 눈깜짝할 사이에 일흔두 번이나 번개를 그려 내어 팽가도법의 위력을 분산시키고 있었다. 파앗--- 팟! 수세에 몰리던 그의 검법이 다시금 무서운 위력을 떨쳐내자 순식 간에 팽천후의 옷자락과 수염이 산산조각으로 잘려져 날아갔다. "헛!" 팽천후는 다급성을 발하며 참인도를 더욱 무섭게 휘둘렀다. 우--- 웅! 가공할 도기가 악진원을 휘감았다. 그러나 악진원은 갑자기 바닥 에 몸을 굴리더니 삼 장(三丈) 가량 뒤로 굴러나갔다. 그는 다시 벌떡 일어섰으나 그의 주위에는 이미 삼백여 군웅들이 첩첩이 포 위하고 있었다. 악진원은 광기어린 눈으로 군웅들을 둘러보더니 앙천광소를 터뜨 렸다. "크하하하...! 그래도 강호에서 사백 년 간 내려온 이 악가(岳家) 의 가주가 너희들같은 놈들에게 죽을 수는 없다!" 군웅들은 그의 처절한 기세에 잠시 움찔했다. 산동악가(山東岳家). 그 무림명가는 허명을 쌓은 것이 아니었다. 비록 중상은 입었을망정 악진원이 죽기를 각오한다면 지금이라도 최소한 군웅들 이십여 명은 희생되어야 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도 악진원은 연검을 거꾸로 쥔 채 자신에게 겨 누고 있었다. "두고 봐라! 내 비록 먼저 죽으나 너희 역시 살아남지는 못할 것 이다, 크윽!" 그는 스스로 자신의 심장을 푹 찔렀고, 연검은 그의 등 뒤로 뚫고 나왔다. 검자루는 물론 그것을 쥔 그의 손까지도 심장 속으로 들 어가 있었다. "저, 저런!" 악진원은 서서히 앞으로 고꾸라졌다. 군웅들은 이 의외의 사태에 대경한 나머지 모두 넋을 잃었다. 설마 그가 자결을 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잠시 후 사태가 가라앉자 군웅들은 한결같이 침중한 표정을 지었 다. 열 명의 배신자들이 모두 처단되었다고는 하나 그들의 최후 발악 으로 인해 이십삼 명의 무고한 군웅들이 희생된 것이었다. 잠깐 동안에 벌어진 혈전의 결과는 너무도 처참했다. 장내는 온통 피바다가 되어 있었고 아무도 입을 열어 말하는 자가 없었 다. 구주진천도 조천명이 제일 먼저 침묵을 깼다. "음곡주께서 살아 있을 줄을 정말 꿈에도 몰랐소." 그는 백독마군 음무위를 바라보며 은은한 격동을 보였다. 군웅들 의 시선 또한 음무위를 비롯하여 그의 수하인 천황십독에게로 향 했다. 군웅들 역시 격동과 함께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음무위는 고소를 짓더니 어이없게도 자신과는 어울리지도 않는 합장 불호를 외우는 것이 아닌가? "아미타불.... 죄송하지만 소승은 음노시주가 아닙니다." 그 말에 조천명은 물론 모든 군웅들이 대경했다. 음무위는 손을 들어 얼굴에 쓴 면구를 벗었다. ③ "아! 저럴 수가......." 군웅들은 모두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나타난 얼굴은 한 명의 젊고 영준한 중으로, 그는 바로 소림의 십 팔나한 중 우두머리인 정혜(丁慧)였다. "오오!" 뿐만 아니라 천황십독은 다름아닌 십팔나한들이었다. 군웅들이 모 두 이 상상도 못할 변화에 어리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자 호불범이 탄식을 하며 나섰다. "여러분, 실상 그 분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소생은 단지 허를 이 용해 첩자를 색출하였을 뿐입니다." 군웅들은 모두 얼이 빠지며 낙심하는 한편 차츰 감탄의 기색을 떠 올리며 시선을 그에게 집중시켰다. 호불범이라는 신비하고도 신출 귀몰한 청년을 향하여....... 만사귀재 호불귀의 손자 호불범은 마침내 엄청난 몫을 해내면서 군웅들의 눈에 만사귀재의 부활과도 같은 의미를 부여했다. 호불범은 낭랑한 음성으로 중인들에게 말했다. "그러나 이번의 계략도 따지고 보면 한 분의 도움 때문이었습니 다. 만일 그 분이 없었다면 아무 것도 해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군웅들이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에 호불범은 무영종을 향해 깊숙히 허리를 굽혔다. "무대협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제서야 군웅들은 무영종을 바라보았다. 호불범보다 몇 배나 더 신비한 인물, 그에 대한 크나큰 의혹이 군웅들의 눈에 떠올랐다. 그러나 무영종의 태도는 담담하기만 했다. 그는 가볍게 군웅들을 향해 포권하며 입을 열고 있었다. "별 말씀 다하시오. 본인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오." "그러나 무대협의 조력이 없었다면 정녕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호소협의 지나친 겸손이시오." 그들의 겸양에 군웅들은 모두 감명을 받았다. 그러나 어찌 되었건 그들 두 사람은 분명 모든 군웅들의 은인이나 다름이 없었다. 만약 그들이 아니었다면 군웅들은 개파대전도 끝나기 전에 미리 음모와 책략에 의해 왜 죽는지도 모르는 채 전멸을 당했을 게 뻔 한 일이었다. 이때 개방의 젊은 방주 만리추풍수사 모용랑이 말했다. "여러분, 이제 거의 삼 경이 되었소이다. 앞으로 세 시진 후면 날 이 새고 그렇게 되면 개파대전을 치뤄야 하오." 모용랑은 혜지가 감도는 눈으로 군웅들을 둘러보며 침중하게 말을 이었다. "그때 수라궁의 마두들이 어떤 흉계를 쓸지 걱정이오." 군웅들의 안색은 삽시에 모두 어두워졌으나 조천명이 분노한 음성 으로 말했다. "이미 수라궁의 흉계는 드러났소. 놈들은 이제 개파대전을 이용하 여 우리 모두를 제거한 뒤 강호제패를 이루려 하는 것이오." 그의 두 눈은 무섭게 부릅떠졌고 으스스한 살광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흐흐흐... 이 조천명이 누구인데 놈들의 뜻을 이루게 하 겠는가? 모친의 원한을 갚기 전에는 천군맹에 돌아가지 않겠노라 고 맹세한 나요!" 조천명은 진천마도를 불끈 쥐었다. "두고 보시오! 내 반드시 구주진천도법의 무서움을 똑똑히 보여 줄테니까!" 그의 말에 장내의 분위기는 오히려 더욱 가라앉았다. 아무도 그처럼 큰 자신은 없을 뿐 아니라 어쩌면 조천명 역시도 내부적으로는 자신이 안 서 있을지 모른다는 의구심마저 든 것이 었다. 중인들의 얼굴에는 불안의 그림자가 길게 깔렸다. 이어 무서운 침 묵, 그 침묵이 지속적으로 그들을 내리 눌 떪? 그런데 누군가 또다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동정어부(洞庭漁夫) 산초경(山焦京)이란 고수로써 머리가 희끗희끗한 칠 순 노인이었 으나 동정호 일대의 일류고수였다. 그는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노부는 지금 수라궁을 떠나겠소." 군웅들은 모두 흠칫 놀랐다. "솔직히 노부는 이 수라궁 개파대전이 이토록 처참한 것인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소." 그는 한 차례 진저리를 친 뒤 말을 이었다. "노부는 결코 죽음이 두렵지 않소. 그러나 노부의 집에는 오직 노 부가 돌아오기 만을 기다리는 눈 먼 손녀가 있소." 동정어부 산초경은 만면에 부끄러움과 죄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중 인들에게 포권 杉? "여러분께는 미안한 일이지만 노부는 지금 집으로 돌아가겠소." 아무도 그를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어쩌면 모두 똑같은 심정이기 에 그를 이해하려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다시 한 사람이 일어서더니 탄식하며 힘없이 말하고 있었 다. "노부도 돌아가겠소."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비겁하다고 욕해도 좋소. 중주의 팔봉장(八鳳莊)은 노 寬 없으 면 쓰러지기 때문이오." 말을 마치자 팔봉장의 장주인 항마신장(降魔神掌) 전백기(田白期) 는 대전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나 아까와는 달리 그의 이 행동 은 군웅들을 동요시켜 버렸다. "나도 가겠소!" "소생도...... 이곳을 떠나겠소." 여기저기서 속속 이십여 명의 인물들이 들고 일어났으며 그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걸어 나왔다. 그것을 본 군웅들의 얼굴에는 침통한 표정이 어렸다. 그들은 떠나 고자 하는 자들을 막을 명분이 없다는 것을 느끼며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때였다. 무영종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떠나려는 자들을 향해 입 을 열었다. "여러분, 소생이 한 마디 하겠소이다." 이십여 명의 인물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무영종은 탄식하며 반문했 다. "수라궁에서 여러분들이 돌아가는 것을 순순히 허락할 것같소이 까?" 항마신강 전백기가 대답했다. "무대협, 어쨌든 노부는 가겠소. 그들이 보내주지 않는다면 뚫고 서라도 갈 것이오." 무영종도 더이상은 말을 잇지 않았으나 불길한 예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십여 명의 인물들은 마침내 무리를 지어 대전 밖으로 걸어나갔 고 군웅들은 착잡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현광대사가 불호를 외었다. "아미타불......." 군웅들 중 그 누구도 그들을 탓하지 않았다. 사실은 군웅들도 조 속히 수라궁을 떠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단지 명예(名 譽)라는 끈이 발을 묶어 놓았기에 그들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할 뿐이었다. 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 속에서도 소리없이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머지 않아 날이 밝을 것이다. 그리고 날이 밝으면 일출(日出)과 함께 무서운 혈풍이 몰아칠 것이 틀림 없었다. 강호무림 수천 년 사상 그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죽음의 피보라가 온통 하늘과 땅을 뒤덮을 것이다. 수라궁 개파대전과 함께....... ④ 여명(黎明). 군웅전 안으로 여러 줄기의 햇살이 비쳐 들어왔다. 마침내 해가 뜬 것이었다. 장내의 삼백여 명의 군웅들은 모두 한결같이 입을 굳게 다물고 있 었으며 그들의 눈은 시간이 흐를 수록 긴장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휙! 옷자락 날리는 소리와 함께 군웅전 안으로 한 인영이 날아들었다. 군웅들은 일제히 그 인영을 향해 시선을 집중했다. 나타난 인영은 다름아닌 금악비였다. 금악비는 대전에 내려서자마자 오만한 눈초리로 주위를 훑어보았 다. 그런 그의 입가에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후후후...! 하룻밤 사이에 꽤 많은 분들이 사라지셨구려?" 군웅들은 침묵했다. 그러나 수백 쌍의 눈은 무서운 분노를 담고 금악비를 노려보았다. 금악비는 자신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만 같은 그 눈길에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곧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험! 소생이 이곳에 온 이유는 여러분께 개파대전을 알리기 위해 서요." 군웅들은 여전히 침묵했다. "개파대전은 오늘 오시(午時), 본궁의 중앙에 있는 수라지청에서 열리오. 여러분들은 그때까지 모두 참석해 주시기 바라오." 구주진천도 조천명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금악비!" 조천명은 차갑게 말했다. "우리는 이미 한 가지 결정을 내렸다." "결정이라니?"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개파대전에 참가하지 않기로 했다." 금악비는 그 말에 어리둥절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이번에는 팽가의 가주 팽천후가 차갑게 말했다. "수라혈신에게 이곳으로 오라고 해라. 이곳에서 너희 수라궁 놈들 과 담판을 짓겠다." 금악비의 안색이 변하더니 군웅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그건 모든 분들의 의견이오?" 만리추풍수사 모용랑이 말했다. "이미 모두 의견이 통일되었소." 금악비의 얼굴이 음침해졌다. "흐흐흐... 후회하실 텐데......." 그 말에 천수겁천 당환성이 분성을 발했다. "후회? 애송이 놈,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더이상 입을 놀린다면 당장 목구멍에 바람 구멍을 내주겠다!" 그러나 금악비는 음흉하게 마주 응수했다. "흐흐흐... 당(唐) 나으리. 당신은 이곳이 사천당가인 줄 착각하 는 모양이나 이곳은 엄연히 수라궁이오." "뭣이?" 당환성의 눈에 무서운 살기가 뻗쳤으나 금악비는 음침하게 말하며 손뼉을 쳤다. "수라궁의 뜻을 어기면 어찌되는 지 보여주겠소, 여봐라!"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밖으로부터 이십인의 흑의인이 들어왔다. 그런데 그들은 기이하게도 어깨에 하나씩의 붉게 칠한 관을 메고 있었다. "뚜껑을 열어라!" 금악비의 말에 흑의인들은 관을 바닥에 내려놓더니 일제히 뚜껑을 열었다. "오! 저럴 수가......." 군웅들은 모두 눈을 부릅뜬 채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관 속에는 각기 이십 구의 해골이 들어 있었는데 끔찍하게도 해골 에는 피로 얼룩진 살점이 드문드문 붙어 있었다. 보아 하니 산 채로 어떤 짐승들에게 뜯겨 먹힌 듯했다. 그나마 살 점에 붙은 피가 채 마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 불과 몇 시진 전에 참변을 당한 것이 분명했다. 경악하는 군웅들에게 금악비가 음산한 괴소를 지었다. "흐흐흐... 이들이 누군지 아시오?" 군웅들이 모두 의혹의 표정을 짓자 금악비는 입가에 잔인한 미소 를 띠며 말했다. "바로 어젯밤 수라궁을 탈출하려 했던 사람들이오." 군웅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고 무영종 또한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는 비로소 죽은 시체들이 왜 그 모양인지 깨달았다. '아아! 그들은 호수에 빠져 바로 그 금린식인괴어에게 당하고 말 았구나.' 한동안 넋이 빠져 있던 중인들 가운데 자면신창 소중산이 벼락같 이 몸을 날렸다. "이 잔인무도한 놈들!" 그의 손에서 무수한 창영(槍影)이 뻗어 나갔다. "으악!" 관을 메고 들어왔던 흑의인 중 한꺼번에 다섯 명의 목에 구멍이 뚫렸다. 소중산의 절기인 추명신창십이식(追命神槍十二式)이 찰나 지간에 그들을 황천으로 보낸 것이었다. 실로 눈부신 창술로 무림의 일절다운 솜씨였다. "으악!" 그러나 비명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나머지 십오인의 흑의인들이 모두 피화살을 뿜으며 쓰러지고 있었다. 그들의 이마에는 손가락 굵기의 구멍이 똑같이 뚫려 있었다. 천수겁천 당환성이 당가의 유명한 암기인 염라정(閻羅釘) 십육 개 를 던져 단번에 그들을 염라전으로 인도한 것이었다. 이 갑작스런 사태에 금악비의 안색은 크게 변했으며 당환성은 몸 을 솟구치며 외쳤다. "애송이 놈! 네 놈도 죽여버리겠다!" 금악비는 흠칫하더니 소매를 뻗었다. 번쩍! 그의 소매 속에서 한 자루의 금마비가 빛살을 그으며 날았으나 당 환성은 냉소했다. "흥! 그까짓 비수 따위가 노부에게 통할성 싶으냐?" 쨍! 그의 손에서 은빛이 뻗는가 싶더니 금마비가 튕겨 나갔고, 두 사 람이 무섭게 격돌하려는 순간이었다. "아미타불......." 낭랑한 불호와 함께 당환성과 금악비는 한 줄기 부드러운 경기가 자신들을 밀어내는 것을 느꼈다. 그들 사이로 한 젊고 영준한 중이 내려섰다. 그는 바로 정혜였고 내려서자마자 당환성에게 합장했다. "아미타불.... 당 노시주, 잠시 진정하십시오." 그러나 당환성은 분노가 이미 극에 이 르러 있었다. "소화상! 길을 비켜주게. 저 놈을 찢어 죽이지 않으면 분통이 터 져 죽을 것같네." 정혜는 물처럼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응시하며 부드럽게 말했다. "당 노시주, 이미 싸움은 시작된 것입니다. 여기서 저 금시주를 죽여 보았자 조금의 이득도 없습니다." 당환성은 그의 설득력 있는 차분한 말에 겨우 노기가 수그러졌다. 정혜는 이번에는 금악비를 향했다. "금시주, 이미 군웅들은 수라궁의 음모를 모두 파악했소이다. 이 제 싸움은 불가피해졌으니 가서 수라궁주에게 전해 주시오." 정혜의 두 눈에 혜지가 흘렀다. "앞으로 반 시진 이후에 우리는 이곳을 나가겠소. 물론 그대들이 순순히 우리를 보내줄 리는 없겠으나 우리는 이곳을 반드시 탈출 할 것이오. 이 싸움에는 머리가 뛰어나고 무공이 강한 쪽이 이길 것이오." 금악비는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흐... 그대의 말을 한 자도 빠짐없이 전하리다." 그는 주위를 훑어보며 광소를 터뜨린 후 빈정거리듯 말했다. "과연 오늘 해가 지기 전 이곳에서 몇 명이나 살아 나갈 지 모르 겠군. 크하하하......!" 그의 안하무인 격인 태도에 군웅들은 모두 노기를 일으켰고 몇 명 의 인물들은 참지 못한 듯 탁자를 치면서 일어났다. "으하하하......" 금악비는 대소를 터뜨리며 유유히 밖으로 걸어나갔다. 군웅들은 모두 흥분이 극도에 달해 웅성거렸다. 사방에서 욕설이 터졌으며 심지어는 몇 명이 밖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여러분, 잠시 진정하십시오." 웅혼한 목소리가 그들의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것은 마치 태산같 이 장엄한 느낌을 주는 음성이었다. 장내가 조용해지자 무영종이 몸을 일으켰다. "여러분, 이곳은 수라궁입니다. 언제 어느 곳에서 살수가 뻗쳐올 지 모르는 곳이니 여러분들이 쉽게 흥분을 해서는 절대 안 됩니 다. 이 위기를 벗어나는 방법은 단 하나, 모든 군웅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치는 길뿐입니다." 군웅들은 모두 숙연해진 채 그를 주시했고 무영종은 그들을 둘러 보며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 반 시진 후 우리는 이곳을 나갈 것입니다. 그때를 위해 여러분은 모두 운기조식하여 진력을 최대한 보충시켜야 합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분위기가 진정되었다. 무영종의 말은 충분히 일 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군웅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 데 태을성수 종리자허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노부에게 한 가지 의견이 있소이다." 종리자허는 잠시 무영종을 의미 깊은 눈으로 힐끗 응시했다. 그 또한 이미 무영종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종리자허는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곳의 군웅들은 삼백 명이나 되오. 그러나 제멋대로 움직인다면 오합지졸과 다를 바가 무에 있겠소? 따라서 우리는 한 명의 대표 자를 뽑아 그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하오." 군웅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점창(點蒼)의 고수 사일신검(射 日神劍) 사극평(査克平)이 일어나 말했다. "예로부터 소림은 중원의 태산북두(泰山北斗)였소이다. 노부는 소 림의 현광대사를 추천하고 싶소이다."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현광대사에게로 향했으나 현광은 고개를 저으며 합장했다. "아미타불... 사시주의 뜻은 고마우나 빈승은 자격이 없소이다." 그는 중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곳에서 필요한 사람은 무공도 무공이지만 군웅들을 영도할 능 력을 가진 사람이어야 하오." 그 말에 소중산이 물었다. "천산비검옹 노선배는 어떻습니까?" 중인들의 시선은 방향을 바꾸어 평범하게 보이는 검의 고수 천산 비검옹에게로 옮겨졌다. 그러나 그 역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소보주는 너무 노부를 과찬하는 것같소. 그러나 노부 는 오랫동안 천산에만 파묻혀 있었기에 강호 경험이 별로 없소이 다. 이번 일을 주지할 자격이 되지 못하오." 이번에는 남궁진강이 신중하게 물었다. "음, 그렇다면 호소협이 어떻겠습니까?" 호불범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생 역시 자격이 없습니다. 소생은 머리만은 자신하나 무공은 문외한입니다. 제 몸 하나 지키지 못하면서 어찌 남을 영도하겠습 니까?" 그러더니 그는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 대신 소생이 한 분을 추천하겠습니다. 그 분이라면 반드시 이 번 일에 최적임자일 것입니다." 군웅들의 얼굴에 궁금증이 일자 호불범은 고개를 한 곳으로 돌렸 고 그곳에는 무영종이 자리하고 있었다. "무대협께 부탁드립니다." 무영종은 깜짝 놀랐다. "아니, 어찌 이 중대한 일을 소생이 맡을 수 있겠습니까? 아니될 말이오." 호불범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무대협, 겸손해 하실 필요 없습니다. 솔직히 천하에서 소제가 심 지와 지력으로 감복한 인물이라면 오직 무대협 한 분밖에 없습니 다." 군웅들은 아연하여 웅성거렸다. 그들로서는 무영종이란 사나이가 아무리 신비막측한 인물이라 한들 설마하니 호불범의 두뇌마저 능 가하리라고까지는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군웅들은 새삼 감탄이 깃든 시선으로 무영종을 바라 보았다. 이때 현광대사가 나서서 덧붙여 말했다. "아미타불.... 소사제의 무공은 노납보다도 훨씬 높으니 무공에서 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오." 그의 말에 군웅들은 마침내 서서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의 빛을 띄었다. '삼성승의 제자이니 과연 적임자다.' 그들이 이같이 일치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통천마군 흑고가 갑자 기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나는 대찬성이오. 무대협의 말이라면 노부 역시 그대로 따르리 다." 청수자도 일어서서 도호를 외었다. "무량수불.... 빈도도 찬성하겠습니다." 몇 명의 군웅들도 또한 일어나 찬동을 표하자 분위기는 이제 완전 히 화합의 국면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기대에 찬 시선으 로 무영종을 바라보았다. 선기묘인 사도유는 껄껄거리며 말했다. "무형, 받아들이시오. 소제가 대막에서 이곳까지 오면서 수많은 기인이사를 만나 보았으나 무형에 비하면 태양과 반딧불의 차이였 소. 이번 일을 타개할 인물은 오직 무형뿐이오." 무영종은 과연 자신이 중책을 맡을 수 있는가에 대해 잠시 생각했 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결심했다. "좋습니다. 미거한 소생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러자 곧 장내가 떠나갈 듯한 함성이 퍼졌다. "와! 와아---!" 선풍마서생 위전풍. 그는 이 며칠 사이에 무척이나 수척한 모습으로 변했다. 지금 그 는 자신이 기거하고 있는 수라궁 내의 한 별원에서 멍하니 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창 밖으로 여명이 밝아오자 위전풍의 눈썹이 미미하게, 극히 미미 하게 떨렸다. '오늘이 개파대전이다.' 위전풍의 초점없는 눈이 조금씩 움직였다. '군웅들은 수라궁의 진정한 무서움을 모른다. 그들은 단지 수라궁 의 겉으로 드러난 일면 만을 알 뿐이다.' 위전풍의 미간에 어두운 그늘이 몰렸다. '한 명도 벗어나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무서운 수라궁의 마수(魔 手)를 그들은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위전풍의 눈썹이 푸르르 떨렸다. 그는 탁자 위의 화병에 꽂힌 꽃 을 응시했다. 꽃은 여인앵련화(女人櫻蓮花)라는 극히 희귀한 꽃으로, 여인앵련 화를 주시하는 위전풍의 눈에 문득 이채가 번쩍였다. '그렇다!'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변화가 일었다. '꽃은 꽃, 그대로일 때가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잘려진 채 아무 리 아름답게 장식된다 해도 그것은 이미 본래의 미가 아니다. 생 명이 거세된 꽃, 그것이 무슨 가치를 갖겠는가?' 위전풍의 두 눈에서 강렬한 신광이 뻗쳤다. '풍우에 지는 꽃이 될지언정 장식된 조화는 되지 않으련다!' 스스스....... 문득 그의 눈 앞에 한 인영의 모습이 나타났다. 일신에 곤룡포를 입은 청년이었다. 천하마성을 한 몸에 지닌 마력의 소유자 독고황(獨孤皇), 바로 그 가 나타난 것이었다. 독고황은 담담히 묻고 있었다. "위형, 생각해 보셨소?" 위전풍은 담담히 대답했다. "생각해 보았소." 두 사람의 눈빛이 부딪혔다. 위전풍의 두 눈에는 신념(信念)이 뭉 쳐 있었고 독고황은 그것을 보고는 탄식했다. "말하지 않아도 위형의 생각을 알겠소." 독고황은 고소를 짓더니 시선을 돌려 탁자 위의 화병에 꽂힌 꽃을 바라보았다. 여인앵련화(女人櫻蓮花). 독고황의 고요하고 무심한 눈에 꽃이 떠 올랐다. "어쩌면 위형의 그런 성격 때문에 내가 더욱 위형을 좋아하는지도 모르오." 그는 손을 내밀었다. 투명할 정도로 희고 고운 그 손은 어찌 보면 여인의 손과도 같았 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대지를 한꺼번에 움켜쥘 수 있을 정도로 기이한 힘이 내재되어 있는 손이었다. 위전풍도 손을 내밀었다. 사나이답게 울퉁불퉁한 손이었다. 그러 나 그의 손도 역시 거친 황야를 질타해갈 수 있는 손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손을 마주 쥐었고 손과 손 사이로 뜨거운 사나이 의 정이 흘렀다. 독고황은 담담하게 말했다. "이 손을 놓는 순간 우리는 등을 지게 되오." 위전풍이 아무 말이 없자 독고황이 다시 말했다. "나는 이후로 위형을 이 세상에서 결코 살려두지 않을 것이오." 담담한 말이었으나 그 속에는 무서운 살기가 내포되어 있었다. 위 전풍은 눈썹 끝을 가늘게 떨며 독고황을 주시했다. "천하에서 오직 당신 만이 이 위모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 소." 독고황의 눈썹도 미미하게 떨렸다. 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전광(電光)." "넷!" 밖에서 짧고 힘찬 음성이 들렸다. "가서 위부인을 모셔 와라." "넷!" 위전풍은 흠칫했으나 입을 열어 말하지는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지리할 정도로 긴 침묵 만이 흘렀다. 잠시 후 밖에서 다시 전광의 목소리가 들렸다. "위부인을 모셔 왔습니다." "알겠다." 독고황은 짧게 말한 후 손에 힘을 주었다. "위형은 이제 어디로 가겠소?" "군웅전(群雄殿)." 위전풍도 손에 힘을 주었고 독고황은 담담히 그를 보며 말했다. "그럴줄 알았소," 그는 고요하던 눈에서 갑자기 기광을 발산하며 차갑게 내뱉았다. "그러나 아까 내가 한 말은 명심하시오. 나는 반드시 당신을 죽일 것이오." 위전풍의 음성도 갑자기 차가와졌다. "나 역시 최선을 다해 당신의 음모를 분쇄할 것이오." 독고황은 손을 놓았으며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위형, 잘 가시오." 그는 그 한 마디를 하고 몸을 돌렸고 그의 등을 바라보면서 위전 풍은 가슴이 막막해짐을 느꼈다. 벽(壁). 독고황의 등이 마치 거대한 하나의 벽과 같이 보였기 때 문이었다.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뚫을 수 없고 넘을 수 없는 벽....... 독고황의 존재는 벽, 바로 그 자체였다. 그러나 위전풍이 멍한 표정으로 있는 사이에 독고황은 이내 연기 처럼 사라졌다. 그의 놀라운 신법은 유령을 방불케 했다. 이때 밖으로부터 아름다운 여인의 음성이 들렸다. "가가(哥哥)......!" 위전풍은 몸을 떨었다. "설한(雪恨)!" ■ 대소림사 제3권 제25장 천문육십사로화절진(天門六十四路花絶陣) -1 ━━━━━━━━━━━━━━━━━━━━━━━━━━━━━━━━━━━ ① 군웅전(群雄殿). 삼백여 명의 정사군웅들은 모두 수라궁과의 최후결전에 대비해 바 짝 긴장해 있었다. 그런 가운데 시간이 흘렀다. 마침내 팽천후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자, 이제 시간이 되었소. 모두 일어섭시다." 그 말에 전 군웅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무영종을 응시했다. 무영종은 이미 군웅들의 마음이 자기 한 몸에 와 있음을 느끼고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분, 모두 준비합시다." 그의 담담하면서도 힘찬 음성이 터진 순간 군웅들은 일제히 자리 를 박차고 일어났다. 무영종은 군웅들을 바라보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 "여러분, 아까 소생이 한 말을 절대 잊으시면 안 됩니다. 수라궁 의 마두들은 분명히 차륜전(車輪戰)을 벌여 우리의 진을 모두 빼 놓으려 할 것 입니다. 절대로 그 술수에 넘어가면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팽천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대협, 염려마시오. 아까 무대협이 말한 것은 한 자도 잊지 않 았소이다." 그는 약간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만약 그 말을 외워보라면 이 팽모가 한 자도 틀리지 않고 모두 읊어 보리다." 군웅들의 입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고 그로 인해 긴장된 분위기가 다소나마 느슨해졌다. 무영종은 담담한 미소를 띈 채 고개를 끄덕였다. "자, 여러분 나갑시다." 삼백여 명의 군웅들은 모두 자신의 무기를 힘껏 쥐어보고는 질서 정연하게 군웅전을 벗어났다. 그러나 그들은 알고 있었다. 저 해 가 떨어지기 전에 자신의 목숨이 살아남을 확률은 극히 희박하다 는 것을....... 수라궁이라는 가공할 이름이 그들의 뇌리 깊속한 곳까지 억눌렀지 만 그들은 조금도 두려운 빛을 띄지 않고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수천 년 중원의 맥을 이어온 무림인들의 불타는 투 혼(鬪魂), 바로 그것이었다. 둥! 둥! 둥---! 둔중한 북소리가 음산하게 울렸다. 군웅전 밖, 수천 평에 이르는 화원(花園)이 군웅전의 앞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연교향(蓮翹香), 잔설화(殘雪花), 벽매하(碧梅荷), 홍연란(紅然 蘭)등 수많은 꽃들이 제각기 그 아름다움을 다투고 있었고 따스한 봄바람에 실려 그윽한 화향이 군웅들의 코를 찔렀다. 그러나 누구 도 한가하게 꽃을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둥! 둥---! 섬ㅉ한 북소리는 차츰 가까워지기 시작했고 무형의 살기가 북소리 를 타고 전해졌다. 군웅들은 모두 긴장된 눈으로 드넓은 화원을 응시했다. 호불범이 무영종의 곁으로 다가왔다. "무대협, 저 화원에서 어떤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습니까?" 그의 목소리는 기이할 정도로 부드러웠다. "저 화원은 예사 화원이 아니오. 과거 사백 년 전, 꽃 속에 묻혀 살던 화중성(花中聖)이라는 기인이 창조해낸 천문육십사로화절진 (天門六十四路花絶陣)이 저 화원 안에 내포되어 있소." 무영종의 말에 옆에 있던 조천명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대협, 우리가 얼마 전 저 화원을 통해 군웅전을 들어설 때에는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지 않소?" 호불범이 창백한 얼굴에 미소를 띄었다. "그렇기 때문에 수라궁이 더욱 무서운 것입니다." "음......." 둥! 둥! 둥! 북소리는 더욱 가까이서 들려왔고 흑고가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대체 저 북소리는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겠군. 공연히 남의 이목만 어지럽게 만드니......." '남의 이목!' 무영종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리더니 갑자기 그의 안색은 홱 변했 다. '그렇구나! 이제 보니 이것은.......' 그는 즉시 군웅들을 바라보며 부르짖었다. "여러분, 즉시 대형을 연환구절진(蓮環九絶陣)으로 변환시키시 오." 그의 말에 군웅들의 표정이 의아하게 변했다. 그러나 무영종은 이 미 그들의 마음으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얻고 있었다. 그들은 일 언의 의문도 제기하지 않고 즉시 대형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연환구절진(蓮環九絶陣). 이 진법은 무영종이 천기대사에게서 전수받은 천고의 절진 중 하 나로 이 연환구절진은 전문적인 수비형태의 진이었다. 말 그대로 전체 군웅의 형태를 아홉 개의 환(環)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아홉 개의 환진 중 전방의 세 개는 가장 강한 고수로 구성되어 적 의 포위망을 부수고 출로(出路)를 뚫는다. 또한 후방의 삼환진(三 環陣)은 적의 추격을 차단시키고 전방의 고수들을 보호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중방의 삼환진(三環陣)은 전후의 사태를 재빨리 파 악해 부상당한 고수와 교체하거나 죽은 고수의 자리를 바꾸는 것 으로, 이 연환구절진은 무영종이 군웅들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 이기 위해서 군웅전 안에서 가르쳐준 것이었다. 둥둥둥둥....... 북소리가 갑자기 급박해지자 무영종이 크게 외쳤다. "저 북소리를 유의하시오. 수라궁은 저 북소리를 타고 천문육십사 로화 절진을 통과하고 있소이다." 군웅들의 시선이 찢어질듯 휩떠지며 화원의 구석구석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과연 드넓은 화원의 사방에서 꽃들이 파랑(波浪)처럼 약간씩 물결치고 있었고 그 물결은 북소리에 맞추어 차츰차츰 군 웅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무영종의 현기서린 눈에서 신광이 흘렀다. '저것은.......' 옆에 있던 호불범이 나직하게 탄성을 터뜨렸다. "십절(十絶)의 방위로 좁혀지고 있습니다. 움직임을 추측해 보건 대 舅煊 삼십육 명의 고수가 뭉쳐 있습니다." 현광대사의 백미가 파르르 떨렀다. "그... 그렇다면 모두 삼백육십 명......." 무영종이 함께 부르짖었다. "천강삼백육십은살무영대(天 三百六十銀殺無影隊)!" 군웅들의 안색이 모두 대변했다. 천강삼백육십은살무영대, 이 얼마나 공포스런 이름인가? 구주진천 도 조천 명이 안면을 씰룩거리며 음산하게 외쳤다. "광혈마제 적표! 그 놈이 기어코 저 죽음의 살수대를 만들었군." 현광대사가 탄식했다. "아미타불... 정혜가 알아본 것이 사실이었구나......." 며칠 전 정혜는 현광의 밀명을 받고 은밀하게 광마혈제 적표의 주 위를 감시한 적이 있었고, 그때 적표와 몇몇 인물 간의 대화를 통 해 천강은살무영대에 관하여 들은 것이었다. 둥! 둥! 둥....... 북소리가 갑자기 완만해지더니 어느 순간 천지가 조용해지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단지 죽음의 파랑만이 악마의 손처럼 군웅 들을 향해 다가올 뿐이었다. 군웅들의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혔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위를 감싸고 있는 적막에 막연한 두려움을 느 끼고 있었다. 적막은 어쩌면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른바 사(死)의 적막(寂寞)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적막을 깨고 무영종이 웅혼한 불문의 사자후(獅子吼)를 터 뜨렸다. "우우우---!" 이 사자후는 군웅들의 마음 속에서 두려움을 일순간에 앗아가 버 렸다. 이어 팽천후가 버럭 외쳤다.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놈들은 일부러 우리에게 공포의식 을 심어주고 있다. 일섬(一閃)에 쓸어 버려라!" 조천명도 부르짖었다. "놈들도 삼백, 우리도 삼백이다! 우리 중 한 명이 죽으면 놈들 열 명이 죽고 우리가 열 명이 죽으면 놈들은 깡그리 죽는다." 흑고 통천마군이 흉맹한 음성으로 그 뒤를 이었다. "광마혈제 적표, 그 늙은 놈은 나이 값도 못하는 놈이다. 이따위 소꿉장난으로 노부를 놀리려 하다니! 흐흐흐......." 그러나 어디선가 가공스런 광소(狂笑)가 이들을 향해 터져나왔다. "크하하하...! 수라궁에 대항하는 자들이 어떻게 되는지는 적표가 똑똑히 보여주마. 얘들아, 쳐라!"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화원 속에서 천지가 무너질 듯한 함성이 터져나왔다. "와와---- 와!" 천문육십사로화절진을 뚫고 수많은 은의무사(銀依武士)들이 드디 어 모습을 드러냈다. 백건(白巾)을 이마에 두르고 양 손에는 은빛 방패(防牌)와 은월도 (銀月刀)를 들고 있는 무사들로, 그들은 하나같이 태양혈이 툭 튀 어 나오고 두 눈에서는 번갯불같은 신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무영종은 은의무사들의 그런 모습을 보고 내심 크게 놀랐다. '저들은 모두가 일류급 고수들이다. 수라궁, 이 얼마나 무서운 곳 인가? 저 많은 고수를 언제 다 키워냈단 말인가.......' 사도유가 무영종을 향해 말했다. "무형, 저들은 바로 내가 수라궁에 들어오기 위해 이 관을 뚫을 때 그곳에 있던 아홉 명의 무사들과 같은 차림이오. 만약 저 놈들 이 모두 그들 아홉 명과 실력이 비슷하다면 실로 무서운 일이오." 무영종의 짙은 눈썹이 한 차례 꿈틀거렸다. 그는 즉시 군웅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여러분! 소생이 명을 내리기 전에는 절대로 섣불리 움직이지 마 시오." 그 말에 따라 군웅들은 일체 대형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자 신의 손에 쥐어진 병기(兵器)를 꽉 움켜쥔 채 은의무사들을 노려 보기만 할 뿐이었다. ② 무영종은 조금도 안색이 변하지 않은 채 은의무사들을 노려보았 다. 천강삼백육십은살무영대는 어느새 군웅들의 주위를 포위하고 는 그 주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이정제동(以靜制動), 이유제강(以柔制强)이다. 절대로 적의 술수 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천강삼백육십은살무영대... 이들은 강중 강(强中强)이다. 여기에 강으로 부딪치면 설사 이긴다 한들 그 피 해가 엄청날 것이다. 그러므로 역시 방법은 단 하나뿐.......' 또다시 어디선가 음흉한 괴소가 터져 나왔다. "크흐흐... 왜 덤비지 않느냐? 겁이 나느냐? 으하하... 이제보니 중원의 고수라는 놈들은 모두 겁장이에 불과했구나!" 조천명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적표! 이 놈이......." 만리추풍수사 모용랑이 재빨리 만류했다. "조맹주, 안 됩니다. 지금 움직이면 놈들의 계략에 넘어가는 것이 오." "으윽! 빌어먹을......." 조천명은 손에 든 진천마도로 땅을 내리찍으며 억지로 분기를 참 았고 다시 적표의 음성이 들려왔다. "좋다, 제법이구나. 그러나 네 놈들이 움직이지 않으면 우리가 공 격하겠다. 천강삼백육십은살무영대, 놈들을 모조리 쓸어버려라!" "와---- 아!" 엄청난 함성과 함께 군웅들의 주위를 돌고 있던 은의무사들이 일 제히 공격을 개시했으니 실로 산천이 떨고 초목조차 울릴 엄청난 대공세였다. 드디어 무림역사상 전무후무한 죽음과 피를 부르는 대혈전의 서막 이 열린 것이었다. 은월도의 도강이 하늘을 찔렀고, 서리서리 뻗 치는 살기가 땅을 갈랐다. 무영종은 크게 외쳤다. "전 삼환(前三環)은 세 번째 생문(生門)을 열고 다섯 개의 사문을 닫으시오! 그리고 중 삼환과 후 삼환은 십팔 개의 휴문(休門)을 모조리 생문(生門)으로 변화시키시오!" 연환구절진(蓮環九絶陣)의 대형이 크게 움직였다. "대형의 십보(十步)를 벗어나지 말고 적의 공격에 대항하시오!" 마침내 불꽃 튀는 대격전이 벌어졌다. 천강삼백육십은살무영대, 그들의 개인적인 무공은 모두 일류급 고 수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 개개인의 무공이 군웅들의 상대 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천강무원대진을 형성하여 절묘한 진법을 바탕으로 공격을 펼치기 때문에 군웅들 개개인의 패도적인 공격을 충분히 막을 수가 있었다. 차차--- 창! 위--- 잉! 펑! 펑....... 천지가 온통 요란한 금속성과 장풍소리로 가득 메워졌다. 하늘도 놀라고 땅도 흔들리는 대접전이었다. 곳곳에서 단말마의 비명이 터지고 피가 튀었다. 군웅들이 형성한 연환구절진의 전 삼환진에서는 끔찍한 대혈전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러나 전 삼환을 맡고 있는 군웅들은 모두가 개세적인 무공의 소유자들이었다. 쉬이이--- 익! 퍼...... 펑! "크--- 아---- 악!" 전 삼환에 부딪친 은살무영대 일 진(一陳)의 삼십여 명은 순식간 에 피로 물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방패를 적절히 이용하는 한편 자신의 생명도 돌보 지 않고 아귀처럼 덤벼 들었다. 또한 본신의 생명을 돌보지않고 덤비니 그 위력은 엄청난 것이었다. 펑! "윽!" 한 은의무사가 비명을 질렀다. 그는 만리추풍수사 모용랑의 장력 을 방패를 막아내고는 뒤로 주르르 밀려나고 있었다. "은살무영대는 놈들의 중위(中位)와 후위(後位)를 공격해라! 그곳 이 약점이다!" 음침한 외침이 어디선가에서 들려왔고 무영종은 대뜸 그 음성의 임자를 알아냈다. '적표, 드디어 나에게 걸려 들었구나!' 그는 곧 군웅들을 향해 외쳤다. "중 삼환, 후 삼환의 군웅들은 십팔개생문(十八個生門)을 모두 사 문(死門)으로 변화시키시오! 일단 들어온 적은 한 사람도 놓쳐서 는 안 되오!" 중 삼환, 후 삼환 군웅들의 대형이 쾌속하게 변화를 일으켰고 은 살무영대의 백여 명 은의무사가 공격하자 그들은 기러기 날개 같 이 대열을 펼치며 순식간에 은살무영대를 포위했다. "걸렸소! 혈의삼십육궁은 연환마궁을 발사하시오!" 무영종의 외침이 터진 순간, 후 삼환에 속해 있던 혈의삼십육궁은 일제히 궁을 발사했다. 슈슈슈슉---! 창졸지간 빗발치듯 쏟아지는 연환마궁에 이십여 명의 은살무영대 사가 쓰러졌다. 그러나 그 외의 대부분은 방패를 들어 화살을 막고 있었고 이를 예측하기라도 한 듯 웅후한 파공음이 울렸다. 위---- 잉! 거대한 화살이 연달아 날았다. 바로 사해신군 구양경의 철마궁이 가공할 철마전을 쏜 것이었다. 철마전 한 개에 은살무영대는 방패까지 꿰뚫리며 한꺼번에 세 명 이 통째로 날아갔고 연이어 쏘아진 철마전은 은살무영대를 계속 쓰러뜨렸다. 중 삼환의 군웅들 역시 가차 없이 포위망 안에 든 은살무영대를 주살시키고 있었고 무영종이 다시금 우렁차게 외쳤다. "적대(敵隊)는 무너지기 시작했소! 후 삼환은 적의 퇴로를 완전히 차단하시오!" 그러자 후 삼환의 백여 명 군웅들은 일제히 은살무영대의 퇴로를 막았고 중 삼환의 군웅들이 재차 그들을 도륙했다. 처절한 비명과 난무하는 인육혈(人肉血)....... 은살무영대는 서서히 무너져가기 시작했으며 광마혈제 적표의 당 황한 음성이 터졌다. "천강무원진(天 武元陣)을 풀어라! 모두 각개로 놈들을 격파하 라!" 그러자 은살무영대는 하늘이 무너질 듯한 함성을 지르며 군웅들을 사방에서 한꺼번에 공격했다. 차차차... 창! 펑! 퍼펑! 군웅들도 이제는 쓰러져 갔다. 은살무영대의 머리통을 날리는 순 간 등이 쪼개지는가 하면 은살무영대의 허리를 끊는 순간 두 팔이 날아갔다. 또한 상대의 가슴에 검을 박은 순간 자신의 가슴과 등 을 꿰뚫렸다. 처절한 사투(死鬪)! 장내는 아수라지옥으로 화하고 말았다. 그 속에서 군웅들을 영도해 앞으로 나가던 무영종은 한 명의 은의 무사가 벼락같이 덮치는 것을 보고 신형을 번뜩였다. 그러자 은의무사의 은월도가 어느 사이 그의 손으로 넘어오는가 싶더니 눈부신 은광이 부채살처럼 그의 손에서 펼쳐졌다. "으아--- 악!" 한꺼번에 다섯 명의 은의무사가 목이 날아갔다. 그것은 바로 불영구검(佛影九劍)으로 무영종은 처음으로 불영검법 을 사용한 것이었다. 우박같은 피가 그의 몸으로 쏟아졌으나 한 방울도 그의 옷자락에 묻지 못하고 튕겨져 나갔다. '살인(殺人).......' 무영종의 가슴에 격랑이 일었다. 소림에서 실수로 현우(玄羽)를 죽인 이래 강호에서 그의 살인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한꺼번에 오 명(五名)의 목을 날리자 무영종은 마음이 크게 진탕했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는 이를 악물었다. "여러분! 연환구절진을 대라금강항마진(大羅金剛降魔陣)으로 변화 하여 가차없이 적을 주살하시오!" 무영종의 입에서 터진 말은 처절하리 만큼 냉혹했으며 그것은 수 라궁의 잔악함이 그의 심중에 커다란 분노와 살심을 일으킨 때문 이었다. "와아----!" 엄청난 함성과 함께 군웅들의 진법이 돌변했다. 전 삼환, 중 삼 환, 후 삼환의 군웅들은 그의 말에 따라 즉각 한 곳으로 뭉쳐졌 다. 이미 그들의 마음 속에 무영종의 존재는 완전한 영도자로 깊은 신 뢰를 심고 있었다. "죽어랏!" 구주진천도 조천명의 진천마도가 가공할 혈우(血雨)를 뿌렸다. "크... 악! 그의 진천마도가 번뜩일 때마다 한꺼번에 두세 명의 은의무사들의 허리가 동강나 날아갔다. 꽈르릉---- 펑! 또한 통천마군 흑고의 장력이 닥치는 대로 은의무사들을 격살시켰 으며 팽천후의 도법(刀法) 역시 실로 끔찍한 위력을 발휘했다. 우우--- 웅! 쐐---- 액! 자전십팔풍의 소용돌이에 방패와 은월도는 물론 은의무사들의 몸 뚱이가 무수하게 토막났다. "흐흐흐흐... 당가(唐家) 암기의 맛을 보여주마!" 슈슈슈슉......! "커억!" 천수겁천 당환성의 활약도 눈부셨다. 그가 일거수 일투족을 움직 일 때마다 은의무사들은 목에 구멍이 뚫린 채 쓰러져 시커멓게 변 색되어 죽어갔다. 소림의 십팔나한들 또한 무서운 위력을 발휘했다. 그들의 염주와 선장(禪杖), 계도(戒刀)가 번뜩일 때마다 은살무영대는 썰물처럼 갈라졌다. 그러나 군웅들의 피해도 적지 아니 참담한 것이었다. 벌써 오십 명 이상이 희생되고 있었다. 싸움은 아수라장으로 화해 피아를 구분치 못할 정도로 얽혀졌으나 어느 쪽이 크게 유리하지도 불리하지도 않았다. 애초 은살무영대는 모두 일류고수인데다 방패를 가진 장점이 있었 고, 게다가 죽음을 불사하는 공격성 때문에 군웅들의 피해도 점차 커갔다. 무영종은 계속 은월도로 적들을 잡초 베듯 치며 상황을 가늠했다. 그러나 이미 싸움의 상황은 극에 이르러 더이상 진세를 바꿀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귓전으로 한 줄기 전음이 들려왔다. (무대협, 군웅들을 화원 좌측 백 장 밖의 가산으로 이동시키시 오!) 무영종은 가슴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이 음성은...... 위전풍, 위형이다.' ③ 전음의 임자는 바로 선풍마서생 위전풍이었다. 그러나 그의 모습 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다시 전음 만이 들려왔다. (화원 속에 설치된 천문육십사로화절진은 이미 붕괴시켰소. 아무 런 저지도 받지 않을 것이니 어서 군웅들을 가산 쪽으로 이동시키 시오, 급하오!) 무영종은 극심한 갈등을 일으켰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나 곧 결단을 내린 듯 그는 군웅들을 향해 크게 외쳤다. "여러분! 대라금강항마진을 그대로 지속시키며 대열을 좌측 가산 으로 이동시키시오!" 그의 갑작스런 지시에 혈전에 여념이 없던 군웅들은 모두 의아했 고 호불범이 외쳐 물었다. "무대협! 그곳에는 천문육십사로화절진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그 런데 어째서 그곳으로 대열을......." 무영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소." 그러나 군웅들의 이동은 이미 개시되었고 그들은 무영종의 지시대 로 화원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휘--- 익! 이때 전권 밖에 한 혈의인이 나타났는데 그는 바로 광마혈제 적표 였다. 적표는 군웅들이 화원 안으로 들어가자 만면에 득의의 괴소 를 흘렸다. "흐흐흐흐... 어리석은 놈들, 죽음의 절진(絶陣) 안으로 들어서다 니......." 그는 으스스한 음성으로 낮게 중얼거렸다. "흐흐흐... 그 화원 속에는 십만 근(十萬斤)의 화약(火藥)이 묻혀 있다. 천문육십사로화절진으로 안 되면 그때는 흐흐... 모든 것을 통째로 날려버릴 것이다." 적표는 음침한 눈으로 화원 속으로 완전히 들어간 군웅들을 노려 보았다. 그런데 곧 그의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군웅들이 화원 깊숙히 들어가도 아무 것도 그들을 가로막는 것이 없지 않은가? 적표는 안색을 보기 흉하게 일그러뜨리며 분노성을 터뜨렸다. "어떤 놈이 천문육십사로화절진을 무너뜨렸구나!" 그는 화원 밖에 포진하고 있던 은살무영대를 향해 외쳤다. "어서 놈들을 추격해라!" 한편 군웅들은 무영종의 영도 하에 화원의 중심부를 지나 좌측의 가산을 향해 신속히 이동했다. 무영종은 군웅들이 아무런 저지도 받지 않자 다소 마음을 놓았다. 휘익! 휙! 그들의 앞에 일곱 명의 인영이 떨어졌다. 그들은 바로 한 명의 흑 의문사와 흑의미부, 그리고 각기 옷색이 다른 다섯 명의 청년이었 다. 군웅들 중 천군맹의 맹주인 조천명이 반색을 했다. "아니, 이게 누구요? 흑룡단의 위단주가 아니오?" 흑룡단이라는 이름에 군웅들은 모두 안색이 변했다. 과연 나타난 사람은 흑룡단의 단주인 선풍마서생 위전풍과 그의 수하인 오상공 자(五霜公子), 琉 위전풍의 아내인 빙혈미인(氷血美人) 고설 한이었던 것이었다. 위전풍은 군웅들에게 다급히 말했다. "여러분! 자세한 이야기를 할 시간이 없소이다. 지금 빨리 가산으 로 이동해야만 하오." 그는 오상공자에게 말했다. "아우들! 어서 계획한 대로 놈들을 막게." "넷! 형님!" 오상공자는 모두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날렸다. "자, 여러분 갑시다!" 위전풍은 군웅들을 재촉했으나 기이하게도 군웅들은 그의 말을 따 르지 않고 일제히 무영종을 응시했다. 무영종은 고개를 끄덕이며 힘차게 말했다. "여러분. 위단주의 뒤를 따르시오!" 그의 말이 떨어지자 비로소 군웅들은 몸을 움직였고 위전풍은 이 상황에 크게 놀랐다. '매교랑에게 이 자에 대한 말은 들었지만 모든 군웅들이 이 자를 신임하다니,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구나. 더우기 천군맹의 맹주 인 조천명과 오만무례한 흑고까지 따르다니 도시 믿기조차 어렵 군.' 위전풍은 무영종이라는 인물에 대해 불가사의함을 느꼈으나 지체 하지 않고 앞장 서 가산을 향해 몸을 날렸다. 잠시 후 군웅들은 마침내 화원을 벗어나 가산에 당도했다. "이쪽으로 오시오!" 위전풍은 가산의 지리를 훤히 아는 듯 군웅들을 안내했다. 군웅들 은 모두 그를 따랐고 곧이어 그들은 가산의 후미진 곳에 있는 커 다란 암벽 앞에 당도했다. 겉으로 보아서는 단지 평범한 암벽이었으나 위전풍이 어느 한 부 분을 연속 누르자 변화가 일어났다. 쿠르르르... 릉......! 요란한 굉음과 함께 암벽이 좌우로 갈라지며 시커먼 동굴의 통로 가 나타난 것이었다. "아! 이곳에 통로가 있다니......." 군웅들은 모두 탄성을 발했다. 그 순간 화원의 중심에서 갑자기 요란한 폭음이 터졌다. 꽝--- 꽈르르르릉----! 실로 엄청난 폭발음으로 지축이 온통 흔들리며 가산 전체가 진동 에 의해 흔들흔들 했다. 연이어 하늘을 찌를 듯이 엄청난 불길이 화원 전체에서 터져 올랐다. 꽝-- 꽈르르-- 꽈르르르--- 릉----! 천번지복의 대폭발, 그 폭발음 속에서 처절한 비명이 연속적으로 희미하게 들려왔다. 군웅들은 이 뜻밖의 사태에 아연실색 했다. 그들은 모두 하늘을 뒤덮은 화염을 바라보며 넋을 잃었다. 위전풍 이 약간 흥분한 음성으로 그들에게 말했다. "하늘이 도왔소! 원래 저 화원 안에는 십만 근의 화약이 매설되어 있었소이다. 그것을 역(逆)으로 이용한 것이오." "아! 그런 엄청난 함정이......." 군웅들은 다시 한 번 입을 딱 벌렸다. 화원 전체를 뒤덮은 화염은 가산에까지 그 화력(火力)이 뻗어와 군웅들은 살이 타는 뜨거움을 느꼈다. 조천명이 괴소를 흘리며 말했다. "크흐흐... 적표 그 늙은 놈도 저 불꽃과 함께 타죽겠군!" 휙! 휙! 충천하는 화염 속에서 몇 줄기 인영이 뛰쳐 나왔다. 그들은 바로 오상공자였으나 어찌된 셈인지 그들은 세 명밖에 없었다. 그것도 옷이 모두 타고 전신이 피투성이였다. "아우들! 둘째, 네째는?" 위전풍이 격동하여 묻자 오상공자의 첫째인 흑풍공자 적무성이 처 절한 음성으로 말했다. "둘째와 네째는... 죽었습니다!" "아!" 위전풍의 놀란 눈에 금새 눈물이 차 올랐다. 그것을 보자 군웅들 도 모두 눈시울이 시큰함을 느꼈다. 결국 오상공자는 군웅들을 위 해 희생을 치른 것이었다. 그러나 위전풍은 이내 고개를 홱 돌렸다. "수고... 했소, 아우들......!" 그는 신색을 다시 회복하며 군웅들을 향해 외쳤다. "자, 여러분. 어서 들어갑시다. 이곳은 수라궁의 호보하 밖으로 통하는 비밀통로요." 군웅들은 모두 빠른 속도로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사라진 직후였다. 휙! 휘익! 동굴 밖에 문득 세 명의 인물이 내려섰다. 앞장 선 인물은 금포노인으로 얼굴에 면사를 쓴 신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는 바로 수라궁의 궁주인 수라혈신(修羅血神)이었다. 그리고 그 의 좌우로 오독비마(五毒飛魔) 구우령과 백골사마(白骨死魔)가 서 있었다. 수라혈신은 동굴을 바라보며 음침하게 말했다. "위전풍, 그 놈 때문에 천강삼백육십은살무영대 의 대부분이 전멸 하고 혈마전주까지 처참한 중상을 입었다." 면사 속으로 보이는 그의 두 눈이 무서운 살기를 발산했다. 그는 이를 부드득 갈며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위전풍! 네 놈은 착각을 했다. 이 동굴이 호보하 밖으로 통하기는 하나, 흐흐흐... 너희들은 절대 이곳을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상상도 못할 무서운 것이 너희들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 다. 크흐흐흐......." 수라혈신의 괴소는 섬뜩하게 이어지더니 어느 순간 갑자기 뚝 멈 추었다. 그는 오독비마에게 묻고 있었다. "독혈당주. 오독절마진(五毒絶魔陣)은 이미 전개했는가?" 오독비마 구우령은 음흉하게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궁주님. 속하의 오독(五毒)은 비록 공간의 구애를 받아 아무 곳에나 펼칠 수는 없지만 이 동굴 속에서야... 흐흐 흐... 십분 위력을 발산할 것입니다." 그는 이어 음침하게 말했다. "그 누구도 이 통로를 빠져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 말에 백골사마도 음침하게 덧붙였다. "또 설사 오독절마진을 통과한다 할지라도 속하의 백팔구유강시녀 (百八九幽彊屍女)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수라혈신은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크흐흐... 한 놈도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이 수라궁이 어떤 곳 인지 똑똑히 보여 주리라." 수라혈신은 싸늘한 눈으로 동굴을 응시하더니 몸을 휙 날렸으며 뒤이어 오독비마와 백골사마도 어디론가 사라졌다. ■ 대소림사 제3권 제26장 이독제독(以毒制毒), 이적공적(以敵攻敵) -1 ━━━━━━━━━━━━━━━━━━━━━━━━━━━━━━━━━━━ ① 동굴 안. 이백오십여 명의 군웅들은 조심스럽게 통로를 지났다. 동굴 안은 생각 밖으로 넓은 편으로 적어도 열 명 정도는 어깨를 나란히 하 고 지날 수가 있었다. 더우기 군웅들 중에서 몇 명이 화섭자(火攝 子)를 밝혀 통로를 환히 살피며 지날 수 있었다. 그들 중 오십여 명은 극심한 상처를 입고 있어 서로 부축을 하며 걷기도 했다. 군웅들은 모두 침중한 안색으로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모두가 조금 전의 대혈전을 생각하며 내심 치를 떨고 있었다. 그들은 인공(人工)으로 축조된 통로를 지나며 결국 똑같은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동굴만 벗어나면 수라궁 밖이다. 수라궁 놈들, 두고 보자! 오 늘의 이 원한은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위전풍과 나란히 걷던 무영종은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위단주, 이 통로는 확실히 수라궁 밖으로 통하는 것이오?" 위전풍은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소." 무영종은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고개를 끄덕였다. '음, 하기야 위형은 오래 전부터 이곳에 열 명의 첩자를 잠입시켜 놓았으니 확실하겠구나.' 통로는 차츰 좁아지기 시작했다. 약 한 마장 쯤 지나자 통로는 반 으로 좁아져 다섯 명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지날 정도가 되었다. 군웅들은 할 수 없이 대열을 길게 늘여 통로를 걸어야 했다. 우... 우... 우... 웅! 갑자기 군웅들의 후미 쪽으로부터 괴이한 실袖 들려온 것은 그 때였다. 그 음향은 맨 선두에 있던 무영종이 제일 먼저 들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군웅들도 뒤이어 모두 그 음향을 들었다. 자세히 귀를 기울여 보 니 날개 달린 괴충(怪蟲)이 허공을 가득 메우며 내는 소리같았다. 군웅들의 얼굴에는 모두 불안과 의혹의 표정이 떠올랐다. 이때 혈 의마검 공손패가 안색이 변해 외쳤다. "저것은... 오독살충(五毒殺蟲)이오!" 그 말에 옆에 있던 조천명이 의아하여 물었다. "공손곡주, 그게 무슨 말이오?" 공손패는 공포에 젖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이, 이것은 오독비마 구우령이 키우는 것으로 다섯 가지 극렬한 독충(毒蟲)들이 내는 소리요." "아!" "극독의 침을 가지고 있는 독벌(毒蜂), 묘강의 무서운 독파리인 혈승(血蠅), 한 번 쏘이면 즉사하고 마는 모기인 마문(魔蚊), 날 아다니 뱀 비음사(飛陰蛇), 무서운 독나비인 귀접(鬼蝶)을 말하 는 것이오." 군웅들은 그 말에 모두 안색이 대변했고 공손패는 치를 떨었다. "구우령은 이 오독살충으로 우리를 동굴 안에서 모조리 죽일 작정 인가 보오." 조천명도 이를 갈며 분성을 터뜨렸다. "으... 으....... 지독한 놈들! 이제 보니 이 동굴도 놈들이 마련 한 계략 중 하나였군." 그러자 모두들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위전풍을 노려보았고 위전 풍은 그만 안색이 창백해지고 말았다. 흑고가 참지 못한 듯 그를 다그쳤다. "위전풍,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하겠느냐?" 위전풍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굳어져 버렸다. 무영종이 그 사 이에 나섰다. "여러분, 위단주의 본심은 이미 밖에 봐서 충분히 알 수가 있지 않소? 그의 형제들인 오상공자 중 둘이 희생되기까지 했소이다. 그러니 위단주는 절대 고의적으로 우리를 사지(死地)에 몰아넣을 사람이 아니오." 무영종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단지 이 통로 속에 이같은 함정이 있는 것 만은 그도 예상치 못 했나 보오이다." 그는 어두운 시선으로 전도(前道)를 응시하고 있었으나 그가 한 말의 효력은 대단했다. 군웅들은 그의 말에 따라 금새 위전풍에 대한 의심을 거두어 버리는 듯했고 위전풍은 무영종을 감격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우... 우... 우... 웅! 오독살충의 날갯소리는 통로의 공기를 진동시키며 점점 더 가까워 졌다. 조천명이 외쳐 물었다. "무대협. 좋은 방도가 없겠소? 이 소리로 보아 잠시 후면 오독살 충이 당도할 것같소." 그 말에 대답하는 자는 호불범이었다. "구우령의 오독살충이 만드는 오독절마진을 막는 법은 단 두 가지 뿐입니다." 군웅들의 이목은 모두 그에게 집중되었고 무영종이 고개를 끄덕이 며 그를 도왔다. "그렇소. 그것은 화(火)와 독(毒)이오." "화와 독?" 조천명의 반문에 호불범은 탄식했다. "이곳에 백독마군(百毒魔君)이 있다면 막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 러나......." 호불범이 힘없이 말을 흐리자 조천명이 그 뒷말을 대신했다. "그들은 이미 죽었소이다." 우... 웅... 우웅! 오독살충의 진동음은 그 사이 더욱더 커졌고 무영종은 안색이 침 중해졌다. "소첩이 한 번 막아보겠어요." 어디선가에서 차가우면서도 아름다운 음성이 들렸는데 음성의 주 인공은 흑의미부, 바로 위전풍의 아내인 빙혈미인 고설한이었다. 그녀는 지금 안색이 무척 창백해져 있었으나 그녀의 타고난 미 (美)는 여전히 중인들의 눈길을 끌고 있었다. "아니, 고여협이 어떻게?" 군웅들이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짓자 그녀는 품 속에서 하나의 백옥 갑을 꺼냈다. 그리고 그녀가 뚜껑을 여니 그 안에서 투명한 빛을 발하는 두 마리의 주먹 만한 은빛 거미가 튀어 나왔다. "이 거미는 설산(雪山) 특산의 은망귀주(銀網鬼蛛)예요." 고설한은 중인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잠시만 물러나 주세요." 군웅들은 모두 비켜 서 주었다. 고설한은 군웅들의 후위에서 은망 귀주를 풀었다. 쓰쓰... 쓰쓰....... 두 마리의 은망귀주는 괴이한 음향을 내며 통로에 거미줄을 치기 시작했다. 그들이 몇 번 좌로 우로 왔다갔다 하는 동안 통로에는 치밀한 거미줄이 완성되었다. 그 거미줄은 투명한 은색이었다. 고설한은 군웅들에게 설명했다. "이 거미줄에는 어떤 물건이든 닿기만 하면 그 즉시 녹아버려요. 오독살충이 아무리 무섭다고 해도 이 은망이면 몇 각 동안은 버틸 수 있을 거예요." 고설한은 아름다운 눈을 깜빡이며 중인들을 재촉했다. "자, 우리는 그동안 이곳을 벗어나야 해요." 무영종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인들을 영도했다. "여러분! 고여협의 말대로 빨리 행동합시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군웅들은 다투어 앞으로 이동했으나 워낙 통로가 좁고 인원이 많아서 이동은 그다지 용이치 않았다. 우... 우... 우... 웅! 오독살충의 진동음은 마침내 지척까지 닥쳤다. 군웅들은 앞으로 나가며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헉!" 그들은 경악성을 발했다. "저, 저럴 수가!" 실로 엄청난 숫자의 독충들이었다. 통로를 꽉 메우다시피한 독봉, 혈승, 마문, 비음사, 귀접 등이 은망에 걸려 광란하고 있었다. 우... 우... 웅! 쓰... 쓰... 쓰....... 소름끼치도록 괴이한 음향이 군웅들의 귀청을 울렸다. "으으!" 맨 뒤에 처진 군웅들은 그 공포스런 광경에 완전히 질리고 말았 다. 이때 무영종이 침착하게 그들을 독려했다. "자, 여러분. 얼마 동안은 안전하니 어서 앞으로 나갑시다." 군웅들은 조용하고 신속하게 앞으로 이동했다. 태양신군(太陽神君) 황보숭양. 그는 맨 뒤에 처져 있던 인물 중 한 명으로 앞을 향해 몸을 날리다 말고 힐끗 은망을 살펴 보았다. 투... 투... 투... 툭! 그의 눈에 독충들의 무게에 눌려 은망의 한 귀퉁이가 뜯어지는 것 이 보였다. 황보숭양은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저 정도라면 길게 잡아야 일 각... 은망은 오래가지 못하고 제 거될 것이다.' 갑자기 그의 얼굴에는 비장한 표정이 어렸다.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군웅들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의 눈에 군웅들 속에 섞여 앞으로 빠져나가는 그의 아들 과 딸인 황보무룡과 황보문연이 보였다. 이미 전신이 피로 얼룩지 고 부상을 입어 처참한 몰골인 그의 혈육들이었다. '저 아이들은 장차 태양장을 이을 혈맥(血脈)들이다.' 이어 황보숭양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슬쩍 대열에서 빠졌다. 그러 나 그 사실을 눈치 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군웅들은 앞으로 달 려나가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었던 것이다. 삽시간에 황보숭양은 군웅들에게서 멀어졌다. 투툭... 툭... 투툭! 은망(銀網)은 하나 하나 끊어지고 있었다. 우... 우... 웅! 쓰... 쓰... 치치... 칙! 오독살충은 발광을 일으켰다. 그 앞에서 태양신군 황보숭양은 우 뚝 서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추호의 흔들림이 없는 모종의 결심 과 각오가 어려 있었다. 그는 내심 중얼거렸다. '태양신공(太陽神功)을 극성으로 끌어올리면 태양열화천강(太陽熱 火天 )에 이른다. 그것은 천지 간에서 가장 극양한 기운이다. 전 력을 다해 펼치면 전신에서 화염이 근 반 시진 동안 작렬하여 방 원 십 장을 불바다로 만들 것이다. 그것이면 충분히 오독살충을 불태울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내 목숨은 끝이다.' 황보숭양의 얼굴에는 비장한 기운이 가득 찼다. 마침내 그는 눈을 지그시 감더니 그 자리에 정좌(正坐)했다. '설사 한 줌의 재로 화할지언정 대의(大義)를 위한 일이라면 내 한 목숨 무엇이 아까우랴?' 황보숭양은 마치 유언이라도 하듯 중얼거렸다. "용아(龍兒)야, 태양장의 운명은 이제 너에게 달렸다." 그는 눈을 부릅떴다. 그의 눈에 은망에 달라붙은 수천만 마리의 독충이 보였다. '모조리 태워 죽이리라!' 투... 툭... 툭! 드디어 은망이 크게 찢어지면서 무수한 독충이 먹구름처럼 쏟아져 나왔다.황보숭양의 두 눈에서 무서운 화광이 뻗었다. 그의 몸이 찬란한 백광(白光)에 휩싸이는가 싶더니 엄청난 불길이 사방으로 작렬했다. 화르르르릉....... 엄청난 화염의 소용돌이가 일었다. 수천만 마리의 오독살충들은 물론 통로 전체가 가공할 화염으로 뒤덮이고 말았다. 심지어는 황 보숭양 자신마저도....... ② 군웅들은 계속 앞을 향해 이동했다. 호불범(戶不凡). 무공을 익히지 않은 유일한 인물인 그는 거듭되 는 격변으로 인해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는 안색이 창백해진 채 걸음걸이마저 헝클어졌다. 그런데 그를 부축하는 손길이 있었다. 무영종이었다. 호불범은 그를 향해 미소지었다. "고맙습니다. 무대협." 그러는 사이 군웅들 속에 있던 황보문연이 안색이 변해 외쳤다. "오빠, 아버님이 보이지 않아요!" 그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던 황보무룡은 흠칫 놀라 주위를 살 폈다. 과연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근처에 있었던 부친 황보숭양이 보이지 않았다. 황보무룡의 얼굴에는 삽시에 불안의 그림자가 떠 올랐다. 황보문연은 걱정이 가득 차 그에게 물었다. "어디 계실까요?" 황보무룡은 입술을 지그시 물며 군웅들의 앞을 바라보았다. "아마 선두로 가신 모양이니 너무 걱정마라. 아버님의 무공으로 보아 무슨 일이야 있겠느냐?" 황보문연은 저으기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으나 막상 그녀를 달 래던 황보무룡은 얼굴이 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설마하니 황보숭양이 군 웅들을 살리기 위해 홀로 뒤에 남아 희생되었을 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한편 무영종은 호불범을 부축하고 앞으로 걸으며 그가 매우 가볍 고 가냘프다는 것에 진한 연민을 느꼈다. '정말 대단한 소녀다. 얼마 남지 않은 생명임에도 이토록 군웅들 을 위해 안간힘을 쓰다니.......' 그는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호소협." 호불범은 고개를 돌려 아름다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 아니오." 무영종은 급히 말을 흐렸다. 그의 표정은 웬지 어색해져 있었다. 그 모습에 호불범은 은연중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설마... 이 분이 눈치를 챈 것이 아닐까?' 이때 위전풍이 그들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소. 앞으로 일 각만 더 가면 수라궁 밖이 오." "음......." 무영종은 침음성을 발했다. 그는 희망을 갖기보다는 오히려 가슴 한 쪽이 무거워지고 있었다. '오독비마의 오독살충이 이 통로에 전개된 것을 보면 앞으로 또다 른 함정이 있을 수도 있다. 과연.......' 그들이 앞으로 나가는 방향의 끝에서 한 줄기 빛이 보였다. '웬 빛이?' 군웅들은 가슴이 섬뜩함을 느꼈다. 그들의 얼굴에는 불안이 어둡 게 깔렸다. 그러나 아무도 입을 열거나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통로는 다시 넓어졌다. 이어 하나의 커다란 광장에 당도하자 군웅 들의 입에서는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아니!" 군웅들은 모두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광장에는 실로 괴기한 광경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광장에는 시커먼 색의 흑관(黑棺)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는데 모 두 백팔 개(百八個)였다. 실로 공포스럽고 음산한 광경이었다. 광장의 사방 벽에는 푸른 인 화가 밝혀져 있었는가 하면 백팔 개의 흑관은 사실상 기이한 진세 (陣勢)로 군웅들의 앞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무영종은 안색이 변했다. '이것은 또 무엇인가?' 그는 곧 중인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모두 조심하시오!" 무영종은 앞장서 조심스럽게 전진했고 군웅들도 그의 뒤를 따라 흑관 사이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무영종은 그들을 인솔하여 진(陣)의 형세를 살펴 생문(生門), 휴 문(休門)을 통해 천천히 진입하고 있었다. 군웅들이 막 흑관의 중심부를 지날 때였다. 끼... 끼... 익! 섬ㅉ한 음향이 사방에서 들렸다. 군웅들은 그 소리에 모두 머리 끝이 쭈뼛서는 공포를 느꼈다. 끼... 익! 덜... 컹! 여기저기서 관뚜껑이 열리기 시작하더니 관 속에서 무엇인가가 벌 떡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그것을 본 군웅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 해야 했다. 관 속에서 일어난 것은 전신에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전라 의 미녀들이었던 것이었다. 도합 백팔 명의 나체미녀, 그것도 모두가 한결같이 눈부신 미모의 젊은 여인들로 희한하게도 머리칼은 금발이었고 눈동자는 벽안(璧 眼)이었다. 게다가 빙결처럼 새하얀 피부와 잘록한 허리, 깜짝 놀랄 만큼 풍 만한 두 개의 육봉과 커다란 둔부, 그리고 기름진 아랫배와 유난 히 길게 뻗은 두 다리는 아찔할 정도의 색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여인들의 비림(秘林)은 폭발 적인 유혹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야말로 숨이 콱 막힐 듯 뇌쇄적인 풍경이었다. 관 속에서 일어 난 나체미녀들을 본 순간 군웅들은 하나같이 가슴이 울렁거리고 말았다. 게다가 백팔 명의 풍만한 나체미녀들에게서는 코를 찌르는 육향 (育香)이 풍겨 군웅들은 단전 아래가 뜨겁게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비교적 나이가 어린 청년들은 금방 호흡이 거칠어졌고 심지어는 무림고인들도 혈관이 부푸는 것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이때였다. 소림의 현광대사가 웅후한 불호성을 터뜨렸다. "아미타불...! 모두들 조심하시오, 저 여인들은 인간(人間)이 아 니라 모두 죽은 지 오래된 시체들이오. 저들은 백골사마(白骨邪 魔)가 연성한 마의 대법인 백팔구유강시녀(白八九幽彊屍女)들이 오!" 그 말에 군웅들은 정신이 번쩍 들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과 연 자세히 보니 나체 여인들의 푸른 눈에는 움직임이 전혀 없었으 며 마치 혼(魂)빠진 시귀(屍鬼)들과 같았다. 이때 가벼운 음향이 그들 사이를 울렸다. 사사사... 삭....... 그것은 바로 강시녀들이 맨발로 군웅들에게 좁혀드는 소리였다. 나체의 강시녀들은 군웅들을 향해 차츰 다가오고 있었다. 실로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터질 듯이 부푼 젖가슴과 연분홍빛의 유두(乳頭), 그리고 두 다리가 벌어질 때마다 살짝살짝 드러나곤 하는 여인의 비역(秘域)....... 너무나도 적나라한 광경에 군웅들은 감히 손을 쓰지 못하고 주춤 주춤 뒤로 물러나기만 했다. 그러나 군웅들의 귓전에 무영종의 냉 엄한 외침이 들렸다. "여러분, 모두 정신 차리시오! 저들은 인간이 아닌 살인괴물들이 오. 여기서 정신이 흩어지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오." 무영종의 경고는 군웅들에게 새로운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다. 제 일 먼저 통천마군 흑고가 대갈일성을 터뜨렸다. "빌어먹을 계집들, 죽어라!" 꽈르릉---! 그의 무서운 통천마장(通天魔掌)이 한 강시녀의 젖가슴을 격중시 켰다. "카... 악!" 강시녀는 섬ㅉ한 짐승의 울부짖음같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삼 장 가량이나 나가 떨어졌다. 두 다리를 뻗으며 떨어진 강시녀의 모습 은 실로 괴이했다. 그러나 강시녀는 놀랍게도 펄쩍 뛰어 오르더니 허공을 한 바퀴 회 전한 후 바닥에 내려섰다 "크... 크악!" 강시녀의 입에서는 인간도 짐승도 아닌 기괴한 음성이 터져 나왔 다. "저... 저럴 수가!" 흑고는 그 광경에 대경실색했다. 자신의 통천마장은 적어도 삼천 근의 힘이 실려 있어 단단한 청석으로 된 비석조차 단숨에 쪼갤 수 있었다. 그런데 골육(骨肉)으로 된 강시녀가 끄떡없이 일어서 는 것을 본 그는 도시 믿을 수가 없다는 듯 멍해졌다. 이윽고 백팔구유강시녀는 군웅들을 일제히 공격하기 시작했다. "으아악!" 여기저기서 처절한 비명소리가 터졌다. 강시녀들의 공격에 단번에 십여 명의 군웅들이 거꾸러졌다. 군웅들의 분노는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다. "요귀들! 죽어랏!" 펑! 퍼엉! 쾅---! 군웅들의 장력은 강시녀들을 무차별 공격했다. 일단 군웅들이 죽 는 것을 보게 되자 그들은 더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전 라의 강시녀들의 모습에 당황했으나 차츰 독한 마음을 먹게 된 것 이었다. 그들은 무차별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금기로 여기던 여 인의 소중한 부위를 공격하는 것마저 마다하지 않았다. 펑! 막중한 장력이 강시녀의 터질 듯이 부푼 젖가슴에 격중되었다. 그 러나 강시녀들은 괴성을 지르며 저만치 날아갔다가는 다시 야차처 럼 덤벼들었다. "카... 아!" 군웅들은 차츰 당황하기 시작했다. "크윽!" 다시 십여 명의 군웅들이 강시녀의 공격에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즉사했다. 강시녀의 옥수(玉手)는 도검(刀劍)보다 더 날카로왔다. 그녀들의 쫙 벌린 손가락은 군웅들의 병기를 여지없이 부러뜨렸으며 머리통 을 으깨는가 하면 가슴과 복부를 꿰뚫었다. 여기저기서 터지는 참혹한 비명으로 인해 장내는 삽시에 피의 아 수라장으로 화했다. 한편 호불범의 안색이 갑자기 창백하게 변했다. 그는 이마에서 식 은 땀을 흘리며 두 눈은 촛점을 잃기 시작했다. 그를 부축하고 있 던 무영종은 흠칫하며 물었다. "호소협, 왜 그러시오?" "고... 고질병이 시작......" 호불범은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며 간신히 이같이 말했다. "야... 약(藥)을......." 그는 안간힘을 쓰며 품 속에 손을 넣었다. 그러나 기력(氣力)이 쇠진한 듯 약을 꺼내지 못했다. 무영종이 침음성을 발하더니 말했 다. "내가 대신 꺼내 드리겠소." 그는 호불범의 가슴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비록 천으로 감쌌지 만 뭉클한 여인의 젖가슴의 감촉을 손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그 러나 그는 내색치 않았다. 호불범은 그의 손길이 소중한 젖가슴을 건드리자 안색이 붉어졌 다. 무영종은 무심한 표정으로 재빨리 옥병 속에서 세 알의 흰 알 약을 꺼내서 호불범에게 먹였다. 잠시 후 호불범의 창백하던 얼굴에는 화색(和色)이 되살아 났다. 기운을 차리자 호불범은 가장 먼저 무영종에게 대한 의혹으로 눈 을 반짝였다. '정말 이 분은 내가 여자임을 눈치채지 못했단 말인가?' 남장여인 호불범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이 분은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단지 모른 척 하실 뿐.......' 호불범은 안타까운 기색이 어린 얼굴로 나직히 한숨을 쉬었다. "으아악!" 처절한 비명은 계속 들려오고 있었고 무영종은 사방을 둘러보았 다. 특히 부상당해 있던 군웅들이 강시녀들의 공격에 의해 처참하 게 쓰러지고 있었다. "저 요괴들!" 무영종의 얼굴에 무서운 격분이 떠올랐다. 그런 표정은 실로 드물 게 나타난 것이었다. 아니, 무영종으로선 처음이었다. 그는 근처 에 있던 관동삼괴에게 말했다. "삼괴, 호소협을 호송해라!" 무영종의 몸은 분노에 찬 장소성과 함께 이미 날아가고 있었다. "우우----!" 그의 손에 쥐여진 은월도가 허공에서 찬란한 무지개를 환출했다. 드디어 불영구검의 절세검법이 다시 전개된 것이었다. 쐐--- 애--- 액! 가공할 검광과 검영이 한꺼번에 일곱 명의 강시녀를 휘감았다. 은 월도는 정확히 강시녀들의 목을 향해 한 바퀴 맴돌았다. "크... 아... 악!" 강시녀들은 처절한 괴성을 지르며 모두 목을 감싸쥐고 날아갔다. 그러나 바닥에 쓰러진 강시녀들은 다시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목은 세 치 깊이로 갈라져 있었다. 분명 그 정도면 즉사를 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그런데 강시녀들은 목을 덜렁거리면서도 다시 그 를 공격해 오는 것이었다. '이, 이럴 수가! 대체 이것들은... 불사지체(不死之體)란 말인 가?' 무영종이 아연실색해 하는 사이 호불범이 두 눈에 이채를 띄며 그 에게 말했다. "무대협, 그 강시녀들의 기(氣)의 원천(源泉)은 회음혈(會陰穴)입 니다. 회음혈을 공격하면 물리칠 수가 있습니다." 호불범은 그렇게 말하며 스스로 얼굴을 붉혔고 무영종 역시 얼굴 이 붉어졌다. 회음혈. 그것은 바로 인체(人體)의 은밀한 곳으로 두 다리 사이에 있지 아니한가? 특히 여인으로 말하면 바로 은밀한 부위의 바로 아래에 해당되는 곳이었다. '하지만 회음혈을 어떻게......?' 그가 난색을 지으며 주춤하고 있을 때였다. "으악!" 바로 그의 곁에서 한 군웅이 강시녀의 공격에 머리가 부숴지며 죽 었다. 그러자 무영종의 가슴에 다시금 무서운 분노가 일어났다. 그는 즉시 몸을 휙 날리며 그 강시녀에게 접근하더니 원앙각퇴의 일식으로 나체 강시녀의 가랑이 사이 회음혈을 여지없이 강타했 다. "끄아아악!" 강시녀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날아갔다. 입에서 시커먼 피를 토 하며 날아간 강시녀는 바닥에 쳐박혀 나신을 부르르 떨더니 축 늘 어졌다. 비로소 완전히 죽은 것이었다. ③ 무영종은 이를 악물며 외쳤다. "여러분, 모두 강시녀들의 회음혈을 공격하시오! 그곳이 치명적인 급소요." 그 말은 곧 군웅들에게 활기를 불어넣었다. 군웅들은 이미 분노가 극에 달해 있었다. 쳐도 쳐도 죽지 않는 강시녀들로 인해 진력이 탈진되었음은 물론 이미 절반 가까운 인원이 희생되었기 때문이었 다. "죽어라! 차... 앗!" 군웅들은 모두 강시녀들의 치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사 실 기막히고도 해괴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그 효과는 확실했다. "카--- 악!" 강시녀들은 순식간에 십여 명이 검은 피를 토하고 날아갔다. 물론 그것도 쉽지 만은 않았다. 일부 절정고수를 제외하고는 강시녀에 게 바짝 접근하여 회음혈을 공격하기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더우기 정파인물들, 특히 소림의 현광과 십팔나한들은 차마 여인 의 비소를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미타불......." 보다 못한 현광이 차라리 먼저 선장을 휘둘러 한 강시녀의 치부를 찔렀다. "크악!" 강시녀는 뒤로 뻗었고 그에 간신히 용기를 얻은 십팔나한도 눈을 질끈 감으며 공격했다. 그러나 혈전은 좀체로 결말이 나지 않았 다. 강시녀들의 무공도 가공할 만큼 높았기 때문이었다. 연달아 다섯 명의 강시녀들을 죽인 무영종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 강시녀들은 모두 동공이 없다. 그것은 앞을 볼 수 없다는 뜻 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공격을 할 수 있겠는가? 혹시.......' 그는 즉시 자신을 향해 덤벼드는 한 강시녀의 공격을 피하며 호흡 을 멈추어 보았다. 그랬더니 강시녀는 몸을 멈칫하고는 주위를 두 리번거리는 것이 아닌가? '과연 나의 추측이 맞았구나.' 그는 군웅들에게 크게 외쳤다. "여러분! 모두 호흡을 멈추고 공격을 중단하시오." 그 말에 군웅들은 모두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이미 무영종을 신 (神)처럼 믿고 있는 그들은 즉시 호흡을 멈추며 몸을 세웠다. 그 러자 괴이한 광경이 벌어졌다. 모든 강시녀들이 일제히 나신을 기우뚱하더니 어리둥절하는 기색 으로 동작을 멈추는 것이었다. 강시녀들은 일시에 방향감각을 잃 은 듯 멍청히 굳어지고 말았다. 무영종은 만면에 희색을 떠올렸다. '그렇구나. 이 강시녀들은 단지 청각 만으로 호흡과 공기의 진동 을 감지하여 공격하는구나. 호흡과 동작을 정지시키면 따라서 강 시녀들은 목표를 잃고 공격을 멈추게 된다.' 무영종은 즉시 군웅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조용히 있다가 강시녀들을 급습하시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한 강시녀가 소리를 듣고 무영종을 덮쳤다. 그러나 그의 몸이 핑그르르 도는 순간 그의 발끝이 강시녀의 회음 혈을 걷어찼다. "카악!" 강시녀가 피를 토하며 날아갔다. 조천명은 눈 앞에 멍청히 서 있는 강시녀를 향해 진천마도를 아래 서 위로 갈랐다. "요망한 계집들! 모조리 도륙하겠다." 위--- 잉! "카아... 악!" 진천마도는 강시녀를 가랑이부터 머리까 완전히 양단시키고 말 았다. 실로 끔찍한 광경이었으나 군웅들은 똑같은 방법으로 강시 녀들을 급습했다. "카악! 칵!" 강시녀들의 숫자는 삽시에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그런데 바로 이 때였다. 우... 우... 우... 웅! 갑자기 통로의 후미진 곳에서 공기의 진동음이 들려오는 것이 아 닌가? "아뿔사! 오독살충이다! 저것들이 벌써!" 군웅들이 대경하며 우왕좌왕했고 그 바람에 그들은 다시 강시녀들 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다시 십여 명의 군웅들이 쓰러지자 무영종은 그들에게 외쳤다. "여러분, 모두 침착히 대응하시오. 숨을 멈추고 조금씩 강시녀들 사이를 빠져 앞으로 전진하시오!" 그 말에 군웅들은 비로소 마음을 안정시켰다. 그들은 호흡을 끊고 옷자락 소리 하나 내지 않은 채 강시녀들 사이를 뚫고 앞으로 이 동하기 시작했다. 무영종 은 곁에 있는 위전풍에게 전음으로 말했다. (위단주, 소생은 이곳에 남아 잠시 할 일이 있소이다. 대신 군웅 들을 밖으로 인도해 주시기 바라오.) 위전풍은 흠칫하더니 그도 역시 전음으로 말했다. (아니, 무대협. 어찌 하실 작정이오? 혼자 남겠다니.......) (저 강시들과 오독살충을 서로 싸우게 하겠소이다.) 위전풍은 안색이 변했다. (그것은 무척 위험한 짓이오!) 무영종은 담담히 웃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군웅들이 이곳을 벗어날 수 없소이다. 소생 의 한 생명을 걸고라도 군웅들을 구해야 하오이다.) 위전풍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얼굴에는 온통 감동과 존경의 빛이 떠올랐다. 무영종은 이어 전음으로 부드럽게 말했다. (위형!) 갑자기 달라진 칭호에 위전풍은 어리둥절해졌다. (소제를 모르시겠소? 소제는 바로 하후성이오.) 위전풍의 안색이 대뜸 홱 변했다. 그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전음 술을 펼친다는 것 뗌 잊은 채 부르짖었다. "다... 당신이......." 무영종은 몸을 돌렸다. (위형, 부탁합니다.) (하, 하후형!) 위전풍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이미 하후성, 즉 무영종은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위전풍의 두 눈에 진득한 물기가 어렸다. (하후형! 부디... 조심하시오!) 그의 격정에 떨리는 전음성에 무영종의 담담한 대답이 전해졌다. (하하... 위형, 또 뵙게 될 것입니다.) 위전풍은 사나이들 만의 거센 감동이 가슴 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곧 몸을 돌리더니 군웅들을 영도하여 그 자 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대세를 위해서는 어쩔수 없는 일이었 다. 이윽고 무영종은 광장에 홀로 남게 되었다. 전라의 강시녀들은 꼭 오십 명이었고 푸르스름한 인화는 강시녀들 의 뇌쇄적인 나체를 비추어 괴기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무영종은 귀식대법으로 호흡을 멈추고 몸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강시녀들도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바닥에는 근 백여 구 에 달하는 군웅들의 시체가 짓이겨진 채 참혹한 광경을 드러내고 있었다. 무영종은 내심 탄식했다. '들어올 때는 오백 명에 달하던 군웅들이었건만 이제 남은 사람은 백 오십여 명에 불과하겠구나.' 우... 우... 우... 웅! 오독살충의 몰려오는 소리는 더욱 가까워졌다. 무영종의 안색이 굳어지는 찰나, 군웅들이 사라졌던 곳으로부터 한 사람이 돌아오 는 것이 보였다. 뜻밖에도 그는 선기묘인 사도유였다. 무영종은 흠칫 놀라 전음으로 물었다. (아니, 사도형! 왜 돌아오셨소?) 사도유는 익살스럽게 웃었다. 그도 역시 전음으로 말했다. (후후후... 무형, 무형은 어떤 좋은 방법이 있어 홀로 남은 것이 오?) 무영종은 흠칫하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후후... 내 그럴 줄 알았소. 마침 내게 좋은 방법이 있소.) (무슨 방법이오?) (후후... 이른바 이독제독(以毒制毒), 이적공적(以敵攻敵)! 즉 독 (毒)으로 독을 제압하고 적(敵)으로 적을 치는 수법이오.)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오만 다만 그 방법이.......) 무영종이 의아해 하는 가운데 사도유는 품 속에서 하나의 손가락 만한 붉은 옥병을 꺼냈다. 뚜껑을 열자 그 안에는 붉은 가루가 들 어 있었다. 무영종은 대뜸 기이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사도유는 허리에 찬 호로병을 끌러냈다. 그 속에는 술이 가득 들어 있었다. 사도유 는 가루약을 술 속에 탔다. (이것은 대막(大漠)에서만 자라는 혈독천갈(血毒天蝎)이 서로 교 미(交尾)할 때 나온 분비물이오. 여기서 나는 향기는 천하의 독충 (毒蟲)들이 모두 좋아하는 것이오. 대막에서는 이것으로 각종 독 충을 유인해 잡는데 쓰이고 있소.) 무영종은 비로소 무엇인가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사도유는 호로병을 기울여 꿀꺽꿀꺽 술을 마셔 큰 호로병의 술은 순식간에 동이 나고 말았다. "푸우---!" 그가 입을 내밀고 내뿜자 즉시 붉은 안개가 퍼져 나갔다. 그것은 미세한 주기(酒氣)로, 그 붉은 주기는 곧 사방으로 퍼져 강시녀들 의 몸에 붙었다. 무영종과 사도유는 호신강기를 일으켜 주기를 물리쳤으므로 그들 을 제외하고 광장은 온통 붉은 안개에 싸이게 되었다. 사도유는 낄낄거렸다. (클클... 이제 구유강시녀가 아무리 무섭다해도 오독살충에 의해 뼈만 남게 될 걸? 컬컬컬.......) (놀랍소. 사도형.) (저 혈독천갈마무는 최소한 이 각 동안 퍼져 있을 것이오. 오독살 충이 저것에 걸리면 낄낄... 아마 서로 죽도록 신나게 싸우겠지. 흐흐흐.......) 우우우... 우웅....... 마침내 오독살충은 광장에 당도했다. 시커먼 구름처럼 몰려오며 내는 소음은 귀청을 찢을 것만 같았다. 사도유는 그 광경에 혀를 내둘렀다. (정말 어마어마하군!) 무영종은 그를 재촉했다. (사도형, 우리도 어서 물러납시다.) 사도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뺐다. 뒤이어 오독살충은 붉은 기 류에 휩쓸렸다. "크아---- 악!" 강시녀들이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독봉, 혈승, 마문, 비음사, 귀 접 등이 새까맣게 몸에 달라붙었기 때문이었다. 실로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다. 두 사람이 보는 앞에서 순식간에 몇 강시녀가 해골로 화했다. (우헤헤헤... 싸워라, 싸워! 그리고 모두 같이 죽어라!) 사도유는 발을 구르며 좋아했다. (갑시다, 사도형!) 무영종은 그의 소매를 잡고 몸을 날렸다. 두 사람은 쾌속한 신법 으로 통로를 달렸다. 약 반 각쯤 달렸을까? 무영종은 문득 신형을 멈추었다. 그가 멈추자 사도유는 어리둥절 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도형, 잠시만 뒤로 물러나 주시오." 무영종의 요구에 그는 더욱 의아했다. "아니, 왜 그러시오?" 무영종은 통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가 노려보고 있는 통로의 폭 은 약 삼 장쯤 되었다. "이 통로를 무너뜨려야겠소." "뭣!" 사도유는 대경했다. '이, 이 사람이 제 정신인가? 무슨 힘으로 이 통로를 무너뜨린단 말인가?' 그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통로의 벽과 천정, 바 닥이 모두 암벽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곧 무영 종의 엄숙한 말이 들렸다. "사도형, 위험하니 물러나시오." 사도유는 아연했으나 뒤로 물러났다. 무영종은 우뚝 선 채 두 손 을 가슴 앞으로 끌어올렸다. "천지 간에 가강 강한 것은 뇌(雷)!" 그의 입에서 단호한 음성이 터졌다. 이어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 다. 번--- 쩍! 찬란한 푸른 섬광이 무영종을 뒤덮었고 그가 쌍장을 뻗자 수천수 만 가닥의 푸른 번개로 화해 통로 천정을 강타했다. 꽝--- 꽈르르-- 릉! 믿을 수 없게도 암벽으로 이루어진 통로의 천정이 산산조각나며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삽시간에 통로는 꽉 막히고 만 것 이었다. "아, 아니......!" 사도유는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그는 인간의 능력으로 그 같은 일을 이루리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갑시다, 사도형." 무영종의 담담한 음성이 그의 정신을 일깨웠다. 사도유는 고개를 몇 번 흔들더니 곧 신형을 날렸다. 그로부터 약 반 각 후. 그들은 마침내 긴 통로를 빠져 나올 수 있었다. 환한 햇살이 비치 고 있었다. 두 사람은 곧 밖으로 빠져 나갔다. 동굴을 빠져나오자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천마봉 정상 부분이었다. 백 오십여 명의 군웅들이 그곳에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가 환 성을 질렀다. "오오! 무사히 나왔구려!" 위전풍이 반색을 지었다. 무영종은 담담히 웃으며 군웅들을 둘러 본 다음 말했다. "자, 여러분. 이제 내려 갑시다." 그러나 이때 음침한 웃음이 들려왔다. "흐흐흐흐... 가겠다고? 어디로 간단 말이냐?" ■ 대소림사 제3권 제27장 천마봉(天摩峯)의 대혈전(大血戰) -1 ━━━━━━━━━━━━━━━━━━━━━━━━━━━━━━━━━━━ ① 군웅들은 전신이 긴장으로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들의 눈 앞에 이십여 명의 인영이 유령같이 나타났는데 맨 앞장 선 자는 전신에 금포를 입은 면사괴인, 바로 수라궁의 궁주이자 전 무림에 피의 음모를 뿌린 일세의 마존 수라혈신이었던 것이다. 그의 뒤에는 백골사마, 오독비마, 불면소살, 고루혈마, 지도마살, 비천야차, 열화풍사, 화의사신 등 수라궁의 중심을 이루는 팔대당 주가 음침한 표정으로 늘어서 있었다. 또한 그들 옆에는 금악비와 천하우물 백화미가 나란히 서 있었고, 다시 백화미 옆에는 얼마 전 수라궁 이 관문 때 고루혈마와 같이 서 있던 왜소한 체구의 청의 복면여인도 서 있었다. 수라궁의 목교를 지키던 흑백쌍로도 보였다. 그들의 표정은 그때 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권태가 실려 있었고 만묘선랑 장염하도 두 눈에 매혹적인 웃음을 머금고 서 있었다. 가장 신비한 것은 맨 오른쪽에 위치한 네 명의 괴인이었는데 그들 은 나이를 추측할 수 없었으며 모두 두 눈에서 괴이한 광망을 흘 리며 서 있었다. 좌측의 마의노인(麻衣老人)은 얼굴 반쪽에 시커멓게 탄 자국이 있 어 모든 사람을 섬뜩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그는 성성한 백발을 허리까지 늘어뜨린채 두 눈과 코는 마치 독수 리를 연상하게 했으며 왼손에 괴형의 흑도(黑刀)를 들고 있었다. 두 번째 노인, 그는 오 척 단구의 작은 키에 적의(赤衣)를 입은 노인으로 그의 몸은 키에 비해 대단히 뚱뚱했다.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 노인의 등에는 자신의 몸 만 큼이나 큰 커다란 가죽 주머니를 메고 있었다. 세 번째 노인은 체격이 팔 척은 됨직한 우람한 노인이었고 그 노 인의 모습 또한 괴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머리는 완전히 금발(金髮)이었고 두 눈은 짙은 녹색인데다 피부는 기이할 정도로 희었다. 마지막 노인은 채의를 걸친 깡마른 노인이었는데 두 눈은 뱀을 연 상할 정도로 가늘게 찢어진 채 음산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피 부는 괴이쩍게도 청동색 빛을 띄고 있었다. '으음, 드디어 수라궁의 주력(主力)이 모두 등장했구나.' 무영종은 침중한 표정으로 그들을 응시했다. 이때 수라혈신이 기 이한 눈으로 군웅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노부가 누군지 아느냐?" 군웅들은 숨을 죽였다. 그러자 수라혈신은 일진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노부가 바로 수라혈신(修羅血神)이다." 군웅들의 안색이 변하며 크게 술렁거렸다. 그러자 조천명이 이를 갈며 진천마도를 치켜들었다. "흐으... 이제 보니 네 놈이 바로 수라궁의 궁주였구나." 수라혈신은 나직한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은 실로 듣는 사람의 전신이 오므라들 정도로 으스스 했다. 무영종의 오른쪽에 있던 천산비검옹 비간운이 문득 낮게 침음성을 터뜨렸다. "으음, 저 네 명의 노마들이 아직까지 살아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는데....... 수라혈신 저 자가 어떻게 저 네 명을 포섭했는지 모르겠군." 현광대사가 탄식했다. "아미타불... 산 넘어 또 산이라더니......." 무영종은 눈살을 찌푸리며 현광에게 전음을 보냈다. (현광사형, 저 네 명이 누구길래 그러십니까?) 현광대사의 안색이 굳어졌다. (아미타불... 소사제, 나의 말을 잘 들어보게. 저 네 명의 노인은 모두 백 년 이전에 강호무림을 진동시켰던 대마두들이라네.) '백 년!' (오른 쪽에 있는 마의노인은 지옥도(地獄刀) 사천무(史天武)란 인 물로 현재 나이가 백오십이 넘는다네. 그는 과거 대파산(大巴山) 에서 적봉우사(赤鳳羽士)의 감리신공(坎離神功)에 의해 얼굴이 저 렇게 타버린 것이라네. 저 자의 마음은 흉악하기 이를 데 없고 잔 인하기가 천하에 짝을 찾기 힘들 정도라네.) 무영종은 낮게 신음성을 발했다. (그 옆의 왜소한 노인 역시 사천무 못지 않는 대마두일세. 그는 벽력천마(霹靂天魔) 갈영비(葛影非)란 자인데 백 년 전 화공(火 功)의 제일인자로 그 명성이 하늘을 찌르던 인물이네. 그리고 금 발의 괴노인은 천절금마(天絶金魔) 서염무(徐焰茂)란 자로 백 이 십 년 전 서역(西域)의 마교인 마라혈교(魔羅血敎)의 제일고수이 자 서역의 최대마존이라네.) '마라혈교?' (마지막 채의노인은 나이가 거의 이백 세에 가까운 노마일세. 과 거 백오십 년 전 음혼혈마(淫魂血魔) 영호풍(令弧風)이라면 희대 의 색마(色魔)로써 무림의 아녀자들에게 공포의 상징이었네. 그는 온갖 음양비술(陰陽秘術)에 능통하여 여인의 음기를 취해 내공(內 功)을 높인 자로, 저 노마의 공력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네.) 현광대사는 탄식했다. (그런데 백 년 전 천뢰사숙에게 패해 사라졌던 저 노마가 다시 나 타나다니! 아미타불.......) 무영종은 가슴이 서늘해짐을 금치 못했다. '그렇게 늙은 노마들이 아직도 살아 있다니.......' 그는 더욱더 수라궁주인 수라혈신에게 의혹과 괴이함을 느꼈다. '수라혈신. 저 자는 대체 어떻게 해서 저 무서운 마두들을 모두 포섭했단 말인가?' 수라혈신은 나직한 괴소를 터뜨렸다. "크흐흐흐... 지금 시간은 정확히 오시(午時)다. 그러나 저 태양 이 지기 전에 너희들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통천마군 흑고가 코웃음을 쳤다. "흥! 수라혈신! 그 뼈다귀같은 늙은 놈 몇 놈을 믿고 까불지 마 라! 흐흐흐... 나 흑고는 저런 놈들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다." 수라혈신은 다시 으스스한 괴소를 흘렸다. "흐흐흐... 통천마군 흑고, 네가 조금 전 뱉아낸 그 말은 아마 너 의 마지막 망언(亡言)이 될 것이다." 이제껏 묵묵히 그를 노려보고만 있던 위전풍이 차갑게 말했다. "수라혈신, 아니 석기량(石奇亮), 가증스럽다! 명문(名門) 석가 (石家)의 빛나는 명성에 온통 네가 먹칠을 하는구나!" 그 말에 군웅들은 대경실색했다. "석... 석기량이라니?" "석대선생(石大先生)!" 군웅들은 크게 술렁거렸다. 수라혈신은 앙천광소를 터뜨리며 얼굴을 가리고 있던 면사를 벗었 다. 그러자 인자하기 짝이 없으며 두 눈에 혜광(慧光)이 빛나는 구순 가량의 노인의 얼굴이 나타났다. "크핫핫핫핫...! 좋다, 위전풍. 목숨을 살려 주었더니 이제는 은 혜를 그 따위로 갚는구나." "아니, 저런! 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군웅들은 드러난 수라혈신의 얼굴을 보고 아연실색을 금치 못했 다. 그들은 마치 믿었던 도끼에 발등이 찍히는 참담한 기분을 맛 보아야 했다. 복건성의 석가(石家). 그 얼마나 찬란한 명성을 누려온 무림의 명 문(名門)인가? 비록 사대세가(四大世家)에 들지는 않았어도 오히 려 사가를 능가하는 명성을 누려온 석가였다. 특히 석대선생 석기량은 그 명성이 만사(萬事), 귀곡(鬼谷)과 함 께 뛰어난 지혜로 널리 알려져 있어 무림의 존경을 한 몸에 받지 않았는가? 그런데 분명 금마비(金魔匕)에 의해 살해된 그가 살아서 그것도 수라궁주가 되어 있다니 실로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군웅들은 모두 의혹과 불신, 그리고 분노와 경악에 치를 떨었다. 천수겁천 당환성이 이를 갈며 외쳤다. "석기량! 네 놈이 진정 이럴 수가 있단 말이냐?" 수라혈신, 즉 석대선생 석기량은 음산하게 웃었다. "후후후... 당환성, 입을 닥쳐라. 속은 너희들의 어리석음을 탓해 라." 군웅들은 분노하여 여기저기서 욕설을 퍼부었다. 이때 무영종이 나섰다. "여러분. 잠깐만 진정하시오!" 군웅들은 금새 입을 다물었다. 무영종은 석기량을 주시하며 담담 히 물었다. "석대선생, 아니 수라혈신께 소생이 한 마디 묻겠소." "흐흐... 얼마든지 물어 봐라." "당신은 한 달 전 석가에서 죽지 않았소?" 석기량은 음산하게 비웃었다. "흐흐흐... 목이 달아나고 없는 시신을 구해 노부라고 알렸을 뿐 이다." 무영종의 고요한 눈에 언뜻 살기가 떠올랐다. "석대선생. 금악비의 금마비가 아무리 무섭다해도 만사(萬事)는 쉽게 그에게 당하지 않을 것이오. 그렇지 않소?" 석대선생의 눈이 번쩍 빛났다. "흐흐... 네 말의 뜻을 알겠다. 물론이다. 호불귀는 결코 금마비 에 당한 것이 아니다. 그를 제거한 것은 바로 나, 아무리 어려서 부터 친분이 있었다지만... 흐흐... 자칭 만사인 그가 어리석게도 나를 너무 믿었었다." 곁에서 그 말은 들은 호불범은 충격을 받고 쓰러질 듯 몸을 비틀 거렸다. "아아......." 군웅들이 오히려 더 분노하여 치를 떨었다. "저런, 파렴치한 놈!" "전 무림을 우롱한 것도 모자라 친구를 배신하고 살해하다 니......." 그러나 석기량은 가책은 고사하고 살기띈 얼굴로 장내를 둘러 보 았다. "흐흐흐... 너희들은 전체 정사무림의 반(半)에 해당된다. 그러니 너희들만 모두 제거하면 전 무림의 반을 장악한 것이나 다름이 없 다." 구주진천도 조천명이 입가에 야릇한 냉소를 머금었다. "크흐흐... 우리들을 제거할 수 있을 것같으냐?" 석기량은 일진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하... 저 쪽을 보아라!" 군웅들은 그의 손길에 따라 고개를 돌렸다. "앗! 저... 저건!" 군웅들은 모두 안색이 새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천마봉의 사방에 엄청난 숫자의 청의무사(靑衣武士)들이 나타난 것이었다. 실로 헤 아리기조차 까마득할 정도로 그들은 천마봉 전체를 면밀히 포위한 채 살기등등하게 서 있었다. "하하하핫... 너희들의 숫자는 고작 백 오십 육 명, 우리는 이천 팔백 명이다. 자, 이래도 이길 자신이 있느냐?" 군웅들의 안색은 질리다 못해 딱딱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팽천후는 코웃음을 쳤다. "흥! 저 따위 오합지졸은 이천팔백이 아니라 십만(十萬)이 덤벼도 겁나지 않는다." 그 말에 이제껏 음산한 표정을 짓고 있던 지옥도 사천무가 갑자기 부엉이 울음소리같은 괴소를 터뜨렸다. "크크크크... 오합지졸이라고 했느냐? 좋다, 그렇다면 오합지졸의 맛이 어떤지 보여주마!" 그는 품 속에서 하나의 검은 깃발을 꺼내 들었다. "지옥칠십이살(地獄七十二煞). 나타나라!" 휙! 휙! 휙! 휙---! 연이은 파공성과 함께 수십 개의 백영이 군웅들을 에워쌌는데 그 들은 모두 칠십 이 명의 백의복면인들이었다. 그들을 보며 무영종은 안색이 변했다. '저들은 바로 수라궁의 첫 번째 관문에 있던 자들이 아닌가?' 지옥도 사천무는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 이들은 노부가 백 년 전부터 고련시킨 이른바 지옥 의 귀객(鬼客) 지옥칠십이살이다!" 군웅들은 모두 아연실색했다. 지옥칠십이살이라는 이름부터가 웬 지 으시시했기 때문이었다. 지옥도 사천무는 뒤이어 음침하게 외쳤다. "얘들아! 저들에게 너희들의 진면목을 보여 주어라!"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우--- 우--- 아---!" 칠십 이 명의 지옥칠십이살은 일제히 장소를 터뜨렸으며 마의 괴 소성은 천마봉을 온통 뒤흔들었다. 그것은 실로 가공할 내공력으 로 개개인으로만 따져도 족히 백 년 수위에 이르고 있었다. 장소성이 터진 순간 그들의 몸에 걸쳐져 있던 백의와 백건은 모두 가루가 되어 날아가더니 그들의 감추어졌던 본신이 드러났다. ② 핏빛의 비늘(鱗). 그들의 전신은 오직 두 눈(眼)을 제외하고 핏빛 비늘로 된 갑옷 (甲衣)으로 덮여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괴수(怪獸)를 보는 기분이 들게 했다. 지옥도 사천무는 다시 광소를 터뜨렸다. "핫핫핫... 지옥칠십이살이여! 혈련마갑(血鍊魔甲)이 어떤 것인지 보여 줘라!" 쨍! 쨍! 쨍....... 귓청을 따갑게 하는 날카로운 금속성이 일제히 울려퍼졌고 지옥칠 십이살의 팔꿈치에서는 톱니가 번쩍이는 강륜(剛輪)이 솟아나왔 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손 끝과 발 끝에서는 독(毒)이 시퍼렇게 묻은 검(劍)이 튀어 나왔으며 또한 전신의 핏빛 비늘이 일어서더니 무 수한 독침으로 화하는 것이 아닌가? "앗! 군웅들은 모두 대경실색했다. "저... 저들은 인간이 아니다!" 정녕 지옥칠십이살은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들은 두 개의 눈 을 제외하고는 도무지 한 곳도 공격할 틈이 없는 그야말로 무시무 시한 상대인 것이었다. 수라혈신 석기량이 대소를 터뜨렸다. "핫핫핫핫... 너희들은 용케도 수라궁을 벗어났지만 이제 모두 이 곳에서 뼈를 묻어야 한다!" 석기량은 양 손을 번쩍 치켜들며 군웅들을 향해 쌍장을 들었다. 쿠르르릉....... 이어 죽음을 부르는 명령이 그의 입에서 떨어졌다. "모두 공격해라! 한 놈도 놓쳐서는 안 된다!" 지옥칠십이살, 수라궁의 팔대당주를 비롯한 마두들, 게다가 이천 팔백 명의 청의무사....... 그들은 일제히 군웅들을 향해 공격을 개시했고 드디어 대혈전(大 血戰)이 벌어졌다. 난무하는 장풍, 병장기 부딪치는 금속성과 경천동지의 회오리, 그 리고 피(血), 피, 피....... 연이어 꼬리를 무는 단말마의 비명, 또 비명....... 마침내 천마봉은 죽음(死)의 지옥으로 화하고 말았다. 아비지옥(阿鼻地獄)이 바로 이곳인가, 구천지옥대제(九天地獄大 帝)인 염왕(閻王)조차 이곳에 이르러서는 얼굴을 가리리라! 피의 난비와 인육(人肉)이 뒤엉키는 가공할 혈전장은 인세(人世) 의 일대 참경을 이루는 듯 했고 군웅들은 살아남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천군맹의 맹주인 구주진천도 조천명, 그는 지옥도 사천무와 무시 무시한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내공에서는 단연 사천무가 위였으나 구주진천도의 도법(刀法)은 초식에서 오히려 위력이 강했다. 차차-- 창---! 두 사람은 한데 엉켜 하늘도 놀라고 땅도 흔들릴 대결전을 전개했 다. 실로 막상막하의 형세였다. 선풍마서생 위전풍은 음혼혈마 영호풍과 붙고 있었는데 실상 전대 의 노마두와 이제 갓 사순에 이른 위전풍과는 서로 비교할 대상조 차 되지 않았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위전풍의 선법(扇法)은 기괴막측하고 변화 가 다양해 음혼혈마와 거의 백중지세를 이루는 것이 아닌가? 그것 은 실로 예기치 못했던 뜻밖의 현상이었다. 촤라라--- 락! 부챗살이 활짝 펼쳐질 때마다 화살같은 경기가 뻗쳐 음혼혈마의 전신대혈을 뒤덮었다. 반면 음혼혈마는 가공할 장력으로 위전풍을 몰아치고 있었다. 검제 남궁진강. 그는 백골사마와 불꽃 튀는 접전을 벌이고 있었고 팽천후 또한 팔대당주 중 음풍당의 당주인 호천광과 막상막하의 혈전을, 그리고 천수겁천 당환성은 독혈당주인 오독비마 구우령과 독공(毒功) 대 독암기로 끔찍한 격전을 전개했다. 사해신군 구양경은 벽력천마 갈영비와 결전을 벌였으며 나머지 군 웅들 역시 그밖의 마두들과 처절한 사투(死鬪)를 벌이고 있었다. 엄청난 격전의 소용돌이가 천마봉을 광풍으로 몰아넣었으나 군웅 들의 무공은 하나같이 지고했다. 사실 그들이 오백 인 중에서 지 금까지 살아남은 이유가 무엇인가? 오직 강한 자 만이 살아남는다는 비정한 무림의 철칙을 그들은 철 저히 입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계속되는 혈전에 이미 지칠 대로 지쳐가고 있었다. 특히 지옥칠십이살의 가공무비한 공격에는 피하기에만 급급할 뿐 감히 아무도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공격은 고사하고 군웅들은 지옥칠십이살의 몸에 스치기만해도 즉 사를 면치 못했다. 한편 무영종은 장내의 처절한 상황에 안면이 무섭게 일그러져 있 었다. 그는 내심 이를 악물며 부르짖었다. '이제 최후의 혈전이다. 더이상 망설일 필요는 없다. 설사 내 몸 이 찢어지는 한이 있어도 마도들을 뿌리째 소탕하고 말리라!' "으악!" 처절한 비명이 가까이서 들렸다. 무영종의 눈에 한 군웅의 목에 지도(紙刀)가 깊숙히 박혀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는 지도마살 마운천이 만면에 음산한 웃음을 흘리며 손가락 사이에 십여 개의 지도를 끼고 있었다. 무영종은 무한한 살심(殺心)이 솟구치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홱 돌려 관동삼괴를 향해 말했다. "삼괴, 그대들은 일체 싸움에 참견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호소협 을 보호하게!" "넷!" 이미 그를 신같이 우러러 보고 있는 관동삼괴는 대답과 동시에 재 빨리 호불범을 둘러쌌다. 휙! 무영종은 즉시 신형을 날렸고 번쩍 하는 순간 어느새 그는 지도마 살 앞에 내려서 있었다. 지도마살은 눈 앞에 환영처럼 무영종이 나타나자 흠칫했으나 곧 음흉하게 말했다. "네 놈도 나의 종이칼을 맞고 싶으냐?" 슈슈슉! 그는 한꺼번에 다섯 자루의 지도를 던졌으나 무영종은 냉소했다. "종이칼은 어디까지나 종이칼일 뿐이다." 파---팟! 은월도가 허공을 가르자 다섯 자루의 지도는 과연 종이장으로 화 해 흩날렸다. "헉!" 지도마살은 대경했으나 무영종의 은월도가 그 순간 무지개같이 뻗 었다. "서래범음(西來梵音)!" 불영구검(佛影九劍)의 제 오 초는 무지개빛 도광(刀光)으로 지도 마살을 휘감았다. 지도마살은 혼신의 힘을 다해 피하려 했으나 소 용없었다. "으... 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그의 오른팔이 날아가며 피를 뿌렸다. "탄지신통(彈指神通)!" 쉬잉---! 무영종의 일지(一指)가 뻗었다. "크악!" 소림 불문의 유일한 지법(指法) 탄지신통은 여지없이 지도마살의 이마 한 복판에 구멍을 뚫었고 지도마살은 이마 앞뒤로 피화살을 뿌리며 쓰러졌다. 처참한 악인의 말로였다. 그러나 다시 무영종의 등 뒤로 누군가가 패도적인 장력을 뿌리며 덮쳤다. 무영종은 빙글 몸을 돌렸고 그의 눈 앞에는 전신이 핏빛 비늘로 덮인 지옥칠십이살의 두 명이 서 있었다. 그들의 전신은 군웅들의 혈육으로 시뻘겋게 젖어 있었고 땅바닥에 는 오십여 명의 군웅들이 처참하게 짓이겨져 죽어있는 것이 보였 다. 무영종은 두 눈에서 불꽃을 튀기며 내심 처절하게 부르짖었다. '부처님이시여! 제자는 이제부터 정말로 살계(殺戒)를 열겠나이 다. 용서하소서!' 무영종의 입에서 웅후한 불문의 사자후(獅子吼)가 터져 나왔다. "우-- 우--- 우----!" 그 놀라운 사자후에 천마봉이 온통 흔들리자 하늘의 구름조차 흩 어지는 듯 했고 장내의 싸움은 일시간에 멈추었다. "천(天)과 불(佛)의 뜻으로 살심(殺心)을 억누르려 했건만 이제는 더이상 참을 수 없다. 모두 멸절시키리라!" 무영종의 입에서 터져나오는 쩌렁쩌렁한 외침에 수라궁도들과 군 웅들의 안색은 모두 크게 변했다. 그리고 곧 지옥살 두 명이 그에게 흉칙한 기세로 덤벼들었으나 무 영종은 피하지 않았다. '이환결! 탄공결! 유화결!' 그는 내심 이렇게 부르짖으며 불문의 최고무공인 반야밀다대승신 공을 극성으로 끌어 올렸고 지옥살 두 명은 정면으로 그와 부딪쳤 다. 쾅----! "크악! 큭!" 천번지복의 폭음과 함께 두 마디의 단말마가 터졌다. 그리고 지옥 살 두 명은 무영종과 부딪친 순간 전신이 폭발하듯 터져 날아가 버렸다. 놀랍게도 강륜, 검, 독침, 혈륜마강 등이 박살이 나고 그 속에 들 어있던 지옥살은 피떡으로 뭉개져 날아간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소림사 십팔나한들의 무시 무시한 합공(合攻)속에서 금강봉마저도 엿가락처럼 휘어버리게 만 들었던 무영종, 아니 하후성이었으므로. 아무리 지옥칠십이살이 무섭고 그들의 혈련마갑이 견고하다고 한 들 결코 무영종의 반야밀다대승신공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오오! 무대협이 저 정도일 줄이야......." 군웅들과 수라궁 인물들은 이 광경에 모두 입을 딱 벌리고 말았으 며 무영종의 활약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천하에서 가장 강한 것은 뇌(雷)의 힘(力)이다!" 그가 다시 이렇게 외치자 그의 쌍장에서 수십 갈래의 섬광(閃光) 이 뻗었다. "크--- 아--- 악!" 이번에는 한꺼번에 다섯 명의 지옥살이 시퍼런 섬광에 덮이더니 녹아 사라져 버렸다. 혈련마갑도 그 무엇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이유는 뇌음신공(雷音神攻)이 무서운 위력으로 그들을 영원히 지 상에서 녹여 소멸시킨 때문이었다. "와--- 아----!" 군웅들은 그 통쾌한 광경에 일제히 환성을 질렀고 삽시간에 그들 의 사기는 충천했다. 가라앉아 있던 용기가 백 배로 상승된 것이 었다. 혈전은 다시 전개되었다. 무영종은 종횡무진 수라궁도와 지옥칠십 이살을 격살시켰다. 그러는 사이 갑자기 누군가 그의 등 뒤로 접 근해 장력을 날렸다. 위--- 잉! '이환결!' 펑! 등에서 폭음이 터졌으나 무영종은 앞으로 십여 걸음 밀려났을 뿐 상처를 입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내심 매우 놀라고 있었다. '누가 이런 무서운 공력을?' 그는 몸을 홱 돌렸다. 그곳에는 수라혈신 석기량이 두 눈에 경악 을 담고 서 있었다. 석기량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설마 자신 의 일 장이 무영종에게 아무런 충격도 주지 못할 줄은 꿈에도 몰 랐기 때문이었다. "애송이 놈, 네 놈은 대체 누구냐?" "무영종." 무영종의 간단한 대답에 석기량은 안색을 일그러뜨리며 살기 띈 음성으로 물었다. "네 놈은 소림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무영종은 차갑게 외쳤다. "알 필요 없다, 이것이나 받아라!" 눈부신 금광(金光)이 뻗으며 무영종의 주먹에서 태산이라도 무너 뜨릴 듯 금강복호신권(金剛伏虎神拳)이 작렬했다. 석기량은 크게 놀랐으나 역시 자신도 전력을 다해 쌍장을 뻗으며 외쳤다. "발칙한 놈, 아수라비천마공(阿修羅飛天魔攻)이다!" '아수라비천마공!' 무영종은 안색이 변했다. ③ 꽝--- 꽈르르--- 릉---! 두 사람의 권력과 장력이 부딪치며 가공할 폭음과 함께 땅바닥을 일 장 깊이로 파헤쳤다. "우욱!" "윽!"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신음이 터졌고 석기량은 뒤로 주르르 밀 려났다. 그러나 무영종은 단지 두 걸음 물러섰을 뿐이었으며 수라 혈신 석기량은 이 일장의 대결의 결과를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 다. '천하에 이토록 강한 놈이 있다니!' 두 사람은 다시 맞붙었고 무영종은 소림칠십이종절예를 연달아 구 사했다. 펑--- 퍼--- 펑! 연이은 폭음과 함께 광풍같은 회오리가 일어났다. 수라혈신 석기 량은 무영종의 웅장하고 도도한 공격에 연신 뒤로 밀려났으며 이 마에 땀이 배기 시작했다. "어린 놈, 받아라!" 근처에 있던 고루혈마 곡우양이 혈장(血掌)을 날리며 싸움에 가담 했으나 무영종의 백보신권(百步神拳)이 그를 단 번에 십 장 밖으 로 날려 버렸 ? 콰쾅---! "크윽!" 곡우양은 늑골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는 것을 느끼고는 피를 뿌리 며 즉사했다. 무영종은 마침내 분노를 터뜨린 것이었고 그를 통해 천 년 역사의 소림무학이 가공할 위력으로 무림에 등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상 근 백 년 만의 일로 강호의 일반적인 인물 들이면 누구나 흉내낼 수 있는 평범한 소림의 권법 백보신권으로 일세의 대마두 고루혈마 곡우양을 일권에 즉사시킨 것이었다. "이, 이럴 수가!" 수라혈신은 두 눈을 찢어질 듯 부릅뜨며 공격을 개시했다. 뿐만 아니라 비천야차, 화의사신 등 팔대당주 두 명이 다시 무영종의 전후에서 가세했다. 삼대 일의 싸움이었다. 비로소 싸움은 백중지세를 이루게 되었으니 실로 무영종의 무학 은 개세적이었다. 그러나 군웅들은 수천 명의 수라궁도들에게 차례로 쓰러져 가고 있었고 특히 지옥칠십이살로 인해 더욱 처참하게 죽어가고 있었 다. 지옥칠십이살은 군웅들을 갈기갈기 찢었고 그 시체마저도 짓이겼 다. 그 광경에 무영종의 눈에서는 불길이 번져 나왔다. 그는 은 월도를 번쩍 치켜들며 외쳤다. "제천구도(濟天求道)---!" 불영구검(佛影九劍) 제 팔 초. "으--- 악!" 가공할 도광(刀光)이 천지를 뒤덮는 가운데 처절한 비명이 터졌고 비천야차 환우령과 화의사신 곡량은 전신이 산산조각이 되어 날아 갔다. "으헉!" 수라혈신 석기량은 간담이 얼어 붙었으나 공세를 더욱 급증 시켜 무영종을 몰아부쳤다. 이때 어디선가 다시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으아아... 악!" 벽력천마 갈영비의 불길을 뿜는 장력이 사해신군 구양경을 불덩어 리로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 구양경은 땅바닥을 데굴데굴 굴렀으며 근 백여 번을 구른 끝에야 간신히 몸에 붙은 불을 끌 수 있었다. 그러나 벽력천마 갈영비는 계속 쌍장으로 시뻘건 불기둥을 뿜어내며 군웅들을 마구 주살하고 있었다. 사해신군 구양경은 눈에 핏발을 세우며 수중의 유성추를 날렸다. 위--- 잉! 펑! "으윽!" 벽력천마는 어깨에 유성추를 맞았다. 그곳에서 피와 살점이 튀자 곧 그의 눈에서 화염이 무섭게 이글거렸다. 그는 설마 구양경이 되살아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크흐흐... 이 놈, 명이 꽤 끈질기구나! 이번에는 나 벽력천마의 화신(火神)을 보여주마." 그는 어깨에 메고 있던 자루를 꺼내더니 주둥이를 열었다. 그 순 간 엄청난 광경이 벌어졌다. 화르르릉......! 자루 속에서는 강맹한 불기둥이 뻗쳐나왔다. "앗!" 자루에서 뻗쳐 나온 불덩이는 근 삼 장(三丈) 크기로 괴이하게도 인간의 형태를 이루어가고 있었다. 화신(火神), 그야말로 불의 신이었다. "으하하하... 화신이여! 모두 태워버려라!" 휘류류류--- 륭---! 불기둥은 벽력천마의 주문에 의해 군웅들을 휩쓸었고 군웅들은 삽 시간에 불덩이가 되어 뒹굴었다. "크으... 이, 이럴 수가!" 구양경은 치를 떨었으며 동시에 등 뒤에서 자신의 명성을 지켜온 철마궁을 꺼냈다. 위--- 잉! 드디어 철마전이 날아갔다. 그것은 불기둥의 중심을 정확히 꿰뚫 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황하의 흐름도 멈춘다는 가공할 위력의 철마전 이라지만 한낱 형체도 없는 불(火)은 꿸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 것은 속절없이 허공으로 날아가고 말았다. "으으으... 이 놈!" 구양경은 이번에는 유성추를 날렸다. 윙---! 그러나 유성추는 불기둥에 닿는 순간 흔적도 없이 녹아버리고 말 았다. 벽력천마는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화신(火神)은 천하무적이다! 으하하하... 죽여라, 태워라!" 휘류류류---륭! "으--- 악!" 군웅들은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며 불덩이가 되어 뒹굴었으며 이제 그들의 숫자는 불과 칠십여 명으로 줄어들어 버렸다. 실로 처참한 결과였다. 사해신군 구양경은 만면에 처절한 표정을 지으며 뒤를 향해 외쳤 다. 그의 뒤에는 그를 평생 수족같이 따르던 황하이괴(黃河二怪) 가 있었다. "이괴! 앞으로 황하칠십이채는 너희들이 관장해라!" 황하이괴는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아니, 총표파자님!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러나 구양경은 이미 이를 부드득 갈며 몸을 날리고 있었다. "죽어라, 벽력천마!" 그는 마침내 육탄 공세까지 불사했다. 그러나 벽력천마는 냉소를 지으며 그를 향해 화신을 날렸다. "태워라!" 휴류류-- 륭---! "크악!" 구양경은 역시 불덩이에 뒤덮혔다. 그러나 불덩이가 된 채로도 그 는 쓰러지지 않았다. 다만 잠시 비틀거렸을 뿐 그는 벼락 같이 몸 을 날려 벽력천마를 끌어 안았다. "윽! 이 놈이?" 휙---! 구양경은 그를 힘껏 끌어안고 몸을 솟구쳤다. 수라궁을 감싸고 있 던 검푸른 호보하의 물결을 향하여....... 풍---덩! 불덩이가 된 구양경과 벽력천마 갈영비는 그대로 호보하의 검푸른 호수에 빠졌다. 푸시시시식....... 물이 부글부글 끓으며 흰 김이 뭉클 솟아 올랐다. "크아아악!"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벽력천마 갈영비는 그대로 온 몸이 산산조 각으로 터지며 폭발을 일으켰다. 촤악! 그의 골육(骨肉)의 파편들이 피보라를 일으키며 수면 위에 뿌려졌 다. 천하 화공(火攻)의 극성은 바로 물이 아닌가. 따라서 그는 호 보하에 빠진 순간 내공이 파괴됨은 물론 분사(分死)를 면치 못했 다. 그가 죽자 군웅들을 휘감던 불기둥도 삽시에 환영(幻影)처럼 팍 꺼져 버렸다. 마치 벽력천마 갈영비의 혼(魂)이기라도 했던 듯 이....... 그러나 그것은 무슨 사술(邪術)이 아니라 벽력천마의 화공(火攻) 의 결정체, 즉 화정(火精)으로써 내공에 의해 그의 뜻대로 움직였 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본신을 잃자 자연히 화정도 소실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 은 사해신군 구양경이 장렬하게 자신을 던져 이루어낸 결과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숭고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군웅들은 처참지경에 처해 있었다. 이천 명이 넘는 수라궁도와 지옥칠십이살에 의해 거의 전 멸상태였으며 그나마 살아있는 자들은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채 악전고투하고 있었다. 무영종은 이를 갈았다. "만(萬)... 불(佛)... 광(光)... 휘(煇)!" 마침내 불영구검(佛影九劍)의 최후 초식이 발출되었다. 파-- 파-- 팟----! 천지는 온통 도광의 눈부신 광휘에 뒤덮히고 있었다. "크--- 으--- 악!" 무려 사방 십 장 안에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단말마가 터졌다. 삼 십여 명의 청의무사와 일곱 명의 지옥살이 산산조각이 되어 피보 라로 흩어졌다. "크큭!" 수라혈신 석기량 또한 참담한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렸다. 그의 전 신은 옷과 살갗이 난도질당한 듯 갈라 터져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 다. 무영종의 일신에 걸쳐진 백의도 무참할 정도로 갈기갈기 찢겨 있 었다. 그러나 반야밀다대승신공으로 인해 그는 이렇다하게 다치지 않았을 뿐더러 우뚝 선 채 냉혹한 시선으로 장내를 돌아보고 있었 다. 수라혈신은 두 눈에 무서운 흉광을 폭사하며 품 속에서 한 자루의 괴검(怪劍)을 꺼냈다. 그것은 검신이 넓고 길이가 두 자밖에 되지 않는 푸른 색 검으로 수라혈신은 문득 기이한 발출자세를 취했다. 마치 그의 몸 전체가 갑자기 하나의 검으로 화한 듯했다. 무영종은 안색이 대변했다. '저 자세는!' "애송이 놈! 영멸수라혼(永滅修羅魂)을 받아라!" 수라혈신의 살기띈 외침이 터진 순간이었다. 우--- 우--- 웅! 가공할 검기가 노해처럼 수라혈신 석기량의 몸 전체에서 일어났 다. 무영종은 아연실색했으나 곧 합장했다. 그것은 범자대비공(梵 慈大悲攻)의 자세였다. 소림 칠십이종절예 중 여섯 번째로 강한 무공의 기수식을 취한 것이었다. 마침내 두 가공할 공력이 하늘과 땅 사이에서 맞부딪혔다. 꽈--- 꽈-- 꽝--! "으윽!" 수라혈신은 전신이 터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뒤로 튕기 듯 붕 떠올 랐고 무영종 또한 어깨가 불로 지지 듯 화끈함을 느꼈다. 피가 화살처럼 어깨에서 치솟았으나 무영종은 너무나 놀라 지혈시 키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영멸수라혼! 이것은... 과거 황(皇)이 익히던 수라구마검(修羅九 魔劍) 중 마지막 초식이 아닌가? 그런데 어째서 이 자가.......' 뒤이어 그는 얼마 전 수라혈신 석기량이 아수라비천마공을 쓴 것 도 기억해냈다. '그 무공도 분명 그때 황의 거처에서 본 수라혈경(修羅血經) 속에 기재된 것이다. 대체, 대체.......' 무영종은 넋을 잃고 있었으나 반면에 사오 장 밖에 내려선 수라혈 신은 만면에 경악의 표정을 띄우고 있었다. '쇠를 무우 베듯 하는 이 수라마검에도 놈이 끄덕없다니, 고작 한 치의 살을 갈라냈을 뿐이라니.......' 그러나 그는 곧 이를 부드득 갈았고 수라마검을 휘두르며 음산하 게 외쳤다. "모두들 마지막 총공격을 가해라!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주살해 라!" 그러자 수천 명의 수라궁도들은 더욱더 흉맹한 기세로 군웅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풍전등화의 운명에 군웅들은 절망을 느꼈다. '틀... 렸다. 이젠 끝장이다.......' 마침내 그들은 전신에 힘이 빠져 버렸다. 이때였다. 문득 하늘 높 이 불꽃이 솟아오르며 폭죽이 터졌다. 펑! 퍼펑! 펑! 연이어 사방에서 청색의 폭죽이 터지고 있었다. "와--- 아--- 아----!" 그와 동시에 천마봉 아래로부터 엄청난 함성이 울려 퍼졌다. 그것 은 최소한 천 명 이상이 동시에 내지르는 듯한 함성이었다. 혈전을 벌이고 있던 군웅들과 수라궁도들은 모두 경악했다. 어디 서 나타났는지 수많은 인물들이 천마봉으로 올라와 수라궁의 인물 들을 주살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또다시 피, 피....... 피의 행진이 이어졌다. 삽시에 피가 대하(大河)를 이루며 천마봉은 다시 아수라의 전장 (戰場)으로 화하고 말았다. ■ 대소림사 제3권 제28장 눈(雪)....... 운명(運命)의 재회(再會) -1 ━━━━━━━━━━━━━━━━━━━━━━━━━━━━━━━━━━━ ① 뜻밖의 대격변이 아닐 수 없었다. 천마봉을 뒤덮는 함성과 난비하는 인영들 속에 갑자기 나타난 이 천이 넘는 무림인들이 바야흐로 수라궁도와 어울려 경천동지의 대 혈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구주친천도 조천명은 하늘을 우러르며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으핫핫핫핫핫...! 천군맹(天群盟)의 형제들이여! 수라궁 놈들을 마음껏 쳐부숴라!" 그들은 바로 천군맹의 고수들이었다. "이, 이런 낭패가 있나?" 수라혈신 석기량은 이 갑작스런 변화에 기겁을 했으나 사태의 급 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아미타불---!" 천지가 진동하는 웅후한 불호성이 다시 천마봉을 뒤흔드는가 싶더 니 이번에는 천마봉 위로 회의승복에 선장(禪杖), 계도(戒刀), 방 편산 등을 든 백 여명의 승려들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그들의 맨 앞에는 외팔이의 한 노승이 서 있었는데 비스듬히 검상 (劍傷)이 그어진 냉막한 얼굴의 그는 바로 소림의 계도원주인 현 각대사였다. 현광대사가 그를 알아보고 반색을 했다. "오! 현각사제......." 현각대사는 냉막한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소매를 떨쳤다. 그 러자 그의 손에는 어느새 핏빛의 괴병기인 혈옥척(血玉尺)이 들려 졌는데 그것은 그가 속가시절에 무수한 피를 묻힌 살인병기였다. 현각은 혈옥척을 치켜 올리며 냉랭하게 외쳤다. "백팔나한진(百八羅漢陣)을 전개하라!" 백여 명의 승려들은 바로 백팔나한이었다. "아- 미- 타- 불---!" 백팔 명의 승려는 일제히 사자후가 실린 불호를 외웠고 드디어 천 년소림 최강의 진법인 백팔나한대진이 펼쳐졌다. 무림사상(武林史上) 단 한 번도 와해된 적이 없었던 백팔나한진은 물결처럼 파랑치며 포진했으며 군웅들을 주살하던 지옥칠십이살은 눈 깜짝할 사이에 나한대진 속에 갇히고 말았다. 위--- 이--- 이--- 잉----! 하늘도 놀라고 땅도 흔들리는 가운데 백팔나한진과 지옥칠십이살 이 마침내 공전절후의 대격돌을 벌이기 시작했다. 현광대사는 쓰러지기 일 보 직전인 군웅들에게 외쳤다. "아미타불...! 여러분, 이곳은 저들에 게 맡기고 어서 탈출합시 다!" 군웅들은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며 새로운 힘이 솟아났다. "차앗, 비켜라!" 군웅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수라궁도들을 주살하며 천마봉을 벗어 나기 시작했다. 이를 본 수라혈신이 길길이 뛰며 악귀처럼 부르짖 었다. "막아라!" 그러나 더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군웅들의 단결된 힘은 삽 시간에 포위망의 일각을 무너뜨렸고 특히 무영종은 군 促湧 선두 에 서서 닥치는 대로 은월도를 휘둘러 수라궁도들을 주살했다. 가히 놀라운 무위였으며 지금까지 그의 손에 쓰러진 자는 이루 헤 아릴 수조차 없었다. 이윽고 포위망이 뚫리고 군웅들은 한 덩어리 가 되어 천마봉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수라혈신은 이를 부드득 갈며 외쳤다. "절대로 벗어나지 못한다! 수라궁에 한 번 들어온 이상 나갈 생각 은 꿈에도 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발악은 이제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었다. 천마봉 기슭. 군웅들은 모두 탈진해 있었다. 무사히 수라궁의 포위망을 뚫고 나 온 직후라 일시에 긴장이 풀린 탓이었다. 더우기 대부분의 군웅들 이 중상을 입은 지라 만일 적진(敵陣)이 아니라면 벌써 쓰러지고 도 남았을 것이다. 휙! 휙! 휙---! 문득 옷자락 나부끼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며 군웅들 앞에 수십 명의 인물들이 출현했다. 나타난 인물 중 맨 앞에 선 자는 백발의 금의노인(金衣老人)으로 그는 위풍당당한 체격에 정광(正光)이 넘치는 구순 가량의 인물이 었다. 이때 군웅들 틈에서 천산비검옹이 기쁨의 탄성을 터뜨리고 있었 다. "아니! 주형(朱兄)이 아니시오?" 그제서야 군웅들도 모두 질세라 환성을 질렀다. "아, 주청산(朱靑山) 노성주(老城主)!" 나타난 백발노인이야말로 무림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일 성 (一城), 즉 중원무성(中原武城)의 노성주인 중원신군(中原神君) 주청산(朱靑山)이었으며 그를 따르는 사십여 명의 고수들은 모두 중원무성의 핵심고수들이었다. 중원무성 주청산은 군웅들을 향해 창노한 음성으로 말했다. "여러분, 추적자들은 우리가 막을 테니 어서 밑으로 내려가시오!" 그 말에 이어 주청산은 손을 흔들었고 여기저기서 속속 오백여 명 의 인영이 나타났다. 군웅들은 그들을 보자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오백여 명의 인 영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당금 구파일방(九派一幇)의 절정고수들이 었기 ㏏潔駭? 팽천후가 격동하여 말했다. "오오! 드디어 중원의 힘이 수라궁을 꺾게 되었소." "마(魔)의 십 일(十日)... 마침내 우리는 승리할 것이오!" 검제 남궁진강도 흥분한 표정이었고 현광대사는 군웅들에게 말했 다. "자, 여러분. 그럼 이곳은 주성주께 맡기고 내려 갑시다." 한편 무영종은 충격을 받고 있었다. '주청산.......' 그는 몸을 부르르 떨며 중원무성의 노성주인 주청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 노인이 바로 나의 외증조부란 말인가?' 무수한 갈등과 격동이 그의 마음 속에서 마구 들끓었다. '아버님으로 하여금 평생 불행한 삶을 살게 했을 뿐 아니라 결국 죽음으로까지 인도한 분이 바로 저 노인이란 말인가.......' 무영종이 거센 격랑으로 좌초를 겪고 있을 때 곁에 있던 위전풍이 전음으로 말했다. (하후형, 모두들 떠났소. 우리도 어서 내려 갑시다.) 무영종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갑자기 모든 것이 허 망한 느낌으로 그의 가슴에 번졌다. 그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려 가야지요......." 그의 힘없는 말투에 위전풍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무영종은 다시 한 번 주청산을 응시하더니 한 차례 긴 탄식을 발하고는 몸 을 날렸다. 중원신군 주청산은 그곳을 떠나는 군웅들의 뒷모습을 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휴우....... 오백 인 중에 살아남은 사람이 고작 저들 오십여 명 뿐이란 말인가......." 주청산의 노안에는 어두운 그늘이 깔렸다. 이때 산모퉁이에서 한 채의 가마가 나타났다. 그것은 네 명의 건장한 남의무사가 메고 있는 작고 정교한 가마였는데 가마의 주렴 속에서 아름답기 그지 없는 여인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주 노선배님, 고수들을 모두 배치시키셨나요?" 주청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종리(鍾里) 소저, 걱정 말게. 이미 천마봉 기슭에는 최소한 이천 명의 정사 각 파 고수들이 매복하고 있네." 주청산은 말을 마치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가마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종리소저, 무엇 때문에 부친을 피했는가?" 가마 속에서 나직한 한숨이 들려왔다. "아버님으로 하여금 공연한 걱정을 끼쳐드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 지요." "음......." 주청산은 침중한 신음을 발하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하늘을 바라보 며 말했다. "아무튼 종리소저의 뛰어난 안배와 지략이 없었다면 무림은 진정 끝장날 뻔 했네." 가마 속에서 겸양의 차분한 음성이 들렸다. "제가 아무리 현명하다고 해도 무림 정사 양도의 군웅들을 한꺼번 에 영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주 노선배님이 없었다면 어찌 이 같은 대업을 이루었겠습니까?" 그 말에 주청산의 노안에서 무서운 결의가 번쩍였다. "종리소저, 이번 기회에 수라궁을 깨끗이 쓸어버리는 것이 어떻겠 나?" "안 됩니다." 가마 속에서 잔잔한 음성이 들렸다. "왜냐면 수라궁의 궁주는 이번 혈겁의 진정한 원흉이 아니기 때문 입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인가?" 주청산의 안색이 대변했다. "진정한 원흉은 아직 나타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럼 그는 어떤 자인가?" "그가 누구인지는 저도 모릅니다. 그 자는 천혈성(天血星)의 마성 (魔星)을 타고난 자로서 수라궁주는 단지 그가 거느린 오대마성 (五大魔星)중의 일인에 불과합니다." 주청산은 안색이 홱 변했 다. "그럴 수가!" 한편 군웅들은 마침내 천마봉을 완전히 벗어났다. 그들은 전신에 기력이라곤 한 올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으나 쉬지 않고 달려 해가 서녘으로 질 때에는 천마봉에서 오십여 리나 떨어지게 되었 다. "휴......." 그들은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어느 정도 안심이 되 었던 때문이었다. 휙! 휙! 휙....... 다시 몇 줄기 인영이 나타나는 바람에 군웅들은 흠칫 놀라는 표정 을 지었다. 나타난 자들은 다섯 명의 금의무사(金衣武士)들로써 가슴에는 모 두 무(武)자가 새겨져 있었다. "여러분. 저희들을 따라 오십시오." 그들 중 우두머리인 듯한 중년장한이 정중히 포권하며 말했다. 팽 천후가 의아하여 물었다. "그대들은 누구요?" 중년장한은 정중히 대답했다. "저희들은 중원무성의 무사들입니다. 성주님의 명령으로 여러분을 위해 마차를 준비해 놓았습니다." "아아!" 군웅들은 안도의 탄성을 발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들의 복장은 중원무성 특유의 것이었고 실제로 군웅들은 모두 중상을 입어 운 신하기가 불편했던 차였다. "자, 저희를 따라 오십시오." 중년장한의 말에 군웅들은 모두 희색을 띄며 따라 나섰고 잠시 후 산로에 이르자 십여 대의 건장한 말이 이끄는 사두마차(四頭馬車) 가 대기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마부석에는 각기 두 명씩 금의무사가 앉아 있었는데 그들은 틀림 없는 중원무성의 무사들이었다. "오오!" 군웅들은 환성을 발했고 금의청년무사는 정중하게 군웅들에게 말 했다. "여러분, 어서 마차에 오르십시오. 이미 노성주님의 안배로 비밀 리에 쉴 곳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군웅들은 한결같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과연 무림을 군림하는 중원무성답다. 치밀하고 완벽한 준비구 나.' 모두들 이렇게 생각하며 차례로 열 대의 마차에 오르기 시작했다. 금의 중년무사는 무영종이 묵묵히 서 있는 것을 보자 정중히 말했 다. "대협도 오르십시오." 그러나 무영종은 멀리 아스라히 신비로운 구름에 가려있는 천마봉 을 응시하며 침중하게 말했다. "나는 상처가 대단치 않으니 걱정마시오." "그래도......." 중년무사는 한 번 더 권유했다. "괜찮소. 다른 분이나 호송하시오." 중년무사는 걱정스럽다는 듯 그를 바라 보았는데 가까이에서 위전 풍 또한 다른 무사의 권유를 받고는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나도 오르지 않겠소, 상처가 대단치 않소." 소림의 현광과 정혜도 말했다. "아미타불... 우리들도 남겠소이다." 마침내 군웅들이 모두 마차에 오르자 남은 사람은 무영종을 비롯 하여 위전풍과 그의 아내인 빙혈미인 고설한, 그리고 현광대사와 정혜 등 다섯 사람이었다. "자, 그럼......." 금의중년무사가 그들에게 포권했다. 따가닥, 따가닥....... 마차는 신호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고 맨 뒤에 출발한 금의 청년무 사는 한 번 더 그들을 바라본 뒤 떠났다. ② 산로에 남게 된 다섯 명은 모두 침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잠시 후 위전풍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정말 이번 수라궁의 일은 하후형이 아니었다면 큰일날뻔 했소." 하후성, 즉 무영종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지 금 수라궁주인 수라혈신이 쓴 무공에 대한 풀 수 없는 커다란 의 혹과 외증조부인 주청산의 등장 등으로 머리가 너무 복잡하여 그 어느 것도 깊이 생각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런데 이때 엄청난 광경이 벌어졌다. 그들의 눈에 아스라히 보이는 천마봉 정상이 갑자기 엄청난 대폭 발을 일으키며 하늘 높이 화염과 연기, 그리고 흙덩이를 솟구쳐 낸 것이었다. 꽝--- 콰르르-- 릉---! 어마어마한 대폭발로 수라봉 전체가 허물어질 듯이 흔들렸으며, 그곳에서 오십 리나 떨어진 무영종 일행이 있는 곳까지 지축이 울 렸다. "아, 아니!" 일행은 대경실색했다. 그때 무영종은 그들에게 다급히 말했다. "여러분! 여기 기다리십시오, 소생이 다녀 오겠습니다." 위전풍도 따라 나섰다. "하후형, 나도 가겠소!" 그러나 무영종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위형은 부인이나 치료하시오." 그의 몸은 즉시 전광석화처럼 천마봉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 광경에 위전풍은 탄성을 발하며 말했다. "아! 하후형은 정말 기인(奇人)이오. 현 무림에 저런 기인이 있다 는 것은 크나큰 다행이오." 정혜는 미소지으며 부언했다. "소사숙님은 천고의 기재이십니다. 아마 무림사상 최대의 기인이 되실 것입니다." 그 말에 위전풍의 안색이 약간 변화를 일으켰다. '어쩌면 독고황... 그의 상대는 하후형 밖에 없을 지도 모른다.' 그는 마음이 침중해졌으나 내색치 않고 아내 고설한을 돌아다 보 았다. "설한, 상처 좀 봅시다." "네." 고설한은 얼굴에 홍조를 띄우며 나직히 대답했다. 한편 중원신군 주청산은 군웅들을 보낸 뒤 천마봉에서 내려올 수 라궁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그들을 협공할 모든 준비가 완 벽하게 끝난 상태였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천마봉에서는 아무도 내려오지 않았고 수 라궁도들은 물론 천군맹의 고수들과 소림사의 승려들조차 소식이 없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그가 점차 커다란 의혹과 함께 불안을 느끼고 있을 때 어디선가 한 줄기 미풍이 불어왔다. 스스스....... 주청산은 흠칫 놀라며 뭔가 괴이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그 바람이 절대 평범한 바람이 아니라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이, 이것은?' 나직하면서 담담한 음성이 바람결을 타듯 들려왔다. "허허허... 석기량은 정말 노부를 실망시키는군. 그의 능력이 그 정도밖에 안 될 줄은 몰랐는걸?" 그러자 잔잔한 늙은이의 음성이 그 말을 받았다. "그의 능력이 모자란 게 아닙니다. 만약 이번에 한 인물만 없었다 면 그는 충분히 승리했을 것입니다."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 "무영종(無影宗)이란 자입니다." 바람을 타고 다시 나직한 너털웃음이 들렸다. "허허허... 그것은 변명밖에 되지 않는다. 약자를 꺾어 이겨서는 진정한 승자가 될 수 없다. 강자(强者)를 꺾는 자 만이 진정한 승 자야." 주청산의 안색이 일변했다. 그는 도저히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목 소리의 방향을 구별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때로는 동쪽에서, ㄸ 로는 반대인 서에서, 그리고 남과 북으로 음성이 이동했기 때문이 었다. '천하에 이토록 경공이 빠른 자가 있단 말인가? 그것도 동시에 두 명이나?' 그는 흰 눈썹을 치켜올리며 중얼거렸다. '아니다, 이것은 경공술이 아니다. 이것은 마도(魔道) 최고의 음 공인 천리회풍전성공(天里廻風傳聲功).......' 놀람은 그뿐이 아니었다. 주위를 돌아다보던 그는 아연실색을 금 치 못했으니 그것은 어느새 자신의 주위에 있던 백여 명의 고수들 이 모두 뻣뻣한 나무토막처럼 굳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이럴 수가......." 주청산은 몸을 빙글 돌렸다. 그 순간 그의 귓전에 예의 음성이 들 려왔다. "허허허... 자네는 노부를 찾는가?" 휙! 주청산은 몸을 번개같이 돌렸다. 그의 눈 앞에 언제 나타났는지 두 명의 인물이 서 있었다. 그들은 사십 대의 준수한 청의 중년문 사(中年文士)와 이십칠팔 세 가량의 朱徨 흑의청년(黑衣靑年)이 었다. 흑의청년. 그는 위전풍이 수라궁 안에서 만난 적이 있었던 독고황 (獨孤皇)이었다. "너희들은 누구냐?" 주청산이 안색이 변해 외치자 청의의 중년문사가 가볍게 그를 나 무랐다. "허허허... 말이 좀 거칠군. 천하에서 노부에게 그렇게 거칠게 말 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는데?" 주청산의 눈에서 무서운 신광이 뻗쳤다. "수라궁의 잡배들이구나. 그렇다면 노부가 한 수 가르침을 청하겠 다." 우---- 웅! 그의 소매가 떨쳐진 순간 묵직한 공기의 진동음이 웅후하게 펼쳐 졌고 중년문사의 고요한 눈에는 가벼운 탄성이 빛났다. "오! 무당(武當)의 실전된 태청강기로군." 그러나 그가 가볍게 손을 젓자 주청산은 자신의 장력이 형체도 없 이 사라지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가슴에 무거운 압력을 느꼈다. "으윽!" 그는 뒤로 세 걸음이나 주르르 밀려났다. 그의 안색은 이미 더이 상 변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돌변해 있었다. '이럴 수가? 나의 이 갑자(二甲子) 내공을 이토록 가볍게 막아내 다니.......' 그러자 가마 속에서 한 가닥 옥음(玉音)이 울려나왔다. "주 노선배님, 조심하세요. 지금 상대가 쓴 것은 바로 마교(魔敎) 의 유가대법(瑜伽大法)입니다." 그 말에 중년문사는 안색을 가볍게 찌푸리더니 가마를 바라보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놀랍군. 노부의 일 장에서 그 근원을 찾아내는 인재 (人才)가 있었다니, 더군다나 여인의 몸으로." 그는 옆에 있는 흑의청년, 즉 독고황에게 물었다. "황(皇). 천하에서 이런 여인은 누구인가?" 독고황의 조용한 얼굴에 미소가 흘렀다. "있다면 오직 둘뿐입니다." 그는 담담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만사(萬事)의 손녀와 천풍보의 보옥(寶玉)인 종리유향(鍾里有香) 뿐입니다. 종리유향은 바로 귀곡(鬼谷)의 비밀제자이기 때문입니 다." "아!" 마차 안에서 가벼운 놀람의 탄성이 들렸다. 과연 마차 안의 여인은 바로 절음폐혈증을 앓고 있는 천하제일지 녀 종리유향이었고 실제로 그녀는 귀곡자(鬼谷子)의 제자였다. 그 러나 그 사실은 부친인 종리자허조차 모르는 일이거늘, 독고황이 환히 알고 있다는 사실은 그녀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허허허... 어쩐지.... 귀곡의 제자였기에 그랬군." 중년문사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주청산을 향해 물었다. "너는 노부가 누군지 아느냐?" 주청산은 눈을 크게 떴다. 만인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중원무성 의 노성주인 자신에게 반말을 하는 자, 그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허허허... 노부가 무림에서 사라진 지 이미 이백 년이 넘었으니 알 리가 없지." '이백 년!' 주청산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노부의 이름은 백리극(百里克)이다." "백리극!" 주청산은 급기야 커다란 충격을 받으며 급히 반문했다. "그, 그럼 당신이 바로 이백 년 전의 인물, 그리고 천 년 간의 육 대천마(六大天魔) 중 일 인인 불사지존(不死之尊)이란 말이오?" "허허허... 그렇네." 주청산은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이 자가 아직 살아있다니, 그럼 이미 나이만 해도 삼백 세에 가 깝다. 그런데 어찌 인간이 이렇게 오래 살 수 있단 말인가? 이 자 는 불사인(不死人)이라도 된단 말인가?' 불사지존 백리극은 가마 곁으로 걸어가더니 가볍게 가마의 주렴을 걷으려 했다. 가마를 메고 있던 남의 무사들은 이미 나무토막처럼 선 채로 굳어 있었다. "멈추시오." 주청산이 외치며 쌍장을 날렸다. "허허, 계란으로 바위를 치려는가?" 백리극은 슬쩍 소매를 저었다. 펑---! "우욱!" 주청산은 연달아 뒤로 팔 보나 밀려났고 그의 안색은 하얗게 탈색 되어 있었다. '이럴 수가......!' 백리극이 가마의 주렴을 걷자 과연 그 속에는 종리유향이 단정히 앉아 있었다. 여전히 창백하면서 매혹적인 모습이었으며 또한 그 녀는 이 갑작스런 사태에도 태연한 채 평온한 모습이었다. 백리극은 조용히 그녀를 주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기재다, 기재야. 비록 황에게는 못미치나 여인으로 치면 천 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한 기재다." 그는 부드럽게 물었다. "아가야, 너는 노부가 누구인지 아느냐?" 종리유향의 창백한 얼굴에는 미소가 흘렀다. "이미 불사지존임을 들었습니다." "으음, 갈수록 마음에 드는군." 백리극은 감탄을 발하고 나서 다시 물었다. "아가야, 너는 노부의 제자가 되고 싶지 않으냐?" 그 말에 처음으로 종리유향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그러나 곧 그녀는 아무런 미련없이 고개를 저었고 백리극은 너털웃음을 웃었 다. "싫다고? 허허허... 좋다, 아가야. 그러나 노부는 네가 그러면 그 럴 수록 더 마음에 드는구나." 백리극이 또다시 슬쩍 손을 젓자 종리유향은 가벼운 신음을 내며 기절했다. 백리극은 몸을 돌려 주청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잘 들어라. 중원의 힘이 제아무리 강하다 해도 결코 노부를 당하 지는 못할 것이다. 수라궁은 노부의 마종지문(魔宗之門)중 오 분 지 일의 힘밖에 되지 않는다." 주청산은 넋을 잃고 있었다. "허허허... 자, 황! 가자." 스스스....... 다시 가벼운 미풍이 불었고 두 사람은 연기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 지고 말았다. 가마 속에 있던 종리유향과 함께....... 주청산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그의 얼굴에는 온통 허탈한 기색이 깔리기 시작했다. '불사지존... 불사지존이 나타나다니.......' 천마봉(天魔峯) 정상에 대폭발이 일어난 것은 그때였다. 엄청난 화염과 함께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③ 눈이 내렸다. 천지를 온통 뒤덮을 듯이 백설이 난분분(欄紛紛)했다. 이곳은 북 방(北方)의 드넓은 광야(廣野). 눈은 풍요로움과 평화의 상징이다. 포근한 정서를 인간에게 주는 눈....... 기이하지 않은가? 뼈를 에일 듯한 한풍(寒風)에 동반되어 내리는 눈은 심혼(心魂)마저 얼릴 듯이 싸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눈을 보는 사람들의 감정은 정반대로 포근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 었다. 그러나 지금 내리는 이 눈 속에는 지난 반 년 간의 엄청난 음모의 잔재가 섞여 있었다. 수라궁 개파대전(開派大典)이후 전 무림은 치를 떨었다. 무공산 천마봉의 수라궁에 초청되었던 정사 오백 명의 고수들과 그들을 초청했던 사천 명이나 되는 수라궁의 모든 고수들, 또한 개파대전 직후 수라궁으로 달려갔던 중원 정사무림의 오천여 명의 고수들....... 그들은 개파대전 그 날의 해가 서산에 떨어지기도 전에 모두 연기 처럼 실종되고 말았다. 대체 어디로 사라졌는지 아무도 그들의 행방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날 이후 천마봉 정상에 위치했던 수라궁의 웅장한 건물도 이제 는 단지 잿더미와 폐허로 변해 눈 속에 파묻혀 있을 뿐, 남은 것 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에 모든 무림인들은 망연자실, 너무도 엄청난 이 사실에 모든 힘을 상실하고 말았다. 누군가 탄식했다. - 아아! 드디어 무림(武林)에 종말(終末)이 오는구나! 눈발이 차츰 거세어졌다. 휘... 이... 잉! 눈보라가 치고 세상의 온갖 더러움을 쓸어 버리듯이 흰 눈이 쏟아 졌다. 세상의 모든 음모를 덮어버릴 듯이 쌓이는 눈, 폭설(暴雪) 이었다. 광야(廣野). 은백의 설지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끝에서 끝으로 보이는 것은 오 직 눈뿐이었다. 이 끝없는 설원을 한 사나이가 걷고 있었다. 그는 백의에 긴 머리 를 허리까지 길게 드리우고 띠로 묶은 절세의 미청년으로 다름아 닌 하후성이었다. 그토록 영민하던 그의 얼굴에는 피로가 두텁게 앉아 있었으나 담 담하고 깊이를 모를 현기는 여전했다. 그의 어깨와 머리 위에는 벌써 눈이 그친 지 오래이건만 눈이 쌓 여 있었다. 그는 끝없는 설원을 그렇게 걸어왔으며 그가 지나온 자리에는 규칙적으로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문득 하후성은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반 년이 지났다.' 그의 발걸음은 비록 지친 듯 했으나 변함없는 속도와 간격을 유지 하고 있었다. '대체 그들은 어디로 갔는가? 마차에 실려간 오십 인의 고수들, 그리고 외증조부와 수많은 무림인들....... 그 많은 사람들이 모 두 어디로 갔단 말인가?' 하후성의 고요한 눈에는 쓰라린 자책의 빛이 떠올랐다. '완전히 당했다. 그때 마차를 몰고 왔던 자들은 중원무성의 무사 들이 아니라 이미 수라궁의 인물로 바뀌어 있었다. 그것을 판단하 지 못하고 너무나 어처구니없이 당하고 말았다.' 하후성은 탄식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다치고 외증조부님과 수천 명의 군웅들은 또 어떻게 하여 사라졌단 말인가? 수라혈신인가? 아니다. 그는 아 니다. 그는 비록 간교한 효웅이지만 그때는 이미 바닥이 드러나 그럴 여력이 없었다. 분명 누군가 있다. 반드시 누군가 더욱더 무 서운 원흉(元兇)이 있다. 그렇다면 그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는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무서운 자다. 실로 엄청난 계략을 지닌 자... 아! 대체 그는 누 구인가?' 하후성은 고개를 들었다. 산(山). 그의 눈 앞에 거대한 산의 웅자가 들어왔고 그것은 그가 가는 방 향의 끝에서 마치 세상의 끝처럼 희뿌연 모습으로 막막하게 가로 막고 있었다. '하란산(賀蘭山).... 결국 여기까지 왔다. 지난 반 년 간 전 중원 을 샅샅이 뒤지며 북상하다 결국 이곳까지 오고야 말았다.' 하란산. 웅대한 영산(靈山)이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침내 하후성은 고향이나 다름없는 하란산까지 오게 되었으며 그 것을 바라보는 그의 뇌리에는 그리운 하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황(皇).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외롭다. 황.... 언제쯤이나 다시 너를 볼 수 있는가?' 천년고목(千年古木). 사람들이 무병장수를 빌던 거대한 고목나무는 가지마다 눈부신 설 화(雪花)를 피워내며 변함없이 우뚝 서 있었다. 그토록 세월이 흘렀건만 심한 눈보라와 광풍폭우 속에서도 천년고 목은 말없이 대자연의 한 부분으로 남아 있었고 그 앞에 지금 하 후성이 서 있었다. 그는 만면에 감회 깊은 표정을 지은 채 멍하니 고목나무를 응시하 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오랫만인가? 고목나무에 서린 수많은 어린 시절의 추억이 삼삼히 뇌리에 떠오 르자 하후성은 굳은 얼굴로 고목나무의 한 부분에 묻은 눈을 털어 냈다. 그 속에 이제는 굳어진 글씨가 나타났다. <하후성(夏候星). 독고황(獨孤皇). 다시 만날 그 날까지 변치 않는 우정을 위하여.......> '황.......' 하후성의 눈꼬리가 떨렸다. 그 글을 보는 순간 그의 가슴은 벅찬 감동의 물결이 어지럽게 격랑을 일으키고 있었다. "황---!" 그의 부르짖음이 설원 멀리멀리로 퍼져나갔다. 도화전현성(桃花田縣城). 봄이면 마을 전체에 도화향이 진동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온통 눈 속에 파묻혀 고요하기 만한 현성이었다. 장원(莊園)의 지붕에도 마당에도 눈 만 가득 쌓여 있을 뿐 이름도 없는 장원은 텅 비어 있었고 문은 열려 있었다. 그것도 한 쪽 문 이 부서진 채로 였다. 하후성은 장원에 당도했다. 바로 자신이 어린 시절 자라왔던 하란 산 기슭의 조용한 마을 도화전현상에 있는 장원, 즉 집으로 돌아 온 것이었다. 부서진 문을 넘어 들어가는 하후성의 얼굴에는 복잡한 감회가 얽 혔다. '내가 자라고... 모든 희노애락이 거쳐간 곳... 귀소본능(歸巢本 能)인가? 다시는 오고 싶지 않았던 이곳을 찾아오다니.......' 그의 걸음은 안채로 향해졌다. 잠시 후 그는 안채의 마당에 눈을 이고 있는 두 개의 무덤을 발견했다. 하후성의 안면이 미미하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그는 한동안 무덤을 내려다보다가 서서히 무릎을 꿇으며 주저 앉았다. 그리고 무덤을 향해 절을 했다. '아버님, 할아범.... 성아(星兒)가 왔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오면 모두들 기쁘다던데... 저는 왜 이토록 마음이 메어오는 것일까 요?' 휘--- 잉! 바람이 불었고 희끗희끗한 눈발이 그 속에 섞여 있었다. 툭! 웬일인지 하후성의 머리를 묶었던 띠가 끊어지더니 그 바람에 칠 흑같은 머리칼이 눈보라에 춤을 추며 흩날렸다. 그러나 하후성은 움직이려 하지 않았고 언제까지고 그곳에 남아 있을듯 아예 굳어져 버렸다. 설원(雪原). 북방의 설원은 동물은 물론 식물까지도 견디지 못할 정도로 추웠 다. 그곳에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조차 보이지 않았으며 그저 끝없이 눈이 덮여 있을 따름이었다. 그 설원을 터벅터벅 걷는 자는 바로 하후성이었다. 하후성은 다시 중원을 향해 발길을 돌리고 있었다. 등 뒤로 하란 산의 웅자가 그를 배웅하는 듯했다. 그는 최근 반 년 사이에 하루도 빼놓지 않고 걸었는데 그것은 중 원에서 이곳까지 수천 리가 넘는 길, 아니 곳곳을 헤매는 일만리 (一萬里)가 넘는 거리였다. 그러나 이제 그는 걷는 습관이 완전히 몸에 배어버린 듯 예외없이 익숙하게 걸었으며 발자국 모양과 간격, 그 속도까지 언제나 일정 했다. 그렇게 걷는 방법 만이 피로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거니와 아마 일 년(一年) 동안을 쉬지 않고 걸으라 해도 그는 걸을 것이었다. 하후성은 불현 듯 걸음을 뚝 멈추었는데 그런 일은 사실 극히 드 문 일이었다. 그런데 그는 걸음을 멈추었을 뿐만 아니라 고개까지 돌리고 있었다. 그는 다시금 하란산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 하란산은 영원하다. 하후성, 힘을 내자! 너는 저 산을 닮고자 하지 않았는가? 하후성, 반드시 이 난관을 극복해야 한다. 너에게 주어진 운명을 반드시 타개해야만 한다! 하후성.......' 따각 따각 따각....... 설원의 정적을 깨뜨리며 일정한 속도로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설원을 가로지르 듯 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 한 대의 쌍두 마차(雙頭馬車)가 달려오고 있었다. 마차를 끄는 말은 눈과 같이 흰 백마(白馬)로써 잡털 한 올 섞이 지 않았다. 그런데 마차는 그와 정반대로 검은 흑오목(黑烏木)으 로 만든 것으로 백마가 끄는 검은 마차는 매우 선명한 대조를 느 끼게 해주었다. 하후성은 이미 등 뒤로 들려오는 마차소리를 들었으나 전혀 듣지 못한 것처럼 계속 묵묵히 걷고 있었다. 사실상 그는 마차소리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으며 그것은 그의 무심(無心)한 표정으로 입증되었다. 휘... 이... 잉....... 북방에서부터 설원을 할퀴어오며 그의 백의 자락을 찢어낼 듯 펄 럭이게 하는 한풍은 그의 검은 머리칼마저 마구 춤을 추게 했다. 따그닥 따그닥....... 마차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바로 그의 등 뒤에 이르자 갑자기 속도를 늦추었다. 그리고 마차 안으로부터 한 줄기 부드러운 음성 이 흘러나왔다. "친구, 어디까지 가시오?" 하후성은 대답하지 않고 계속 걸었으나 마차는 그의 걸음에 맞추 어 느리게 나갔다. "음, 눈이 더 내릴 듯 한데 이 마차에 오르는 것이 어떻겠소? 가 는 길까지 태워 드리겠소." 그래도 하후성이 묵묵부답 걷기만 하자 마차 안에서 기이한 음성 이 들려왔다. "친구, 그대의 모습은 무척 외롭고 쓸쓸해 보이는구료. 마차에 올 라 얘기나 하면서 가면 여정이 한결 가볍지 않겠소?" 그러나 여전히 하후성의 입은 굳게 다물려 있었고 뒤이어 마차가 속력을 약간 더 내더니 그의 옆으로 따라 붙었다. 마차 안으로부터 탄식이 울려 나왔다. "아! 소성....... 너는 무척이나 변했구나." 그 음성을 듣자 하후성은 돌처럼 그 자리에 굳어지며 안색이 변했 다. '이... 이... 목소리는?' ④ 끼익! 마차도 멈추었고 그 안에서 몹시 다정한 음성이 하후성을 불렀다. "소성, 마차 안으로 올라와라." 하후성은 극심한 격동을 일으켰고 그로 인해 그의 준미한 눈썹 끝 과 눈꼬리가 미미하게 떨었다. 그리고 마차의 휘장이 열리자마자 그는 빨려들 듯 마차 안으로 몸을 실었다. 마차 안은 마주 보며 앉을 수 있는 의자가 놓여 있을 뿐 매우 조 촐한 구조로 아무런 장식이나 도구도 없었다. 흑의죽립인(黑衣竹立人). 의자에는 흑의를 입고 대나무로 만든 삿갓을 쓴 인물이 조용히 앉 아 있었다. "소성, 자리에 앉게." "그... 그대는......." 하후성의 음성이 가늘게 떨려 나오자 흑의죽립인은 머리에 쓰고 있던 죽립을 벗었다. 그러자 드러난 얼굴은 천하를 한 눈에 굽어보는 패왕(覇王)과도 같이 위풍과 야망이 충만한 청년, 바로 독고황(獨孤皇)이었다. "황!" 하후성은 격동을 일으키며 부르짖었고 독고황은 그런 그를 바라보 며 만면에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소성, 오랫만이다." "황!" 두 사람은 서로를 힘차게 끌어안았다. 두 사나이의 가슴에 뜨거운 우정의 불길이 타올랐다. 드디어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태어난 정사(正邪)의 최고 기재들 은 다시 만났다. 운명 속에서 만나고 운명 속에서 헤어졌던 두 친 구가 기나긴 세월의 흐름 속에서 다시 만난 것이었다. 격렬한 우정의 불길 속에서 마주 안은 두 사람은 깊숙히 서로의 체온을 나누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것은 또다른 운명의 변 괴를 전제로 한 서글픈 재회(再會)였다. 마차가 달리는 가운데 하후성과 독고황은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뜨거운 우정이 담긴 시선이 줄곧 오가고 있었다. 하후성은 비로소 격동을 가라앉히며 물었다. "황! 도대체 그 동안 그대는 어디에 있었는가? 그토록 찾으려 해 도 찾지 못했으니......." 독고황의 준수한 얼굴에 갑자기 어두운 그림자가 스쳤다. "소성. 너는 나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나는 너를 이미 몇 번이나 보았었다." 하후성은 그 말에 흠칫 놀랐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인가?" 독고황은 대답하지 않고 탄식하며 물었다. "소성. 너는 무엇 때문에 문(文)을 이어가지 않고 무(武)를 택했 느냐? 네가 변함없이 학문(學文)을 익혔다면 우리는 지금 쯤......." 그는 웬지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흔들더니 음울한 음성으로 물 었다. "소성, 너는 내가 누군지 아느냐?" 독고황의 이상한 태도에 하후성은 불길한 예감으로 가슴이 마구 떨려 왔다. "황, 지금 무엇을 말하려는 것이냐?" 독고황은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말했다. "소성, 내 언젠가 너에게 말한 적이 있을 것이다. 이 거대한 중원 의 대륙을 반드시 내손안에 넣겠다고." 독고황은 눈을 번쩍 떴고 그의 고요하던 눈 속에서 강렬한 빛이 발산되었다. "지금 나는 그것을 실행 중이다." 하후성은 자신도 모르게 전신을 떨었고 독고황은 경직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나는 마종지문(魔宗之門)의 문주(門主)다. 수라궁은 바로 마종지 문의 오대세력 중 하나다." 하후성은 충격적인 말에 완전히 넋을 잃고 말았다. "그... 그럴 수가... 그럴 수가......." 독고황은 문득 간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소성,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이 독고황에게 있어서 너는 나의 분신(分身)같은 친구다." 하후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말을 할 래야 할 수도 없 었다. "소성, 무림을 떠나다오. 너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해도 결코 나를 당하지는 못한다. 이것은 우정어린 충고다. 소성......." 하후성은 그제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군. 이제 알았다, 황....... 네가 바로 오대마성(五大魔星) 을 거느리고 나타난 천혈성(天血星)의 인물이구나." 이번에는 독고황이 말을 하지 않았고 하후성의 물처럼 담백하던 두 눈에는 안개가 뿌옇게 어렸다. 그는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보며 웃었다. "하하하...! 어이가 없구나. 수년 만에 만난 너와 내가 그 세월의 흐름 속에서 이렇듯 정과 사의 양극으로 나뉘어지다니!" 독고황은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소성. 내가 강호에 초출(初出)했을 때... 그때 나는 너에 대한 그리움을 이길 수 없었다. 그래서 당시 너의 이름을 대신 사용했 었다." "무슨 말이지?" "지금 네가 쓰는 환영신룡(幻影神龍)이란 명호는 바로 당시의 내 가 퍼뜨린 것이다." 하후성의 안색이 약간 변하더니 나직하게 웃었다. "후후... 그랬었나? 이제야 환영신룡의 의문이 풀렸군." 독고황의 눈이 점차 빛났다. "소성. 아니 무영종(無影宗)! 너는 꿈에도 몰랐겠지. 하지만 나는 네가 자부신군 무영종으로 변 洋臼 수라궁에 들어온 순간부터 너 를 알아 보았다. 그리고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척 기뻐했다." "아!" "그러나 너의 무공이 너무나 강하고 또 너의 지혜가 너무도 초절 함에 나는 그때부터 너와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생기는 것 을 느꼈다." "으음." "군웅전에 묻어놓았던 오만 근의 화약도 너 하나 때문에 사용하지 못했다. 그리고 천문육십사로화절진의 십만 근 화약도 너 하나 때 문에 알게 모르게 위전풍에게 비밀 이 새어나가게 하여 오히려 천 강삼백육십은살무영대를 모두 희생시키게 했다." 독고황은 약간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소성. 너는 나의 이런 마음을 조금이라도 아느냐? 네가 만약 조 금이라도 알 수 있다면 무림을 떠나다오. 소성. 제발......." 독고황의 어투와 표정은 절실했고 그에 따라 하후성의 안면은 마 구 경련을 일으켰다. 그리고 실로 오랫 동안 그의 안색은 무수한 변화를 일으키며 자꾸만 뒤바뀌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하후성의 안색은 평정을 회복하였고 그의 얼굴에는 인생 (人生)의 모든 것을 달관한 자의 기품마저 떠오르고 있었다. 하후성은 입을 열어 담담하고 차분하게 말했다. "황. 나는 아직도 너를 좋아한다.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그래서 지금 내 마음은 터질 것만 같다. 하지만 황. 용서해다오. 내가 애초부터 무림에 몸을 담지 않았다면 몰라도 한 번 담은 이 상 나에게는 이 무림을 지켜야할 운명(運命)이 부여되어 있다." 그의 음성 또한 절실하기 그지 없었으며 독고황의 안색은 침중하 게 굳어졌다. "소성. 너의 현재 무공은 천하에서 짝을 찾을 수 없을 만큼 강하 다. 그러나 너 혼자의 힘 만으로 마종지문에 대항한다는 것은 계 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다." "그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아니, 너는 모른다. 설사 너를 가르킨 소림 삼성승(三星僧)이라 할지라도 마종지문의 적수는 되지 못한다." 하후성은 대답을 피해 잠시 침묵한 후 물었다. "황. 하나만 묻자." "좋다." "반 년 전 수라궁에서 탈출한 고수를 마차에 실어 데려간 것은 너 의 계략이었느냐?" 독고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럼 정사 사천여 명이 넘는 고수들이 실종된 것도?" "물론이지." "그들은 모두 어디에 있느냐?" 독고황은 담담히 대답했다. "그들은 모두 안전하다. 그러나 당분간은 무림에 나오지 못한다." 그는 기이한 웃음을 흘려냈다. "후후... 그들이 제압되어 있는 동안 무림정세는 완전히 마종지문 에 굴복하게 될 것이다." 이번에는 독고황이 하후성에게 물었다. "소성. 너는 나의 스승이 누구인지 아느냐?" "모른다." "그 분은 불사지존(不死之尊)이시다." 하후성은 안색이 돌변해 부르짖었다. "그... 그가 아직 생존해 있단 말이냐?" "후후... 물론이다. 그 분뿐만 아니라 그 분의 부인인 벽안마희 (碧眼魔姬)께서도 생존해 계시다." "믿을 수가 없군!" "더군다나 나에게는 수라혈신 외에도 네가 아는 오대마성 중에 나 머지 사대마성이 있다. 또한 그밖에도 마종지문에는 실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전대고수들이 있다." "아!" "자, 이래도 네가 마종지문을 상대하겠느냐?" 독고황은 경악하고 있는 하후성을 주시하며 말했다. "소성. 현재 너의 무공은 나와 비슷하다. 그러나 일 년 안으로 나 는 내가 익힌 스승과 사모의 무공은 물론 천 년 전의 천중극마(天 中極魔)와 천극수라대제(天極修羅大帝), 또 혈세천존(血世天尊) 등 육대천마와 천축(天竺) 마라혈교(魔羅血敎)를 비롯한 천축 십 팔교(十八敎)의 무공, 그리고 수천 년 간 비전되어 내려온 사도의 백육십 종(百六十種)의 모든 마공을 대성할 것이다." 독고황은 침착하게 말을 잇고 있었다. "그때가 되면 나의 무공은 상상도 할 수 없이 강해진다. 그러므로 너는 영원히 나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다." 하후성은 계속 듣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황......." 그는 마음을 가라 앉히려는 듯 낮게 한숨을 쉰 후 말했다. "언젠가 네가 나에게 물은 적이 있었지. 만약 네가 천하의 죄인이 된다면 어찌 하겠느냐고?" 하후성은 당당한 자세로 가슴을 펴 보였다. "그때의 마음과 지금의 나의 마음은 똑같다. 나는 곧 저 하란산처 럼 결코 변치 않을 것이다." 그의 음성은 갑자기 차갑게 변했다. "그러나 우정과 대의는 별개다." 독고황의 안색은 일시에 굳어버렸고 하후성은 더욱 냉랭하게 덧붙 였다. "나는 싸울 것이다. 독고황 그대와, 아니 전 마종지문과......." 독고황은 만면에 격동을 일으켰다. "소성. 그럼 너는 죽는다." 하후성은 고소를 지으며 답했다. "오히려 죽음이 더 편할 지도 모른다." "소성. 너는 바보다. 무림을 떠나기만 하면 너는 영원히 행복해질 수 있다." 하후성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독고황을 쏘아보았다. "황, 너라면 지금 모든 것을 버리고 마종지문을 떠날 수 있느냐?" 그 말에 독고황의 짙은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그것 봐라. 네가 마종지문을 버리지 못하듯 나 또한 무림을 떠나 지 못한다. 이것은 똑같은 이치다." 독고황은 삽시에 안면근육이 마비된 듯 굳어져 버리더니 갑자기 허탈하게 말했다. "소성. 조금만 더 가면 주산진(朱山鎭)이다." 그의 얼굴에는 기이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무림의 일은 무림의 일이고 우리는 우리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 르지만 오늘 하루 만큼은 너와 실컷 술이나 마시고 싶구나." 하후성 역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좋다, 황." 따그닥, 따그닥....... 마차는 달렸다. 끝없는 설원(雪原)으로....... ■ 대소림사 제3권 제29장 친구여, 무림(武林)을 떠나라! -1 ━━━━━━━━━━━━━━━━━━━━━━━━━━━━━━━━━━━ ① 주산진(朱山鎭). 하란산으로부터 남쪽으로 백여 리 떨어진 일개 촌이었다. 귀래거(歸來居). 귀래거는 주산진에 있는 유일한 객점으로 곧 돌아간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어디로 돌아간다는 뜻인가. 휘--- 잉--- 휘--- 이--- 잉! 삭막한 북방의 한풍이 초라한 객점 귀래거의 붉은 깃폭을 찢어낼 듯 흩날렸고 그 한풍 속에는 눈보라가 뒤섞여 있었다. 객점 안. 몇 개의 낡은 주탁이 놓여있을 뿐 손님은 거의 없었다. 단지 구석 진 곳에 두 청년이 앉아 안주도 없는 술을 마시고 있을 뿐이었다. 하후성과 독고황이었다. 그들은 지금 마차 안에서의 모든 일을 잊 은 듯이 호탕한 분위기였다. "하하하... 황! 그때 호대인(胡大人) 집의 호연향 낭자가 나를 통 해 그대에게 연서(戀書)를 준 일을 기억하는가?" 하후성의 유쾌한 말에 독고황은 쓴 웃음을 지었다. "소성. 말도 마라. 그 당시 나는 호낭자를 피해 도망다니느라고 얼마나 진땀을 뺐는지 아느냐?" 그는 웃음을 지으며 술을 쭉 들이킨 후 말했다. "아무튼 세월이란 놀랍다. 그때 눈 속에 넘어져 제대로 걷지도 못 하던 꼬마가 이렇게 늠름하게 컸다니......." 독고황의 두 눈에는 과거에 대한 회억이 짙게 어렸으나 곧 그는 머리를 떨치며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소성, 한 가지 묻자." "뭘 말이냐?" "사랑하는 여인이 있느냐?" 하후성은 뜻밖의 질문에 멈칫하더니 곧 쑥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고 독고황은 박장대소했다. "으하하하...! 천하의 영웅인 너도 여자에게 만은 약한 모양이구 나." 하후성은 그 말에 코웃음쳤다. "흥! 그렇게 말하는 너에게는 무척이나 여인이 많은 모양이구나." 독고황은 어깨를 으쓱했다. "당연하지. 나같이 멋진 사람을 보고 어느 여인이 반하지 않겠느 냐?" 하후성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흥! 네가 멋지다고? 아마 그 여인들은 나를 보지 못한 모양이구 나. 그 여인들이 나를 보면 아마 까마귀와 봉황의 차이가 무엇인 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뭐, 뭐라고? 소성, 그럼 나는 까마귀고 너는 봉황이란 말이냐?" "그야 이를 데 있느냐? 당연하지." 독고황은 어깨를 들썩거렸다. "안 되겠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소성, 너와 일만 초를 겨루 겠다." 그러자 하후성은 양 손을 흔들며 익살맞게 말했다. "그것만은 사양하겠다. 만약 이 얼굴에 상처라도 생기면 혼인줄이 다 막힐 게 아니냐?" "으하하하......!"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요란한 폭소를 터뜨렸고 그러한 그들의 모습은 아무런 부담도 없는 단순한 죽마지우(竹馬之友)같았다. 그 러나 그들 사이에는 이미 황하(黃河)보다 더 넓은 간격이 벌어져 있음을 그 누가 알겠는가? 잠시 후 독고황의 표정이 착 가라앉자 하후성도 얼굴을 굳혔고 삽 시에 두 사람은 모두 안색이 침중해졌다. 독고황은 갑자기 하후성의 손을 꽉 움켜 쥐더니 물었다. "소성, 아까 내가 한 말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없겠느냐?" 하후성은 부드러운 눈으로 그를 마주보며 담담히 고개를 흔들었 다. "황, 불가능한 일이다." 독고황은 탄식하며 술잔을 들어 다시 쭉 들이켰다. "크으...! 독하구나. 오늘따라 웬 술이 이렇게 쓴가?" 독고황의 눈에는 가느다란 핏 璲 어렸다. "소성, 어쩌면 너와 나 둘 중 한 사람은 죽을 지 모른다." 하후성은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소성, 넌 정말 멋진 바보다." 독고황이 이렇게 말하자 그 말을 받아 하후성이 같은 투로 답했 다. "그렇다면 이 바보의 친구인 너도 바보구나." "하하...! 그렇던가? 하기야 어쩌면 이 세상은 모두 바보들 만 사 는 지도 모르지." 독고황은 씁쓸하게 웃은 뒤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진지한 표정 을 지으며 물었다. "소성, 내가 알기로 너에게는 너를 지극히 사랑하는 여인이 세 명 있다." 하후성은 흠칫했고 독고황은 웃으며 손을 꼽았다. "그 첫째 여인은 바로 매군(梅君)으로 그녀는 이미 너의 아이를 가졌다." "뭣이?" 하후성의 안색은 크게 변했다. "네... 네가 어찌... 그녀를!" 독고황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위전풍이란 자는 현명하고 무섭도록 치밀한 자다. 그러나 그는 나를 너무도 몰라. 나는 벌써부터 그가 수라궁에 십비(十秘)를 침 투시킨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후성은 더이상 침착할 수가 없었다. "모두... 죽였나?" "매군은 아니다. 소성. 매군은 너를 자신의 몸보다도 더 사랑하고 있다." 하후성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매군.... 그녀가 그 날의 결합으로 아기를 가졌다니.......' 하후성은 희비를 알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버렸다. 독고황은 그를 주시하며 다시 손가락을 세웠다. "두 번째 여인은 바로 만사(萬事)의 손녀인 호불범이다." 하후성은 다시금 흠칫 놀랐다. '그녀가 나를?' "그녀는 절음폐혈증을 앓고 있어 앞으로 목숨이 반 년도 채 남지 않았다. 때문에 그녀는 자기 자신의 생명에 조금도 애착을 느끼지 않고 있으나 죽기 전에 꼭 너를 만나고 싶어한다." 하후성이 입이 얼어붙은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 번째 여인은......." 독고황은 고개를 들어 말했다. "화미(花美), 들어 오너라."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객점의 안 쪽에서 한 명의 백의 미녀 가 사뿐히 걸어 나왔다. 그녀는 놀랍게도 바로 천하우물(天下尤 物) 백화미였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아름다웠으나 웬지 몹시 초췌 하고 수척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복잡한 감정이 서린 눈으로 하후 성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대는... 백소저?" 하후성이 놀라 부르짖자 백화미는 입술을 열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현수... 아니 하후공자. 오랫만이에요." 독고황은 술을 자작으로 따라 들이킨 후 말했다. "화미는 그 동안 나에게 너를 살려달라고 수없이 애원했다. 하 하... 그녀는 너와 나의 관계를 모르면서 그런 말을 한 것이지." 하후성의 안색이 변하는 가운데 독고황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 다. "화미는 나를 보위하는 오대마성 중 한 명인 흑영마후(黑影魔后) 단혜령의 제자이다. 그런데 이러한 그녀가 너를 지극히 사랑하고 있다." 하후성의 안면근육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 을 꽉 움켜쥐며 물었다. "황, 너의 속셈은 대체 무엇이냐?" 독고황은 담담히 웃었으나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세 명의 여인과 황금(黃金) 천만 냥이면 너는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무림을 떠나라, 소성!" 하후성은 격동된 음성으로 말했다. "황! 아까 나는 분명히 말했을 텐데, 불가능하다고!" "소성, 미안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그 순간 독고황의 손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빠르게 막 일어서려는 하후성의 전신 삼십육 개 대혈을 제압시켜 버렸다. 그의 수법은 완벽했고 시기와 위치, 그리고 출수방법 등에 조금도 헛점이 없었다. 하후성은 단 한 점도 피해낼 여유가 없었다. 더구나 방심(放心)했 던 터라 그는 여지없이 독고황의 일격에 당하고 말았다. "으윽!" 하후성은 비명을 지르며 털썩 탁자에 주저 앉았으며 아울러 그는 전신의 내공이 일시에 소실되는 듯한 허탈한 느낌을 맛보아야만 했다. 그러나 기이한 일이 벌어진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후후후......." 뜻밖에도 그는 입가에 허망한 자조의 웃음을 흘리고 있었고 독고 황은 아연한 채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물었다. "소성, 왜 화를 안 내느냐?" 하후성은 떨리는 손을 들어 술잔을 잡았고 처음으로 술을 들이켰 다. 무척 쓴 술이었다. "황, 너의 마음을 이해한다. 그런데 어찌 화를 낼 수가......." "소성......." "그러나 황, 네가 이렇게 한다고 해서 내 결심이 꺾이는 것은 아 니다." 독고황은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소성. 너는 이제 일 각만 지나면 아주 깊은 잠에 빠진다. 조금 전 내가 쓴 수법은 천 년 전 천중극마가 쓰던 무형무혼천절수(無 形無魂天絶手)다. 그로 인해 너는 이미 무공이 폐쇄되었다. 영원 히......." 하후성의 안면이 부르르 떨렸다. "소성. 용서해다오. 네가 나를 아무리 욕해도 좋다. 그러나 모든 것이 너를 위해서라는 것만은 알아다오." 독고황의 간절한 말에 하후성은 담담히 말했다. "황. 너를 미워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갑자기 그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황......." 하후성은 다음 말을 잇지 못한 채 문득 정신이 흐려지는 것을 느 끼며 탁자에 엎드렸다. "소성......." 독고황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그의 두 눈에는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소성.... 미안하다.' 그는 등을 돌리며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화미." "네." 백화미는 공손히 대답했다. "마차가 이미 준비되었다. 소성과 그 두 여인과 함께 마차를 타고 그곳으로 떠나라." "......." 백화미의 얼굴에는 착잡한 기색이 어렸다. "천로(天老)와 지로(地老)가 너를 안내해 줄 것이다." "소종사(少宗師)님......." 백화미는 감정이 복받치는 것을 느낀 듯 무릎을 꿇었으나 독고황 은 냉연하게 잘라 말했다. "가라, 어서!" 그는 어조를 바꾸어 덧붙였다. "그를 사랑해야 한다. 너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라도." "소종사님......." "그는 천하에서 가장 훌륭한 인물이다." 독고황 음성에는 갑자기 격정이 묻어났다. "변함없이 그를 사랑하지 않으면... 내, 너를 죽일지도 모른다." "아아!" "가라, 어서... 빨리!" 백화미는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 채 탁자에 엎드린 하후성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사라진 한참 후에도 독고황은 그 자 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성.... 이렇게 해서 너와 나는 이제 영원히 헤어지게 되는구 나. 소성, 소성.......' 독고황은 입술을 깨물며 나직히 중얼거렸다. "소성. 천하에 한 병밖에 없는 만년학정혈(萬年鶴情血)을 이미 호 낭자에게 복용시켰다. 그러나 너는 지금 얼마나 내 가슴이 찢어질 것같은 지 모를 것이다. 만년학정혈로 인해 호낭자는 살았지만 내 가 처음으로 사랑을 느낀 한 여인(女人)은 지금 죽어가고 있다. 아느냐? 그녀... 그녀는 지금... 죽어가고 있어......." 마지막 독고황의 말은 처절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주점 귀래거(歸來居) 밖에서는 지금 한창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 었다. ② 삶과 죽음. 그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무(無)....... 무의 세계란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니 설사 존재한다 고 해도 그를 느낄 수 없다면 부재(不在)하는 것이나 무엇이 다를 바 있겠는가. 하후성. 지금의 그가 바로 이런 상태였다. 독고황의 뜻밖의 급습을 당한 이후로 그는 삶도 죽음도 아닌 그런 무의 공간 속을 헤매고 있었다. 그러나 다시 광명(光明)이 그의 깊고 깊은 잠을 일깨웠고 그는 마 침내 눈을 떴다. 그의 육신은 지금 부드럽고 푹신한 침상에 반듯이 뉘여져 있었다. 그가 있는 곳은 크고 화려한 방(房)이었는데 단아한 천으로 장식 된 높은 천정이 그의 눈에 무척이나 포근하고 온화한 느낌으로 다 가왔다. 하후성은 서서히 상체를 일으켰고 바로 곁에서 지극히 부 드러운 여인의 음성이 그를 불렀다. "이제 깨어나셨어요?" 하후성은 고개를 돌렸다. '백화미(白花美)!' 바로 천하우물 백화미가 침상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그러나 눈처럼 흰 백의를 입고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은 더없이 청초하고 순결무 맨 보였다. 그녀는 하후성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몸은 괜찮으신가요?" "이곳은 어디요?" 하후성은 대답 대신 자신이 궁금한 것부터 물었고 백화미 역시 그 의 질문과 다른 말을 했다. "며칠 더 쉬셔야 해요." 하후성은 무심한 어조로 다시 물었다. "낭자가 나를 이곳으로 데려 왔소?" 너무도 감정이 섞이지 않은 무감동한 음성에 백화미의 안색이 약 간 변했다. 그러나 곧 그녀는 눈을 내려 깔며 다소곳이 말했다. "네, 그런 셈이에요." 하후성은 고개를 저으며 방 안을 둘러본 뒤 담담히 말했다. "황은 너무나 많은 것을 생각했군." 백화미는 탁자에 놓인 식기를 들었다. "하후공자님, 이 연자탕(蓮 ? 좀 드세요." 그러나 하후성은 간단히 거절했다. "식욕이 없소." 그 차갑기까지 한 무심한 태도에 백화미의 안색이 다시 변화를 일 으켰고 그녀는 매혹적인 두 눈에 눈물을 글썽거리며 곧 울 것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은... 저를 경멸하시는 군요?" 하후성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내가 어찌 낭자를 경멸하겠소?" 그의 얼굴에는 짙은 자조가 어렸다. "어쩌면... 내 자신을 더 경멸하는지도 모르오." 기어코 백화미의 뺨에 수정같은 눈물이 흘렀다. "너무 자신을 학대하지 마세요. 모든 것은 운명일지도 몰라요." "운명? 그렇군, 운명이라......." 하후성은 닫혀있는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밖에 눈이 오고 있는 것같구료." "네, 며칠째 계속......." "창문 좀 열어 주겠소?" 백화미는 몸을 일으키더니 연자탕을 탁자에 놓고는 사뿐히 걸어 창문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휘... 잉....... 바람소리가 들렸고 곧 눈이 내리는 광경이 하후성의 눈에 들어왔 다. 밖은 그야말로 백설천지로 이곳이 어떠한 장소인지 구별조차 할 수가 없었다. 함박눈 만이 온통 시야를 가 리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이곳에 온 지 얼마나 되었소?" "열흘 되었어요." "열흘이라, 후후... 그때 눈이나 지금 눈이나 똑같은 눈인데 너무 도 느낌이 다르구려." 백화미는 무엇인가를 느낀 듯 걱정스럽게 말했다. "공자님, 날씨가 차갑습니다. 이만 창을 닫지요." 하후성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 하하... 이제는 나도 추위를 타야 하나?" 백화미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진한 연민의 표정이 어렸고 하후성은 그녀에게 담담히 물었다. "백낭자, 황이 그대에게 무엇을 지시하였소?" "아니에요, 아무런 지시도 하지 않았어요." "그럼 무엇 때문에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이오?" 그 말에 백화미의 얼굴이 서글프게 변하더니 그녀는 입술을 지그 시 깨물며 하후성에게 말했다. "공자님, 비록 무림의 일 각에서 요조숙녀답지 않게 살아온 소첩 이지만 몸 만은 청백(淸白)하게 지켜왔습니다. 또한 소녀가 이곳 에 있는 이유는......." "이유는?" "공자님에 대한 사무친 정한 때문입니다." 대담하고 솔직한 대답에 하후성은 절로 얼굴이 굳어졌다. "그럼 나하고 이곳에 계속 있겠단 말이오?" "그... 그렇습니다." "언제까지고?" 백화미의 두 눈에 간절한 애원이 어렸다. "공자님께서 소첩을 미워하시지만 않으신다면... 평생 모시고 싶 습니다." 그녀는 다시 옥루를 떨구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의 이런 모습 은 예전과는 너무도 딴판으로 과거의 요염하고 요사(妖邪)한 모습 은 찾아볼 래야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한동안 하후성의 시선은 망연히 그녀에게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그는 母 창 밖으로 눈을 돌렸고 두 사람 사이에는 잠시 묘한 침묵이 흘렀다. 백화미가 먼저 그 침묵을 깼다. "공자님, 소첩은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공자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분들을 데려 오겠습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가더니 잠시 후에 몇 명의 인물들과 함께 다시 들어왔다. 하후성은 여전히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으므 로 들어선 자들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나으리......." 가냘프나 야무진 음성이 그의 귓전에 들려왔다. 그것은 촉촉히 젖 은 다정한 음성이기도 했으며 또한 하후성에게는 너무도 귀에 익 은 음성이었다. 그는 마침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두 여인(女人)이 서 있었 다. 매군(梅君), 즉 매교랑(梅嬌 )이 보였으며 그 곁에는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미색절륜한 황의소녀가 서 있었다. 매교랑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올랐다. "나으리!"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며 하후성에게 가냘픈 몸을 던지더니 곧 하 후성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흐흐흑... 나으리....... 소녀를... 소녀를... 모르나이까?" 하후성은 여전히 굳어 있었으나 탄식하며 그녀의 긴 머리칼을 쓰 다듬었다. "매군, 울지 마시오. 왜 모르겠소? 당신을......." 매군은 더욱 애처롭게 흐느꼈다. "흐흐흑... 나으리......." 황의미소녀 또한 두 눈에 가득 눈물을 담은 채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저를... 기억 하시겠습니까?" "낭자는......." 하후성은 잠시 혼란을 느낀 듯 미간을 좁히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 다. "그대는 호불범(胡不凡)......." 그녀는 바로 만사(萬事)의 손녀이자 지난 날 남장여인이었던 호불 범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제는 호연연(胡姸姸)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것이 소녀의... 본 명이니까요." "호연연......." 하후성이 낮게 되뇌이는 사이 호불범, 즉 호연연은 고개를 떨구었 다. 그러자 그녀의 작은 발 끝에 그녀의 마음처럼 영롱한 눈물이 떨어졌다. 이때 방문이 다시 열리며 여러 명의 인물이 들어왔는데 앞장 선 자는 백발이 성성한 두 명의 평범해 보이는 노인으로 그 들은 모두 마의(麻衣)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뒤로는 수라궁에서 하후성의 변신인 무영종을 따르다 가 실종되었던 관동삼괴(關東三怪) 삼형제가 들어왔고 백화미가 맨 뒤에서 그들을 따르고 있었다. 관동삼괴는 침상에 비스듬히 앉아 있는 하후성을 보자 처음에는 멈칫했다. 그것은 그들이 하후성의 본래 모습을 알지 못했던 때문 이었다. 그러나 무릇 사람의 기(氣)란 어쩌면 외양과는 무관한 것 이 아닌가? 관동삼괴는 금새 격동을 일으키며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대형! 아니, 주인님!" 하후성은 탄식해마지 않았다. "삼괴, 그대들은 왜 나를 그렇게 부르는가?" 대괴 시천공이 공손히 읍하며 말했다. "주인님, 저희 형제들은 오직 주인님 때문에 산 목숨입니다. 그러 므로 앞으로 영원히 주인으로 모실 것입니다." 하후성은 씁쓸히 고개를 저었고 때를 같이 하여 두 마의노인이 그 에게 다가왔다. "하후공자, 노부들을 알겠소?" 하후성은 그들을 한 번 본 뒤 담담하게 말했다. "왜 모르겠소이까? 봉산진(鳳山鎭)의 황(皇)의 장원에 있던 두 노 인이라는 것을......." "그렇소, 공자. 우리들은 천로(天老)와 지로(地老)라 하오." 하후성은 탄식하며 물었다. "두 분 노인들이 소생을 감시할 것이오?" 천로가 고개를 저으며 나직히 웃었다. "허허허... 감시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소. 단지 우리는 공자를 보 살펴 드릴 뿐이오." 갑자기 하후성은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핫핫핫핫핫... 핫핫......!" 하후성의 그런 모습은 마치 처절한 영웅의 말로를 보는 것같았다. "흑흑흑... 나으리!" 세 명의 여인이 모두 고개를 돌리며 흐느꼈다. 힘을 잃은 대호(大 虎), 바로 하후성의 모습이 그러했고 관동삼괴 또한 무릎을 꿇은 채 통곡을 터뜨렸다. "크흑... 주인님!" 천로와 지로 만이 무표정한 모습으로 서 있을 뿐이었다. 하후성은 어느 순간 긴 광소를 갑자기 뚝 그쳤다. 그러나 무심한 듯 다시 눈이 쏟아지는 창 밖을 응시하는 그의 시 선과는 달리 그의 내심은 이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황, 너는 잘못 생각했다! 나는 결코 여기서 굴복하지 않는다. 반 드시 이곳을 탈출할 것이다. 나의 결심은 더욱 굳어졌다. 얼마나 많은 난관이 닥칠지는 모르지만 나는 반드시 황, 너의 모든 음모 를 분쇄함은 물론 마종지문을 궤멸시키고 말 것이다!' 눈(雪), 창 밖의 눈보라는 더욱 거세어지고 있었다. ■ 대소림사 제3권 제30장 운명(運命)의 재탄생(再誕生) -1 ━━━━━━━━━━━━━━━━━━━━━━━━━━━━━━━━━━━ ① 전각(殿閣). 정교하게 축조된 삼층의 전각은 수려한 산세와 더불어 마치 산의 한 부분인 듯 훌륭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그 전각은 한 채의 웅장한 장원(莊園) 내의 후원에 있었으 며 주위로는 역시 정교하게 가꾸어진 화원과 연못, 그리고 가산이 있었다. 그것은 실로 수려한 구조물로 그 주위에는 잔설이 채 녹지 않고 쌓여 있었다. 그러나 긴 겨울의 막바지는 이제 봄을 맞아들일 준 비를 하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나 열려져 있는 삼층 전각의 창문, 그곳에는 한 아름다운 여인이 홀연히 창 밖을 응시하며 서 있었다. 종리유향(鐘里有香). 바로 천하제일지녀이자 천룡보의 금지옥엽이며 절음폐혈증을 앓고 있는 비운의 소녀였다. 그녀는 멀리 산봉에 쌓여 있는 잔설을 바라보며 넋을 잃고 서 있 었다. 그녀의 안색은 무척 창백했고 모습 또한 다소 초췌했으나 역시 타고난 우아한 미(美)는 여전했다. 지금 그녀가 들어있는 전각 삼층의 방은 궁전을 방불케할 정도로 화려했고 그녀의 바로 뒤에는 두 명의 청의시녀들이 시립하고 있 었다. 종리유향의 우수에 젖은 눈은 산봉의 잔설을 바라 보았다.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다.' 그녀의 눈에는 몽롱한 기운이 어렸다. '하후성....... 나의 마음 속에 처음으로 사랑을 심어준 분, 그리 고 아버님과 전 중원의 운명... 그 모든 것이 저 잔설에 덮혀 쓰 러졌다.' 문득 그녀는 자잘한 기침을 쏟아냈다. '이제... 이 마지막 겨울이 가면 나도 사라지겠지. 후회는 없다. 그러나.......' 그녀의 등 뒤에서 한 줄기 부드럽고 다정한 음성이 들려왔다. "종리소저, 몸도 좋지 않은데 왜 창문을 열어놓고 계시오?" 독고황이었다. 그는 여전히 흑의를 입고 있었으며 창백할 정도로 흰 영준한 얼굴과 흑의가 좋은 대조를 이루어 그의 기질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종리유향은 몸을 돌리지 않았다. '이 분.... 지난 반 년이 넘는 동안 이 분은 나를 자신의 몸처럼 아껴주었다. 처음에 나는 그 얼마나 이 분을 증오했던가? 천혈성 의 마성을 타고난 전 무림의 공적, 그러나 유독 나에게 있어서만 은.......' 그녀의 마음 속에는 자신도 모르게 달콤한 느낌이 가득 차오르고 있었고 독고황이 다시 부드럽게 말했다. "종리소저, 창문을 닫고 안으로 드시오." 그러나 종리유향은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처연히 대답했다. "아니에요, 잔설을 구경하고 싶어요." 독고황은 두 눈 가득히 연민의 정을 담고 다시 권유했다. "잘못하면 찬 바람에 건강을 해치게 되오." "어차피... 이 겨울이 지나면 새 봄을 다 보지도 못하고 죽을 목 숨...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독고황의 안색이 변화를 일으켰다. "아니오, 낭자는 아직 건강하오. 어찌 그런 말을 하시오?" 종리유향은 비로소 몸을 돌리더니 독고황의 염려에 가득찬 눈을 응시하며 미소지었다. "하늘의 뜻은 어길 수가 없는 법이에요." 그 말에 독고황의 가슴 속에서는 갑자기 뜨거운 기운이 북받쳐 올 라왔다. 그는 격동을 일으키며 두 손으로 그녀의 가냘픈 양 어깨 를 잡았다. "낭자는 죽지 않소! 아니, 절대로 죽을 수가 없소. 내가, 이 독고 황이 그것을 허락치 않을 것이오. 천하패존인 나의 명령을 어기고 당신이 어찌 죽을 수가 있단 말이오?" 독고황의 음성은 거의 처절함에 가까웠다. 그것은 실로 놀라운 일 이 아닐 수 없었다. 태산이 무너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일대 의 마웅(魔雄)이 독고황 아닌가? 그런데 그가 일개 여인으로 인해 이토록 감정이 격해지다니 타인 이 보아도 그럴진대 정작 당사자인 종리유향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공자님, 아니 황(皇).... 소녀는 당신에게 무척 감사해요. 보잘 것 없는 저 하나 때문에 아버님을 비롯한 수많은 무림인들을 해치 지 않고... 그리고 또 이렇게까지 소녀를 보살펴 주시니......." 종리유향은 얼굴에 홍조를 띄우고 있었다. "짧은 인생이나마 소녀는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해요." "유향(有香)!" 독고황은 자신의 감정을 주체할 길이 없는듯 그녀를 껴안았다. "황......." 종리유향 역시 나직히 그의 이름을 부르며 안겨 들었다. 오랫 동안 하후성의 그림자 때문에 방황하던 그녀의 마음은 이 순 간 완전히 독고황에게로 깊이 스며들고 있었고 그것은 비로소 확 신하게 된 뜨거운 애정이었다. 독고황도 그것을 느낄 수 있었으며 그는 가냘픈 종리유향의 몸을 굳세게 껴안고는 내심 부르짖었다. '유향... 너를 놓치지 않겠다. 나는 가장 친한 벗도 잃었다. 처음 으로 사랑을 느낀 너마저 잃은다면 나는, 나는.......' 두 사람의 가슴은 뜨겁게 불타 올랐고 아울러 그들은 언제까지고 그렇게 있을듯 움직이지 않았다. 전실(殿室). 그곳에는 청의 중년문사와 독고황이 대좌하고 있었다. 중년문사는 바로 희대의 대마두인 불사지존 백리극이었으며 그는 고요한 눈으로 독고황을 바라보며 물었다. "황. 마음이 괴로우냐?" 독고황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렇게 괴롭게 될 것을 왜 한 병밖에 없는 만년학정혈을 그녀에 게 먹이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주었느냐?" 독고황이 대답이 없자 백리극은 탄식했다. "이제는 후회해도 어쩔 수 없다." 비로소 독고황은 입을 열었다.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사부님." 불사지존 백리극은 고개를 저었다. "황. 정말 이 사부는 너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지만 이번 일 만 큼은 너를 이해할 수가 없구나." 그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황. 내 말을 잘 들어라. 하후성이라는 아이는 너의 천적(天敵)이 다. 비록 그의 내공이 폐쇄되었다고는 하나 앞으로 어찌될지 모르 는 일이다." 독고황은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이미 제자는 천로와 지로를 그에게 붙여 놓았습니다. 그들의 무 공은 오대마성에 못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이 합치면 천하에 당할 자가 없습니다." "음......." 백리극은 침중한 신음을 발했으나 곧 무슨 생각을 했는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황. 걱정이구나. 네가 유향 그 아이 때문에 대업을 그르친다 면......." 그 말에 독고황의 눈에는 이제까지 없었던 강렬한 신광이 번쩍 솟 아 나왔다. "사부님. 염려마십시오. 제자는 결코 사적인 일과 공적인 일을 분 간 못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대업을 달성할 것입니다." 백리극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음. 그러나 그 아이의 목숨은 앞으로 길어야 반 년이다. 어쩌면 이번 마지막 남은 겨울조차 못넘길지도 모른다. 너는 그 고통을 견딜 수 있느냐?" 독고황의 얼굴이 어둡게 변했고 그것을 본 불사지존 백리극의 얼 굴에 괴이한 빛이 어렸다. "황. 그 아이에게 천마환혼영체대법(天魔還魂靈體大法)을 쓰는 것 이 어떠냐?" 독고황의 안색이 홱 변했다. "안 됩니다! 그것 만은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러나 영원히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 독고황의 눈에는 강한 집념의 불꽃이 튕겼다. "설사 유향을 죽일지언정 그녀를 혼백이 상실된 마녀로 만들지는 않겠습니다. 차라리 순결한 유향의 모습을 평생 기억 속에 간직하 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유향 또한 그것을 원할 것입니다." "음." 문득 사이(邪異)한 광채가 백리극의 눈에서 번뜩였으나 그는 금새 그것을 지워버리더니 무겁게 말할 뿐이었다. "황. 너는 이 겨울을 유향을 돌보며 이곳에서 지내라. 노부는 봄 이 오기 전에 노부 평생의 숙원을 달성하겠다!" "아!" "오대마성과 전 마종지문의 고수를 이끌고 소림사를 공격하겠다. 수천 년 동안 아무도 소림을 무너뜨리지 못했으나 이번에 노부가 기필코 소림 삼성승을 죽이고 소림을 영원히 멸망시키겠다!" 불사지존 백리극의 두 눈에서는 서리서리 가공할 패기와 집념, 야 욕이 불타 올랐다. "흐흐흐... 수천 년 간 유아독존 격으로 내려온 소림을 내가, 이 불사지존이 무너뜨리고야 말겠다!" ② 봄. 삼월(三月). 길고 긴 겨울도 부드러운 봄처녀의 향긋한 숨결에 밀려 도망쳤으 니 강(剛)을 이기는 것이 유(柔)이듯 혹한의 겨울도 마침내 살랑 대는 봄의 훈풍에 ㅉ겨나고 말았다. 황혼. 삼 월의 석양(夕陽)은 따스한 느낌을 주었다. 한 채의 장원(莊園), 그리고 한 화려한 방 안. 하후성은 창문을 열고 서산에 걸린 석양과 봄바람을 감상하고 있 었다. 그러나 감상이란 어쩌면 한가한 사람들이나 즐기는 사치스 러운 감정일런지도 모른다. 어쨌든 지금 하후성의 심정이 그런 기분이 아님은 확실했으니 기 실 그는 창 밖에 가득 피어있는 화원의 봄꽃들에게서 향기가 풍겨 옴에도 불구하고 꽃을 보지 않고 있었다. 방문이 열리며 한 황의미녀가 걸어 들어왔다. 호연연(胡娟娟)이었다. 그녀는 다가와 부드럽고 다정하게 물었다. "성랑, 무엇을 보고 계신가요?" "꽃을 보고 있소." 하후성은 내심과는 달리 그렇게 말했고 호연연도 그 점을 눈치챈 듯 그의 곁으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성랑. 아직도 마음이 편치 않으신가요?" 하후성은 그녀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아아, 성랑! 소녀는 당신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 또 그것을 굳이 만류하고 싶은 생각도 없어요. 당신은 원래부터가 그 런 분이니까요." 그러나 하후성은 전혀 다른 말을 꺼냈다. "교랑(嬌 )은 어떻소?" "화미(花美) 언니가 돌봐주고 있어요. 아마 며칠 안으로 아기를 낳게 될 거예요." 하후성의 안색에는 별다른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으나 누가 알랴? 그의 마음에는 실로 커다란 기복이 일고 있었다. '아기를 낳게 된다고?' 호연연이 그를 보며 다시 말했다. "성랑, 백언니에게 너무 차갑게 대하지 마세요. 그녀는 진정으로 성랑을 사랑하고 있어요." 하후성은 몸을 돌려 호연연을 응시했다. 너무나 아름다운 여인, 호연연은 마치 활짝 핀 모란(牡丹)을 연상케 하는 순결하고도 그 윽한 미(美)를 풍겨내고 있었다. 하후성은 담담한 눈길을 그녀에게 주며 입을 열었다. "연연, 오늘따라 아름답게 치장했군. 대체 누구에게 보일려고 그 렇게 아름답게 꾸몄지?" 호연연은 얼굴에 홍조를 띄우며 고개를 떨구었으나 내심 가슴이 무척 쓰렸다. '성랑.... 당신은 너무나 야속하군요. 알면서도 묻는 당신의 그 저의는 무엇인가요? 그래요, 당신 때문에 연연은 이렇게 치장을 했답니다. 언제나 머나먼 허공 만을 응시하는 당신의 눈을 잡아두 기 위해서.......' 그녀의 눈에서 수정같은 눈물방울이 아롱져 떨어졌으나 하후성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는 무심한 투로 말 했다. "연연, 당신은 천하제일의 미녀이자 재녀(才女)요. 천하에 어떤 남자라도 당신을 보면 애정을 느낄 것이라는 말이오." 호연연은 가슴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그... 그게 무슨 말인가요?" "아름다운 꽃도 세월이 흐르면 시드오. 연연, 당신은 이 좁고 답 답한 곳에서 평생을 지내게 되는 것이 싫지 않소?" 호연연의 안색은 갑자기 충격을 받은 듯 창백하게 변했다. "성랑... 다... 당신은......." 그녀는 말을 끊더니 섬섬옥수로 눈물을 씻었다. 그리고 그녀는 처 량한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성랑. 당신이 절 보고 죽으라고 하면 죽겠어요. 제가 보기 싫다 면 때려도 좋아요. 그러나... 그러나 떠나라는 말 만큼은 하지 말 아 주세요. 제발......." 하후성의 굳어있던 마음에 비로소 격동이 치밀어 올랐다. 그는 갑 자기 두 손으로 호연연의 어깨를 꽉 쥐며 말했다. "연연! 언젠가 세월이 흐르면 당신은 후회할 것이오." 그러나 호연연은 눈물어린 눈을 깜박이지도 않으며 고개를 흔들었 고 그 바람에 구슬같은 눈물이 떨어져 하후성의 손목을 적셨다. "미모가 무슨 소용이 있나요? 재지(才智)가 무슨 소용이 있나요? 만인의 선망도 소용 없어요. 저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성랑, 당신 의 애정뿐이에요." "연연......." 하후성의 마음은 마침내 여인의 부드러운 눈물에 녹아버렸다. 그 는 호연연을 와락 끌어 안았다. "연연, 당신은 너무나 어리석소." 호연연은 다시 뭐라 말하려 했으나 더이상 말할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그것은 그녀의 입술이 하후성의 입술에 의해 덮혀버렸기 때문이었다. '아아! 이게... 꿈인가요, 현실인가요? 성랑.......'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며 하후성의 목을 끌어 안았다. 깊고 깊은 입맞춤이었다. 두 사람의 입술은 서로의 애정을 캐내려 는 듯 뜨겁고 진하게 맞부딪치고 있었고 또한 그들의 혀와 혀는 서로를 수없이 확인하고 또 찾았다. '아아.......' 호연연의 가슴은 뜨겁게 파동치며 사나이의 한 없는 격정과 사랑 을 받아 들였다. 이윽고 하후성은 그녀를 안고는 서서히 걸어 자신의 침상 위에 반 듯이 눕혔다. 황혼은 일락서산(日落西山). 어둠이 몰려옴과 함께 방 안은 고요 한 춘풍(春風)이 넘쳐 흘렀다. "오늘 밤... 그대와 함께 하겠소." 하후성의 열정적인 음성이 꿈결같이 호연연의 귓전에 떨어졌다. 뒤이어 그녀는 자신의 몸에서 옷자락이 하나씩 벗겨져 나가는 것 을 느꼈다. 잠시 후 그녀는 태초 이래의 완전한 알몸이 되었다. 솟을 곳이 알 맞게 솟아오르고 꺼질 곳이 미묘한 계곡을 이룬 호연연의 육체는 실로 찬탄을 금치 못할 정도로 완숙미를 이루고 있었다. 어슴프레한 잔영 속에 드러누운 여체의 신비로움, 그것은 밝은 곳 에 노출된 모습을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은은하면서도 뜨거운 유혹 과 충동을 불러 일으켰다. 학처럼 고운 목의 선은 가슴에 이르러 두 갈래의 굴곡을 이루었는 데 여인에게 있어 가장 소중하며 순결한 모성(母性)이 잠재된 젖 가슴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또한 젖가슴 끝의 작은 열매는 미지의 희열과 두려움, 그리고 불 안스러운 기대로 인해 미미하게 떨고 있었다. 아랫배로 이어지는 미끈한 곡선(曲線)과 완만한 구릉은 대지(大 地)처럼 누워 있었고, 그 아래 초지(草地)는 숨막히는 긴장 속에 어둠을 뭉쳐 안고 깊이 깊이 전율스런 호흡을 일으키고 있었다. 게다가 두 다리는 대리석처럼 반듯하고 수려하게 뻗어내린 채 세 상에서 오직 한 사람 만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아!" 호연연은 자신의 육체가 서서히 끓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며 가늘 게 신음했다. 그때였다, 하후성의 손길이 그녀의 육체에 닿은 것 은....... "흑......." 그녀는 호흡이 급해지는 것을 느끼며 바르르 전율함과 동시에 발 끝을 오무렸다. 그 순간 사나이의 육중한 체중이 그녀의 몸에 가 득히 실렸다. 어느새 하후성은 옷을 벗고 있었고 사나이의 육체는 퍼득이는 여 인의 가슴과 온 몸을 짓눌렀다. "으... 음." 호연연은 신음이 고조됨을 억제치 못하며 미끈한 팔로 하후성의 목을 휘감았다. 하후성의 남성은 여인이 굴복하는 것을 원치 않았고 함께 그들은 오지에 들어갔다. 단 한 치의 빈 틈도 없이 두 사람의 육체는 밀 착되고 접합되었다. 활활 타오르는 육체의 불꽃, 정염(情焰)의 화신이 뜨거운 정해의 파도를 뛰어 넘고 있었다. 꽃과 나비가 서로 어울려 백 년의 공생 (共生)을 꿈꾸듯 뜨겁게 그들은 영육(靈肉)을 불태웠다. 호연연은 온 몸에 가득히 번지는 무한한 희열과 행복감에 다시금 눈물을 떨구었다. '아아! 성랑, 성랑... 이제 우리는 하나가 되었어요. 이제 그 누 구도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아아... 성랑, 사랑합니 다.......' 밤, 뜨거운 밤이었다. "으아... 앙......." 장원(莊園)의 또다른 한 모퉁이, 힘찬 새 생명의 탄생을 알리는 어린 아이의 울음소리가 그곳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모체에서 열 달 동안 자란 후 처음으로 세상의 광명(光明)을 접하 게 된 아기는 힘찬 울음을 터뜨림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 리고 있었다. 하후성은 방문 밖에서 그 울음소리를 듣는 순간 벅찬 감동과 희열 을 느꼈다. '드디어.......' 문이 열리며 백의를 입은 미녀가 나왔다. 그녀는 바로 백화미였 다. 그녀의 얼굴은 땀방울이 맺힌 채 흥분과 감동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어떻게 됐소? 아기는......?" 하후성이 격정을 삼키며 묻자 백화미는 생긋 웃으며 떨리는 음성 으로 말했다. "아들이에요! 귀여운 옥동자(玉童子)를 낳았어요!" "아들이라고? 하하핫... 아들이라고?" 하후성은 웃었다. 이 순간 만은 만사의 시름을 잊으려는 듯 호탕 하게 웃고 있었다. 지난 반 년 동안 한 번도 웃지 않던 그가 처음 으로 자신의 분신(分身)인 아들의 탄생에 웃음을 터뜨린 것이었 다. 그는 백화미에게 물었다. "교랑은?" "무사해요. 그녀는 지금 당신을 찾고 있어요." 하후성은 진심이 담긴 어조로 말했다. "고맙소. 화미." 그 순간 백화미는 가슴이 뭉클함을 느꼈다. '고맙다고? 그런데 분명 화미라고 했어. 이 분이.......' 그러나 하후성은 이미 날 듯이 방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곧바로 침상으로 달려갔다. 침상 위에는 매군, 즉 매교량이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호연연이 막 목욕을 끝낸 어린아 이를 품에 안아들고 있었다. "아... 앙! 아앙......." 아기의 힘찬 울음소리에 하후성은 가슴이 찡하는 것을 느꼈다. 매 교랑이 수척해진 얼굴에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성랑, 보세요. 당신의 아기예요. 바로 당신의 분신이자 천첩 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후성은 아기를 받아 안았다. 그러자 기 이하게도 아기는 울음을 뚝 그치고는 앙징스러운 손으로 허공을 저었다. 맑은 눈을 상큼 떠 그를 쳐다보며 방글방글 웃는 아기, 정녕 귀엽 고 탐스러운 옥동자였다. 하후성은 가슴이 마구 뛰는 것을 느끼며 아기의 터질듯 발그레한 뺨을 감싸쥐었다. "이녀석, 네가... 네가 나의 아들이냐? 네... 네가?" 곧 가슴에 진한 감동의 물결이 번지자 그는 한동안 아기를 안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첫 아들을 본 아버지의 심정이 이럴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었다. 천하(天下)를 얻은 느낌이 이러할까? 한없이 마음이 넓어지는 기 분은 물론 전신이 훈훈함으로 가득 차오르는 듯했다. 이윽고 하후성은 침상으로 다가가 매교랑의 어깨를 짚더니 그녀의 창백한 뺨을 어루만지며 다정히 말했다. "교랑, 정말 수고했소." 매교랑은 생긋 웃어 보였다. "성랑... 기뻐요." 그녀의 맑은 눈에서 눈물이 아롱지는 것을 보며 하후성은 아기를 가슴에 지그시 안았다. 그리고 어느새 잠이 든 아기를 내려다보며 내심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아가야, 너는 나의 분신이다. 이 하후성의 또다른 생명이란 말이 다. 알겠느냐?' 하후성의 가슴 속에서는 일말의 희망이라는 것이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새로운 생명(生命)의 탄생, 그것은 결국 또다른 운명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일까? ■ 대소림사 제3권 제31장 소림혈풍(少林血風) -1 ━━━━━━━━━━━━━━━━━━━━━━━━━━━━━━━━━━━ ① 하후성의 모습은 무척이나 수척해져 있었다. 그것은 독고황으로부터 무형무혼천절수에 의해 내공이 소실된 후 필연적으로 오는 결과일런지도 몰랐으나 또한 단순히 그때문만도 아니었다. 그는 매교랑이 아이를 낳은 열흘 후부터 근 한 달 간을 자신의 처 소에 틀어 박힌 채 꼼짝도 하지 않고 무엇인가에 골몰해 있었다. 지금 그의 앞에는 관동삼괴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하후성은 드디 어 입을 열었다. "삼괴, 그 동안 내가 구결(口訣)로 전수해준 무공을 모두 연성했 는가?" 대괴 시천공이 공손히 대답했다. "네, 주인님. 덕분에......." 하후성은 기이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오늘 내가 그대들을 부른 이유를 아는가?" 이번에는 시천지가 반문했다. "주인님의 깊은 마음을 어찌 저희들이 추측하겠습니까?" 하후성은 탁자 위에 놓인 한 장의 종이를 그들에게 주었다. "이것을 보아라." 관동삼괴는 의아하여 종이를 받아 바닥에 펴보았다. 종이에는 복 잡한 도형이 무수히 그려져 있었다. "그것은 바로 무회곡(無回谷), 즉 이 장원 주위에 설치되어 있는 구구무회멸멸대진(九九無回滅滅大陣)의 도해다." 관동삼괴의 안색이 일제히 굳어지자 하후성은 무겁게 말했다. "그대들은 내일 밤 이 무회곡을 탈출해라." "아!" "소림사로 가서 내가 이곳에 갇혀 있음을 알려야 한다." 시천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님의 뜻을 알겠습니다." 하후성의 말투는 아까보다 더욱 어두웠다. "명심(明心)해라. 이 구구무회멸멸대진은 이른바 죽음의 절진(絶 陣)으로 최소한 이 진 속에서 너희 세 명 중 두 명은 죽을 것이 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서는 진영을 빠져나갈 수가 없다." 관동삼괴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으나 이괴 시천수가 먼저 결심을 굳힌 듯 단호하게 말했다. "옛부터 미인(美人)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죽고, 참다운 무사는 진정한 주군(主君)을 위해 죽는다고 했습니다." 대괴 시천곡도 결연한 어조로 부언했다. "저희 삼형제의 목숨은 이미 주인님께 맡긴 것입니다. 어찌 이제 와서 죽음을 두려워 하겠습니까?" 삼괴 시천지 또한 주먹을 움켜 쥐었다. "구구무회멸멸대진이 제아무리 무섭다 해도, 또 저희 삼형제가 그 곳에 뼈를 묻는 한이 있다 해도 저희는 기필코 주인님의 뜻에 따 르겠습니다." 하후성은 만면에 격동을 일으켰다. "고맙다, 삼괴."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이루 형언키 어려운 괴로움이 함께 떠오르 고 있었고 이를 아는 듯 시천공이 말했다. "염려 마십시오. 주인님. 비직들은 목숨을 걸고 임무를 완수하겠 습니다." 그리고 그들 삼괴는 모두 예를 갖춰 하후성에게 삼 배(三拜) 했으 며 하후성은 잔뜩 충혈된 눈으로 그런 그들을 바라보았다. 하후성은 비록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내심 자책과 고통으로 처절히 부르짖고 있었다. '삼괴, 미안하다. 그러나 대의(大義)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으 니... 너희가 가는 길은 바로 사지(死地), 단 한 명도 살지 못한 다. 그러나... 그럴 수밖에는.......' 밤이었다. 무회곡(無回谷)이란 이름 그대로 한 번 들어가면 영원히 나오지 못하는 계곡이던가? 누가 그런 이름을 붙였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무회곡에 설 치되어 있는 구구무회멸멸대진이 그것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천연 적인 기암괴석(奇岩怪石)을 바탕으로 펼쳐져 있는 가공할 절진(絶 陣)....... 게다가 무서운 절정고수 팔십 일 명이 진 속의 요지를 지키고 있 었으니 그야말로 하늘을 나는 새라 할지라도 이곳을 빠져나간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했다. 무회곡의 밤. 나삼의 미녀는 밤하늘에 총총히 뜬 별을 바라보며 두근거리는 가 슴을 달래고 있었다. 등불에 육체의 굴곡이 은은히 비쳐보이는 묘한 차림새로 서있는 여인은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천하우물(天下羽物)로 이름이 드 높았던 백화미였다. 그녀의 마음은 지금 온통 기대와 흥분, 그리고 사랑의 감정으로 설레이고 있었다. '그 분이 오늘밤 나를 불렀다. 그 분이... 그 분이.......' 사실 지난 수 개월 동안 하후성은 백화미를 한 번도 단독으로 부 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밤 그가 백화미를 은밀히 자신의 처 소로 불렀고 그 부름을 전달한 사람은 관동삼괴의 첫째인 시천공 이었다. '대체 무슨 일일까? 그 분이 나를 부른 이유는.......' 백화미의 고혹적인 양 뺨은 도화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어쨌든 좋다. 단지 그 분이 나를 불렀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나는 더없이 기쁘니까.' 하후성의 처소였다. "성랑(星郞)." 백화미는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 그러자 즉시 안에서 착 가라앉 은 하후성의 음성이 들려왔다. "들어오시오. 화미." 그녀는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다. 궁등이 밝게 밝혀져 있는 방 안 에서 하후성은 탁자에 단정히 앉아 있었다. 그는 맑게 웃으며 말했다. "어서 오시오. 화미." 백화미는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하후성의 맞은 편에 앉았다. 그 덕분에 하후성은 환한 궁등 아래에서 나삼을 통해 그녀의 폭발적 인 마력을 지닌 육체의 굴곡을 완연히 볼 수 있었다. "웬일로 이 밤에 저를 부르셨나요?" 정염이 담긴 백화미의 두 눈이 그를 똑바로 바라 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곧 물처럼 고요한 하후성의 눈길을 대하자 움찔하고 말았 다. 타올랐던 마음은 이내 식어버렸고 하후성의 담담하면서도 신 중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대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어서요." 백화미는 울컥 가슴이 저려 왔다. '과연... 이 분은 오늘밤 나를 원한 것이 아니었구나.' 그녀는 이제까지의 모든 기대가 일시에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느 꼈으나 입술을 잘근 물었다. "어떤 부탁인가요?" 하후성의 얼굴이 갑자기 엄숙하게 변했다. "화미. 나는 이 무회곡을 벗어날 것이오." "그, 그건!" "그러기 위해서는 화미의 힘이 필요하오." 백화미는 불현듯 입가에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성. 당신은 진정... 조금도......." 그러나 곧 그녀는 고개를 다시 들었다. 그녀의 눈은 매서우리만치 진지하게 반짝였다. "성, 제가 어떻게 무엇을 하란 말인가요?" 하후성은 그녀를 주시하며 말했다. "내일 밤 이곳을 탈출하여 다가오는 중양절(重陽節)에 이것을 악 양에 있는 악양루의 현판에 꽂아 주시오." 그는 품 속에서 한 자루의 검은 색 화살을 꺼냈다. 그것은 길이가 한 뼘밖에 되지 않았으나 웬지 모를 섬뜩한 느낌을 주고 있었고 화살의 날개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었다. <현천령(玄天令)> 백화미는 그 화살을 바라보며 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현천령은 과거 하후성이 숭산의 태실봉에 있는 승불폭 뒤의 동굴 에서 만난 적미천존(赤眉天尊) 여적성에게서 얻은 것이었다. 하후 성은 현천령을 탁자에 꽂으며 말했다. "이것을 악양루의 현판에 꽂으면 십 일(十日) 안으로 찾아오는 사 람이 있을 것이오. 그때 그들에게 내가 처한 상황을 모두 알려 주 시오." "그것... 뿐인가요?" "그렇소." "단지... 그것뿐인가요? 저를 부른 이유는?" "그... 렇소." 백화미의 안색이 처연해지는가 싶더니 그녀의 눈에는 삽시간에 이 슬이 맺혔다. 그러나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다시 한 번 입술 을 잘근 물었고 갑자기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녀는 지극히 요염하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성. 그렇다면 저에게도 부탁이 있어요." 하후성은 가슴이 뜨끔하는 것을 느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② 백화미는 서서히 몸을 돌렸다. 스르르르....... 그녀가 한 바퀴 돌자 그녀의 몸에 걸쳐져 있던 한 겹의 나삼은 가 벼운 음향과 함께 벗겨져 나갔고 그녀는 완전 나체가 되어 밝은 궁등 아래 섰다. 하후성의 눈이 크게 부릅떠지는 것을 보며 백화미는 불타는 음성 으로 말했다. "이것이 저의 부탁이에요." 하후성은 그 순간 분명히 보았다. 그녀의 두 눈에서 강렬한 정열 의 불꽃과 함께 서글픈 애정이 자학하듯 마구 뒤엉키는 것 을....... 그리고 백화미의 폭발적인 유혹을 불러 일으키는 나신이 단지 한 송이의 서글픈 꽃으로 보인 것도 그때였다. 활짝 피었으나 열매를 맺을 수 없어 이내 스스로 져버릴 꽃, 그것 은 찬란하도록 아름답지만 산중에서 무심히 지는 달을 소원하며 슬픔의 피를 토하고 있었다. 마침내 하후성은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다가갔다. "화미......." 백화미의 나신이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고 그녀는 입을 열어 물었 다. "성. 마지막으로 물어볼 말이 있어요." 하후성은 다가가던 걸음을 뚝 멈추었다. "당신의 마음 속에는 이 화미가 들어설 공간이 조금도 없나요? 나 백화미는 영원히 당신을 사랑할 자격이 없나요?" 하후성의 두 눈 끝이 파르르 떨렸고 백화미의 두 눈에는 최후의 간절한 열망이 어렸다. 그녀는 내심 이렇게 부르짖고 있었다. '성, 거짓이라도 좋아요. 저를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면 화미 는... 화미는... 죽어도 좋아요!' 하후성은 손을 들어올려 매끄러운 곡선을 그려내린 백화미의 가녀 린 어깨를 잡았다. 그는 백화미가 전율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 다. 하후성의 입이 떨어졌다. "화미. 나는 결코 무정(無情)한 사내가 아니오. 내가 그 동안 그 대에게 냉정하게 대한 이유는 오직 나로 인해 그대가 불행해질까 봐 그런 것뿐이었소. 만약 내가 다시 삶을 찾을 수만 있다면... 영원히 그대와 함께 살 것이오." "아아!" 백화미라 이름 붙여진 외로운 들꽃(野花), 그녀는 이제야 자신의 개화(開花)가 헛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주인의 손길을 향 해 다가가는 그녀는 희열의 탄성을 발하며 전신을 떨고 있었다. "성랑!" 그녀는 격렬하게 하후성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진정으로......." "화미......." 하후성은 백화미의 육체가 용광로처럼 뜨겁게 달아오른 것을 느꼈 고 그 인해 그의 잠자던 남성의 욕망은 거센 불꽃을 일으키며 점화되었다. 그는 백화미의 육체를 번쩍 안고 침상으로 걸어갔으며 잠시 후에 는 그녀의 터질 듯이 풍만한 젖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아아아!" 백화미는 두 손으로 하후성의 머리칼을 움켜쥐며 온 몸의 뜨거운 열을 주체하지 못한 듯 마구 떨었다. 이윽고 하후성 또한 스스로의 옷을 벗어던졌다. 그러자 단단한 그 의 육체도 적나라하게 궁등 아래 드러나며 힘찬 남성의 상징이 여 인의 굴복을 요구하듯 몸을 일으켰다. 두 남녀의 육체는 서로를 뜨겁고 격하게 탐닉했다. 기실 그 동안 얼마나 원했던가? 천하우물의 요녀(妖女), 게다가 마(魔)와 순정의 양면성을 가진 희대의 미녀 백화미는 이제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녀는 천하에서 오직 단 한 사람 만의 사랑의 포로가 되기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온갖 미태와 폭발적인 뜨거운 정염을 풀어 놓 고 있었다. 백화미의 전인미답의 육체를 마음껏 오가던 하후성의 입술과 혀, 손길의 애무는 극점에 달했다. "아... 학!" 백화미의 육체는 드디어 비등점으로 치달아 올라 강렬한 육향을 발산시켰고 사나이의 몸을 뱀처럼 휘감은 채 몸부림쳤다. 사나이의 입술은 여인의 곳곳의 보루를 점차 무너뜨리더니 마침내 성문(城門)을 힘껏 파고 들었다. "아학!" 여인은 굴복의 신음을 발했다. 두 남녀의 신음은 곧 합일(合一)되 어 끝없이 비등했고 완벽하게 합쳐진 두 육체는 끝없이 서로의 살 (肉)을 혼입하며 뜨겁고 긴 항해를 시작했다. 침상은 열풍(熱風)에 휘말렸다. 백화미는 다소곳이 하후성의 옆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도화빛이 은은히 어려 있어 한결 더 매혹적이었으 나 이제까지와는 달리 흡족하고 양순한 모습이었다. 하후성은 그녀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무회곡에 설치되어 있는 구구무회멸멸대진은 구구팔십일로(九九 八十一路)의 지로(支路)가 어지럽게 얽혀 있는 절진 중의 절진이 오. 그리고 이곳의 팔십일로는 모두 사문(死門)으로, 생문(生門) 은 단 한 곳도 없소." 백화미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러나 생문을 만들 수는 있소. 이미 관동삼괴로 하여금 절진 속 으로 들어가도록 했소. 그들은 팔십일로를 지키고 있는 고수들과 처절한 악투를 전개할 것이오. 그렇게 되면 필히 절진을 지휘하는 천로와 지로는 팔십일로를 구로(九路)의 사진(死陣)으로 전환시켜 단숨에 관동삼괴를 죽이려들 것이오. 그때......." 하후성은 탁자에 놓인 한 장의 종이를 백화미에게 보여주며 설명 했다. "이것은 화진법(和陣法)을 설명한 도해요. 구구무회멸멸대진은 십 종이 넘는 각종 진법이 배합된 것이나 이곳의 대종은 바로 구 궁 (九宮)으로써, 구 문(九門)을 모두 사문(死門)으로 만든데 이 진 법의 무서움이 있소." "아!" "그러나 여기에 화진법을 인도하면 구 궁을 십 절(十絶)로 바꿀 수 있소. 이렇게 진법에 변화를 주면 구 사문(九死門)에 일 생문 (一生門)을 가하게 되어 그쪽으로 탈출할 수 있을 것이오." 백화미는 탄성을 발하는 한편 감탄과 존경의 시선으로 하후성을 응시했다. "어쩌면... 성랑의 머리 속에는 그렇게 많은 학문이 들어 있나요? 마의 절진을 바꾸어 놓다니, 이건 그 누구도 상상조차 못할 일이 에요." 그러나 하후성은 담담히 말했다. "모든 것이 천기사숙님께 배운 것이오." "그랬군요." "내일 밤 그대는 동(東)으로 들어가서 서(西)로 나가시오." "네." "반드시 중양절 날 악양루 현판에 현천령을 꽂는 것을 잊지 마시 오." 백화미는 궁금한 듯 물었다. "그렇게 되면 누가 오나요?" "그렇소. 그들은 이제껏 강호에 한 번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던 무서운 제 삼의 세력이오. 그들이라면 이 무회곡을 능히 파괴시킬 수 있을 것이오." "아아!" 백화미는 다시 한 번 탄성을 발하더니 갑자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얼굴을 붉히며 하후성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성랑. 저에게 입을 맞춰 주세요." 하후성은 빙긋 웃으며 그녀의 꽃잎같은 입술 위에 자신의 입을 맞 추었다. 꿀같이 달콤한 입술이 하나로 협쳐지며 달콤하고도 향기 로운 타액이 오고갔다. 한참 후에야 백화미는 입술을 떼었다. "그럼, 성랑......." 그녀는 몸을 일으켜 방을 걸어나갔다. 그러나 그녀가 문을 여는 순간 하후성은 그녀를 불렀다. "화미." 그녀가 돌아다보자 하후성은 담담히 말했다. "사랑하오." "아!" 백화미의 하얀 얼굴에 갑자기 주르륵 두 줄기 옥루가 흘러내렸다. 그녀는 담뿍 행복한 미소를 머금은 뒤 밖으로 나갔다. 그녀의 마음은 온통 찬란한 행복감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리고 밤 하늘의 별도 그녀의 심정을 아는 듯 더욱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 다. 한편 하후성은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롱한 별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었으며 기이한 신태가 어리는 얼 굴로 그는 내심 이렇게 부르짖고 있었다. '이제 침착하게 기다리는 것이다. 천기(天機)는 뜻한 자에게 내려 진다. 황. 올해가 가기 전에 너와 나는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 다.' ③ 호수는 고요했다. 오직 정적뿐....... 그러나 그 호수에 한 개의 돌멩이를 던져 보라. 한 차례 파문이 고요한 호수를 삽시에 흔들며 수 없는 물결을 그려내지 않겠는가? 무림천하(武林天下). 가공할 마(魔)의 집단인 수라궁의 개파대전 이후 일 년 반 동안 무림은 너무나도 고요했다. 무림사상 일찌기 이토록 고요했던 적 은 없었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죽음의 그림자가 전 중원을 뒤덮 기 시작했음을 누가 알겠는가? 소림사(少林寺). 천여 년의 역사를 간직하며 면면히 그 맥을 이어 내려온 대소림사 의 불심각(佛心閣)에는 소림 삼성승(少林三聖僧)이 대좌하고 있었 다. 천심(天心), 천뢰(天雷), 천기(天機), 세 고승은 이미 오랫 동안 그런 상태로 앉아 있었다. 창문이 열려 있었고 창문을 통해 천공(天空)이 보였다. 천심선사 는 천공을 응시하며 나직히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드디어 암천(暗天)의 천혈성과 오대마성이 죽음의 핏빛을 뿌리누나. 엄청난 혈하(血河)가 전 중원을 적실 것이로 다." 그 말에 천뢰와 천기의 얼굴에 어두움이 떠올랐고 천심은 탄식하 며 말을 이었다. "적은 너무나 무섭다. 일찌기 무림사상 이렇게 강한 마성은 없었 다." 그는 눈을 내리감고 있는 천기선사에게 물었다. "천기사제. 느끼는 점이 있는가?" 천기는 눈을 뜨고 천공을 살피더니 암담한 어조로 말했다. "아미타불.... 핏빛 그늘이 소림을 덮고 있습니다. 소림의 좌(坐) 는 바로 무원성(武元星)입니다. 그런데 무원성을 천혈성의 혈기 (血氣)가 뒤덮고 있으니 이는 곧 소림혈겁(少林血劫)의 조짐입니 다. 천 년 이래 가장 무서운......." 그 말에 갑자기 천뢰선사가 눈을 부릅떴고 그의 고리 눈에서는 무 서운 분광이 쏟아져 나왔다. "어떤 놈이 감히 소림을 공격한단 말인가!" 그의 분노성은 불심각 전체를 쩌르릉 울렸다. "노납이 당장 그 놈들의 숨통을 끊어 놓겠소!" 천뢰는 커다란 두 주먹을 으스러져라 움켜 쥐었으며 천심선사가 불호를 외우며 나무랐다. "아미타불.... 천뢰사제, 자네의 화성(火性)은 아직까지 조금도 억제되지 않았군." 천뢰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의 호흡이 거친 것으로 보아 그 의 격분은 가라앉지 않은 것같았다. 그를 보며 천심선사는 내심 중얼거렸다. '어쩌면... 천뢰의 저 화성이 필요할런지도 모르지.' 그는 다시 천기선사에게 물었다. "천기사제. 혈겁의 조짐이 보인다고 했는가? 그렇다면 그들은 언 제쯤 소림에 당도하 겠는가?" 천기선사는 탄식했다. "내일 밤입니다." 천심, 천뢰의 얼굴이 일시에 굳어졌고 천심선사는 침중하게 불호 를 외우며 말했다. "아미타불.... 천기. 자네는 지금 당장 수라궁에서 돌아온 정혜 (丁慧)를 위시한 범천승 십이 명과 장경각의 모든 경전(經典)을 조사동으로 옮기게." 천기선사는 그 말에 대뜸 천심의 뜻을 짐작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그는 눈을 내려감은 채 연신 불호를 외웠고 그가 타고 있는 사륜 거가 미미하게 흔들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격동이 얼마나 큰 지 알 수 있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천뢰선사는 눈을 부릅뜨고 있었으며 그의 두 눈에서는 화광(火光)이 충천하는 듯했다. 천심선사는 가볍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소림은 영원하네. 그 누구도 소림을 무너뜨리지 못하 네. 아무리 험한 난관이 닥치고 마풍(魔風)이 불어와도 소림은 영 원할 것이네." 천심선사는 천공을 우러러 보았다. 그는 천공의 한가운데, 오대마 성과 천혈성의 반대 쪽에서 희미하게 깜빡이는 성좌에 시선을 던 졌다. '아미타불.... 현수(玄修).... 천기를 짚어보니 너는 반 년 후에 나 금제(禁制)가 풀리겠구나.......' 밤(夜). 밤은 안식과 평화의 상징이어야 하거늘 모든 음모는 밤에 펼쳐진 다. 그리하여 밤은 때로는 처절하고 공포스러운 혈겁(血劫)의 상 징이기도 했다. 언제부터인가 소림사가 있는 숭산 소실봉을 유령처럼 오르는 인물 들이 있었다. 천(千)... 이천(二千)... 아니, 헤아릴 수조차 없었 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이동에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 많 은 숫자가 움직이는 데 나뭇잎 하나 바스락대는 소리조차 없다 니....... 그들은 하나같이 가공할 무공의 소유자들인 것이었다. 현정(玄正). 그는 소림사의 지객원주(知客院主)였다. 소림 외가무공(外家武功)의 일인자이기도 한 그는 소림 칠십이절 예 중 나한기공(羅漢氣功)을 십이 성 익혀 전신에 창칼이 들어가 지 않는 금강불괴지신이었다. 그는 지금 한 그루 커다란 나무 밑에 앉아 합장하고 있었는데 그 나무는 보리수, 곧 부처가 득도했다는 나무였다. 그는 염주를 굴리며 계속 염불을 외웠다. 그는 두 눈을 굳게 감은 채 지극히 엄숙한 표정이었으며 그의 등 뒤에는 삼십 명의 중년화 상이 질서정연하게 앉아 있었다. 현정대사는 문득 입을 열었다. "정유(丁有)." "네, 사부님." 등 뒤에서 한 중년화상이 대답했다. "해탈이란 무엇인고?" 선문(禪問)인가? 그러나 이런 시각, 이런 상태에서 선문을 하다니 뭔가 모순이 느껴졌다. "허허허.... 수많은 대답이 있겠지. 그러나 노납은 그것을 단지 무(無), 그 하나로 보고 싶구나." 스스스스....... 어디선가 극히 경미한 음향이 울리더니 그것은 사방으로부터 좁혀 들기 시작했다. '왔구나.' 현정대사는 내심 이렇게 부르짖었으나 여전히 담담한 신색으로 다 시 입을 열었다. "불제자의 몸으로 해탈에 오르는 것 만큼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느 냐?" 그러자 갑자기 심금을 뒤흔드는 교소가 들려왔다. "호호호...! 화상. 네가 진정한 해탈을 얻고 싶다면 내가 시켜 주 겠다." 이와 함께 보리수 아래에 유령처럼 한 흑의인영이 나타났는데 그 녀는 바로 수년 전 소림사로 현오대사를 찾아왔던 흑의미부 단혜 령(段慧令)이었다. 현정대사는 서서히 몸을 일으키며 합장했다. "아미타불.... 여시주. 두 번째 뵙는군요." "이것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단혜령의 차가운 말과 함께 그녀의 일 장(一掌), 흰 옥수가 뻗어 졌고 빛이 번뜩이더니 무시무시한 한기(寒氣)가 현정을 향해 몰아 쳤다. "빙백마유공(氷魄魔幽功)!" 현정은 부르짖으며 승포를 떨쳤다. 펑---! "으윽!" 두 사람의 경력이 부딪치자 회오리가 일며 현정은 신음과 함께 뒤 로 육 보나 뒤로 밀려 나갔다. "호호호호...! 나 흑영마후(黑影魔后) 단혜령이 과거 소림에서 쓴 무공은 본신 무공의 반도 되지 않는다. 오늘은 진정한 무서움을 비로소 보여주겠다!" 그녀는 갑자기 허공을 향해 외쳤다. "얘들아! 쳐라!" "와아...! 죽여라!" 사방에서 엄청난 함성이 일시에 터졌다. 슈슈슉---! 꽈르릉... 펑! 드디어 무시무시한 대혈전이 벌어졌다. 어둠 속에서 수백 명의 흑 의인들이 덮쳐와 삼십 명의 화상들을 공격했고 창(槍), 검(劍), 도(刀), 필(筆)....... 모든 무기가 난무했다. "크억!" 한 화상은 순식간에 전신에 열 가지의 병기가 꽂혀 거꾸러졌고, 다른 한 화상은 머리가 박살나는가 싶더니 목이 베어지고 다시 온 몸이 열 동강이 나 날아갔다. 펑---! 무시무시한 수십 줄기의 장풍이 또다른 한 화상을 혈육덩이로 만 들었다. "아미타불---!" 현정은 가슴이 무너지는 것을 느끼며 처절하게 불호를 외웠다. 그 는 전신에 나한기공을 일으킨 다음 금강복호신권으로 흑의인들을 쳤다. 꽈르르... 릉... 펑! "크...아...악!" 금광이 번쩍이자 한꺼번에 십여 명의 흑의인들이 날아갔으나 날카 로운 교성이 그 사이로 울려 퍼졌다. "호호호호...! 돌중. 너의 상대는 본 마후다!" 우--- 웅---! 흑영마후 단혜령의 한 쌍 옥장이 새하얀 기류를 발출시켰다. 펑---! 막 신형을 돌리던 현정은 정통으로 가슴에 장력을 맞았다. "우욱!" 그의 입에서 피보라가 뿜어지는 찰나, 그는 단번에 십여 걸음을 물러났으나 쓰러지지는 않았다. 소림의 저력에 근간을 둔 그의 정 신력 때문이었을까? 단혜령은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지독한 중! 십 성(十成)의 빙백마유공을 맞고도 쓰러지지 않다 니.......' 그러나 현정의 몸은 더이상 그의 의지를 따라주지 않았다. 그는 가슴에 균열이 가는 것을 느끼며 처절하게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불존이시여, 자비를......." 그의 전신이 갈라지며 피가 터졌다. 결국 그는 고목처럼 쓰러지고 말았다. 이를 본 단혜령은 비로소 날카로운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호...! 그러면 그렇지. 마종문의 오대좌상(五大坐上)중 하 나인 나 흑영마후의 장력을 맞고 쓰러지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보리수 아래에는 끔찍한 혈하 (血河)가 흐르고 있었고, 삼십 명의 화상들은 전멸해 있었다. 반면에 흑의인들의 시체는 백여 명도 더 되었으나 단혜령은 눈 하 나 깜짝하지 않고 싸늘하게 외쳤다. "가자!" 휙! 휙! 휙......! 수백 명의 흑영은 앞으로 화살처럼 쏘아 나갔다. ④ 천 년 소림에 드디어 가공할 대혈풍이 몰아쳤다. 불사지존(不死之尊) 백리극을 위시하여 그의 부인이자 과거 이백 년 전 천마교(魔魔敎)의 교주였던 벽안마희(碧眼魔嬉) 냉소군(冷 素君), 그리고 오대마성(五大魔星), 즉 마종문의 오대좌상 중 세 명인 흑영마후 단혜령, 수라혈신 석기량, 제천마검(制天魔劍) 방 천극(方天戟) 등이 직접 소림으로 쳐들어 왔다. 그밖에도 백팔십 명의 초절정의 대마두들과 삼천 명에 달하는 마 종지문 고수들이 동시에 소림사를 공격했다. 영원한 중원의 맥(脈)인 소림은 이제 드디어 최후를 맞이하는 듯 했다. 우르르릉---! 꽈--- 앙----! 소림사의 웅장한 건물 사방에서 요란한 폭음과 함께 불길이 하늘 로 치솟고 사방에서 엄청난 함성이 울렸다. "와--- 아--- 아---!" 수라궁의 삼천 명 고수들과 소림의 천 명 승인들 사이에서 공전의 대혈전이 벌어졌다. 피가 튀고 살이 찢겨 난비하는 가운데 처절한 비명이 꼬리에 꼬리 를 물었다. 아수라(阿修羅)의 지옥계(地獄界)가 현신하는 듯했다. 이곳이 어디인가? 소림사, 바로 천 년 불문(佛門)의 성지가 아니 던가. 그러나 하룻밤 사이에 소림사가 완전히 지옥(地獄)으로 변 했다면 세인들은 믿을 것인가. "아미타불... 크 아...악!" 비명이 잠시도 쉬지 않았고 피가 성스러운 불전(佛殿)을 물들였 다. 불문이 금하는 최대의 계율인 살계(殺戒)도 이날 밤 만큼은 지켜 질 수 없었다. 아니, 살계를 가장 처절하게 파계(破戒)한 날이 바 로 이 날이었다. 불사지존 백리극. 희대의 대마존인 그는 수중의 불사마검(佛死魔劍)을 높이 치켜든 채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크핫핫핫핫......!" 소실봉 전체가 그의 마소(魔笑)에 뒤흔들렸다. 백리극의 발 아래에는 수십 명의 소림사 승려들의 시체가 참혹하 게 뒹굴고 있었고 수계원주 현암대사와 법화각주 현귀대사의 잘려 뒹구는 수급에서는 무서운 불(佛)의 분노가 이글거렸다. 그러나 여전히 수백 명의 흑의인들이 사방에서 소림의 승려들을 닥치는 대로 주살시키고 있었다. 백리극은 문득 외쳤다. "혜령(慧令)." "네! 대종사님." 흑영마후 단혜령은 표표히 그의 앞에 떨어졌고 백리극은 청수한 얼굴에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명령했다. "고수들을 데리고 장경각으로 가라. 장경각에 있는 모든 경전을 태워버려라! 장경각의 경전은 소림의 혼(魂)이다. 그 혼을 태워버 리지 않으면 언젠가 소림은 되살아난다. 알겠느냐?" "네!" 흑영마후 단혜령은 몸을 빙글 돌렸으며 다음 순간 그녀와 백여 명 에 달하는 흑의인들은 화광이 충천하는 불전 사이로 날아갔다. 장경각(藏經閣). 이곳은 소림의 혼이 담긴 수만 권의 불경과 무학(武學)의 비경이 간직된 곳이다. 휙! 휘... 익! 흑영마후 단혜령과 백여 명의 흑의인들은 마침내 장경각에 당도했 다. 꽈꽝! 그들에 의해 흑단목으로 만든 장경각의 문은 일시에 박살이 났다. 그러나 장경각에 뛰어든 그들은 곧 텅빈 서가(書架)를 보며 입을 딱 벌렸다. "아? 단 한 권의 경전도 없다!" 과연 장경각은 단지 텅 빈 건물에 불과했을 뿐, 그 많던 경전을 하나도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단혜령은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이... 이제 보니 이 중놈들이 경전을 모두 옮겼구나!" 그녀는 수하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이 자들이 경전을 옮겼다면 어디로 옮겼겠는가?" 과거 수라궁의 독혈당(毒血堂) 당주였던 오독비마 구우령이 대답 했다. "단좌상(段坐上). 소림에서 가장 은밀한 곳이라면 조사동(祖師洞) 을 들 수 있습니다." "그렇다, 바로 그곳이다!" 단혜령의 입가에는 싸늘한 미소가 얼음가루마냥 흩어졌다. "조사동으로 가자!" 제천마검(制天魔劍) 방천극, 그는 마종문 오대좌상의 한 명이었 다. 그러나 평생 마도의 비전인 사검(邪劍)만을 익힌 그는 과거 이백 년 전 불사지존의 오른팔 격으로 만일 검법(劍法)만을 따지면 불 사지존과 쌍벽을 이룬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미 그의 사검 아래 소림의 승려 백 인 이상의 피가 흩뿌려졌다. "제천삼십육사(制天三十六邪)!" 그는 사검을 휘두르며 외쳤다. "넷!" 시산혈하의 도륙장에서 삼십 육 명의 괴노인들이 일제히 대답 했 는데 그들 역시 모두 한결같이 사검을 든 채 모두 전신이 피로 젖 어 있었다. "나를 따르라. 대웅전(大雄殿)을 공격하겠다!" "넷!" 이윽고 방천극과 그의 직계수하인 제천삼십육사는 불전 사이로 날 아갔다. 대웅전(大雄殿). 중원 어느 곳의 사찰에도 대웅전은 있다. 그러나 소림사 대웅전의 규모는 상상을 불허하는 것으로써 이른바 소림의 천여 명 승인들 이 동시에 아침 불공을 드릴 수 있다는 엄청나게 큰 곳이었다. "아미타불......." 대웅전 앞 뜰에는 소림의 현 장문인(掌門人)인 현공대사(玄空大 師)를 비롯하여 선좌원수인 현광(玄光)과 계도원주 현각(玄覺), 그리고 현자 항렬의 장문인 호법인 사대금강(四大金剛)과 항마십 불(降魔十佛)이 선두에서 백여 명의 승려들을 거느리고 우뚝 서 있었다. 휙! 휙! 휙......! 허공에서 떨어지는 수많은 흑영들은 바로 제천마검 방천극과 제천 삼십육사를 위시한 이백여 명의 흑의인들이었다. "아미타불.... 걸음을 멈추시오!" 현공대사의 불호성이 묵직하게 대웅전을 울렸다. "너는 누구냐?" 방천극이 으시시하게 외쳤다. "아미타불.... 빈승은 현공이오." 방천극은 움찔했으나 곧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하...! 네가 바로 대소림의 장문인인 현공이냐? 좋다, 현공! 나 제천마검 방천극이 오늘 너의 목숨을 접수하겠다." 그는 뒤이어 날카롭게 외쳤다. "제천삼십육사!" "넷!" "모두 죽여라! 대웅전의 기둥을 뿌리째 뽑아라!" 불사지존 백리극의 불사마검이 세심원주(洗心院主) 현진대사의 가 슴을 꿰뚫고 있었다. "크... 윽! 아미타불......." 현진은 검에 꿰인 채 눈을 부릅뜨며 불호를 외웠고 이를 본 백리 극은 광소를 터뜨렸다. "핫핫핫핫...! 대소림이 이것밖에 안 되는가?" 현진은 손에 들고 있던 염주를 떨어뜨렸다. "아미타불...! 그러나 소림은 영원...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 이오....... 윽!" 그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고개를 꺾었다. "으하하하하...! 무너지지 않는다고? 천만에. 해가 뜨기 전에 소 림은 끝장날 것이다." 그런데 이때 어디선가 천둥소리와도 같은 외침이 울려왔다. "불사지존! 노납이 너의 모든 흉계를 끝장내 주겠다!" "누구냐?" 백리극은 그 웅장한 외침에 흠칫 놀라며 외쳤다. 휘--- 잉! 바람이 불었고 그와 동시에 백리극 앞에 육중한 체격의 노승이 한 명 떨어져 내렸다. "노납은 천뢰(天雷)다!" 다시 천둥같은 음성이 불사지존의 귓청을 진동시켰고 백리극은 자 신도 모르는 사이에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소림사상 최강의 고수라는 마애천불(魔涯天佛) 천뢰가 바로 너 냐?" "그렇다!" 그러나 백리극은 이내 광소를 터뜨리며 비웃었다. "으하하하하...! 네가 노부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천뢰는 마치 천 개의 쇠종이 부딪치는 듯한 웅후한 음성으로 말했 다. "물론이다! 소림무학은 중원무학의 총본산으로 그 누구도 소림무 학을 이길 수 없다!" "으하하하...! 너의 사조인 지원(知元)도 내 앞에서 그런 오만한 말은 하지 못했다. 그런데 어찌 네가 감히 그런 말을 하느냐?" 천로선사는 노성을 터뜨렸다. "닥쳐라, 백리극! 받아라---!" 천뢰의 양 손이 합장하자 번갯불같은 섬광이 뻗었고 백리극도 뒤 질세라 양 소매를 떨쳤다. 꽝--- 꽝--- 꽝----! 엄청난 폭음이 터지며 그들 사이의 땅이 움푹 파여 흙더미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윽!" "억!" 두 사람은 다급성을 지르며 각기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으나 그들 은 서로 경악하고 있었다. '과... 과연 불사지존이구나! 이렇게 무공이 강하다니.......' '이... 이럴 수가? 진정 놀랍다. 이백 년 전 지원이 살아있다 해 도 이 정도는 되지 못할 것이다.' 두 사람의 눈은 무섭게 불타오르며 서로를 노려 보았고 마침내 백 리극은 불사마검을 치켜들었다. "좋다! 소림 사상 최강의 고수와 사도 사상 제일인자인 나 불사지 존 중 누가 위인가 가려보자!" 꽈-- 르-- 릉--- 콰르르-- 릉---! 두 사람이 맞부딪치자 다시 경천동지할 굉음이 울렸다. 벽안마희(碧眼魔嬉) 냉소군. 그녀는 불사지존을 대신해 마종지문 최강의 고수들인 혈황백마(血 皇百魔)들을 독려하며 소림사 전체를 피로 물들이고 있었다. 퍼-- 펑-- 콰르릉---! "아미타불! 크윽!" 수라혈신 석기량도 옆에서 그녀를 보좌하고 있었으나 혈황백마만 해도 얼마나 가공할 마의 집단인가? 혈황백마는 바로 불사지존과 벽안마희가 공동으로 마공사공(魔功 邪功)을 연성시켜 무려 백 년 간에 걸쳐 손수 키워온 무서운 마두 들이었다. 이들 혈황백마가 전개하는 혈황백절파천절진(血皇百絶破天絶陣)은 너무도 가공할 위력을 지니고 있었고 천하에 그 누구도 그 공포의 절진을 막을 수가 없었다. "크크크크크......!" "으아--- 악!" 실로 엄청난 대혈풍(大血風)이 소림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수라혈신 석기량은 아수라장 속에서도 꼿꼿이 대항하고 있 는 소림의 승려들을 바라보며 내심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과연 대소림이다. 마종지문의 전 힘을 쏟았는데도 이렇게 끈질기 게 버티어 내다니!' 그러다 그는 흠칫 놀랐다. 그것은 혈황백절파천절진의 서쪽 일 각 이 갑자기 붕괴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크--- 아악!" 오륙 명의 혈황백마가 쓰러지는 것이 눈에 들어옴과 동시에 천지 를 진동하는 불호성이 들렸다. "아- 미- 타- 불----!" 그것은 백여 명의 눈썹이 새하얗게 센 노승(老僧)들이 동시에 내 지른 사자후였다. 그들의 등장은 벽안마희를 비롯하여 수라혈신, 그리고 혈황백마를 모두 대경하게 만들었다. 백팔나한대진(百八羅漢大陣)! 드디어 천 년 소림의 정화(情華)인 소림사 백팔나한진이 발동된 것이었다. ■ 대소림사 제3권 제32장 소림대살계, 거성 떨어지다 -1 ━━━━━━━━━━━━━━━━━━━━━━━━━━━━━━━━━━━ ① 소실봉 서쪽의 암벽(岩壁). 그곳에는 소림의 금지인 한 비동(秘 洞)이 있었다. 휙! 휙! 휙......! 어둠을 가르고 백여 개의 흑영이 떨어져 내렸다. 그들은 바로 흑영마후 단혜령과 백여 명의 마종지문 고수들이었 다. 비동의 입구는 열려 있었고 아무런 장애물도 없었다. "이곳이다. 들어가자!" 단혜령의 외침과 함께 그들은 비동 안으로 물밀듯이 들어갔다. 비 동은 상상보다 넓고 반듯한 석동(石洞)이었다. 잠시 후 십 장(十丈) 가량 전진하자 그들은 하나의 석문이 가로막 는 것을 볼 수가 있었는데 석문에는 불존(佛尊)의 좌상이 음각으 로 새겨져 있었다. <함부로 들어오면 불존의 뜻에 따라 초열지옥(焦熱地獄)으로 떨 어지리라.> 단혜령은 석문에 새겨진 이같은 글귀를 보자 싸늘하게 냉소하며 말했다. "흥, 웃기는 소리! 구우령. 문을 부숴라!" "네. 냉좌상!" 오독비마 구우령은 대뜸 석문을 향해 그의 절기인 오독절령장(五 毒絶靈掌)을 날렸다. 꽈르릉... 꽝! 오색의 장력이 작렬하자 석문은 무력하게 迷爾 버렸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뜻밖의 사태를 유발시켰다. "으아악!" 석문 안 쪽에서 시뻘건 불덩이가 확 쏟아져 나오더니 구우령을 덮 친 것이었다. "헉! 저... 저럴 수가!" 단혜령은 대경하여 뒤로 후퇴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구우령은 잿 더미가 되고 말았고 경악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꽈르르... 르... 릉! 엄청난 진동음과 함께 갑자기 그들이 서 있던 밑바닥 전체가 꺼져 버렸다. "으... 아... 아......!" 밑바닥의 끝이 보이지 않는 지옥의 무저갱으로 마종지문 고수들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추락하고 말았다. 단혜령은 간신히 절정의 경공술을 펼쳐 무저갱을 벗어날 수 있었 으나 주위를 둘러보니 살아남은 자는 불과 사십여 명뿐이었다. 그녀는 전신에 온통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과... 과연 소림은 무서운 곳이구나!' 그러나 그녀는 이를 바드득 갈며 다시 전진했다. 석문을 지나 그 로부터 십 장쯤 나아갔을까? 꽝! 하는 느닷없는 굉음과 함께 눈 앞에 거대한 석문이 떨어졌다. "아니?" 놀랄 겨를도 없이 굉음과 함께 등 뒤에서 또 하나의 석문이 떨어 졌다. "으아악!" 미처 피하지 못한 서너 명이 석문에 깔려 비참하게 즉사하고 말았 다. "이, 이럴 수가? 나갈 곳은?" 살아있는 자들마저 우왕좌왕할 찰나였다. 철커덩! 크르르르....... 괴이한 금속음이 요란하게 울리더니 동시에 사방의 석벽에 구멍이 뚫리며 사람의 입상(立像) 크기 만한 철동인(鐵銅人)들이 나타나 는 것이 아닌가. 크르르... 릉! 퍽! "크악!" 십이 명의 철동인들은 기계적으로 종횡무진 움직이며 마구 마종지 문 고수들을 쳐죽였는데 철동인의 주먹 하나가 대여섯 명의 머리 통을 여지없이 박살내 버렸다. 그들은 전후좌우로 어지럽게 움직이며 육탄과 주먹으로 닥치는 대 로 마종지문 고수들을 격살시켰다. "아! 이럴 수가... 이럴 수가......." 흑영마후 단혜령의 안색이 잿빛이 되었으나 이때 한 철동인이 그 녀에게 부딪쳐 왔다. 불사지존 백리극과 마애천불 천뢰선사는 이미 삼천 초(三千招)의 대격전을 벌였다. 그것은 실로 하늘도 땅도 경악할 공전절후의 대 혈전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싸움은 실로 막상막하였다. 내공에 있어서는 불사지존이 단연 한 수 위였으나 반야밀다대승신 공은 천뢰의 몸을 이미 금강불괴지신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리하 여 천고의 마검(魔劍)인 불사마검은 수없이 천지를 갈랐지만 천뢰 의 몸에서 만큼은 모두 튕겨나가고 말았다. 불사지존은 싸우면 싸울 수록 놀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천뢰에게 서 쏟아져 나오는 소림칠십이종의 절예는 대해(大海)처럼 끊일 줄 모르고 펼쳐나와 그를 당황케 했던 것이었다. 恬 백팔나한대진(百八羅漢大陣). 이는 명실공히 소림 최고의 비전진법이었다. 소림에는 원래 두 개 의 나한대진이 있었으나 특히 백팔나한진은 노소(老少)가 총망라 된 나한승려들로 이루어져 가히 태산(泰山)에 비견되는 절세의 대 진(大陳)이었다. 지난 날 천마봉 수라궁의 개파대전 때 출동했던 소(小) 나한진만 해도 정자(丁字) 항렬의 십팔나한승을 통해 가공할 위력을 과시하 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현재 나타난 백팔나한진의 위력은 당시와 비할 바가 아 니었다. 벽안마희의 무공과 석기량의 지략, 그리고 혈황백마의 기 세를 다 합쳐도 백팔나한진에는 통하지 않았다. 위--- 이---잉! 펑- 퍼-- 엉! "크--- 악!" 혈왕백마는 처철한 비명을 지르며 하나 둘 쓰러져 갔다. 뿐만 아 니라 벽안마희 냉소군의 이백 년이 넘는 내공이 소림 고승들 사이 를 좌충우돌 했으나 나한대진은 요지부동, 끄덕도 하지 않았다. 냉소군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과... 과연 나한대진의 위력은 가공하구나! 이... 이렇게 강할 줄이야.......' 흑영마후 단혜령은 이를 부득부득 갈며 조사동의 통로를 달리고 있었다. 이제 그녀의 뒤를 따르는 수하들은 이제 일곱 명에 불과했다. 그 것은 가공할 철동인들에게 모두 처참한 죽음을 당한 때문이었다. 그나마 살아남은 자들도 전신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단혜령은 두 눈에 무서운 살기를 뿜으며 계속 그들을 이끌 고 앞으로 나갔으며 이윽고 그들은 하나의 커다란 지하광장에 도 달했다. "아......!" 단혜령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발했다. 광장은 온통 향연이 자욱히 깔려 있어 엄숙하고 신비스런 분위기 였다. 그 바람에 그녀는 다소 멈칫하는 기색을 보였다. 정면에는 백팔 개의 황금으로 조각된 크고 작은 불상(佛像)이 갖 가지 동작으로 세워져 있었는데 그 앞에는 사람 키 만한 향로가 아홉 개 놓여져 뭉클뭉클 푸른 연기를 뽑고 있었다. 또한 그 앞에 수백 개의 항아리가 질서정연하게 놓여져 있었다. 단혜령은 대뜸 그 항아리들이 소림고승들의 유골을 담은 것임을 알아내었다. 그것은 항아리마다 고승의 법호들이 기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앗!" 단혜령은 항아리들을 둘러보다가 갑자기 뾰죽한 경악성을 터뜨렸 다. 그것은 수백 개의 항아리 맨 마지막에 마치 생생히 살아있는 듯한 한 노승이 입정(入定)하고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매우 청수하며 인자한 백발노승의 아미 중간에는 붉은 홍점이 나 있었다. 매우 특이한 이 노승의 얼굴을 본 순간 단혜령은 전신을 경련했다. "곡... 곡무현!" 그녀는 격동을 일으키며 노승에게 다가갔다. 그는 바로 현오(玄 悟), 즉 지난 날 단혜령이 부러진 비수로 찔러 죽인 현오대사였던 것이다. 단혜령은 그의 앞에 가더니 곧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 다. "호호호...! 곡무현, 너는 결국 이곳에 죽어 있구나. 호호 호......!" 그녀는 만면에 처절한 원한의 표정을 지으며 이를 갈았다. "평생 나 단혜령으로 하여금 불행하게 살게 만든 자! 좋다, 이제 시신을 본 이상 시신마저 가루로 만들어 버리겠다." 그녀는 말이 끝나기도 전 일 장을 현오의 머리에 내리쳤다. 푸른 빛이 번뜩이며 가공할 벽옥사라공(碧玉邪羅功)이 펼쳐졌다. 그러나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도래했다. 그녀의 일 장이 머 리에 떨어지기 직전, 현오의 굳게 감겼던 눈이 번쩍 뜨여지는 게 아닌가? 그와 동시에 합장했던 그의 두 손이 번개처럼 뻗더니 단혜령의 양 쪽 젖가슴 밑의 급소에 깊숙히 박혀버렸다. "아악---!" 단혜령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날아갔다. 그녀의 양 쪽 가 슴 밑에 구멍이 뻥 뚫리며 피가 분수같이 뿜어져 나왔다. 그녀는 찢어질 듯 두 눈을 부릅떴다. "곡, 곡무현... 네... 네가 살아 있었다니......." 현오는 탄식하며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정해(情海)는 억겁(憶劫)이다. 여시주, 이제 마성 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소." "네... 네가... 크... 으... 윽!" 흑영마후 단혜령의 차가우면서도 아름답기 그지없던 얼굴이 갑자 기 변하기 시작했다. 빙결같은 피부가 점차 쭈글쭈글 해지더니 온 통 주름살 투성이로 변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머리도 완전 백발이 되어 그녀는 순식간에 노파가 되 고 말았는데 그것도 백 살이 훨씬 넘은 노파였다. "크... 악!" 그녀의 등 뒤에서 연달아 비명이 터졌다. 돌아다 보니 어느새 열 두 명의 젊은 승려가 나타나 일곱 명의 마종문도를 격살시키고 있 었다. 그들은 정혜(丁慧)와 범천승(梵天僧)들이었다. 단혜령은 아직도 자신의 모습이 변한 것을 몰랐던지 갑자기 처량 한 표정을 지으며 현오에게 말했다. "무현.... 다... 당신이 나를 죽이려 하다니......." 현오는 서서히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다가가며 탄식했다. "혜령(慧令). 용서하시오." 단혜령의 늙은 얼굴에 눈물이 흘렀다. "나... 나는 당신을 그토록 사랑... 했는데......." 현오는 비감하게 말했다. "나도 그대를 사랑했소." "그런데... 왜......?" "아미타불......." 현오는 괴로운 듯 합장불호를 했다. 단혜령은 눈을 감으며 말했 다. "당신은 기억하나요? 백 년 전 그 날 달빛 아래 맹세했던 말 을......." "기억하오." "그때... 우리는... 한 날에 태어나지는 못했어도 죽을 때는 동시 에 죽자고 맹세했지요." 단혜령의 얼굴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덮혔다. "조... 졸립군요......." "혜령." 단혜령은 눈을 힘겹게 떴다. "무현.... 저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시겠어요? 마지막......." "으음......." "가까이, 가까이... 그리고 저를... 안아 줘요... 제발......." 현오의 눈에 괴로움이 스쳤으나 결국 탄식하며 그는 단혜령의 곁 으로 다가갔다. 단혜령의 꺼져가던 눈에서 번쩍 살기가 스친 것은 이때였다. ② 현오가 그녀의 몸을 안은 순간이었다. "으윽!" 현오는 섬뜩한 하나의 칼날이 마치 다정한 정인(情人)의 혀처럼 부드럽게 자신의 심장 속으로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한 자루 비수가 그의 심장을 찢고 등까지 관통한 것이었다. "호호호...! 결국... 결국... 당신과 한 날 동시에... 죽는군 요... 호호호......!" 단혜령은 그렇게 죽었다. "사백님!" 정혜는 현오의 등 뒤로 튀어나온 칼을 뒤늦게 보고 대경하여 외쳤 다. 그러나 현오는 오히려 담담했으며 단혜령의 싸늘히 식어가는 시신을 굳게 끌어안았다. "물러가라." 그는 이제 불존의 제자도 현오도 아니었다. 오직 곡무현(曲武玄), 바로 그 자신의 본연으로 돌아가 있었다. 곡무현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넘쳐 흘렀고 그 눈물은 아직도 악 독한 웃음을 머금고 있는 단혜령의 주름살 투성이의 얼굴에 떨어 졌다. 그러자 기이하게도 단혜령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렸다. "혜령.... 우리의 사랑은 애초부터 잘못된 것이었소. 당신은 사도 출신... 그리고 훗날 벽안마희의 제자가 되었을 때... 나는 우리 가 동廢 합쳐질 수 없음을 느꼈소......." 곡무현은 단혜령의 싸늘한 시신을 굳게 끌어안았다. "그때 당신이 소림으로 날 찾아왔을 때 물었지. 단심검(丹心劍)의 조각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느냐고....... 아아... 그때 실은... 그것을 나는 손에 쥐고 있었소......." 곡무현의 얼굴에 회색 그늘이 덮혔다. 그에게도 죽음이 찾아온 것 이었다. "혜령... 약속대로 당신과 함께 가겠소......." 그는 심장에 꽂힌 비수를 뽑았다. "아미타불... 불존이시여, 이 못난 제자를 용서하소서... 윽!" 그의 가슴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수같은 피가 단혜령과 그를 한꺼 번에 적셨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 꼭 끌어안은 채 서서히 앞으 로 고꾸라졌다. "사백님... 사... 사백님......." 범천승들의 비통한 외침이 조사동을 울렸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고 공(空)에서 기(氣)가 발해진다! 이는 진정한 무(武)의 진리(眞理)다!" 꽈-- 르르--- 릉! "크-- 악---!" 혈황백마는 추풍낙엽처럼 어지럽게 공중으로 날아가며 피를 뿌렸 고 소림 백팔나한진으로 인해 이제 그들 중 살아남은 자는 불과 삼십 명 안팎이었다. 나한승들은 노란 승포를 펄럭이며 흡사 물의 흐름인 듯, 때로는 태산인 듯 장중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를 보며 벽안마희 냉소군 은 치를 떨었다. "이백 년 전 천하를 주름잡던 육대천마의 하나인 나 벽안마희가 이까짓 진법에 걸려 고전하다니!" 냉소군은 터질 듯한 분노를 억제치 못하여 불쑥 허공으로 몸을 솟 구쳤고 수라혈신 석기량은 대경하며 외쳤다. "안 됩니다, 주모(主母)! 위험합니다!" 석기량은 어느 정도 나한대진을 파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벽 안마희가 몸을 솟구친 방향이 바로 백팔나한대진 중 가장 무서운 방위인 사공절문위(死空絶門位)인 것을 알아본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고 말았다. 벽안마희 냉소군이 허공 오 장 높 이로 뜬 순간 나한승들은 합장하듯 부르짖었다. "허(虛)는 곧 실(實)이요, 실은 곧 허다! 허허실실(虛虛實實)속에 진정한 살(殺)이 있으니 천하의 그 누구도 당하지 못하리라!" 백팔 명의 나한승들은 일제히 한 곳으로 몰리더니 쌍장을 쳤고 그 것은 백팔 명의 내공(內功)이 완전히 합일된 것이었다. 꽝-- 꽈르릉----! 벽안마희 냉소군의 내공이 아무리 높고 무공이 하늘을 가린다지만 어찌 백팔 승려들의 전 내공을 받을 수 있으랴? 그녀는 피를 뿌리 며 하늘 높이 튕겨져 올라갔다. 희대의 마녀도 자신의 능력을 모르는 한낱 어리석은 여인일 뿐이 었다. 냉소군은 허공 십 장 높이까지 솟았다가 줄 끊어진 연처럼 떨어져 내렸다. 쿵---! 그녀는 바닥에 피를 뿌리며 떨어졌으나 역시 대마녀다왔다. 죽기 전 처절하게 외치고 있었다. "서... 석기량, 마지막 명령이다! 나... 나한대진을 없에라!" 그녀는 그 말을 남기고 전신을 폭발시켜 버렸다. 숨이 멎는 순간 그녀의 가공할 내공이 흐뜨러지며 사방으로 그녀의 육신을 분산시 킨 것이었다. "주모---!" 석기량은 크게 울부짖었다. 그러나 한 번 죽은 인간은 그 어떤 방 법으로도 회생이 불가능한 법이다. 석기량은 문득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 좋다, 백팔나한진! 천 년 이래 그 누구도 깨지 못 했다지만 내가, 이 석기량이 부수어 주겠다!" 그의 발악적인 말에도 백팔 승인들은 초연했으며 그저 담담히 불 호 외운 채 진형을 움직일 뿐이었다. 석기량은 품 속에서 하나의 자루를 꺼냈다. "자, 보아라! 이것은 벽력천마(霹靂天魔)가 만든 백팔 개의 벽력 뇌화탄(霹靂雷火彈)이다! 모두 함께 날려 버리겠다!" 그의 몸에서 불길이 확 일었다. 그는 스스로 기폭제가 되기 위해 삼매진화로 자신의 몸을 태운 것이었다. "피, 피해라!" 백팔 승인들은 대경하 여 사방으로 흩어져 갔으나 그것은 이미 너 무나도 늦은 일이었다. 꽝--- 꽈-- 르- 르- 릉---! 엄청난 대폭발음과 함께 주위 삼백 장은 완전히 화염으로 휩싸이 고 말았다. 동시에 전각이, 불당이, 탑(塔)이 대웅전이 모두 거대 한 화염폭풍에 날아갔다. 모든 것이 끝장나고 있었다. 여명(黎明). 소림사의 불타는 성지에도 여명은 밝아오기 시작했다. 불사지존 백리극과 마애천불 천뢰선사는 어느덧 일만 초(一萬招) 를 싸우고 있었다. 실로 무림사상 듣지도 보지도 못한 공전의 대격전으로 인해 그들 주위 백여 장은 완전히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마침내 불사지존은 내심 탄식했다. '아! 과연 소림은 소림이다. 이 자의 무공은 실로 상상도 할 수 없이 강하다!' 그는 벌써 불사마검으로 천뢰의 수십 군데 사혈(死血)을 찔렀다. 그러나 불사마검은 그에게 약간의 상처만 입혔을 뿐 모두 튕겨나 오고 말았다. "좋다, 천뢰! 과연 대단하다. 노부는 진정으로 감탄하는 바이다. 그러나 너만 없으면 이 소림도 끝이 아니냐? 노부가 비록 한 팔을 잃는 한이 있어도 기필코 널 제거해야겠다!" 불사지존 백리극은 이렇게 외치며 오른팔을 앞으로 뻗었다. "아미타불... 불사지존이여! 소림의 웅혼함은 사공 따위에 비할 바가 아니다. 공연한 수작이다!" 백리극은 으스스한 노성을 터뜨렸다. "천뢰! 천하의 칠십이 가지 마공(魔功)을 모두 합친 이 공격에도 네가 죽지 않는가 두고 보겠다!" 다음 순간 실로 통천경악할 일이 벌어졌다. 우우... 웅....... 괴이한 진동음과 함께 백리극의 온 몸에서 시커먼 기류가 발산되 더니 동시에 검은 기류는 오 장 가량 퍼졌다가 다시 좁혀갔다. 묵인(墨人). 그는 완전히 시커먼 인간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곧 그 검은색은 그의 앞으로 내민 오른팔로 집중되더니 섬전 일순, 그의 팔은 엄청난 폭음과 함께 쑥 뻗히며 천뢰의 가슴으로 박혀버 렸다. "크윽!" 천뢰는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이미 그의 합장했던 쌍수도 반야밀 다대승신공을 쏟은 뒤였다. 꽈--- 쾅---! "으아악!" 불사지존 백리극 또한 전신이 산산히 부서지는 것을 느끼며 뒤로 붕 떠 십 장 밖까지 날아갔다. 이는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엄청난 결과로 천뢰선사의 가 슴에는 백리극의 마공이 응집된 마수(魔手)가 깊숙히 박혀 있었 다. 반면 십 장 밖에 떨어진 백리극은 땅 속으로 한 자 빠졌다가 튕 겨 나왔으며 그의 가슴은 시뻘겋게 피로 젖어 있었다. 그는 이미 자신의 전 내공이 반 이상 소실된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크... 크윽! 천뢰, 네 놈이......." 그는 안면에 무시무시한 살기를 띄우며 다시 藍막 걸어갔다. 그 순간이었다. "아미타불......!" 슈슈슈--- 슈슉---! 펑---! "크윽!" 어디선가 우박같은 암기가 쏘아져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백리극 의 전신에 박혀버렸다. 그의 몸은 다시 오 장 밖으로 날아갔다. 장내에는 어느새 나타났는지 천기선사가 사륜거를 밀고 있었는데 암기는 바로 그의 사륜거에서 발출된 것이었다. "끄... 윽! 너... 너는 누구냐?" 백리극은 다시 일어나며 물었다. "아미타불... 천기(天機) 외다." 백리극의 안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소림 삼성승... 과... 과연 명불허전이구나." 투... 투... 투... 툭! 놀랍게도 그의 전신에 박혀있던 수백 종의 암기가 모두 빠져 나왔 다. 그러나 그가 이미 치명적인 상처들을 입은 것을 그의 백납같 이 굳어진 안색이 입증해 주고 있었다. 바로 이때였다. 엄청난 대폭발음이 대웅전 쪽으로부터 울려왔다. 동시에 무시무시한 화광(火光)이 소림 전체를 집어 삼킬 듯 일어 났다. 쾅--- 꽈--- 르릉---! "아, 아니!" 장내의 인물들은 모두 안색이 대변하고 말았다. 백리극도 몹시 충 격을 받은 듯했다. 그는 급히 허공으로 몸을 솟구치더니 사방을 향해 외쳤다. "철수하라! 퇴각하라---!"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혈전을 벌이고 있던 마종지문의 고수들은 모 두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때 허공으로 몸을 솟구쳤던 백리극이 불사마검을 던졌다. "으윽!" 사륜거에 앉아 있던 천기선사는 불사마검이 빛살 같이 날아와 자 신의 가슴에 박히는 것을 보았다. 그의 고개가 앞으로 뚝 꺾어졌 다. 백리극의 외침이 불타는 소림사를 진동시켰다. "듣거라! 비록 나 불사지존의 목숨은 얼마남지 않았으나 앞으로 진정한 천혈성(天血星)을 타고난 마종문주(魔宗門主)가 나타나 전 무림을 피로 쓸어버릴 것이다! 크하하하......." 처절한 광소는 밝아오는 여명을 온통 으스스하게 뒤흔들었고 뒤이 어 소림사는 고요한 정적에 싸였다. 수천 명에 달했던 마종지문의 고수들은 모두 철수한 것이었다. 장내에 문득 피투성이가 된 천심선사(天心禪師)가 나타났다. "천기사제!" 그는 가장 먼저 사륜거로 날아갔다. 그러나 어찌하랴? 이미 천기 선사는 싸늘히 식어 있었다. 불사마검이 그를 뚫고 사륜거 등의자 뒤까지 비어져 나와 있었다. "아아!" 천심선사는 이번에는 가슴에 백리극이 날린 검은 마수(魔手)가 박 힌 채 고목처럼 서 있는 천뢰선사에게 몸을 날렸다. "천뢰사제!" 그러나 천뢰는 꺼져드는 음성으로 말했다. "사... 사형. 건드리지 마시오. 건드리면 죽소. 나... 나를 조사 동(祖師洞)으로... 조사동으로 옮겨 주시오." 천뢰는 안간힘을 쓰며 한 마디를 더 뱉았다. "혀, 현수(玄修)... 그 아이를... 기다려야... 합니다." 천심선사는 눈물을 지으며 합장했다. "아미타불......." ③ 중양회(重陽會). 무림인들이라면 누구나 사파의 일회(一會)를 기억했다. 지난 백 년 간 사파무림은 남맹북단(南盟北檀), 일교(一敎), 일회(一會), 이곡(二谷) 등이 지배해 왔는데 이들 중에서도 가장 신비스런 단 체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일회(一會)였다. 왜 이런 괴이한 이름이 붙었는가? 그것은 그들이 백 년 동안 오직 매년 중양절(重陽節)에만 모이기 때문이었고 중양회에 속한 고수들의 이름과 숫자는 물론, 그 총단 이 어디에 있는지, 심지어는 회주(會主)가 누구인지조차 온통 비 밀이었으므로 그렇게 불리게 된 것이었다. 단지 그들은 매년 중양절만 되면 모였다가 사라졌고 따라서 중양 절을 제외하고 백 년 동안 강호상의 활약은 전혀 없었다. 악양루(岳陽褸). 열흘 전 중양절에 악양의 악양루 현판에 한 개의 검은 화살이 꽂 혔다. 그것은 한 뼘 정도의 크기로 아무도 그것에 주의하는 자는 없었다. 또한 그것은 바로 높은 현판의 글씨에 박혀 있었기 때문에 웬만큼 안력이 좋지 않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발견하기가 불가능했다. 악양루에서 멀지 않은 한 객점의 동쪽의 객방에서 백의 청년서생 이 초조한 표정으로 서성이고 있었다. 그는 바로 백화미가 남장으로 변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지금 열린 창문을 통해 빨갛게 불타오르는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녀의 만면에는 긴장감이 잔뜩 어려 있었다. '성랑의 말에 의하면 열흘 안으로 누군가 찾아온다고 했는데... 오늘이 마지막 밤이건만 어째서.......' 이때 그녀의 바로 등 뒤에서 한 줄기 음산한 음성이 들렸다. "현천령을 꽂은 사람이 바로 그대인가?" 백화미의 몸이 일시에 싸늘하게 굳어졌다. '이... 이럴 수가... 바로 등 뒤까지 오도록 내가 눈치를 챌 수 없었다니.......' 그녀는 아연하여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중(僧), 바로 한 명의 붉 은 가사를 입은 중이 서 있었다. 그런데 왼손에 핏빛의 옥불장(玉 佛杖)을 들고 있는 그의 두 눈은 온통 검은 동자뿐이어서 실로 섬 뜩한 느낌을 주는 혈의중이었다. 그를 보자 백화미의 뇌리에는 한 인물이 떠올랐다. '호... 혹시 이 자는 백 오십 년 전 일대혈풍을 일으켰던 현천교 (玄天敎)의 혈마불(血魔佛)이 아닐까?' 그러는 사이 어디선가 낄낄거리는 까마귀같은 웃음소리가 들려왔 다. "컬컬컬... 혈마불, 그가 현천령을 꽂았으니 현천령주인 것은 당 연하지 않은가?" 방 안에 다시 한 흑영이 날아 들어왔다. 그는 전신에 흑색의 헐렁한 도포(道袍)를 입고 있었는데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창백했으며 나이를 추측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의 왼쪽 어깨에는 징그럽게도 한 마리의 까마귀가 앉아 있었다. 백화미는 그를 보자 가슴이 식는 것을 느꼈다. 이번에는 어디선가 소름끼치는 괴소가 들려왔다. "크흐흐흐흐흐... 흑오존자(黑烏尊子)! 그러나 그의 모습은 천존 의 말씀과는 다르다." '흐... 흑오존자!' 백화미는 안색이 변했다. 백 오십 년 전. 마오(魔烏)의 울음소리가 들리면 황하가 혈하(血 河)로 변한다는 무서운 대혈마가 존재했었다. 그는 현천교의 절정 고수로 흑오존자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었다. 그 이름은 곧 죽 음의 상징이었다. 까마귀를 대동한 흑오존자는 낄낄거렸다. "낄낄... 혈영마인(血影魔人)! 그대도 벌써 와 있었군." "크흐흐... 제일 먼저 왔지!" 스스스스....... 방 안에 붉은 안개가 모이는 듯 하더니 뭉쳐져 하나의 핏빛 인간 이 형성되었다. 전신의 피부나 눈동자, 옷마저 온통 핏빛의 괴인 이었다. 혈영마인. 그도 역시 백 오십 년 전 현천교의 절정고수로 무림을 피바다로 만든 위인이었고 그의 혈영만겁장(血影萬劫掌)은 사도 최고의 악 랄한 마장(魔掌)이었다. 백화미는 방 안에 세 명의 대마두가 나타나자 전신에 소름이 끼치 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다시 이번에는 천진난만하기 그지 없는 어린 소년의 익살 맞은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헤헤헤헤...! 혈영마인. 네가 제일 먼저 왔다고? 천만에, 나는 이미 삼 일 전에 이곳에 도착했다." 그러자 흑오존자는 욕설을 퍼부었다 . "제기랄! 마동(魔童), 어디에 있느냐? 썩 나와라!" "낄낄낄낄......!" 괴이한 웃음소리가 울린 순간이었다. "아악!" 백화미는 그만 혼비백산한 채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비틀비틀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벽에 사람의 얼굴이 나타났는데 그것은 희 한하게도 귀여운 소년(少年)으로 그 소년은 벽 속에 박힌 채 태연 하게 웃고 있었다. 흑오존자가 거칠게 외쳤다. "징그럽다! 어서 당장 나와라!" 그 말에 소년이 미소 지으며 벽에서 빠져 나왔으나 놀랍게도 벽 에는 아무런 손상도 없었다. 백화미는 그만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아! 이들의 무공은 정말 상상도 할 수 없이 높구나. 그런데 마동 (魔童)이라면.......' 마동(魔童). 오래 전부터 강호에 전해지는 두 가지 노래가 있었다. - 경소자(驚笑者) 소중살(笑中殺), - 경소년(驚少年) 암중살(暗中殺). 웃는 자를 조심하라, 웃음 속에 살(殺)이 있다. 어린 아이를 조심하라, 보이지 않게 죽음(死)의 살수를 전개한다. 이 노래는 전대의 대마두인 불면소살(佛面笑殺) 호천광과 바로 이 마동(魔童)을 일컫는 것으로써 불면소살은 항상 웃으면서 살인을 하기 때문에 웃는 자를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그런 면에서 마동(魔童)의 무서움은 불면소살을 십 배 능가했다. - 웃는 자를 만날지언정 어린 소년(少年)은 만나지 마라. 그의 손 에 걸리면 왜 죽는지도 모른 채 황천으로 간다. 비록 불면소살과 같은 서열에 있지만 마동은 그보다 훨씬 잔혹한 인물로 그 역시 과 현천교의 절정고수였다. 백화미는 객방에 나타난 네 괴인들을 바라보며 놀라면서도 한편 의아스러웠다. '이들은 모두 과거의 현천교 사대살신(四大煞神)들이다. 이들이 중양절 날 꽂은 현천령을 보고 달려오다니... 그럼 혹시 이들이 바로 중양회(重陽會)라는 이름이 붙은 일교의 인물이 아닐까?' 그녀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과연 중양회란 이들 현천교의 잔당 들을 가리키는 말로써 과거 백 년 전 현천교주 적비천존이 실종된 후 이들은 일 년에 한 번 중양절 날 모여 현천교의 재건을 다짐했 던 것이다. 단지 무림에서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단 한 명 도 없었다. 이윽고 흑오존자가 백화미에게 흉칙하게 웃으며 물었다. "꼬마야, 네가 어찌 현천령을 갖고 있느냐?" 백화미가 비로소 놀란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고 있을 때 갑자기 어 디에선가 웅혼한 음성이 들려왔다. "사령(四靈). 너희들은 본 천존의 말을 잊었느냐? 현천령은 곧 나 와 같다는 것을." 휘... 이... 잉! 방 안에 한 줄기 음풍이 부는가 싶자 어느 틈에 두 명의 인물이 나타났는데 그 중 우측에 선 자는 바로 현천교의 교주인 적미천존 (赤尾天尊) 여적성으로 지난 날 하후성이 승불폭에서 만났던 바로 그 인물이었다. 그 곁의 흑의를 입은 청수한 노인(老人)은 머리도 수염도 검은가 하면 손에도 검은 색의 섭선(攝扇)을 들고 있었으며 두 눈에는 무 한한 지혜(智慧)가 어려 있었다. 적미천존은 검은 장포에 금룡(金龍)이 새겨진 옷을 입고 있었고 머리에는 관을 썼으며 수염은 교룡처럼 꼬았다. 그의 신광은 마치 번갯불같았으되 지난 날과 많이 달라진 모습이 었다. 그가 나타나자 네 괴인, 즉 사령은 모두 바닥에 무릎을 꿇 었다. "사령, 천존을 뵙습니다!" 그러나 적미천존이 손을 흔들자 사령은 튕기듯 모두 일어났다. 무 형의 강기가 그들을 일으킨 것이었다. 적미천존은 곧 고개를 돌려 백화미를 바라보았다. "아이야, 현천령을 네가 어찌 얻었느냐?" "노... 노선배님......." 백화미는 이미 그가 백 년 전 현천교의 교주인 적미천존 여적성임 을 알아보고는 급히 무릎을 꿇었다. "소녀 백화미, 노선배를 뵈옵니다." 적미천존은 담담히 물었다. "노부는 현천령을 하후성이란 아이에게 주었다. 그런데 어찌 네가 갖고 있느냐?" 백화미는 그에게 단번에 죄다 설명했다. 하후성이 마종지문에 의 해 무회곡에 갇혀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의 부탁으로 현천령을 꽂은 일 등과 그 와중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모두 전했다. 듣고 있던 적미천존은 안색이 굳어졌으나 곧 하늘을 우러러 보더 니 광소를 터뜨렸다. "핫핫핫핫...! 백리극, 그 놈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구나! 으하 하하......!" 그는 차갑게 불렀다. "사령!" "넷!" 사령은 모두 복명했다. "무회곡으로 가자!" 그 순간 백화미는 자신의 몸이 어느새 혈마불에 의해 나꿔채져서 는 순식간에 밤하늘을 날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아!" 백화미는 그저 탄성을 내지를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왜냐면 귀청을 찢는 듯한 바람소리가 그녀로 하여금 눈을 질끈 감게 했기 때문이었다. ④ 무회곡(無回谷). 방 안에 세 명의 인물이 심각하게 마주보고 있었다. 하후성은 탁 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고 그 앞에 천로와 지로가 얼굴이 굳 어진 채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천로가 음산한 음성으로 물었다. "하후공자. 백화미가 벌써 백 일이 넘도록 보이지 않는데 어찌된 일이오?" 하후성은 차를 마신 후 담담히 말했다. "그녀는 몸이 안 좋아 요양 중이오." "그렇다면 얼굴이라도 볼 수 있지 않소?" 하후성은 찻잔을 소리나게 내려 놓으며 노성을 질렀다. "닥치시오. 그녀는 이제 마종문의 사람이 아니라 나 하후성의 내 자요. 내가 아무리 내공이 흩어졌다고는 하지만 나를 무시하는 말 은 도저히 용납치 못하겠소." 그 말에 천로의 안색이 무섭게 변했으며 특히 그의 두 눈에는 가 증스럽다는 듯 분노의 불길이 이글거렸다. "으... 으......." 그는 무섭게 하후성을 노려보았고 반면에 하후성은 추호도 동요하 지 않고 천로를 마주 보았다. 그의 고요한 눈은 눈 앞에서 태산이 무너진들 깜빡도 하지 않을 듯했다. 천로는 분노로 몸을 떨었다. "노부가... 이백 년을 살아오는 동안... 이토록 큰 모욕은 받아보 지 못했다." "후후......." "한 번 발을 구르면 태산조차 떤다는 우리 천지쌍군(天地雙君)을 네가......." 그러나 하후성은 여전히 담담했다. "소종사님의 명만 아니었다면 너는 죽어도 만 번은 더 죽었을 것 이다!" 하후성이 무겁게 그 말을 받았다. "나의 무공이 상실되지 않았다면 당신들은 내 앞에 감히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을 것이오." "우욱!" 지로가 막 발작을 하려는 듯 두 주먹을 움켜 쥐었으나 천로가 간 신히 그를 붙잡았다. "아우, 나가세!" 그는 노화를 최대한의 인내로 참는 한편 천로에게 이끌려 방을 나 가며 기어이 한 마디를 남겼다. "기억해라! 이 무회곡은 한 번 들어오면 영원히 나가지 못한다. 우리 천지쌍군 외에도 소종사가 특별히 배치시킨 구구팔십일로의 고수들이 있다. 섣불리 행동한다면 소종사 앞에서 자결하는 한이 있어도 네 놈을 때려 죽이리라!" 하후성은 그들이 사라지자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핫......!" 그의 웃음은 고독한 영웅의 처절한 비감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이내 그는 웃음을 뚝 그치더니 창 밖을 바라보았다. 밤하늘에는 성좌가 흐르고 있었다. '서쪽의 성군(星群)이 이곳으로 흐르고 있다. 삼 일(三日).... 삼 일이면 모든 것이 판가름난다. 황, 나는 반드시 이곳을 나갈 것이 다!' 하후성의 얼굴에는 무서운 결단의 빛이 어렸다. 궁등이 따스한 빛을 밝히는 방 안. 하후성과 호연연(胡姸姸), 매교랑, 그리고 하후성과 매교랑 사이 에 태어난 아기가 있었다. 매교랑은 침상에 걸터 앉아 귀여운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있었고 호연연은 그 광경을 바닥에 앉아 턱을 고인 채 물끄러미 평화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하후성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탁 자에 앉아 기다란 두루마리를 펼쳤다. 그가 혼자서 먹을 갈고 붓을 들자 그 광경을 본 호연연의 안색이 싹 변했다. 하후성은 두루마리에 무엇인가를 쓰기 시작했다. 그것 은 바로 인체의 도형으로 도형의 옆에는 깨알같은 주석이 새겨져 있었다. '.......' 호연연의 가슴은 점차 무거워졌다. 비록 지금은 평범한 아낙이 되 었지만 역시 천하제일재녀가 아닌가? 그녀는 이미 하후성이 무엇 을 하고 있는지 깨닫고 있었다. 이윽고 하후성은 붓을 놓더니 두루마리를 말아 품 속에 집어 넣었 다. "으앙!" 이때 매교랑의 젖을 빨고 있던 아기가 불현듯 크게 울어댔다. 매 교랑은 깜짝 놀라 급히 아기를 달랬다. "아가야. 울지 마라......."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꽈르르-- 릉-- 꽈-- 릉---! 무회곡 전체가 울리는 엄청난 폭발음이 들리더니 무서운 내공(內 功)이 담긴 앙천광소가 무회곡을 뒤흔드는 것이 아닌가? "으하하하하하하......!" 그 웃음이 채 그치기도 전에 처절한 비명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으... 아... 악!" 하후성은 그 갑작스러운 음향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드디어 왔구나.' 호연연과 매교랑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고 아기도 놀라서인지 울 음을 뚝 그쳤으나 처절한 비명은 계속 울려왔다. 콰-- 쾅-- 꽈르릉---! "크... 아... 악!" 지옥 아수라계를 방불케 하는 처절한 괴음향이 무회곡 전체를 폭 풍처럼 휩쓸고 있었다. 꽝---! 문득 방문이 박살나며 피투성이의 한 흑의노인이 뛰쳐 들어왔다. 그는 가슴에 금룡이 수놓아져 있었고 머리에는 관을, 그리고 수염 은 교룡 형태로 꼬아져 있었다. 그는 바로 적미천존 여적성이었다. 그의 왼팔은 어깨서부터 잘려 져 반신이 완전히 피로 물들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방 안에서 하후성을 발견하자 눈을 크게 부릅뜨더니 대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크하하하...! 하후성. 널 드디어 찾아냈구나!" 그의 얼굴에는 희색이 만연히 떠올라 있었다. 하후성도 그를 대뜸 알아볼 수 있었다. 하후성은 마음이 크게 진탕하는 것을 느끼며 그에게 다가갔다. "노선배......."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격동을 일으키며 굳게 끌어 안 았다. "하후성! 이게 얼마 만이냐?" 적미천존의 음성은 팔이 잘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고통이 섞 여 있지 않았으며 되려 호탕하기만 했다. 그는 껄껄 웃더니 방 안의 두 여인과 어린 아이를 둘러보았다. "그것 보아라! 내 예상이 어디 틀린 적이 있느냐? 핫핫핫...! 너 는 영원히 불제자가 될 수는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다 문득 그는 기이한 시선으로 하후성을 응시했다. "너는... 내력(內力)을 상실했느냐?" "네, 그것은......." 하후성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고 적미천존도 짐작되는 바가 있 는 듯 더이상 묻지 않았다. 다만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는 날카로 운 안광을 빛내며 잠시 하후성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하후성은 적미천존의 피투성이 어깨를 바라보며 오히려 걱 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노선배님, 그 팔은......." "팔? 하하하...! 천지쌍군 그 놈들의 무공은 정말 상상 외로 높았 다. 팔 하나 잃은 것 만으로도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지." 적미천존의 입가에는 특유의 오만한 웃음이 흘렀다. "흐흐흐... 대신 놈들은 목숨을 바쳤지. 나 적미천존의 팔이 그렇 게 값어치없는 것 만은 아니야." 적미천존은 여전히 껄껄 웃었으나 그의 그런 의지는 오래가지 못 하였다. "우욱!" 그는 비명을 발하더니 피를 토하며 순식간에 안색이 잿빛이 되었 다. "노선배님!" "크으! 천로 그 놈의 천멸광한장(天滅廣寒掌)이 이렇게 지독할 줄 은 몰랐구나." 이때에도 밖에서는 계속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고 적미천존이 다급 하게 말했다. "하후성, 시간이 없다. 어서 정좌해라." 하후성은 멈칫거릴 수밖에 없었다. "어서! 이것은 너와 노부의 운명이다." 무슨 뜻인가? 하후성은 의아했으나 적미천존의 재촉에 할 수 없이 바닥에 정좌하고 앉았고 적미천존은 즉시 그의 백회혈에 손바닥을 붙였다. 곧 무서운 진기(眞氣)가 장강대하처럼 하후성의 체내로 뜨겁게 흘 러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삽시에 그의 본신 내력으로 화해 전신 사지백해를 힘차게 치달리고 있었다. 이 뜻밖의 사태에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모르는 하후성의 귓전에 적 미천존의 웅후하면서도 엄숙한 말이 울렸다.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들어라. 노부의 생명은 앞으로 한 시진도 남지 않았다." 하후성은 대경했으나 진기의 유입으로 인해 몸을 움직이지 못함은 물론 입조차 열 수가 없었다. 적미천존은 계속 말했다. "백 년 전 노부의 혈천교는 천하를 장악하고 있었고 누구도 그 힘 을 당하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불사지존 백리극이 노부를 찾아왔다......." 적미천존의 말은 하후성의 뇌리로 계속 들어왔다. 불사지존 백리극. 그는 백 년 전에도 강호제패의 야심을 품고 있 었으며 그때 벌써 은밀히 마종지문을 세우고는 알게 모르게 세력 을 확장시켜 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백리극은 당시 사파무림을 장악하고 있던 현천교의 교 주 적미천존을 찾아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그것은 적미천존에게 마종지문의 부문주 자리를 줄테니 손을 잡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사파의 종주인 적미천존이 그 제안을 받아들일 이유 가 없었다. 의당 그는 단호히 거절했고 백리극은 그런 그에게 결 투를 신청했다. 백리극은 천 초(天招)를 한정지으며 말하기를 그 싸움에서 지는 쪽은 자신의 문파를 해체하고 백 년 동안 무림에서 물러나자는 것 이었다. 두 사람은 드디어 공전의 대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그것은 처음부 터 백리극의 교활한 암계로써 그는 미리 적미천존의 무공 내력을 환히 파악해 놓은 상태였다. 천 초의 대결이라는 그 싸움은 결국 광대놀음에 불과했고 겨우 한 초 반 식(一招半式)의 패배로 인해 적미천존은 현천교의 해체는 물론, 그 후 백 년 간이나 암흑을 헤매는 치욕을 겪어야 했다. 적미천존 여적성은 백리극의 간악한 술수에 휘말렸던 자신을 후회 하는 한편 백 년 후 반드시 복수하겠노라고 다짐하며 그 길로 무 공 고련을 위해 심산에 숨어 들었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어느새 백리극은 그의 몸에 한 가지 금제의 암수를 써 놓았었다. 그로 인해 여적성은 소양경(小陽經), 태양경(太陽經), 소양맥(小 陽脈), 태양맥(太陽脈)에 무서운 화기(火氣)가 생겨나는 바람에 혈맥을 크게 다치고 말았다. 그 상태로라면 무공 연마는 고사하고 목숨조차 채 일 년을 부지하 기가 어려웠다. 적미천존은 크게 분노했으나 그때는 이미 백리극 이 깊이 잠적하여 찾을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천고의 성약(聖藥)인 소 림대환단(少林大環丹)만 있다면 그는 금제에서 거뜬히 풀려나올 수가 있었다. 적미천존은 그 즉시 소림사로 달려가 당시의 소림장문인이던 천심 선사(天心禪師)를 만났다. 그러나 대환단은 불문(佛門)의 성약이므로 인연이 닿지 않는 대마 두에게는 줄 수 없노라는 게 천심의 대답이었다. 결국 적미천존은 더욱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천심선사는 대신 한 가지 문제를 제시하며 그것을 맞추면 대 환단을 주겠노라고 말했다. 그로 인해 적미천존은 그 날부터 승불 폭에 있는 동굴 속에 주저앉아 천심이 제시한 문제를 풀기 시작했 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은 바로 천심의 깊은 혜안에서 나온 것이었으 니, 적미천존은 승불폭에서 몇 년이 지나면서 차츰 그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의 양경양맥(陽經陽脈)에 입은 상처는 오직 화(火)의 반대인 수 (水), 즉 음기(陰氣)만이 억제할 수가 있었다. 애초에 천심이 낸 문제에는 해답이 없었다. 그는 다만 승불폭의 수성(水性)에 적미천존을 맡긴 것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적미천존은 승불폭에서 백 년을 머무는 동안 스스로 상처가 치유되기에 이르 렀다. 적미천존의 긴 말이 끝났다. 그 동안에도 그의 진기는 끊임없이 하후성의 백회혈로 흘러 들어 갔고 하후성의 귀에는 그의 말이 꿈결처럼 들려왔다. "천심, 그 자는 진정 존경할 만한 화상이었다. 결국 그는 나를 구 한 셈이다." 그러나 하후성은 갑자기 적미천존으로부터 흘러드는 진기가 순행 (順行)을 거부한 채 마구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적미천존의 음성 에도 힘이 빠지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천지쌍군과 오백 초의 격전을 벌이는 사이에 가라 앉았던 상처가 재발되었다. 다시 그 금제가 작용하기 시작하여 양 경양맥이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점점 가라앉아 가는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대로 두면 나 스스로의 진력이 나 자신을 태우게 된다. 그래서 너의 몸에 진력을 이전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너는... 노부에 의 해 다시 태어났노라......." 말이 끝나자마자 하후성은 진기의 유입이 그치는 것을 느꼈다. 백 회혈에 놓여졌던 적미천존의 손도 떨어졌고 비로소 하후성은 자유 의 몸이 되어 급히 몸을 돌렸다. "아!" 그는 탄식을 발했다. 적미천존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은 백발 로 변했으며, 그 멋진 적미(赤眉)조차 하얗게 세어 버렸는가 하면 얼굴은 온통 주름살로 뒤덮혀 있었다. 무회곡 밖에서 들리던 폭음과 비명소리는 어느새 조용히 가라앉고 있었다. 하후성은 멍하니 백발노인이 된 적미천존을 바라보며 넋 을 잃었다. 휙! 휙......! 방 안에 여섯 명의 인영이 피비린내와 함께 날아들었다. 앞장 선 자는 흑의와 흑발흑염의 검은 부채를 든 노인이었고 그 뒤를 이어 혈마불, 흑오존자, 혈영마인, 마동, 백화미가 따라 들 어왔다. 적미천존은 그들 중 흑의노인에게 힘없는 음성으로 물었다. "귀곡자. 밖은......?" 흑의노인은 바로 만사(萬事)와 함께 무림을 떨어울리는 지사(智 士) 귀곡자였으되 그는 바로 백 년 전 혈천교의 군사(軍師)이자 총호법이기도 했다. 귀곡자는 변해버린 적미천존의 모습에 순간적으로 모든 것을 짐작 한 듯 탄식했다. "아... 교주... 결국은......." 적미천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러나 노부의 모든 것은 헛되이 사라지지 않고... 이... 소형제에게 넘겨 주었다." 귀곡자는 다시금 탄식을 금치 못했다. "교주......." "무회곡의 상황은?" "안심하십시오, 교주. 모두 전멸시켰습니다." 적미천존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으나 이미 안색이 잿빛이었 다. "교주님!" 사령은 무릎을 털썩 꿇었고 귀곡자는 얼굴이 암담하게 변했다. 그 들을 향해 적미천존은 꺼져드는 음성으로 말했다. "너... 너희들... 잘 들어라......." 그는 품 속에서 검은 화살을 꺼내더니 그것을 멍하니 서 있는 하 후성에게 주었다. "오늘부터... 이 현천령의 주인(主人)은 ... 이 소형제다......." "교주님!" "천존......." "너... 너희들이 진정으로... 나를 따른다면... 목숨을 바쳐... 소형제를... 따르라......." "노선배님!" 하후성은 격동하여 무릎을 꿇으며 적미천존을 끌어 안았고 적미천 존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백 년 동안의... 외로왔던... 마음을 달래려고... 너를... 소형 제... 너를... 아! 그러나 아쉽구나......." 무림의 거성(巨星) 적미천존 여적성은 이렇게 숨지고 말았다. 무림의 하늘에서 신성(新星)의 재탄생(再誕生)과 함께 또 하나의 거성이 이렇게 떨어져간 것이었다. "노선배님......." ④ 무회곡(無回谷). 방 안에 세 명의 인물이 심각하게 마주보고 있었다. 하후성은 탁 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고 그 앞에 천로와 지로가 얼굴이 굳 어진 채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천로가 음산한 음성으로 물었다. "하후공자. 백화미가 벌써 백 일이 넘도록 보이지 않는데 어찌된 일이오?" 하후성은 차를 마신 후 담담히 말했다. "그녀는 몸이 안 좋아 요양 중이오." "그렇다면 얼굴이라도 볼 수 있지 않소?" 하후성은 찻잔을 소리나게 내려 놓으며 노성을 질렀다. "닥치시오. 그녀는 이제 마종문의 사람이 아니라 나 하후성의 내 자요. 내가 아무리 내공이 흩어졌다고는 하지만 나를 무시하는 말 은 도저히 용납치 못하겠소." 그 말에 천로의 안색이 무섭게 변했으며 특히 그의 두 タ〈 가 증스럽다는 듯 분노의 불길이 이글거렸다. "으... 으......." 그는 무섭게 하후성을 노려보았고 반면에 하후성은 추호도 동요하 지 않고 천로를 마주 보았다. 그의 고요한 눈은 눈 앞에서 태산이 무너진들 깜빡도 하지 않을 듯했다. 천로는 분노로 몸을 떨었다. "노부가... 이백 년을 살아오는 동안... 이토록 큰 모욕은 받아보 지 못했다." "후후......." "한 번 발을 구르면 태산조차 떤다는 우리 천지쌍군(天地雙君)을 네가......." 그러나 하후성은 여전히 담담했다. "소종사님의 명만 아니었다면 너는 죽어도 만 번은 더 죽었을 것 이다!" 하후성이 무겁게 그 말을 받았다. "나의 무공이 상실되지 않았다면 당신들은 내 앞에 감히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을 것이오." "우욱!" 지로가 막 발작을 하려는 듯 두 주먹을 움켜 쥐었으나 천로가 간 신히 그를 붙잡았다. "아우, 나가세!" 그는 노화를 최대한의 인내로 참는 한편 천로에게 이끌려 방을 나 가며 기어이 한 마디를 남겼다. "기억해라! 이 무회곡은 한 번 들어오면 영원히 나가지 못한다. 우리 천지쌍군 외에도 소종사가 특별히 배치시킨 구구팔십일로의 고수들이 있다. 섣불리 행동한다면 소종사 앞에서 자결하는 한이 있어도 네 놈을 때려 죽이리라!" 하후성은 그들이 사라지자 앙천광소를 터뜨 렸다. "으하하하핫......!" 그의 웃음은 고독한 영웅의 처절한 비감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이내 그는 웃음을 뚝 그치더니 창 밖을 바라보았다. 밤하늘에는 성좌가 흐르고 있었다. '서쪽의 성군(星群)이 이곳으로 흐르고 있다. 삼 일(三日).... 삼 일이면 모든 것이 판가름난다. 황, 나는 반드시 이곳을 나갈 것이 다!' 하후성의 얼굴에는 무서운 결단의 빛이 어렸다. 궁등이 따스한 빛을 밝히는 방 안. 하후성과 호연연(胡姸姸), 매교랑, 그리고 하후성과 매교랑 사이 에 태어난 아기가 있었다. 매교랑은 침상에 걸터 앉아 귀여운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있었고 호연연은 그 광경을 바닥에 앉아 턱을 고인 채 물끄러미 평화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하후성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탁 자에 앉아 기다란 두루마리를 펼쳤다. 그가 혼자서 먹을 갈고 붓을 들자 그 광경을 본 호연연의 안색이 싹 변했다. 하후성은 두루마리에 무엇인가를 쓰기 시작했다. 그것 은 바로 인체의 도형으로 도형의 옆에는 깨알같은 주석이 새겨져 있었다. '.......' 호연연의 가슴은 점차 무거워졌다. 비록 지금은 평범한 아낙이 되 었지만 역시 천하제일재녀가 아닌가? 그녀는 이미 하후성이 무엇 을 하고 있는지 깨닫고 있었다. 이윽고 하후성은 붓을 놓더니 두루마리를 말아 품 속에 집어 넣었 다. "으앙!" 이때 매교랑의 젖을 빨고 있던 아기가 불현듯 크게 울어댔다. 매 교랑은 깜짝 놀라 급히 아기를 달랬다. "아가야. 울지 마라......."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꽈르르-- 릉-- 꽈-- 릉---! 무회곡 전체가 울리는 엄청난 폭발음이 들리더니 무서운 내공(內 功)이 담긴 앙천광소가 무회곡을 뒤흔드는 것이 아닌가? "으하하하하하하......!" 그 웃음이 채 그치기도 전에 처절한 비명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으... 아... 악!" 하후성은 그 갑작스러운 음향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드디어 왔구나.' 호연연과 매교랑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고 아기도 놀라서인지 울 음을 뚝 그쳤으나 처절한 비명은 계속 울려왔다. 콰-- 쾅-- 꽈르릉---! "크... 아... 악!" 지옥 아수라계를 방불케 하는 처절한 괴음향이 무회곡 전체를 폭 풍처럼 휩쓸고 있었다. 꽝---! 문득 방문이 박살나며 피투성이의 한 흑의노인이 뛰쳐 들어왔다. 그는 가슴에 금룡이 수놓아져 있었고 머리에는 관을, 그리고 수염 은 교룡 형태로 꼬아져 있었다. 그는 바로 적미천존 여적성이었다. 그의 왼팔은 어깨서부터 잘려 져 반신이 완전히 피로 물들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방 안에서 하후성을 발견하자 눈을 크게 부릅뜨더니 대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크하하하...! 하후성. 널 드디어 찾아냈구나!" 그의 얼굴에는 희색이 만연히 떠올라 있었다. 하후성도 그를 대뜸 알아볼 수 있었다. 하후성은 마음이 크게 진탕하는 것을 느끼며 그에게 다가갔다. "노선배......."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격동을 일으키며 굳게 끌어 안 았다. "하후성! 이게 얼마 만이냐?" 적미천존의 음성은 팔이 잘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고통이 섞 여 있지 않았으며 되려 호탕하기만 했다. 그는 껄껄 웃더니 방 안의 두 여인과 어린 아이를 둘러보았다. "그것 보아라! 내 예상이 어디 틀린 적이 있느냐? 핫핫핫...! 너 는 영원히 불제자가 될 수는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다 문득 그는 기이한 시선으로 하후성을 응시했다. "너는... 내력(內力)을 상실했느냐?" "네, 그것은......." 하후성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고 적미천존도 짐작되는 바가 있 는 듯 더이상 묻지 않았다. 다만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는 날카로 운 안광을 빛내며 잠시 하후성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하후성은 적미천존의 피투성이 어깨를 바라보며 오히려 걱 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노선배님, 그 팔은......." "팔? 하하하...! 천지쌍군 그 놈들의 무공은 정말 상상 외로 높았 다. 팔 하나 잃은 것 만으로도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지." 적미천존의 입가에는 특유의 오만한 웃음이 흘렀다. "흐흐흐... 대신 놈들은 목숨을 바쳤지. 나 적미천존의 팔이 그렇 게 값어치없는 것 만은 아니야." 적미천존은 여전히 껄껄 웃었으나 그의 그런 의지는 오래가지 못 하였다. "우욱!" 그는 비명을 발하더니 피를 토하며 순식간에 안색이 잿빛이 되었 다. "노선배님!" "크으! 천로 그 놈의 천멸광한장(天滅廣寒掌)이 이렇게 지독할 줄 은 몰랐구나." 이때에도 밖에서는 계속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고 적미천존이 다급 하게 말했다. "하후성, 시간이 없다. 어서 정좌해라." 하후성은 멈칫거릴 수밖에 없었다. "어서! 이것은 너와 노부의 운명이다." 무슨 뜻인가? 하후성은 의아했으나 적미천존의 재촉에 할 수 없이 바닥에 정좌하고 앉았고 적미천존은 즉시 그의 백회혈에 손바닥을 붙였다. 곧 무서운 진기(眞氣)가 장강대하처럼 하후성의 체내로 뜨겁게 흘 러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삽시에 그의 본신 내력으로 화해 전신 사지백해를 힘차게 치달리고 있었다. 이 뜻밖의 사태에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모르는 하후성의 귓전에 적 미천존의 웅후하면서도 엄숙한 말이 울렸다.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들어라. 노부의 생명은 앞으로 한 시진도 남지 않았다." 하후성은 대경했으나 진기의 유입으로 인해 몸을 움직이지 못함은 물론 입조차 열 수가 없었다. 적미천존은 계속 말했다. "백 년 전 노부의 혈천교는 천하를 장악하고 있었고 누구도 그 힘 을 당하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불사지존 백리극이 노부를 찾아왔다......." 적미천존의 말은 하후성의 뇌리로 계속 들어왔다. 불사지존 백리극. 그는 백 년 전에도 강호제패의 야심을 품고 있 었으며 그때 벌써 은밀히 마종지문을 세우고는 알게 모르게 세력 을 확장시켜 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백리극은 당시 사파무림을 장악하고 있던 현천교의 교 주 적미천존을 찾아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그것은 적미천존에게 마종지문의 부문주 자리를 줄테니 손을 잡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사파의 종주인 적미천존이 그 제안을 받아들일 이유 가 없었다. 의당 그는 단호히 거절했고 백리극은 그런 그에게 결 투를 신청했다. 백리극은 천 초(天招)를 한정지으며 말하기를 그 싸움에서 지는 쪽은 자신의 문파를 해체하고 백 년 동안 무림에서 물러나자는 것 이었다. 두 사람은 드디어 공전의 대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그것은 처음부 터 백리극의 교활한 암계로써 그는 미리 적미천존의 무공 내력을 환히 파악해 놓은 상태였다. 천 초의 대결이라는 그 싸움은 결국 광대놀음에 불과했고 겨우 한 초 반 식(一招半式)의 패배로 인해 적미천존은 현천교의 해체는 물론, 그 후 백 년 간이나 암흑을 헤매는 치욕을 겪어야 했다. 적미천존 여적성은 백리극의 간악한 술수에 휘말렸던 자신을 후회 하는 한편 백 년 후 반드시 복수하겠노라고 다짐하며 그 길로 무 공 고련을 위해 심산에 숨어 들었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어느새 백리극은 그의 몸에 한 가지 금제의 암수를 써 놓았었다. 그로 인해 여적성은 소양경(小陽經), 태양경(太陽經), 소양맥(小 陽脈), 태양맥(太陽脈)에 무서운 화기(火氣)가 생겨나는 바람에 혈맥을 크게 다치고 말았다. 그 상태로라면 무공 연마는 고사하고 목숨조차 채 일 년을 부지하 기가 어려웠다. 적미천존은 크게 분노했으나 그때는 이미 백리극 이 깊이 잠적하여 찾을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천고의 성약(聖藥)인 소 림대환단(少林大環丹)만 있다면 그는 금제에서 거뜬히 풀려나올 수가 있었다. 적미천존은 그 즉시 소림사로 달려가 당시의 소림장문인이던 천심 선사(天心禪師)를 만났다. 그러나 대환단은 불문(佛門)의 성약이므로 인연이 닿지 않는 대마 두에게는 줄 수 膨遺遮 게 천심의 대답이었다. 결국 적미천존은 더욱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천심선사는 대신 한 가지 문제를 제시하며 그것을 맞추면 대 환단을 주겠노라고 말했다. 그로 인해 적미천존은 그 날부터 승불 폭에 있는 동굴 속에 주저앉아 천심이 제시한 문제를 풀기 시작했 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은 바로 천심의 깊은 혜안에서 나온 것이었으 니, 적미천존은 승불폭에서 몇 년이 지나면서 차츰 그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의 양경양맥(陽經陽脈)에 입은 상처는 오직 화( ?의 반대인 수 (水), 즉 음기(陰氣)만이 억제할 수가 있었다. 애초에 천심이 낸 문제에는 해답이 없었다. 그는 다만 승불폭의 수성(水性)에 적미천존을 맡긴 것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적미천존은 승불폭에서 백 년을 머무는 동안 스스로 상처가 치유되기에 이르 렀다. 적미천존의 긴 말이 끝났다. 그 동안에도 그의 진기는 끊임없이 하후성의 백회혈로 흘러 들어 갔고 하후성의 귀에는 그의 말이 꿈결처럼 들려왔다. "천심, 그 자는 진정 존경할 만한 화상이었다. 결국 그는 나를 구 한 셈이다." 그러나 하후성은 갑자기 적미천존으로부터 흘러드는 진기가 순행 (順行)을 거부한 채 마구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적미천존의 음성 에도 힘이 빠지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천지쌍군과 오백 초의 격전을 벌이는 사이에 가라 앉았던 상처가 재발되었다. 다시 그 금제가 작용하기 시작하여 양 경양맥이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점점 가라앉아 가는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대로 두면 나 스스로의 진력이 나 자신을 태우게 된다. 그래서 너의 몸에 진력을 이전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너는... 노부에 의 해 다시 태어났노라......." 말이 끝나자마자 하후성은 진기의 유입이 그치는 것을 느꼈다. 백 회혈에 놓여졌던 적미천존의 손도 떨어졌고 비로소 하후성은 자유 의 몸이 되어 급히 몸을 돌렸다. "아!" 그는 탄식을 발했다. 적미천존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은 백발 로 변했으며, 그 멋진 적미(赤眉)조차 하얗게 세어 버렸는가 하면 얼굴은 온통 주름살로 뒤덮혀 있었다. 무회곡 밖에서 들리던 폭음과 비명소리는 어느새 조용히 가라앉고 있었다. 하후성은 멍하니 백발노인이 된 적미천존을 바라보며 넋 을 잃었다. 휙! 휙......! 방 안에 여섯 명의 인영이 피비린내와 함께 날아들었다. 앞장 선 자는 흑의와 흑발흑염의 검은 부채를 든 노인이었고 그 뒤를 이어 혈마불, 흑오존자, 혈영마인, 마동, 백화미가 따라 들 어왔다. 적미천존은 그들 중 흑의노인에게 힘없는 음성으로 물었다. "귀곡자. 밖은......?" 흑의노인은 바로 만사(萬事)와 함께 무림을 떨어울리는 지사(智 士) 귀곡자였으되 그는 바로 백 년 전 혈천교의 군사(軍師)이자 총호법이기도 했다. 귀곡자는 변해버린 적미천존의 모습에 순간적으로 모든 것을 짐작 한 듯 탄식했다. "아... 교주... 결국은......." 적미천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러나 노부의 모든 것은 헛되이 사라지지 않고... 이... 소형제에게 넘겨 주었다." 귀곡자는 다시금 탄식을 금치 못했다. "교주......." "무회곡의 상황은?" "안심하십시오, 교주. 모두 전멸시켰습니다." 적미천존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으나 이미 안색이 잿빛이었 다. "교주님!" 사령은 무릎을 털썩 꿇었고 귀곡자는 얼굴이 암담하게 변했다. 그 들을 향해 적미천존은 꺼져드는 음성으로 말했다. "너... 너희들... 잘 들어라......." 그는 품 속에서 검은 화살을 꺼내더니 그것을 멍하니 서 있는 하 후성에게 주었다. "오늘부터... 이 현천령의 주인(主人)은 ... 이 소형제다......." "교주님!" "천존......." "너... 너희들이 진정으로... 나를 따른다면... 목숨을 바쳐... 소형제를... 따르라......." "노선배님!" 하후성은 격동하여 무릎을 꿇으며 적미천존을 끌어 안았고 적미천 존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백 년 동안의... 외로왔던... 마음을 달래려고... 너를... 소형 제... 너를... 아! 그러나 아쉽구나......." 무림의 거성(巨星) 적미천존 여적성은 이렇게 숨지고 말았다. 무림의 하늘에서 신성(新星)의 재탄생(再誕生)과 함께 또 하나의 거성이 이렇게 떨어져간 것이었다. "노선배님......." ■ 대소림사 제3권 제33장 갈라진 천년고목(千年古木) -1 ━━━━━━━━━━━━━━━━━━━━━━━━━━━━━━━━━━━ ① 무령산(武靈山). 휘... 이... 잉... 휘... 이이... 잉! 바람이 분다. 음산한 늦가을의 추풍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산동성(山東省)의 험준한 고봉으로 봉우리 위에는 벌써 겨울을 실감나게 하듯 삭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곳에는 십여 명의 인영이 서 있었는데 먼저 무회곡를 탈출해 나 온 하후성과 그 일행들, 즉 백화미, 호연연, 그리고 아기를 꼭 품 에 안고 있는 매교랑 등이 감회 깊은 얼굴로 있었다. 또한 그들과 더불어 귀곡자(鬼谷子), 현천교의 사령(四靈)인 혈마 불, 흑오존자 혈영마인, 마동 등이 삭풍을 맞으며 우뚝 서 있었 다. 휘... 이... 이... 잉! 음산한 바람이 그들을 몰아치는 가운데 하후성은 낮은 음성으로 말하고 있었다. "마종지문이 소림을 쳤단 말이오?" 귀곡자의 안색이 침중하게 굳어졌다. "그렇습니다." 하후성의 눈썹 끝이 파르르 경련했다. "결과는?" "누구도 이기지 못했습니다. 마종지문이 스스로 물러났기 때문입 니다." 휘... 이...잉! 바람이 더욱 거세게 불었다. "소림의 피해는?" 귀곡자는 차마 입을 열지 못했고 하후성이 재차 물었다. "어느 정도요?" 비로소 귀곡자는 더듬거리듯 침중하게 말했다. "반 이상이 죽고... 소림 삼성승 중... 천뢰선사와 천기선사까 지......." 바람 때문인가? 하후성의 장삼이 무섭도록 휘날렸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양 주먹을 으스러져라 움켜쥐고 있었다. 귀곡자가 나직히 탄식했다. "그러나 마종지문의 피해는 더욱 컸습니다. 근 천여 명에 달하는 고수들이 숨졌고 불사지존(不死之尊) 역시 회생이 불가능할 정도 로 심한 상처를 입었습니다." 하후성은 결연한 의지가 엿보이는 눈으로 하늘을 응시했다. '황(皇).... 어쩔 수 없구나. 이제 너와 나의 싸움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의 안색이 순간적으로 무서우리만큼 평정을 되찾았다. "귀곡자. 지금 당신의 능력으로 현천교의 고수를 몇 명이나 모을 수 있소?" "어느 정도의 고수를 말입니까?" "일류급 고수요." 귀곡자는 수중의 흑선(黑扇)을 쫙 펼쳤다. "전력을 추구한다면 두 달 안으로 최소한 오백 명은 가능합니다." 하후성의 두 눈이 다시금 무섭게 번뜩였다. "좋소. 당신은 지금부터 사령을 데리고 현천교의 고수를 모두 소 집하시오. 그리고 두 달 후 소림사로 오시오." 그러나 갑자기 귀곡자의 섭선이 탁 하는 소리를 내었다. 그의 눈 밑이 파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무겁게 입을 열고 있었다. "주군. 외람된 말씀이오나 노부가 한 마디 올리겠습니다." "무엇을 말이오?" "노부는 현천교의 제자이니 마땅히 주군의 명을 받들어야 합니다 . 그러나 현천교 오백인의 목숨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닙니다. 만에 하나, 한 순간의 감정만으로 자칫 실수한다면 평생 돌이킬 수 없 는 잘못을 저지르게 됩니다." 하후성은 눈썹을 한 차례 격하게 떨더니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귀곡자를 응시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귀곡자의 두 눈은 변함이 없 었다. 그의 눈에는 심기를 도저히 추측할 수 없을 정도 기이한 현기가 서려 있었다. 마침내 하후성은 만면에 기이한 미소를 머금 었다. "만사(萬事)와 귀곡(鬼谷) 두 명 중 한 명 만 얻으면 천하를 얻을 수 있다는 말뜻을 이제야 알겠소." 이어 그는 느닷없이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는 것이 아닌가. "귀곡자. 가르침을 바라오." 그의 뜻밖의 행동에 귀곡자는 크게 당황했다. "주... 주군, 노부는 감당하지 못합니다." "가르침을 주시오. 귀곡자." 하후성의 어조는 더할나위 없이 진지했다. 마침내 귀곡자의 두 눈 에는 경탄의 빛이 떠올랐다. 그는 공손히 입을 열었다. "실상 주군의 혜지는 노부를 훨씬 능가합니다. 단지 감정이 격해 있어 일시지간 혜지가 가려져 있을 뿐입니다." "으음......." "한 가지 일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열 번을 생각하십시오." 하후성은 귀곡자의 손을 꽉 잡았다. "고맙소. 그대의 깊은 뜻, 내 충분히 이해하오." 그는 귀곡자의 손을 놓으며 시선을 허공으로 돌렸다. "귀곡자. 현천교의 고수를 두 달 안으로 소림사로 데려올 수 있겠 소? 마종지문이 일 말의 눈치도 못채게 말이오." 그 말에 귀곡자는 수중의 부채를 접으며 입을 열었다. "섣달 그믐 날, 오백 인의 고수가 야음을 타고 소림으로 오를 것 입니다. 주군께서는 소림에 미리 연락을 취해 오해가 생기지 않도 록 해주십시오." 하후성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소. 내 명심하리다." 귀곡자는 흑선을 품 속에 넣고는 하후성을 향해 공손히 허리를 굽 혔다. "주군.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수고해 주시오." 사령도 다투어 하후성에게 인사를 올렸고 귀곡자는 그들을 재촉했 다. "사령, 갑시다." 귀곡자와 사령의 모습이 한꺼번에 유령같이 천애봉에서 사라졌다. 휘...이...잉! 바람 만이 나뭇가지를 스치며 괴이한 음향을 발하자 매교량이 하 후성에게 다가와 부드럽게 말했다. "성랑, 우리도 이제 내려가야죠?" 하후성은 그녀의 말을 못들은 듯 멍하니 하늘을 응시하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시선을 옮겼다. "교량......." 그의 어조는 착 가라앉아 있었고 매교랑은 웬지 가슴이 저리는 것 을 느끼며 불안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하란산의 도화전현성(桃花田縣城)에 가면 한 채의 낡은 장원이 있소." "장원... 이요?" "그렇소. 그곳이 나의 집이오. 비록 오랫 동안 비워두어 낡고 퇴 락했지만 손질을 하면 깨끗해질 것이오." 매교랑은 불안으로 두근대는 가슴을 껴안은 채 어둠이 서린 눈으 로 물었다. "성랑의 뜻은......." 하후성은 그녀의 품에 안겨 있는 아기를 내려다 보았다. 그런 그 의 눈에는 복잡한 상념이 어지럽게 얽혔다. "아기를 데리고 그곳에 가 있으시오." 매교랑은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 버리더니 눈꺼풀을 떨며 그에게 뭐라 말하려 했다. 그러나 하후성이 그녀의 말을 막았다. "교랑. 당신은 정녕 꿋꿋하게 살아온 여인이오. 세상의 모든 악조 건이나 거듭되는 난관에도 그대는 결코 굴복하지 않고 이겨 왔 소." "왜... 왜... 그런 말을?" 하후성은 길게 탄식했다. "당신은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우리들의 아이를 훌륭히 잘 키울 것이라고 믿소." 하후성은 품 속에서 하나의 두툼한 두루마리를 꺼냈다. 그것은 그 가 무회곡 안에서 손수 인체의 도해와 글씨를 적어넣은 것이었다. "여기에는 나의 모든 무공(武功)이 실려 있소. 만약... 내가 죽는 다면......." 백화미와 호연연은 그 말에 충격을 받은 듯 몸을 떨었으며 매교랑 은 겉잡을 수 없는 눈물을 뿌렸다. "그... 그만 하세요. 성랑! 제발......." 그러나 하후성은 차분히 가라앉은 말투로 계속 말했다. "내가 죽는다면 그 아이를 훌륭하게 키우시오. 그리고 이십 년 후 를 기약하게 해주시오." 매교랑, 백화미, 호연연 세 여인은 넋을 잃은 듯 하후성을 응시했 다. 하후성은 잠시 뜸을 들인 후 백화미를 바라 보았다. "화미." "네!" 백화미는 절로 몸이 떨리는 것을 주체하지 못했다. "교랑을 돌봐 주시오." 그녀가 고개를 떨구자 두 줄기 눈물이 바람에 날려 허공에 흩어졌 다. 휘... 이... 이... 잉! 삭풍에 옷자락이 찢어질 듯 흩날렸으나 하후성의 모습은 언제나 변함이 없었다. 그는 산이었으며 산을 닮았고 또 언제나 산이 되려 했다. 이제 그 는 산 그 자체가 된 듯이 보였다. 봉우리에 있는 인물들은 하후성 을 바라보며 한결같이 그런 느낌을 받고 있었다. 한동안 그를 우러러보던 매교랑은 아기를 안은 채 그 자리에서 큰 절을 올렸다. 어느새 그녀의 음성은 이상할 정도로 맑게 가라앉아 있었다. "성랑. 아기는 반드시 훌륭하게 키우겠어요." 백화미는 옆에 선 채 나직히 흐느끼고 있었다. 하후성은 그녀를 바라 보았다. "염려 마세요. 천첩도 최선을 다하여 매언니와 아기를 돌보겠어 요." 하후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루마리를 그녀에게 건네 주었다. "그럼 먼저 떠나겠소." 하후성은 멍하니 서 있는 호연연의 손을 잡고 신형을 날렸다. 그 의 모습은 바람과 함께 표표히 산봉 아래로 사라져 갔다. 백화미는 입술을 깨물며 손으로 자신의 아랫배를 어루 만지고 있 었다. 그녀는 하후성에게 할 말이 있었으나 미처 하지 못했다. '바보! 왜 그 말을 못한 거야....... 너의 뱃속에도 그 분의 씨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그랬던가? 천하우물 백화미. 그녀 역시 하후성의 아이를 잉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미처 그 사실을 알리지 못했다. 어 쩌면 그 사실이 하후성의 마음에 짐이 될까 저어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휘...이...잉......! 바람이 불었다. 봉우리를 흔드는 삭풍은 두 여인의 텅 빈 가슴을 더욱 쓸쓸하게 만들고 있었다. ② 천년고목(千年古木). 위... 이... 이... 잉! 무서운 강풍이 고목의 거대한 둥지를 부러뜨릴 듯이 휘몰아 쳤다. 하란산 언덕 위의 고목나무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세상을 굽어보고 있었다. <하후성(賀候星). 독고황(獨孤皇). - 다시 만날 그 날까지 변치 않을 우정(友情)을 위하여.> 천년고목에 새겨진 글씨에도 어느덧 세월의 흐름이 두텁게 스며 있었다. 위... 이... 이... 잉! 엄청난 광풍(狂風)이 고목을 몰아치더니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몰리기 시작했다. 문득 빗방울이 떨어졌다. 늦가을의 비가 하란산을 후려치고 있었 다. 쏴... 아... 쏴....... 비는 순식간에 폭우(瀑雨)로 변해 하란산 전체를 온통 비의 장막 으로 가두어 버렸다. 꽝... 꽈르르... 릉! 엄청난 뇌성벽력이 천지를 온통 푸른 섬광으로 가르는가 싶더니 떨어져 내렸다. 뇌정(雷霆)의 신이 노한 것일까? 천공을 위에서 아래로 갈라치듯 푸른 섬뇌(閃雷)가 떨어졌다. 꽝... 와지끈! 섬뇌가 고목나무에 떨어졌다. 그 순간 거대한 고목의 나무가지가 부러져 나가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독고황(獨孤皇). 그는 한 칸의 밀실 안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지금 그의 앞에는 한 개의 커다란 수정관(水晶棺)이 놓여져 있었다. 수정관은 투명하여 속이 비쳐 보였는데 그 속에는 안색이 창백한 한 명의 미녀(美女)가 잠자는 듯 누워 있었다. 그녀는 바로 천하제일지녀인 종리유향이었다. 지금 그녀의 모습은 마치 잠자는 것같아 보였다.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창백한 얼굴 에는 지순한 미소가 어려 있는 것같았다. 독고황은 수정관을 쓰다듬으며 격동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유향. 내가 왔소. 꼭... 반 년 만이구려." 독고황의 얼굴에는 그리움이 아련히 떠올랐다. "지난 반 년 동안 나는 모든 무공을 대성(大成)하여 사부께서도 못이루었던 불사지체가 되었소. 그러나... 그것이 무슨 소용이오? 차라리 내 생명을 나누어 당신에게 줄 수만 있다면 더이상 바랄 게 없을 것같소." 독고황의 손길이 떨렸다. "유향. 날 원망하시오. 만년학정혈을 소성(小星)에게 주지 않았다 면 지금쯤 당신은......." 그의 눈자위가 가늘게 경련했다. "그러나 난 그럴 수가 없었소. 그것은 당신도 이해할 것이오. 유 향.... 당신은 천하에서 가장 착한 여인이니 말이오." 그의 읊조림은 계속되었다. "당신의 삼백육십오혈을 찔러 당분간 생명이 정지된 상태로 만들 어 놓았소. 한 줌의 기(氣)를 이어 놓았으니 유향.... 언제가 될 지는 모르지만... 백 년이 걸리든 천 년이 걸리든 다시 만년학정 혈을 구할 것이오. 내 반드시 당신을 되살려 놓고 말겠소." 독고황은 수정관의 모서리를 꽉 움켜 쥐었다. "믿어주오. 유향! 당신의 그 아름답고도 순수한 두 눈을 반드시 다시 뜨게 만들고 말 것이오." 독고황은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는 섭섭하고 아쉬운 표정으로 잠든 듯 눈을 감고 있는 종리유향을 바라보았다. "유향. 가겠소. 그러나 다시 돌아 오겠소. 염려마시오. 결코 당신 을 외롭게 하지는 않을 것이오......." 독고황은 몇 번이나 수정관을 돌아보다가 마침내 몸을 돌려 석실 을 나갔다. 독고황. 그는 반 년 만에 석부(石府)에서 가공할 사공(邪功)과 마 공(魔功)의 정화를 통합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출관한 그를 기 다리고 있는 것은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의 사부인 불사지존 백리극이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폐관하 기 전까지만 해도 청수하기만 하던 중년의 모습은 간 데 없고 백 리극은 온통 백발이 성성한 주름살 투성이의 노인으로 변해 있었 던 것이다. "황....... 널 기다려야 한다는... 마지막 신념으로 눈을 감지 못 했다......." 백리극은 침상에 누워 그를 맞이했다. 그런 그의 모습은 바람만 불어도 날려갈 듯 풀기 하나 없이 허약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독고황은 대경할 수밖에 없었다. "사부님!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대체... 왜......?" "허허... 허... 노부의 능력은 아직도 부족했었나 보다... 너 의... 사모(師母)도 죽었다. 그리고 흑영마후도... 석기량도... 모두... 죽었어......." "사부님!" 백리극은 나뭇가지같이 마른 손을 뻗었다. "황.... 손... 손을... 다오......." 독고황이 손을 내밀자 백리극은 그의 손을 꽉 잡았다. 그러나 그 힘은 너무나도 미미한 것이었다. "이... 사부의 평생 꿈이 무엇인지... 너는 알겠지......." "사부님......!" 백리극은 간절한 눈으로 독고황을 바라보았다. "이룰 수... 있느냐?" 독고황은 이를 악문 채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비로소 초라하게 늙은 백리극의 얼굴에 한 가닥 안도와 자랑스러워하는 미소가 떠올랐다. "믿노라. 무림 수천년사를 거쳐... 사(邪)는 한 번도 정(正)을 꺾 지 못했고 이 사부 역시 실패했지만... 그러나... 너는... 너만은 꼭 해내리라고......." 백리극의 눈가에 죽음의 그늘이 덮혔다. "사부님,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그러나 백리극은 이미 죽음의 문턱에 닿아 있었다. 그가 그때까지 살아 있었던 것은 독고황을 마지막으로 보기 위한 집념 때문이었 던 것이다. 마침내 생명의 불꽃이 사그라지고 있었다. "황.... 좋은... 녀석." "사...... 부님!" 결국 희대의 마왕 백리극은 눈을 감고 말았다. 무림의 하늘에 또 하나의 거성(巨星)이 떨어진 것이었다. 비록 평생 무서운 마성(魔 性)을 뿌려 왔으나 무림의 빛나는 별 하나가 소멸해 버린 것이었 다. 위... 이... 위... 잉! 폭풍(暴風)이 불었다. 엄청난 대폭풍이 하란산을 통째로 날려버릴 듯 세차게 불었다. 그 폭풍에 드디어 천년고목은 뿌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우... 우... 우... 웅....... 비통한 진동음을 내며 고목은 폭풍 속에서 울부짖었다. "소종사......." 전신이 시뻘겋게 피로 물든 노인이 부복했다. 그는 바로 천지쌍군 중의 지로(地老)였다. 그의 앞에서 독고황은 대경하고 있었다. "지로! 이게 어찌 된 일이오?" 지로는 피거품을 물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소종사.... 하후성, 그가 탈출을... 탈출을......." "뭐, 뭣이!" 독고황은 둔기로 머리를 한 차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끼며 안 색이 크게 변했다. 지로는 바닥에 부복한 채 이를 갈며 부르짖었 다. "형... 형님을 비롯한 팔십일로의 고수들이 모조리 전멸... 했습 니다." 지로는 시커먼 피를 울컥 토해 냈다. "소종사! 이... 이 원한을... 원한을... 큭!" 지로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거꾸러졌다. 그의 손가락은 석실 바닥 에 깊이 박혀 있어 그가 얼마나 한을 품고 죽었는가를 말해주고 있었다. 번......쩍! 섬전이 석실 안을 시퍼렇게 물들였다. 곧이어 뇌성이 천지를 뒤흔 들었다. 섬전이 석실을 물들이는 순간 무섭도록 굳어진 독고황의 얼굴이 비쳐지고 있었다. '소성, 네가... 네가!' 독고황의 두 눈이 새파란 광망을 쏘아냈다. '너 하나 때문에 수십 번을 생각하고 수백 번을 양보했다. 너... 너 하나 때문에 내가 처음으로 사랑한 여인마저 희생시켰 다....... 그런데 너는.......' 그는 전신을 마구 떨고 있었다. '널 키워낸 소림을 차마 내 손으로 칠 수가 없었다. 그때문에 사 부님과 사모님이 돌아가셨다.' "우... 우... 아......!" 갑자기 독고황의 입에서 울분과 한에 찬 장소가 터져 나왔다. "소성, 더이상 나에게 무엇을 바라느냐? 무엇을 바라느냔 말이 다!" 꽝! 갑자기 문이 열리며 바람과 함께 세 괴인이 들어와 그의 앞에 우 뚝 섰다. 그들은 제천마검 방천극과 전신을 흰 천으로 칭칭 감은 괴인, 그 리고 전신이 온통 핏빛으로 이루어진 듯한 혈사신(血死神)과도 같 은 노인이었다. 추혼사신(追魂死神) 음혼사(陰魂士). 그는 오대마성의 일인으로 오직 불사지존에게만 이천 초 만에 패 했을 뿐 평생 한 번도 패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평생 너무나 악독한 마공 만을 익히느라 전신이 끔찍 한 상처 투성이였으며 용모도 괴물같이 변했다. 그리하여 그는 항상 흰 천으로 얼굴은 물론 전신을 칭칭 휘감고 다녔는데 사실상 오대마성 중 가장 무서운 고수였다. 마라천황(魔羅天皇) 나이찰(那異刹). 그는 천축 마라혈교(魔羅血敎)의 교주이자 천축 제일의 고수로 언 제나 핏빛을 좋아했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혈의(血衣) 만을 입고 다녔다. 방천극, 추혼사신, 마라천황, 이들은 살아남은 세 명의 마종지문 좌상들이었다. "소종사!" 추혼사신이 분노한 음성으로 외쳤다. "무슨 일이오?" 독고황은 그들을 노려보았다. "소종사! 중원무성(中原武城)의 성주인 중원신군 주청산이 대막의 선기묘인 사도유와 함께 갇혀 있던 천형뢰(天形牢)에서 본문의 천 형삼십육마를 비롯한 백 오십 명의 고수를 죽이고 탈출했소이다!" "뭣이!" 독고황의 안색이 홱 변했고 추혼사신은 차갑게 말했다. "소종사께서는 큰 실수를 하였소이다. 애초부터 인정을 두지 말고 그들 사천 명의 고수들을 죽여야 했건만, 결국 이런 일이 벌어졌 소이다." 독고황은 전신을 떨며 석탁의 모서리를 움켜 쥐었다. 우... 두... 둑! 혈석(血石)으로 된 단단하기 그지 없는 석탁 모서리가 가루가 되 었다. "우--- 우-- 우---!" 마침내 독고황은 포효를 발했으며 그의 몸 속에 잠재해 있던 가공 할 마성(魔性)이 일시에 폭발해 버렸다. 우르릉--- 콰앙---! 뇌성벽력이 대지(大地)를 갈랐고 광풍폭우가 쏟아지며 석실 안은 무서운 번갯불로 가득 찼다. 그 속에서 무시무시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소성! 이제 끝이다! 너와 나의 우정(友情)은 더이상 존속될 수가 없다!" 독고황의 눈은 번갯불보다 더 섬뜩한 광망을 줄기줄기 뿜어냈다. "죽이겠다!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 그의 음성이 석실을 온통 뒤흔들었다. 뒤이어 그는 싸늘하게 말했 다. "제천마검!" "넷!" 방천극은 복명했다. "그대는 마종문의 전 고수를 이끌고 탈출자들을 추격하시오. 그리 고... 한 놈도 남김없이 모조리 죽여 버리시오, 모조리!" "넷!" 방천극의 두 눈에서도 무시무시한 살광이 퍼져 나왔다. "마라천황!" "넷!" "그대는 천축 마라혈교의 전 고수들을 이끌고 중원무성(中原武城) 을 공격하시오! 수많은 무림인들이 그곳에 모여 있을 것이오, 그 들을 완전히 도륙하시오!" "크흐흐흐... 알겠소이다, 소종사." "추혼사신!" "넷!" "추혼사신대(追魂死神隊)는 현재 몇 명이 있소?" 어둠 속에서 추혼사신 음혼사의 으스스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크크크크... 모두 천 명이오." "좋소! 그들을 모두 끌고 전 무림을 쓸어 버리시오. 정사(正邪)를 가릴 것 없이 모조리, 모조리 붕괴시키시오!" "크크크크... 알겠소이다!" 드디어 무림의 하늘에 혈살성(血殺星)의 핏빛 기운이 퍼지기 시작 했다. 번-- 쩍! 우르르르-- 릉---! 섬광, 그리고 뇌성벽력이 대지를 산산조각 낼 듯 때렸다. "구파일방, 남맹북단, 모조리 한 곳도 빠짐없이... 남칠성(南七 省), 북육성(北六省)을 또한 모조리 쓸어 버리시오!" 꽈르르--- 릉! 꽈---앙! 천년고목의 정 중앙에 엄청난 뇌성벽력이 떨어져 고목을 일시에 절단시켜 버렸다. 화염(火焰)이 갈라진 고목나무를 일시에 불덩이 로 만들어 버렸다. 천 년 동안이나 하란산의 언덕에 우뚝 서서 천하를 굽어보던 장대 한 고목나무는 폭우 속에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 대소림사 제3권 제34장 혈야무림(血夜武林) -1 ━━━━━━━━━━━━━━━━━━━━━━━━━━━━━━━━━━━ ① 초설(初雪). 첫눈은 겨울의 길목에 들어서 한껏 몸을 움츠리던 사람들에게 뜻 밖의 선물처럼 즐거움을 안겨준다. 첫눈을 맞으며 사람들은 무엇인가 알 수 없는 기대감을 갖게 마련 이다. 따라서 거리에 뛰어나와 첫눈을 맞으며 소원을 빌거나 콧노 래를 흥얼거리곤 한다. 그러나 이 해의 첫눈은 전 무림에 가공할 혈 ?血風)을 동반하고 찾아왔다. 엄청난 대혈겁의 소용돌이가 초설과 함께 시작되었다. 까... 악! 까... 아... 옥! 까마귀(烏鳥), 보는 사람의 마음을 섬ㅉ하게 하는 불길한 흉조(兇 鳥). 수천 수만 마리의 까마귀가 산동성(山東省) 백골령(白骨嶺)을 바 위건 고목이건 가릴 것 없이 뒤덮고 있었다. 지옥도(地獄圖). 어찌 인간 세상에 이런 아수라계(阿修羅界)가 있 을 수 있을까? 하나의 거대한 흑암 옆, 그곳에 한 구의 처참하기 그지없는 시체 가 눈 뜨고 볼 수 없는 형상으로 널부러져 있었다. 그는 바로 대막(大漠)의 기인인 선기묘인(仙機妙人) 사도유였다. 그는 사지(四肢)가 절단된 채 간 곳이 없고, 복부마저 갈라져 내 장이 흘러나와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눈을 부릅뜨고 있었는데 생전의 그답지 않게 공 포에 질린 듯 눈알이 툭 튀어나와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옆에 있는 한 구의 시신이었다. 중원무성(中原武城)의 노성주인 중원신군 주청산이었다. 무림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주청산. 그도 싸늘한 시체가 되어 나뒹 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주청산의 은염은 온통 피로 물들어 혈염(血髥)으로 화해 있었다. 그의 채 감겨지지 않은 두 눈에는 처절한 통한이 배어 있었고 그 의 가슴에는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그밖에도 주위에는 오백여 구의 참혹무비한 시신들이 흩어져 까마 귀의 먹이가 되고 있었는데, 이들은 바로 마종지문의 천형뢰를 탈 출했던 무림인들이었다. 그들은 결국 이 백골령에서 제천마검 방천극이 이끄는 삼천 명의 마종지문 고수들에 의해 처참히 도륙되고 만 것이었다. 이 처참한 광경을 덮어주려는 듯이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 첫 눈과 함께 시작한 혈풍은 전 중원을 공포로 몰아 넣었다. 마라천황(魔羅天皇) 나이찰에 의해 중원무성(中原武城)의 백여 명 식솔이 모조리 전멸하고 그곳에 운집해 있던 정사고수 오백여 명 도 비참하게 죽었다. 그들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을 뿐 아니라 충천하는 화광 속 에 모든 것이 재로 사라지고 말았다. 추혼사신대(追魂死神隊). 죽음의 피를 찾아 날뛰는 늑대들....... 추혼사신 음혼사가 이끄는 이 피에 굶주린 악마의 화신들로 이루 어진 공포의 마인들은 삽시간에 전 무림을 휩쓸기 시작했다. 그들 이 스쳐가는 곳은 곧 지옥으로 화하고 말았다. 그 누구도 그들의 혈행(血行)을 막지 못했다. 오직 피가 튀고 혈육(血肉)이 난무할 뿐이었다. 첫눈이 내릴 때 광동성(廣東省)에서 시작된 이 죽음의 행진은 강 서(江西), 절강(浙江), 호남(湖南), 호북(湖北)을 거쳐 전 중원으 로...... 전 중원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실로 가공스런 공포의 대혈로(大血路)가 이어졌다. 소림사(少林寺). 마종지문과의 엄청난 대혈전은 천 년 역사의 소림사를 기둥째 뒤 흔들었다. 소림은 이제 옛날의 소림이 아니었다. 곳곳의 불전이 불타고 소림사의 절반 가량이 잿더미가 되었다. 지객원(知客院). 과거의 지객원주는 현정(玄正)대사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 뒤를 이은 정항(丁恒) 대사로 그는 오십이 세였 으며 인자한 용모를 가지고 있었다. 지객원의 한 선방에서 그는 하후성과 남장 차림의 호연연과 마주하고 있었다. 하후성은 막 이곳에 당도했다. 정항대사는 깊숙히 허리를 숙이며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소사숙님,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하후성은 합장 답례한 후 물었다. "정항. 현정사형은 어디 계시오?" 그 말에 정항대사는 침통한 표정으로 불호만 외 뿐이었다. "아미타불......." "정항!" 하후성은 재촉에 그는 마지 못한 듯 말했다. "현정사백께서는... 원적하셨습니다." 하후성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이미 지객원에서 정 항이 맞는 것을 보 弩 때 예견치 못한 바는 아니었으나 막상 직 접 듣고 보니 충격을 금할 길이 없었다. 마침내 그는 탄식하며 물었다. "마종지문 때문인가?" "그렇습니다. 소사숙." 정항대사는 합장하며 말했다. "소사숙. 천심(天心) 사백조님께서는 소사숙이 오시면 불심각으로 오시라 하셨습니다." "알겠소. 정항." 하후성은 몸을 일으켰다. 불심각(佛心閣). 선방에서 천심선사가 정좌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담담했으며 눈빛도 역시 물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지금 그의 앞에는 하후성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사부님......." 천심은 자애롭게 말했다. "현수. 노납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더이상 말할 필요는 없 느니라." 하후성은 침음했다. "아미타불.... 들었는지 모르지만 천기사제는 이미 원적했다." 하후성은 가슴이 쓰린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천심의 얼굴 에도 일대 고승답지 않게 짙은 고뇌가 어렸다. 천심선사는 백미를 미미하게 떨다가 입을 열었다. "현수." "네, 사부님." "이곳을 나가는 즉시 조사동(祖師洞)으로 가보아라." 하후성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천뢰 사제가 너를 기다리고 있다." 하후성은 이내 몸을 부르르 떨며 내심 부르짖었다. '그럼... 천뢰사숙이... 돌아가시지 않았단 말인가?' 천심선사는 다시 부드럽고 자애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현수." "네, 사부님." "곧 있으면 모든 혈겁(血劫)이 종식된다. 아미타불.... 노납은 너 에게 더이상 뭐라고 말할 수가 없다. 단지 한 마디만 하겠다." 현수는 숙연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들었다. "원한은 원한을 낳고 복수는 복수를 부른다. 불존의 뜻을 항상 기 억하라. 자비... 언제나 마음 속에 자비를 가져라." 천심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아미타불.... 모두가 부처님의 뜻일 뿐......." 하후성은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격랑을 느끼며 바닥에 엎드린 채 물었다. "대사부님. 제자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것입니까? 대사부님, 가르침을 주십시오. 제가 어떻게 해야 할 지를......." 그러나 천심은 더이상 할 말이 없는 듯 굳게 눈을 감은 채 입정 (入定)하고 있었다. 조사동(祖師洞) 안. 백팔 개의 황동 불상(佛像)과 아홉 개의 향로, 그리고 수백 개에 달하는 유골 항아리들 가운데 천뢰선사가 있었다. 그러나 그 또한 이미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가슴에 시커 먼 마수(魔手)가 관통된 채 전신이 피투성이가 되어 마치 시체처 럼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서 하후성은 너무도 큰 충격에 넋을 잃고 있었다. 그러나 하후성을 바라보는 천뢰의 눈에는 격동의 빛이 어렸다. 고 리눈같은 그의 두 눈에서는 쉬지 않고 따뜻한 자애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 사숙님... 이게... 이게 대체......." 하후성은 털썩 무릎을 꿇었으나 천뢰선사는 아무렇지도 않은듯 너 털웃음을 웃었다. "허허허... 현수. 노납의 모습이 뜻밖이냐?" "사숙님......." "이리 가까이 다가와라." 하후성이 무릎을 꿇은 채 다가가자 천뢰는 한 손으로 그의 어깨와 머리칼을 쓸었다. "허허허.... 현수, 이 녀석! 완전히 성숙했구나. 이 사숙조차 이 제는 너의 적수가 되지 못하겠구나." "사숙님......." 하후성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얼마 만에 만난 그들 사도지간이던 가? 그런데 이런 모습으로 비참하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상상 이나 했겠는가. 실상 하후성은 소림 삼성승 중에서도 이 천뢰선사에게 가장 큰 정 (情)을 받았고 또 느꼈다. 그것은 천뢰에게 대부분의 무공을 배웠 고 그와 같이 숱한 난관을 넘었기 때문이었다. 천뢰선사는 만면에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현수여, 슬퍼하지 말아라. 노납의 생명은 비록 얼마 남지 않았으 나 죽는 순간에 이르니 오히려 불존의 말씀 모두가 하나같이 새롭 구나. 이것은 노납 평생의 가장 큰 수확이니 이 어찌 기쁜 일이 아닐소냐?" "사숙님......." 천뢰선사는 문득 그에게 물었다. "현수, 반야밀다대승신공의 근본이 무엇인고?" 하후성은 흠칫했으나 곧 대답했다. "불(佛)의 극원과도 같은 공(空)이옵니다." "공(空).... 그렇다. 그것이다. 그러나 진리란 언제나 말하기는 쉬우나 깨달아 실천하기는 어려운 법이 아니더냐?" "그렇습니다. 사숙님." "노납은 불사지존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이 조사동에서 너를 기다리는 동안 수많은 진리를 깨달았다." 천뢰의 얼굴에는 갑자기 은은한 신광이 감돌기 시작했고 그의 음 성은 낮으나 무한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다. "무념무아무상무심(無念無我無常無心)이 되니 곧 우주(宇宙)가 일 체(一體)라, 천지인(天地人)이 합일되는 것은 바로 여기에 기인한 다." 하후성은 안색이 엄숙해졌다. 그것은 바로 일찌기 그가 깨달았던 반야밀다심경의 요결(要決)이었다. "모든 것은 공(空)으로 돌아간다. 노납은 비로소 반야밀다대승신 공을 십이 성(十二成) 터득했다." 천뢰선사의 말에는 법열의 기쁨이 가득 서려 있었다. 그는 천고의 기재 하후성을 벌모세수로부터 시작하여 소림사상 최 고기인으로 키워내었으되 그 자신은 막상 도달하지 못했던 극한의 경지에 마침내 이른 것이었다. "사숙님. 축하드리옵니다." 하후성이 고개를 숙이며 읍했으나 천뢰는 갑자기 엄숙히 말했다. "현수, 정좌하거라." 하후성은 그의 말대로 정좌했다. 그것은 천뢰와 더불어 요결을 논 (論)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순간 뜻밖에도 하후성의 백회혈 (百會血)에 뜨거운 기운이 부어졌다. '앗!' 하후성은 내심 경악성을 발했다. 설마 천뢰가 개정대법(開頂大法) 을 시행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를 제지하기에는 이미 때가 늦어 있었다. 뜨거운 기운이 전신에 스며듬과 동시에 그의 귓전으로 천뢰의 음 성이 마치 불(佛)의 전성처럼 울려왔다. "삼라만상(森羅萬象) 우주만물(宇宙萬物) 색즉시공(色卽是空) 공 즉시색(空卽是色)... 법화일언(法華一言) 중부지처(中府之處) 공 요결람(空要訣覽)... 원체전동(元體全動) 무유지영(無有之 永)......." 천뢰가 읊는 요결은 모두가 반야밀다대승신공의 십이 성 경지를 일컫는 요체로써 하후성은 더이상 방심할 수가 없었다. 그는 할 수 없이 천뢰로부터 부어지는 뜨거운 진기를 받아들이며 전심전력으로 요결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무아지념(無我之念) 무상지경(無常之境)... 합원지공(合元之 空)......." 하후성은 머리 속이 수정(水晶)같이 맑아짐을 느꼈고 동시에 그의 정좌한 몸이 그 상태로 석 자 가량 떠올랐다. 부공삼매(浮空三 昧)! 마침내 전설의 경지에 들어선 그는 해탈의 희열감을 맛보고 있었다. 모든 것이 확연히 밝아진 느낌을 받으며 그는 눈을 번쩍 떴다. ② 하후성의 눈에는 아무런 광채도 서려 있지 않았다. 단지 어린아이 처럼 맑을 뿐이었다. 그는 즉시 천뢰선사를 볼 수 있었는데 천뢰의 표정은 장엄하기 이 를 데 없이 마치 불존과도같은 후광으로 빛나고 있었다. 천뢰는 입을 열어 말했다. "현수여, 노납이 백 팔십 년을 살아온 동안 가장 깊이 사귄 사람 이 세 명이니 바로 대사형 천심과 천기 사제, 그리고 너... 현수 다." 천뢰의 얼굴에 다시금 자비로운 미소가 떠올랐다. "대사형은 노납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며 천기 사제는 가장 감탄 을 준 사람이다. 그러나 노납의 마음 속에 깊고 진정한 정(情)을 느끼게 한 것은 바로 너, 현수였다." "사숙님!" "노납은 기쁘기 한량 없도다. 이제 유한(有恨)이 없다." 천뢰는 부드럽고 현기어린 눈으로 하후성을 바라보았다. 이미 자 신의 모든 내공력을 하후성에게 불어넣었으므로 지금 그의 몸은 껍데기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어찌 그의 몸에서 이토록 신태가 흐를 수 있는 것일까? 실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천뢰선사는 성불지체(成佛之 體)라도 되었단 말인가? 천뢰는 다시 말했다. "현수. 너는 소림사상 첫 번째로 반야밀다대승신공의 극성인 십이 성에 도달한 기재다. 거기에 노납의 이승에서의 정화(精華)가 부 어졌으니 너는 이제 소림뿐 아니라 무림, 아니 고금을 통하여 전 무후무한 존재다." 말을 마치자 그는 두 눈을 스르르 감았다. 홀연히 그의 몸에서 신 태가 사라지고 있었다. "아미타불.... 영(靈)이 떠나는도다." "사, 사숙님!" 하후성은 격하게 몸을 떨었다. 그러나 천뢰는 담담하고도 자애롭 게 말했다. "현수, 모든 것은 공(空)이다. 불존의 말씀을 기억하라. 자비 를... 기억하라.... 나무아미타불.... 자비를......." 조용해졌다. 조사동 안에는 곧 태고(太古)의 정적이 찾아들었다. "사숙님!" 일대의 기승인 천뢰는 죽었다. 마침내 그는 해탈을 하여 불계(佛 界)에 들고 말았다. 현수 이전에 천 년 소림의 가장 강했던 고수 천뢰선사는 마침내 원적을 한 것이었다. "사숙님......!" 하후성의 부르짖음이 조사동을 메아리치게 했다. 지객당(智客堂)에서 두 인물이 마주보고 있었다. 하후성은 격동어린 시선으로 눈 앞에 서 있는 흑의 중년문사, 즉 선풍마서생 위전풍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위전풍은 왼쪽 팔이 없었고 단지 빈 소매만 펄럭일 뿐이 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꿋꿋하기 그지 없었다. "위형의 팔은?" 하후성이 묻자 위전풍은 호탕하게 웃었다. "핫핫핫...! 하후형, 무림계(武林界)에 살다보면 이런 일은 비일 비재한 것이오. 신경쓰지 마시오." 위전풍은 힐끗 빈 소맷자락을 바라보더니 고소를 지었다. "중원무성에 있다가 마라천황(魔羅天皇)의 蒐응 당했소. 후후 후... 마라천황 나이찰의 무공은 확실히 대단했소. 그러나... 놈 역시 한 쪽 팔을 잃었으니 결국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었소. 후후 후후......." 하후성의 안색이 심각한 변화를 일으켰다. "주... 중원무성이 공격을 당했다는 말이오?" 위전풍은 의아한 듯이 그를 응시했다. "아니, 하후형은 전혀 모르고 있었소?" 하후성은 떨리는 가슴을 억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으음......." 위전풍은 어두운 안색으로 나직히 침음했다. "보름 전 마라천황이 이천여 명의 고수를 끌고 중원무성을 공격했 는데 실로 끔찍한 대혈전이었소. 중원무성에 있던 무림인들은 이 를 악물고 대항했지만 워낙 중과부적(衆寡不敵)이라... 거의 전멸 을 면치 못했소." "아!" "휴우! 더군다나 중원신군 주 노선배 역시 백골령(白骨嶺)에서 제 천마검 방천극에 의해 분사(憤死)하셨으니......." 하후성의 얼굴은 아예 잿빛이 되었다. '외증조부님마저... 외증조부님마저.......' 정신이 아득해지고 천지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하후성의 정력(定力)은 가히 초인간적이었다. 그는 양 주먹을 으스러지도록 잡으며 위전풍을 향해 입을 열었다. "중원무성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몇 명이나 됩니까?" 위전풍은 더욱 의아해졌다. '하후형이 왜 이토록 중원무성에 신경을 쓸까?' 그러나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음, 나를 포함해서 근 십 여 명 정도밖에 살아남지 못했소이다." 하후성이 다그치듯 물었다. "혹시 주청산 노선배의 손녀를 아십니까?" "아! 주설란(朱雪蘭) 여협을 말하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그 분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위전풍은 길게 탄식했다. "주여협 역시 중원무성을 빠져나오지 못했소이다." 하후성의 전신이 무섭게 떨리다 못해 모든 혈맥들이 터질 듯이 팽 창되었다. 평생 오직 정인(情人) 하후연 만을 기다리던 외로운 여 인, 그러면서도 자신이 낳은 자식마저도 보지 못한 채 언제나 한 (恨)을 안고 살아온 여인...... 그녀 주설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지 않는가? '어머니... 어머니.......' 하후성은 다만 가슴 속으로, 가슴 속으로 뜨겁게 통곡했다. '어머니!' 위전풍은 하후성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무서운 자제력(自制力)이 그의 비통을 억누르고 있어 위전풍이 보기에 그는 단지 고개를 떨 구고 있을 뿐이었다. "실로 엄청난 피바람이 강호 전역을 휩쓸고 있소. 추혼사신 음혼 사, 제천마검 방천극, 마라천왕 나이찰 등 마종지문의 육천여 고 수들은 모두 세 방향으로 나뉘어서 전 무림에 죽음의 비를 뿌리고 있소. 이미 남칠성(南七省)의 수많은 문파가 혈우(血雨)에 물들었 고 특히 추혼사신 음혼사가 이끄는 일천 명의 추혼사신대(追魂死 神 ?는 피에 굶주린 악마(惡魔)처럼 날뛰고 있소." 위천풍의 격앙된 어조가 하후성의 귀를 때렸다. "하후형! 지금 이 무서운 혈겁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천하에서 오 직 대소림사(大少林寺)와 하후형밖에 없소. 이미 소실봉 밑에는 전 무림의 고수 일만여 명이 집결해 있소." 위전풍은 하후성의 양 손을 꽉 잡았다. "하후형, 당신의 한 마디면 모든 고수들이 불길처럼 일어날 것이 오. 하후형!" 하후성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누가 알겠는가? 그의 찢어질듯한 마음을....... 그러나 그런 속에서도 하후성은 이미 결심하고 있었다. '황(皇).......' "소림의 땡초중놈들아, 어서 나와라! 당장 하후성인지 뭔지 하는 어린 놈을 끌고 나와라!" 소림사 산문(山門)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떠드는 노인이 있었다. 봉두난발에다가 두 눈에 시퍼런 ㅁ?狂氣)가 흐르는 괴노인, 그 는 바로 광검절심(狂劍絶心) 유무심(有無心)이었다. "천심(天心), 이 늙은 중놈아! 어서 나와라!" 그의 행동은 예나 지금이나 완전히 광인이었다. 보다 못한 소림의 사대금강(四大金剛)이 뛰쳐나와 저지하려 했으나 광검절심은 악을 쓰며 수중의 검을 미친 듯이 휘둘러댔다. 파... 파... 팍! 그의 광검오마식(狂劍五魔式)은 가히 하늘조차 뒤집을 지경이었 다. 그러나 사대금강이 누구인가? 광검절심의 검이 제아무리 무서워도 사대금강의 합공(合功)을 당 해내기는 힘들었다. 다만 사대금강은 광검절심에게 차마 손을 쓰 지 못하고 그의 공격 만을 차단하고 있었다. 결국 광검절심은 노화가 하늘을 찔렀지만 현자(玄字) 돌림의 사대 금강을 자신의 뜻대로 물리칠 수는 없었다. "사형들, 잠시 물러나 주십시오." 하후성이 바람같이 나타나자 사대금강은 반색을 하며 뒤로 몸을 뺐다. "오! 소사제, 어서 오게." "저 노시주가 아까부터 계속 소사제를 찾는데 워낙 성격이 기이하 여 종잡을 수가 없었네." 하후성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시선을 광검절심에게 옮겼 다. 그의 두 눈은 기이할 정도로 고요했다. 그런데 광검절심은 하후성을 발견하자마자 벼락같이 다가오며 노 성을 지르는 것이 아닌가. "오! 너 이 놈, 잘 왔다. 이 놈아! 어서 당장 손녀딸을 내놔라! 대체 섬화(閃花)를 소림사 어느 구석에다 쳐박아 놨느냐?" 하후성은 눈살을 찌푸렸다. "유노선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광검절심이 이를 바드득 갈았다. "이 놈아! 네 놈이 모르면 누가 알겠느냐? 섬화 그 년이 너를 찾 겠다고 나간 지가 벌써 일 년이 넘었다." 그는 두 눈에서 시퍼런 광기를 뿜어내며 이를 다시 갈았다. "육십 년 전에 천기(天氣)인지 뭔지 하는 그 늙은 중놈에게 속아 서 그 바람에 육십 년 동안 대홍산 천화곡(天火谷)에 묻혀 산 것 만 해도 분통이 터져 죽겠는데, 거기에 또 손녀까지 납치해? 내 이 놈의 소림사를 뿌리째 뽑아 놓겠다!" 그의 광기는 절정에 이르러 있었다. 그러나 이때 하후성은 내심 짐작가는 것이 있었다. '으음. 유섬화란 소녀가 천화곡을 떠난 모양이군.' 광검절심 유무심이 폭갈을 터뜨렸다. "이 놈! 네 놈부터 족치겠다!" 이때 어디선가 창노한 음성이 들려와 그를 제지했다. "광옹(狂翁), 그만 두게. 그게 무슨 추태인가?" 휘익! 수중에 한 자루의 호미를 들고 있는 노인이 나타났다. 그를 본 하 후성은 흠칫했다. '월옹(月翁)?' 그 노인은 바로 하후성이 대홍산 기슭에서 만난 적이 있는 자칭 월옹이란 노인이었다. "어? 네... 네가 이곳에 웬일이냐?" "광옹. 섬화는 잘 있으니 염려 말게." 유무심은 어리둥절해 했다. "네... 네가 어찌 아느냐?" 월옹은 탄식하며 말했다. "섬화야, 숨는다고 되는 일이 아니니 이제 나오너라." 그러자 장내에 한 쌍의 젊은 부부가 나타났다. 남자는 젊고 영준한 검사(劍士)로 그의 왼쪽 어깨에는 한 마리의 비응(飛鷹)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여인은 무척 아름답고 현숙해 보였는데 그녀는 바로 지난 날 천화곡의 망나니 소녀였던 유섬화 였다. 그녀는 지난 날과는 완전히 딴 사람이 된 듯 완전히 변해 있었다. 광검절심 유무심은 그녀를 보자 노화를 터뜨렸다. "네 이 년, 섬화!" 유섬화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할아버지, 용서하세요." "이... 이... 년을 그냥......." 유무심은 실제로 주먹을 치켜 들었다. "노선배님, 모든 죄는 소생에게 있습니다." 낭랑한 말과 함께 젊은 검사가 그의 앞에 무릎을 꿇자 비로소 유 무심도 흠칫했다. "네 놈은 누구냐?" "소생은 천산비검옹(天山飛劍翁)의 제자인 비응공자(飛鷹公子) 표 화운입니다." 유무심은 안색이 급변했다. 비응공자 표화운이라면 당금 사룡(四 龍)의 한 인물이 아닌가? 그러나 유무심이 놀란 이유는 단순히 그게 아니었다. 그는 유섬화 와 표화운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 탄식해마지 않았다. "그렇지, 섬화 너도 이젠 다 컸구나. 이제 나 만의 손녀는 아니구 나......." 그의 옆으로 월옹이 다가왔다. "광옹, 천화곡으로 돌아가세. 자네가 앞으로 살면 얼마를 살겠는 가? 노부와 같이 바둑이나 두며 여생을 보내세." 유무심의 안색이 몇 번이나 변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그는 미친 듯 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핫핫핫핫핫......!" 중인들은 한결같이 불안한 눈으로 그를 바라 보았으나 그것은 단 지 기우였다. "가세, 월옹!" 웃음을 뚝 그친 순간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몸을 휙 날렸다. 월옹 도 호탕하게 웃으며 그를 따라갔다. "할아버지!" 유섬화는 크게 부르며 유무심을 따라 몸을 날리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옷자락을 잡는 사람이 있었다. "섬화." 그는 바로 표화운이었다. 유섬화는 멈칫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 에는 갈등이 여러 번 교차 되었으나 그녀는 결국 그 자리를 떠나 지 못한 채 고개를 뚝 떨구고 말았다. 그녀의 행동에 중인들은 모두 얼굴에 미소를 떠올렸다. 과연 인간 사(人間事)란 순리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③ 그믐의 밤을 칠야(漆夜)라고도 부른다. 그것은 자고로 그믐 밤이 칠흑같이 어둡기 때문에 붙여진 말이었 다. 섣달 그믐. 이 해가 가고 있었다. 한 해의 마지막 밤이었다. 이 밤이 지나면 새로운 해가 중원에 뜰 것인가? 온통 악몽과 혈겁, 음모와 피보라로 점철되었던 무서운 한 해가 가면 과연 새로운 평화가 도래할 것인가? 칠야의 어둠을 타고 오백인의 검은 그림자가 숭산(嵩山)을 오르고 있었다. 그들이 움직이는 데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모두가 일기당 천의 절정고수들임이 분명했다. 앞장을 선 인물은 흑의에 검은 머리, 검은 수염, 그리고 손에는 검은 섭선을 들고 있었다. 그는 바로 현천교의 총호법인 귀곡자였다. 그렇다면 바로 이들 오 백 명의 고수들은 현천교의 인물들이리라. 섣달 그믐. 이 날이 바로 하후성과 약속하여 소림에 집결하기로 그 날이었던 것이었다. 휘... 이... 잉....... 살을 에일 듯한 삭풍이 휘몰아쳤고 하늘에는 먹장구름이 켜켜로 떠 있었다. 그리고 삭풍에 실려 눈이 한 송이 두 송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곳은 숭산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하남성의 서북쪽 귀운산(鬼雲 山) 마운협(馬雲峽)이었다. 협곡 양 쪽으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무너질듯 위태롭게 기울어 있는 이곳은 언제나 안개가 서려 음산하기 이를 데 없는 분위기로 일명 혈무곡(血霧谷)이라고도 부른다. 혈무곡의 절벽 위에는 삭풍에 옷자락을 나부끼며 한 인영이 우뚝 서 있었다. 눈보라에 백의를 표표히 날리며 무심한 표정으로 서 있는 인영이 있었다. 휘... 이... 잉! 눈 실은 삭풍이 그의 머리칼을 휘날렸는데 유난히 검은 머리는 허 리까지 늘어져 있으며 또한 흰 띠로 묶여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 다. 그는 바로 하후성이었다. 휘... 이... 잉! 기분 탓인가? 바람조차도 웬지 울컥하는 피비린내를 풍기는듯했 다. 두! 두... 두... 두... 갑자기 천지를 진동하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더니 뒤이 어 혈무곡으로 향하는 천여 필의 말이 있었다. 그것은 모두 흑마(黑馬)였고 마상에 앉은 인물들도 모두 흑의에 검은 복면까지 두르고 있었다. 그들은 등 뒤에 한결같이 섬뜩한 빛이 감도는 일월쌍극(日月雙戟)을 교차하여 메고 있었고 흑마 또 한 모두 철갑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앞장 선 자는 이들 대열과는 반대로 전신을 유령같이 흰 천으로 칭칭 감은 자였다. 무림인들은 그를 일컬어 추혼사신(追魂死神)이라 불렀다. 그렇다면 그가 이끄는 군마들이야말로 현 강호를 피로 쓸고 있는 추혼사신대(追魂死神隊)가 아닌가? 바로 죽음의 피를 부르는 악마 의 사신들이었다. 두... 두... 두... 두! 말발굽 소리가 지축을 울리는 가운데 천지에 죽음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그들은 빠른 속도로 혈무곡을 뒤덮고 있는 안개 속으로 들어갔다. 안개조차 그들이 두려운 듯 거센 파장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때 절벽 위에 서 있던 하후성의 두 눈에 살기가 일어났다. 그는 추혼사신대가 혈무곡 안으로 모두 들어서자 손을 번쩍 치켜 들었 다. 그러자 실로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절벽 위의 능선을 따라 무수한 인영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실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그 인영들이 점점이 모습을 드러내 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숫자는 수백(數百), 아니 수천(數千)이 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그의 영도를 따르는 무림인들이었다. 두... 두... 두... 두......! 드디어 추혼사신대는 완전히 혈무곡 중심으로 들어왔다. 하후성의 입에서 죽음의 명령이 떨어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공격하라---!" 꽝-- 꽈-- 르- 릉---! 절벽 위에서 무엇인가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집채만한 바위로부터 거대한 고목 둥치, 엄청난 양의 바윗덩이들로 마치 혈 무곡을 메워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우박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지옥도(地獄圖)이련가? 혈무곡 안은 암석 등의 낙하로 인해 창졸 지간 피와 죽음의 아수라장으로 화하고 말았다. 놀라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철갑흑마들, 그러나 떨어져 내리는 바윗덩이는 철갑흑마들의 허리를 부러뜨렸고 말에서 굴러떨어진 흑의무사들은 말발굽에 짓밟히는가 하면 신형을 날리다 고목둥치 나 바위에 깔려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즉사하고 있었다. 인마(人馬)가 뒤엉킨 채 몰사하는 참경은 혈무곡을 일시에 지옥곡 (地獄谷)으로 만들었고 그로 인해 추혼사신대는 순식간에 절반 이 상이 처참하게 궤멸되고 말았다. 그 광경을 무심하게 내려다 보고 있던 하후성은 몸을 번쩍 날리며 두 번째 외침을 발했다. "공격---!" 그러자 이번에는 바윗덩이가 아닌 수천 명의 군웅들이 협곡 밑으 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손에 손에 무기를 쥔 채 그들은 지는 꽃잎처럼 분분이 낙하했다. 이윽고 대혈전이 벌어졌으나 우왕좌왕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수백 명의 추혼사신대는 미처 운신하기도 전에 전신에 수십 자루의 칼 을 맞고 난자되어 고꾸라졌다. 특히 하후성의 양 손이 움직일 때마다 엄청난 피가 튀었고 그것은 처참무비한 대살륙전의 기폭제가 되었다. 추혼사신대. 죽음을 부르던 그들은 마침내 스스로가 죽음으로 빠 져 들어가고 만 것이었다. 참고 참았던 군웅들의 분노가 마침내 폭발한 것이었다. 마라천황(魔羅天皇) 나이찰(那異刹). 그는 왼팔이 어깨서부터 잘려나가고 없었다. 그것은 바로 얼마 전 선풍마서생 위전풍과의 일전에서 얻은 전과 (戰果)로써 그로 인해 그는 몸 전체에 큰 타격을 받았으나 심후한 내공으로 간신히 체력을 유지할 뿐이었다. 그가 쓰는 무기는 한 자루의 핏빛 옥으로 된 혈옥마도(血玉魔刀) 였다. 밤. 나이찰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상처 부근에 심한 격통을 느껴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 다. "뇌파(雷破)!" 그는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부르셨습니까?" 문을 열고 한 인물이 들어섰는데 그는 붉은 옷을 입은 중년장한으 로 나이찰의 첫 번째 제자이자 마라혈교 내에서 서열 두 번째의 고수이기도 했다. "가서 제세활불(濟世活佛)을 데려와라." 나이찰의 명령이 무엇을 뜻하는지 뇌파는 알았다. 제세활불이란 천축 활교(活敎)의 교주로서 의술(醫術)에 능통한 자였다. 나이찰 은 그를 청해 상처를 치료하려는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교주님." 뇌파는 고개 숙여 절을 한 뒤 방을 나왔다. 그리고 그는 제세활불 을 만나러 가기 위해 회랑을 돌아갔다. "켈켈켈켈......." 갑자기 괴이한 웃음소리가 옆에서 가깝게 들리자 그는 눈살을 찌 푸렸다. "누... 누구냐? 으...헉!" 그러나 이내 그는 온 몸에 쭈뼛 소름이 돋을 정도로 놀랐다. 벽(壁). 그 속에서 웬 어린 소년의 얼굴이 가공할 사기(邪氣)가 어린 미소를 띈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으... 으......." 뇌파는 공포감이 전신을 응축시키는 것을 느끼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때 무엇인가에 등을 부딪쳤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돌릴 수도 비명을 지를 수도 없었다. 퍽! 둔탁한 음향과 함께 그의 머리는 박살이 나고 만 것이었다. 그의 뒤에는 전신에 흑의를, 어깨에 까마귀를 얹고 있는 괴인이 음산하 게 서 있었다. 흑의괴인은 바로 현천교 사령의 한 명인 흑오존자 (黑烏尊子)였다. 흑오존자가 축 늘어진 뇌파의 시체를 옆구리에 끼자 벽 속에서 어 린아이가 튀어나왔다. "켈켈켈! 마라천황, 다음 차례는 너다!" 그는 바로 마동(魔童)이었다. ④ 방문 밖에서 늙은 음성이 들렸다. "부르셨습니까? 교주님." 침상에 누워있던 마라천황 나이찰은 희색을 띄며 물었다. "오, 제세활불인가?" "그렇습니다." "들어오게!" 방 문이 열리고 방 안에 혈의를 입은 한 늙은이가 들어왔다. 그는 손에 불장(佛杖)을 들고 있었는데 눈썹과 수염이 모두 허옇고 무 성했다. 노격(奴格). 이것이 제세활불의 이름이었다. 그는 활교의 교주로 서 무공보다는 의술에서 일가를 이루고 있었다. 나이찰은 고통스러운 듯 눈썹을 찌푸리며 그를 향해 잘려진 어깨 를 가리켰다. "으음.... 상처가 여간 쑤시는 게 아니다. 좀 봐다오." "네, 교주님!" 제세활불은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이며 다가왔다. 그는 나이찰의 상처를 살펴보더니 침중하게 말했다. "위험합니다. 상처가 곪기 시작했습니다." 나이찰은 잔뜩 면상을 구겼다.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 "활교 전래의 금침파혈대법(金針破血大法)을 써야 합니다." "금침파혈대법? 그게 무엇인가?" 제세활불은 입가에 묘한 웃음을 띄며 말했다. "신묘무궁한 것입니다. 그 어떤 중상일지라도 단숨에 고칠 수가 있습니다." 나이찰은 대뜸 희색을 띄었다. "좋다. 어서 시술해다오!" 활불은 만면에 득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먼저 상의를 벗으십시오." "음......." 나이찰은 스스로 상의를 벗었다. 그러자 그의 기름진 배가 노출되 더니 곧 시커멓게 피가 엉긴 채 뼈까지 검게 변색되어 있는 왼쪽 어깨가 드러났다. 활불은 품 속에서 근 반 자나 되는 금침을 하나 꺼냈고 그 긴 금 침을 본 나이찰은 깜짝 놀랐다. "그... 그렇게 긴 침으로?" "단 한 방이면 끝납니다." 활불이 씨익 웃으며 장침을 들어올리자 나이찰의 얼굴은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나이찰이 침 끝을 불안한 듯 쳐다보는 사이, 번뜩하는가 싶자 장침은 뜻밖에도 그의 배꼽 밑 단전혈(丹田穴)에 깊숙히 꽂 혀 버리는 것이었다. "크악!" 나이찰은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동시에 그는 전신 내공이 산산조 각으로 흩어져 버리는 것을 느끼며 부르짖었다. "이, 이럴 수가? 네 놈이......." 활불은 뒤로 물러나며 음흉한 괴소를 흘렸다. "흐흐흐흐! 나이찰, 나는 노격이 아니다." 나이찰은 대경실색했다. "너... 네가?" 활불이 얼굴을 쓱 문지르더니 한 장의 가죽을 벗겨내고 있었다. "흐흐...! 이것은 단지 노격의 얼굴 가죽에 불과하다." 나타난 얼굴은 바로 현천교 사령 중 혈마불(血魔佛)이었다. "너... 너는......." 나이찰의 두 눈이 퉁방울처럼 튀어나오는 순간이었다. "헤헤헤헤!" 방 안을 진동하는 어린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벽에 서 마동이 툭 튀어나왔다. "흑! 너... 너희들은......." 스스스스....... 이번에는 방 안에 각기 검고 붉은 기류가 모여지더니 흑오존자와 혈영마인이 나타났다. "컬컬컬! 나이찰, 이것이 네 장난감이냐?" 마동은 키득거리며 오른손에 든 시뻘건 도(刀)를 흔들었는데 그것 은 마라천황의 무기인 혈옥마도였다. 그는 만면에 장난스런 웃음 을 흘리며 이마에서 비지땀을 흘리고 있는 나이찰에게 다가갔다. "헤헤헤! 본 신의(神醫)가 네게 멋진 의술(醫術)을 베풀겠다." 혈왕마도가 무심히 기름진 나이찰의 배를 쭉 갈랐다. "으... 아... 악!" 그러나 복부가 갈라진 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고 연이어 나이찰 의 팔, 다리, 목이 차례로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실로 끔찍한 신술(神術)이었다. - 만사(萬事)와 귀곡(鬼谷) 둘 중에 한 명만 있어도 천하(天下)를 취할 수 있다. 강호에 전해진 이 말은 과연 허언이 아니었다. 이른바 천궁혈극대라진(天弓血極大羅陣)이라 했다. 귀곡자는 호북성(湖北省) 대별산(大別山) 근처의 약 십만 평에 달 하는 광야에 이 가공할 공포의 대진(大陣)을 설치해 놓았다. 그리고 같은 날, 제천마검(制天魔劍) 방천극은 자신의 직계수하인 제천삼십육사와 함께 수하 마종지문 고수 삼천 명을 이끌고 대별 산으로 향했는데 결국 이는 죽음의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비 신세를 자청한 행위가 되고 말았다. 방천극과 그의 수하들은 모조리 이 천고의 절진에 걸려들었고 천 궁혈극대라진의 사방 이백사십로에 설치된 죽음의 함정에서 그들 은 모조리 염라전(閻羅殿)으로 인도되고 만 것이었다. "크-- 아-- 아-- 악----!" 처절한 비명이 장장 십 주야를 이어갔다. 그리고 무림사상 사검(邪劍)의 제일인자인 제천마검 방천극 또한 천궁혈극대라진 내에서 전신에 삼백육십 개의 혈전(血箭)이 꽂힌 채 처절하게 울부짖으며 죽고 말았다. 피를 쏟아내는 무림의 하늘(天)이여....... 휘... 이... 잉....... 바람이 불었다. 음산한 피바람은 한 언덕 위를 처절한 원귀의 호곡인 양 울부짖으 며 지나갔다. 그 언덕 위에서 귀곡자는 검은 섭선을 접어 가슴에 댄 채 서 있었다. 그의 앞에는 한 명의 노도(老道)가 낡은 마의 도포자락을 바람에 휘날리며 서 있었다. 적봉우사(赤鳳羽士). 무림인들에 의해 이렇게 불리우는 그는 바로 일승일도일존(一僧一道一尊) 중의 일도(一道)로 공동파의 지도자 였다. 적봉우사는 수년 전 하란산에 나타났을 때와 조금도 변함없는 모 습이었다. "무량수불.... 비극이로다, 비극이야. 앞으로 무림의 산하에는 방 황하는 원귀들의 통곡 소리가 드높겠도다." 적봉우사의 음성은 비감하기만 했고 귀곡자는 그에게 공손히 허리 를 숙였다. "신도(神道)께서 방천극을 제거해 주신 덕분에 그래도 모든 일이 잘 되었습니다." 그러나 적봉우사는 고개를 흔들며 탄식했다. "무량수불... 무량수불......." 그는 음산한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귀곡자. 이제 이 혈풍을 종식시켜야 하오." "신도께서는 어떤 혜지를 갖고 계십니까?" 적봉우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대마성이 모두 제거된다 해도 천혈성(天血星)은 아직 건재하 오. 또 마종지문도 완전히 무너진 것이 아니오."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천혈성의 마성(魔性)을 수그러지게 할 인물이 딱 한 명 있소." 귀곡자는 안색이 변하며 급히 물었다. "그... 그가 누구입니까?" 적봉우사는 기이한 눈빛으로 귀곡자를 바라보았다. "귀곡자, 그대의 제자인 종리유향이 바로 그 아이오." 귀곡자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 아이는 무척 총명합니다. 그러나 이미 그 아이는 과거 불사지 존에게 납치되었는데......." 적봉우사는 담담히 도호를 외웠다. "무량수불.... 애정이란 의외로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이오." 그는 두 눈에서 기광을 흘려냈다. "빈도에게 한 병의 만년학정혈(萬年鶴精血)이 있소이다. 어쩌면 이것으로 영원히 혈풍을 종식시킬 수 있을 지도 모르오." 말하다 문득 천하제일도(天下第一道) 적봉우사의 눈에는 아련히 한 인물이 떠올랐다. '하후성. 그 아이와 독고황이 부딪친다면... 오호라! 안 된다. 절 대로 안 된다. 그것은 너무나도 큰 비극이다.' 적봉우사는 몸을 돌렸다. "귀곡자, 빈도는 먼저 마종지문으로 가보겠소이다. 최선을 다하여 이 혈겁을 방지해 보겠소이다." 스스스스스....... 적봉우사의 인영이 흐려지더니 안개처럼 흩어져 갔다. 실로 신출 귀몰한 신법이었다. 귀곡자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다 탄식 했다. "과연 대단한 분이시다. 천존(天尊)에 비해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 을 것이다." 귀곡자의 얼굴에 갑자기 안타까움이 어렸다. 그는 죽은 적미천존 이 그리워진 것이었다. 호탕하고 솔직담백하며 기가 활달했던 현 천교의 대교주(大敎主)가 생각난 것이었다. '후우.... 이 귀곡자도 이제 늙었는가?' 귀곡자의 청수한 얼굴에는 하나의 주름살이 잡혔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신형을 날렸다. 그가 사라지자 단지 음산한 바람 만이 언덕을 거세게 휘몰아쳤다. 휘... 이... 이... 잉! ■ 대소림사 제3권 제35장 천년고목(千年古木) -1 ━━━━━━━━━━━━━━━━━━━━━━━━━━━━━━━━━━━ ① 눈이 내렸다. 천지를 온통 은백색으로 물들이며 눈은 하남(河南)에도, 하북(河 北)에도, 그리고 광동(廣東)에도 내렸다. 하란산(賀蘭山). 북방의 대영산(大靈山). 하란산은 어제나 오늘이나 한 점의 변함도 없었다. 흰 눈을 인 채 고요히 머물고 있는 하란산의 웅자는 어찌 보면 입정(入定)한 노 승같기도 했다. 하후성은 마침내 하란산에 왔다. 왼손에 흰색의 목검을 들고 눈을 맞으며 하란산으로 온 그는 온통 백설천지인 하란산 기슭을 밟으며 서서히 걸음을 옮기고 있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언덕의 천년고목이 서 있던 자리. 그러나 지금은 그 거대한 천년고목은 사라지고 없었다. 벼락에 의 해 어느 날 갑자기 불타 버리고 만 것이었다. 다만 타고 남은 잔재 위에 흰 눈이 가득 덮혀 있을 뿐이었다. 하후성의 눈이 부러진 고목 둥치에 딱 멈추더니 그만 촛점을 잃고 흔들렸다. '고... 고목(古木)이... 고목이... 부러지다니.......' 그의 몸 역시 눈에 띌 정도로 경련을 일으켰다. '황.... 결국 너와 나는 이 고목의 운명처럼... 이렇게 끝나야만 하는가?' 그는 우뚝 멈추어 선 후 목검을 든 채 마치 굳어버린듯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누구를 기다리는 것일까?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오직 하후 성 자신 만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점(點). 그것은 하나의 검은 점이었다. 하란산 밑의 설야에 검은 점이 나타나더니 점차 커지며 한 인영의 모습으로 화했다. 전신에 흑의를 입고 머리에는 검은 건(巾)을, 왼손에는 검은 색의 목검을 쥔 창백한 청년, 그는 독고황이었다. 독고황은 천천히 언덕을 올라오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과거 천 년고목이 우뚝 서 있었던 곳에 당도해 걸음을 멈추었다. "......!" 독고황의 눈썹 끝이 부르르 진동했다. 그 역시 부러지고 검게 불 타 버려 둥치만 남아 있는 고목나무를 보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 은 모습이었다. 독고황은 하후성과 마주 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이 점차로 가라앉 더니 종내에는 아주 무심해지고 있었다. 그것은 하후성도 마찬가 지였다. 천고의 두 기재(奇才). 운명이 갈라놓은 정사양도의 최절정에 올 라있는 두 청년은 불타버린 고목나무를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눈이 계속 내렸다. 하후성의 머리 위에도, 독고황의 머리 위에도, 눈은 차츰 쌓였고 부러진 천년고목도 흰 눈에 덮이고 있었다. 두 사람은 흰 눈을 사이로 한 채 마주보고 있었다. 마치 상대를 서로 빨아 들이기라도 하려는 듯.......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 사이의 시간은 우주도 숨을 멎은 듯 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하후성이었다. "황. 네가 이곳으로 올 줄 알았다." "나 역시 네가 이곳에 올 줄 알았다." 두 사람의 대화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다시 침묵. 그 사이 눈은 함박눈으로 화해 펑펑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독고황이 입을 열었다. "소성. 우리가 왜 이렇게 됐을까?" 하후성은 나직히 웃었다. "나도 모른다. 후후후.... 어쩌면 얄궂은 운명의 장난 때문인지도 모르지." 다시 침묵이 흘렀고 한참 후에 하후성이 또 입을 열었다. "황. 중원신군(中原神君)이 나와 어떤 관계인지 아느냐?" 독고황은 언뜻 의문스런 표정을 지었다. 하후성의 눈썹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바로 나의 외증조부님이시다." 독고황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이어지는 하후성의 음성은 담담했으나 약간 떨리고 있었다. "마라천황이 멸망시킨 중원무성 안에는 나의 모친도 계셨다. 그 분도 역시 돌아가셨다." "그랬... 던가......." 독고황은 얼굴에 한 가닥 고통스런 표정을 짓더니 수중의 흑검(黑 劍)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소성. 나의 사부님은 물론 사모님과 오대마성 역시 모두 죽었 다." 독고황의 눈썹 끝이 올라가더니 하후성의 눈빛과 정면으로 대치했 다. "철저히... 아주 철저히 짓밟혔다." 문득 독고황의 미간이 와락 접혀졌다. "소성, 더이상 말해 보아야 구차할 뿐이다. 검(劍)을 들어라." 그는 이렇게 외치며 마침내 검을 치켜들었고, 그를 바라 보던 하 후성의 눈자위는 심한 경련을 일으켰다. 그러나 하후성 또한 백검 (白劍)을 서서히 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들은 각기 자신들의 옷색깔과 똑같은 검을 준비했다. 마치 약속 이나 한 듯한 모습이었다. 두 사람은 각자 목검을 치켜든 채 우뚝 섰다. 휘... 이... 잉! 바람이 거세게 불어 두 사람의 흑의와 백의가 눈보라와 함께 어지 럽게 휘날렸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가운데 독고황의 흑검은 좌상단의 건삼결 (乾三結)을, 반면 하후성의 백검은 중상단의 이사결(離四結)을 짚 고 있었다. 하후성은 바로 소림 최고의 검학(劍學)인 불영구검(佛影九劍)의 마지막 초식인 만불광휘(萬佛光輝)의 기수식을 취한 것이었다. 휘... 잉... 잉......! 눈보라가 석상처럼 굳어있는 그들을 연신 휩쓸었다. 시간은 그 사 이에도 쉬임없이 흘렀다. 그러나 그들은 역시 조금도 움직이지 않 았다. '소성(少星). 왜 먼저 공격하지 않느냐?' 독고황은 내심 이렇게 부르짖고 있었다. '황(皇). 먼저 공격해라. 어서.......' 휘... 이... 이... 잉! 눈보라가 어느 순간 한 차례 격하게 몰아치자 독고황의 검 끝이 약간 이동했고, 따라서 하후성의 검도 움직였다. 돌풍이 또다시 일었다. 이번에는 정면으로 대치하고 있는 두 사람 외에 다른 물체들을 쓸어갔다. 휘... 이... 이잉! 고목나무의 둥치에 쌓여 있던 눈이 바람에 쓸려가자 무엇인가가 두 사람 사이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벼락을 맞아 불타다 남 은 한 조각의 나무껍질이었다. <하후성(夏候星). 독고황(獨孤皇). - 다시 만날 그 날까지 변치 않을 우정(友情)을 위하여.> 운명(運命)이여! 드디어 독고황의 몸이 날았다. 그는 신검합일(身劍合一)이 되어 마침내 하후성과 부딪친 것이었다. 아무 소리도 없었다. 전광석화(電光石火). 섬전(閃電)을 다시 수천분지 일로 가른 찰나 에 그들의 검과 검은 서로의 몸을 찌르고 있었다. "으윽!" "윽!" 짧은 비명과 함께 그들은 꼭 한 치의 간격을 두고 땅에 떨어져내 렸다. 그리고 두 사람은 무섭게 서로를 노려 보았다. 하후성의 안색은 격동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황.... 너는... 충분히 나의 가슴을 찌를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왜... 검을 갑자기 틀었느냐?" 독고황의 흑검은 단지 하후성의 옆구리에 깊은 상흔을 남겼을 뿐 이었다. 피(血). 붉은 피가 하후성의 백삼을 적시고 다시 점점이 뿌려져 백설을 붉게 물들였다. 이번에는 독고황이 창백하게 질린 안색으 로 말했다. "소성.... 너의 검도 나의 단전(丹田)을 분명히 찔렀다. 그런 데... 왜 갑자기 오 푼이 빗나갔느냐?" 두 사람의 눈은 시뻘겋게 충혈된 채 서로의 눈을 집요하게 주시하 고 있었다. 휘... 이... 이... 잉! 눈보라가 한 데 얽힌 그들을 휘몰아쳤고 하후성의 약간 갈라지는 듯한 음성이 바람을 타고 날렸다. "황, 너는... 애초부터... 나를 공격할 마음이 없었다!" 독고황의 침중한 음성도 바람에 흩날렸다. "그것은... 소성, 너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너에게는 대의(大 義)라는 것이 있어 모든 감정을 죽이고 나를 찔렀지." "황......." "소성, 수년이 흘렀으나... 너는 아직도 독하지가 못하구나. 너 는... 반드시 나를 찔러야만 했다." 위... 이... 이... 잉! 하후성과 독고황은 똑같이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 불길처럼 뜨거운 그 무엇이 동시에 두 사람의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북받쳐 올랐다. "소성!" "황!" 그들은 동시에 서로를 불렀다. 그리고 독고황의 눈에도 하후성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으며 뜨거운 눈물과 함께 웃음이 천천히 그들 의 얼굴에서 피어 올랐다. "소성, 좋은 녀석......." 그러나 갑자기 독고황의 몸이 부르르 떨리더니 그의 백납같은 안 색은 더욱 창백해졌다. 그는 자신의 단전 부근에 엉켜 있던 본신 의 진기가 무섭게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내 쓰러질듯 휘청했다. "황!" 하후성은 크게 부르짖으며 다급히 그를 부축했다. 독고황은 그의 품에 안긴 채 하늘을 바라 보았다. "소성. 그 옛날... 우리가 처음 만나던 그 날도 지금처럼 눈이 많 이 내렸지......." "황!" 독고황은 희미하게 웃으며 하후성을 바라보았다. "녀석, 슬퍼하지 마라. 나는 죽지 않는다. 아니, 죽을 수가 없다. 내가 죽는다면 너 또한 살지 않을 것임을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알 기 때문이다." 독고황의 미소를 대하는 하후성의 얼굴에도 곧 그와 동류(同類)의 미소가 떠올랐다. 우정(友情). 그들의 우정은 죽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 순 간 그들의 가슴 속에서 더욱 찬연히 피어나고 있었다. 쏟아지는 눈송이의 축복을 받으며 두 사나이의 우정은 더욱 찬란하게 설화 (雪花)처럼 피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하후성과 독고황은 서로 끌어 안은 채 천천히 자리에 주저 앉았 다. 두 사람의 몸에서 흘러내린 피는 그들의 몸과 백설을 다 함께 단심(丹心)처럼 붉게 물들였다. 이때였다. 문득 하란산 언덕 밑으로부터 한 줄기 인영이 쾌속한 속도로 날아왔다. 그는 바로 허름한 마의도포를 입은 천하제일도(天下第一道) 적봉 우사였다. 또한 그의 품에는 한 가냘픈 여인이 안겨져 있었다. 그녀는 바로 전신 삼백육십오혈이 제압된 채 가사 상태에서 수정 관에 안치되어 있던 천하제일지녀 종리유향이었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지금 종리유향의 두 눈은 과 거와 달리 충만한 생기로 반짝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황......!" 아름다운 옥음(玉音)이었다. 종리유향의 음성은 눈보라 속에서 지 극한 애정을 담은 채 맑게 울리고 있었다. "저에요, 황!" 다시 한 차례 옥음이 눈보라 속에 짜랑하게 울리자 독고황은 꺼져 가던 의식이 소스라치듯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무엇인가. 이 음 성은? 이 음성은......? 죽었다 해도 그 음성을 들으면 벌떡 일어날 그였다. "유... 유향(有香)!" 사랑(愛)의 힘은 기진했던 그를 실제로 급격히 일으켜 세웠고, 어 느 틈엔지 적봉우사의 품에서 벗어난 종리유향은 새처럼 앞으로 달려나가며 사랑하는 정인의 이름을 마구 불렀다. "황, 황......!" "유향......!" 마침내 두 남녀는 눈보라 속에서 서로를 힘껏 부둥켜 안았다. 그 들이 그렇게도 목메이게 갈구하던 그들 만의 우주(宇宙)가 기어코 완성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설사 세상의 종말이 닥친다 할지라도 이제 그들로서는 두려울 게 없었다. 두 사람은 눈보라 속에서 다시는 떨어지지 않 으려는 듯 굳게 굳게 끌어안고 있었다. 하후성도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잠시 독고황과 종리 유향이 한 덩어리가 된 모습을 바라보더니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는 서서히 몸을 돌렸다. "아! 노선배님......." 적봉우사의 초연한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허허허.... 오랫만이구나. 소형제." "노선배님께서... 어찌?" 적봉우사는 독고황과 종리유향을 바라본 뒤 길게 탄식하며 말했 다. "소형제. 자네는 모르겠지만 독고황은 이곳으로 올 때 이미 자신 의 모든 것을 포기했다네." "아!" "그는 천형뢰에 갇혀 있던 사천 명의 정사고수들을 모두 풀어주고 마종지문도 해체시켰네." 하후성은 가슴이 거세게 격탕함을 느꼈다. 일섬의 전류와도 같은 격정이 정수리로부터 발바닥에 이르기까지 그의 전신을 관통하고 있었다. 적봉우사는 담담히 말했다. "또한 이미 그는 소형제의 일검(一劍)으로 인해 전 내공이 모두 흩어져 다시는 무공을 쓸 수 없게 되었네." 적봉우사는 하늘을 우러러 보며 말했다. "그를... 용서해 줄 수 있겠나?" 그 말에 하후성은 문득 웃었다. 그의 웃는 얼굴에 하얀 눈송이가 송이송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용서할 수 있느냐고요?" "그렇네. 그를 용서할 수 있어야 하네." 하후성은 미소를 지었다. 눈부시게 보이는 미소였다. 하후성은 담 담히 입을 열였다. "노선배님. 저는 더이상 용서할 게 없습니다. 모든 것이 운명의 장난이었거늘... 대체 누구를 용서하는 것입니까?" "오! 소형제......" "하하하...! 이 눈(雪)! 눈이 모든 것을 덮어 주고 있지 않습니 까? 그 동안의 피도, 음모도, 원한도, 한(恨)마저도 이 눈이 모두 덮어 주고 있지 않습니까......?" 하후성은 눈발을 향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가슴이 후련해지도 록 그는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의 밝고 시원한 웃음소리는 하란산의 언덕을 울리고 있었다. 휘... 이... 이 ...잉! 눈보라가 그를 휘몰아쳤다. 표표히 피로 물든 옷자락을 휘날리고 서 있는 하후성의 모습은 또 하나의 고목나무처럼 보였다. 한 시대(時代)에 태어난 천하제일의 두 기재(奇才). 정(正)과 사(邪) 양극(兩極)을 걷게 했던 운명의 장난도 그들의 뜨거운 우정을 훼방하진 못했다. 이제 모든 은원(恩怨)은 막을 내 리고 있었다. 두 천하기재의 영원한 우정의 힘이 운명의 사슬을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게 한 것이었다. 독고황(獨孤皇). 그는 비록 천하를 얻지 못했고 전 내공을 잃었으 나 그 모든 것을 합친 것보다 더 중요한 사랑하는 여인 종리유향 을 얻었다.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최초이자 최후로 사랑한 여인을 얻음으로써 그는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반면 하후성은 비로소 웃을 수 있었다. 불행했던 어린 시절, 하란 산의 고목나무 아래서 만났던 우정의 벗 독고황을 다시 부를 수 있게 되었다. 휘... 이... 잉....... 눈(雪)과 그리고 영원한 우정(友情)이 설원에서 찬란한 꽃을 피운 것이었다. 봄. 양춘가절(陽春佳節)의 따뜻한 햇살이 온누리를 밝게 비추었 다. 하란산의 한 언덕 위에는 예전에 지나던 사람들의 걸음을 멈추게 하던 천년고목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불타버린 둥치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훈훈한 봄바람이 불자 언덕 위의 풀잎들이 춤을 추었다. 그런데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불타버린 고목의 둥지 끝에서 가늘 게 흔들리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새싹....... 죽어버린 고목 둥치에서 연록색 잎으로 새 순(筍)이 트자 사람들 은 이 새 순을 보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 이 어린 순(筍)은 언젠가는 크게 자라 다시 천년고목(千年古木) 이 될 것일세. - 끝 -